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8월 5일 월요일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서울: 휴머니스트, 2020) 서평

김산해 "최초의 신화 길가메쉬 서사시"(서울: 휴머니스트, 2020) 서평


구약학은 넓은 범주에서 '고대 서아시아(근동)학'에 속한다.
성경은 당연하게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책이 아니다.
치열한 삶의 자리를 통과했다.
그 생생한 흔적을 메소포타미아 지역 여러 신화를 통해 확인 할 수 있다.

오랜 숙제였던 이 책을 이번 여름휴가 기간을 이용해 읽었다.
풍성한 포만감을 느꼈다.
수메르는 인류 최초의 문명을 꽃피운 곳이다.
높은 문화는 곧 '이야기'로 열매 맺는다.
그렇게 탄생한 신화가 바로 "길가메쉬 서사시"다.

길가메쉬는 수메르 도시 '우루크'를 다스린 왕이다.
그는 2/3는 신이고 1/3은 인간인 전설적인 존재다.
길가메쉬가 친구 엔키두와 함께 겪는 모험이 이 서사시의 주 내용이다.

읽는 내내 무척 흥미진진했다.
우선, 무려 4800년 전에 쓰인 옛이야기지만 내용 전개가 탄탄했다.
삶의 본질을 통찰하는 묵직한 문장들도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고대 히브리 세계에 영향을 준, 고대 서아시아의 정치, 종교문화를 생생히 엿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구약 성경과 신앙은 이미 훨씬 오래전 형성돼 도도하게 흘러 내려온 거대한 문화의 흐름 속에서 솟구쳐왔음을 확인한다.

한편, 책을 읽는 내내 번역자인 김산해 박사의 노고를 느꼈다.
그는 길가메시 서사시의 여러 판본을 수메르어와 아카드어를 통합해 번역해 재배치했다.
덕분에 한글로 직역을 읽는 편의를 누린다.
게다가 곳곳에 있는 자료 사진이 수메르 문명을 더욱 생생하게 마주하게 했다.

아쉬움도 있다.
우선 전체 네 장(chapter)중 2장은 서사시 본 내용이고 나머지 1, 3, 4장은 배경 설명과 해설이다.
하지만 구분이 명확하지 않아 구성이 혼란스럽다.
3장의 경우 제목이 '비극의 전주곡, 죽음의 공포'여서 마치 서사시 내용이 계속 이어지는 것으로 오해 여지가 있다.
각주의 경우 편집자의 전문성이 드러난 공간이지만 불필요한 내용까지 길어져 산만했다.
게다가 히브리 성경과 관계를 곳곳에 언급하는 것까지는 자연스럽지만 '베꼈다.'라고 단정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성경과 성경의 세계를 보다 생생히 이해하기 원한다면 꼭 읽어야 할 책이다.

한편, 책을 덮자마자 주원준 박사님의 길가메쉬 서사시 강의를 유튜브로 찾아들었다.
https://www.youtube.com/watch?v=JJxj0ziaFgk

우리나라에서 불모지와 같은 '고대근동학'분야를 개척하신 박사님의 업적이 새삼 존경스럽다.
구약학 전공자로서 적어도 주 박사님의 책은 다 읽어야겠다는 사명감이 든다.
스승께 배운 '최종 형태로서 정경'을 존중하는 태도가 설교자로서 성경을 대하는 가장 근본적인 자세다.
동시에 '정경적 접근'을 균형 있게 하기 위해서라도 '고대근동학'에 대한 관심과 공부를 꾸준히 해야 한다.

따라서 <길가메쉬 서사시>는 내 신학 여정에 여러모로 유의미하고 인상적인 독서다.
목회자들에게 강력히 추천한다.

2024년 7월 26일 금요일

시편 116편 1~8, 15절, "들으시는 주님께"

 2024년 7월 26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시편 116편 1~8, 15절, "들으시는 주님께"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솔직히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어린 시절 주입받은 하나님, 여전히 제 마음 한 쪽에 화석처럼 흔적이 남아 있는 하나님의 그림자는 너무나 거대하고 두려운 모습이었습니다. 따라서 그런 주님을 향해 ‘경배’나 ‘순종’ 같은 수직적인 표현은 무척 자연스럽습니다. 반면 “사랑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저로서는 어딘가 어색합니다.

하지만 본문 속 시인은 그런 저와 달리 하나님께 “사랑한다.”라고 분명히 고백합니다. 개역개정성경은 우리말 어법을 살려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를 1절 가장 뒤에 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약 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한다.” 이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 사랑’이라는, 시 전체의 핵심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그렇다면 시인 그토록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를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1절에 따르면, 주님께서 “그의 음성과 그의 간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듣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미완료형’입니다. 말 그대로 아직 완료되지 않은, 끝나지 않은 동작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경우 과거로부터 비롯되어 현재를 거쳐 미래로 이어지며 반복하는 행동을 의미합니다. 즉, 하나님이 들으셨고, 들으시고, 들으실 것을 뜻 합니다.

그렇지만 때때로 하나님께서 정말 그렇게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지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이와 관련하여 예전에 읽었던 수필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집사님 한 분께서 마음 속 깊이 이런 의문을 가지고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온 세상 수많은 사람의 기도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고 응답하실까? 궁금해 했습니다. 언뜻 굉장히 어리석고 유치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분명히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막연한 관념으로 덮고 지나가기에는 그 질문의 무게감이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사님께서 아들이 속한 대학 합창단의 발표회에 참석했습니다. 한참 즐겁게 음악을 듣다가 문득 신비로운 경험을 했습니다. 분명히 비슷한 또래 남학생들 수십 명이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가운데서 어느 순간 아들 목소리가 또렷이 들려 왔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바로 사랑하는 자녀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 속에서 자기도 모르게 아들 목소리에 더욱더 집중하여 그 음성을 분간하는 것이 어머니의 본성입니다. 아마 여러분도 비슷한 경험을 한 번쯤 해 보셨을 겁니다. 그 집사님은 이 체험을 통해 사랑하는 자녀들이 드리는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어렴풋하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는 주님의 신비 전체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 그림자를 더듬어 가는데 도움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간구와 애원에 귀 기울이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청신경을 자극시킨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시는, 온 세상을 향한 주님의 지극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는 본문 1절의 고백을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문장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 고백의 심층을 보다 생생히 깨달아 알기 위해, 그가 주님께 구한 간구의 내용을 살펴봐야 합니다. 본문 3절에 따르면 시인이 겪고 있던 시련은 ‘사망의 줄’과 ‘스올의 고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올>은 히브리 세계관에서 사람이 죽음 이후에 머무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여기서 드러난 그의 상황은 분명합니다. 마치 ‘죽을 것만 같은 절망’입니다. 따라서 그는 처참한 ‘환난과 슬픔’ 가운데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께 기도하며 내 영혼을 건져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1절의 고백대로 “그 음성과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주님의 위대하심을 5~8절에 더욱더 힘 있게 찬양하였습니다. 5~8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여기서 시인은 먼저 주님의 은혜와 공의, 긍휼과 구원을 노래합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을 향해 평안히 돌아가라고 외칩니다. 주님이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그의 눈을 눈물에서, 그의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시인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한없는 사랑을 계속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절정에 이르러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15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시인은 자신이 겪은 고난이 ‘사망’에 가까웠음을 3절과 8절에 이미 두 차례나 언급하였습니다. 그만큼 그가 짊어졌던 고통의 무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절망으로부터 구하시고, 그의 음성과 간구를 들으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 없이 찬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개인적인 고백이 15절에 이르러서 ‘경건한 자들’ 즉,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에게로 범위가 확장됩니다. 게다가 죽음과 맞닿은 정도가 아니라 ‘죽음 자체’를 이야기 합니다. 더욱더 놀라운 것은 결론입니다. 그와 같은 ‘경건한 자들의 죽음’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귀중하다고, 눈부시게 값지다고 찬양합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얼핏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를 구해 낸 대상인 ‘죽음’이 당신 눈에 추하거나 악하게 보여야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성도의 죽음이 소중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의 구원은 바로 죽음을 통한 참 생명과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 자녀들을 죽음에서 건지시는 방법은 죽지 않게 하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죽음을 맞이하는’ 엄중한 역설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갖 고통과 시련 가운데 외치는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구하시는 분이심을 가슴 뜨겁게 고백하길 바랍니다.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주님께서 분명히 살아계시지만, 은혜와 구원으로 늘 함께 하시지만, 그렇다고 해서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 빗겨 가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정면으로 달려들곤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단절 속에 더 깊은 좌절과 상실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망 속에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귀를 기울이시고 마침내 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을 살리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절정을 십자가에서 보이셨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죽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비참하게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마침내 이 땅에 부활의 생명과 희망을 열어준 은총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응답하시고 구원하시는 그 분만의 고독하고 치열한 뜻을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해서 모든 일이 기적처럼 잘 풀리지 않습니다. 간절한 소원이 성취되지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 자체가 성공을 보장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실한 신앙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겪을 때가 훨씬 더 많습니다. 그리고 그 깊은 죽음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처절히 되묻고는 합니다. 

그렇지만 분명히 마음에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도저히 기도에 응답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 결코 죽음에서 구해질 수 없을 거라며 끝없는 좌절에 잠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찬란한 복음입니다. 또한 오늘 함께 읽은 시편에서 시인이 절절히 노래하는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 


조심스럽지만 제 이야기를 들려드리겠습니다. 제가 목사 안수를 받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일입니다. 당시 제가 섬긴 교회의 청년 하나가 저에게 불쑥 어떻게 목회자가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이런 질문은 그동안 수백 번도 넘게 참 많이 들었습니다. 아마 여러분도 목사님들에게 가장 궁금해 하며 질문하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그 식상한 물음표가 제 심장을 예리하게 찔렀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본격적으로 소명을 확인했던 순간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수요기도회에서 열심히 기도하다가 ‘네가 나의 말씀을 전하길 원한다.’라는 음성을 들었습니다. 어쩌면 그건 제 망상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분명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때부터 하나님께서 저를 신비롭게 인도하셔서 목회자의 길을 걷게 하셨습니다. 놀라운 과정을 거쳐 저를 장신대 신학과에 진학했습니다. 그렇게 신학을 공부하며 하나님의 부르심을 점점 깨달아 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저는 목사로서 참 많은 결격사유를 가졌다는 잔인한 사실과 직면하였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저는 남들 앞에 서서 말을 하는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어릴 때부터 심장이 약해서 무대 공포가 심했습니다. 가벼운 언어 장애를 겪어 치료도 받았습니다.  

그 외에도 신학대학원 졸업 후 온갖 상처와 좌절을 겪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저에게 ‘너 이래도 목사 될래?’라고 말하며 윽박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과연 목사로서 적합한 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며 많이 갈등했습니다. 마치 손가락이 마비된 음대생의 심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꿈이 있었지만 그 꿈을 이루기에 저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기만 했습니다. 짙고 짙은 환난과 슬픔이 저를 덮쳤습니다.

그런 고된 시간들을 지나 어느새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한 청년으로부터 “어떻게 목사가 되셨느냐?”라는 질문을 들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문득 깨닫고 또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연약한 종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말씀을 전하는 일꾼이 되고 싶다는 한 소년의 기도에 주님께서는 주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물론 저는 여전히 많은 한계와 부족함을 절감합니다. 그런 저에게 탁월하고 훌륭한 설교를 하려는 욕심은 사치입니다. 주님께서 저에게 주신 말씀을 담백하게 전하기 위해 미흡하나마 무던히 노력할 뿐입니다. 따라서 저는 이렇게 설교단에 설 때마다 매 번 작은 기적을 실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는 분이심을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합니다.

이러한 진리를 저뿐만 아니라 이 자리에 함께 하신 모든 성도님도 함께 고백하실 줄 믿습니다. 그 은혜를 온 몸과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높여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 가운데, 삶을 통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시길 소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그 모든 경배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의 앞날을 가장 선하고 올바르게 이끄실 줄 믿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꺼낸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실망을 드리는 거라면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도, 어쩌면 평생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큰소리로 말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다만, 오늘 함께 읽은 시편 말씀을 통해 감히 고백합니다.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셔서 제 삶의 아픔 깊숙이 다가오시어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심을 믿습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의지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날마다 조금 더 주님을 사랑해 가겠다고 다짐합니다. 부디 이 믿음의 여정에 함께 하는 온 성도님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본문 1절 말씀을 부족하나마, 제가 다시 번역한 문장으로 읽어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 저의 간청하는 목소리를 
들어주셨고, 들어주시고,
들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개인역)


기도
자녀의 간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은 순백이 아니라, 고통 가득한 세상임을 날마다 절감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시편의 찬양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위대한 역설을 거듭 깨닫습니다. 
그 신비로운 은혜를 통하여 자녀의 모든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가슴 깊이 품습니다. 마침내 그 사랑을 고백하길 원합니다. 이와 같은 위대한 복음을 삶 속에서 언제나 힘써 전하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임 당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4년 7월 17일 수요일

사무엘상 14장 43~52절 "사는 날 동안에

2024년 7월 17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4장 43~52절 "사는 날 동안에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49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50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의 군사령관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51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세월은 흘러 지나가지 않습니다. 영혼 깊이 차곡차곡 쌓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나날만큼, 세월의 퇴적층을 지닙니다. 각기 고유한 빛깔과 질감을 지닙니다. 결정적인 순간 그 생생한 단면이 드러납니다.

1973년 7월 10일 새벽, 이탈리아 로마에서 16살 청소년이 마피아에게 납치되었습니다. 그들은 대담하게 1,700만 달러, 지금 환율로도 230억이 넘는 거액을 몸값으로 요구했습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인질의 할아버지 존 폴 게티가 어마어마한 석유 재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세계 최고 부자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습니다. 그는 납치범의 요구에 응할 여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만약 여러분이 이런 상황에 놓인다면, 자녀 혹은 손주가 납치된다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사실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 자체가 너무나 죄송합니다. 상상만 해도 무척 끔찍합니다. 그 순간, 누구나 피가 거꾸로 솟기 마련입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위험에 처한 내 아이를 한시바삐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 합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당연은 늘 당연하지 않습니다.

폴 게티는 손자가 마피아에게 납치 되었음에도 무려 사 개월이나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범인들은 몸값을 320만 달러로 대폭 낮추었습니다. 게티는 그제야 협상에 응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100만 달러를 더 깎아 220만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혹시 이유를 아십니까? 220만 달러까지 세금 공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220만 달러마저도 아이의 아버지, 즉 자기 아들에게 연 4% 이자로 빌려준 돈입니다. 

존 폴 게티는 세계적인 명성을 자랑하는 거대한 미술관을 세울 정도로 값비싼 예술품 수집을 즐겼습니다. 또한 젊은 미녀들과 어울려 노는 데는 흥청망청 지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납치당해 공포에 떠는 손자를 위해서는 자기 돈 단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그의 손자는 납치된 지 5개월 만에 겨우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정신 충격으로 건강을 크게 잃었습니다.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다가 54세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몇 년 전, “올 더 머니”라는 제목의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납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탐욕의 노예가 된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뚜렷이 확인합니다. 오로지 욕망을 따라 살아온 세월이 풍기는 악취를 맡습니다. 그 퇴적층의 단면이 얼마나 끔찍한 모습인지를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도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상실하며, 광기에 휩싸여 인생을 쌓아 올린 한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지금 전쟁을 지휘하는 중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보급입니다. 탁월한 지휘관이 통솔하거나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 할지라도 병사들이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백전백패합니다. 

따라서 지금 사울에게 왕으로서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전쟁터에서 극한 체력을 소모하는 병사들을 향한 안정적인 먹을거리 제공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상식과 전혀 다른 무모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바로 금식령입니다. 블레셋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엄중하게 명령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가 제사장 권위를 함부로 훔쳐 또 다른 율법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참 묘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수풀을 지날 때 하필 달콤하게 흐르는 꿀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왕의 명령 때문에 그 꿀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병사들은 갈등과 굶주림 속에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던 그 때, 부하와 함께 단둘이서 블레셋 군인 20명을 무찌르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수풀 안에 있는 꿀을 주저 없이 지팡이로 찍어 먹었습니다. 그 결과 요나단은 전혀 의도치 않게 왕명을 어긴 불경건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이 금세 밝혀졌습니다. 요나단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무심결에 꿀을 먹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장남을 향해 사울이 격분하였습니다. 끝까지 어리석은 자기 고집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합니다. 본문 44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라고 서슴없이 외칩니다. 이렇게 독기 어린 말이 이해 되십니까? 설령 자기 자녀가 맞아 죽을 죄를 지었어도 그것을 감싸주는 게 부모로서 마땅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해할 여지는 있습니다. 군대를 통솔하는 왕으로서 질서를 지키고 싶었을 겁니다. 사심 없이 원칙을 세우길 바랐을 겁니다. 이를 통해 전쟁터 기강을 굳건하게 유지하길 원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 뜻에 합당한 명령일 경우 그러합니다.

그렇지만 사울의 명령은 정반대로 몰상식하고 폭력적이었습니다. 어쩌면 하나님은 누가 봐도 죄 없는 요나단이, 그 명령을 일부러 어기게 하셨을지 모릅니다. 사울이 자기 잘못을 깨닫고 뉘우칠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아들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주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저주하였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이스라엘 군대가 요나단의 결백을 적극적으로 변호합니다. 본문 4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백성이 왕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은 엄연한 반역 행위입니다. 게다가 전쟁 중에는 즉결 처분 대상입니다.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사울 앞에 나섰습니다. 어디서 이런 담대함이 나왔을까요?

사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하나님과 철저히 함께한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탐욕에 눈먼 사울만은, 그를 천하의 극악한 죄인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의 영혼이 어떤 상태인지 여실히 드러납니다. 

사울은 권력을 지키고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든 이용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자기 욕망을 가로막는다면 무엇이든 걸림돌로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전쟁터로 끌려와 충성하는, 힘없는 백성의 굶주림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맏아들에게 거침없이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권위를 도둑질하여 제멋대로 휘둘렀습니다. 

지난날 청년 사울은 겸손하고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토록 추하게 변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원인을 본문 47~48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사울은 즉위한 이후 블레셋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과 싸워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거듭되는 승리의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랜 적대 국가인 아말렉까지 쳐들어가 이겼습니다. 백성이 그를 향해 “사울! 사울!” 외치며 열광합니다. 한없는 정복감과 희열을 사울의 영혼 깊이 몰려왔습니다. 

그러자 사울은 점점 미쳐가기 시작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 뜻을 살피며 내면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서 나라를 위해, 묵묵히 섬겨야 할 다른 책무에는 관심 갖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새로운 승리를 갈구하며 강한 군대를 만드는 것에만 몰두했습니다.

이러한 사울의 행적은, 얼핏 왕으로서 합당한 의무 수행으로 보이기도 합니다. 군통수권자로서 정당한 국방 활동으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매우 심각한 범죄입니다. 신명기 17장에 기록된 모세 율법에서 하나님은 엄중하게 경고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임금은 병마와 같은 최신 무기를 통해 군사력 증강에 몰두 하지 말아야 합니다. 대신 율법책을 직접 옮겨 적어 항상 곁에 두고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 경외하는 것을 배우고, 계명을 실천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통치자는 왕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정의와 평화로 다스리십니다. 이스라엘의 군주는 그러한 주님의 통치를 대신하는 일꾼에 불과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과 그들의 왕이, 주변 나라들과 구별되는 가장 커다란 차이점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그들을 섬기고 돌보는 왕은 다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맹목적인 탐욕 대신 하나님 나라를 추구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주님을 업신여겼습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권력을 오로지 성공만을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점차 높은 곳에 올라가면 갈수록, 많은 것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는 어느새 하나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미 그에게는 자신만이 진정, 왕이며 하나님인 까닭입니다. 

사무엘상 역사가는 이러한 사울의 생애를 본문 52절에서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요약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여기서 ‘사는 날 동안에’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모든 날에’라는 뜻입니다. 즉, 사울이 일평생 붙잡은 삶의 태도를, 그가 살아온 시간의 퇴적층을 가리킵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블레셋과 벌이는 끝없는 싸움입니다. 죽음과 폭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본문은 자칫 오해 소지가 있습니다. 그가 원치 않게 부득이 전쟁 상황에 놓인 것으로 착각할 여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맥락을 통해 진실을 분명히 알게 됩니다. 

앞서 본문 47~48절을 통해 확인했듯이 전쟁은 곧 사울의 최우선 관심사입니다. 그 스스로 능동적으로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어떻게든 이기기 위해 용사들을 불러 모아 강한 군대를 키우는 일에 무엇보다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자신이 원하는 모든 것을 두 손에 움켜쥐며 살았습니다. 참 기묘하게도 광기에 사로잡혀 불신앙을 드러냈음에도, 가는 곳마다 전쟁에서 승전보를 남겼습니다. 뿐만 아니라 본문 49~51절에 따르면, 권력을 유지할 든든한 일가를 이루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승리에 취했습니다. 성공에 중독되었습니다. 이기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오로지 권력만이 삶의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숱하게 보내신 애정 어린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대신 백성을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헛된 탐욕을 이루기 위해 고귀한 생명들을 희생 시켰습니다. 

그러나 사울을 사로잡은 승리의 화염은 결코 영원하지 않았습니다. 음울하게 흩날리는 뿌연 재만 남긴 채, 그를 불사르고 사라졌습니다. 사울은 그토록 열광하며 내달렸던 전쟁터에서 마침내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승자의 함성을 외쳤던 그곳에서 패배자의 신음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주님께서 맡기신 왕으로서 소명에는 무관심하고 철저히 은혜로 주어진 권력에 목을 맨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쟁터로 나서는 아버지의 군복을 붙잡고 울먹이는, 어린 아이들의 눈망울을 보셨습니다. 행군하는 군인들의 발걸음에 배인 공포를 느끼셨습니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남편을, 아들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여인들의 절규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그들 모두는 사울의 권세에 눌려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임금 주위에서 아부하는 권력자들 어느 누구도 그들의 탄식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사울의 일생을 관통한 범죄를 냉정하게 평가하셨습니다. 그로 인한 억울한 죽음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가 평생 쌓아올린 세월의 선명한 단면을, 이스라엘 역사가를 통해 서늘한 문장으로 기록에 남기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성경에 담아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5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52 사울은 일생 동안 블레셋 사람과 치열하게 싸웠다. 그래서 사울은, 용감한 사람이나 힘 센 사람은, 눈에 보이는 대로 자기에게로 불러 들였다


반면 사울이 저주했던 그의 아들 요나단은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맏아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요구되는 훌륭한 인격과 실력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본문에서 확인하듯 백성에게 진심 어린 존경과 지지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즉, 요나단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권력 계승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자기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우기를 원하시는 왕이, 자신이 아닌 다윗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위해 권력을 기꺼이 양보하며 그를 지켜 주었습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너무나 어리석고 미련합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나 개인의 성공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진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 따라 요나단은 성경 속 그 누구 못지않게 위대한 섬김과 희생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요나단의 훌륭한 신앙과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 장면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0장입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적개심이 극한으로 치달았습니다. 공공연히 그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그 둘 사이에서 다윗을 보호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척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요나단은 약속대로 다윗을 들판에서 만납니다. 그는 운명의 거친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제 다시는 다윗을 보지 못할 것을 직감했습니다. 부둥켜 안고 함께 울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요나단은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20장 42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42 그러자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잘 가게. 우리가 서로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잊지 않도록 하세. 주님께서 나와 자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나의 자손과 자네의 자손 사이에서도, 길이길이 그 증인이 되실 걸세." 다윗은 일어나 길을 떠났고, 요나단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사울과 달리 요나단이 추구한 삶의 기준은 다름 아닌 ‘주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내밀한 뜻과 성품입니다. 그는 주님의 마음을 바탕으로 자기를 살폈습니다. 다윗을 바르게 평가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통해 다윗과 관계를 올바로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에게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충실히 순종했습니다. 진리를 따르기 위해 과감히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누가 봐도 당연히 소유할 수 있는 권력과 재물을 주저 없이 포기했습니다. 아버지 사울과는 전혀 반대되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삶의 퇴적층입니다. 

이처럼 사울과 요나단은 비록 부자지간이지만, 그들은 사는 날 동안에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극명하게 다른 세월을 쌓아올렸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평생 자기만을 위해 무엇이든 움켜쥐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렇지만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둘은 시간이 흘러 같은 날, 같은 곳 길보아 산 위에서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요나단이 살아온 날들은 사울이 살아온 날들에 비하면 미련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나단은 진실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단해야 합니다. 분명 사람들로부터 왕이라 불렸고 또한 스스로 자신을 왕으로 여겼지만, 결코 진정한 왕일 수 없었던 사울 대신, 당연히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왕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주저 없이 왕의 길에서 벗어난 요나단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참 하나님이심에도 기꺼이 참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오르셨던 예수님의 걸음과도 일치합니다. 요나단의 위대한 희생은 곧 주님의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요나단의 죽음은 결코 허무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죽지만 죽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를 일으키고 높이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섬김과 나눔을 묵묵히 이어갈 때 부활의 하나님께서 진정한 생명과 희망으로 당신의 모든 자녀를 새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나단의 삶을 통해 늘 명심해야 할 부활 신앙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귀감이 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로 소설가 권정생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 일본 동경의 빈민가에서 나고 자라셨습니다. 광복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셨지만, 여전히 가난하게 지내셨습니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온갖 궂은일을 하셨습니다. 또한 결핵을 크게 앓으며 건강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안동 일직교회 문간방에 거주하며 종지기로 살았습니다. 선생님은 거기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의 시선으로 “강아지 똥”과 “몽실 언니”를 비롯한 여러 소설을 지었습니다. 그 책들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며 서서히 이름이 널리 알리셨습니다.

외람되지만 만약 제가 이때, 권정생 선생님이라면 이제 적당히 누리고 살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고생만 하며 살아오다 마침내 아름다운 문학을 꽃피워냈습니다. 그런 그가 조금 여유 있게 산다고 해서 함부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익과 명예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해맑은 성품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995년, 아동문학의 대부인 윤석중 선생님께서 미리 알리지 않고 갑자기 서울에서 안동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권위 있는 “새싹문학상”을 직접 수여하셨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그 수상을 마치 형벌처럼 느꼈습니다. 결국 5일 뒤에 상패와 상금을 우편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선생님은 수필에서 자기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성취한 노력의 대가로 만족해야지 다른 누구한테 평가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중략) 상을 주고받는 일이니 신문에 내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열흘 전에 우리 이웃에선 잇따라 초상이 났다. (중략) 온통 이웃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데 우리 집에 경사 났다고 축하 손님이 찾아왔으니 어찌 부담스럽지 않았겠는가.”(『우리들의 하느님』 148쪽)

여러분은 이러한 선생님의 행동과 생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저는 솔직히 답답합니다. 만약 제 친한 친구가 이렇게 처신한다면 버럭 소리 지를지 모릅니다.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너무 그렇게 고지식하게 살 필요 없다고 다그칠 것 같습니다. 힘들게 살아오며 정당하게 노력해 얻은 결실이니 마음껏 즐겨도 된다고, 오히려 그게 더 맞는 거라고 한참 설득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세상은 그런 순진무구한 바보들 덕분에 조금씩 아름답게 변화되어 왔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당연히 움켜쥘 수 있는 화려한 성공과 출세를 조금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외면하고 무시하는 청명한 진리를 당연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렇기에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을 향한 따뜻한 공감을 평생 잃지 않으셨습니다. 재산 전부를 기증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검소하게 지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서 사는 날 동안에 이 땅에 남긴 발자취는 하나님을 진정 믿고 따르는 이의 삶이 얼마나 향기로울 수 있는지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혼탁해진 영혼을 맑게 하는 시간의 영롱한 퇴적층을 보여줍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선생님처럼 똑같이 고고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당장 저부터 전혀 자신 없습니다. 다만, 삶의 지향점을 정직하게 돌이켜 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며 세월을 쌓아 올렸는지를 가만히 살펴야 합니다.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혹시 남들보다 좀 더 높이 올라, 더욱 많은 돈을 움켜쥐는 것이 아닙니까? 그 대신 좀 더 낮아지고 나누고 섬기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를 참으로 살리는 생명의 길이 놓여 있음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시간은 그저 흘러가지 않습니다. 켜켜이 쌓여갑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아온 세월만큼, 저마다의 색깔과 촉감을 지닌 삶의 퇴적층이 있습니다. 그 예리한 단면이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납니다. 마치 극도로 대조적인 사울과 요나단처럼 말입니다.

십자가는 주님께서 이 땅에 참 사람으로 살아가시며 쌓아 올린 위대한 퇴적층입니다. 그 눈부신 단면에 담긴 찬란한 은혜와 섬김을 영혼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온 생애를 다해 이루고 전해야 할 하나님 나라 복음을 날마다 곱씹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향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호화로운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의 사울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멸시하고 조롱 할지라도,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나의 모습이 때때로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쉽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참된 위로와 승리가 이 시대의 요나단으로 살아가며 세월을 쌓아 올리는 우리의 모든, 사는 날 동안에 언제나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왕이신 하나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저희조차 욕망에 눈이 어두워 진리를 거부하고 성공의 달콤한 결실에만 열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승리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사울의 어리석음을 물리치길 소망합니다. 사울처럼, 사는 날 동안에 탐욕이 이끄는 대로 내달리지 않게 하옵소서. 
그 대신 요나단처럼 일평생 잠잠히 진리를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꺼이 낮아지고 내려놓으며 섬길 때 주어지는, 부활 생명을 풍성히 누리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선물로 주어진 인생의 퇴적층을 믿음으로 쌓아올리게 하옵소서.
확연히 패배자로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참 승리를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6월 29일 토요일

영화 "문라이즈 킹덤"(Moonrise Kingdom, 2012) 후기

 

마침내 폭풍 같은 일더미에서 벗어났다.
성취감을 느끼며 문득 웨스 앤더슨 감독 영화가 보고싶었다.
그의 동화 같은 이야기와 예쁜 색감이 그리웠다.

마침 넷플릭스에 있는 "문라이즈 킹덤"을 보았다.
그는 내 기대를 충분히 만족시켰다.
감독 특유의 그림같은 화면이 내 마음을 포근하게 했다.
어른들과 아역들의 연기 조화도 일품이었다.
재치 있는 대사들이 웃음 짓게 했다.

그리고 웨스 앤더슨 영화들이 으레 그렇듯 영화가 끝나고 묵직한 여운을 안겨주었다.
표현방식은 화사하지만 다루고 있는 소재는 묵직하다.
어느 섬마을 소년과 소녀의 가출이라는 낭만적인 줄거리를 보여주지만 두 사람이 각자 처한 삶의 자리는 처참하다.
현실의 모순과 폭력을 애둘러 가지 않고 정면으로 다룬다.
그림 같은 화면으로 현실을 덮지 않고 오히려 따뜻한 시선으로 심층을 파고드는 영상 미학에 감탄한다.
그래서 짙은 잔향을 남긴다.

헐리우드의 많은 배우가 그의 작품에 출연하고 싶어하는 이유일 것이다.
나를 비롯한 많은 팬들에게 사랑받는 이유일 것이다.
그의 진가를 늦게 알고 여러 작품을 극장에서 보지 못해 아쉽다.
틈틈이 그의 영화를 더 많이 보고 싶다.
다음 개봉작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한편, 나의 설교 또한 웨스 앤더슨의 영화와 같길 바라본다.
성경과 오늘의 현실에 직면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복음을 풍부한 문학적 상상력을 바탕으로 펼치고 싶다.
그러기 위해 더욱 노력하고 싶다.

2024년 6월 28일 금요일

예레미야애가 3장 19~24절 “오히려 희망”

2024년 6월 28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애가 3장 19~24절 “오히려 희망”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너무나 어둡고 어두운 절망이었습니다.
예레미야애가는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한 예루살렘 함락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에 패배했다는 것은 단지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의 정치·군사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동안 철저히 믿고 섬긴 우리 민족 신이 적이 섬기는 신에게 굴복하여 그들을 버리고 떠났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벨론 군대가 성전을 짓밟는 모습을 무력하게 보고 있어야 했던, 당시 유다 사람들 영혼에 오늘 우리가 감히 헤아리기 힘든 절망과 슬픔이 덮쳐왔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로서 사명을 감당하긴 했지만 그 역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민족적 시련 앞에 하나님 뜻을 연거푸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레미야애가의 원문은 “어찌하여!”라는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예언자는 자신의 울분과 원망을 주님께 거침없이 토로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은 처참한 고통을 본문 19~20절에서 “쓴 쑥”과 “쓸개즙”이라는 미각(味覺) 단어를 통해 표현합니다. 마치 혀끝을 강력히 자극하고 좀처럼 머리에서 떠나지 않은 “쓴 맛”처럼 그 아픔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따라서 예언자는 마음 깊이 밀어닥친 떨림과 좌절을 경험하였습니다.

확신하기는 이 자리에 계신 모두 예레미야의 탄식을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미 겪었고 또 지금 맛보고 있는 인생의 ‘쓴 맛’이 있습니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현실입니다. 불행히도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지나친 비관론이 건강하지 못하듯이 무모한 낙관론 또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발 아무런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전혀 힘들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모든 시련과 똑바로 마주 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충분히 아파하고 분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모든 문제를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 역시 깊고 깊은 절망의 중심에서 전혀 뜻밖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본문 21~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새번역)

절망과 직면하여 처참하게 몸부림쳤던 예레미야는 고통스런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은혜를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이성은 이러한 희망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런 ‘이성의 저항’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 실패하고, 날마다 힘겨운 일만 계속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희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막연히 그래야만 할 것 같은 학습된 강박을 내려놓고 자신의 무능과 무지 그리고 어두운 현실을 직면할 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언자는 그 숱한 절망 가운데 놀라운 희망을 가슴에 품었습니다. 혹독한 불행 한 복판에서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찾아오시는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과 “끝없는 긍휼”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은 그가 흔히 말하는 독실한 믿음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서가 아닙니다. 소위 ‘긍정의 힘’을 붙잡아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는 모범적이고 얌전한 신앙인의 모습과 거리가 멉니다.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처럼, 예레미야서에는 절규하며 흐느끼는 그의 솔직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합니다. 마찬가지로 절망의 언덕을 지나며 하나님 앞에 애써 착한 척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얼마든지 주님께 원망하고 탄식해도 괜찮습니다. 주님의 위대한 은혜와 사랑이 그 모든 고통의 몸부림을 품고 다가와, 예례미야와 우리를 압도했고 압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 위에서 피를 흘리시며 하나님을 향해 비참하게 울부짖으셨습니다. 동시에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피맺힌 십자가가 부활의 생명을 꽃 피웠듯이 고난과 고통 가운데 내뱉는 우리의 신음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생생히 깨닫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될 줄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생명과 구원은 말랑말랑한 심리적 위안이 아닙니다. 새하얗게 표백된 종교 관념도 아닙니다. 정반대로 찐득찐득하고 얼룩지고 악취나는, 땀과 눈물과 피로 뒤범벅된 채 달려오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제아무리 부정하려 애쓰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결코 믿어지지 않지만, 날마다 새롭게 마음에 채워지는, 그리하여 끝내 안길 수밖에 없는 주님의 놀라운 긍휼입니다.


20세기 중반 나치 독일의 광기가 전 유럽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수용소에 몰아 놓고 끔찍한 대량 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그때 오스트리아 출신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온 가족과 함께 붙잡혀 아우슈비츠에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와 동생을 잃은 채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인류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었고, 한 개인에게는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픔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제목의 저술을 남깁니다. 20세기 어두운 역사를 뚫고 솟아 오른 위대한 기록유산입니다. 프랭클 박사는 이 책에서 고통의 의미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삶과 죽음, 고통 받는 것과 죽어가는 것까지를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getting through work.)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getting through suffering)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시련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지니는 숙명이자 소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을 관통하는 내면의 시력을 키워야 합니다. 고통의 의미를 헤아리는 영혼의 깊이를 가져야 합니다. 시련과 직면하여 그것을 완수해 가는 용기를 품어야 합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그런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하십니다. 그렇기에 그 모든 좌절과 실패는 우리를 진실로 살리고 새롭게 하는 구원 과정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문제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에 억지로 눈을 감지 말아야 합니다. 어두움에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충분히 아파해야 비로소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마음껏 울어야 마침내 웃을 수 있습니다. 한없이 절망해야 오히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회복의 복음입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마지막에 기록된 예언자의 고백을 함께 드리길 원합니다. 24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24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새번역)

한 번 따라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여기서 새번역 성경은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개역개정은 “기업”으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각 지파와 가문 별로 제비 뽑아 나눈 땅을 가리킵니다. 

그 토지는 유목 생활을 마치고 이제 농경 생활을 막 시작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삶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는 예언자의 고백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 생존과 생활의 근거입니다.”

이와 같은 예레미야의 고백에 동의하십니까? 이러한 선언을 부정할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시간 기도의 자리로 모인 모두가 기꺼이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조금만 더 정직히 들여다본다면 매우 다른 실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이 때때로 하나님 대신에 돈과 명예와 권력을 마치 삶의 근거처럼 여기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을 우상화하며 나의 어리석은 탐욕을 대신 이루어줄 분으로 이용하려 들 때도 많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주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믿고 따르는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레미야처럼 위기 가운데 어떤 선택을 내리는지 보면 됩니다. 어려움 속에 누구나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냅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거창하게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정말 무엇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는지를 고난과 마주할 때 결정적으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한다면 지나치게 많은 돈을 움켜쥐려 애쓰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연약한 이웃을 억누르지 말고 섬겨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진정 소망한다면 나의 어리석은 탐욕이 아닌 공동체의 평화를 위해 기꺼이 손해보고 져주어야 합니다.

본문에서 의연한 찬양을 드리는 예레미야의 상황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정반대입니다. 너무나 어둡고 어두운 절망이었습니다. 몰락한 나라의 예언자로서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극히 암울한 상황 속에서 참으로 희망을 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외쳤습니다. 그 말씀을 통해 이스라엘을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부디 거듭 바라기는 이와 같은 찬란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도 이어지길 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씀드리면서도 제 마음은 한 없이 무겁기만 합니다. 험난한 세상 가운데 성도님들이 온갖 불안과 염려를 겪고 계시다는 것을, 그리하여 때로는 감사와 찬양조차 사치스럽게 느낀다는 걸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사이기 전에, 믿음의 여정을 함께 걷는 길벗으로서 말씀 드립니다. 온 몸으로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내며 진리를 외친 예언자와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의지하여 간곡히 당부합니다.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오히려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보다 앞서, 우리와 함께 고난 당하신 신실하신 주님께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을 날마다 가득히 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맞서 오직 하나님만이 진정 나의 모든 것이요 희망임을 진심으로 고백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참된 희망이신 하나님
잠시도 잊을 수 없는 모든 슬픔과 절망 가운데 주님을 바라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여러 모양으로 찾아오는 한결같은 사랑과 긍휼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저희 모든 것이요 참된 희망임을 고백합니다.
살아가며 너무나 지치고 힘겨운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주위에 온통 어둠으로 둘러싸고 있는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잠잠히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의지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통해 나 자신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며 시련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망의 현실을 몸소 살아내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