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1월 10일 목요일

요한일서 5장 13~21절 "생명을 구하는 기도"

2018년 12월 22일, 토, 삼덕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요한일서 5장 13~21절 "생명을 구하는 기도"

13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쓰는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17 모든 불의가 죄로되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도 있도다
18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는 다 범죄하지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아노라 하나님께로부터 나신 자가 그를 지키시매 악한 자가 그를 만지지도 못하느니라
19 또 아는 것은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고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한 것이며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요한일서의 결론부에 해당됩니다. 먼저 13절을 보시면 “하나님의 이름을 믿는 너희”, 곧 교회를 향해, “이것”, 즉 훗날 요한일서로 불리게 된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다름 아닌 그들로 하여금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전에도 설교 때 몇 번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성경에 기록된 무척 중요한 개념이지만 번역 때문에 자주 오해받는 단어가 바로 “영생”입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헬라어 단어 <조에>는 번역한 한자말의 의미처럼 단순히 길게 오래오래 사는 생명을 뜻하지 않습니다. 사랑이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믿음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참된 생명을 의미합니다. 이것이야말로 요한일서는 물론이고 함께 연결된 요한복음을 통해 들려진 복음의 핵심입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진리를 받아들인 교회가 실천해야할 사명입니다. 바로 기도입니다. 14~15절 제가 읽겠습니다.

14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15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복음으로 말미암은 담대함을 가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거침없는 용기를 가지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담대함과 용기 가운데 주님께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간구에 아버지 하나님께서 귀 기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기도의 방향은 나에게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누구든지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 그리하면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범죄자들을 위하여 그에게 생명을 주시리라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으니 이에 관하여 나는 구하라 하지 않노라

요한은 죄를 지은 사람들이 생명을 얻도록 기도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때 “생명”으로 옮긴 단어는 앞서 13절에 “영생”으로 번역된 헬라어 단어와 같은 <조에>입니다. 즉, 사도는 하나님의 참된 생명의 구원이 성도 각자에게 이루어진 것에 안주하지 말 것을 당부합니다. 나뿐만 아니라 우리의 이웃, 심지어 죄를 지은 사람들을 위해서도 기도하라고 편지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말씀은 우리가 곁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해야하는 지, 올바른 태도를 알려줍니다. 우리 주위에 늘 천사같이 순하고 착한 사람들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례하고 오만한 사람들, 심지어 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그런 그들을 일방적으로 내치거나 경멸하는 것은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마음으로 최선을 다해 인내하고 포용하며 그들 안에 부활의 생명이 흘러넘치도록 진심으로 중보하며 기도해야 합니다.

동시에 16절은 상당히 논쟁적인 내용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는 표현입니다. 적어도 이 구절에 기록된 사도 요한의 표현에 따르면 세상의 죄는 중보기도의 효력이 있는 “사망에 이르지 아니하는 죄”와 중보기도 할 필요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 이 두 가지로 나뉘는 것처럼 보입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런 구분이 과연 타당해 보이십니까? 설교를 준비하며 요한일서 주석들을 살펴보며 느낀 점은 너무나 많은 연구자들이 이 문제를 두고 골치 아파 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만큼 풀어내기가 쉽지 않은 복잡한 논쟁거리입니다.

제가 감히 이러한 난제를 해결할 능력은 전혀 없지만, 저 나름의 생각을 풀어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 읽은 요한일서뿐만 아니라 성경 전체는 마치 거대한 산맥과 같아서 제 각기 다양한 산과 나무들이 존재하기 마련이고 때때로 그 구성 요소들을 너무나 상충돼 보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각각의 특징과 아름다움은 존중하되 가장 높은 산봉우리에 올라 전체 윤곽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전해진 가장 중요한 계시가 무엇일까요? 단연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모든 성경 말씀은 궁극적으로 이 두 사건과 이어져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나무위에 달리신 그 한없이 위대한 희생 앞에 오늘 본문 16절에 나오듯이 그 어떤 중보기도도 필요 없는, 용서받지 못할, “사망에 이르는 죄”가 과연 존재할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것은 십자가의 완전한 능력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신 십자가와 부활이 전하는 구원은 사람들의 이해를 완전히 초월한다는 것을 항상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왜 요한은 그런 도발적인 표현을 사용했을까요? 여기서 우리가 거듭 유념해야할 점은 신약성경의 그 어떤 저자도 자신의 글이 문자적으로 완벽히 보편타당한 진리를 표현하는 성경이 되리라고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다고 해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권위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만, 특별히 신약성경의 경우 각각의 특수한 상황이 있었고 그 상황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각종 글과 편지가 쓰여졌습니다.

요한일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4장 2~3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정하는 세력을 언급합니다. 이 사람들은 영혼은 우월하고 몸은 비천하다는 이른바 ‘영지사상’을 가진 이단들을 가리킵니다. 이것은 오늘날뿐만 아니라 초기 교회 때부터 이단의 존재로 교회가 혼란에 빠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요한일서에 직접적으로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로마제국에 의한 박해로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는 일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염두에 둔다면 요한이 그 어떤 중보기도도 필요 없는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고 표현한 의도를 깨닫게 됩니다. 그것은 정말로 기계적으로 죽음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그만큼 예수님의 위대한 구원을 심각하게 모독하고 주님의 몸 된 교회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남기는 심각한 죄가 존재하고, 그 죄를 엄중히 경계하려는 가장 강력한 형태의 강조법으로 이해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십자가 그늘 아래 용서받지 못할 죄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 드넓은 사랑에 의지하여 여러분의 모든 죄를 정직히 주님께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동시에 하나님의 구원은 근본적으로 거부하는 치명적인 죄가 있음을 명심하며 진리 가운데 스스로를 정직히 돌아보아야 합니다.


이를 위해 마지막으로 20~21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0 또 아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르러 우리에게 지각을 주사 우리로 참된 자를 알게 하신 것과 또한 우리가 참된 자 곧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니 그는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라 21 자녀들아 너희 자신을 지켜 우상에게서 멀리하라

요한은 자신의 첫 번째 편지를 마무리하며 우리가 거듭 들어야 할 복음의 핵심을 다시 강조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나님이시고 참 생명이라는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주님과 반대 되는 우상을 멀리하고 자신을 지켜야 합니다. 이러한 우상 숭배 금지를 막연히 타종교를 거부하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다른 종교에 구원은 없습니다. 이것은 결코 양보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하지만 그 안에도 우리가 충분히 귀 기울일만한 보편진리가 있다는 점 역시 명심하며 불필요한 대결과 경쟁을 지양해야 합니다.

대신 성경이 궁극적으로 대적하는 우상의 실체를 깨닫고 단호하게 물리쳐야 합니다. 한 마디로 그것은 무한한 탐욕입니다. 이러한 우상은 교회 밖에만 존재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때때로 교회 안에 더욱 활개를 치곤합니다. 따라서 가장 그럴듯한 신앙 언어로 선동적으로 하나님을 외치지만 오히려 공동체를 어지럽히면서까지 주님을 이용해 자신의 성공과 안위를 지키려 한다면 그것은 최악의 우상숭배입니다. 하나님 보다 자기 자신이 더 소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의 시작부분에 기록된 말씀대로 더욱 담대히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자신이 우상을 물리치고 하나님을 진리 가운데 바로 섬길 수 있도록 기도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을 제대로 알지 못한 채 죄를 저지르고 방황하는 이들을 위해 중보하시길 바랍니다. 그 자신이 곧 사랑이신 위대한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런 우리의 모든 기도에 귀 기울이셔서 우리 각자와 가정과 교회를 가장 선한 길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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