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8일 목요일

역대하 7장 11~22절 "다시 역사 앞에"

포항제일교회 수요기도회, 2020년 10월 7일, 목사 정대진 
역대하 7장 11~22절 "다시 역사 앞에"

11 솔로몬이 여호와의 전과 왕궁 건축을 마치고 솔로몬의 심중에 여호와의 전과 자기의 궁궐에 그가 이루고자 한 것을 다 형통하게 이루니라
12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사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네 기도를 듣고 이 곳을 택하여 내게 제사하는 성전을 삼았으니
13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15 이제 이 곳에서 하는 기도에 내가 눈을 들고 귀를 기울이리니
16 이는 내가 이미 이 성전을 택하고 거룩하게 하여 내 이름을 여기에 영원히 있게 하였음이라 내 눈과 내 마음이 항상 여기에 있으리라
17 네가 만일 내 앞에서 행하기를 네 아버지 다윗이 행한 것과 같이 하여 내가 네게 명령한 모든 것을 행하여 내 율례와 법규를 지키면
18 내가 네 나라 왕위를 견고하게 하되 전에 내가 네 아버지 다윗과 언약하기를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끊어지지 아니하리라 한 대로 하리라
19 그러나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경배하면
20 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성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리니
21 이 성전이 비록 높을지라도 그리로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22 대답하기를 그들이 자기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붙잡혀서 그것들을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하리라 하셨더라


우리는 지금 ‘백일의 성경통독’을 진행 중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코로나19를 비롯한 삶의 여러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길 소망합니다. 이를 돕기 위해 수요 예배 때마다 현재 읽는 통독 범위에 대한 설명과 핵심 메시지를 나누고 있습니다. 특별히 지난 2주간 탁월한 구약학자 두 분의 명강의를 듣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습니다. 바로 이어서 이 자리에 서게 되어, 부족한 저로서는 몹시 부담스럽습니다.

여러모로 미흡하지만 이 시간 크게 세 가지를 중심으로 미력하나마 준비한 내용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구약 성경 속 ‘역사서’의 의미, 두 번째는 역대기의 배경과 의의, 세 번째는 역대기의 핵심 메시지인 성전에 대해 방금 함께 읽은 본문 중심으로 나누고자 합니다.


1. 구약 성경 속 역사서의 의미

먼저 한 가지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과연 구약 성경 안에 ‘역사서’가 존재할까요? 너무나 당연하게 ‘그렇다’라고 생각하실 겁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관련해서 준비한 구약성경 배열구분 표를 화면을 통해 보시길 바랍니다. 

편의상 생략했지만 주후 382년에 신학자 히에로니무스가 교황 다마소1세의 명령에 따라 라틴어로 번역한 성경을 가리며 ‘불가타역’이라고 부릅니다. 여기에서 외경을 제외한 것이 지금 우리가 가진 개신교 성경의 배열입니다. 그런데 히에로니무스가 구약을 라틴어로 번역한 대상은 히브리성경의 헬라어 번역본인 ‘칠십인역’이었습니다. 따라서 칠십인역과 기독교 성경은 예언서의 세부 순서만 제외하고 장르 구분과 배열이 무척 비슷합니다.

반면에 히브리어로 처음 기록된 구약 성경과는 매우 다릅니다. 왜냐하면 구약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할 수밖에 없었던 주전 3세기의 상황 때문입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더 이상 팔레스타인 지역에만 살지 않았습니다. 복잡한 국제 정세에 의해 지중해 전역에 흩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차츰 헬라어와 헬라문화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들의 신앙에까지 자연스럽게 녹아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헬라어 구약성경인 ‘칠십인역’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이 과정에서 단지 언어만 바꾸지 않았습니다. 성경의 분류와 배치가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러면서 본래 히브리 성경에는 없었던 새로운 장르가 등장합니다. 바로 ‘역사서’입니다. 주전 5세기에 기록된 서양 최초의 역사서인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통해 알 수 있듯이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 ‘역사서’는 무척 친숙한 저술문화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당시 세계관에 따라 칠십인역의 번역자들은 여호수아에서 에스더까지의 8권의 성경을 ‘역사서’로 분류해 한 곳으로 모았습니다. 이것은 기존의 히브리 성경과 비교할 때 매우 파격적인 시도 입니다. 동시에 나름의 합리성과 정당성을 가진 의미 있는 작업이었습니다. 구약 성경은 분명히 허무맹랑한 신화가 아니라 치열한 역사 속에서 움터 오른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구약의 역사서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역사서’로 이해하는 문헌들과 그 성격이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히브리 성경 본래의 분류와 그 의미를 분명히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다음 화면 보시겠습니다. 

구약 성경의 핵심은 바로 모세오경입니다. 이것은 다른 구약성경의 번역본들도 동의하는 매우 중요한 사실입니다. 이 때 오경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토라>는 율법을 넘어서는, 하나님의 뜻 혹은 교훈을 가리킵니다. 이러한 토라의 토대 아래 구약 안에 두 가지 장르가 뻗어갑니다. 바로 예언서와 성문서입니다. 이 둘은 별개의 독립적인 성경이 아닙니다. 토라를 철저히 의존하며 거기에 반응한 결과입니다.

먼저 예언서는 토라에 근거해 예언자들이 그 시대를 향한 주님의 말씀을 대언한 기록입니다. 성문서는 자신의 신앙을 토라를 바탕으로 문학적으로 표현한 책입니다. 흥미롭게도 칠십인역에서 시작되어 오늘 우리에게까지 역사서로 분류되는 구약의 성경들은 예언서나 성문서 한쪽에 몰려 있지 않고 양쪽에 나뉘어져 있습니다. 게다가 예언서에 포함된 열왕기와 달리 역대기는 성문서의 마지막에 위치해 구약성경 전체를 마무리하는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구약 역사서를 이해하는 가장 기본적인 토대는 무엇일까요? 세계사 연대표나 고고학 발굴기록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보편적인 역사 연구 자료도 매우 중요합니다.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되고 가능한 많이 활용해야 합니다. 하지만 구약의 역사를 올바로 들여다보기 위해 제일 먼저 바탕에 두어야할 것은 바로 모세오경입니다. 그 안에 담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그 핵심 진리에 비추어 이스라엘의 역사를 더듬어 가야합니다.

따라서 구약의 역사서를 통해 문자 그대로 엄밀한 의미의 역사적 사실을 따지는 것은 적절하지 못합니다. 여호수아 시대에 정말 해와 달이 멈추었는지, 요나가 실제로 물고기 뱃속에 들어갔다 살아나왔는지를 천체물리학이나 동물행동학의 시각으로 펙트를 따지며 논쟁하는 것은 소모적입니다. 성경의 기록 목적과 배경과 편집의 의도가 세속적인 역사서나 과학서와는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거듭 강조하지만 물론 그렇다고 해서 구약의 역사서가 일반적인 역사의 흐름과 전혀 무관한 허구의 소설이라는 뜻은 전혀 아닙니다. 다만 본래의 성격에 맞게 가장 먼저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뜻과 다스림 그리고 거기에 반응한 이스라엘의 신앙을 발견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구약의 역사서에서 길을 잃거나 오해 하지 않고 그 속에서 우리를 향한 주님의 사랑과 은혜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2. 역대기의 배경과 의의

다음으로 구약 역사서 중에서 역대기의 배경과 그 의의에 대해 말씀 나누겠습니다. 역대기의 가장 인상적인 특징 중 하나는 도입부분에서 길게 등장하는 이스라엘의 족보입니다. 1장부터 무려 9장까지, 아담에서 시작하는 방대한 명단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역대기의 저작연대를 추측할 수 있는 흥미로운 기록이 있습니다. 바로 역대상 3장 17~24절 입니다. 그 중에서 17~20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7 사로잡혀 간 여고냐의 아들들은 그의 아들 스알디엘과 18 말기람과 브다야와 세낫살과 여가먀와 호사마와 느다뱌요 19 브다야의 아들들은 스룹바벨과 시므이요 스룹바벨의 아들은 므술람과 하나냐와 그의 매제 슬로밋과 20 또 하수바와 오헬과 베레갸와 하사댜와 유삽헤셋 다섯 사람이요

여기에 보면 바벨론에 포로로 사로잡혀 간 여고냐의 자손 중에서 ‘스룹바벨’이 언급됩니다. 바로 에스라, 느헤미야에 등장하는, 성전 재건을 주도한 유다의 지도자와 동일인물입니다. 그 때를 주전 6세기 후반으로 추정하는데 역대기는 그의 후손을 두 세대 아래까지 족보에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역대기의 저작 시기와 관련해서 주목할 점은 역대상 29장 7절에 페르시아의 화폐 단위인 ‘다릭’이 언급된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보시는 사진은 고고학 발굴을 통해 발견한 페르시아 동전 다릭의 실제 모습입니다. 다릭은 주전 515년 후에 제작이 시작되었습니다. 이러한 정황들을 종합해서 대부분의 학자들은 역대기가 주전 4세기경에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때는 유다 백성들이 1차 포로 귀환 후 대략 백오십년 가량 지난 후 입니다. ‘포로 살이’라는 가장 끔찍한 위기는 넘겼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이고 무한한 은혜를 그저 높여 찬양할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삶은 계속되고 시련은 남아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과 성벽을 재건하고 유지하는 고단한 현실에 부딪혀야 합니다. 그 가운데 민족을 다시 일으켜 세워가는 과정이 너무나 막막하기만 합니다.

따라서 온 이스라엘을 새롭게 일깨울 동력이 필요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그 시대 신앙 지도자들이 결심하였습니다. 바로 다시 역사 앞에 마주서는 것입니다. 정확히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들은 오늘의 문제를 딛고 일어나 미래를 열어가기 위해 지난날 하나님께서 조상들을 통해 이루신 일들을 경청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입에서 입으로 혹은 기록을 통해 전해 내려온 옛 이야기들을 또 다시 모아 새로운 역사서를 남겼습니다. 그것이 바로 ‘역대기’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바로 이미 역사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바로 사무엘기와 열왕기입니다. 사실 역대기의 내용 대부분은 그 둘의 시대와 겹칩니다. 단순히 지난날을 회고하기 위함이라면 이미 존재하는 기록물을 들춰보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런데 주전 4세기, 혼란의 시대를 살았던 유다 사람들은 왜 또 다른 역사서를 만들었을까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다스림이 그들에게 전혀 새롭게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사무엘기와 열왕기도 훌륭하지만 지금의 현실과 고민은 충분히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또한 미래를 짊어질 아이들에게 가르치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많습니다. 결론적으로 그들은 과거의 역사서를 절대화하며 숭배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백성들은 새로운 역사를 개척해 나가며 새로운 역사책을 만들었습니다. 그 결과가 역대기라는 이름으로 성경에 담겨 오늘 우리 손에까지 들려지게 되었습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구약성경의 형성 자체가 역사적인 치열한 토론과 고민의 결실이라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절대로 획일적인 정답을 강요하지 않습니다. 성경 내용을 문자적으로 집착하고 낡은 전통에 얽매이는 것은 후대의 오해일 뿐입니다. 동일한 과거 사건에 대한 다양한 생각을 구약의 역사서 자체가 활짝 열고 있다는 것을 반드시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물론 전해 내려온 신앙의 유산을 무시하라는 뜻이 절대로 아닙니다. 귀하고 소중한 전통은 당연히 지켜 보호하고 발전시켜가야 합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위대한 역사를 가진 우리 포항제일교회에서 섬기고 배운다는 사실이 너무나 자랑스럽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의 드넓은 품을 신뢰해야 합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고집을 무너뜨리고 새로운 이해를 열어젖힌 성경의 깊이를 헤아려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역대기를 읽어가며 가지고 깨달아야할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입니다.

3. 역대기의 핵심 주제 ‘성전’

마지막으로 역대기의 핵심 메시지 중 하나인 ‘성전’에 대해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을 중심으로 말씀 드리겠습니다. 화면을 통해 보시는 표와 같이 역대상하 전체의 주요단락을 성전과 관련해서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먼저 역대상 1~9장에는 족보가 길게 나옵니다. 그 가운데 중요한 공간 배경으로 성전이 언급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역대상 10~29장은 다윗의 통치를 ‘성전 건축’을 중심으로 정리합니다. 이어지는 역대하 1~9장은 솔로몬의 성전 완공을 비중 있게 기록하였습니다. 끝으로 역대하 10~36장에 나오는 유다 왕들 역시 그들의 성전 정책을 기준으로 역사적 평가를 내립니다. 

다소 거친 정리이긴 하지만 이를 통해 역대기 역사서의 문학 구조 자체가 ‘성전’이라는 핵심 메시지를 드러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주제의식이 가장 극적으로 드러나는 장면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아버지 다윗으로부터 이어져 오는 오랜 준비와 많은 노력 끝에 솔로몬은 마침내 예루살렘 성전 건축을 마쳤습니다. 그 위대한 사건을 축하하기 위해 온 이스라엘은 진심으로 기뻐하며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날 밤, 하나님께서 솔로몬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성전과 관련하여 소중한 언약을 맺어 주셨습니다.

그 언약의 내용은 둘로 나뉘어집니다. 바로 복과 경고입니다. 먼저 13~14절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3 혹 내가 하늘을 닫고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혹 메뚜기들에게 토산을 먹게 하거나 혹 전염병이 내 백성 가운데에 유행하게 할 때에 14 내 이름으로 일컫는 내 백성이 그들의 악한 길에서 떠나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여 내 얼굴을 찾으면 내가 하늘에서 듣고 그들의 죄를 사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지라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가운데 자연재해와 흉작과 전염병과 같은 어려움이 있을 때 그들이 죄의 길에서 떠나 겸손하게 스스로 낮추고 성전에서 기도하여 당신의 얼굴을 찾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왜냐하면 16절 말씀과 같이 주님의 눈과 마음이 항상 성전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성전에 임재하신 하나님은 성전으로 나아온 백성들의 아픔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이 따스한 은혜의 약속은 동시에 엄중한 경고로 이어집니다. 19~22절 함께 읽겠습니다. 

19 그러나 너희가 만일 돌아서서 내가 너희 앞에 둔 내 율례와 명령을 버리고 가서 다른 신들을 섬겨 그들을 경배하면
20 내가 너희에게 준 땅에서 그 뿌리를 뽑아내고 내 이름을 위하여 거룩하게 한 이 성전을 내 앞에서 버려 모든 민족 중에 속담거리와 이야깃거리가 되게 하리니
21 이 성전이 비록 높을지라도 그리로 지나가는 자마다 놀라 이르되 여호와께서 무슨 까닭으로 이 땅과 이 성전에 이같이 행하셨는고 하면
22 대답하기를 그들이 자기 조상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신 자기 하나님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에게 붙잡혀서 그것들을 경배하여 섬기므로 여호와께서 이 모든 재앙을 그들에게 내리셨다 하리라 하셨더라

만약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율례와 명령, 구체적으로 토라를 무시하고 우상을 섬긴다면 준엄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성전이 황폐하게 됩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으로부터 멸시와 조롱을 당하게 됩니다.

이처럼 하나님께 순종하면 복을 받고 불순종하면 벌을 받는 다는 가르침은 사실 성경 전체에서 쉽게 발견하는 말씀입니다. 어찌 보면 너무 뻔하고 당연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힘겹게 포로살이에서 돌아와, 솔로몬시대에 비해 몹시 초라한 성전을 겨우 다시 지은 당시 유다 사람들로서는 가슴에 사무치는 역사의 한 장면입니다. 단지 오래전에 있었던 한 사건으로 멈추지 않고 지금 그들에게 생생하게 현실로 부딪혀 오는 살아있는 진리였습니다.

그들은 새로 역사를 정리해 나가며 지난 날 솔로몬에게 말씀하신 주님의 음성 앞에 멈춰 섰습니다. 솔로몬은 물론이고 여호사밧과 히스기야와 요시야처럼 유다에 영광을 가져온 위대한 왕들이 펼친 통치의 핵심을 발견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들이 성전에서 겸손히 하나님께 예배하며 그 뜻을 따르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약 150년 전, 바벨론 군대에 의해 화려한 성전이 무너진 치욕을 겪은 원인을 다시금 깨달았습니다. 그것은 정치, 외교, 군사의 차원을 넘어 신앙의 문제였습니다. 바로 성전 건물만 자랑할 뿐 정작 하나님을 외면한 채 탐욕을 숭배한 결과입니다.

이제 두 번째 성전을 새롭게 지은 백성들 앞에도 두 가지 갈림길이 놓여있습니다. 솔로몬 때와 비교하면 상황은 매우 다르지만 본질은 같습니다. 하나님을 따르면 살고, 버리면 죽습니다. 비록 지금 눈앞에 있는 성전 건물은 이웃 나라 다른 신들의 화려한 신전과 견주면 초라하기 그지없습니다. 현재 자신들의 처지는 주변 강력한 제국들과 비교하면 약소민족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강력한 무기가 있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다스림입니다.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그 힘과 희망을 그들은 바로 역사에서 찾았습니다. 조상들로부터 이어오는 신앙의 내력과 전승 가운데 발견하였습니다. 그 역사를 통해 신앙을 이어갔습니다. 그리고 바로 그 역사의 기나긴 여정을 지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전 4세기,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하여 새롭게 삶의 터전을 일구어 가는 유다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환경과 문화 속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삶의 본질은 일치합니다. 특히나 코로나19라는 전지구적인 재앙 가운데 더욱더 흡사한 선택 앞에 놓입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임재를 신뢰하며 그분을 따르느냐 그렇지 않느냐 입니다.

더구나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이후 성전에 대한 이해는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성전은 더 이상 건물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을 섬기고 따르며 교회를 이루는 우리 모두가 성전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이 순간도 나와 함께 하심을 반드시 믿으시길 바랍니다. 재난을 지나며 아무런 희망을 찾을 수 없는 막막한 일상 속에, 여전히 어리석은 욕망과 결핍과 한계로 가득한 내 마음 가운데 주님께서 찾아오심을 분명히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을 붙잡고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성경에 담긴 역사 앞에 다시 마주해야 합니다. 악한 길에서 떠나야 합니다. 겸손히 기도해야 합니다. 오직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 주님께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 딸인 우리를 반드시 구하고 살리고 회복시키기 때문입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구약에 ‘역사서’로 분류된 성경들은 현대적인 의미의 실증적인 역사서와는 거리가 멉니다. 그 대신 모세오경을 토대로 한 신앙고백의 역사로 이해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한 가지 역사 해석만을 절대화 하지 않고 상황의 변화와 현실의 도전에 맞서는 가운데 역대기가 등장했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과 역사를 보다 폭넓고 유연하게 경청할 줄 알아야 합니다. 

끝으로 포로에서 귀환한 유다 백성들을 역사를 통해 성전 중심의 신앙을 회복했음을 명심해야 합니다. 따라서 참된 성전인 우리에게 임하시는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겸손히 예배의 삶을 살고 죄악을 물리쳐야 합니다.

역대기의 핵심 구절이자 고난 속에 믿음의 역사를 피와 눈물로 써 내려가며 새롭게 발견했던 말씀인 본문 14절 말씀을 공동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고 설교를 마치겠습니다.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은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며 나를 찾고 나쁜 길에서 돌아서야 한다. 그리하면 나는 하늘에서 듣고 그 죄를 용서해 주고 그 사는 땅에 다시 생명을 주리라.”


기도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
희망을 찾기 어려운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지날수록 더욱 지쳐만 갑니다. 아픔과 절망과 가까이 지내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 저희들로 하여금 매일 주님의 말씀 앞에 서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그 말씀 가운데 신앙의 역사와 마주하게 하심에 감사합니다. 다시 역사 앞에 섭니다. 온 우주의 역사를 주관하시는 주님의 얼굴을 바라봅니다.
저희 모두가 오늘날 진정한 성전임을 기억하며 죄의 길에서 떠나 겸손히 예배자의 삶을 살게 하여주시옵소서. 주님, 포항제일교회와 대한민국과 세계를 불쌍히 여겨주시고 죄를 용서하시며 다시 생명을 주시옵소서.
역사 가운데 오셔서 역사를 새롭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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