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8일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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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18장 “아브라함의 중보”

2025년 12월 19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8장 “아브라함의 중보” 

서아시아의 한낮은 매우 뜨겁습니다. 사람들 대부분 나무 그늘 아래에서 더위를 피합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그 때 멀리서 걸어오는 낯선 남자 셋이 눈에 띄었습니다. 유목민 문화에서 나그네 대접은 매우 중요합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관습 만이 아니라 몸에 밴 섬김을 보여 줍니다. 상당한 규모를 이끄는 족장이지만 굳이 달려나가 몸을 땅에 굽혀 인사 하였습니다. 발 씻을 물을 가져다 주고 음식을 베풀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이 이끄는 일행이었습니다. 어제 읽은 17장에서 할례 의식에 이어 한 번 더, 내년에 분명 사라에게서 아들이 태어날 것을 분명히 알려주기 위한 방문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주님의 깊은 애정을 드러내는 장면이었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명확하게 문장으로 말씀하십니다.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7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

하나님이 말씀 하십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여기서 아브라함 대신에 자기 이름을 넣어보시기 바랍니다. 매우 감격스러운 음성입니다. 아브라함을 주님이 얼마나 극진히 사랑하고 신뢰하는 지를 분명히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하십니다. 바로 소돔 심판입니다. 하나님은 당신께 들려온 부르짖음에 응답하여 그들을 멸하려 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만류합니다. 소돔 땅에 혹시나 50명이 있다면 용서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은 여기서 멈추지 않고 45명, 40명, 30명, 20명, 10명. 이렇게 다섯 번에 걸쳐 집요하게 하나님께 간청하였습니다. 그 결과 마지막으로 의인 열명을 구원의 조건으로 약속 받았습니다.

이러한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부르시고 당신의 뜻을 낱낱이 드러내시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을 사람들이 일방적으로 복종하기 바라지 않으십니다. 피조물인 인간이 주님의 뜻에 의문을 표하고 따져 묻는 것을 얼마든지 이해하고 받아들이십니다. 특히나 그 안에 다른 사람을 향한 애끓는 중보의 마음이 있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바로 여기에서 노아와 아브라함의 차이가 나타납니다. 영국 최고 랍비를 역임한 조너선 색스의 통찰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왜 ‘믿음의 조상’이라는 영예가 훨씬 앞서 존재해 ‘의인’이라고 칭함 받았던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에게 주어졌을까요? 둘 다 ‘심판’ 선고를 전해 들었습니다. 노아는 묵묵히 알겠다고만 하였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사람들을 살리기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서 하나님께 담대히 나아가 간청하였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노아가 잘못했다는 말이 전혀 아닙니다. 노아로서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노아가 아닌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를 통해 당신의 나라를 그려가시는 뜻을 되새겨 보아야 합니다. 19절 말씀과 같이, 그의 후손을 통해 이 땅에 하나님의 정의와 공평을 이루는 게 목적입니다. 

우리의 기도가 아브라함과 같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들이 도무지 이해가 안 될 때, 부당하고 지나쳐 보일 때, 담대히 나아가 당돌히 막아서도 괜찮습니다. 오히려 반가워하시며 기뻐하십니다. 성경 전체에 드러난 주님의 성품이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웃을 살리는 기도, 주위 사람들을 일으키는 손길을 건네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의 모든 섬김을 하나님께서 즐겁게 받으시며 이렇게 말씀하실 줄 믿습니다. “내가 하려는 것을 너에게 숨기겠느냐”


기도
정의와 공평의 주 하나님
소돔 심판 소식을 들은 아브라함의 위대한 중보기도를 말씀 가운데 확인합니다. 인간의 만류와 외침에 기꺼이 반응하시고 귀 기울이시는 주님의 드넓은 품을 발견합니다. 저희 역시 아브라함을 본받아 죽음 앞에 놓인 이들을 위해 중보하며 그들을 사망에서 건지는 일에 최선을 다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사랑받는 자녀로서 믿음의 기도를 드러내길 소망합니다. 저희에게 반드시 이루실 언약을 소망하며 섬김과 나눔의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17일 수요일

창세기 17장 “전능하신 하나님”

2025년 12월 18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7장 “전능하신 하나님” 

어제 읽은 창세기 16장의 마지막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6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이었다.

바로 다음절인 오늘 본문 17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불과 1절 사이에 13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여든 여섯 살이었던 아브람이 구십 구세가 되었습니다. 더욱더 쇠약해진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언약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며 내면에도 깊은 주름살이 잡혔을 겁니다. 그런 아브람을 향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1절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주님께서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이 아브라함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더 큰 상실과 좌절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토록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작 당신이 약속하신 언약을 아직 이루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거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매우 도발적인 반응을 합니다.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습니다. 기쁨으로 짓는 미소가 아닙니다. 쓰디쓴 냉소입니다. 꿈과 기대가 산산이 무너지고 부서진 노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입니다. 그런 까닭에 18절에, 자조적으로 말합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단호하게 내년에 사라가 낳을 이삭을 통해 언약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은 집안 모든 남자와 함께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철저히 무력한 순간입니다. 움직일 수 없이 그저 아파하고 신음할 뿐입니다. 이 상황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너무나 큰 상징과 교훈을 안겨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지극한 무력함을 통해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전능하심은 아브라함의 소원을 마법처럼, 그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즉각 이루는 권능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실망을 끼치고 좌절을 안긴, 철저한 절망과 무능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비참한 모습으로 매달려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마음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굳게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그 전능하심이 지닌 입체성을 성경으로 온전히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때로 너무나 쓰라리고 허무하고 불쾌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주님의 전능은 지극히 무력하고 무능한 얼굴로 나타나는 진리를 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십자가로 드러나신 하나님의 참된 능력이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며 진실로 살릴 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함께 고백하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주 하나님
마치 아브람이 그러하였듯, 저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주님의 얼굴은 때로 너무나 무능하고 무심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저희의 간절한 바람과 소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냉기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저히 무력한 모습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참된 구원은 힘겨운 공백을 통과한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며 겪는 그 어떠한 시련도 담대히 딛고 일어날 힘을 주시옵소서. 저희의 연약한 기대를 넘어서는 주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16일 화요일

창세기 16장 “살피시는 하나님”

2025년 12월 17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6장 “살피시는 하나님” 찬송가 365, 363장

어제 읽은 창세기 15장은 계속된 난임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브람에게 다가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별을 마음에 품고 믿음을 지니고 의롭게 인정받은 아브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성경에 기록된 눈부시게 위대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장인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권유의 따라 이집트 출신 여종 하갈과 동침하였습니다.

분명 칭찬받은 믿음을 지녔으나 여전히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브람을 함부로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런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현실 속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며 우리를 위로합니다. 동시에 그 결과 겪었던 거친 시련 또한 보여 줍니다.

하갈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여주인 하갈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래는 가만히 있지 않고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여기서 ‘학대’에 해당하는 단어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 생활을 묘사할 때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하갈은 너무나 혹독한 핍박을 받고 무거운 배를 잡고 도망칩니다. ‘임산부 도망자’라는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입니다. 

그런 하갈에게 하나님이 다가와 말을 거십니다. 8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쉽게 지나칠 수 있겠지만 너무나 중요한 대화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물론이고 고대 서아시아 문헌에서 신이 여성에게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유일한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이른바 아브라함의 정통 족보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불신앙을 드러낸 행동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하갈에게 다가와 아픔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하갈은 자신이 입은 은혜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역시도 오늘 우리에게는 별거 아닌 장면으로 쉽게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서아시아에서 여성이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행동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하나님과 하갈 사이의 파격적인 만남과 대화를 소개합니다. 주님은 아브람과 그의 아들들만이 아니라 천대받고 학대당한 이방인 여성에게 다가오셔서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살리시려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몸소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모습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러한 희생으로 온 세상을 구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거듭 깨닫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은 기준으로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제한합니다. 심지어 구원과 신앙에 있어서도 함부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밀어내고는 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더욱더 커다란 마음으로 주위에 고통당하는 이들의 신음에 귀 기울이고 안고 보듬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은 바로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기도 가운데 내뱉는 신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이루고 전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저희 삶의 모든 아픔을 살피시는 하나님
임신으로 부푼 배를 부여잡고 도망치는 하갈처럼, 때로 저희도 끝없는 좌절과 절망 가운데 깊이 빠지곤 합니다. 그런 저희의 모든 신음을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믿습니다. 그 사랑에 감긴 무한한 넓이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진심으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받은 은혜를 명심하며 주위에 있는 소외되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건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15일 월요일

창세기 15장 “별처럼 새긴 믿음”

2025년 12월 16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5장 “별처럼 새긴 믿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뿐만이 아니라 아브람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를 알려 주십니다. 바로 하나님게서 그의 방패이자 상급, 즉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들어도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생깁니다. 현재 아브람은 두려운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제 읽은 14장은 그가 거둔 놀라운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 많은 전리품을 챙겼고 살렘왕 멜기세덱의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두려워 하지말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겉으도 드러난 조건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두려워하는 요소들, 이를테면 건강이나 재산에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무얼 두려워 했을까요? 아브람 스스로 답 합니다.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아브람은 곧바로 자기 후계 문제를 두고 이야기 합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예전에 말씀 드린대로 고대에는 신에게 받은 저주로 여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시대 자녀가 없는 집은 입양하여 상속자를 세우는 일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아브람 역시 흔한 풍속을 따라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자녀를 약속하셨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실망과 서운함이 아브람을 비롯한 모든 인류가 품은 두려움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단호하게 말씀 하십니다.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닙니다. 그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그의 상속자입니다. 이런 눈부신 약속을 확실히 아브람의 영혼에 심으시고자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을 가리키며 그의 자손이 별들처럼 셀 수 없이 많을 거라고 알려주십니다. 

그 별들이 아브람의 마음에 하나씩 들어와 박혔습니다. 그의 내면에 영롱한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 빛깔이 하나씩 모여 ‘믿음’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위대한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본문 6절 함께 읽겠습니다.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른바 ‘이신칭의’라는 성경 전체의 가장 위대한 복음을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특히나 바울이 로마서에 인용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서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 그리고 그런 인간의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보석같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첫 번째 대화입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아브람이 묵묵히 경청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아브람의 마음을 덮친 의심과 회의와 좌절이 깊고 깊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낱낱이 토로 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한탄을 하나님은 억누르거나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들으시고 밖으로 이끄시어 별을 보여주시며 그에게 믿음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칭송을 받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심을 통과한 신앙이라는 걸 발견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을 배제하고 현실을 무시하며 억지로 이 앙다물며 외치는 ‘아멘’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두렵고 아프고 괴롭우며 원망과 탄식이 계속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펼치시는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며 잠잠히 믿음을 품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서 의롭게 여기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저마다의 하늘 위에 뜬 별을 바라보며 신앙의 여정을 이어가길 축원 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아브라함의 영혼 깊은 두려움을 보시고, ‘두려워 말라’라고 위로하시는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솔직한 실망과 원망을 담은 진솔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 저희 걸음을 이끄시어 손수 믿음을 아로새겨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참되고 진실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