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3일 목요일

출애굽기 15장 22~27절 “치료하시는 주님”

2024년 5월 23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출애굽기 15장 22~27절 “치료하시는 주님”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24 백성이 모세에게 원망하여 이르되 우리가 무엇을 마실까 하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7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이제 광야를 향해 길을 나섭니다. 새로운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마침내 낯선 여정을 떠납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놓인 상황입니다. 그들은 홍해를 건넜습니다. 성경이 기록한 가장 극적이고 화려한 구원을 경험했습니다. 거대한 이집트 제국이 몰락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용맹하게 달려오던 이집트 정예 부대가 바닷속에 잠기는 걸 지켜보았습니다.

이때, 어떻게 가만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은 주님을 높여 찬양했습니다. 모세가 알려준 노래를 함께 부르며 용사이신 주님께 찬송을 불렀습니다. 뿐만 아니라 미리암과 여인들도 손에 소고를 들고 나와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높고 영화로우신 주님께서 말과 그 탄 자, 즉 이집트의 힘을 상징하는 기병을 바다에 던지신 사건을 노래했습니다. 위대한 구원 한복판에 있던 백성이 위대한 찬양을 드렸습니다.

여기까지가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적힌 내용입니다. 이로써 ‘출애굽’이라는 이야기 단락을 마쳤습니다. 이제 출애굽기 15장 22절에서 민수기 20장 27절까지 ‘광야 여정’이라는, 모세오경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이야기가 등장합니다. 오경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의 중심이기도 합니다. 구원받은 백성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생생하게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 말씀은 이런 광야 여정의 서곡에 해당합니다. 시작부터 매우 숨 가쁜 리듬을 들려줍니다. 22,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2 모세가 홍해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하매 그들이 나와서 수르 광야로 들어가서 거기서 사흘길을 걸었으나 물을 얻지 못하고 23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한글 성경에는 잘 드러나지 않지만 구약 원문에는 각 동사 앞에 접속사가 붙어 있습니다. 이런 느낌입니다. “그리고 모세가 인도했고, 그리고 광야로 들어갔고, 그리고 걸었고, 그리고 물을 얻지 못고, 그리고 마라에 이르렀고, 그리고 마시지 못했다.” 히브리어 문법 용어로 ‘와우연속법’이라고 합니다. 연속적인 사건 흐름을 강조하는 표현 방식입니다.

이스라엘에게는 잠깐의 여유도 없었습니다. 홍해를 건너자마자 낙원에 도착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광야를 걸었습니다. 삼일동안 무겁게 걸음을 옮기며 타는 갈증을 느꼈습니다. 마침내 겨우 샘물을 발견했습니다. 하지만 마실 수 없는 ‘쓴 물’이었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의 감정을 헤아려 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이 애쓰고 노력해서 이집트를 탈출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모세에 의해, 전적인 은혜로 홍해를 건넜습니다. 양쪽에 벽처럼 서 있는 바다 사이를 지나며 이스라엘은 마치 꿈을 꾸는 것 같았을 겁니다. 바람결에 실려 온, 소금기 머금은 물방울이 뺨을 톡톡 건드린 촉감을 잊을 수 없습니다. 바닷물에 휩쓸려가는 이집트 군마의 울음소리가 아직도 귀에 멤도는 것 같습니다. 

그런 다음 메마른 광야로 내 던져졌습니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이집트에서는 비록 노예로 살았으나 적어도 먹을 것은 풍족했습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무덥고 거친 길을 떠돌며 노예만도 못한 비참한 상황에 놓였습니다. 자연스럽게 원망이 터져 나옵니다. 이런 그들을 과연 누가 함부로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제가 전에 섬겼던 교회는 4년 차 목회자에게 자기계발과 연수 차원에서 성지 여행을 보내주셨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작년 5월에 출애굽 여정을 따라 이집트, 요르단, 이스라엘을 둘러보는 매우 뜻깊고 유익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일정 중 이집트 북부에서 남부 시내산까지 종일 내려갔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무척 답답하고 지루했습니다. 그런데 그 때 저는 에어컨이 잘 나오는 대형 버스 안에 있었습니다. 반면 이스라엘은 광야가 머금은 자연의 야성에 그대로 노출되었습니다. 인생의 예리한 단면을 정확하게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지금까지 살아오며 모든 게 계획대로 이루어진 분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으실 겁니다. 거침없이 흐르는 인생 물결에 휩쓸려 지금 이곳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경험합니다. 위대한 사랑에 감격하여 찬양을 올려드렸습니다. 그렇지만 광야는 여전히 광야입니다. 전날 밤 배불리 진수성찬을 먹어도 하루 만에 주린 배를 움켜쥐는 게 연약한 인간의 실존입니다. 홍해는 목을 축여주지 못합니다. 찬양이 목마름을 해결해 주지 못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저마다의 광야 여정을 시작하며 뜨거운 신앙과 냉혹한 현실 사이에서 방황합니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지를 혼란스러워 합니다. 불과 조금 전에 경험한 하나님의 굳센 손길을 의심스러워합니다. 뜨겁게 내리쬐는 햇볕에 혼미한 정신을 붙잡고 애타게 물을 찾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러한 이스라엘과 우리를 향해 어떻게 하실까요? 25절 함께 읽겠습니다.

25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이스라엘의 거센 원성을 들은 지도자 모세는 주님께 해결책을 구하며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주님은 한 나무를 가리키며 그 나뭇가지를 물에 던지게 했습니다. 그러자 독성이 사라지고 마실 수 있는 물이 되었습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가리키다.’입니다. 한글 맞춤법에서 흔히 헷갈리는 동사가 ‘가리키다.’와 ‘가르치다.’입니다. 어떤 대상을 지칭하는 ‘가리키다.’와 어떤 내용을 교육하는 ‘가르치다.’는 발음이 비슷하지만 뜻은 다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가리키다는 뜻의 히브리어 <야라>는 ‘가르치다’는 의미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25절에서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를 “한 나무를 가르치시니”라고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결정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구약의 중심인 모세오경을 가리켜 히브리어로 <토라>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토라는 방금 언급한 ‘가르침’이라는 뜻의 <야라>에서 유래한 단어입니다. 그리고 그 토라를 일컫는 여러 표현이 있는데 그 중 대표적인 게 바로 25절에 나란히 나오는 ‘법도와 율례’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어떤 나무를 가리키고 가르치신 것은 단순히 쓴물을 고치시려는 의도가 아닙니다. 단지 백성이 불평하는, 눈 앞에 있는 원인을 고치시려는 뜻이 아닙니다. 훨씬 더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을 순종하고 따르라는 교훈입니다. 관련해서 이어지는 26절을 눈여겨봐야 합니다. 26절 함께 읽겠습니다.

26 이르시되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들어 순종하고 내가 보기에 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 중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25절의 ‘법도와 율례’처럼, 하나님께서 알려주신 율법을 뜻하는 비슷한 단어들이 계속 나옵니다. 바로 의와 계명과 규례입니다. 주님은 목마름에 신음하던 백성에게 당신 말씀을 귀 기울여 듣고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조금 의아합니다. 마치 목이 말라 우물을 찾아온 아이에게 책을 쥐어주는 어른 같습니다. 현실성 없는 뜬구름 잡는 말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곧바로 이어지는 주님의 자기 계시를 통해 여기에 담긴 깊고 깊은 복음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율법을 지킨 백성에게 이집트 사람이 앓았던 질병을 내리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다음 당신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라. 

우리에게 너무나 큰 위로와 힘을 주는 말씀입니다. 특히나 심각한 병으로 신음하고 있거나 그런 가족을 곁에 두었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치료하시는 주님의 약속과 권능을 의지하고 간절히 부르짖습니다. 우리가 금요기도회 때마다 아픈 이들을 위해 함께 간구하는 근거입니다. 그 결과 실제로 기도의 능력을 통해 병 고침이 일어나는 경험을 목격하고는 합니다. 온교회가 함께 사모해야 할 아름다운 은사와 이적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하나님께서 명확히 당신 자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말씀하신, 성경 본문의 맥락과 의도를 차근히 살펴봐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질문해야 합니다. 본문 말씀에서 병든 사람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이 고작 쓴 물을 먹은 것에 불과합니다. 어쩌면 몇몇 사람이 배탈이 났을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그게 다입니다. 민수기 21장에 기록된, 불뱀에 물린 사람들이 놋뱀을 보고 살아난 사건과는 명확하게 대조합니다. 

그렇다면 본문이 진정 의미하는 ‘질병’은 무엇일까요? 무엇이 하나님에 의한 참된 치료일까요? 어떤 걸 기준삼아 그 뜻을 파악할 수 있을까요? 바로 주님이 가리키고 가르치신 율법, 즉 말씀입니다. 아무리 잔병 없이 튼튼하고 건강하게 지낸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하며 불평과 원망으로 살아간다면 그는 심각하게 병든 사람입니다. 반대로 병원 침대에 아픈 몸을 기대 누워 신음 한다 할지라도 말씀을 붙잡고 주님의 뜻을 잠잠히 헤아린다면 그는 진정 치료받은 자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이렇게 당신을 ‘치료하는 여호와’라고 알려주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이 현재 처한 상황을 다시금 유념해야 합니다. 그들은 이제 막 광야로 나섰습니다. 수백년간 대대로 익숙하게 살아왔던 화려한 이집트 제국을 떠났습니다. 전혀 다른 황량한 땅을 떠돌며 지내야 합니다. 무척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해야 합니다. 

그러면서 수많은 마라를 지납니다. 쉴 새 없이 쓴물을 마십니다. 그러다 보면 자연스럽게 말씀에서 벗어나기 쉽습니다. 하나님이 아닌 우상이 손짓하는 길로 벗어나게 됩니다. 그들 건네주는 달콤한 유혹에 벗어나기 쉽습니다. 성경은 실제로 그들이 그렇게 범죄 한 역사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의 백성은 굳게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진정 치료하십니다. 몸과 마음의 가장 깊은 목마름을 말씀으로 해결해 주십니다. 이것이 광야 여정 전체를 아우르는 복음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광야를 향해 나아갑니다. 어떤 모래 바람이 우리를 덮칠지 모릅니다. 어떤 곤충의 독에 쏘일지도 모릅니다.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상처는 인간의 숙명입니다. 살아가기에 누구나 마음이 다치고 베이고 쓴물을 들이킵니다. 그럴수록 하나님의 말씀에 잠잠히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이 안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품으시기 바랍니다. 더욱 정확하게는 말씀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닮아가며,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붙잡고 담대하게 걸음을 내딛으시길 바랍니다. 

광야를 지나는 백성을 마라를 거쳐 엘림에 이르게 하시는 하나님,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로 목을 축이고 그늘에 쉬게 하시는 그 주님은 우리의 치료자 이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치료하시는 주님
하루하루, 저마다의 광야 길을 지나는 자녀들을 돌보아 주시옵소서. 마라의 쓴물에 괴로워하고 원망하는 저희의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스스로 ‘너희를 치료하시는 여호와’라고 선언하시는 주님 마음을 헤아리기 원합니다. 날마다 생명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지켜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된 치유를 누리고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진정한 치유자,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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