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9일 목요일

사무엘상 19장 18~24절 “선지자 중에 있었던 사울”

2023년 3월 6일, 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9장 18~24절 “선지자 중에 있었던 사울”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군대며 말했습니다. 본문 24절은 이를 가리켜 ‘속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 반복하는 말을 뜻합니다. 소문 혹은 한자어 회자(膾炙)와 비슷합니다. 그만큼, 사울이 선지자 무리에 섞여 있었던 이 사건이 온 이스라엘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속담,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가 본문에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사무엘상 10장 12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2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이 구절은 사울이 기름 부음 받은 사건 흐름 속에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체계가 바뀌는 건,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나 획기적인 변화입니다. 열두 지파의 느슨한 연대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사사들이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강대국들이 등장하며 한계를 경험합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사무엘도 동의했습니다.

그 순간, 온 백성의 관심은 하나로 모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누구인가?입니다. 자세히는, 사사께서 과연 누구에게 기름부을까?입니다. 사무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거대한 시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까닭에 왕을 지목하시는 하나님 음성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왕에게 기름 부은 다음 절차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사울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 때, 사울은 너무나 겸손한 청년이었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 부은 후에 벌어질 일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하여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새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우발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모든 게 하나님의 깊은 계획 아래 있습니다. 이 속담에는 사울의 극적인 변화와 그를 향한 백성들의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사울이 공식적으로 즉위 하기에 앞서, 그가 얼마나 왕으로 적절한 인물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우리는 사울의 안타까운 몰락을 발견합니다. 그는 다윗을 시기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다윗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점점 미움이 싹터 올랐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딸과 결혼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처참한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의 광기를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그때, 다윗이 처음으로 몸을 맡긴 사람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사무엘입니다. 마지막 사사이자 온 이스라엘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입니다. 관련해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제목이 ‘사무엘상하’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무엘이 지닌 권위와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다윗이 그런 사무엘에게 피신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울에게 기름 부은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합니다. 본문 19~20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사울에게 다윗은 1급 반역범입니다.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다윗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결국 어느 요원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알아냅니다. 바로 사무엘과 함께 라마 나욧이라는 지역에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상식적으로 사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바로 ‘머뭇거림’입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주저함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군사들을 보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울의 정신세계는 무엇일까요? 얼른 다윗을 잡아 그를 제거하하는 것, 그래서 자기 권력을 강하게 움켜쥐는 게 인생의 최우선 순위였습니다. 그것을 방해하는 그 무엇도 거침없이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사무엘도 방해물에 해당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사무엘을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주님 역시 그의 욕망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에 휘둘리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뜻을 당신의 방법대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사울의 명령을 받고 다윗을 향해 특공대가 출동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윗이 얼마나 용맹한 군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을 보호하고 있는, 사무엘 제자들의 저항도 예측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 비장한 각오로 급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뜻밖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압도합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예언’을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우리가 잘하는 훌륭한 예언자들이 했던 행동과 다릅니다. 히브리어 동사의 문법 형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대언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울은 이 황당한 사태를 보고 받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별동대를 보냈습니다. 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세 번째로 보낸 부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답답하고 초조해진 사울은 직접 나섰습니다. 다윗이 숨어 있는, 사무엘의 거처 라마 나욧으로 몸소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사울 역시 앞서 보낸 부하들과 같은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압도 당합니다. 본문 23~2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치열하게 타오르던 권력욕, 걷잡을 수 없는 분노,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증오. 그 모든게 무장해제 되었습니다. 주님의 손길에 사로잡혀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옷을 벗은 채 하루종일 사무엘 앞에서 누웠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는 특히 더 옷은 신분을 상징했습니다. 왕이 입는 곤룡포는 아무나 만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비슷한 색깔의 의복도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귀한 왕복을 주의 종 사무엘 앞에서 훌렁 벗어던졌습니다. 너무나 상징적입니다. 그의 그토록 집착해 마지않는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허무한 것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장면입니다.

이 때, 그에 대한 속담이 다시 나옵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입니다. 이 말이 처음 등장했던 상황을 앞서 확인했습니다. 그 시절 사울은 순수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속담은 그런 사울을 향한 칭찬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 같은 속담이 이제는 비난과 조롱의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속담의 문장은 같지만 그 주인공의 인격과 성품이 완전히 뒤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이기고 살아남은 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또한 다윗 편에서 일방적으로 사울을 폄훼한 기록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사람의 손길이 묻어 있습니다. 하지만 승자의 기록은 아닙니다. 신자, 믿는 자들의 기록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윗의 추한 악행과 사울의 선한 공적 모두 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연약한 모든 인간은 때때로 다윗이 되었다가 사울이 되기도 합니다. 혹은 사울처럼 한 때는 순전한 신앙인이었으나 어느 순간 광기에 사로잡힌 악인으로 변하기 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건은 평생에 걸친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의 이중성을, 내 안의 더러운 탐욕을, 내 안의 연약함을 마주 보시길 바랍니다.

그 모습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 주십니다. 그 믿음 가운데 헛되고 헛된 탐욕에서 벗어나 생명의 복음을 누리고 전하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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