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28일 목요일

주역(周易) 독서 후기

‘음’(陰)과 ‘양’(陽), 동양인에게 익숙한 개념이다.
자연 이치를 크게 두 가지 속성으로 나누는 방식이다.
양은 긴 한 줄(ㅡ), 음은 짧은 두 줄(- -)로 표기한 것을 가리켜 ‘효’(爻)라고 부른다.
이러한 효를 두 개씩 결합한 것이 체질 분류로 유명한 ‘사상’(四象)이다.
그리고 효를 세 개씩 조합한 것이 ‘팔괘’(八卦)다.
주역은 이러한 팔괘를 각각 ‘상괘’(上卦)와 ‘하괘’(下卦)로 구분한다.
이 둘의 결합으로 (8x8) 64괘를 구성한다.

주역은 각 괘에 대한 풀이를 담은 책이다.
성균관대 이기동 교수님의 번역 위주로 읽었다.
그야말로 겉핡기다.
하나씩 차근히 풀어볼 여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이 책의 심오함을 엿볼 수 있었다.
인생의 복잡다단함을 여실히 담고 있기 때문이다.

주역이 흔한 오해와 달리 단순한 점술서가 아닌 철학서인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삶은 끊임없이 변한다. 고정된 정답은 없다.
음 혹은 양만을 고집할 때 반드시 탈이 생긴다.
상황에 따라 역동적으로 음과 양의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그 중심에 ‘인’(仁)이 있다.
공자가 주역을 즐겨 읽었고, 사서오경에 포함되는 이유다.

결론적으로 주역은 변화무쌍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묵직한 교훈을 준다.
혼란스러울수록 본질을 지켜야 한다고 알려준다.
환경을 탓하기 전에 자신을 바로 세우라고 가르친다.
무엇보다 덕을 베푸는 것을 명심하라고 일깨워준다.

지난 일곱달, 틈틈이 주역을 읽으며 삶은 곧 ‘변화’임을 받아들인 것만으로도 깊은 위안을 받았다.
여유가 생기는 대로 좀더 자세히 공부하고 싶다.
그리고 조금이나마, 변화 가운데 의연한 사람이 되고 싶다.

2022년 7월 20일 수요일

고린도후서 7장 8~16절 “도리어 근심함으로”

2022년 7월 20일, 수,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고린도후서 7장 8~16절 “도리어 근심함으로”

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15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16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근심’과 ‘후회’, 본문의 시작인 8절에서 각각 두 차례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어찌보면 모든 인생은 이 두 낱말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근심하고 후회하며 살아갑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만큼 인간이 무척 어리석고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삶을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항상 뜻한 바대로 인간관계를 끌고갈 수 있는 사람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억지로 자신을 포장할 필요 없습니다. 근심은 사람으로 살아가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입니다. 그런 까닭에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한 사도인 바울 또한 근심했습니다. 자신의 근심을 애써 감추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며 자신의 근심을 솔직하게 있는 그대로 토로하였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바울이 근심하는 이유입니다. 8절을 보면 바울은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한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요? 정확한 사실을 확인하는 건 어렵습니다. 하지만 고린도전후서의 맥락을 통해 대략적인 상황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어제 설교 때 말씀 드린대로,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애정을 가지고 어렵게 개척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많은 문제가 일어났습니다. 특히 바울과 관련해서는 그의 권위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습니다. 그가 이른바, 다른 정통 사도들과는 달리 예수님과 함께 동거동락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지난날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과거로 인해 여전히 의혹의 눈길을 받았습니다. 따라서 바울을 향한 비난과 폄훼가 아직 만연했습니다.

바울로서는 다른 사람들의 힐난은 어느정도 참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나 사랑한 고린도교회 안에서 조차 날카로운 의심의 눈초리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디도를 통해 그들을 꾸짖는 편지를 고린도에 보냈습니다. 

하지만 편지를 보내고 바울은 곧 후회 했습니다. 괜히 고린도교회와 관계가 멀어질 것을 우려 했습니다. 특히나 흥분한 감정으로 쓴 편지였기에 더욱 그러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8절 내용처럼,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했습니다. 괜한 일을 했다며 전전긍긍했습니다. 고린도교인들이 얼마나 마음 상했을지 몰라 전전긍긍했습니다. 어쩌면 다시 볼 수 없을지 모른다며 심하게 자책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디도로부터 뜻밖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놀랍게도 교인들이 바울의 편지를 통해 근심하고 스스로를 돌이켜 회개하였습니다. 염려했던 일과 정 반대였습니다. 예상하지 못한 은혜가 임했습니다. 

많이 들으셨겠지만 성경에서 회개는 단순히 잘못했던 행동을 뉘우치는 차원이 아닙니다. 전적인 방향전환입니다. 사람을 누구나 살던대로 살고 싶어합니다. 육중한 힘의 관성으로 나아갑니다. 따라서 삶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것은 그 자신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의 철저한 개입과 긍휼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교회가 ‘회개’했다는 소식이 바울에게 얼마나 큰 위로를 주었을지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바울은 단순히 자신을 음해하던 사람들이 마음을 바꾼 것으로만 여기지 않았습니다. 고린도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성도를 향한 주님의 초월적인 은혜를 발견했습니다.

그 결과 바울은 근심에 대해 깊은 성찰에 다가갑니다. 10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바울은 근심을 두 가지로 나눕니다. 바로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과 ‘세상 근심’입니다. 세상 근심이 무엇인지 잘 아실 것입니다. 굳이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습니다. 지금도 하고 계실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벗어날 수 없는 숙명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의 유한함을 잘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가지고 강력한 권력을 움켜줘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선망을 받는 인기 스타와 재벌이 각종 기행을 저지르는 이유입니다. 따라서 세상 근심, 더 정확히는 세상살이를 근심하게 하는 인간의 뿌리깊은 공허와 결핍은 사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다릅니다. 고린도교회가 그러하였듯이 혹시 내가 지금 주님에서 멀어져있지 않은지를 두려워하며 살피게 됩니다. 내 감정과 욕심을 진리보다 앞세우지 않았는지를 곰곰이 돌이키게 합니다. 그리하여 마침내 죄의 길에서 전적으로 방향을 돌려 하나님의 품에 안깁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라고 말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근심이 찾아올 때 지나치게 염려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근심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다만 적은 소유나 낮은 지위만을 두고 근심한다면 어리석습니다. 그 모두를 넘어서는 하나님의 풍요와 다스림을 불신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나의 참 실상을 두고 근심하는 사람에게는 복이 있습니다. 그의 내면이 살아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영혼의 감각이 활발하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를 바울은 11절에서 이렇게 나열합니다.

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간절하게 하고, 복음을 변호하여 증거하게 하고 거룩한 분노를 내게 하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사모하게 합니다. 또한 열정을 일으키고 악을 벌하게 합니다. 참된 근심의 결과로 주님 앞에 깨끗하고 정결하게 됩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근심합니다. 삶을 예측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예상하지 못한 시련이 닥쳐오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그런 까닭에 지금 이 시간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신분들이 많이 계실 것입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은혜 또한 예상하지 못하게 찾아옵니다. 그 은혜가 고린도교회에는 근심의 모습으로 임했습니다. 이를 통해 바울은 이루말할 수 없는 회복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내가 무엇을 근심하고 있는지 기도 가운데 차근히 살펴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존재와 다스림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세상 근심을 물리치시길 바랍니다. 사망에 이르게 하는 어리석은 염려와 불안을 말씀을 통해 떨쳐내시길 바랍니다. 그 대신 참된 근심, 복음 가운데 나를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온전한 근심을 통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고린도후서 7장 2~7절 “위로하시는 하나님”

2022년 7월 19일, 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고린도후서 7장 2~7절 “위로하시는 하나님”

2 마음으로 우리를 영접하라 우리는 아무에게도 불의를 행하지 않고 아무에게도 해롭게 하지 않고 아무에게서도 속여 빼앗은 일이 없노라
3 내가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를 정죄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이전에 말하였거니와 너희가 우리 마음에 있어 함께 죽고 함께 살게 하고자 함이라
4 나는 너희를 향하여 담대한 것도 많고 너희를 위하여 자랑하는 것도 많으니 내가 우리의 모든 환난 가운데서도 위로가 가득하고 기쁨이 넘치는도다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삶은 고통입니다. 믿는 자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오히려 믿음 따라 살기 때문에 더욱더 번민합니다. 따라서 복음을 전하며 산다는 것, 복음에 자신의 온 인생을 건다는 것은 고난의 연속입니다. 시련과 절망을 끝없이 마주하게 됩니다. 사도 바울이 그러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본문에서 자신이 겪은 환난에 대해 토로합니다. 5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5 우리가 마게도냐에 이르렀을 때에도 우리 육체가 편하지 못하였고 사방으로 환난을 당하여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이었노라

바울은 여기에서 자신이 ‘사방으로 환난을’ 당했다고 말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한자어 ‘사방’(四方)은 한 사람을 둘러싼 동서남북, 모든 방향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여기에 해당되는 헬라어 원문은 훨씬 더 깊고 넓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사방으로 환난을’이라는 표현을 ‘온갖 종류의 환난’이라고 번역할 수 있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이 한 인간으로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시련을 짊어졌다고 말합니다. 그 결과 밖으로는 다툼을, 안으로는 두려움을 겪었습니다. 사도는 외부적으로는 자신을 적대하는 사람들과 갈등했습니다. 그의 내면은 근심과 불안이 가득했습니다. 환난의 절정을 지나 시련의 심연에서 몸부림쳤습니다.

만약 여기에서 끝났다면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바울은 없습니다. 그가 그저 괴로움에만 몸부림쳤다면 복음 전파는 커다란 한계에 부닥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자신을 덥쳤던 절망을 넘어서는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였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위로입니다. 6절 말씀 다같이 읽겠습니다.

6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하나님께서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진심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그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를 위로하심을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환난 가운데 있는 자녀들을 결코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반드시 위로하십니다.

주목해야할 것은 위로의 방식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기도 가운데 하나님의 직접적인 위로를 경험합니다. 문득 성경 구절 하나가 마음 깊이 다가옵니다. 찬양 가사 한 줄이 내면 깊은 공명을 울립니다. 혹은 주님의 선명한 음성을 들을 때도 있습니다. 이 모든 특별한 경험들은 세상살이에 지친 우리에게 분명 너무나 큰 위로가 됩니다. 그래서 이런 체험을 사모하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함부로 무시하거나 폄훼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위로는 직접적인 만남만이 아님을 명심해야 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가 훨씬 더 많습니다. 주님께서는 곁에 두신 사람들을 통해 당신의 자녀들을 위로 하십니다. 본문 속 바울이 그러합니다. 본문 7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7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본문에서 바울이 고백하는, 자신이 경험한 하나님의 위로는 세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앞서 읽은 6절에 나오듯이 디도의 방문입니다. 두 번째는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로부터 받은 위로입니다. 그 구체적인 내용은 알 수 없습니다. 그렇지만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 호의적인 대우를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 위로는 바로 그런 디도가 고린도교회에 관련해 바울에게 알려준 내용입니다. 바로 그들이 ‘사모함과 애통함과 바울을 위한 열심히 있다’는 사실입니다. 좀더 쉽게 풀면, 고린도교회 교인들이 바울을 몹시 그리워하고 다시 만나길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하나님께로 받은 위로 중 앞의 두 가지는 세 번째 위로이자 결론을 향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이 바울은 그리워 했기 때문에 그와 친밀한 동역자인 디도를 사랑으로 따뜻하게 반겨 주었습니다. 이러한 소식을 가지고 디도가 찾아 왔기에 바울은 자신의 온 몸과 마음을 휘감는 아픔을 딛고 일어날 위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것을 알기 위해 바울과 고린도교회 사이의 특별한 관계를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애정을 가지고 개척한 교회입니다. 하지만 아쉬움을 남기고 교회를 떠나야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는 고린도교회에 대한 많은 그리움이 남았고 기회가 열리는대로 방문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고린도 교회에 대한 안 좋은 이야기들이 바울에게 들려옵니다. 교회 안에 심각한 문제가 많이 발생했습니다. 심지어 바울의 권위를 부정하고 그를 모함하는 사람들이 생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고린도후서 2장 1절에 다음과 같은 아픈 말을 남겼습니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공동번역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 다시는 여러분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싶지 않아서 여러분을 방문하지 않기로 결심했습니다.

바울의 아픔이 느껴지십니까? 그는 고린도교인들이 너무나 보고 싶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만나길 포기했습니다. 그 결과 애써 수고한 자신의 수고가 모두 부정당하는 고통을 겪었습니다. 그의 존재 자체를 뒤흔든 깊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디도가 가져온 고린도교회 소식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나 사람 때문에 힘들어 합니다. 인간 관계는 단순명쾌한 산수가 아닙니다. 고차방정식입니다. 풀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더욱더 혼란에 빠집니다. 나의 지나온 인생 모두가 무너져 내리는 것 같은 고통을 겪기도 합니다. 숨이 턱 막히는 절망속에 주저 앉기도 합니다.

가정 안에서 부모 자녀 사이의 애증, 형제 사이의 시기와 원망으로 힘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학교 안에서의 치열한 경쟁과 친구 사이의 배신으로 깊은 상처를 받았던 분도 계실 것입니다. 일터에서 동료 사이의 갈등과 불화로 어려움 처한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는 때때로 ‘밖으로는 다툼이요 안으로는 두려움’을 겪게 됩니다.

그러나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를 위로하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 위로 가운데 절망을 딛고 일어나 한 걸음 더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 역시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곧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온 세상을 위로 하셨습니다. 디도가 바울에게 위로가 되어 주었습니다. 바울이 또한 우리의 위로가 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위로의 사람으로 자신을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 길은 명확합니다. 바로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기꺼이 희생하고 져줄 때 비로소 살아나고 이기는, 생명의 진리를 되새겨야 합니다. 알량한 자존심을 내려 놓고, 헛된 권위를 벗어 놓고, 어리석은 욕망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렇게 생긴 내면의 여백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고통 가운데 몸 부림치는 신음에 귀를 기울이고 품어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공동체는 평안을 되찾고 낙심한 영혼이 되 살아 나기 때문입니다.

삶은 고통입니다. 그러나 고통만은 아닙니다. 위로가 있습니다. 바로 거기에 희망이 있습니다. 따라서 위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로의 사람으로 세우셨습니다. 그 부르심에 응답하여 받은 은혜를 기쁨으로 전하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022년 7월 19일 화요일

고린도후서 6장 14절 ~ 7장 1절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2022년 7월 18일, 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고린도후서 6장 14절 ~ 7장 1절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성도는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자연스럽게 세상과 섞이게 됩니다. 따라서 결코 세상과 분리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격정적인 어조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16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온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성전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상과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바울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건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성전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성도가 곧,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도는 당연히 우상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대조합니다. 바로 의와 불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입니다. 성전과 우상과 마친가지로 이러한 예시들은 명백히 상극입니다. 결코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제시하기 위한 바울의 첫 문장이 우리의 마음을 복잡하게 합니다. 바로 14절에 기록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입니다. 그러면서 15절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이러한 말씀을 선뜻 동의하십니까? 현실 속에서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설교를 처음 시작하며 말씀 드렸듯이 성도는 이 세상 한복판을 살아갑니다.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물론 세속을 등지고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신앙 수련에만 집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몰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결단을 존중합니다. 분명 이 세상에 유의미한 섬김입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대부분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고 생업에 종사합니다. 이러한 세상살이가 수도생활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이 땅 한 복판에서 치열한 현실과 부딪히며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의 하루하루는 많은 고민을 껴안게 합니다. 신앙 생활은 칼로 무자르듯 단순한 정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 속 바울의 질타와 달리 우리는 때때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합니다. 불신 자들과 교제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과연 잘못일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장 이 자리에도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정말 가까운 사람 중에 아직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거래처 중에 다른 종교에 심취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만남과 사귐이 죄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 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현실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산 속에 숨어 계시지 않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과 어울리셨습니다. 심지어 세리와 창기와 같은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의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한 사귐과 나눔을 통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성도의 현실 자체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바울 역시 복음을 전하며 믿지 않은 여러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려면 마땅히 그들과 어울려야합니다. 오히려 전도를 위해 바람직하고 합당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본문에서 이토록 흥분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처럼 과격하게 세상과의 분리를 강조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에 담긴 바울의 문제의식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정말 자기가 말한 그대로 안 믿는 사람과 일체 교류하지 않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러한 거친 표현을 통해 고린도교회가 자신들의 문제를 명확히 깨우치길 바랐습니다. 그러기 위한 충격요법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편지했던 그 어떤 교회들보다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여러 파벌로 나뉘어져 심각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게다가 가난하고 약한 성도들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나 정작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교회를 일깨우길 원했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안에 모이긴 했지만 주님의 몸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무리를 깨우치길 원했습니다. 그렇기 위해 그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일깨웁니다. 16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전입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갔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화려한 성전 건물이 아닌 연약한 인간이 임재하신다는 말씀은 너무나 놀라운 복음입니다. 

따라서 성전으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함입니다. 본문 7장 1절, 제가 봉독 해 드리겠습니다.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성도는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세상과 분리해 살 수 없습니다. 어떤면에서는 그래서도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어울릴 수 있습니다. 대신 한 가지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 되지는 않지만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선명하게 명심하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거룩함의 방향은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경우 이 구절을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합니다. 열심히 종교생활 하거나 혹은 더럽다고 생각하는 특정 행동들을 하지 않는 차원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결단과 행동도 충분히 유의미합니다. 그러나 본질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전과 대비시키는 존재를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우상’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벨리알’이라는 악마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악마는 결코 하나님과 대등하게 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앞에 즉각 무릎 꿇습니다. 하지만 패잔병의 마지막 발악처럼 분명 실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름을 거명하며 악한 인격의 존재를 상기 시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거룩함의 방향을 온전히 설정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거룩함은 단순히 도덕적인 선행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열정적인 교회 활동만도 아닙니다. 그 둘다 분명 중요합니다. 폄하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더욱더 애쓰고 노력해야 할 것은 우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더욱더 구체적으로는 우상의 가르침과 통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힘의 숭배입니다. 어떻게든 더 많이 움켜쥐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주위에 있는 약한 사람들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런 벨리알과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지고 나누시고 섬김으로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능력인지 보이셨습니다. 무엇이 참된 지혜이고 무엇이 온전한 부요함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하루 이런 주님을 본받아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세상과 분리되지 않지만 분명 구별하여,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2022년 7월 16일 토요일

흉터의 문장 - 류시화

흉터의 문장

- 류시화

흉터는 보여 준다
네가 상처보다 더 큰 존재라는 걸
네가 상처를 이겨 냈음을

흉터는 말해 준다
네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렸는지
그럼에도 네가 살아남았음을

흉터는 물에 지워지지 않는다
네가 한때 상처와 싸웠음을 기억하라고
그러므로 흉터를 부끄러워하지 말라고
그러므로 몸의 온전한 부분을
잘 보호하라고

흉터는 어쩌면
네가 무엇을 통과했는지 상기시키기 위해
스스로에게 화상 입힌 불의 흔적
네가 네 몸에 새긴 이야기
완벽한 기쁨으로 나아가기 위한
완벽한 고통

흉터는 작은 닿음에도 전율하고
숨이 멎는다
상처받은 일을 잊지 말라고
영혼을 더 이상 아픔에 내어 주지 말라고

너의 흉터를 내게 보여 달라
나는 내 흉터를 보여 줄 테니
우리는 생각보다 가까우니까

출처: <꽃샘바람에 흔들린다면 너는 꽃>(수오서재, 202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