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8월 27일 일요일

사무엘상 16장 1절, "한 왕을 보았느니라"

2023년 8월 23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6장 1절, "한 왕을 보았느니라"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많은 분이 공감하실 겁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 마음은 항상 불안합니다. 이새가 그랬습니다. 게다가 전쟁 중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염려에 빠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군복무 중인 아들들을 먹이고, 그들 지휘관을 대접할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인 엘라 골짜기는 그가 살고 있는 베들레헴에서 서쪽으로 약 23km 정도에 위치합니다. 우리 교회를 기준으로 하면, 직선거리로 광화문까지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기에는 꽤 멉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사이에는 메마르고 거친 산줄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강도를 비롯한 여러 위험이 있습니다. 나이 많은 이새가 도무지 직접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자기 대신 누구를 보낼까요? 종을 보내거나 아니면 건장한 아들에게 심부름 시키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는 막내 다윗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은 몇 살이었을까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2~14절에 보면, 그에게는 형 일곱이 있었고 그 중 3명이 군대에 끌려갔습니다. 따라서 넷째 형부터는 입영 대상 기준이 아닙니다. 이를 토대로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당시 다윗은 갓 어린아이티를 벗은 10대 초중반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이새는 이미 다 큰 아들들은 지극정성으로 배려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어리고 힘없는 막내에게는 정반대로 막 대합니다. 그의 여린 어깨 위에 육중한 짐을 들려 힘겹고도 고된 여정을 혼자 보냈습니다. 이 상황이 이해되십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전쟁터에서 매우 비참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감히 하나님의 군대를 날마다 모독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대에서 누구 하나 당당히 맞서 싸우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그 모습에 거룩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분연히 일어나 골리앗과 대결을 자원합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잔악무도한 사울 왕이더라도 뽀얀 살결의 소년이 저 괴물 같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걸 차마 허락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이 사울을 설득하기 위해 들려준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그 시절, 어린 다윗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3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잘 알다시피, 그는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양 떼를 이끌고 다녔던 유다 광야는 푸른 풀이 아름답게 우거진 한가로운 목장이 아닙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에는 험악한 사자나 곰이 빈번하게 출몰하였습니다. 맹수들이 양뿐만 아니라 다윗의 목숨까지도 해치러 달려드는 매우 위험천만한 광야입니다. 

이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라면 아무리 집안 경제 사정이 어렵다 한들, 어린 아들에게 돈 벌어오라며 음산한 길거리에 아무렇지 않게 내보낼 수 있으십니까? 정상적인 부모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오늘날 인권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의 유년 시절을 묘사하는 성경의 태도는 일관됩니다. 바로 부모로부터 당한 철저한 배제와 소외입니다. 그는 자라가며 마땅한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무엘이 집에 찾아왔음에도 형들과는 달리 초대받지 못한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윗은 시편 27편 10절에 다음과 같은 눈물겨운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도 다윗은 아름다운 신앙을 꿋꿋하게 지켰습니다. 본문 바로 뒤에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에 악령이 틈타 깊은 고통에 시달리는 사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신하들은 탁월한 수금 연주자 한 명을 곁에 두어서 그 음악 소리를 통해 고통을 이겨내시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의견을 받아들인 사울의 허락 아래 찾은 적임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최고의 수금 연주자로 인정받았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그의 수금 실력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을 알려줄까요? 당연히 그 악기를 날마다 부단히 연습했음을 의미합니다.

음악가들이 흔히 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 연습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 안 하면 스승이 알고, 삼일 연습 안 하면 관객이 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왕 앞에 수금을 들고 설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그 악기를 항상 가까이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울의 신하들이 단순히 능숙한 연주자를 찾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악령이 떠나갈 정도로 성령 충만한, 영의 찬양을 들려줄 사람을 구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어릴 때부터 날마다 수금을 들고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을 쉼 없이 드린 예배자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무엘상 16장 18절에, 다윗을 가리켜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본래 순박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권력을 손에 쥔 후 차츰 하나님과 멀어지고 심지어는 대적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울 대신에 다른 왕을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누군가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매우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왕은 현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울이 아니라 나중에 새로 즉위할 다른 왕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보았다.”가 아니라 “볼 것이다.”라는, 미래 의미로 표현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경우 히브리어 문법상 보통 ‘미완료 동사’로 적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반대로 과거 혹은 현재 사건을 뜻하는 ‘완료형’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미래 사건을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완료형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경우를 가리켜 ‘예언적 완료형’(perfectum propheticum)이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드러내는 구약 성경 특유의 표현법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신 “한 왕”은 누구일까요? 그는 분명히 다윗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직 그는 왕이 되기는커녕 다윗이라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그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앞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지극히 마땅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유다 광야에서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참혹한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며, 저 멀리 들리는 맹수들의 섬뜩한 울음소리 가운데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켰습니다. 그렇게 그는 무수한 좌절로 얼룩진 비참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럼에도, 그 모든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날마다 수금을 손에 움켜 쥐며 잠잠히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황량한 광야 한복판에서 눈물 맺힌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찬양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 눈망울에 당신의 두 눈을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이 선언은 하나님의 위대한 감탄이자 의지입니다. 사람들 눈에 다윗은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초라한 아이였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눈에는 이미 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날, 마치 어린 다윗과 같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진 않으셨습니까? 그 시절, 힘겹게 거닐었던 여러분의 유다 광야는 어디입니까? 혹시 그 아픔이 여전히 내면 깊숙한 어두운 곳을 찌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건 간에, 다른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그 어떤 멸시를 당하든 간에 상관없이,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묵묵히 일구어 나갈 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향한 위대한 뜻과 계획을 예언적 완료형으로 선언하십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항상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이렇듯 본문은 다윗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눈길을 묘사합니다. 이 안에 담긴 위대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묵상의 걸음을 더욱더 멀리 내디뎌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한순간의 ‘완성’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과정’이라는 진리입니다.

다윗을 향한 주님의 찬란한 계획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위대한 예언자이며 제사장이자 사사인 사무엘이 직접 그의 머리 위에 기름 부었습니다. 심지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감격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많은 백성의 환호와 지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를 왕으로 눈여겨보시고 부르신 하나님 말씀이 금세 이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가 지금 당장 권력을 손에 쥔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윗은 순탄하게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한참 동안 먼 길을 돌아, 무려 약 10년간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임금이 되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 척까지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혹독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를 실현하며 메시아를 예고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중대한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뺏은 것과 온 이스라엘 가운데 군사로 모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헤아린 것입니다.

이 두 사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시대 권력자의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라는 사실입니다. 왕이 눈에 띄는 여인을 마음대로 곁에 두는 사례는 역사책에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여인이 유린당하는 끔찍한 성범죄가 일어났습니다. 밧세바가 대표적인 희생자입니다.

또한 나라의 군사력을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군 통수권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책무는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켜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 엄중히 금지하신 까닭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현실을 핑계로 하나님보다 창과 칼과 병거를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 두 가지 죄에 분노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도망자 시절은 물론이고 왕관을 머리 위에 얹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왕으로서 ‘과정’에 있음을 잊어버린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느샌가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왕으로 ‘완성’ 되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 결과, 주변 다른 나라 왕들과 같은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극명하게 나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반복하신 경고를 끝까지 거부한 채 자신이 이미 왕이 다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어떻게든 왕권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탐욕을 향해 맹렬히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자신이 아직 왕이 아닌, ‘왕이 되어가는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아무런 자격 없던, 초라한 목동을 이 자리로 부르시고 이끄신 주님의 놀라운 은총과 다시 마주했습니다. 그리하여 순박한 소년의 미소를 되찾았습니다.

열왕기상 1장은 그러한 다윗의 말년을 기록합니다. 1~4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2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몹시 늙어서 이불을 덮어도 냉기를 느낄 정도로 기력이 많이 쇠하였습니다. 신하들은 고민에 빠져 여러 차례 논의 끝에 묘수를 찾았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예쁜 처녀, 아비삭을 구해다가 다윗이 그녀를 안고 따뜻하게 주무시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 왕으로서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밧세바와 달리 유부녀도 아니었습니다. 율법 기준에도 비난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결코 아비삭과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다윗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가 아직 왕이 아니라 평생 주님 앞에서 왕이 되어가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내면 깊이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죄악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비참하게 희생당한 우리야와 능욕을 겪은 밧세바의 고통을 마음에서 지우지 않았습니다.

늙은 왕의 품에 어린 소녀를 안기려는 계획은 중년 남성 정치가들 입장에서는 탁월한 판단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결정에 따라 진행할 과정과 결과는 여전히 참담합니다. ‘미모’는 철저히 주관적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예쁜 처녀’라는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고관대작의 여식으로 결정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비삭은 지방 권력자에게 저항할 수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집의 딸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윗은 이기적인 편의에 취해 그런 내밀한 현실을 모른척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 버거운 공포와 수치심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허물이 아니더라도 말씀 앞에 겸손히 자신을 다스렸습니다. 아비삭의 몸에 욕망 어린 손길을 뻗는 대신, 자신이 오래전 앞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따스한 눈길을 그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기 삶을 마무리 했습니다. 초라한 소년 목동을 왕으로 세우신 놀라운 사랑의 시선에 일평생 응답하며 살아갔습니다.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묵묵히 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부득이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설교 초안은 제가 대학 시절에 했던 묵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때 저는 목회자가 되길 꿈꾸며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무척 많은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너무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며 수 없이 절망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한동안은 저를 향해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몹시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차츰 목사로 불리는 게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함께 읽은 말씀과 지금까지 저를 신실하게 이끄신 주님의 손길을 통해 절절히 고백합니다. 저는 일평생 그저 ‘목사가 되어가는 사람’이지 결코 그 어떤 순간도 ‘목사로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샌가 ‘이제 목사가 다 되었다.’고 착각하는 순간, 저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가장 멀어지며 변질된다는 진실 또한 엄중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 아래 일평생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신앙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서 3장 12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새번역 성경)

그러므로 너무 교만하거나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지나치게 스스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신실하신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모든 여정 가운데 언제나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눈길을 신뢰하며 주어진 일상을 다윗처럼 날마다 희망차게 일구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향해 오늘도 하나님께서 따스한 사랑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기도
자녀들의 중심을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 옛날, 거친 광야에서 외로이 눈물을 삼키는 어린 다윗을 향해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주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가 저마다 지니는 힘겨움과 아픔 또한 누구보다 잘 아시고 위로하시며 새로운 삶의 길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양과 기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또한 주님의 부르심은 완성이 아니라 평생에 이르는 과정임을 고백합니다. 은총의 긴장과 균형을 지켜가며 좌절과 교만을 넘어 참된 구원의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다윗과 같이 연약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더욱더 섬김과 나눔을 이어가게 하옵소서.
참 생명의 길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열어 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