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11월 17일 토요일

시편 116편 1~8, 15절 “들으시는 주님께”

2018년 11월 16일, 삼덕교회 금요기도회, 목사 정대진
시편 116편 1~8, 15절 “들으시는 주님께” 

1 여호와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도다
2 그의 귀를 내게 기울이셨으므로 내가 평생에 기도하리로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설교를 시작하며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목사가 묻기에는 이상하게 들리는, 어쩌면 뻔하고 당연한 질문처럼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특히나 한 주간 쌓인 삶의 피로를 온 몸에 가득히 안고 금요일 저녁에도 기도의 자리에 오신 귀한 성도님들께 더더욱 적절치 않은 질문 같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기에 당연히 그 하나님께 열심히 기도하기 마련입니다. 그렇지만 한 편으로 “나는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가?”라는 질문 앞에 조금은 머뭇거리게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저 역시 그렇습니다. 오랫동안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뜨겁게 기도하고 찬양했지만 정작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기가 늘 어색했습니다. 사랑의 대상인 그 하나님의 생생한 모습을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절대자이신 주님은 저의 아름다운 아내처럼 저를 매혹시키는 구체적인 겉모양을 가지고 계시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어릴 때부터 제가 배운 하나님은 한 없이 거대하고 두려운 분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분을 향해 ‘경배한다.’거나 혹은 ‘섬긴다.’와 같은 수직적인 신앙 언어는 주저 없이 사용할 수 있었지만, 내가 정말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지에 대해서는 자신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저와는 달리 본문 속 시인은 하나님을 향해 “사랑한다.”고 거침없이 고백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우리말 어법을 살려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를 1절 가장 뒤에 배치하였습니다. 하지만 구약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는 사랑한다.” 이 말이 제일 먼저 나옵니다. 이러한 표현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라는, 시 전체의 핵심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따라서 이와 같은 시인의 사랑고백을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차근히 되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주목 해야 하는 것은 그가 그렇게 하나님을 사랑하는 ‘이유’입니다. 본문 1절에 따르면, 그것은 바로 주님께서 ‘그의 음성과 그의 간구를’ 들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여기에도 솔직히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께서 정말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지 확신하기 어려운 까닭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문득, 제가 예전에 읽었던 수필 내용이 떠올랐습니다. 어느 집사님 한 분께서 방금 앞에 나눈 물음을 마음 깊이 가지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어떻게 온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의 기도에 하나하나 귀 기울이시고 응답하실까?’ 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언뜻 굉장히 어리석고 유치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는 분명히 불가능한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막연한 종교 관념으로 그냥 덮고 지나가기에는 그 질문이 가지고 있는 무게감이 결코 만만치 않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집사님께서 아들이 속한 대학 합창단의 발표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한참을 즐겁게 음악을 듣다 문득 신비로운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분명히 비슷한 또래 남자 대학생들 수십 명이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 가운데서 아들의 목소리가 또렷이 들렸습니다. 그 이유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랑하는 자녀의 음성이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여러 사람들 속에 섞여 노래한다 할지라도 사랑하는 아들의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더욱 집중하여 그 음성을 분간하는 것이 어머니의 본성입니다. 그 집사님은 이러한 체험을 통해 사랑하는 자녀들이 드리는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신비를 어렴풋하나마 깨달을 수 있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인간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의 모습 전체를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합니다. 다만 그 그림자를 더듬어 가는데 조금은 도움이 됩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들의 간구와 애원에 귀 기울이신다는 것은 단순히 그분의 청신경을 자극시킨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녀들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집중하시는, 이 세상을 향한 주님의 분명한 사랑을 뜻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는 본문 1절의 고백을 더욱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 음성과 내 간구를 들으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고 바꿀 수 있습니다. 또한 이 문장을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가 그를 사랑하는 도다.”라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와 같은 사랑고백의 깊이를 보다 생생히 깨달아 알기 위해 그가 주님께 구한 간구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3~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 사망의 줄이 나를 두르고 스올의 고통이 내게 이르므로 내가 환난과 슬픔을 만났을 때에 4 내가 여호와의 이름으로 기도하기를 여호와여 주께 구하오니 내 영혼을 건지소서 하였도다 

시인이 하나님께 간절히 구한 내용은 결코 그 자신의 얄팍한 욕망이 아니었습니다. 3절에 따르면 그것은 ‘사망의 줄’과 ‘스올의 고통’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스올>은 히브리 세계관에서 사람들이 죽음 이후에 머무는 공간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3절에 담긴 그의 상황은 분명합니다. 마치 ‘죽을 것만 같은 절망’입니다. 우리는 그것이 정확히 어떤 사건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 시가 바벨론 포로기를 거치며 작성, 혹은 완성되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따라서 구체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시인은 나라의 패망과 포로생활을 거치며 극한의 고난과 절망을 겪었음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신앙공동체의 그 처참한 ‘환난과 슬픔’ 가운데 주님의 이름으로, 주님께 기도하며 자신의 영혼을 건져달라고 애원하였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1절의 고백대로 바로 “그 음성과 간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이어서 그러한 주님의 위대하심을 더욱 힘 있게 찬양하였습니다. 5~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5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의로우시며 우리 하나님은 긍휼이 많으시도다 6 여호와께서는 순진한 자를 지키시나니 내가 어려울 때에 나를 구원하셨도다 7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 8 주께서 내 영혼을 사망에서, 내 눈을 눈물에서, 내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나이다 

시인은 주님의 은혜와 공의, 긍휼과 구원을 노래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에게 평안히 돌아가라고 외칩니다. 그 이유는 주님께서 그의 영혼을 사망에서, 그의 눈을 눈물에서, 그의 발을 넘어짐에서 건지셨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계속해서 자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한없는 사랑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절정에 이르러서 그는 매우 의미심장한 말을 남깁니다. 15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눈썰미 있게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시인은 자신이 겪은 고난이 ‘사망’에 가까웠음을 3절과 8절에서 이미 두 차례나 언급하였습니다. 그만큼 그가 짊어졌던 고통의 무게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무거웠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시련으로부터 구하신 하나님의 은혜는 더 없이 찬란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그 개인의 고백이 15절에 이르러서 ‘경건한 자들’ 즉,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모든 성도들에게로 범위가 확장되었습니다. 게다가 죽음과 맞닿은 정도가 아니라 ‘죽음 자체’를 이야기 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결론입니다. 그와 같은 ‘경건한 자들의 죽음’이 주님께서 보시기에 눈부시게 값지다고 찬양합니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얼핏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성도들을 구해 낸 대상인 ‘죽음’이 당신의 눈에 추하거나 악하게 보여야 맞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정반대로 그 죽음이 소중한 까닭은 과연 무엇일까요? 주님의 구원은 죽음을 통한 참된 생명과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죽음에서 건지시는 방법은 결코 죽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로 ‘죽음을 맞이하게 하는’ 엄중한 역설임을 그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그 한 사람만의 일회적인 사건이 아닌 이 땅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 수 없이 반복되는 분명한 진리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본문 속 시인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온갖 고통과 시련 가운데 외치는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구하시는 분이심을 가슴 뜨겁게 고백하길 바랍니다. 동시에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살아계시지만, 그 분께서 은혜와 구원으로 늘 함께 하시지만, 그렇다 해서 죽음의 그림자가 우리에게서 빗겨가지는 않습니다. 도리어 정면으로 달려들곤 합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의 단절 속에 더 깊은 좌절과 상실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성도들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시는 주님께서는 우리를 절대로 절망 속에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끝내 구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살리시는 방법입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절정을 십자가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 나무에 매달려 끔찍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분 역시도 죽음을 피하지 못 했습니다. 오히려 그 누구 못지않게 처절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는 마침내 이 땅에 부활의 생명과 희망을 열어준 은총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며,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응답하시고 구원하시는 그 분만의 고독하고 치열한 뜻을 마음에 분명히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다고해서 모든 일들이 기적처럼 잘 풀리지 않습니다. 우리의 기대와 바람이 원하는 만큼 성취되지도 않습니다. 열심히 기도하는 것 자체가 성공을 보장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신실한 신앙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시련을 겪을 때가 더 많이 있습니다. 

종종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절망과 허무함 속에 허우적거리기도 합니다. 때때로 악랄한 음해를 겪기도 합니다. 또한 번번이 반복되는 실패 가운데 괴로워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 깊은 죽음의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처절히 되묻곤 합니다. 

그렇지만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도저히 기도에 응답받지 못했다고 느끼는 그 순간, 결코 죽음에서 구해질 수 없을 거라며 끝없는 좌절에 잠긴 바로 그 순간, 하나님의 구원은 하나님의 뜻대로 반드시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그것이 바로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찬란한 복음이자 오늘 함께 읽은 시편에서 시인이 절절히 노래하는 하나님 사랑의 핵심입니다. 


제가 전에 섬겼던 다른 교회에서 어느 청년을 심방하며 이러저러한 대화를 나누었는데 불쑥 저에게 어떻게 목회자가 되었는지 물었습니다. ‘왜 신학을 공부했느냐?’ 혹은 ‘왜 목사가 되려 했느냐?’ 이런 종류의 질문은 제가 신학교에 입학한 이후, 정말 수백 번도 넘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그날은 왠지 그 식상한 물음표가 제 심장을 예리하게 찌르는 듯 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돌이켜보면 제가 본격적으로 목사가 되기로 결심했던 순간은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였습니다. 수요기도회에서 열심히 기도하다가 불쑥 제 내면 깊이 ‘네가 나의 말씀을 전하길 원한다.’라는 뚜렷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메시지가 명확한 하나님의 목소리라고 자신하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것은 저의 망상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그 이후 제가 목사가 되고 싶다고 계속해서 기도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생각은 한 순간의 우발적인 사건으로 그치지 않고 점점 더 구체적으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장신대 신학과 외에는 다른 학교에는 아예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제가 목사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을 점점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때 들은 그 음성은, 하나님께서 저로 하여금 목사가 되고 싶어 하는 소원을 마음에 주시고 그것을 스스로의 입술로 구하게 하고자 주신 부르심의 씨앗임을 오랜 시간에 걸쳐 깨달아 갔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았습니다. 저는 목사가 되고 싶어 하면 할수록 제가 결격사유가 매우 많다는 잔인한 사실을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누가 봐도 목회자로서 정말 부적격한 사람이었습니다.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선 저는 심장이 약해서 무대공포가 심했습니다. 

또한 언어치료까지 받을 정도로 발음 기관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정확한 발음과 어조로 사람들 앞에서 이야기 하려면 지금도 남들보다 몇 배의 준비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아마 저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말이 어눌한 목사일 겁니다. 그런 까닭에 여전히 제가 제일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일은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마이크 잡고서는 겁니다. 다른 목사님들은 유창하게 잘 하는 식사기도가 저는 참 부담스럽습니다. 원고 없이 말해야 되니까요. 그런 까닭에 대학시절 내내 제가 목사로서 과연 적합한 지에 대한 고민은 점점 더 깊어져 갔습니다. 

다행히 감사하게도 신학대학원에서 무리 없이 목회 훈련을 계속 이어가며 앞서 얘기한 문제들은 어느 정도 해결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조금은 자신감을 가진 채로 졸업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후 차마 이 자리에 말 못할 온갖 상처와 좌절을 겪었습니다. 마치 온 세상이 저에게 ‘너 이래도 목사 될래?’라고 윽박지르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들 역시 묵묵히 지나 어느새 정신을 차려보니 안수를 받고 부족하나마 목사로서 여러 소임을 감당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긴 여정 끝에 한 청년으로부터 “어떻게 목사가 되셨느냐?”라는 질문을 듣는 순간, 저는 문득 깨닫고 또,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이 연약한 종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다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되고 싶다는 한 소년의 기도에 주님께서는 주님의 방법으로 응답하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 모든 과정들이 그림처럼 아름답고 순탄하게 극적으로 이어지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께 구한 모든 것들이 전부 이루어진 것도, 원했던 결과를 즉각 얻었던 것도 아닙니다. 그 대신, 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절망과 비참함에 사무쳐 눈물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저를 향한 당신의 뜻을 제가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방식으로 이루어가셨습니다. 그리하여 수도 없이 자포자기 하며 주님을 원망했지만 마침내 저를 이 과분한 자리에 세우셨습니다. 물론 아직도 너무나 미흡하지만 제 역할과 책임을 나름대로 감당할 수 있도록, 적절한 힘과 도움을 날마다 채워주셨습니다. 제가 목사로서 너무나 부적격하다고 생각했던 모습들이 오히려 겸손히 주님을 따르는 종으로서 적격하게 만드시려는 은혜임을 비로소 깨닫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은 잘 눈치 못 채셨겠지만, 저는 설교하려 강단에 설 때마다 매 번 작은 기적을 실감합니다. 하나님께서 제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는 분이라는 진리를 떨리는 목소리로 고백하게 됩니다.

이는 분명, 저만의 경험과 은혜가 아니라고 굳게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고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다만, 그분의 때와 방법이 사람의 어리석은 기대와 어긋날 뿐입니다. 그래서 심지어 죽음 한 복판에서 고통에 겨운 눈물을 흘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을 귀중하게 보시는 주님께서 깊은 섭리 가운데 가장 합당한 길로 지금까지 이끌어 오셨고 앞으로도 이끌어 가심을 항상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믿음 가운데, 우리 삶을 통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감사의 찬양과 예배를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그 모든 경배를 기뻐 받으시고 우리의 앞날을 가장 선하고 올바른 길로 이끄시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질문을 다시 하겠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실망을 드리는 거라면 정말 죄송하지만, 저는 아직도, 어쩌면 평생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자신 있게 말 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감히 고백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저를 사랑하셔서 제 삶 깊숙이 다가오시어 제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응답하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 은혜를 의지하여 떨리는 목소리로 조심스레, 주님을 사랑하겠노라고, 사랑해 나가겠다고 다짐하게 됩니다. 부디 이러한 고백과 찬양이 우리 삼덕교회에 더욱 온전히 흘러넘치기를 온 마음 다해 소망합니다.

끝으로, 본문 1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주님, 주님께서 나의 간구를 들어주시기에,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기도
자녀들의 음성과 간구를 들으시는 사랑의 하나님
우리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은 고통 없는 순백의 세상이 아니라 죽음의 총성이 오가는 절망의 현장임을 날마다 절감하곤 합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성도들의 그 모든 죽음을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시편의 찬양을 통해 십자가와 부활의 위대한 역설을 거듭 깨닫습니다. 
그 신비로운 은혜를 통하여 성도들의 모든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더욱 가슴깊이 품으며 마침내 그 사랑을 고백하길 원합니다. 그로 말미암은 위대한 복음을 삶 속에서 언제나 힘써 전하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죽임 당하심으로써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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