2023년 1월 4일 수요일

야고보서 2장 14~26절 “능히 구원하는 믿음”

2023년 1월 4일, 수,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야고보서 2장 14~26절 “능히 구원하는 믿음”

14 내 형제들아 만일 사람이 믿음이 있노라 하고 행함이 없으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15 만일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일용할 양식이 없는데
16 너희 중에 누구든지 그에게 이르되 평안히 가라, 덥게 하라, 배부르게 하라 하며 그 몸에 쓸 것을 주지 아니하면 무슨 유익이 있으리요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24 이로 보건대 사람이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고 믿음으로만은 아니니라
25 또 이와 같이 기생 라합이 사자들을 접대하여 다른 길로 나가게 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 믿음이 능히 자기를 구원하겠느냐?” 야고보서의 핵심을 담은 질문입니다. 더 나아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논의를 제기합니다. 지금 우리는 시간의 혜택을 입고 있습니다. 어린 시절 지녔던 순진무구한 의문을 아직도 품고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시간이 흐르고 고민이 더해가며 배움이 쌓이다가 어느 순간 상당한 답을 알게 됩니다.

복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건,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에게 너무나 당연한 명제입니다. 이 자체에 의문을 가지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2천년에 걸친 다양한 논의와 연구 심지어 목숨 걸고 전쟁까지 하며 치열하게 벌인 토론의 결실을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믿음과 구원 사이 관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기까지 제법 두꺼운 세월의 퇴적층이 쌓였습니다. 그 위에 피어난 꽃향기를 맡고, 달콤한 열매를 먹으며 신앙 생활을 합니다.

하지만 야고보가 사랑하는 믿음의 형제, 자매들에게 편지를 썼던 1세기 상황은 전혀 다릅니다. 거센 혼란의 연속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섬기며 사셨습니다. 십자가에 죽임당하셨습니다. 그리고 다시 살아나시어 하늘에 오르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생애를 목격했거나 전해 들은 사람들은 과연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뭔가 위대한 사랑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믿고 깨달은 바를 명확하게 정리하는 건 어려웠습니다. 저마다 익숙한 문화와 가치관 아래서 예수님을 이해했습니다. 그 이해를 바탕으로 복음을 설명했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서로 조금씩 차이가 나기 시작합니다.

그중에서도 가장 논쟁적인 주장이 교회 한쪽에서부터 들려오기 시작합니다. 바로 ‘믿음으로 받는 구원’입니다. 그 목소리에 차츰 여러 사람들이 귀 기울였습니다. 어느샌가 그 의견이 상당한 힘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반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거센 언쟁이 벌어졌습니다. 극심한 긴장이 벌어졌습니다. 그 때의 살벌한 분위기를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라는 주장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야고보 역시 어느 정도는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한다고 해서 무조건 무시하지 않습니다. 대신 야고보가 몹시 심각하게 위기의식을 느끼는 점이 있습니다. 바로 그 ‘믿음’에 대한 심각한 왜곡입니다. 병들고 뒤틀리고 그을린 믿음입니다. 유익하지 않은 믿음입니다. 그 예를 야고보는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본문 15~16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15 어떤 형제나 자매가 헐벗고 그 날 먹을 양식조차 떨어졌는데 16 여러분 가운데 누가 그들의 몸에 필요한 것은 아무것도 주지 않으면서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 하고 말만 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지금 우리는 한겨울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순간도 어딘가에 누군가는 주린 배를 움켜쥐고 추위에 떨고 있을 것입니다. 국가의 복지 정책이 미치지 못하는 그늘진 곳에, 지극히 기본적인 생존마저 위협당하며 암담해 하는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너무나 끔찍한 현실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당장 그 모두에게 따뜻하고 풍요로운 도움을 완전하게 베풀어 줄 수는 없습니다. 아무 말 못 한 채, 너무나 안타깝고 답답해할 뿐입니다. 그런다고 해서 비난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평안히 가서 몸을 따뜻하게 녹이고 배부르게 먹어라”라고 말만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 영혼이 심각하게 병든 증거입니다. 고통에 휩싸인 사람을 두 번 죽이는 악행입니다. 따라서 그 누군가를 향해 야고보는 본문 17절에서 이렇게 단호하게 말합니다. 

17 이와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그 자체가 죽은 것이라

그렇다면 무엇이 과연 살아있는 믿음일까요? 야고보는 누구나 기꺼이 존경할 위대한 인물의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흥미롭게도 바울 역시 로마서에서 아브라함을 인용했습니다. 로마서 4장 2~3절 읽어드리겠습니다.

2 만일 아브라함이 행위로써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면 자랑할 것이 있으려니와 하나님 앞에서는 없느니라 3 성경이 무엇을 말하느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매 그것이 그에게 의로 여겨진 바 되었느니라

이러한 바울의 주장을 과연 야고보가 얼마나 접했고 이해했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어느 정도 의식한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야고보는 바울과 정반대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닙니다. 대신 바울이 쓴 편지로 말미암아 혹시나 교회 안에 생길 오해를 우려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아브라함이 지닌 신앙의 더 깊고 다채로운 면을 다시금 일깨워 줍니다. 본문 21~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우리 조상 아브라함이 그 아들 이삭을 제단에 바칠 때에 행함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것이 아니냐 22 네가 보거니와 믿음이 그의 행함과 함께 일하고 행함으로 믿음이 온전하게 되었느니라 23 이에 성경에 이른 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으니 이것을 의로 여기셨다는 말씀이 이루어졌고 그는 하나님의 벗이라 칭함을 받았나니

야고보는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 위에서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친 사건을 언급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가장 충격적인 장면 중 하나입니다. 나이 백 살에 어렵게 얻은 아들입니다. 주님께서 그 아들을 번제로 바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번제는 제물로 바칠 짐승을 토막내고 불태우는 제사입니다. 차마 아비가 자식에게 할 수 없는 짓입니다.

도무지 실행하기 어렵습니다. 아들을 불사를 장작을 챙겨 모리아 산을 향해 걸음을 옮기는 것. 떨리는 두 손으로 날카로운 칼끝을 자식을 향해 겨누고 내리치는 것. 도저히 쉽게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물론 이 사건의 의미는 너무나 복잡하고 깊습니다. 단순하게 해석하기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 사실만은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바로 아브라함의 그 순종을 보시고 그의 믿음을 인정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명확히 깨닫게 됩니다. 죄인을 능히 구원하는 믿음, 살아있는 믿음은 입술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매끈한 말이 누군가의 믿음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비장한 논리로 가득한 궤변이 참된 믿음을 보증하지 못합니다. 야고보는 본문 26절에서 거듭, 단호하게 이렇게 말합니다. 

26 영혼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니라

그렇다면 무엇이 참으로 살아 있는 믿음일까요? 어떤 믿음이 우리를 구원할까요? 바로 행함이 있는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에서 몸소 본을 보인 믿음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신을 향해 진지하게 물어야 합니다. 과연 내 믿음이 나를 움직이게 하고 있습니까? 내 믿음이 좌절을 딛고 일어나게 하고 있습니까? 내 믿음이 나를 위험을 무릅쓰고 용기 있게 결단하게 하고 있습니까?

혹시 그 반대로, 믿는다고 하면서 주변 사람들은 전혀 배려하지 않고 힘을 과시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어떻게든 아득바득 이기려고 이를 앙다물고 있지 않습니까? 믿는다고 하면서 현재 주어진 위치와 힘에 안주하며, 약한 이들을 함부로 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모두가 마찬가지입니다. 완전히 건강한 믿음을 가진 사람은 저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번 거짓 믿음에 자기를 숨기고 나를 속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자신을 정직하게 돌아보시기 바랍니다. 나의 믿음을 바르게 점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행함이 없는 죽은 믿음이 아닌, 자기를 능히 구원하는 살아있는 믿음을 가꾸고 지키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