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9월 1일 수요일

마가복음 9장 2~9절 "산 위에서 산 아래로"

포항제일교회 수요기도회, 2021년 9월 1일, 목사 정대진
마가복음 9장 2~9절 "산 위에서 산 아래로"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본문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한 방식을 주목해야 합니다. 신약 원문에는 각각의 제자들 이름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헬라어 정관사는 영어 정관사 ‘the’와 비슷하게, 각각의 존재를 주목하는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어색하나마 해당 내용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육일 후에 예수께서 ‘그를’ ‘베드로를’, 그리고 ‘그를’ ‘야고보를’, 그리고 ‘그를’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셨다.

마가복음이 이렇게 이 세 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씩 힘주어 부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6일 전에 겪었던 사건과 본문 말씀이 매우 긴밀하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당신이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 당하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복음의 핵심을 비로소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헛된 꿈에 가득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왕좌에 오르시면 그 곁에서 호의호식하려던 기대가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특히 베드로가 무척 놀라며 불쾌해했습니다. 불과 조금 전에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그가 예수님을 붙잡고 따질 정도였습니다.

본문 2절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베드로는 물론이고 곁에서 동조한 “그” 야고보와 “그” 요한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6일 전의 그 긴장과 갈등이 여전히 본문 아래에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음산하게 흔들거립니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갑니다. 바위들이 기괴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그들을 노려봅니다. 제자들로서는 그 모두가 자신들을 비웃는 것 같습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축축한 욕망에 대한 부끄러움, 성급한 행동에 대한 자책, 자신들의 수고를 몰라주는 스승에 대한 원망. 이 모두가 뒤 엉킨 채 그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딛었습니다. 낡은 신발과 거친 산길의 마찰이 불협화음을 내며 잔인한 적막 속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겹게 도착한, 어느 이름 모를 높은 산 위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였습니다. 3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아무리 깨끗이 빨래해도 나올 수 없는 찬란한 빛이 예수님으로부터 뿜어져 나왔습니다. 이 때, “광채”로 옮겨진 헬라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단 한 번,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따라서 그 순간 주님에게서 나오는 빛은 흔히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광선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채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4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변화된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이 때, 구약의 수많은 위대한 인물 가운데 특별히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이 함께 등장했다는 사실이 굉장히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둘 다 구약에서 진정한 메시아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모세와 관련해서 신명기 18장 15절 말씀 읽어드리겠습니다.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훗날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이스라엘 가운데 세우실거라고 예고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수많은 예언자들을 백성들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참된 예언자가 또다시 자신들에게 나타날 것을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민족적 고난을 힘겹게 헤쳐 가며, 모세가 찾아오길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풍성하고 온전한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여줄 것을 마음 깊이 고대했습니다.

엘리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라기 4장 5절 읽어 드리겠습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말라기를 통해, 훗날 당신의 백성에게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마찬가지로 엘리야 역시 언젠가 그들 곁에 다시 올 것을 기대 했습니다. 엘리야가 메시아의 오심을 바르게 알려줄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서 “엘리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예언자입니다. 그들이 언젠가 다시 나타나 참된 메시아가 누군지 똑똑히 알려 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마침내 제자들 앞에, 그것도 이 세상에 다시없을 화려하고 찬란한 빛을 비추시는 예수님 곁에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화를 내고 원망을 쏟아 놓은 그 어리석은 제자들, 그 베드로와 그 야고보와 그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가셔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셨을까요? 

그들의 의심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당신께서 온 세상을 구하시고 다스리시는 참된 주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내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예언자들의 증언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진리를 제자들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도록 눈부신 영광 가운데 드러내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경배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믿고 알아갈 때, 늘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습니다. 만약 그렇다고 말한다면 그건 거짓말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는 인간의 그릇된 탐욕과 정면으로 부딪힙니다. 사람들을 참을 수 없이 불편하고 당황하게 합니다. 

어쩌면,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거칠게 따져 물었던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솔직한 마음을 대신한 행동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제자들”에게 당신의 참되고 찬란한 영광을 드러내신 주님을 따라 우리 역시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산 밑에서는 결코 넓게 멀리, 제대로 볼 수가 없습니다. 지금 서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와 풍경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더 높은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저마다의 문제들을 마냥 끌어안고만 있다면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혼란 속에 주저 앉아만 있어서는 절대로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숨 막히는 삶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아름답게 빛나는 주님의 영광을 잠잠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야구 경기에서 1,2점차의 긴박한 승부를 매듭짓는 투수를 가리켜 ‘마무리 투수’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오승환 선수를 많은 분들이 역대 최고로 인정합니다.

그런 오승환 선수가 지난 2013년 5월에 했던 인상적인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때 그는 묵직한 돌 직구를 던지며 리그를 압도하는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다 시즌 중에 가벼운 부상을 당해 이례적으로 이틀간 쉬었습니다. 그를 대신해 그 해 데뷔한 신인 선수가 등판했습니다. 첫 날은 아쉽게도 승리를 놓쳤지만 이튿날에는 무사히 세이브에 성공했습니다.

마침 그 신인은 오승환 선수의 룸메이트였습니다. 이미 전설이 된 그는 까마득한 후배를 이렇게 다독였다고 합니다. “마운드에서 다른 생각을 할 줄 알아야한다.” 경험이 부족한 어린 투수가 숨막히는 승부처에서 상대편의 노련한 타자를 상대 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대부분은 포수의 글러브만을 보고 공 던지기 바쁩니다.

하지만 오승환 선수는 반대로 가야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인터뷰 기사의 마지막 단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오승환도 마운드에 오르면 알게 모르게 ‘딴 짓’을 한다. 오승환의 습관은 이따금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승환은 ‘공을 받아들고 한번쯤 경기장 밖을 쳐다보곤 한다. 먼 곳을 바라보면 포수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했다. 오승환이 ‘최고의 직구’를 던지는 비결 중 하나다.”

기사를 읽으며 야구 외적으로도 참 중요한 인생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치열한 문제와 직면할 때, 오히려 여유를 가지고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 너무나 중요합니다. 정확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의 숱한 시련을 이겨낼 용기와 힘을 얻게 됩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지금 우리는 이 소중한 수요일 밤에 함께 모여 말씀과 기도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코로나19로 인한 많은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매주일을 지켜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눈앞에 신비로운 일들이 화려하게 펼쳐지지 않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배당에 등장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배는 주님의 위대한 영광으로 나아가게 하는 가장 소중한 은총의 도구입니다. 예배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뜻을 함께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복음의 생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무엇보다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사랑방을 비롯한 여러 소그룹을 더욱더 사모하며 모이시길 바랍니다. 각종 양육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작고 건강한 다양한 모임을 통해 예배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또 다른 빛깔의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마저 어렵다면 매일 단 1분이라도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 방이든 차 안이든 혼자 조용히 주님의 영광을 묵상하시길 권합니다. 단언하건데, 그러한 산 위의 시간들이 여러분들의 내면을 참으로 건강하고 풍요롭게 할 줄 믿습니다.


그런데 이처럼 “산 위를 향해야” 한다는 진리와 동시에 반드시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산 위에만” 머물러 있는 걸 원치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놀라운 영광뿐만 아니라 그분 곁에 선 모세와 엘리야를 바라본 베드로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감격과 동시에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만 예수님의 마음을 신중하게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른 채 어리석은 욕망을 쉽게 내뱉었습니다. 바로, 영광스런 산 위에 함께 머무르는 것입니다. 주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각각 천막을 치고 거기에 계속 살자고 스승에게 건의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 순간, 제자들의 눈앞에 펼쳐졌던 신기한 광경들이 사라졌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그들이 진정 마음 깊이 담아 두어야 할 진리를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9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께서는 더 이상 산 위에 계시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당신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 그들이 그곳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한 번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그 모습 그대로, 영광스럽고 찬란한 빛에 둘러 싸여 산 위만 줄곧 계신다면 어떻게 될까요? 더 이상 가난하고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의 경배만을 받으며 얼마든지 편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 아무런 손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굳이 산 아래로 내려 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을 얻기 위해 본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 17~18절 말씀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 아래에서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 아이는 귀신들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처참한 광경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가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산 아래로 가야만 사람들의 눈물과 땀으로 질퍽거리는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산 아래로 가야만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산 아래로 가야만 마침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그림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인 라파엘로 산치오의 유작 “그리스도의 변모”(Transfiguration, 1518-20) 입니다. 이 작품은 본문에 묘사된 주님의 찬란한 변화를 웅장한 화법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그가 단지 예수님의 영광만을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래쪽 우편을 자세히 보시길 바랍니다. 확대한 그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라파엘로는 변화산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 위에서 보이신 주님의 눈부신 영광과 산 아래, 귀신들린 소년의 고통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명확하게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을 함께 한 화폭에 담았습니다. 두 장면이 하나로 합해질 때에만 복음의 양면이 가지는 조화와 균형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 바라며 당부합니다. 주님의 찬란한 영광을 소망하며 저마다의 영적 산 위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의 신비를 경험하는 것을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참으로 살리는 생명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가 산 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절대로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넓힐 수 없습니다.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를 사모하며 교회 안에 모이는 이유는 더욱 당당히 교회 밖을 향해 흩어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이웃에게 사랑의 언어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묵상해야 하는 목적은 그 말씀을 저마다의 삶으로 향기롭게 번역하기 위함입니다. 

이렇듯 성도는 산에서 내려가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소중한 진리를 잊어버린 채 산 아래에만 주저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혹은 산 위에만 머물러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 없는 부활, 혹은 부활 없는 십자가처럼 철저히 뒤틀리고 그을린, 병든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산 위에서의 예수님과 산 아래에서의 예수님 모두를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참으로 깨닫고 전하기 위해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함께 꿈꾸는 선교적 교회와 마을 목회의 지향점입니다. 대단히 새롭거나 기발한 생각이 아닙니다. 성경에 담긴 신앙의 본질을 교회 가운데 이루려는 움직임입니다. 동시에, 우리 교회가 이미 지난 116년의 역사를 통해 포항 땅에 선명하게 남긴 발자취이기도합니다. 그 어느 교회 보다 열심히 예배로 모였습니다. 말씀을 사모하고 뜨겁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산 위에서 보내는 영광의 시간을 힘써 지켰습니다.

동시에 학교를 세워 민족 교육과 계몽에 힘썼습니다. 3.1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해서 일제의 폭정과 맞섰습니다. 그 외에도 산 아래에서 고통 받고 신음하는 이웃을 위해 여러 모양의 귀한 섬김을 이어갔습니다.

또한 작년에 코로나19가 확산된 이후 우리 교회가 지나온 신앙 여정을 돌이켜 보시길 바랍니다. 전지구적인 재난을 겪으며 지친 몸과 마음의 회복을 위해 산 위의 시간을 보냈습니다. ‘백통’을 통해 성경 통독과 말씀 묵상에 힘썼습니다. 또한 ‘단련’과 ‘기품’을 통해 기도를 새롭게 배우고 익히는 귀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동시에, 주님과 함께 세상으로 나아가며 일상을 새롭게 일구는 산 아래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올리브 헌금을 모아 코로나19로 고통 받는 이웃과 교회를 섬겼습니다.  지난 여름, “소명으로 사는 확실한 행복”, 줄여서 ‘소확행’이라는 이름으로 온 가족성경학교를 보냈습니다. 그리고 올 하반기는 “회복력 있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믿음 가운데 삶의 시련을 딛고 도약할 수 있도록 다양한 계획들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과정들을 통해 주님께서 몸소 본을 보이셨고, 우리 교회의 위대한 신앙 선배들이 일찍이 앞서 걸으신 균형 있고 건강한 신앙을 회복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순과 낯선 진리로 말미암아 당황해하고 힘겨워하는 우리를 산 위로 이끄십니다. 바로 거기서 놀랍고도 위대한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따라서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주님만의 찬란한 빛이 머무는 예배의 자리를 향해 눈길을 두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 빛을 가슴 깊이 품고 산 아래,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주님께서 거룩한 정관사와 함께, 사랑을 담아 부르시고 날마다 이끌어 주실 줄 분명히 믿습니다.


기도 
영광의 하나님
고단한 삶을 살아가며 때때로 번민과 갈등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주님께 실망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원망이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예배의 산 위를 오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고유한 광채를 마주하며 새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산 위에만 머무르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우리나라 안팎의 고난 받는 사람들, 살아갈 희망을 잃고 슬픔에 사무쳐 신음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이들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본받아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주님의 뜻을 넓히게 하옵소서.
산 아래로 내려가기 위해, 산 위로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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