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6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7장 1~8절 “전능하신 하나님”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2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 하시니
3 아브람이 엎드렸더니 하나님이 또 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4 보라 내 언약이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지라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1)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6 내가 너로 심히 번성하게 하리니 내가 네게서 민족들이 나게 하며 왕들이 네게로부터 나오리라
7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및 네 대대 후손 사이에 세워서 영원한 언약을 삼고 너와 네 후손의 하나님이 되리라
8 내가 너와 네 후손에게 네가 거류하는 이 땅 곧 가나안 온 땅을 주어 영원한 기업이 되게 하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은 무력합니다. 섬뜩한 포탄 소리에 놀라 울고 있는 우크라이나 어린이에게, 대홍수로 삶의 터전을 잃은 리비아 수재민에게, 오랜 기근으로 굶주린 배를 힘없이 어루만지는 아프리카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무력합니다.
먼 나라의 거대한 재앙만이 아닙니다. 이 자리에 계신 모두 오래 기도했지만 도무지 이루어지지 않은 응답으로 절망해 본 적 있으실 겁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가족이 있습니다. 아무리 간청해도 병이 낫지 않습니다. 아무리 부르짖어도 해결되지 않는 경제적 어려움이 있습니다.
애초에 믿고 의지할 대상이 없으면 차라리 더 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창조주를 믿고 섬기기에, 신앙과 현실 사이 무한한 거리와 무게가 나를 짓누릅니다. 주님을 향한 깊은 실망과 배신감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평범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일이 아닙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받는 아브라함의 이야기입니다.
본문 바로 앞 절인 창세기 16장 16절을 읽어드리겠습니다.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창세기 16장은 하갈이 고난 끝에 이스마엘을 낳은 사실을 알려주며 끝을 맺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는 86세였습니다. 그리고 바로 다음절인 본문 1절 읽어 드리겠습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단 한 절 만에 무려 13년이 훌쩍 지났습니다. 86세였던 아브라함은 어느새 99세가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처음 하나님께 부르심을 받은 나이는 75세입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이미 굉장히 보기 드문, 상당히 나이 많은 노인입니다. 그가 겪은 치명적인 비극이 있습니다. 바로 자녀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도 많은 가정이 난임으로 고통받고 있습니다. 우리 조상도 대를 이을 자손을 낳는 걸 매우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이 살았던 고대 서아시아에서 아들의 의미는 그 이상 훨씬 더 막중합니다. 이미 지난 주 금요일 새벽에 설명 드렸지만 한 번 더 말씀 드리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살았던 세계에서 자녀는 단순한 혈육이 아닙니다. 그의 존재가치가 곧 신에게 인정받았다는 뜻입니다. 아들과 손자와 많은 후손이 생긴다는 것은 조상의 생명이 영원히 이땅에 이어질 만하다고 하나님에게 복을 받은 결과입니다. 그렇다면 정반대로 아기를 갖지 못한다면, 주위 사람들은 물론 자기 자신도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명확한 저주로 이해했습니다. 그의 숨결이 더 이상 세상에 이어질 가치가 없다는 징벌로 여겼습니다.
현대인에게는 말도 안되는 소리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오랜 옛날 가나안 사람들에게는 매우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아브라함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가 보낸 75년의 세월 속에 이루 말할 수 없는 설움이 차올랐습니다. 그런 그를 주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거대한 규모와 화려한 문화를 자랑하는 도시 우르의 우상들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에게 가슴 벅찬 감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주님께 가장 원초적으로 기대한 소원은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아들 하나 낳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여주신 거대한 능력에 비하면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로부터 무려 24년이 흘렀습니다. 그 사이에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주님과 함께 한 승리와 영광의 순간도 분명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브라함 마음 속 가장 깊은 슬픔과 절망에 대해서는 주님은 분명 무력하셨습니다.
하나님 없이 지낸 75년과 다른 결의 처연한 슬픔이 하나님을 알고 지낸 24년 동안 그의 내면에 차곡차곡 차올랐습니다. 그것이 99세 노인 아브라함의 상황입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주님께 상당히 도발적인 행동을 합니다. 바로 비웃음입니다. 창세기 이야기 흐름에 따르면 13년만에 불쑥 나타난 하나님은 그에게 지난날 맺은 언약을 다시 꺼내 십니다. 그에게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거라고 약속합니다. 그의 수많은 자손이 가나안 땅을 물려받을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하나님께 아브라함은 어떻게 반응했을까요? 창세기 17장 17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7 아브라함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려, 웃으면서 혼잣말을 하였다. "나이 백 살 된 남자가 아들을 낳는다고? 또 아흔 살이나 되는 사라가 아이를 낳을 수 있을까?“
아브라함은 자기 앞에 나타나신 하나님 앞에 본능적으로 엎드려 예의를 갖추긴 했습니다. 그렇지만 더 이상 주님의 말씀에 더 이상 감격하진 않습니다. 싸늘한 쓴웃음을 짓습니다. 그의 영혼을 사로잡은 섬뜩한 냉기가 입 밖으로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것만 같습니다. 사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과연 누가 그런 아브라함을 향해 믿음없다고 꾸짖을 수 있겠습니까?
바로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성경은 그 어떤 누구도 영웅적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조상 아브라함 역시 평범한 사람이었음을 알려줍니다. 그 또한 믿음을 두고 갈등하고 번민했습니다. 불신에 사로잡혔고 심지어 주님을 향해 냉소를 지었습니다. 그 순간 그는, 오늘날 저마다의 고난 가운데 하나님의 무력함을 느끼고 절망을 느끼는 모든 사람을 대변합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에 온기가 다시 돌기 위해, 차디찬 쓴웃음을 지우고 따사로운 미소를 되찾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주님의 언약을 더욱더 차근차근 곱씹어야 합니다. 낯설고 새롭게 마주하고 살펴봐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많은 자손과 땅에 대한 언약은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미 몇 차례 반복되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눈에 띄는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바로 이름 변화입니다. 본문 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5 이제 후로는 네 이름을 아브람이라 하지 아니하고 아브라함이라 하리니 이는 내가 너를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되게 함이니라
지금까지 그의 이름은 ‘아브람’입니다. ‘존귀한 아버지’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그의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바꾸셨습니다. 비슷한 발음이지만 ‘많은 사람의 아버지’라는 뜻을 지닙니다. 언약하신 내용을 이름에 그대로 새겨 넣었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인격을 가리킵니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께서는 온 우주를 창조하실 때 피조물을 향해 이름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아담으로 하여금 동물의 이름을 짓게하시며 창조 사역에 참여 시키겼습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이름에는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은 아브라함에게 값싼 위로를 주려고 그의 이름을 바꾸지 않으셨습니다. 위태로운 희망에 취하게 하려고 새로운 이름을 건네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진실로 사라를 통해 그의 아들을 낳아 많은 백성의 아버지로 만들겠다는 창조의지를 단호하게 보여주셨습니다. 그걸 위해 아브람에서 아브라함으로 그의 이름을 변화시켜 주셨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해야 할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시며 그에게 다가오셨습니다. 1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여기서 ‘전능한 하나님’은, 주님이 당신에 대해 ‘전능하다’는 수식어를 붙인 게 아닙니다. 원문 <엘 샤다이>는 하나님의 이름 ‘엘’을 발전시켜 변형한 여러 이름 중 하나입니다. ‘전능하심’이라는 당신의 내면 깊은 속성을 담은 자기 이름을 먼저 아브람에게 들려주셨습니다. 그런 다음 그의 이름을 바꾸시며 그를 향한 놀라운 창조 계획을 확인시켜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낳기까지 과정이야말로 하나님의 전능을 가장 생생히 보여줍니다. 그것은 한순간에 극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원하는 때에 그가 원하는 방법대로 성취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수많은 좌절과 실망에 부딪혀야 했습니다. 가정 안에 심각한 갈등을 겪어야 했습니다. 그 모든 여정 거친 끝에 마침내 이삭이 태어났습니다.
분명 아브라함으로서는 너무나 감당하기 버겁고 힘겨운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모든 세월을 통해 당신의 전능하심이 참으로 어떤 의미인지를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제멋대로 욕심을 휘두르는 독재자의 권력이 아닙니다. 많은 제물로 배를 불린 뒤 마법같은 선물을 던져주는 우상의 권능도 아닙니다. 철저히 무력하고 미련해 보이기에 오히려 이 세상 가장 위대하고 지혜로운 전능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이것을 생생히 증거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려 이렇게 울부짖으셨습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음을 호소하셨습니다. 온 우주를 압도하는 암흑입니다. 이루말할 수 없이 처절한 무력함의 절정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믿고 고백합니다. 그 십자가의 절망이 부활을 꽃피웠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부활의 생명과 능력은 더욱더 아름답고 위대하게 세상을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셨듯이 당신의 이름 ‘엘 샤다이’, ‘전능하신 하나님’으로 다가오시는 주님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이 우리 각자를 향해 새롭게 바꿔 부르시는 이름을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삶의 그 어떤 허무함과 시련과 고난을 넘어설 수 있는 참된 능력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기 때문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무력합니다. 사람의 생각과 판단으로 볼 때 그러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인간의 계획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전능이 항상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우리가 연약할수록, 서툴고 부족할수록 더욱 찬란하게 빛나시는 권능의 손길을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와 주님께서 오늘 하루도 동행하시고 새 힘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전능하신 주 하나님
삶의 여러 고난에 지치고 무너질 때 주님은 무력해 보입니다. 오랜 침묵에 마음을 잃고 주저 않기도 합니다. 저희의 아픔에 영영 무관심한 것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의 전능은 인간의 어리석은 기대를 넘어섬을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자녀들을 향한 위대한 창조의지를 발견합니다. 그 깊은 뜻을 헤아리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마음에 새기고 전하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참으로 무력하시기에 진정 전능하셨던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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