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2월 24일 화요일

마태복음 4장 1~11절 “광야로 이끄사”

2026년 2월 22일, 사순절 첫째 주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4장 1~11절 “광야로 이끄사”


세례 받으시고 광야로 가시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 때에”라는 말로 시작합니다. 신약 원문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토테>라는 헬라어가 1절의 첫 단어입니다. 마태복음 저자가 매우 즐겨 사용하는 낱말입니다. 이야기의 매끄러운 흐름을 강조합니다. 즉, 바로 앞에 기록된 내용과 긴밀하게 다음 내용이 펼쳐진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관련해서 거듭 강조하고 싶습니다. 성경은 반드시 문맥을 이해해야 합니다. 특정 구절과 단락에 눈이 멈추어서는 안 됩니다. 어떤 위치에서 어떤 흐름을 따라 전하는 말씀인지를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 바로 앞에는 어떤 내용이 담겨 있을까요? 마침 지난 1월 11일 주일예배 때 함께 읽었던 말씀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 받으신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겸손히 요단강에서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성령님께서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하늘에서 내려 오셨습니다. 하늘에서는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아버지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너무나 황홀한 풍경입니다. 이제 본격적으로 사명을 감당할 예수님을 향한 가장 위대한 찬사입니다. 


바로 그 때에, 예수님은 성령에게 이끌리셨습니다. 이미 앞선 세례 장면에서 성령님이 등장하셨기에 자연스러운 연결입니다. 여기까지만 끊어보겠습니다. 익숙한 성경 지식을 내려놓고 낯설게 보시길 바랍니다. 세례 받으시며 화려하게 첫 걸음을 내디디신 예수님이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으셨습니다. 자연히 눈부신 승리와 영광의 무대를 떠올리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1, 2절 함께 읽겠습니다.


1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2 사십 일을 밤낮으로 금식하신 후에 주리신지라


예수님은 세례 받으신 후 광야에서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세례, 광야, 금식, 시험. 이런 단어들이 마태복음을 기록하고 읽는 마태공동체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졌을까요? 네 권의 복음서 중에서 마태복음은 가장 히브리적인 복음서입니다. 구약 성경을 자주 언급합니다. 이 책을 읽는 첫 번째 독자들은 구약에 익숙한 사람들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성경을 토막내어 이해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오늘날과 달리 귀로 듣고 외우는 게 익숙했습니다. 구약 성경 속 중요한 주제어나 장면을 들으면 자연스럽게 긴 맥락을 연상했습니다. 결론적으로 마태공동체는 본문 1, 2절에 묘사된, 광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럽게 출애굽기를 떠올렸습니다.


그들의 조상은 하나님께서 길을 여신 홍해 바다를 건너는 놀라운 구원을 경험하였습니다. 계속 이어 광야를 향한 웅장한 대열을 진행할 것만 같습니다. 눈부신 이적을 계속되길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정반대입니다. 그들은 거친 시련을 겪었습니다. 쓴물을 마주하며 자기들 의 밑바닥을 발견하였습니다. 처절한 한계와 직면하는 시험 을 내내 치렀습니다.


예수님께서 지금 처한 상황이 바로 그러합니다.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광야로 가셔서 사탄의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무려 사십일이나 금식하시고 몸과 마음이 몹시 지쳐있었 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주님이 겪는 고난은 그 한 분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인생의 광야 여정을 지나는 모든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고통을 몸소 짊어지셨습니다. 홍해 이적과 마라의 쓴 물이 공존하는 삶의 현실을 온 몸으로 끌어 안으셨습니다.


시험인가 유혹인가?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누구에 의해 광야로 가셨는지를 유념할 필요가 있습니다. 앞서 확인했듯이 성령님입니다. 성령님은 곧 하나님의 영입니다. 즉, 예수님은 아버지 하나님에 의해 시험 받으셨습니다. 상당히 모순적인 장면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고된 시험으로 몰아넣는 다는 게 얼핏 잘 와닿지 않습니다. 굳이 당신의 아들을 시험해 자질을 검증하려는 것은 논리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런 이유로 ‘시험’이라는 단어 선택에 대한 논란이 분분 합니다. 해당하는 헬라어를 시험 대신 ‘유혹’이라고 번역할 수도 있습니다. 시험의 장소인 광야로 이끄신 분은 하나님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 다가가 악한 손길을 건넨 존재는 하나님이 아닌 마귀입니다. 따라서 마귀의 입장에서 예수님을 ‘유혹’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흥미롭게도 같은 헬라어 단어를 두고, 대한성서공회가 출간한 네 가지 성경이 각각 다르게 옮겼습니다. 우리가 읽은 개역개정성경과 새번역 성경은 ‘시험’으로, 새한글 성 경과 공동번역은 ‘유혹’으로 옮겼습니다. 그만큼 본문에서 예수님이 겪은 일을 쉽게 판단하기 어렵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시험 당하셨을까요? 마귀에게 유혹 당하셨을까요?


결론부터 말씀 드리면 둘 다입니다. 어느 한쪽만 옳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시험당하시며 유혹당하셨습니다. 동시에 유혹당하시며 시험 당하셨습니다. 어떻게 가능할까요? 사탄 역시 하나님의 통치 아래에 있기 때문입니다. 욥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마귀는 감히 하나님과 맞설 수 없는 존재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선 안에서 활동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사탄에게 예수님이 시험을 받도록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왜 그러한 유혹을 감수 하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서 다시 한번 지금 예수님께서 겪는 시험이 단지 그 한 분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인생의 광야를 지나는 모든 사람의 가장 본질적인 고통을 몸소 짊어진 희생입니다.


시험의 내용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마주한 시험 혹은 유혹의 의미를 차근히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마귀는 세 가지 제안으로 주님께 다가와 마음을 흔들었습니다. 먼저 3절 함께 읽겠습니다.


3 시험하는 자가 예수께 나아와서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 님의 아들이어든 명하여 이 돌들로 떡이가 되게 하라


마귀는 먼저 예수님에게 돌을 떡으로 바꾸어 먹으라고 유혹하였습니다. 지금 주님은 사십 일 금식으로 몹시 허기진 상태입니다. 배고픔을 채우고 싶어하는 것은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욕구입니다. 마귀는 그런 연약함을 저격하였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굶주림을 견디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품위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에게는 얼마든지 돌을 떡으로 만들 능력도 있습니다. 즉, 주님의 존엄과 자격에 대한 유혹이기도 합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배고픔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또한 인간을 가장 초라하게 만드는 것 중 하나가 음식입니다. 먹어야 사는 존재에게 먹을 게 없을 때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빠집니다. 또한 그런 처지에 놓인 자기 자신이 너무나 비참하게 보입니다. 그런 ‘굶주림’에서 벗어나고자 어떤 짓이든 하는 게 인간의 본성입니다.


단지 입으로 들어가는 음식만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인간은 여러 종류의 허기를 느끼는 존재입니다. 그 온갖 굶주림을 게걸스레 채우려 합니다. 인정을 받고자 이루 말할 수 없는 추태를 부리기도 합니다. 사랑을 갈구하며 한없이 초라해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영혼 깊은 구멍을 메우고자 안간힘을 씁니다.


다음으로 5~6절 읽겠습니다.


5 이에 마귀가 예수를 거룩한 성으로 데려다가 성전 꼭대 기에 세우고 6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뛰어 내리라 기록되었으되 그가 너를 위하여 그의 사자들을 명하시리니 그들이 손으로 너를 받들어 발이 돌에 부딪치지 않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이번에 마귀는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웁니다. 거기서 뛰어 내려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사탄은 한 걸음 더 교묘한 술책을 씁니다. 시편 91편 11~12절을 인용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천사들이 보호할 거라는 말씀을 가져와 자기 입맛에 맞게 이용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끄떡없을 테니 뛰어보라고 유혹 하였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확인합니다. 성경 문자 자체가 중요한게 아닙니다. 성경 본문이 정말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지를 더욱 귀 기울여야 합니다. 그러지 않을 때, 오히려 악한 세력에 의해 함부로 이용당할 위험이 많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마귀의 두 번째 시험은 하나님을 향한 궁극적인 ‘신뢰’를 도전합니다. 누구나 살아가며 인생의 아찔한 추락을 경험합니다. 그때, 주님의 극적인 개입과 도우심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구해주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자녀들 의 고통에 무감한 듯이 냉랭하게 버려두신 것만 같은 절망에 빠질 때가 많습니다. 그런 하나님을 부여잡고 끌어 당겨 이용하려는 인간의 절박함을 사탄은 집요하게 파고들었습니다.


이어서 8~9절 함께 읽겠습니다.


8 마귀가 또 그를 데리고 지극히 높은 산으로 가서 천하 만국과 그 영광을 보여 9 이르되 만일 내게 엎드려 경배하면 이 모든 것을 네게 주리라


이번에 마귀는 예수님을 지극히 높은 산으로 데리고 올라 갔습니다. 실제 있는 산에 물리적으로 이동했다기 보다는 시각적인 환상으로 보는게 자연스럽습니다. 천하만국이 한눈에 보이는 산은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귀는 온 세계와 그 찬란한 영광을 주님께 보여주며 자기에게 엎드려 경배하라고 합니다. 그렇게 한다면 그 모든 것을 주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역시 우리 삶과 매우 긴밀합니다. 바로 ‘숭배’의 문제입니다. 만약 우리 눈앞에 고대 종교의 신상이 서 있다고 상상해 보겠습니다. 그 앞에 머리 숙여 절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누가 봐도 명백히 우상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사탄은 훨씬 더 교묘한 방식으로 우리를 유혹합니다. 지나치게 많은 돈을 흔들어 댑니다. 과도하게 높은 지위를 우러러보게 만듭니다. 심지어 신앙으로 합리화 하기도 합니다. 대놓고 마귀에게 절을 하지 않을 뿐 인간 내면의 뿌리 깊은 탐욕은 하나님 아닌 다른 무언가를 경배하게 만듭니다.


정리하자면 예수님은 굶주림과 신뢰와 경배, 이 세 가지를 두고 유혹과 시험을 당하셨습니다. 이 역시 예수님께서 광야로 향하신 모습과 마찬가지로, 가나안을 향해 나아갔던 이스라엘의 모습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배고픔을 호소하다가 만나와 메추라기를 먹었습니다. 여러 위기를 겪으며 하나님의 즉각적인 도움을 구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황금으로 만든 소를 비롯해 우상의 유혹에 넘어갔습니다.


이를 통해 더욱 명확히 깨닫습니다. 예수님께서 모든 인간을 대표해 광야로 가셨듯이, 그곳에서 당한 시험 역시 인류의 근원적인 결핍과 고통을 짊어지신 결과입니다.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주님은 우리가 살아가며 겪는 괴로움을 너무나 잘 아십니다. 단순히 머리로 이해하고 넘어가는 정도가 아닙니다. 당신 스스로 치열한 시험을 통과 하셨습니다. 처절한 한계를 직면하고 몸부림치셨습니다.


말씀으로 이기시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사탄의 유혹을 어떻게 이겨내셨을까요? 먼저 4절 함께 읽겠습니다.


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되었으되 사람이 떡 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이어서 7절입니다.

7 예수께서 이르시되 또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마지막으로 10절입니다.

10 이에 예수께서 말씀하시되 사탄아 물러가라 기록되었으되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 하였느니라


시험과 유혹을 대처하는 예수님의 가장 확실한 무기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탄이 속삭일 때마다 주님은 말씀으로 대처하셨습니다. 진리를 선포하시며 거짓을 물리치셨습니다. 말씀만이 자녀를 참으로 일으켜 세웁니다. 오직 말씀을 통해 영혼 깊은 곳을 멍들게 하는 악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있는 굶주림을 채웁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주님을 뒤흔들려는 조급함과 불안을 내려놓고 잠잠히 하나님을 신뢰합니다. 말씀으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 경배하며 탐욕으로 그려낸 거짓 우상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인용하신 성경 구절들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모두 신명기입니다. 신명기 6~8장에 몰려 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모세가 백성에게 했던 설교입니다. 광야 여정을 마치고 이제 가나안 땅에서 새로운 도전을 맞이하게 된 이스라엘을 향한 사랑 어린 권면입니다. 그들이 앞으로 살아갈 낯선 세상에서 올곧게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명심해야 합니다. 떡이 아닌 말씀으로 살아야합니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 하나님만 경배하고 섬겨야 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스라엘 백성만이 아니라 저마다의 광야를 지나 숱한 좌절에 부딪히고 맞서는 모든 사람이 거듭 기억해야 할 생명 의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하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에 담긴 진리를 뻔하게 받아들이지 말고 항상 새롭게 대하며 공부해야 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동시에 말씀 그 자체이신 예수님의 인격을 마음에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분의 존재 자체를 깊이 묵상하며 받아들여야 합니다.


완성하는 승리

시험과 유혹에 맞서 싸운 예수님의 승리는 십자가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주님은 나무에 달려 “내가 목 마르다”라고 신음하며 내뱉으셨습니다. 극한의 굶주림입니다. 몸과 영혼 의 처절한 허기에 시달리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천사들에게 안기실 수도 있었습니다. 온갖 위험과 위협을 극적으로 피할 수 있었습니다. 로마제국 반역범의 사형틀인 십자가를 거부하고 황제의 권력을 경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혹은 또다른 제국을 세우고 그 힘을 숭배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모든 시험을 이겨내셨습니다. 온갖 유혹을 물리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 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광야를 지나는 이들에게 진정한 위로와 희망을 안겨주셨습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정 바라고 의지할 분은 예수님입니다. 주님의 말씀에 진정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분의 삶과 인격을 닮아가기에 힘써야 합니다. 말씀이 이 땅에 오신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만이 저마다의 광야에서 지쳐 쓰려진 우리를 일으켜 세우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만이 진정 살아날 길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영광만이 이 세상의 거짓과 폭력을 이겨낼 참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광야를 지날 때 두려워 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우리는 때로 홍해를 통과하고 광야에 서 있는 이스라엘처럼, 세례 받으시고 광야에서 시험 받으신 예수님처럼 극심한 혼란과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사실 인생의 모든 여정이 다 그러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우리를 시험하시는 까닭은 미워하고 버리셔서가 아닙니다. 좌절을 안기고 무너뜨리려는 게 아닙니다. 그 모두가 진정 하나님의 자녀이며 백성답게 살아가게 하시는 위대하고 놀라운 과정임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중국 역사 가운데 주전 475년에서 221년까지 일곱 개의 제후국이 치열하게 패권을 다투던 시기를 전국시대(戰國時代)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온 나라에 전쟁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 혼란의 시대 한복판에 활동한 사상가 맹자는 다음과 같은 위대한 깨달음을 남깁니다.


"순(舜)임금께서는 밭두둑 가운데에서 농사짓다가 떨쳐 일어나셨고, 부열(傅說)은 성벽 쌓는 일을 하다가 등용되었고, 교격(膠鬲)은 어물과 소금을 팔다가 등용되었고, 관이오 (管夷吾)는 옥에 갇혀 있다가 등용되었고, 손숙오(孫叔敖)는 바닷가에서 살다가 등용되었고, 백리해(百里奚)는 시장에서 등용되었다.


그러므로 하늘이 장차 큰 임무를 어떤 사람에게 내리려 할 적에는 반드시 먼저 그의 마음을 괴롭게 하고 그의 근골을 수고롭게 하며, 그의 몸을 굶주리게 하고 그의 몸을 궁핍하게 하여, 어떤 일을 행함에 그가 하는 일이 뜻대로 되지 않게 하니, 이는 그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그가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게 해주려는 것이다.


사람은 항상 과실이 있은 뒤에 고치니, 마음이 고달프고 생각에 순조롭지 못한 것이 있은 뒤에야 분발하며, 사람들의 낯빛에 드러나고 음성에 나타난 뒤에야 깨닫는다. 나라에 들어가서는 법도 있는 대신의 집안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나라 밖에 나와서는 적국과 외환이 없는 나라는 항상 망한다."


결론적으로 그는 이렇게 문장을 끝맺습니다. 然後 知生於憂患 而死於安樂也


뜻은 이러합니다. “그런 뒤에야 사람은 우환 가운데에서는 살아나고 안락함 가운데에서는 죽는다는 것을 알게 된다.”

<맹자> 告子章句 下, 제 15장 국역출처: 전통문화연구회


광야 여정을 지나는 이들에게 주는 너무나 고귀한 통찰입니다. 나그넷길을 걷는 이들에게 괴로움과 궁핍과 좌절은 피할 수 없는 숙명입니다. 그렇지만 근심과 환난은 결코 우리를 죽일 수 없습니다. 도리어 그 시련을 통해 다가오시는 주님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변화됩니다. 부르심을 따라 하늘의 뜻을 이루며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삶은 우리를 억누릅니다. 여러 모양의 굶주림으로, 서늘한 불신으로, 어지러운 혼란으로 몰아붙입 니다. 광야에 지쳐 주저앉게 합니다. 그럴수록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광야로 이끄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주님께서 이끄셨기에 주님께서 돌보십니다. 거룩한 사명을 맡기십니다. 때로 사탄의 속삭임이 들려오지만 하나님께서 능히 이기게 하십니다. 그분의 말씀이 우리와 영원히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는 한 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의 능력에 힘입어 인생의 모든 시련을 담대하게 이기고 나아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저희는 모두 광야에 서 있습니다. 화려한 승리의 기억도 잠시뿐입니다. 곧 광야의 모레 바람 속에 힘겨워 합니다. 여러 모양의 유혹으로 방황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시험이 주님의 손 안에 있음을 고백합니다. 결국 저희를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답게 만들어 가는 은혜의 여정임을 믿습니다. 사순절, 주님의 고난을 더욱 마음에 새기길 소망합니다. 십자가와 부활의 길에 진정 승리와 소망이 살아 있음을 온전히 깨달아 누리고 전하게 하여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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