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7월 23일 일요일

마태복음 22장 34~40절 “가장 큰 계명, 사랑”

포항제일교회 수요기도회, 2023년 7월 19일,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2장 34~40절 “가장 큰 계명, 사랑”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우리 교회 아동부 어린이 한 명이 무더위에 지치고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잠시 이성을 잃고 땅바닥에 있던 못을 주어서 예배당 벽에 이렇게 낙서 했습니다.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

그리고 이 천년이 흘렀습니다. 서기 4023년입니다. 우리교회 예배당이 무너지지 않고 형체를 잘 지킨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세계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2023년 대한민국 포항 기독교인의 생활상을 알기 위해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건물 벽 한쪽에 새겨진, 당시 기준으로는 고대 한국어로 쓴 짧은 문장을 발견합니다. 무엇이죠?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좀 더 상상을 발전시켜 보겠습니다. 그 때 남미 대륙에 사는 한 청년이 자기 시대 언어로 번역한 발굴 기록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아, 이 천년 전에 동아시아에 있었던 한국이라는 나라는 ‘배고파 죽겠다.’라고 괴로워하며 글자를 새길 정도로 무척 굶주리고 가난한 나라였구나!”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못 이해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2023년 대한민국과 4023년 남미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문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저러해서 죽겠다.’라는 국어 표현에는 우리나라의 오랜 아픈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가난과 전쟁과 질병 등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던 험난한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옛 문장에 담긴 이러한 배경을 무시한다면 분명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문자’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화 수단입니다. 하지만 맥락에서 벗어날 경우 뜻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가깝게 지낸 가족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사소한 말실수로 관계가 틀어지곤 합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읽을 때도 분명히 유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금 드린 이야기처럼 동아시아와 남미 사이, 이 천년의 문화와 역사 차이는 필연적으로 의사소통의 오해와 왜곡을 가져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의 경우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에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기준으로 보면 삼국 시대가 막 시작될 때였습니다. 즉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고 주몽이 활을 쏘며 고구려를 세울 때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심지어 구약 성경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너무나 먼 옛날에 기록하고 편집되었습니다. 게다가 고대 서아시아와 유럽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로 적혔습니다. 우리가 가진 한글 성경은 그것을 ‘번역’한 책입니다.


정리하자면 성경은 절대로 하늘로부터 한 순간에 쿵! 하고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과 전혀 다른 전통과 상황 속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성경을 반드시 원전으로만 봐야하고 번역 성경은 무가치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린 성경책을 사랑하고 여기에 담긴 말씀을 날마다 꾸준히 읽으며 바르게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이 ‘언어로서 한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면서 참사람이듯, 성경도 신비로운 모순과 조화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에 대한 이런 기초 상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말씀 전체가 보여주는 커다란 그림과 풍경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 대신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며 무리한 자기 신념을 고집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말씀이 본래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참 멀어져 있습니다. 분노와 증오에 가득차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기 보다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도 성경을 왜곡하며 자신의 어리석은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4~3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22장 15절부터 시작하는 ‘논쟁 단락’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둘러싸여 당신의 권위를 변론하셨습니다. 22장 15~22절은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논란을 들려줍니다. 본문 바로 앞인 23~33절은 부활을 오해한 사두개인들을 논박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그들로서는 평소 대립했던 사두개인들의 논리가 무참히 깨지는 모습을 보며 몹시 통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예수라는 사나이는 몹시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과는 정반대로, 그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완벽히 지키는 것에 전혀 관심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세세한 율법 조항들을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창기와 세리들과 어울리며, 당시 신앙 전통으로 볼 때, 경악스러운 죄를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리새인 중 ‘한 율법사’가 대표선수로 나섰습니다. 주님께 나아가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에서 어느 말씀이 가장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 가장 뜨겁게 토론하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본문 속 율법사의 의도는 정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다는, 답을 듣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예수의 수준과 실력을 만 천하에 드러내 망신 주려는 게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교활한 계략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자무식 나사렛 촌놈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럴듯한 속임수로 무지몽매한 백성을 속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해 깊은 토론을 시작하면 금세 바닥을 드러낼 거라고 율법사는 기대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자칫 어설프게 대답했다가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사람으로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군중들을 열광시킨 주님의 가르침과 비유를 한 순간에 평가절하 할 수 있는 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37~3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먼저 신명기 6장 5절을 언급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지켜야할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전 존재와 온 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면서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그 사이에 있는 “둘째도 그와 같으니”입니다. 이를 통해 이웃 사랑은 앞서 말한 하나님 사랑보다 한 층 낮은 차원이 아니라,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 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웃을 함부로 대한다면그것은 거짓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섬기지 않으면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와 만족에 취한 그릇된 이웃사랑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 모두를 끝맺는, 40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성경의 “강령”(綱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령”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크레만타이>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곧바로 옮기면 “걸려 있다” 혹은 “의존 하다”라는 뜻입니다.

커튼과 커튼 봉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아무리 값비싼 좋은 커튼을 구입한다 할지라도 잘못된 봉에 끼우면 본래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튼튼한 막대기에 제대로 걸려있을 때 비로소 커튼은 커튼다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경 전체의 모든 구절이 기대어 걸려있는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며 중요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이 사실을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은 이른바 <쉐마>이라고 불리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메주자’라고 불리는 작은 상자에 넣어 출입구에 붙여 두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는 구약 성경의 중심입니다. 그 중에서도 19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십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조항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레위기 19장 18절, 한 구절만이 아니라 19장 전체를 인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이웃 사랑은 십계명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랍비 아키바 역시 ‘이웃사랑’이 최고의 율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예수님 말씀은 대단히 신선하고 기상천외한 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그 시대 종교 기득권들에게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정작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진리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샌가 그럴듯한 거짓이 복음을 대신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담백한 진리를 통해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셨습니다.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어찌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운 신앙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침략으로 멸망직전에 이른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열정적인 신앙을 불태웠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입니다. 특별히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사’는 오늘날 신학자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필사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5%도 되지 않았던 그 시절입니다. 실로, 막강한 권위였습니다. 문제는 율법사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의 각종 정결 규정을 100%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특별히 물이 부족한 사막 지대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절대다수의 백성은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어기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약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말씀으로 위로 하기는커녕 함부로 비난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믿음 없는 더러운 사람들이라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의 경건함을 더욱 내세우고 으스대기 일쑤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성경 글자에는 철저히 집착했지만 정작 그 본질인 “사랑”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이용해 그들을 착취하고 억눌렀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마저 왜곡시키며 복음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추악한 죄악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은 종교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말씀의 본질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권위를 함부로 휘두르며 거룩한 소명을 모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는 그럴듯하게 떠들어 댔지만 실상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거창하게 외쳤지만 정작 본인들이 주위 사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굳게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말씀이십니다. 주님은 성경의 핵심에 대해 단지 입술로만 정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본질인 “사랑”을 이 땅에서 직접 살아내셨습니다. 모든 죄인을 살리기 원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의 영원한 증거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복음은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한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찬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크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자 부르심입니다. 이와 같은 소중한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이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성경적으로” 혹은 “성경대로”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정말 귀한 태도입니다. 인간의 연약한 이성과 경험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삶의 방향을 결정하려는 자세는 그 자체로 너무나 훌륭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대로’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정반대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자기 뜻과 욕심을 고집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억지로 들이밀며 그 권위를 훔쳐 휘두르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지식을 자랑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마음 중심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십자가 사랑을 품고 겸손히 그리고 잠잠히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대로’라는 말은 ‘사랑으로’라는 조건과 합할 때 비로소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사랑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탐욕으로 포장한 사랑이 아니라, 참 사랑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러했듯이 거짓을 몰아내고 어둠을 이겨내며 절망에 맞서는, 진리와 빛과 희망의 사랑을 성경을 읽으며 내 삶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긍정하게 합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좌절과 한계를 십자가 그늘 아래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탐욕을 위해 말씀을 이용하려는 바리새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갖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를 믿음으로 분명히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 안에 인간의 실수가 조금도 담겨있지 않거나 모든 내용이 과학이나 역사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놀랍고도 깊은 뜻 가운데 굳이 연약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어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진정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글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죽은 문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으로 변하게 합니다.


성경은 마치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은 분명 창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얼룩과 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그러한 흠결을 보고 창문 자체를 무시하거나 외면 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곤 합니다.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창문 유리 혹은 창틀에만 눈길을 멈추고 거기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문이 있는 까닭은 결코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너머 아름다운 풍경과 햇살을 전해주는 것이 창문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창문의 흠집으로 그 전체 가치를 폄하하지 않습니다. 혹은 유리의 값어치에만 지나치게 몰두하지도 않습니다. 창문 너머의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봅니다.

성경을 대하는 바른 태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비록 상상 속 이야기이지만 4023년에 발견한, 이천년 전 먼 나라에 지어진 예배당의 발굴기록을 읽는 사람은 벽 한 쪽 구석에 있는 작은 낙서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짧은 문장을 두고, 독단적인 이해와 고집으로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 대신 건물 전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배당이 오랜 시간 품어온 따스한 이야기와 존재 목적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천천히 곱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의 문자 혹은 부분적인 내용에 집착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바라보길 기대하십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품으며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새롭게 확인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올바르게 섬기고 사랑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언어를 사용하시어 성경을 기록하시고 우리 손에 전해주신 이유를 다시금 확인하였습니다. 말씀에 담긴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바르게 깨닫고 경험하며 그 뜻 가운데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옵소서.
성경을 왜곡하고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탐욕을 멈추고, 진리 가운데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는 거룩한 습관을 지키며, 그 안에 담긴 놀랍고 풍성한 세계를 맛보고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3년 7월 18일 화요일

사무엘하 6장 12~17절 "마침내 기쁨으로"

포항제일교회 주일예배, 2023년 7월 16일, 목사 정대진
사무엘하 6장 12~17절 "마침내 기쁨으로"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14 다윗이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는데 그 때에 다윗이 베 에봇을 입었더라
15 다윗과 온 이스라엘 족속이 즐거이 환호하며 나팔을 불고 여호와의 궤를 메어오니라
16 여호와의 궤가 다윗 성으로 들어올 때에 사울의 딸 미갈이 창으로 내다보다가 다윗 왕이 여호와 앞에서 뛰놀며 춤추는 것을 보고 심중에 그를 업신여기니라
17 여호와의 궤를 메고 들어가서 다윗이 그것을 위하여 친 장막 가운데 그 준비한 자리에 그것을 두매 다윗이 번제와 화목제를 여호와 앞에 드리니라


다윗이 기뻐합니다. 체면 따윈 아랑곳하지 않고 격렬하게 춤까지 출 정도입니다. 여기서 ‘기쁨’으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사무엘상하와 열왕기상하로 이어지는 긴 이스라엘 역사서에 단 세 번만 나옵니다. 그 모두, 나라 전체를 들썩이게 한 경사를 표현했습니다. 당연하게도 본문에서 기뻐하는 사람은 다윗 혼자가 아닙니다. 온 이스라엘이 함께 즐거워합니다. 마침내 하나님의 궤가 그들 가운데 도착했기 때문입니다. 

나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지고 거리마다 환호성으로 가득했습니다. 그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사람들은 과연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지금, 그들의 감정은 ‘기쁨’이라는 두 글자로 쉽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기쁨 아닌 기쁨입니다. 한 꺼풀만 들춰봐도 그 내면에는 복잡다단한 아픔과 설움이 뒤엉켜 있습니다.

관련해서 ‘베레스웃사’에 대해 기록한, 본문 앞 단락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사건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진노”입니다. 사무엘하 6장 7절 읽겠습니다.

7 여호와 하나님이 웃사가 잘못함으로 말미암아 진노하사 그를 그 곳에서 치시니 그가 거기 하나님의 궤 곁에서 죽으니라

권위적인 아버지가 인상을 찌푸리면 집안 공기가 차가워집니다. 무능한 직장 상사가 열등감에 찌들어 철없이 짜증 부리면 회사 분위기가 무거워집니다. 하물며 하나님께서 화를 내셨습니다. 그것도 매우 격정적으로 분노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의 노여움을 누가 감히 감당할 수 있을까요? 거대한 공포가 이스라엘을 압도하였습니다. 

더욱 절망스러운 점은 그러한 하나님의 진노를 쉽게 납득하기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수레를 끌던 소가 휘청거려 언약궤가 땅에 떨어질 뻔하였습니다. 이 모습을 본 웃사가 하나님의 궤를 얼른 붙잡았습니다. 얼핏 보면 민첩한 대처입니다. 오히려 칭찬받을 행동처럼 보입니다. 하지만 결과는 정반대였습니다. 엄중한 심판이 내려져 그 자리에서 곧바로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 장면이 이해되십니까? 사실 당황스럽습니다. 하나님이 괴팍하고 심술궂어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는 대체 언약궤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을 둘러싸고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를 돌아봐야 합니다.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궤’는 법궤, 언약궤, 증거궤 등으로 다양하게 불립니다. 그 거룩한 상자 안에는 모세가 시내산에서 받은 십계명 돌판과 아론의 지팡이와 만나 항아리가 담겨 있습니다. 그 위를 천사 조각 두 개로 장식 했습니다. 이 자체로 주님의 강력한 임재를 상징합니다.

그런 까닭에 사무엘상 4장에 보면, 이스라엘이 실로 성전에 있었던 법궤를 전쟁터에 가져갔습니다. 법궤와 함께라면 반드시 승리한다고 확신했습니다. 하지만 싸움에서 졌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법궤까지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나라의 존립 자체가 무너지는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입니다. 반면에 블레셋 사람들은 의기양양했습니다. 언약궤를 다곤 신전에 보관했습니다. 의도는 분명합니다. 자기들 신이 이스라엘 신 야훼보다 강하다는 우월감입니다. 그렇지만 정반대로 다곤 신상의 머리와 두 손목이 잘리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블레셋은 놀라서 새 수레를 만들고 소에 메어 언약궤를 벧세메스로 돌려보냈습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벧세메스 사람들이 법궤 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그 죄로 말미암아 커다란 심판을 받았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이스라엘은 마음이 얼어붙었습니다. 주님의 궤를 기럇여아림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으로 옮겼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아비나답의 아들 엘리아살이 ‘거룩하게 구별하여 주님의 궤’를 잘 지켰습니다. 그러자 온 나라에 다시금 온기가 돌았습니다. 그 후 70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습니다. 이렇듯 언약궤에는 이스라엘이 그동안 겪은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있습니다.

이제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기게 되었습니다. 당연하게도 그 실행은 지금까지 하나님의 궤를 훌륭하게 모신 아비나답 가문이 맡았습니다. 그중에서 웃사와 아효가 등장합니다. 성경은 그 둘을 가리켜 ‘아비나답의 아들’이라고 소개합니다. 하지만 정황상 알리아살의 아들, 즉 ‘아비나답의 손자’로 보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 두 사람이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자부심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거기다 어명에 의해 진행하는 국가 행사를 총괄하며 더욱 우쭐거렸습니다. 여기까지는 괜찮습니다. 누구나 충분히 그럴 수 있습니다. 문제는 언약궤 가운데 임재하시는 주님 뜻을 순종하지 않는 데 있습니다. 그들을 욕망에 따라 하나님을 움켜쥐고 이용하려 하였습니다. 먼저 사무엘하 6장 3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3 그들이 하나님의 궤를 새 수레에 싣고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나오는데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와 아효가 그 새 수레를 모니라

웃사와 아효가 하나님의 궤를 새로 만든 수레에 실었습니다. 어디선가 봤던 장면입니다. 바로 블레셋 사람들이 법궤를 벧세메스로 보낼 때 그렇게 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이방인들의 행동입니다. 반면 모세 율법은 이렇게 명령합니다. 

진영을 떠날 때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이 성소와 성소의 모든 기구 덮는 일을 마치거든 고핫 자손들이 와서 멜 것이니라 그러나 성물은 만지지 말라 그들이 죽으리라 회막 물건 중에서 이것들은 고핫 자손이 멜 것이며(민 4:15)

이 규정을 웃사와 아효가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히 아버지로부터 배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사무엘하 6장 2절에 보면 다윗이 하나님의 궤를 ‘메어오려’ 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은 언약궤를 수레에 실어서 몰았습니다. 자기들을 더욱 돋보이려는 야망과 편의를 위한 행동입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사무엘하 6장 4절 보겠습니다.

4 그들이 산에 있는 아비나답의 집에서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올 때에 아효 앞에서 가고

사무엘하 6장에서 언약궤는 총 15번 나옵니다. 대부분 “하나님의 궤” 혹은 “주님의 궤”라고 부르면서 ‘하나님의 임재와 주권’을 강조합니다. 4절에서 다윗이 보낸 사람들이 “하나님의 궤”를 싣고 나왔다고 언급합니다. 반면, 바로 이어서 웃사가 법궤보다 압장 설 때는 유일하게 그냥 “궤”라고만 언급합니다. 

사무엘 역사가의 너무나 의도적이고 냉정한 기록입니다. 즉, 웃사와 아효 형제가 법궤를 단순히 상자로 대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이 언약궤를 거룩한 소명이 아닌, 형식적인 노동의 대상으로 여겼다는 의미입니다. 

결정적으로 사무엘하 6장 6절 보겠습니다. 

6 그들이 나곤의 타작 마당에 이르러서는 소들이 뛰므로 웃사가 손을 들어 하나님의 궤를 붙들었더니<히, 아하쯔>

하나님께서 진노하신 가장 결정적인 원인입니다. 앞서 이 장면이 얼핏 난해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렇지만 지금까지 설명한 맥락을 살펴보면, 여기에 드러난 웃사의 악한 의도가 명확하게 보입니다. 그는 단순히 법궤를 보호하려고 손을 댄 게 아닙니다. 자기 뜻대로 하나님을 움켜쥐려 했습니다. 구약 원문에 이 의미가 생생하게 잘 드러납니다.

6절의 “붙들었더니”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아하쯔>입니다. 이 단어가 등장하는 유명한 창세기 장면이 있습니다. 바로 야곱의 출생입니다. 알시다시피 야곱은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쌍둥이 형과 싸웠습니다. 그러다 에서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창 25:26). 그때, “잡았으므로”라고 옮긴 히브리어 역시 <아하쯔>입니다. 야곱의 일생을 관통하는 몸짓입니다. 성공을 향한 그의 집요한 집착과 치열한 야망을 드러냅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웃사가 법궤를 붙잡은 것은 야곱이 에서의 뒷꿈치를 잡은 모습과 비슷합니다. 게다가 <아하쯔>는 ‘소유로 삼다.’라는 의미를 포함합니다. 앞서 소개한 민수기 4장 15절은 언약궤를 포함한 성물을 두고 “만지지 말라”는 명령도 함께 합니다. 그러면서 “그들이 죽으리라”라고 단호하게 경고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무섭게 윽박지르고 겁주려는 게 아닙니다. 법궤에 함부로 손을 대기 시작하면, 점점 자기의 느낌과 경험으로 익숙하게 여기기 마련입니다. 그러다 보면 나도 모르게 하나님을 감히 소유하려는 어리석은 죄악에 빠지게 됩니다.

웃사와 아효가 그러했습니다. 아주 어릴 때, 혹은 태어나기 전부터 자기 집에 언약궤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버지가 정성스럽게 주님의 궤를 모시는 것을 매일 보고 자랐습니다. 이웃은 물론이고 나라 전체가 우리 가정을 우러러보며 존경합니다. 자라면서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도왔습니다. 그러면서 어느샌가 언약궤가 친숙해 졌습니다. 경외심이 옅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 대신 저 기이한 상자를 통해 더 유명해지고 부유해지고 싶은 탐욕이 커져갔습니다. 

드디어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임금께서 직접 사람들을 보내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하나님의 궤를 모셔 오겠다며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려한 행진을 시작했습니다.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몰려옵니다. 각종 악기가 웅장하게 찬양을 연주합니다. 그 화려한 대열의 중심에서, 웃사는 법궤가 실린 수레를 내려다보며 기세등등했습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상황이 일어났습니다. 얌전하던 소가 나곤의 타작마당에 도착하자 갑자기 몸을 심하게 흔들어 댔습니다. 

순식간에 많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 갑니다. 이대로 계획을 망칠 수 없습니다. “안돼!”라고 외치며 본능적으로 두 팔을 뻗었습니다. 있는 힘껏 법궤를 움켜잡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그를 가차 없이 내리치셨습니다. 그날 그 순간, 웃사가 보인 단 하나의 행동만을 두고 일어난 일이 아닙니다. 오랜 시간 그가 주님을 억지로 붙잡고 마음대로 흔들려 했던 죄악 가득한 태도를 준엄하게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현장에서 주목해야할 또 다른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입니다. 그는 그 자리에서 가장 당황하고 두려워하며 화를 냈습니다. 다윗은 분명 궤를 메어오라고 지시했습니다. 웃사와 아효가 명령을 무시하고 수레에 실었다가 비극이 일어났습니다. 내 말을 잘 들었다면 아무 일 없었을지 모릅니다. 억울하고 원통해 하며 몸을 부르르 떨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냉철하게 물어야 합니다. 그가 정말 아무런 잘못이 없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을 ‘영웅 서사’로 읽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다윗 역시 하나님의 책망을 피할 수 없습니다.  

사무엘하 6장 9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다윗은 무심결에 자기 죄를 실토합니다. 새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다음과 같습니다.

9 그 날 다윗은 이 일 때문에 주님이 무서워서 "이래서야 내가 어떻게 주님의 궤를 내가 있는 곳으로 옮길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람은 누구나 위기 순간에 본심이 나옵니다. 억지로 붙잡은 체면이 무너지고 덜컥 속마음을 말하곤 합니다. 지금 다윗이 그러합니다. 그는 자기가 계획한 이 법궤 행렬의 종착점을 언급합니다. 바로 ‘내가 있는 곳’입니다.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사실이 있습니다. 사무엘하 6장 전반부에서 언약궤의 출발점이 기럇여아림의 다른 이름인 ‘바알레유다’라고 분명히 언급합니다. 하지만 정작 목적지는 나오지 않습니다.

물론 암묵적으로 알고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성 어딘가에 다윗이 준비한 장소입니다. 관련해서 사무엘하 이야기의 흐름을 가운데 5장을 주목해야 합니다. 다윗이 여러 위기를 이겨내고 온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 가장 먼저 한 일이 있습니다. 바로 예루살렘 함락입니다.

예루살렘성은 여부스 사람들이 살았던 매우 견고한 요새입니다. 지금까지 이어오는 이스라엘의 중심지입니다. 나라의 혼란을 끝내고 발전해 나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수도입니다. 그 눈부신 성과에 다윗은 감격하며 벅차 올랐습니다. 자기 이름을 따서, ‘다윗 성’이라고 부르며 자랑스러워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지난날 언약궤를 뺏어가 이스라엘에 수치심을 안긴 블레셋과 싸워 크게 이겼습니다. 승리와 번영의 분위기가 점점 활기차게 움터 올랐습니다. 이제 남은 것은 하나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입니다. 더 이상 아비나답의 집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기필코 예루살렘성으로 모셔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다윗은 온 나라의 힘을 모아 화려한 이벤트를 연출합니다. 먼저 사무엘하 6장 1절을 보면 군사 3만명을 모읍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왜 굳이 3만명일까요? ‘3만’은 지난날 블레셋에게 언약궤를 뺏겼던 전투의 전사자 숫자입니다(삼상 4:10). 지난날 조상들에 의해 무너진 나라의 자존심을 다시 세우는 굉장히 치밀한 연출입니다. 이를 통해 오랫동안 깊게 상처받고 움츠러든 백성의 마음을 치유하기 원했습니다. 주님의 궤를 중심으로 이스라엘이 하나되길 소망했습니다. 임금으로서 너무나 탁월한 판단과 추진력입니다. 어찌보면 무척 당연한 결정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당연하다고 해서 옳은 건 아닙니다. 다윗은 정작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았습니다. 다음 장인 사무엘하 7장에서는 성전 건축을 두고 예언자 나단을 통해 주님의 말씀을 듣고자 했습니다. 그 모습과 비교하면 다윗의 잘못이 더욱더 명확하게 드러납니다. 왜 그랬을까요? 그가 왜 하나님의 궤를 무모하게 옮기는 결정적인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야망에 눈이 가려 조급하고 불안해서입니다. 

다윗은 오랜 도망자 생활 끝에 어렵게 왕위에 올랐습니다. 나라 안팎으로 여전히 많은 위험 요소가 남아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가 하루속히 확보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왕으로서 정통성입니다. 모두가 인정할 상징이 필요합니다. 그게 바로 법궤였습니다. 어떻게든 빨리 법궤를 가져오는 일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웃사와 아효가 자기 명령을 무시하고, 율법을 어긴 것을 뻔히 알고서도 내버려 둔 이유입니다. 

결론적으로 다윗이 지은 죄는 하나님께서 벌하신 웃사와 그리 다를 바 없습니다. 오히려 권력의 최고 정점에 있었기에 훨씬 큰 책임과 잘못이 있습니다. 그 역시 웃사와 마찬가지로 주님을 움켜쥐고 자기 마음대로 이용하려 했습니다. 하나님이 임재 하시는 언약궤의 이동 방법과 시기와 장소를 제멋대로 결정했습니다. 거창한 행사로 야망을 감추려 했습니다. 보기 좋고 듣기 그럴듯한 화려한 명분과 구실은 핑계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 모든 비극의 핵심은 다윗이 권력에 취해 주님을 ‘내가 있는 곳’으로 끌어들이려 한 오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결코 인간에 의해 놀아나지 않으십니다.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영광과 존귀를 당신의 때에, 당신의 방법으로 스스로 이루어 가십니다. 거룩한 진노를 뿜어내셨습니다. 사람들이 가증하게 세운 모든 계획을 무너뜨리셨습니다. 축제를 장례로 바꾸셨습니다. 그 결과, 들떠 올랐던 열기가 차갑게 식었습니다. 이스라엘 전체가 공포에 휩싸였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앞에 그 어떤 누구도 감히 희망을 꿈꾸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득한 절망 속에 허우적거릴 뿐입니다.

그렇게 석 달이 흘렀습니다. 너무나 아프고 쓰린 시간입니다. 이스라엘은 침묵했고, 다윗은 괴로움에 몸부림쳤습니다. 그런 그에게 놀라운 소식이 들려왔습니다. 본문 1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2 어떤 사람이 다윗 왕에게 아뢰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하나님의 궤로 말미암아 오벧에돔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에 복을 주셨다 한지라 다윗이 가서 하나님의 궤를 기쁨으로 메고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으로 올라갈새

언약궤를 대신 맡아 보관하던 오벧에돔과 그의 온 집에 주님께서 복을 주셨습니다. 이와 관련해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정보는 제한적입니다. 분명 좋은 소식인 건 맞지만 다윗과 이스라엘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로 다가왔는지 아주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허물과 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이제는 당신의 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겨도 좋다는 분명한 계시입니다. 

그러자 다윗이 기뻐했습니다. 온 이스라엘이 함께 즐겁게 환호했습니다. 마침내 기쁨으로 예배드렸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질문을 기억하십니까? 그때, 그들의 감정과 표정은 과연 어떠했을까요? 기쁨이란 한 단어로 표현하기 힘든, 기쁨 아닌 기쁨입니다. 서러운 통곡과 좌절과 신음과 분노를 거쳐 피운 웃음과 미소입니다.

우리가 늘 마음에 새겨야 할, 성경에 기록된 가장 극적인 예배 장면입니다. 순도 100% 기쁨으로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저마다 근심과 슬픔을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마음속 어딘가에 흉터를 안고 예배하러 나아옵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품어 안으시고 놀라운 사랑으로 돌보시는 복음을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고난 가운데에도 마침내 기뻐하며 말씀과 찬양과 기도로 오직 주님만을 높이는 것이 곧 참된 예배임을 내면 깊이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본문은 온전한 예배 가운데 있었던 중요한 장면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13절입니다.

13 여호와의 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히, 짜아드>을 가매 다윗이 소와 살진 송아지로 제사를 드리고

다윗은 베레스웃사의 죄악을 반복하지 않았습니다. 그때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우선 주님의 궤를 율법에 따라 사람들 어깨에 메게 하였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재촉하지 않았습니다. 조급해하며 얼른 움직이라고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대신 여섯 걸음 뒤에 제사, 즉 예배 드렸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걸음’은 히브리어로 <짜아드>입니다. 구약에서 그리 자주 나오지 않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유래한 단어가 사무엘하 5장 24절에서 앞서 나가시는 주님의 걸음 소리를 묘사하는 데 사용되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예배 가운데 새롭게 깨달아야 할 삶의 태도를 알려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걸음에 내 발걸음을 맞추는 것입니다. 이 세상은 우리를 불안하게 하고 부추깁니다. 더 빨리 더 멀리 쉬지 말고 달려가라고 합니다. 기쁨을 잃어버리게 하는 중요한 원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남들보다 느리고 때로는 멈춰 있어도 괜찮습니다. 중요한 것은 주님의 보폭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점검하고 돌이키며 바로잡으며 진정한 기쁨을 회복하는 것이 곧 예배라는 사실을 거듭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속 예배의 중심에 언약궤가 놓여 있습니다. 그 모습이 어떠했을까요? 처음 만들었을 때는 황금으로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분명 눈부시게 아름답고 찬란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쟁터에서 블레셋에게 뺏기고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곳곳에 흠집이 생겼습니다. 여기저기 벗겨지고 갈라지고 뒤틀렸습니다. 때때로 비바람을 맞고 모래 먼지를 뒤집어썼을 것입니다. 어쩌면 어느 소년 병사의 검붉은 핏방울이 눈물 자국처럼 묻어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하지만 분명 사람들이 함부로 손을 댈 수 없었던 탓에 낡고 상한 모습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언약궤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살아가며 겪은 온갖 시련과 아픔에 함께 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히려 더 큰 위로와 희망을 안겨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저 멀리 하늘 위에 찬란한 영광 가운데 머물지 않으셨습니다. 참 사람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갖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많은 무리가 각자 원하는 욕망에 따라 예수님을 붙잡고 거세게 흔들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묵묵히 자기 길을 걸으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인생의 수많은 공포에 짓눌리며 눈물짓고 근심하는 모든 이들에게 참된 기쁨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만이 이 세상에 유일하게 예배받으실 분이심을 믿습니다. 거친 현실을 넘어 지치고 상처 입은 몸으로 우리를 품어 안으신 주님만이 우리 삶과 예배의 중심이십니다. 예수님의 걸음을 따라 걸으며, 하나님을 움켜쥐고 끌어당기려는 어리석은 욕심을 내려놓고, 마침내, 기쁨으로 예배하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참으로 예배받기 합당하신 주 하나님.
때때로 저희는 웃사와 아효처럼, 그리고 다윗처럼 주님을 움켜쥐려고 합니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내 욕망이 바라는 길로 하나님을 끌어당기곤 합니다. 어리석음과 연약함을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전쟁터와 우상의 신당을 나뒹굴며 생긴 수없이 많은 흠집으로 예루살렘에 도착한 언약궤처럼, 상하고 지친 모습으로 저희 가운데 오신 예수님만이 예배의 중심임을 고백합니다. 세상살이의 그 어떤 고달픔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마침내 기쁨으로 예배하게 하옵소서. 성공을 향한 조급함과 실패에 대한 불안함을 내려놓고 주님의 걸음에 저희 걸음을 맞추게 하옵소서.
심판을 넘어서는 위대한 사랑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3년 6월 15일 목요일

첫 책, "하나님의 이름들, 그 맥락과 의미"(좋은씨앗) 출간






마침내 저의 (공식적인) 첫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작년 4월, 출판사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고 어렵게 집필하며 보낸 지난 시간이 먹먹하게 스쳐갑니다.
오랫동안 작가를 꿈꾸고, 어설프게 흉내를 내다가 마침내 제 책을 손에 쥐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정보는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한번 살펴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아낌없는 격려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위기보다 더 큰 위기”

2023년 6월 14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위기보다 더 큰 위기”

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5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본문 1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 아, 슬프다. 어찌하여 금이 빛을 잃고, 어찌하여 순금이 변하고, 성전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흩어졌는가?

예언자는 무심한 듯 툭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유다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충격적인 사건이 짧지만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바로 성전 파괴입니다. 늠름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할 성전의 벽돌들이 산산이 무너져 저잣거리에 널 부러져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침략이 지금까지 겪었던 외적의 침입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한 종교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믿고 있는 세계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전을 통해 주님이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머무시는 온 우주를 경험했습니다. 그러한 성전이 바벨론 군대의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그때 유다 사람들이 겪었던 충격과 공포는 현대인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입니다. 삶을 지탱해온 모든 세계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믿고 의지할 단 한 줌의 희망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전 파괴’라는 결정적인 재난의 종지부를 찍기 전에 이미 끔찍한 재난이 예루살렘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바로 ‘굶주림’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역사적 배경은 느부갓네살이 지휘한 바벨론 군대가 주전 587년 1월부터 18개월동안 진행한 포위 작전입니다. 무려 1년 6개월입니다. 봉쇄당한 채로 지내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긴 시간입니다. 극심한 궁핍이 성안을 휘몰아쳤습니다.

그때 유다가 겪은 굶주림이 얼마나 컸냐면 고대 사회의 견고한 신분질서를 무너뜨릴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문은 생생히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7~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 사람이 겪는 가장 비극적인 죽음은 아사(餓死), 즉 ‘굶어 죽는 것’입니다. 예언자 또한 차라리 칼에 찔려 죽는게 배고파 죽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부했던 예루살렘에서 몇 사람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극심한 굶주림에 몸부림 쳤습니다. 뽀얀 살결을 자랑했던 귀족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포동포동했던 살갗이 막대기처럼 말랐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경험하는 끔찍한 비극입니다. 예레미야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이 와중에 옳고 그름을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우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어깨를 마주해야 합니다. 서로 좋게좋게 토닥여야 합니다. 비록 갑싼 자기연민일지라도 함께 울며 보듬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험난한 위기 속에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냉철하게 진리를 분별했습니다. 올곧은 진실을 전했습니다. 설령 그것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심지어 자신을 위협할지라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6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예언자는 서슬퍼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소돔’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아실겁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도시 이름입니다. 끔찍한 죄악으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곳입니다. 상징성이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더 무겁다고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가뜩이나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위당해 두려워 떨었던 유다 백성들로서는 너무나 불쾌한 헛소리였습니다. 예언자를 향해 격분해 달려들어도 할 말이 없는 망발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레미야가 어떤 핍박을 겪을지 그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예루살렘의 죄악을 지적한 근거가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 3~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희생과 사랑은 천륜입니다. 심지어 들개들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굶주려도 새끼들에게 빈젖이라도 물렸습니다. 하지만 유다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배고파 울부짖는 자녀들을 내팽개치고 자기 배만 채우려 했습니다. 심지어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극악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예언자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은 잔인하기만 하구나”

위기가 누군가의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평소 말끔한 행색과 교양 있는 몸가짐을 한다 할지라도 어려움에 닥쳤을 때, 인격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민족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성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자 소름끼치는 잔인함을 드러납니다. 율법에 담긴 섬김과 나눔의 정신과 정반대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기는커녕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시련은 강한 외적의 침입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 주위를 꽁꽁 에워싸는게 아닙니다. 몇 날 며칠 배고픔이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약자를 돌보지 않는, 그들의 비루한 인격과 거짓 신앙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기 이전에 그 처참한 내면세계과 죄악으로 인해 남유다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둔한 마음이 애써 부정하고 진리를 외면했을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절망 속에 처절히 몸부림 칠 때 오히려 희망이 있습니다. 내 추악한 실상을 마주하는 고통 가운데 다시 시작할 길이 열립니다. 내 더러운 죄악과 직면할 때 비로소 참으로 새로워지는 생명의 씨앗이 싹터옵니다. 본문 6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6 예전에는 저 소돔 성이 사람이 손을 대지 않아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내 백성의 도성이 지은 죄가 소돔이 지은 죄보다 크구나.

다시 말씀 드립니다. “내 백성의 도성이 지은 죄가 소돔이 지은 죄보다 크구나”라는 예언자의 노래는 유다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허무하고 비참하게 숨을 거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침내 살아 남았습니다. 쓰라린 진리가 마침내 달콤한 거짓을 이겨냈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며 삶의 방향을 되돌리는 이들을 향해 비추는 은혜의 물결이 온 세상에 흘러넘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복음을 생생하게 증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돔과 나와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해,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너무나 괴롭고 불편한 진실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를 살리는 진정한 생명과 희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우리의 전 존재를 넉넉히 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과 동행하며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이자 백성답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55~66절 "깊고 깊은 구덩이에서"

2023년 6월 13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애가 3장 55~66절 "깊고 깊은 구덩이에서"

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60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61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63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64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심히 깊은 구덩이’, 이 세 단어가 예언자가 처한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가장 낮은 구덩이’입니다. 금방 연상하는 장면이 있으실 겁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시골 마을 우물에 빠져 울다가 어른들이 꺼내준 경험 혹은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책과 뉴스에서 구덩이가 끔찍한 사건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혹은 조직폭력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깊은 구덩이는 그 자체로 극심한 공포를 안겨줍니다. 깜깜한 암흑, 축축한 벽의 질감, 정체 모를 벌레가 윙윙거리며 내는 소리, 그 모든 게 심장을 조여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어떻게든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구덩이는 이 땅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공간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어제 읽은 53, 54절은 예언자가 놓은 상황을 더욱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대적자들이 그를 구덩이에 넣은 것으로 모자라서 돌을 던졌습니다. 여기서 돌이, 구약 원문에는 ‘단수’ 즉, 한 개로 적혀 있습니다. 아마도 구덩이에서 나올 수 없게 막아놓은 커다란 돌덩이로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안에는 머리까지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라는 본문의 첫 구절은 그 자체로 너무나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애가 전체의 주제와 구조로 볼 때 더욱 강렬한 울림을 줍니다. 애가는 바벨론 침략에 의해 남유다가 겪은 참상을 다룹니다. 온 민족이 겪은 처참한 고난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참상을 매우 정교한 운율에 따라 노래하였습니다. 전체 다섯 장 중에서 1, 2, 4, 5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숫자에 맞춰 모두 22절입니다. 그런데 가운데 있는 3장은 여기에 3을 곱한 66절입니다. 형식 자체가 예레미야애가 전체에서 3장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단락입니다. 즉, 애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갑자기 초점이 예언자 한 사람에게로 좁아집니다. 온 민족 누구나 예외 없는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비탄을 노래합니다. 그러다가 제일 결정적인 대목에서 ‘나의 아픔’을 토로합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4장과 5장에서 예루살렘성을 비롯한 민족 전체로 시야가 확대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전체가 겪는 어려움 속에서 개개인을 주목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개인’이라는 존재가 발견된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옛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겪는 고난에 대해, 적어도 오늘날처럼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가령 외적의 침입으로 마을이 몰살된다면, 그곳에 사는 한 사람은 피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모두가 겪은 슬픔을 두고, 그것도 왕족이나 귀족인 아닌 평범한 사람이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오래전 사람들에게는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언자는 남유다가 예루살렘 성전과 함께 파멸되는 고통을 노래 하는 와중에 자기가 빠졌던 깊은 구덩이를 이야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께서는 지금 내가 신음하며 흘리는 눈물을 거대한 강물의 한 부분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하나를 함께 아파하며 들어다보십니다. 예언자는 그 사랑을 신뢰했습니다. 그 가운데 자기 아픔에만 집착하지 않고 온 백성을 향한 주님의 뜻과 마음을 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깊고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지는 않으십니까? 예레미야처럼 매우 심각한 공포는 아닐 수 있습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까마득한 어두운 구덩이 빠져, 물이 머리까지 차고 돌덩이가 머리 위로 막히는 경험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질병, 돈, 가족 간의 불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정말 죽을 것만 같은 순간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당신의 이름을 불렀던 한 사람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본문 56~5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이 넉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56 '살려 주십시오. 못들은 체 하지 마시고, 건져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57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58 주님, 주님께서 내 원한을 풀어 주시고, 내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59 주님, 주님께서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을 보셨으니, 내게 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울부짖으며 간구하는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가까이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원초적인 복음을 신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한 복음이지만 막상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는 구덩이 속을 지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고즈넉한 호숫가나, 푸르른 평야만을 지난다면 의심할 필요없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적어도 평평한 길만 무던히 걸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깊고 깊은 수렁 속에 몰아놓고, 거기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를 향해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때로는 서운한 게 사실입니다. 솔직히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복음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어두운 수렁에 잠기셨습니다. 십자가는 높이 들린 구덩이입니다. 예수님은 죽임당하시어 암흑으로 가득한 동굴 무덤에 누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지금도 저마다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한 위대한 희망의 선언입니다. 

오늘 하루, 이 생명의 복음을 더욱 마음 깊이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물이 목 위로 차오르는 순간을 지납니다. 그 섬뜩한 냉기가 온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합니다. 빛 한 줌 들어 오지 않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무서움에 떨고는 합니다. 머리 위를 가로막은 육중한 돌덩이가 이제는 다 끝났다고,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올곧게 따르는 이들에게 그 모든 흑암을 뛰어넘는 희망의 빛줄기가 가득히 비쳐옴을 믿습니다.

본문 55~57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55 주님, 그 깊디 깊은 구덩이 밑바닥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56 '살려 주십시오. 못들은 체 하지 마시고, 건져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57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