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4월 14일 금요일

마태복음 27장 27~56절 "십자가에 가까이"

2017년 4월 13일, 부산진교회 성금요일 새벽기도회 설교, 정대진 목사
마태복음 27장 27~56절 "십자가에 가까이"

27 이에 총독의 군병들이 예수를 데리고 관정 안으로 들어가서 온 군대를 그에게로 모으고 28 그의 옷을 벗기고 홍포를 입히며 29 가시관을 엮어 그 머리에 씌우고 갈대를 그 오른손에 들리고 그 앞에서 무릎을 꿇고 희롱하여 이르되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 하며 30 그에게 침 뱉고 갈대를 빼앗아 그의 머리를 치더라 31 희롱을 다 한 후 홍포를 벗기고 도로 그의 옷을 입혀 십자가에 못 박으려고 끌고 나가니라 


32 나가다가 시몬이란 구레네 사람을 만나매 그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워 가게 하였더라 33 골고다 즉 해골의 곳이라는 곳에 이르러 34 쓸개 탄 포도주를 예수께 주어 마시게 하려 하였더니 예수께서 맛보시고 마시고자 하지 아니하시더라 35 그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은 후에 그 옷을 제비 뽑아 나누고 36 거기 앉아 지키더라 37 그 머리 위에 이는 유대인의 왕 예수라 쓴 죄패를 붙였더라 38 이 때에 예수와 함께 강도 둘이 십자가에 못 박히니 하나는 우편에, 하나는 좌편에 있더라 39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 40 이르되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하며 41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 42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그가 이스라엘의 왕이로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 43 그가 하나님을 신뢰하니 하나님이 원하시면 이제 그를 구원하실지라 그의 말이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였도다 하며 44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욕하더라 

45 제육시로부터 온 땅에 어둠이 임하여 제구시까지 계속되더니 46 제구시쯤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47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이르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48 그 중의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면을 가져다가 신 포도주에 적시어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49 그 남은 사람들이 이르되 가만 두라 엘리야가 와서 그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50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니라 51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52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53 예수의 부활 후에 그들이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54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일어난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이르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55 예수를 섬기며 갈릴리에서부터 따라온 많은 여자가 거기 있어 멀리서 바라보고 있으니 56 그 중에는 막달라 마리아와 또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또 세베대의 아들들의 어머니도 있더라 



우리는 지금 부활절에 앞서 고난 주간을 보내며, 죄인들을 위해 고통당하신 예수님의 희생을 새벽마다 묵상하고 있습니다. 성금요일인 오늘은 이러한 고난주간의 절정입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날,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십자가 고난을 보다 온전히 묵상하고 깨달아 아는 것은 각자의 신앙을 올바르게 회복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의미를 왜곡하거나 축소시키곤 합니다. 특별히 “얼마나 아프셨나?”라는 찬양과 영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로 대표되듯이 육체적인 고통으로만 과도하게 제한해서 이해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물론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피 흘리시며 온 몸으로 겪은 아픔 자체는 복음의 중요한 일부이고 결코 무시해서는 안 될 내용입니다. 

그러나 지나치게 여기에만 시선을 고정하는 것은 십자가 고난, 더 나아가 하나님 나라 복음을 온전히 이해하는 데 방해가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며 몸소 겪으신 희생의 실체를 보다 넓은 시야를 통해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본문 27~31절은 주님께서 로마 총독의 직속 부대에 속한 군인들에 의해 모욕당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점령군 신분으로 식민지에 거주한다는 것은 상당한 특권과 동시에 테러의 위협에 늘 노출되어 어마어마한 긴장에 짓눌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그들은 폭력을 수반한 일탈 행위를 수시로 저질렀습니다.

간혹 언론을 통해, 이라크와 아프가니스탄 등에 파병된 일부 미군들이 포로들에게 저지르는 끔찍한 학대를 접하셨을 겁니다. 물론 그 반인륜적 범죄 자체는 결코 용인할 수 없는 짓입니다. 하지만 동료들의 죽음을 늘 가까이 접하며 그들의 내면이 얼마나 피폐해졌을 지는 충분히 짐작하며 공감할 만합니다. 

이는 지금 예수님을 둘러싼 로마 군인들의 처지와 매우 흡사합니다. 게다가 그분의 고향 갈릴리는 이스라엘에서 반로마 무장 투쟁이 가장 격렬하게 일어났던 지역입니다. 따라서 그들이 예수님을 향해 키득거리며 “유대인의 왕”이라 부른 후에 침을 뱉고 갈대로 머리를 쳤던 까닭은 괴팍한 성격을 가져서가 아니라 갈릴리 출신으로서 유대인의 왕으로 일컬음 받아왔던 주님의 존재가 그들에게 그동안 실제적인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실을 통해 예수님을 죽음으로 몰고 간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로마제국을 중심으로 한 그 시대의 치열한 정치현실 이었음을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따라서 주님의 십자가는 절대로 막연하고 모호한 영적인 상징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단지 종교의 영역 안에만 맴도는 그림자도 아닙니다. 정치와 전쟁과 경제를 비롯한 삶의 모든 지평을 폭넓게 아우르는 하나님의 온전한 구원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저마다의 가정과 학교와 직장에서 마주하는 온갖 구조적인 모순과 절망의 한 복판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길 소망합니다. 로마 군인들에 의해 힘겹게 건네받은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 위를 오르신 예수님께서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내는 치열한 일상의 생생한 고통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32절부터의 말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겪은 모욕들을 더욱 자세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우선 39절을 보면, ‘지나가는 자들은 자기 머리를 흔들며 예수를 모욕하여’라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41절은 ‘그와 같이 대제사장들도 서기관들과 장로들과 함께 희롱하여 이르되’라고 기록하였습니다. 또한 44절 역시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강도들도 이와 같이 하더라’라고 언급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확인할 수 있는 것은 마태복음의 저자는 예수님의 고난을 기록하며 그의 신체적인 고통보다는 정신적인 수치와 혐오에 더 중점을 두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이는 다른 복음서들 역시 동일하게 보이는 태도입니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다시 말씀드리면 예수님께서 육체적인 고난을 덜 당하셨다 거나 혹은 그것이 별 의미 없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또한 육체는 영혼보다 비천하다는 이원론을 말하려는 것도 결코 아닙니다. 

다만, 복음서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예수님의 고난은 단지 눈에 드러나는 몸의 상처로만 그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온 인격과 전존재를 뒤흔드는 치명적인 모욕입니다.

우리는 간혹 사회적 선망의 대상이 되는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비극적인 소식을 접하곤 합니다. 그럴 때면, ‘그렇게 많은 돈과 명예를 가졌는데 사는 게 뭐 그리 힘들까?’ 라고 무심한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은 종종 보게 됩니다. 하지만, 아직 어린 저로서는 매우 조심스러운 말씀이지만, 삶은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오히려 깨끗한 살결 너머에 숨겨진 누덕누덕한 아픔이 눈에 보이는 외상(外傷) 보다 훨씬 더 잔인한 고통을 안겨주기도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내면 깊숙이 겪은 수치가 바로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그 누구에게도 차마 말 못할 절망으로 숨죽여 눈물 흘릴 때, 도무지 떨쳐지지 않는 모욕과 굴욕으로 괴로울 때, 헤아릴 수 없는 자기혐오에 빠져 고통당할 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시길 소망합니다. 십자가 위에서 온갖 사람들에 의해 멸시와 조롱을 당하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아픔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예수님께서 치열한 정치 상황에 의해 끔찍한 모욕을 당하시며 십자가 위에 오르신 후, 한 낮임에도 온 땅 위에 어둠이 뒤 덮였습니다. 그리고 세 시간이 더 흘러 이제 당신의 모든 호흡을 다하기 직전, 주님께서는 자신을 휘감는 그 모든 고난을 한 문장으로 처절히 외치고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입니다. 이 외침은 의인이 겪는 고난을 나열한 후 결론적으로 하나님의 위로와 승리를 노래하는 시편 22편의 첫 구절과 일치합니다. 하지만 이를 두고 예수님께서 평소 이 시편을 즐겨 암송 하셨다 라든지 혹은 여전히 마음의 소망을 잃지 않았다고 추측하는 것은 마태복음 저자의 의도와는 다소 거리가 있습니다.

시간 관계상 자세히 설명할 수는 없지만 마태복음이 결론적으로 묘사하는,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께서 울부짖은 핵심은 분명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으로부터의 “버림받음”입니다. 여기에 그 어떤 긍정적인 요소도 개입될 여지가 전혀 없습니다. 그야말로 절망 그 자체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 고난과 죽음의 진정한 본질입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로 말미암아 부활의 찬란한 생명이 마침내 우리 곁에 찾아오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지난날 경험했고, 지금 지나고 있으며, 앞으로 마주할,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모든 고통의 시간들이 우리를 이미 구원했고, 끝내 구원할 것입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로부터 버림받았다며 신음 하는 것 외에, 달리 그 어떤 말로도 설명할 수 없는 가장 깊은 절망의 시간들로부터 비로소 부활의 참된 은혜와 생명을 누리게 된다는 이 눈부신 진리를 언제나 가슴 깊이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 담긴 가장 위대한 계시인 십자가와 부활이 보여주는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역설과 모순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고난주간의 절정인 성금요일입니다. 이 날을 보내며 주님께서 달리신 십자가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바랍니다. 한없이 남루한 모습으로 고난당하신 예수님의 얼굴을 보다 오롯이 마주하길 원합니다. 그리하여 십자가 복음의 의미를 더욱 풍성히 깨달아 알며 삶 가운데 온전히 누리고 또 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구원의 하나님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당시 치열한 정치상황의 결과이자 가장 치명적인 모욕의 현장임을 말씀을 통해 살펴봤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하나님을 향해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며 외치신 예수님의 울부짖음이 마음 깊이 사무쳐 옵니다. 
따라서 그 십자가를 믿고 바라보는 우리 모두의 하루하루 치열한 삶과 현실을, 헤아릴 수 없는 고독과 수치를, 그리고 한없는 절망을 하나님께서 그 누구보다 잘 아시고 보듬어 안으시며 그것으로 말미암아 끝내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은 온전하고 풍성한 진리를 굳게 지키며 그 안에서 참된 자유와 쉼을 누리는 진정한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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