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월 4일 수요일

야고보서 2장 1~13절 “최고의 법, 이웃 사랑”

2023년 1월 3일, 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야고보서 2장 1~13절 “최고의 법, 이웃 사랑”

1 내 형제들아 영광의 주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2 만일 너희 회당에 금 가락지를 끼고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오고 또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에
3 너희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자를 눈여겨 보고 말하되 여기 좋은 자리에 앉으소서 하고 또 가난한 자에게 말하되 너는 거기 서 있든지 내 발등상 아래에 앉으라 하면
4 너희끼리 서로 차별하며 악한 생각으로 판단하는 자가 되는 것이 아니냐
5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들을지어다 하나님이 세상에서 가난한 자를 택하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또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상속으로 받게 하지 아니하셨느냐
6 너희는 도리어 가난한 자를 업신여겼도다 부자는 너희를 억압하며 법정으로 끌고 가지 아니하느냐
7 그들은 너희에게 대하여 일컫는 바 그 아름다운 이름을 비방하지 아니하느냐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10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11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비록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본문 말씀은 가장 평범한 대상에게 제일 익숙한 주제를 제시하며 시작합니다. 야고보는 자기 편지를 받는 이들을 가리켜 이렇게 부릅니다. “내 형제들아”. 얼핏 사소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를 통해 야고보와 따뜻한 교분을 나누는 신앙공동체가 이 편지의 수신자임을 다시금 명확하게 알려줍니다.

그 형제들에게 야고보는 무엇을 이야기할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라고 말합니다. 성도는 곧 예수님을 우리 주, 그리스도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교회는 그런 신자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성도가 지닌 가장 원초적인 정체성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 다음 문장이 아주 중요합니다.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철저한 경건 생활을 해야할 수도 있습니다. 믿음을 가졌기 때문에 고상한 몸가짐을 지킬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불쑥 익숙하지만 불편한 진리를 툭 던집니다. 바로 사람을 차별하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 사랑을 입고 전하는 우리 역시 지극히 마땅히 차별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거부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적어도 머리로는 그러합니다. 하지만 막상 실천하려고 할 때, 드높고 거친 장벽과 마주하게 됩니다. 더욱더 안타까운 현실은 그런 차별이 교회 안에서조차 만연하다는 사실입니다. 야고보는 당시 신앙 공동체 안에 있었던 차별 문제를 신랄하게 지적합니다. 본문 2~4절을 공동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2 가령 여러분의 회당에 금가락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고 합시다. 3 그 때 여러분이 화려한 옷차림을 한 사람에게는 특별한 호의를 보이며 "여기 윗자리에 앉으십시오." 하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서 있든지 밑바닥에 앉든지 하시오." 하고 말한다면 4 여러분은 불순한 생각으로 사람들을 판단하여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이 장면이 마치 눈 앞에 펼쳐지는 것 같습니다. 굳이 설명을 덧붙일 필요 없습니다. 이 상황에 담긴 씁쓸한 공기를 직관적으로 느끼실 겁니다. 여기에는 불편한 진실이 있습니다. 2천년이 지난 오늘도 본질적으로 그리 다르지 않은 현실을 쉽게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그 옛날 야고보가 분개하며 토로한 행태가 여전히 우리에게도 익숙한 까닭입니다.

제 신학대학원 동기 목사님이 예전에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그 목사님이 대학 시절에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열심히 전도하셨습니다. 그러다가 길거리에서 채소를 팔던 어느 할머니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곳을 오갈 때마다 그 할머니께 복음을 전했습니다. 꼭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가까운 교회에 가보시라고 여러 차례 권유했습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침내 할머님은 이렇게 속내를 이야기하셨습니다.

“이보게 청년, 교회는 나 같은 사람 싫어해. 나처럼 가난하고 무식한 사람을 별로 환영하지 않아. 헌금도 잘하고 많이 배워서 교양있는 사람을 더 좋아해”

그 목사님은 펄쩍 뛰며 아니라고 답했습니다.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일을 겪고 꽤 시간이 지나 저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타깝게도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그 때 그 어르신 생각을 조금씩 수긍하게 된다고 했습니다. 물론 그분 말이 전부 다 맞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교회가 그 정도까지 엉망은 아닙니다. 교회를 지나치게 냉소적으로 비난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마음 한 구석 어딘가 거북해집니다. 분명 과장이지만, 애써 외면했던 불편한 진실을 폭로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모임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죄인입니다. 교회 안에서 조차 죄악으로 일그러진 시선으로 다른 사람을 바라보고 평가합니다. 따라서 세속적인 지위와 재산 때문에 차별을 겪었거나 혹은 했던 경험이 누구에게나 있을 겁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야고보를 통해 주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진리 가운데 더욱 건강한 신앙 공동체를 세우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본문 8~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8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9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

문제가 복잡할수록 본질을 명심해야 합니다. 특히 말씀에 집중해야 합니다. 이 때는 아직 신약이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우리 기준에서 구약이 당시에는 성경 전체였습니다. 야고보는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구절을 언급합니다. 바로 “네 이웃 사랑 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입니다. 우리에게 매우 친숙합니다. 예수님께서 인용하셨기 때문입니다.

한 율법 학자가 주님께 어느 계명이 가장 큰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명쾌하게 답합니다. 바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 때, 이웃 사랑을 말씀하시며 가져온 본문이 레위기 19장입니다. 이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은 ‘이웃 사랑’이라는 개념을 제시하시려고 아무 구절이나 끌어온 게 아닙니다. 왜냐하면 레위기 19장은 단연코, 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레위기 19장은 ‘거룩함’이라는 이스라엘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을 선언합니다. 그러면서 십계명을 확장해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일상 속에 실천해야 할 다양한 율법을 기록합니다. 그 모두를 아우르는 핵심이 바로 18절입니다. 여기에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이 기록 돼 있습니다. 그런데 그 이웃 사랑의 범위가 34절에 급격히 확대됩니다. 바로 가나안에 함께 사는 이방 민족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4 너희와 함께 있는 거류민을 너희 중에서 낳은 자 같이 여기며 자기 같이 사랑하라 너희도 애굽 땅에서 거류민이 되었었느니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출애굽까지 언급하시며 가나안 땅에 함께 사는 이방인들을 ‘자기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방인들은 이스라엘로서는 쉽게 사랑하기 힘든 대상입니다. 상당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성경이 말하는 사랑, 교회가 힘써 지키고 이루어야 할 사랑, 성도가 자신의 온 삶을 다해 이루어 가야 할 사랑은 막연한 관념이 아닙니다. 감상적인 감정도 아닙니다. 치열하고 숭고한 소명입니다.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그 사랑을 예수님께서 바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몸소 행하셨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철저히 무력한 인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 찬란한 영광의 주님께서 죄인을 위해 희생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 함께 살던 이방인과는 비교도 안 되는 어마어마한 차이를 뛰어넘는 눈부신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이루면 모든 걸 다 이룹니다. 사랑을 잃으면 모든 걸 다 잃습니다. 한 사람이 지닌 신앙의 깊이는 그의 삶에서 풍기는 사랑의 향기, 그리고 사랑을 행하기 위한 성실로 알 수 있습니다. 교회의 교회다움은 참된 사랑의 의미를 얼마나 깊이 묵상하고 실천하고 노력하는 지 여부로 드러납니다.

결론적으로 오늘 본문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이웃을 차별 없이 사랑하라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어쩌면 너무나 뻔하고 당연한 소리로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장 원초적인 복음을 무시할 때 성도의 인격과 삶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교회의 순수함과 본질이 어그러지게 됩니다. 이러한 진리의 말씀을 오늘 하루도 마음 깊이 묵상하며 ‘사랑’이라는 최고의 법을 온 몸과 마음 다해 지켜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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