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5일 목요일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위기보다 더 큰 위기”

2023년 6월 14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위기보다 더 큰 위기”

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5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본문 1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 아, 슬프다. 어찌하여 금이 빛을 잃고, 어찌하여 순금이 변하고, 성전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흩어졌는가?

예언자는 무심한 듯 툭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유다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충격적인 사건이 짧지만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바로 성전 파괴입니다. 늠름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할 성전의 벽돌들이 산산이 무너져 저잣거리에 널 부러져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침략이 지금까지 겪었던 외적의 침입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한 종교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믿고 있는 세계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전을 통해 주님이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머무시는 온 우주를 경험했습니다. 그러한 성전이 바벨론 군대의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그때 유다 사람들이 겪었던 충격과 공포는 현대인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입니다. 삶을 지탱해온 모든 세계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믿고 의지할 단 한 줌의 희망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전 파괴’라는 결정적인 재난의 종지부를 찍기 전에 이미 끔찍한 재난이 예루살렘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바로 ‘굶주림’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역사적 배경은 느부갓네살이 지휘한 바벨론 군대가 주전 587년 1월부터 18개월동안 진행한 포위 작전입니다. 무려 1년 6개월입니다. 봉쇄당한 채로 지내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긴 시간입니다. 극심한 궁핍이 성안을 휘몰아쳤습니다.

그때 유다가 겪은 굶주림이 얼마나 컸냐면 고대 사회의 견고한 신분질서를 무너뜨릴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문은 생생히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7~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 사람이 겪는 가장 비극적인 죽음은 아사(餓死), 즉 ‘굶어 죽는 것’입니다. 예언자 또한 차라리 칼에 찔려 죽는게 배고파 죽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부했던 예루살렘에서 몇 사람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극심한 굶주림에 몸부림 쳤습니다. 뽀얀 살결을 자랑했던 귀족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포동포동했던 살갗이 막대기처럼 말랐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경험하는 끔찍한 비극입니다. 예레미야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이 와중에 옳고 그름을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우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어깨를 마주해야 합니다. 서로 좋게좋게 토닥여야 합니다. 비록 갑싼 자기연민일지라도 함께 울며 보듬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험난한 위기 속에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냉철하게 진리를 분별했습니다. 올곧은 진실을 전했습니다. 설령 그것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심지어 자신을 위협할지라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6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예언자는 서슬퍼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소돔’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아실겁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도시 이름입니다. 끔찍한 죄악으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곳입니다. 상징성이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더 무겁다고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가뜩이나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위당해 두려워 떨었던 유다 백성들로서는 너무나 불쾌한 헛소리였습니다. 예언자를 향해 격분해 달려들어도 할 말이 없는 망발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레미야가 어떤 핍박을 겪을지 그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예루살렘의 죄악을 지적한 근거가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 3~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희생과 사랑은 천륜입니다. 심지어 들개들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굶주려도 새끼들에게 빈젖이라도 물렸습니다. 하지만 유다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배고파 울부짖는 자녀들을 내팽개치고 자기 배만 채우려 했습니다. 심지어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극악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예언자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은 잔인하기만 하구나”

위기가 누군가의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평소 말끔한 행색과 교양 있는 몸가짐을 한다 할지라도 어려움에 닥쳤을 때, 인격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민족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성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자 소름끼치는 잔인함을 드러납니다. 율법에 담긴 섬김과 나눔의 정신과 정반대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기는커녕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시련은 강한 외적의 침입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 주위를 꽁꽁 에워싸는게 아닙니다. 몇 날 며칠 배고픔이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약자를 돌보지 않는, 그들의 비루한 인격과 거짓 신앙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기 이전에 그 처참한 내면세계과 죄악으로 인해 남유다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둔한 마음이 애써 부정하고 진리를 외면했을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절망 속에 처절히 몸부림 칠 때 오히려 희망이 있습니다. 내 추악한 실상을 마주하는 고통 가운데 다시 시작할 길이 열립니다. 내 더러운 죄악과 직면할 때 비로소 참으로 새로워지는 생명의 씨앗이 싹터옵니다. 본문 6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6 예전에는 저 소돔 성이 사람이 손을 대지 않아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내 백성의 도성이 지은 죄가 소돔이 지은 죄보다 크구나.

다시 말씀 드립니다. “내 백성의 도성이 지은 죄가 소돔이 지은 죄보다 크구나”라는 예언자의 노래는 유다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허무하고 비참하게 숨을 거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침내 살아 남았습니다. 쓰라린 진리가 마침내 달콤한 거짓을 이겨냈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며 삶의 방향을 되돌리는 이들을 향해 비추는 은혜의 물결이 온 세상에 흘러넘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복음을 생생하게 증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돔과 나와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해,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너무나 괴롭고 불편한 진실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를 살리는 진정한 생명과 희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우리의 전 존재를 넉넉히 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과 동행하며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이자 백성답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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