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일교회 주일 1부예배, 2021년 11월 7일, 목사 정대진
룻 4:1~12; 딤전 6:17~19 "이름이 지워질 때와 남겨질 때"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17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18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19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디모데전후서는 사도 바울이 ‘믿음 안에서 참 아들 된’ 디모데를 향해 사랑을 담아 쓴 편지입니다. 특별히 그가 목회자로서 명심해야 할 내용들을 담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본문 17~19절은 부유한 교인들을 향한 교훈입니다. 그것은 바로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참된 생명을 취하기 위해 기꺼이 나누라는 권면입니다.
이러한 말씀의 풍성한 의미를 깨닫기 위해 함께 살펴봐야 할 구약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룻기 입니다. 그 중에서 4장 3~6절을 화면 보시면서, 새번역 성경으로 저와 한 절씩 나누어 읽겠습니다.
3 보아스가 집안간으로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에게 말하였다.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의 친족 엘리멜렉이 가지고 있는 밭을 팔려고 내놓았소.
4 나는 이 사실을 분명히 알려 드리오. 여기 앉아 계시는 분들과 우리 마을 어른들께서 보시는 앞에서, 나는 당신이 그 밭을 사라고 말씀드리오. 당신이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을 지겠다면, 그렇게 하시오. 그러나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을 지지 않겠다면, 그렇게 하지 않겠다고 분명히 말하여 주시오. 당신이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첫째 사람이오. 나는 그 다음이오." 그러자 그가 대답하였다. "내가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을 지겠소."
5 보아스가 다시 말하였다. "그렇다면,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로, 고인의 아내인 모압 여인 룻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오. 그렇게 하여야만, 그가 물려받은 그 유산이 고인의 이름으로 남게 될 것이오."
6 그러자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이 있는 그 사람이 말하였다. "그런 조건이라면 나는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을 질 수 없소. 잘못하다가는 내 재산만 축나겠소. 나는 그 책임을 질 수 없으니, 당신이 내가 져야 할 집안간으로서의 책임을 지시오."
유명한 장면이어서 많이 친숙하실 것입니다. 그렇지만 솔직히 이 내용이 정확히 이해되십니까? 저는 몇 년 전에 어떤 계기가 있어 해당 본문을 오랜 시간 붙잡고 씨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잘 모르겠다.’입니다.
대충 쉽게 넘어가서 그렇지, 여기에는 너무나 많은 난제와 논쟁거리가 있습니다. 먹을 게 없어 부득이 며느리를 시켜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했던 나오미가 팔려고 내 놓았다는 그 땅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율법에 따라 친척으로서 감당해야할 책임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그리고 대체 그게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과 어떤 관계일까요? 룻기가 다루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척 어렵습니다.
이렇게 복잡한 문제일수록 해결을 위해서는 먼저 명확한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습니다. 룻기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룻기가 ‘이름’이라는 주제를 특별하게 다룬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룻기는 그 어떤 성경보다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 책의 결론에 이르는 가장 결정적인 순간에 이름에 대한 언급을 반복합니다. 화면 보시면서 함께 확인하시겠습니다.
먼저 보아스는 친척과의 대화에서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했습니다(룻 4:5). 이어서 성문 앞에서 그 친척과의 모든 공적 절차를 마치고 보아스가 결과를 선포할 때 역시 ‘이름’을 두 번이나 연거푸 언급합니다(룻 4:10). 뿐만 아니라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보아스를 향해 그 자리에 증인으로 모인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이름’이 명예롭게 알려지길 축복합니다(룻 4:11b).
그런데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보아스의 온전한 섬김이 낳은 결실인 아기를 마을 여인들이 축복합니다. 그러면서 앞서 보아스가 성문에서 받은 축복의 내용과 마찬가지로 그 아이 또한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길 기원하였습니다(룻 4:14). 심지어 아기의 이름을 아버지나 어머니나 혹은 할아지나 할머니가 아닌 동네 여인들이 지어주었습니다. 바로 ‘오벳’입니다. 그 맥락 속에서 ‘다윗’이라는 위대한 이름이 등장하며 이 아름다운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룻 4:17, 22).
이렇듯 룻기는 성경 속 그 어느 책보다 ‘이름’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합니다. 왜냐하면, 고대인들에게 있어 이름은 단지 한 사람을 향해 부르는 호칭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의 존재 자체를 뜻합니다. 그가 지닌 참된 생명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반드시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전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저 없이 사랑으로 희생을 하는 것이 바로 룻기가 알려주는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를 유념할 때, 룻기 본문이 두 사람의 이름을 매우 대조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바로 어느 친척과 보아스 입니다. 먼저, 보아스와 성문에서 마주했던 그 친척의 이름을 끝내 알 수 없다는 점을 주목해야 합니다. 별거 아닌 걸로 쉽게 넘길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에도 정작 그 이름은 모르는 사람들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익명의 친척을 바라보는 성경의 시선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매우 싸늘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친척은 가족으로서의 책임은 쉽게 저버리고 오로지 자기 재산을 지키는 데만 열중 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율법에 담긴 하나님의 뜻보다는 돈을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러한 삶의 태도는 보아스의 주도면밀한 대화법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친척에게 건넨 제안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집니다. 처음에는 엘리멜렉의 땅 이야기만 했습니다. 사사시대 베들레헴 마을에서 희년법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분명 일정부분 손해를 감수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길게 보았을 때, 그 친척에게도 어느 정도 이익이 돌아왔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무시하기 어려웠기에 설령 밑지는 계약이라 할지라도 그가 감수할만한 수준은 되었을 것입니다.
그런 까닭에 친척은 긴장을 풀고 선뜻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그에게 나오미와 관련한 모든 진실을 공개합니다. 그의 며느리 룻을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그 의무를 다하기 위해 막대한 양육비용이 소요됩니다. 게다가 그 아이의 호적은 자기가 아닌 죽은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그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철저히 희생만 요구당할 뿐입니다.
그러자 그 친척은 지금껏 그나마 지켜왔던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끈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확고히 거부합니다. 그러면서 모든 절차를 마치며 보아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룻 4:8) 얼핏 듣기에 상당히 점잖은 표현입니다. 하지만 이 문장을 구약 원문의 맥락과 분위기에 따라 “너나 사라!”로 의역하는 학자도 있습니다(민영진). 저는 동의합니다. 상당히 일리가 있습니다. 그만큼 그의 반응이 매우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이 때, 보아스가 의도적으로 그 행동을 유도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반응을 충분히 예상했습니다. 좁은 마을 공동체에서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내며 그의 가치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친척은 재산축적을 삶의 최우선순위로 여겼습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돈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재물에 대한 그 친척의 어리석은 집착입니다. 그 결과 물질을 손에 들려주신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았습니다. 힘겨운 가난으로 고통 받는 가족의 아픔에 눈을 감았습니다. 희년법에 담긴 놀라운 은혜를 무시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부린 욕심의 파장은 단지 한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가정을 넘어, 공동체를 향해 심각한 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핵가족을 넘어 1인 가정이 보편화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의 대가족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 개념이 친족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가집니다. 지파를 넘어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아래 한 가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말 성경에서 편의상 ‘친척’으로 번역한 단어 대부분은 직역하면 ‘형제’라는 뜻입니다. 구약성경은 두 개념을 크게 구별하지 않고 사용합니다.
그러나 그 이름 모를 친척은 형제로서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가족을 넘어서는, 진정한 가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치고 상한 이들을 향한 주님의 뜻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회복시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했습니다.
가난하여 어린 여자의 몸으로 위험을 무릅쓰고 거친 남정네들 사이를 오가며 이삭을 줍는 비참한 현실에 함께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돌아와 그 이름을 이어줄 자손이 없는 눈물겨운 절망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자기 재산을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대신 오로지 돈 밖에 몰랐습니다.
어쩌면 그는 성문에서 집으로 돌아가 안도의 한 숨을 내 쉬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 바보처럼 후덕한 친척 보아스 덕분에 심각한 위기를 넘겼다고 여겼을 겁니다. 재산을 무사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큰 창피도 겪지 않았다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남편을 잃은 여인을 아내로 거두어 자녀를 낳아 죽은 자의 이름을 잇는 것은 룻기만의 독특한 모습이 아닙니다. 이미 신명기 25장 5~10절에 ‘형사취수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줄여서 ‘수혼’이라고도 부릅니다.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수를 아내로 맞이해 형의 이름으로 자녀를 낳아 과부를 돌보게 하는 제도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시선으로는 괴상해 보이지만, 전 세계적으로 고대 유목민들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사회현상입니다.
그런데 모세는 이를 어길 경우 엄중히 처벌할 것을 명령하였습니다. 신명기 25장 9절 읽어 드리겠습니다.
9 그의 형제의 아내가 장로들 앞에서 그에게 나아가서 그의 발에서 신을 벗기고 그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이르기를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에게는 이같이 할 것이라 하고
가족의 생명을 이어가는 의무를 행하지 않는 자에게 치욕적인 형벌이 공개적으로 시행됩니다. 피해를 겪은 과부가 마을 장로들 앞에서 그의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를 가리켜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라고 동네 사람들을 향해 선언합니다.
룻기의 그 친척 역시 이러한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과 비교해 보면 사실 그는 성문 앞에서 어떤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순탄하게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치명적인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로 이름이 지워진 것입니다.
분명 그에게도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끝내 그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 룻기는 단지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정도로 머물지 않습니다. 철저히 은폐합니다. 마치 그가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름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관련해서 룻기 4장 1절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히, 플로니 알모니>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는 지난 밤 룻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문에 올라가 문제의 그 친척을 발견했습니다. 여기서 룻기는 단순히 보아스가 그 사람을 불렀다고, 동작을 설명하는 간접화법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마치 따옴표를 넣듯이 호칭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문장 안에 정작 그의 이름은 없습니다.
그 대신 <플로니 알모니>라는 독특한 히브리어 단어가 등장합니다. 굳이 직역하자면 ‘어떤 무엇’(such a one)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단 3번 만 사용된 희귀한 표현입니다. 그것도 하나는 사물(삼상 21:3), 다른 하나는 장소(왕하 6:8)를 가리킵니다.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는 본문이 유일합니다. 이처럼 난해한 까닭에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성경은 ‘아무개’라고 번역 했습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보아스가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성문 앞에서 그 친척을 향해 실제로 <플로니 알모니>라고, “어떤 무엇아!” 혹은 “아무개야!”라고 불렀을 리가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룻기는 마치 공중파 TV에서 비속어가 나올 때 “삐~”소리로 음소거 처리 하듯이, 그의 이름을 지워버립니다. 저자의 명백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는 성경에서 이름이 사라지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그 친척의 잘못과 그를 향한 하나님의 준엄한 꾸짖음 보며 떠오른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도덕경 73장에 나오는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입니다. “하늘의 그물은 크고 넓어 엉성해 보이지만 결코 놓치는 법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 친척은 당대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약삭빠르게 처신해 여유를 누린 사람으로 평가받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주님의 시선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는 가장 엄중한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보아스의 이름은 그 친척과 명백히 대조적으로 기록됩니다. 앞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그 날 성문에서의 거래는 누가 봐도 그에게 상당히 손해입니다. 사실 철저한 약자인 이방 여인 룻의 형편 따위는 그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간밤에 맺은 약속쯤이야 얼마든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을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보아스에게 누구도 감히 항의하거나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결코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내려 놓았습니다. 굳이 다른 친척의 양보를 받아내면서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간혹 룻기를 삼류 로맨스 소설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유한 중년 남성인 보아스가 어리고 예쁜 룻을 보고 반해서 손해를 무릅쓰고 사랑을 이루어 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명백한 오해입니다. 룻기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잡다단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함부로 웃으며 넘길 수없는 보아스가 막대한 희생을 보여줍니다. 적어도 재정적인 이익과 손해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 친척이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정세가 불안했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과 긴장관계인 모압 여인과 혼인하여 아기를 낳는 위험도 감수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아스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희년 법에 따라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사명 앞에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참 생명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할 것은 그 방식입니다. 보아스는 그 이름 모를 친척과는 정반대로 메시아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룻기의 마지막 두 구절인 4장 21~2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보아스는 룻기에서 단지 등장인물로만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인 다윗의 이름으로 끝맺는 족보에 두 번이나 거듭해서 이름이 기록됩니다. 즉, 보아스는 베들레헴 마을의 인자한 아저씨로만 동네사람들의 기억에 머물다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나란히 이름을 언급되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마태공동체가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복음서로 정리하였습니다. 그 첫 장을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 앞서 본 룻기의 족보를 인용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5~6a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보아스가 룻과 함께, 다윗의 할아버지인 이새를 낳은 아버지로 주님의 거룩하신 족보에 등장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모범적으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놀라운 헌신과 희생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정신을 무엇보다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벳이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들이긴 하지만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엘리멜렉의 대를 잇는 인물입니다. 따라서 엄밀하게 따지면, 족보상으로는 보아스가 아니라 엘리멜렉의 아들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 이름 모를 친척이 책임을 거부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그런데 왜 룻기는 마지막 단락에 이르러, 성문 앞에서의 치열한 논의와 정반대로 결론지었을까요?
이것은 룻기를 둘러싼 가장 치열한 논쟁거리중 하나입니다. 저 역시 이를 두고 오랫동안 심각하게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다 여러 연구를 참고하여 내린 결론은 이것입니다. 보아스가 살던 사사시대에는 분명 오벳이 엘리멜렉의 아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전해 내려오지 않지만 그 당시 기록된 족보에는 그렇게 율법에 따라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보아스에 대한 이야기가 율법의 문자를 뛰어 넘어 오랜 세월을 지나 살아남았습니다. 수백년이 지나 바벨론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어느새 일반적으로 통용되었던 족보의 기록 원칙을 차츰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하여 룻기를 최종 완성한 편집자들은 보아스가 오벳의 진정한 아버지이고 증조할아버지로 인정하여 새로운 족보를 넣었습니다. 마침내 따뜻한 사랑이 싸늘한 문자를 이겼습니다. 치열한 희생이 완고한 규칙을 뛰어넘었습니다.
이름에 담긴, 누군가의 인격과 존엄성을 가볍게 여긴 사람은 결국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반면에 다른 사람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며 그 어떤 어려움에도 주어진 사명을 묵묵히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가 전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단지 나오미와 룻, 가련한 두 과부의 인생만 구하지 않았습니다. 고된 삶의 현실속에 아파하며 회복을 갈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참 생명이 가진 희망을 보여 주었습니다.
오늘 신약 본문 중에서 17~19절을 새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7 그대는 이 세상의 부자들에게 명령하여, 교만해지지도 말고, 덧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도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풍성히 주셔서 즐기게 하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하십시오. 18 또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주라고 하십시오. 19 그렇게 하여, 앞날을 위하여 든든한 기초를 스스로 쌓아서, 참된 생명을 얻으라고 하십시오.
바울이 의도하진 않았겠지만, 저는 이 말씀을 읽으며 자연스럽게 보아스가 떠올랐습니다. 그야말로 선을 행하고, 좋은 일을 많이 하고, 아낌없이 베풀고, 즐겨 나누어, 앞날을 위한 든든한 기초를 쌓아 참된 생명을 얻은, 가장 모범적인 신앙인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보아스의 삶을 통해 바울이 단순히 부자교인들에게만 한정된 목회 지침을 제시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세상은 사람들을 재산을 기준으로 나누고 평가합니다. 하지만 교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안에서 모두가 한 가족입니다. 기꺼이 서로 나눕니다. 때로는 손해도 감수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사랑은 실체로서 다가가게 됩니다. 약함과 한계를 딛고 진정한 생명을 함께 호흡할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든든한 기초를 쌓아, 더불어 살아가는 모두에게 참된 생명과 은혜를 전하고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생명의 주 하나님
선을 행하고 나누어 주길 좋아했던 보아스의 위대한 신앙을 마음에 새깁니다. 동시에 그와 정반대로 재물에 소망을 두었던 어느 이름 모를 친척의 어리석은 탐욕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이름은 성경 안에 찬란하게 새기시고 그 친척의 이름은 지우신 뜻 앞에 겸손히 자신을 돌아봅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며 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조
포항제일교회는 2021년 하반기를 "회복력 있는 신앙"이라는 주제로 보냈습니다.
그 일환으로 11월 7일, 부목사 네 명이 공통으로 디모데전서 6장 11~19절을 본문으로 하여 "참된 생명을 취하는 가정"이라는 제목으로 주일 설교를 했습니다.
이날 제가 1부 예배에서 했던 설교 원고입니다.
주안점에 따라 본문과 제목과 내용 구성을 수정하여 공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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