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7월 19일 화요일

고린도후서 6장 14절 ~ 7장 1절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2022년 7월 18일, 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고린도후서 6장 14절 ~ 7장 1절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14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17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18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 하셨느니라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성도는 세상 속에 살아갑니다. 자연스럽게 세상과 섞이게 됩니다. 따라서 결코 세상과 분리해서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격정적인 어조로 이렇게 부르짖습니다. 16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하나님께서 임재하는 거룩한 공간입니다. 온 세상과 구별되는 거룩함의 상징입니다. 이러한 성전은 너무나 당연하게도 우상과 정반대에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나아가 바울은 예루살렘에 세워진 건물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 곧 성전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성도가 곧,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거룩한 성전입니다. 그런 까닭에 성도는 당연히 우상과 함께 할 수 없습니다.

이러한 말씀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이 자리에 계신 누구도 거부할 수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은 그 진리를 강조하기 위해 여러 가지를 대조합니다. 바로 의와 불법, 빛과 어둠, 그리스도와 벨리알입니다. 성전과 우상과 마친가지로 이러한 예시들은 명백히 상극입니다. 결코 어울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주장을 제시하기 위한 바울의 첫 문장이 우리의 마음을 복잡하게 합니다. 바로 14절에 기록된 “너희는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입니다. 그러면서 15절을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이러한 말씀을 선뜻 동의하십니까? 현실 속에서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설교를 처음 시작하며 말씀 드렸듯이 성도는 이 세상 한복판을 살아갑니다. 결코 분리되지 않습니다. 물론 세속을 등지고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 신앙 수련에만 집중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깊은 산 속에서 하나님과의 교제에만 몰두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진심으로 존경합니다. 그분들의 헌신과 결단을 존중합니다. 분명 이 세상에 유의미한 섬김입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그렇게 살 수 없습니다. 대부분 가정을 꾸리고 자녀를 양육하고 생업에 종사합니다. 이러한 세상살이가 수도생활보다 결코 열등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이 땅 한 복판에서 치열한 현실과 부딪히며 살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성도의 하루하루는 많은 고민을 껴안게 합니다. 신앙 생활은 칼로 무자르듯 단순한 정답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런 까닭에 본문 속 바울의 질타와 달리 우리는 때때로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합니다. 불신 자들과 교제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과연 잘못일까요?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당장 이 자리에도 믿지 않는 배우자와 결혼하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정말 가까운 사람 중에 아직 복음을 영접하지 않은 친구도 있을 것입니다. 거래처 중에 다른 종교에 심취한 분들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런 만남과 사귐이 죄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다시 강조 합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셔서 현실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리고 산 속에 숨어 계시지 않고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많은 사람과 어울리셨습니다. 심지어 세리와 창기와 같은 그 사회의 가장 밑바닥의 죄인들과 식탁을 함께 하셨습니다. 그러한 사귐과 나눔을 통해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바울은 성도의 현실 자체를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 알 수 있듯이 바울 역시 복음을 전하며 믿지 않은 여러 사람들과 가까이 지냈습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믿지 않는 자들은 우리가 복음을 전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러려면 마땅히 그들과 어울려야합니다. 오히려 전도를 위해 바람직하고 합당한 삶의 태도입니다.


그렇다면 바울이 본문에서 이토록 흥분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이처럼 과격하게 세상과의 분리를 강조한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는 여기에 담긴 바울의 문제의식을 들여다 봐야 합니다. 즉, 바울은 고린도교회가 정말 자기가 말한 그대로 안 믿는 사람과 일체 교류하지 않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러한 거친 표현을 통해 고린도교회가 자신들의 문제를 명확히 깨우치길 바랐습니다. 그러기 위한 충격요법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바울이 편지했던 그 어떤 교회들보다 많은 문제들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여러 파벌로 나뉘어져 심각한 갈등을 겪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성적으로 문란했습니다. 게다가 가난하고 약한 성도들을 존중하지 않고 무시했습니다. 

바울은 그렇게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하나 정작 예수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교회를 일깨우길 원했습니다. 교회라는 이름안에 모이긴 했지만 주님의 몸된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지 못한 무리를 깨우치길 원했습니다. 그렇기 위해 그들의 정체성을 명확하게 일깨웁니다. 16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6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우리는 그리스도의 성전입니다. 이 말씀은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삶을 살아갔던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인 선언입니다. 존귀하신 하나님께서 화려한 성전 건물이 아닌 연약한 인간이 임재하신다는 말씀은 너무나 놀라운 복음입니다. 

따라서 성전으로 살아가는 성도에게 요구되는 덕목이 있습니다. 바로 거룩함입니다. 본문 7장 1절, 제가 봉독 해 드리겠습니다. 

1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성도는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거듭 말씀드리지만 우리는 세상과 분리해 살 수 없습니다. 어떤면에서는 그래서도 안 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얼마든지 어울릴 수 있습니다. 대신 한 가지 명심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과 분리 되지는 않지만 구별된 사람들입니다. 이러한 정체성을 선명하게 명심하며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 거룩함의 방향은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경우 이 구절을 율법주의적으로 해석합니다. 열심히 종교생활 하거나 혹은 더럽다고 생각하는 특정 행동들을 하지 않는 차원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결단과 행동도 충분히 유의미합니다. 그러나 본질은 아닙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도 바울이 성전과 대비시키는 존재를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우상’입니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벨리알’이라는 악마의 이름을 언급합니다. 악마는 결코 하나님과 대등하게 맞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통치 앞에 즉각 무릎 꿇습니다. 하지만 패잔병의 마지막 발악처럼 분명 실체가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그 이름을 거명하며 악한 인격의 존재를 상기 시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거룩함의 방향을 온전히 설정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추구하는 거룩함은 단순히 도덕적인 선행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열정적인 교회 활동만도 아닙니다. 그 둘다 분명 중요합니다. 폄하해서는 안됩니다. 다만 더욱더 애쓰고 노력해야 할 것은 우상을 물리치는 것입니다.

더욱더 구체적으로는 우상의 가르침과 통치를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힘의 숭배입니다. 어떻게든 더 많이 움켜쥐려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주위에 있는 약한 사람들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고 이용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런 벨리알과 정반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낮아지고 나누시고 섬김으로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무엇이 진정한 능력인지 보이셨습니다. 무엇이 참된 지혜이고 무엇이 온전한 부요함인지를 알려주셨습니다. 

오늘 하루 이런 주님을 본받아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는 우리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세상과 분리되지 않지만 분명 구별하여,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이 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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