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7일 토요일

창세기 16장 6~16절 “살피시는 하나님”

2023년 9월 2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6장 6~16절 “살피시는 하나님”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7 여호와의 사자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에서 그를 만나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12 그가 사람 중에 들나귀 같이 되리니 그의 손이 모든 사람을 치겠고 모든 사람의 손이 그를 칠지며 그가 모든 형제와 대항해서 살리라 하니라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14 이러므로 그 샘을 브엘라해로이라 불렀으며 그것은 가데스와 베렛 사이에 있더라
15 하갈이 아브람의 아들을 낳으매 아브람이 하갈이 낳은 그 아들을 이름하여 이스마엘이라 하였더라
16 하갈이 아브람에게 이스마엘을 낳았을 때에 아브람이 팔십육 세였더라


한 여인이 도망칩니다. 하지만 마음 내키는 대로 내 달릴 수는 없습니다. 몸이 무겁기 때문입니다. 그녀는 홀몸이 아닙니다. 생명이 몸 안에 자라 배가 불러옵니다. 집 안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이를 앙다물고 황급히 걸음을 옮겨 광야를 지나고 있습니다. ‘임신부 도망자’, 이렇게 두 단어로 요약할 수 있는 처지는 한 인간이 경험하는 극한의 고통을 보여줍니다. 그녀는 어쩌다 이러한 상황에 몰리게 되었을까요? 그 이유를 본문 6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6 아브람이 사래에게 이르되 당신의 여종은 당신의 수중에 있으니 당신의 눈에 좋을 대로 그에게 행하라 하매 사래가 하갈을 학대하였더니 하갈이 사래 앞에서 도망하였더라

비극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브라함의 책임 회피입니다. 오랫동안 임신하지 못한 아내 사래, 그리고 임신한 여종 하갈 사이에 벌어진 갈등을 방치했습니다. 둘 사이에서 제대로 역할을 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내가 자기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그 결과 그녀가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여기서 ‘학대’로 옮긴 히브리어는 <아나>입니다.

이 단어가 출애굽기에도 매우 중요한 순간에 등장합니다. 바로 이집트 사람들이 히브리 노예들에게 고된 중노동을 강요하며 괴롭힐 때입니다. 이를 통해 하갈이 겪었던 고통의 무게와 크기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무지 감당하기 벅찬 절망입니다. 그녀는 마침내 도망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도망치다 하갈은 ‘광야의 샘물 곁 곧 술 길 샘 곁’을 지납니다. 물이 부족한 서아시아 지역에서 여행자들은 자연스럽게 오아시스를 따라 이동했습니다. 하갈에게도 자연스러운 선택입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녀는 뜻밖의 만남을 경험합니다. 바로 ‘여호와의 사자’ 즉, ‘천사’입니다. 달리 말하면 천사를 보내신 하나님입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샘물’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는 ‘지켜보는 눈’이라는 뜻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상당히 오묘하고 역설적인 상황을 드러냅니다. 사람의 눈을 피해 도망쳐 숨었습니다. 하지만 그곳을 하나님이 지켜보십니다. 이를 통해 분명히 깨닫습니다. 이 세상 그 누구도, 그 어디에도 주님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때로는 당황스럽고 두렵지만, 너무나 놀랍고 위대한 위로를 안겨주는 진리입니다.

이 땅을 살아가며 누구나 저마다의 사래를 만납니다. 모양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힘 있는 자에게 학대를 경험하기도 합니다. 그 순간 하나님은 나와 전혀 무관한 존재 같습니다. 나로부터 저 멀리 떨어져 우주 어딘가에 숨어 계신 것만 같습니다. 그런 까닭에 제각기 살고자 도망쳐 달아납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우리를 항상 지켜보고 계십니다. 꾸짖고 다그치려는 게 아닙니다. 함께 아파하고 공감하며 새로운 살길을 열어주시기 위함입니다. 본문 8~9절 함께 읽겠습니다.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9 여호와의 사자가 그에게 이르되 네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 수하에 복종하라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질문하십니다. “네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길이냐?” 몰라서 물어보셨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분명 아시지만, 질문과 대답을 통해 당사자에게 명확히 확인시키려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갈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여주인 사래에게서 도망하여 나오는 길입니다.” 지금 하갈이 경험하는 끔찍한 현실입니다. 짧은 문장 안에 많은 이야기가 함축적으로 담겨 있습니다.

하갈이 원해서 아브라함의 아기를 가진 게 아닙니다. 힘없는 여종의 뜻과 무관하게, 나이 든 주인 어르신과 마님이 일방적으로 내린 결정이었습니다. 임신 사실을 알고 우쭐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잠시 정신을 놓았습니다. 그 전에는 하늘처럼 떠받들었던 사라가 어느 순간 우스워 보였습니다. 자기와는 전혀 다른, 여주인의 늙은 몸이 만만해 보였습니다. 겁 없이 사래를 깔보았습니다. 그 댓가는 혹독했습니다. 겁에 질린 채, 아기를 밴 몸으로 도망쳐야 했습니다. 그 상황 자체가 고대 사회에서는 도무지 살아날 길이 없는, 죽음과 절망입니다.

천사는 하갈과 대화를 나누며 이 사실을 그녀에게 다시 확인시켰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말씀하셔야 할까요? 그녀를 힘들게 했던 상황에서 한순간에 벗어나 안락한 길을 열어줄 것을 자연스럽게 기대하게 됩니다. 그러나 주님의 사자는 전혀 뜻밖의 말씀을 전합니다. 9절 후반부를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하나님은 하갈의 탈출을 돕지 않으셨습니다. 지난 시간 그녀를 괴롭게 했던 사람과 장소로 다시 돌아가라고 말씀 합니다. 굉장히 잔인합니다. 하갈이 겪었던 학대에 눈을 감으신 것처럼 보입니다. 너무나 무심하고 냉정한 명령처럼 들립니다.

게다가 지금 하갈과 천사가 대화를 나누는 장소가 ‘술 광야’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면 더욱 의미심장합니다. 이집트 고대 문서에 따르면 이 동네에 시내 반도와 이집트를 가로지르는 국경 수비대 담장이 있었습니다. 즉, 술 광야는 그 지역 자체가 거대한 국경선입니다. 이곳을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면 이집트 영토입니다. 아마도 그녀의 목적지였을 고향입니다. 친숙하고 풍요로운 제국입니다. 하지만 여기서 북쪽으로 돌아가면 아브라함과 사라가 살고 있는 가나안 땅입니다. 하갈은 지금 그 경계선에 서 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주님은 그녀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의 여주인에게로 돌아가서, 그에게 복종하면서 살아라.” 이 말씀이 하갈에게 어떻게 들렸을지 상상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너무나 듣기 괴로웠을 것입니다. 어쩌면 또다른 학대로 느꼈을지 모릅니다. 심지어 여기에 해당하는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그녀의 손 아래에서 스스로 고통을 감내하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하갈에서 고통에서 당장 벗어나는 극적인 해방을 약속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대신 또다시 고통스런 현실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얼핏 이 장면만 보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풍성한 사랑의 하나님과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냉정한 말씀을 하셨을까요? 10~11절 제가 읽겠습니다.

10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내가 네 씨를 크게 번성하여 그 수가 많아 셀 수 없게 하리라 11 여호와의 사자가 또 그에게 이르되 네가 임신하였은즉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이스마엘이라 하라 이는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음이니라

분명 고통 자체는 변하지 않습니다. 심지어 하갈은 나중에 다시 한번 더 쫓겨났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아들 이스마엘도 함께 버려집니다. 그렇지만 그 모든 고난을 뚫고 다가오는 찬란한 은혜와 희망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사실입니다. 그 고통에 응답하시며 이겨낼 힘과 용기를 주셨습니다. 바로 그녀 뱃 속에 있는 이스마엘의 자손들이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도 크게 번성 할 거라는 약속입니다.

옛날 사람들에게 자녀가 주는 상징성은 지금 우리와 같지 않습니다. 단지 사랑스런 가족, 혹은 대를 잇는 자손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자녀는 곧 신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증거입니다. 많은 자녀가 태어났고 그들 또한 많은 자손을 낳아 퍼뜨린다는 것은 조상의 인격과 생명이 이 땅에 마땅히 이어질 만하다는 걸, 그들이 믿는 신이 확증하는 것으로 받아 들였습니다. 

반대로 자녀가 없다는 것은 더 이상 이 세상에 그 누군가의 존재 가치가 없다는 저주로 이해했습니다. 아브라함을 비롯한 성경 인물들이 자녀가 없음을 두고 매우 심각하게 좌절하고 절망하는 이유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하갈에게 많은 자손을 약속한다는 것은 보통 놀라운 사건이 아닙니다. 비록 당장은 그녀가 목숨의 위협을 받을 정도로 학대를 경험한 별 볼 일 없는 여종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습니다. 그녀에게 다가오셔서 말을 거셨습니다. 그녀 또한 아브라함 못지 않게 의미있고 소중한 존재임을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갈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처음으로 말을 거는 여성입니다. 고대 사회에서 신이 여인과 대화하는 것 자체가 굉장히 진귀한 장면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왕족이나 귀족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혈육도 아닙니다. 이방인 여종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성경이 알려주는 복음의 위대함을 알려줍니다.

흔히 구약 성경을 유대인만의 복음으로 오해하곤 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1세기 교회, 바울의 대적자들이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우리 주님의 품은 원대합니다. 협소하고 어리석은 기준으로 함부로 사람들을 나누고 판단하고 소외시키지 않습니다. 모든 사람을 넉넉히 품습니다. 그런 까닭에 하갈은 위대한 고백을 남깁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하나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성경에서 이름은 단순한 호칭이 아닙니다. 누군가의 가장 내밀한 인격과 본성을 가리킵니다. 그런 까닭에 감히 신의 이름을 함부로 언급하는 것은 고대 서아시아 사회에서 철저히 금지되었습니다. 십계명 3계명에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고 명령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갈은 용기있게 주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지금 그녀가 경험한 하나님의 성품을 가장 잘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바로 ‘살피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렇게 그녀가 부른 주님의 이름이 너무나 적절하기에 성경이 기록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주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통해 분명히 드러났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주님께서 여러분을 ‘살피시는 하나님’이심을 분명히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도 모르는, 그 누구에게도 말못한 설움과 슬픔을 주님께서 들여다보고 함께 아파하심을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물론 그 하나님이 당장 고통에서 우리를 꺼내 주시지 않습니다. 심지어는 힘겨운 현실로 다시 돌아갈 것을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우리의 그 모든 발걸음에 함께하시고 힘을 주시고 언약을 세우심을 믿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과 더불어 더욱 승리하는 오늘 하루 되시길 축복합니다.


기도
살피시는 하나님.
고통스러운 현실을 피해 달아난 하갈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마음에 새깁니다. 저희의 모든 아픔을 들으시고 힘겨운 눈물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의 위대한 언약을 사모합니다. 주님과 함께 다시 가나안으로 돌아갈 용기를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화려한 신기루에서 벗어나 은혜가 피어오르는 광야를 향해 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에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함께 지시고 부활하시어 하늘 위로 오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