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7월 21일 월요일

사도행전 16장 19~32절 "주 예수를 믿으라"

2025년 7월 21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16장 19~32절 "주 예수를 믿으라"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24 그가 이러한 명령을 받아 그들을 깊은 옥에 가두고 그 발을 차꼬에 든든히 채웠더니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27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칼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28 바울이 크게 소리 질러 이르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29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 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엎드리고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32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하나님의 촉촉한 은혜를 사모하여, 황량한 마음을 안고 이 자리에 나아오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한 가지 질문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고백하기에 이 새벽에 잠을 깨우고 예배당에 왔고, 예수님을 나의 구세주로 믿기에 그분의 이름으로 기도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너무나 뻔하고 당연하게 들리는, 주 예수를 믿는 믿음이 지닌 무게와 질감을 본문 말씀을 통해 묵직하고 거칠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사도행전 16장 1절부터 시작하는 이야기 흐름과 긴밀하게 이어집니다. 바울은 원래 소아시아에 선교하려 하였으나 성령님에 의해 길이 막혔습니다. 그러다 밤에 환상 중에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는 마케도니아 사람의 모습을 보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 뜻에 순종하여 네압볼리를 거쳐 빌립보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역설을 발견합니다. 주님께서 지시하신 곳을 향해 내 의지를 꺾고 나아갔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편하고 즐거운 순간을 맞이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그곳에서 예상 밖의 시련과 고난을 연거푸 겪습니다.

사도행전 16장 16~18절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16 우리가 기도하는 곳에 가다가 점치는 귀신 들린 여종 하나를 만나니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 17 그가 바울과 우리를 따라와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들은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 하며 18 이같이 여러 날을 하는지라 바울이 심히 괴로워하여 돌이켜 그 귀신에게 이르되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내가 네게 명하노니 그에게서 나오라 하니 귀신이 즉시 나오니라

어느 날 바울과 실라는 기도하러 가는 길에 “점치는 귀신들린 한 여종”을 만납니다. 그 여인은 우리 주변에서 흔히 보는 무속인이 아닙니다. 자기 뜻대로 점을 치고 복채를 받지 않습니다. 너무나 안타깝게도 ‘노예’입니다. 그녀가 행하는 점술의 실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악한 이들이 그녀의 능력을 알아보고 소유하여 돈벌이로 삼았습니다. 16절의 “점으로 그 주인들에게 큰 이익을 주는 자라”라는 기록은 누군가를 향한, 성경에 나오는 가장 슬픈 소개입니다.

그런 그녀가 바울 일행을 보고, “지극히 높은 하나님의 종으로서 구원의 길을 너희에게 전하는 자”라며 목소리 높여 외칩니다. 이런 일이 며칠 동안 반복되었습니다. 그러자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하여 그 가련한 여인을 사로잡았던 귀신을 쫓아내었습니다. 누가 봐도 칭찬받아 마땅한 선하고 옳은 일입니다. 그렇지만 현실은 호락호락하지 않습니다. 뜻밖의 시련이 바울을 덮쳤습니다. 조금 길지만, 본문 19~23절 함께 읽겠습니다.

19 여종의 주인들은 자기 수익의 소망이 끊어진 것을 보고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장터로 관리들에게 끌어 갔다가 20 상관들 앞에 데리고 가서 말하되 이 사람들이 유대인인데 우리 성을 심히 요란하게 하여 21 로마 사람인 우리가 받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할 풍속을 전한다 하거늘 22 무리가 일제히 일어나 고발하니 상관들이 옷을 찢어 벗기고 매로 치라 하여 23 많이 친 후에 옥에 가두고 간수에게 명하여 든든히 지키라 하니

여종의 주인들이 바울과 실라를 붙잡아 치안을 담당하는 관원들에게 끌고 갔습니다. 그들이 위험한 사상을 전파한다며, 자기들 속내를 감추고 고발하였습니다. 그러자 관리들은 바울에게 심한 매질을 하고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돈을 숭배하는 인간의 욕망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 지를 확인합니다. 한 여인이 귀신 들려 정신과 의지가 속박당한 채 살아가는 것은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당연히 많은 관심과 도움을 받아야 할 안타까운 처지입니다. 하지만 그가 귀신으로 인해 점을 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이용해 돈 벌 생각만 할 뿐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종이 귀신으로부터 벗어나게 된 것은 주인들에게는 암담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젠 더 이상 부당하게 얻은 많은 돈을 챙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본문에 등장하는 익명의 주인들은 한마디로 돈을 구원으로 믿고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돈을 향한 욕망에 사로잡힌 채 다른 사람의 존엄과 아픔 따위에는 전혀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자신들의 수입을 가로막은 바울에게 노골적으로 적개심을 품으며 로마 제국의 사법 당국에 넘겨버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또 다른 무언가를 구원으로 믿고 여기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로 빌립보 감옥의 교도관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로마 제국 공무원입니다. 로마 질서와 가치관을 철저히 따르는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는 황제를 믿고 의지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지배 이념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그리스 신화 속의 “제우스”와 “포세이돈”을 비롯한 강력한 신들을 “구세주”로 불렀습니다. 로마 황제 역시 그들과 같은 권력으로 백성을 보호하고 돌보는 구세주로 선전하였습니다. 이러한 사회구조 속에서 그 간수는 로마 제국 질서의 한 위치를 굳게 지키며, 황제로 대표되는 강력한 힘과 풍요를 구원으로 여겼습니다. 

그런 그에게 중대한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자신이 근무하고 있던 감옥에 웬 이교도 둘이 잡혀 왔습니다. 그들은 제국이 허락하지 않은 불법 종교를 전파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게다가 그 내용은 로마 반역범으로 처형당한 이스라엘 시골 갈릴리 사람 예수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난 진정한 주님이라는 지극히 불온한 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로마 황제의 통치를 전면으로 부정하는 위험 세력입니다. 따라서 그 교도관은 명령 받은대로 깊은 감옥에 바울과 실라를 가두고, 발에 차꼬를 단단히 채웠습니다. 위대한 로마 제국의 떠받드는 일꾼으로서 맡은 일을 든든히 수행하였습니다. 자기 역할과 신념을 견고하게 지켰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게 뒤흔들리는 사건이 일어납니다. 25~26절 함께 읽겠습니다.

25 한밤중에 바울과 실라가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매 죄수들이 듣더라 26 이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감옥에 갇힌 바울과 실라가 한밤 중에 기도하고 하나님을 찬송하였습니다. 그러자 갑자기 큰 지진이 나서 감옥이 흔들리고 문이 열렸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죄수들을 묶어뒀던 수갑과 차꼬가 풀어졌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떻게 판단했을까요? 당연히 죄수들이 이 기회를 틈타 달아났을 거라고 짐작했습니다. 그것은 곧 교도관으로서 치명적인 업무상 과실입니다. 사형에 처해도 할 말 없는 엄중한 중죄입니다. 그런 까닭에 간수는 스스로 목숨을 끊을 것을 다짐하고 실행에 옮기려 하였습니다. 로마 제국을 향한 그의 확고한 신념을 명확히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러자 바울은 큰 소리를 질러 그의 행동을 제지 합니다. 모든 죄수가 다 제자리에 있다며 안심시켰습니다. 그 소리를 들은 교도관은 등불을 들고 달려가 바울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 순간 둘의 관계는 완전히 역전되었습니다. 이제 바울은 더 이상 그에게 로마 반역범이 아니라 진리를 알고 전하는 참된 예언자입니다. 따라서 그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30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0 그들을 데리고 나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하거늘

지진과 함께 몸도 마음도 함께 흔들린 간수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 그는 불과 조금 전까지 황제를 구세주로 믿었습니다. 제국이 보장하는 안전과 그가 베푸는 빵을 구원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그날 겪은 충격적인 사건을 통해 자신이 그동안 당연하게 여겼던 구원이 더 이상 구원이 아님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견고하게 쌓아 올린 세계관이 모두 무너졌습니다. 자기 앞에 죄수로 붙잡혀 있던 그들이 복음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따라서 화려하고 웅장한 로마 문명도 답을 주지 못했던, 오랫동안 가슴에 품은 질문을 건넵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바울은 이렇게 답합니다. 31절 함께 읽겠습니다.

31 이르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 하고

사랑하는 여러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나와 우리 가정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길은, 오직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어쩌면 너무나 당연하고 뻔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바울이 살았던 시대, “구원”의 깊이는 결코 얕지 않습니다. 그 당시 ‘구원’은 단지 종교적 의미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사람의 삶에 구체적인 영향을 미치는 통치 개념에 더 가깝습니다.

귀신 들린 여종을 착취했던 주인들에게는 돈이 구원이었습니다. 로마 질서 안에서 기득권을 누린 사람들에게는 제국의 힘과 풍요가 구원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는 것이 진정한 구원이라고 외칩니다. 십자가의 희생과 고난이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나 초라하고 비참하게 보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는 세상을 구원하는 부활을 여는 은혜의 열쇠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복음의 생생한 핵심입니다.

부디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구원의 범위는 절대로 영혼에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구원의 영역은 결코 내세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우리의 온 몸과 마음은 물론이고 현세와 내세 그리고 온 세계와 우주를 아우르는 다스림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길은 오직, 십자가와 부활을 온 인격과 전존재로 살아내신 예수님께만 있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을 믿고 전하는 삶은 좀 더 낮아지고 비우는 섬김을 뜻합니다. 그 길을 향해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를 부르시고 계십니다. 이와 같은 부르심에 응답하여 바울처럼 예수님을 본받아, 삶의 여러 시련과 고난을 묵묵히 이겨내며 복음을 전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꺼낸 질문을 다시 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때로 귀신 들린 여종을 노예 삼았던 사람들처럼 많은 돈이 손짓하는 유혹에 흔들리곤 합니다. 어떨 때는 강한 권력과 높은 지위에 마음이 뺏길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만이 진정 온 세상의 주님이심을 이시간 거듭, 마음 깊이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다른 무엇이 아닌 그 놀라운 희생과 사랑을 삶의 견고한 기준과 토대로 삼으시길 바랍니다. 그런 나 자신과 우리 가정을 주님께서 참으로 구원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
온 세상을 다스리시고 구원하시는 주 하나님
귀신 들린 여종의 고통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었던 사람들에게서 저희의 어리석은 탐욕을 발견합니다. 제국의 질서에 충실하게 복종했던 어느 한 간수에게서 권력 앞에 흔들리고 선망했던 저희의 우매함을 깨닫습니다. 
오직, 죄인을 위해 고난 당하시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우주의 참된 주님이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을 받으시어 진정한 구원의 길로 이끌어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도, 이 놀라운 생명의 복음을 바울처럼, 그윽한 삶의 향기로 힘써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7월 17일 목요일

신명기 19장 1~10절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2025년 7월 17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신명기 19장 1~10절 “죽음의 땅에서 생명의 땅으로”

1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여러 민족을 멸절하시고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 땅을 네게 주시므로 네가 그것을 받고 그들의 성읍과 가옥에 거주할 때에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에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4 살인자가 그리로 도피하여 살 만한 경우는 이러하니 곧 누구든지 본래 원한이 없이 부지중에 그의 이웃을 죽인 일,
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6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7 그러므로 내가 네게 명령하기를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라 하노라
8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네 지경을 넓혀 네 조상들에게 주리라고 말씀하신 땅을 다 네게 주실 때
9 또 너희가 오늘 내가 너희에게 명하는 이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항상 그의 길로 행할 때에는 이 셋 외에 세 성읍을 더하여
10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에서 무죄한 피를 흘리지 말라 이같이 하면 그의 피가 네게로 돌아가지 아니하리라


장마철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위로를 사모하며 기도의 자리로 모인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구약 성경을 보다 폭넓게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중요한 개념 중 하나는 바로 “땅”입니다. 구약에서 땅은 단순한 지형지물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땅은 태초부터 변하지 않고 사람들과 가장 가까이 존재하는 거룩한 피조물입니다. 또한 땅은 백성이 하나님의 통치를 구현할 가장 기초적인 삶의 터전입니다. 특별히 가나안 땅은 주님께서 당신의 구원을 이루시기 위해 약속하시고 선물하신 곳입니다. 따라서 땅의 고결한 의미를 탐욕으로 변질시키지 말라는 것이 성경의 일관적인 가르침입니다.

이런 맥락에 따르면 구약에 나오는 살인 금지는 곧, 땅을 피로 더럽히지 말라는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기록된 최초의 살인자인 가인을 향해 꾸짖으신 말씀은 그러한 땅과 피의 역동적인 관계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창세기 4장 10~12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0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 11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12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는 십계명 제 6계명에서 “살인하지 말라”라고 엄중히 명령하셨습니다. 가나안 땅에서 당신 뜻을 새롭게 이룰 이스라엘이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할 말씀입니다. 이러한 주님의 의지를 더욱 확고히 드러내는 율법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 기록된 “도피성”입니다. 도피성에 대한 규례는 본문 외에도 민수기 35장 9~34절과 여호수아 20장 1~9절에 무려 두 번이나 더 언급됩니다. 그만큼 이 제도는 이스라엘을 통해 이루실 하나님 나라의 성격을 확고하게 규정하는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본문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 가운데에서 세 성읍을 너를 위하여 구별하고 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 전체를 세 구역으로 나누어 길을 닦고 모든 살인자를 그 성읍으로 도피하게 하라

도피성 규례의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요단강을 기준으로 동편과 서편에 각각 세 곳의 도피성을 정하셨습니다. 그 여섯 도피성의 위치는 이스라엘 전역에 고르게 흩어져 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길도 넓게 닦여 있어서 누구든 쉽게 접근할 수 있습니다. 백성 중 의도치 않게 실수로 누군가의 목숨을 잃게 한 사람이 거기로 도망쳐 안전히 숨게 하였습니다.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본문은 보다 명확한 이해를 위해, 일상에서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생생한 예를 들어 설명합니다. 5절 제가 읽겠습니다.

5 가령 사람이 그 이웃과 함께 벌목하러 삼림에 들어가서 손에 도끼를 들고 벌목하려고 찍을 때에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그의 이웃을 맞춰 그를 죽게 함과 같은 것이라 이런 사람은 그 성읍 중 하나로 도피하여 생명을 보존할 것이니라

어떤 사람이 이웃과 함께 숲에 나무를 베러 가서 도끼질한 경우를 가정해 보겠습니다. 안타깝게도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날이 자루에서 빠져 곁에 있는 사람을 그만 숨 지게 했습니다. 이 때 그는 전혀 살인을 의도하지도 계획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산업현장에서 비슷한 사건이 간혹 일어나곤 합니다. 엄연히 실수이고 사고입니다.

하지만 세상사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 앞에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사고를 저지른 당사자는 결백하다고 말할지라도 피해자 가족의 심정은 다르기 마련입니다. 순순히 사실을 받아들이고 용서한다면 다행입니다. 하지만 아무런 목격자가 없다면 당연히 가해자의 속내를 의심하게 됩니다. 그러다 도무지 억누르지 못한 분노에 휩싸여 보복하려는 상황을 충분히 예상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복수하려는 유가족으로 말미암아 또 다시 땅을 피로 더럽히지 않도록 도피성을 정하셨습니다. 6절 함께 읽겠습니다.

6 그 사람이 그에게 본래 원한이 없으니 죽이기에 합당하지 아니하나 두렵건대 그 피를 보복하는 자의 마음이 복수심에 불타서 살인자를 뒤쫓는데 그 가는 길이 멀면 그를 따라 잡아 죽일까 하노라

모세는 실수로 살인자가 된 사람을 향한, 복수심에 불타올라 뒤쫓는 사람을 언급합니다. 그를 가리켜 “그 피를 보복하는 자”라고 부릅니다. 그는 1차적으로는 피해자의 가족들을 가리킵니다. 그런데 최근 연구는 그들에 의해 고용된 살인 청부업자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그만큼 복수는 치밀하고 집요 합니다. 많은 영화와 드라마의 주제가 ‘복수’인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거창하진 않더라도 복수심에 불타올라 불미스러운 일이 생긴 경우를 주위에서 종종 목격합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세심한 제도 장치를 통해 더 이상 억울한 피 흘림이 없게 하셨습니다. 사고에 의해 억울하게 살인자가 된 사람을 보호할, 든든한 도피성을 마련하셨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묵상해 보면 이 도피성 제도에 담긴 하나님의 더욱 깊은 사랑을 발견합니다. 이 율법은 단지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그 한 사람만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원한에 사로잡혀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 살인을 자행할 지 모르는, 피해자의 가족들을 죄의 유혹에서 지켜주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피가 피를 부르는 악순환을 끊고, 죽음의 저주가 아닌 생명의 질서를 이스라엘 가운데 굳건하게 세우시려는 주님의 단호한 의지입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도피성을 통해 더 이상 땅이 피로 얼룩지지 않고 생명을 싹 틔우는 세상을 이루길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의 탐욕은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외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조차 분노의 노예가 되어 살기 어린 눈빛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그 적개심의 방향은 시간이 흐르며 점차 하나의 흐름을 이루어갔습니다. 그 결과, 진리를 외친 수많은 예언자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희생의 정점입니다. 주님은 억울하게 피 흘린 사람들의 대표입니다. 참 하나님이시지만 몸소 참 인간이 되신 예수님은 이 세상의 광기 어린 분노에 둘러싸였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결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의 고통과 무관한, 허공 위의 존재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우리의 모든 눈물과 아픔에 함께 하십니다.

그렇게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가 위대한 부활 생명을 안겨주었습니다. 십자가는 온 우주 가운데 가장 찬란한, 참된 도피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안에 용서받지 못할 사람은 없습니다. 그 어떤 살인자도, 그 어떤 죄인도 진정한 도피성인 십자가 그늘 아래 쉼과 평안을 누린다는 진리를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와 부활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믿고 따른다면, 피의 보복이 아닌 생명의 질서를 일구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먼저 분명히 다짐해야 할 것은 살인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가운데 형법적 의미로서 살인을 했거나 할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살인의 의미를 더욱 넓게 풀어 설명하셨습니다. 마태복음 5장 21절과 22절 상반부를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이어서 요한1서 3장 15절에서 함께 읽겠습니다.

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예수님과 사도 요한은 ‘살인’의 정확한 의미를 보다 넓고 깊게 알려줍니다. 바로 ‘미움’입니다. 물론,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가 항상 원만할 수는 없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싫어하는 사람도 생기기 마련입니다. 어찌 보면 이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렇지만 누군가를 “미워”하는 것은 다른 문제입니다. 그 안에는 상대를 향한 적개심이 담기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날마다 내면 속 미움을 덜어내기 위해 자신을 늘 살펴야 합니다.

그것은 내 의지와 노력으로는 불가능합니다. 죄인인 나를 위해 죽임 당하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무궁무진한 사랑을 가슴 깊이 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합니다. 내가 얼마나 놀라운 용서를 받았는 지 진심으로 고백하는 사람은, 비록 고되고 힘들지만 다른 사람을 향한 용서의 여정을 걸어갑니다. 용서는 내 신앙을 점검하는 가장 분명한 기준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주기도와 비유를 통해 끊임없이 용서를 가르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누군가의 ‘도피성’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가혹한 현실을 견뎌내는 사람들의 시원한 그늘이 되어야 합니다. 온갖 멸시를 겪는 사람들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을 경험한 사람들의 청량한 샘물이 되어야 합니다. 그 길은 분명합니다. 바로 십자가가 알려주는 바와 같이 끊임없이 자신을 낮추고 비우고 섬기는 것입니다. 

주어진 힘을 휘두르고 사는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이 기대어 쉴 여백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어리석은 열등감을 감추려, 내면에 공허하게 쌓아 올린 허상을 지워내야 합니다. 복음 안에서 자신을 참으로 마주하고 품어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삶의 여러 위협으로부터 숨을 헐떡이며 도망쳐온 누군가를 지켜 보호 할 수 있는 도피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비록 그 길이 험하고 지칠 지라도 우리 주님께서 몸소 앞서 가셨음을 명심하며 날마다 새 힘을 얻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저마다 주어진 삶의 자리를 피로 얼룩지우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씨앗을 파종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신실한 사랑의 주 하나님
분노와 복수의 악순환을 끊어내기 위해 도피성을 세우신 놀랍고 위대한 뜻을 마음에 새깁니다. 십자가에 올라 온 우주의 진정한 도피성이 되신 예수님의 복음을 품고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사랑과 용서를 실천하며 주위 사람들에게 쉼과 평안을 주는 도피성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7월 12일 토요일

순조롭게 되고 있어

 

“순조롭게 되고 있어”

초등학교 1학년 아들이 뜻밖의 한자어를 사용했다. 어느 책에서, 혹은 어느 동영상을 보고 따라 한 건지 모르겠다. 어쨌든 아빠로서 뿌듯하면서 뭉클했다. 인하가 선물 받은 나노 블록을 조립하는 중에 한 말이다. 굳이 나를 앞에 앉혔다. 혼자서 하기 어렵다고 했다. 여기서 ‘어렵다’라는 의미는 사실 절반만 맞다. 블록 조각을 끼우는 건 어린아이의 작은 손으로도 충분히 가능하다. 문제는 잘못 끼웠을 때다. 아직 여린 손으로 빼내기 어렵다. 그 ‘수정’을 위해 큼지막한 손을 가진 아빠를 맞은편에 두었다.

제법 고된 역할이었다. 촘촘하게 조립된 블록 조각을 분해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결국 손에 상처도 입었다. 그 대신 아들은 조금씩 블록을 완성하는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밴드로 감싼 엄지손가락의 미세한 통증을 느끼며 아들에게 물었다. “잘 되고 있어?” 그러자 인하가 내게 대답했다. “응, 순조롭게 되고 있어.”

블록 조립을 시작하며 내게 했던 “어렵다”라는 말처럼, “순조롭다.”도 절반의 진실을 담고 있다. 엄밀히 말해 순조롭지 않았다. 중간중간 설명서와 다른 위치에 블록을 끼웠다가 빼내는 걸 반복했다. 만약 도와주는 아빠가 곁에 없었다면 완성을 포기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다. ‘순조로움’의 밑바탕에 기꺼이 상처를 감수하며 기쁘게 돕는 아빠의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삶 속 한 조각이라도 순조롭게 도울 수 있다는 건 참으로 행복한 일이다. 내 인생 또한 알게 모르게 어긋난 숱한 순간을 바로 잡아준 많은 이들 덕분에 지금껏 ‘순조롭게’ 이어져 왔음을 고백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의 그 어떤 실패와 좌절도 새롭게 하시며 마침내 순조롭게 하시기 위한 사랑임을 불쑥 깨닫는다.

완성한 블록을 뿌듯한 표정으로 내게 보여준 아들에게 나 또한 나직이, 순간 먹먹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해 주었다.

“맞아, 순조롭게 되고 있어.”

2025년 6월 20일 금요일

사도행전 10장 34~48절 “부분을 넘어서는 복음”

2025년 6월 20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10장 34~48절 “부분을 넘어서는 복음”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36 만유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46 이는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 높임을 들음이러라
47 이에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요 하고
48 명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라 하니라 그들이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니라


폭우가 쏟아지는 날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 새벽을 깨우고 기도의 자리로 모인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10장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유대교의 울타리를 뛰어넘어 온 세계로 향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만남을 소개합니다. 바로 로마 장교 고넬료와 사도 베드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서로 전혀 알지 못했던 두 사람에게 각각 신비로운 방식으로 다가오셔서 그 둘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이러한 만남을 통해 베드로가 깨달은 진리를 결론적으로 요약합니다. 34~35절에 함께 읽겠습니다.

34 베드로가 입을 열어 말하되 내가 참으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시고 35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

이 때,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아니하신다.’에 해당되는 신약 원문은 ‘하나님은 사람을 부분적으로 보지 않으신다.’로 직역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사람의 외모” 혹은 “부분”은 직접적으로 민족을 가리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오랫동안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난 자신들만이 하나님으로부터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었습니다. 이러한 신념이 그들 신앙의 핵심이자 전부였습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부분적으로 보지 않으신다.”라는 베드로의 성찰은 우리에게 너무나 큰 깨달음을 안겨 줍니다. 인간이 보기에 전부라고 여기는 것이 실상 얼마나 협소한 인식의 결과인지를 알게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모든 아집과 오만을 내려놓고 온 우주와 진리의 참된 전부이신 주님을 더욱 믿고 의지해야 합니다. 


이렇듯 베드로는 고넬료와 신비로운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에 대해 보다 넓고 깊게 이해하였습니다. 그 깨달음을 가지고 고넬료의 가족과 친구들에게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본문 37~43절입니다. 이 일곱 절은 사도행전을 지은 누가가 쓴, 누가복음의 요약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예수님의 복음이 선명하고 구체적으로 잘 정리 돼 있습니다.

동시에 이 말씀은 고넬료와 마찬가지로 이방인인 우리가 거듭 귀 기울여야할 복음의 핵심을 잘 담고 있습니다. 오늘 시간 되시면 다시 한번 차근히 소리 내어 읽어보시길 권하고 싶습니다. 먼저 37~38절 함께 읽겠습니다.

37 곧 요한이 그 세례를 반포한 후에 갈릴리에서 시작하여 온 유대에 두루 전파된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 38 하나님이 나사렛 예수에게 성령과 능력을 기름 붓듯 하셨으매 그가 두루 다니시며 선한 일을 행하시고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고치셨으니 이는 하나님이 함께 하셨음이라

베드로는 먼저 세례자 요한의 활동을 소개합니다. 그런 다음 예수님의 사역을 정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부어주신 성령과 능력을 바탕으로 선한 일을 하였습니다. 그 선한 일이 무엇일까요? 바로 마귀에게 눌린 모든 사람을 위한 치유입니다. 주님은 유대인이나 남자나 부자나 권력자만을 위해, 혹은 당신과 친하고 도움이 되는 사람들만을 고치지 않으셨습니다. 모든 억압으로부터, 모든 사람을 살리셨습니다. 협소한 기준으로 아무도 차별하지 않고 참된 해방을 안겨 주셨습니다. 이어서 39~41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9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40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41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이어서 베드로는 복음의 핵심인,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해 말씀합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증인”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을 비롯한 사도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은 목격한 증인이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증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이어지는 42~43절에 기록된 사명과 연결됩니다. 42, 43절 함께 읽겠습니다.

42 우리에게 명하사 백성에게 전도하되 하나님이 살아 있는 자와 죽은 자의 재판장으로 정하신 자가 곧 이 사람인 것을 증언하게 하셨고 43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니라

증인의 가장 중요한 사명은 무엇일까요? 바로 “증언”입니다. 인간의 좁은 편견이 얼마나 어리석은 지를 깨달았다면,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참으로 마주했다면, 이 복음 안에 담긴 하나님의 무궁한 뜻을 고백한다면, 주님의 명령에 따라 그분의 권능과 구원을 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와 같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으십니까? 우리는 비록 그분을 직접 보지는 못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일관된 기록을 통해 주님께서 이 땅 위에서 행하신 삶과 가르침을 발견합니다. 그 안에 담긴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구원과 사랑을 느낍니다. 이것은 단지 옛날 어느 훌륭한 한 성인의 업적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을 진정 살리고 회복시키는 참 생명의 진리입니다.

따라서 베드로를 비롯한 복음의 증인은 자신의 온 삶을 다해 복음을 증언하였습니다. 또한 시대 시대마다 증인들의 증언은 온갖 위험 속에서도 계속 이어져 왔고 마침내 오늘날 우리에게 까지 전해져 왔습니다.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것과 그것을 증언하는 것은 곧 같은 의미입니다. 믿기만 하고 전하지 않는 다는 것은 모순이며, 그 믿음이 건강하지 않음을 드러내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겸손과 지혜로, 삶을 드려 날마다 복음을 전하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이처럼 베드로가 고넬료와 그의 가족, 친구들에게 예수님을 소개하였을 때, 그들에게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44~45절 함께 읽겠습니다.

44 베드로가 이 말을 할 때에 성령이 말씀 듣는 모든 사람에게 내려오시니 45 베드로와 함께 온 할례 받은 신자들이 이방인들에게도 성령 부어 주심으로 말미암아 놀라니

베드로로부터 복음을 전해들은 모든 사람에게 성령님께서 임재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2장에 기록된 오순절 사건이 여기서 반복되었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로마 출신 혹은 로마 문화권 소속입니다. 그런 그들이 유대 사람인 베드로와 그 무리가 알아들을 수 있는 외국어를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이방 언어로 하나님을 높이는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졌습니다.

이러한 장면은 구원이 분명 유대인의 혈통을 넘어선다는 진리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그 전까지 절대로 그럴리 없다고 믿었던, 고넬료와 같은 이방인들에게도 주님이 뻗으시는 능력의 손길이 제한 없이 미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알려 줍니다. 따라서 베드로는 감격하며 그들을 교회 공동체로 받아들이는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내용을 통해 성령 충만의 진정한 의미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이신 성령님을 내면 가득히 모시는 “성령 충만”은 모든 그리스도인이 간절히 구하고 사모해야 할 일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성령 충만에 대한 오해입니다. 그것은 굉장히 신비롭고 특별한 체험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성령 충만은 본질적으로 온갖 경계를 넘어서는 용기를 의미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이 중요한 근거입니다. 성령께서는 인간이 오랫동안 사로잡혔던 모든 편견과 고정관념과 차별과 멸시를 무너뜨리고, 참된 섬김의 공동체를 이루어 가십니다. 따라서 우리가 그러한 성령님의 충만한 임재를 구한다면 마땅히 다른 사람을 외적인 조건으로 평가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학벌과 주거환경과 연봉 등의 유치한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존재 자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품고 섬기는 것이야말로 성경이 말하는 진정한 성령의 기름 부으심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성령님의 임재 가운데 생겨난 교회 공동체는 세례를 통해 믿음을 함께 고백하고, 이 세상과 전혀 다른 포용과 나눔을 꾸준히 실천해야 합니다. 교회의 교회 됨은 결코 크기나 규모에 있지 않습니다. 그 교회 안에 얼마나 힘 있고 유명한 사람들이 모이는지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아무리 소득이 달라도, 아무리 살아온 환경과 여건이 다르다 할지라도 서로 주저 없이 하나 되어 한 몸을 이루며 화합하는 결단에 달려 있습니다.

부디 우리 승리교회가 지금껏 그러했듯이 참으로 더욱 성령 충만한 공동체가 되길 원합니다. 이를 위해 하나님의 눈길을 닮아가며 다른 누군가의 부분이 아닌 전체를 바라보길 소망합니다. 그리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더욱 온전히 이해하고 전하는, 증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진심으로 바라며 축원합니다.

기도
만유의 주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사람들이 움켜쥐는 일부분을 넘어 온 우주를 덮는 전체를 향하고 있음을 말씀을 통해 거듭 발견합니다.
하나님의 드넓은 뜻 앞에 날마다 겸손히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복음을 들은 증인으로서 마땅히 증언하는 복음 전도의 사명을 다짐합니다.
또한 인간의 어리석고 편협한 기준을 넘어서는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누리고 전하는, 참된 성령 충만을 이루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6월 16일 월요일

사도행전 10장 17~33절 "마침내 만나다"

2025년 6월 16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10장 17~33절 "마침내 만나다"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21 베드로가 내려가 그 사람들을 보고 이르되 내가 곧 너희가 찾는 사람인데 너희가 무슨 일로 왔느냐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대
23 베드로가 불러 들여 유숙하게 하니라 이튿날 일어나 그들과 함께 갈새 욥바에서 온 어떤 형제들도 함께 가니라
24 이튿날 가이사랴에 들어가니 고넬료가 그의 친척과 가까운 친구들을 모아 기다리더니
25 마침 베드로가 들어올 때에 고넬료가 맞아 발 앞에 엎드리어 절하니
26 베드로가 일으켜 이르되 일어서라 나도 사람이라 하고
27 더불어 말하며 들어가 여러 사람이 모인 것을 보고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29 부름을 사양하지 아니하고 왔노라 묻노니 무슨 일로 나를 불렀느냐
30 고넬료가 이르되 내가 나흘 전 이맘때까지 내 집에서 제 구 시 기도를 하는데 갑자기 한 사람이 빛난 옷을 입고 내 앞에 서서
31 말하되 고넬료야 하나님이 네 기도를 들으시고 네 구제를 기억하셨으니
32 사람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그가 바닷가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느니라 하시기로
33 내가 곧 당신에게 사람을 보내었는데 오셨으니 잘하였나이다 이제 우리는 주께서 당신에게 명하신 모든 것을 듣고자 하여 다 하나님 앞에 있나이다


이른 새벽 주님께 나아온 성도님들께 하나님의 청량한 은혜가 풍성하시길 축복합니다.

사도행전 10장은 바울의 회심에 이어 베드로 역시 온 세상을 향한 선교에 눈을 뜨는 결정적인 사건을 소개합니다. 본문 바로 앞에 있는 1~16절에서 베드로는 여전히 유대교의 제한적 인식으로 복음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새로운 진리를 발견하게 하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가이사랴 주둔 부대에서 근무하고 있던 로마 장교 고넬료입니다. 그는 로마 군인이었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며 많은 구제와 기도를 이어가는 경건한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그는 아직 예수님을 알지 못한 채 구약에만 의존한, 반쪽짜리 신앙 생활을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이 두 사람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베드로와 고넬료 모두,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드넓은 복음의 지평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뜻을 펼치기 위해 하나님은 베드로에게 환상을 보여주셨습니다. 고넬료가 보낸 부하들이 그에게 향하는 중에 베드로는 율법 전통에 따라 한낮임에도 지붕에 올라 기도를 하였습니다. 

그 때, 하늘로부터 커다란 그릇이 내려왔습니다. 거기에는 율법에 금지된 먹을거리들이 잔뜩 담겨 있었습니다. 이어서, 그것을 잡아먹으라는 명령이 내려졌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말씀이 무려 세 번이나 반복되었음에도 베드로는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익숙했던 기존 진리와 전혀 다른, 새롭고 낯선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오늘 본문 말씀은 그러한 환상을 본 이후 어리둥절해 있던 베드로에게 일어난 일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17~18절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17 베드로가 본 바 환상이 무슨 뜻인지 속으로 의아해 하더니 마침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시몬의 집을 찾아 문 밖에 서서 18 불러 묻되 베드로라 하는 시몬이 여기 유숙하느냐 하거늘

그는 방금 자기가 본 계시의 의미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어서 계속 그 뜻을 고민하였습니다. 마침 그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베드로가 신세 지고 있던 시몬의 집 문 밖에 서서 그를 찾았습니다. 

얼핏 보면 이 장면을 별거 아닌 모습으로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당히 긴장감 넘치는 상황입니다. 본문에서 자세하게 언급하진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이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은 그의 부하인 로마 군사들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반면 베드로는 로마 입장에서는 반란 세력입니다. 제국의 질서를 거부하여 끝내 반역법으로 극형을 당한 예수를 여전히 추종하였습니다. 그를 “주님”으로 부르며 위험한 사상을 퍼뜨리고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베드로를 찾으러 로마 군인들이 도착했을 때, 주변 분위기는 싸늘하게 식었을 겁니다. 주변 모든 사람은 물론이고 그 자신도 체포를 위해 왔다고 짐작했을 것입니다. 너무나 불편하고 불쾌한 만남입니다. 그런 베드로를 성령님께서 안심시키셨습니다. 19~20절 함께 읽겠습니다. 

19 베드로가 그 환상에 대하여 생각할 때에 성령께서 그에게 말씀하시되 두 사람이 너를 찾으니 20 일어나 내려가 의심하지 말고 함께 가라 내가 그들을 보내었느니라 하시니

성령님께서는 고넬료의 부하들을 당신께서 보내셨다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심하지 말고 그들과 함께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베드로는 그 말씀에 용기를 얻었습니다. 고넬료의 부하들에게 그들이 찾는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밝히며 대체 무슨 일로 왔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전혀 뜻 밖의 말을 하였습니다. 22절 제가 읽겠습니다.

22 그들이 대답하되 백부장 고넬료는 의인이요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이라 유대 온 족속이 칭찬하더니 그가 거룩한 천사의 지시를 받아 당신을 그 집으로 청하여 말을 들으려 하느니라 한 대

그들은 자신들의 지휘관인 고넬료를 이렇게 소개합니다. 그는 우선 의인으로서 로마의 우상이 아닌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훌륭한 신앙과 인품으로 온 유다 백성에게 칭찬받았습니다. 그런 그에게 천사가 나타나 베드로가 신세지고 있는 집의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습니다. 사도를 모셔와 말씀을 듣도록 시켰다고 부하들이 대신 전해 주었습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그들을 따라가 마침내 고넬료와 마주하였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뭔가 범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본래 유대인은 이방인들과 가깝게 지내는 것이 금지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전적인 섭리 가운데 자신이 고넬료의 가족과 함께 있게 된 상황을 돌아보았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앞서 지붕에서 기도하며 환상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28절 제가 읽겠습니다. 

28 이르되 유대인으로서 이방인과 교제하며 가까이 하는 것이 위법인 줄은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께서 내게 지시하사 아무도 속되다 하거나 깨끗하지 않다 하지 말라 하시기로

하나님께서는 율법에 금지된 음식을 먹지 않는 베드로에게 15절에서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처음에는 이것이 단순히 먹을 것에 대한 말씀인 줄로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고넬료와의 극적인 만남을 통해 그 환상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은 율법 안에서 단지 음식 조항 만을 가리키지 않습니다. 그 모두를 넘어 사람들이 함부로 깨끗하거나 부정하다고 판단했던 모든 영역을 가리킵니다. 더욱 직접적으로 아브라함의 혈통을 타고나지 않은 이방인들은 저주 받은 더러운 존재가 아닙니다. 그들 역시 하나님의 사랑을 입어 예수님의 구원에 참여할 수 있다는 진리를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 이러한 복음의 내용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들립니다. 하지만 그 시대 성도에게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계가 명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너무나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고넬료 역시 자신이 겪은 신비로운 체험을 들려주었습니다. 비록 그는 로마 군인 이었지만 이스라엘의 야훼 하나님을 경외하였습니다. 유대인들의 경건 전통에 따라 제 구시, 오늘날로 따지면 오후 세시에 기도 하였습니다. 그 가운데 빛난 옷을 입은 한 사람, 즉 천사를 만났습니다. 그 천사는 하나님께서 그의 기도를 들으시고 구제를 기억하셨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면서 도시 욥바에서 베드로가 머물고 있는 정확한 위치를 알려주었습니다. 그곳으로 사람을 보내서 베드로를 데려오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드디어 이제 고넬료는 베드로에게 삭막한 율법 문자를 넘어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들을 준비를 갖추었습니다. 


이렇듯 베드로와 고넬료, 그 이전까지 생면부지였던 두 사람이 역사적인 만남을 가졌습니다. 이것은 결코 그들의 계획이나 의지의 결과가 아니었습니다. 깊은 섭리 가운데 성령님께서 베드로에게, 그리고 천사가 고넬료에게 불연듯 나타나 그들을 만나게 하셨습니다. 이 만남을 통하여 이방인에게 복음이 전해지는 놀라운 역사가 본격적으로 펼쳐졌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우리에게 허락하신 여러 만남의 의미를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쳇바퀴 돌 듯 반복되는 일상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우리가 도무지 예상하지 못했던 만남이 끊임없이 이어집니다. 친구와 동료 등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만남을 처음부터 열심히 계획 얻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심지어 배우자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너무나 뜻 밖의 인연으로 부부로 맺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그 모든 인연은 삶의 여러 요소에 의해서, 정확히는 하나님의 신비로운 손길로 이루어집니다. 또한 앞으로도 우리 인생의 가장 소중한 여러 만남을 주님께서 예비 하셨음을 믿음으로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물론 이렇게 감사하고 반가운 만남 못지않게, 불쾌하고 힘겨운 만남도 적지 않습니다. 완전히 다른 세상에 살며 전혀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들과 부득이 대화를 할 때가 있습니다. 치명적인 열듬감과 한 없이 낮은 자존감으로, 함부로 남을 비난하고 공격하는 이들과 어쩔 수 없이 일상을 공유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그 모든 당황스러운 만남을 통해 복음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얼마든지 고넬료에게 직접 예수님의 복음을 말씀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베드로를 만나 그를 통해 복음을 듣게하셨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을 사람을 통해 사람에게 들려주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간혹 하나님께서 직접 당신의 음성을 들려주실 때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신비한 체험 자체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주님께서 이 세상을 다스리시는 가장 기본적이고 근본적인 방식이 있습니다. 바로 일상입니다. 그런 까닭에 평범한 하루를 곁에서 함께하는 사람들의 입술에 당신의 말씀을 담아주십니다.

십자가는 하나님과 사람의 위대한 만남의 복음입니다. 바로 거기서 하늘과 땅이 만나고, 무한과 유한이 접촉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이 계획하신 만남이 얼마나 아름다운 결실인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그런 까닭에 부활을 목격한 증인들은 직접 사람들을 만나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도 주어진 모든 만남을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의 음성에 겸손히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사람들 사이의 모든 차이와 구별을 뛰어넘는,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진실하고 겸손하게 전하고 살아내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기도
은혜로우신 주 하나님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에 담긴 주님의 깊은 뜻을 깨닫게 하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이해되지 않는 만남과 힘겨운 관계 속에서 당황하고 피하고 싶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만남 속에 하나님의 깊은 섭리가 있으며, 놀라운 진리를 향한 초청이 담겨 있음을 믿습니다.
저희 삶에지금까지 허락하신 만남의 의미를 복음으로 다시 살펴보게 하시고, 오늘 하루 마주할 이들에게 더욱더 주님의 선함과 사랑을 전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