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9월 20일 일요일

예레미야애가 3장 19~24절 “오히려 희망”

포항제일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2020년 9월 18일,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애가 3장 19~24절 “오히려 희망”

19 내 고초와 재난 곧 쑥과 담즙을 기억하소서 
20 내 마음이 그것을 기억하고 내가 낙심이 되오나 
21 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22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23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 
24 내 심령에 이르기를 여호와는 나의 기업이시니 그러므로 내가 그를 바라리라 하도다 


예레미야애가는 주전 586년, 바벨론 군대에 의해 예루살렘성이 함락당한 역사적인 사건을 배경으로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전쟁에 패배했다는 것은 단지 한 나라와 다른 나라 사이의 정치·군사적인 사건이 아닙니다. 그동안 철저히 믿고 섬긴 우리 민족의 신이 적국의 신에게 굴복하여 그들을 버리고 떠났음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바벨론 군인들이 성전을 짓밟는 모습을 무력하게 보고 있어야 했던 당시 유다 사람들 가슴에는 오늘 우리가 감히 헤아리기 힘든 절망과 슬픔이 깊이 새겨졌습니다.

예레미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로서의 사명을 감당하긴 했지만 그 역시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민족적 시련 앞에 하나님의 뜻을 연거푸 되물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레미야애가의 원문은 “어찌하여!”라는 탄식으로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예언자는 자신의 울분과 원망을 주님께 거침없이 토로하였습니다.

예레미야는 자신이 겪은 처참한 고통을 본문 19~20절에서 “쓴 쑥”과 “쓸개즙”이라는 미각(味覺)적인 단어를 통해 표현합니다. 마치 혀끝을 강력히 자극하고 좀처럼 뇌리에서 떠나지 않은 “쓴 맛”처럼 그 고통은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따라서 마음 깊이 밀어닥친 우울함으로 떨림과 좌절을 경험하였습니다.

확신하기는 이 자리에 계신 모든 분들이 예언자의 탄식을 충분히 공감하실 겁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이미 겪었고 또 지금 맛보고 있는 인생의 ‘쓴 맛’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삶은 고통이고 고통은 현실입니다. 불행히도 이 세상은 낙원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천사가 아닙니다. 

따라서 지나친 비관론이 건강하지 못하듯이 무모한 낙관론 또한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그러니 제발 아무런 상처받지 않은 것처럼, 전혀 힘들지 않은 것처럼 스스로 속이지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그 모든 시련과 똑바로 마주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충분히 아파하고 분노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를 덮쳐온 그 모든 문제들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길이 비로소 열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예언자의 탄식은 자기 자신만이 아닌 민족과 열방을 향해 있다는 점입니다. 즉, 예레미야는 단순히 사적인 몰락과 실패 때문에 슬피 울지 않았습니다. 비록 그가 흘린 눈물은 한 사람의 여윈 뺨을 타고 흘러내렸지만 그 눈물의 깊이와 넓이는 유다와 바벨론과 서아시아와 온 세상을 아울렀습니다.

개인의 아픔은 분명 고유한 영역이기에 충분히 존중 받아야 합니다. 특히나 다른 사람들이 겪는 괴로움에 대해  함부로 판단하거나 가르치려 들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나 자기의 힘겨운 처지에만 집착하며 주위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 또한 옳지 않습니다. 소통과 공감 없이 오로지 나의 손해와 억울함에만 골몰하는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대신 자신이 겪었던 힘겨운 시간을 통해 이웃의 아픔에 더욱 눈길을 돌려야 합니다. 

또한 오늘날 대한민국과 세계 곳곳에서 들려오는 울부짖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특히나 우리는 지금 코로나19와 기후 위기로 말미암아 전 지구적인 재앙을 겪고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보던 암울한 미래를 현재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언제 끝날지 기약할 수 없는 숱한 문제들과 함께 일상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의 손해만 계산하지 말아야 합니다. 재난에 더욱더 취약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과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려야 합니다. 파괴되는 생태계와 함께 신음하며 주님의 창조 세계가 다시금 아름답게 회복되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고통과 절망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태도입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이와 같은 깊고 깊은 절망의 중심에서 전혀 뜻밖의 은혜를 깨달았습니다. 본문 21~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그러나 마음속으로 곰곰이 생각하며 오히려 희망을 가지는 것은, 22 주님의 한결같은 사랑이 다함이 없고 그 긍휼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23 "주님의 사랑과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고, 주님의 신실이 큽니다."(새번역)

절망과 직면하여 처참하게 몸부림쳤치던 예레미야는 고통스런 현실과는 전혀 다른 은혜를 내면 깊은 곳에서부터 느꼈습니다. 그것은 바로 ‘희망’입니다.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까요? 우리의 이성은 이러한 희망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이성의 저항’은 지극히 타당합니다.

만약 여러분이라면, 미래를 위해 계획하는 모든 일들이 전부 실패하고, 날마다 힘겨운 일들만 계속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도 무모하게 ‘희망’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코로나블루를 한 순간에 떨쳐버리고 장미빛 미래를 쉽게 그릴 수 있겠습니까? 막연히 그래야만 할 것 같은 학습된 강박을 내려놓고 자신의 무능과 어두운 현실을 직면할 때,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언자는 그 숱한 절망 가운데 놀라운 희망을 가슴에 품게 되었습니다. 혹독한 불행 한 복판에서 매일 아침마다 새롭게 찾아오시는 “주님의 한결 같은 사랑”과 “끝없는 긍휼”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그가 흔히 말하는 굉장히 독실한 믿음을 철두철미하게 지켜서가 아닙니다. 소위 ‘긍정의 힘’을 굳게 붙잡아서도 아닙니다.

오히려 예레미야는 모범적이고 얌전한 신앙인의 모습과 거리가 멉니다. 그 삶에는 “눈물의 예언자”라는 별명처럼 절규하며 흐느끼는 솔직한 원망과 분노로 가득합니다. 대표적인 구절인 예레미야 20장 14~18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4 내가 태어난 날이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이 복된 날이 되지 말았어야 했는데. 15 나의 아버지에게 ‘아들입니다, 아들!’ 하고 소식을 전하여, 아버지를 기쁘게 한 그 사람도 저주를 받았어야 했는데. 16 바로 그 사람은 주님께서 사정없이 뒤엎어 놓으신 성읍들처럼 되어서, 아침에는 울부짖는 고통 소리를 듣고, 대낮에는 전쟁의 함성을 들었어야 했는데. 17 내가 모태에서 죽어, 어머니가 나의 무덤이 되었어야 했는데, 내가 영원히 모태 속에 있었어야 했는데. 18 어찌하여 이 몸이 모태에서 나와서, 이처럼 고난과 고통을 겪고, 나의 생애를 마치는 날까지 이러한 수모를 받는가!(새번역)

사랑하는 여러분, 도저히 체면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예언자의 가슴 절절한 아픔이 느껴지십니까? 그의 처절한 통곡소리를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주님의 위대한 은혜와 사랑이 그 모든 고통의 몸부림을 품고 다가와 그를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절망의 언덕을 지나며 하나님 앞에 애써 착한 척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예레미야처럼 얼마든지 주님께 원망하고 탄식해도 괜찮습니다. 

예수님 또한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피를 흘리시며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울부짖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피맺힌 십자가가 부활의 생명을 꽃 피웠듯이 고난과 고통 가운데 내뱉는 우리의 신음이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을 생생히 깨닫게 하는 은혜의 통로가 될 줄 믿습니다.

기독교 신앙이 말하는 생명과 구원은 말랑말랑한 심리적 위안이 아닙니다. 새하얗게 표백된 종교 관념도 아닙니다. 정반대로 찐득찐득한 땀과 눈물과 피로 뒤범벅된 채 달려오는 뜨거운 사랑입니다. 제아무리 부정하려 애쓰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고 결코 믿어지지 않지만, 날마다 새롭게 마음에 채워지는, 그리하여 결국 끝내 안길 수밖에 없는 주님의 놀라운 긍휼입니다.


20세기 중반 나치 독일의 광기가 전 유럽을 사로잡았습니다. 그들은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을 수용소에 몰아 놓고 끔찍한 대량학살을 저질렀습니다. 그때 오스트리아의 유대인 정신과 의사 빅터 프랭클이 온 가족과 함께 붙잡혀 아우슈비츠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사랑하는 아내와 어머니와 동생을 잃은 채 홀로 살아남았습니다. 인류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는 비극이었고, 한 인간에게는 도무지 감당하기 힘든 절망이었습니다.

그러나 프랭클은 그 아픔을 딛고 일어나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토대로 위대한 저술을 남깁니다. 우리나라에는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이 책에서 고통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삶의 의미는 삶과 죽음, 고통 받는 것과 죽어가는 것까지를 폭넓게 감싸 안는 포괄적인 것이었다.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되었다. 우리는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더 이상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getting through work.)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getting through suffering)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가운데 시련은 피해갈 수 없습니다. 그것은 인간이 살아있는 존재로서 지니는 숙명이자 소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절망을 관통하는 내면의 시력을 키워야 합니다. 고통의 의미를 헤아리는 영혼의 깊이를 가져야 합니다. 시련과 직면하여 그것을 완수해 가는 용기를 품어야 합니다. 신실하신 주님께서 그런 연약한 우리를 사랑하시고 구하십니다. 그렇기에 그 모든 좌절과 실패는 우리를 진실로 살리고 새롭게 하는 구원의 과정임을 반드시 믿으시길 소망합니다.  

따라서 문제로부터 도망치지 말아야 합니다. 갈등에 억지로 눈을 감아서는 안 됩니다. 어두움에 등을 돌리지 말아야 합니다. 충분히 아파해야 비로소 치유될 수 있습니다. 마음껏 울어야 마침내 웃을 수 있습니다. 한없이 절망해야 오히려 희망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에게 안겨주는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회복의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결론적으로 본문 마지막에 기록된 예언자의 고백을 함께 드리길 원합니다. 24절 읽어 드리겠습니다.

24 나는 늘 말하였다.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새번역) 

한 번 따라해 보시길 바랍니다. “주님은 나의 모든 것, 주님은 나의 희망”. 여기서 새번역 성경은 “내가 가진 모든 것”으로, 개역개정성경은 “기업”으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약속의 땅에 들어갈 때 각 지파와 가문 별로 제비 뽑아 나눈 땅을 가리킵니다. 

그 토지는 유목생활을 마치고 이제 농경생활을 막 시작하는 이스라엘 사람들로서는 가장 중요한 삶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내가 가진 모든 것”이라는 예언자의 고백을 이렇게 바꿀 수 있습니다. “주님은 내가 생존하고 생활하는 근거입니다.”

이와 같은 예레미야의 고백에 동의하십니까? 이러한 선언을 부정할 사람은 여기에 아무도 없습니다. 이 시간 기도의 자리로 모인 모두가 기꺼이 동의하는 믿음의 내용입니다. 하지만 자신을 조금만 더 정직히 들여다본다면 매우 다른 실상을 발견하게 됩니다. 저를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때때로 하나님 대신에 돈과 명예와 권력을 숭배하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주님을 우상화 하며 나의 어리석은 탐욕을 대신 이루어줄 분으로 이용하려 들 때도 많습니다. 그래서 말로는 하나님을 믿는다고는 하지만 정작 진리를 따르기 보다 주님의 거룩한 이름을 들먹이며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안타까운 경우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내가 정말 주님을 나의 모든 것으로 믿고 따르는지 무엇으로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예레미야처럼 위기 가운데 어떤 선택과 판단을 내리는지 보면 됩니다. 곤란함과 어려움 속에 누구나 진짜 자기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동안 자신이 거창하게 말로만 떠든 것이 아니라 그동안 정말 무엇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왔는지를 고난과 마주할 때 결정적으로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신뢰한다면 좀 더 많은 돈을 움켜쥐기 위해 추한 모습으로 애쓰지 말고 가난한 이들을 위해 나누어야 합니다. 주님을 진실로 믿는다면 약자들을 억누르며 존재감 과시하는 대신 더욱더 섬겨야 합니다. 복음의 능력을 진정 소망한다면 개인의 사사로운 이익이 아닌 공동체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 기꺼이 손해보고 희생해야 합니다.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본문에서 의연한 찬양을 드리는 예레미야의 상황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정 반대로 몰락한 나라의 예언자로서 가난하고 비참한 삶을 살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극히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진실로 자신을 참으로 풍요롭게 하며 희망을 주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시라고 외쳤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통해 공동체를 위로하고 격려하였습니다.

부디 거듭 바라기는 이와 같은 찬란한 고백이 저와 여러분의 입술에도 이어지길 원합니다.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러나 사실 이렇게 말씀드리면서도 제 마음은 한 없이 무겁기만 합니다. 험난한 세상 가운데 성도님들이 겪고 계신 온갖 불안과 염려가 때로는 감사와 찬양조차 사치스럽게 느끼게 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목사가 아닌, 믿음의 여정을 함께 걷는 길벗으로서 당부 드립니다. 온 몸으로 현실을 치열하게 살아내며 진리를 외친 예언자와 예수님의 말씀과 삶에 의지하여 간곡히 권면합니다. 그 어떤 절망 속에서도 오히려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보다 앞서, 우리와 함께 고난당하신 신실하신 주님께서 도저히 거부할 수 없는 사랑과 긍휼을 날마다 가득히 안겨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에 맞서  하나님만이 진정 나의 모든 것이요 희망임을 항상 고백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우리의 참된 희망이신 하나님
잠시도 잊을 수 없는 그 모든 슬픔과 절망 가운데 주님을 바라봅니다. 아침마다 새롭게, 여러 모양으로 찾아오는 한결같은 사랑과 긍휼을 의지합니다. 그리하여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모든 것이요 참된 희망임을 진실로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특별히 코로나19로 말미암아 너무나 지치고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날로 악화되는 기후 위기 가운데 생존의 위협을 느끼기도 합니다. 그럴수록 잠잠히 주님만을 바라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의지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한 삶을 통해 나 자신과 교회와 세상을 변화시키며 시련을 완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절망의 현실을 몸소 살아내시며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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