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4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2장 34~40절 "가장 큰 계명, 사랑"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우리 교회, 교회학교 학생 한 명이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잠시 이성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못을 주어서 예배당 벽에 이렇게 낙서 했습니다.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
그리고 이 천년이 흘러 서기 4023년이 되었습니다. 우리교회 예배당이 무너지지 않고 형체를 잘 지킨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세계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시대에서 2천년 전인 21세기 대한민국 기독교인의 생활상을 알기 위해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건물 벽 한쪽에 새겨진, 당시 기준으로는 고대 한국어로 쓴 짧은 문장을 발견합니다. 무엇이죠?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좀 더 상상을 발전시켜 보겠습니다. 그 때 남미 대륙에 사는 한 청년이 이 발굴에 대한 번역 기록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아, 이 천년 전에 동아시아에 있었던 한국이라는 나라는 ‘배고파 죽겠다.’라고 괴로워하며 글자를 새길 정도로 무척 굶주리고 가난한 나라였구나!’
여러분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해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2023년 대한민국과 4023년 남미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문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저러해서 죽겠다.’라는 우리말 강조 표현에는 이 땅의 아픈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전쟁등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던 험난한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옛 문장에 담긴 이러한 배경을 모른 채 글자만 쳐다본다면 분명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을 때도 흔히 생기는 오류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문자’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사람 사이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화 수단입니다. 하지만 맥락에서 벗어나면 뜻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가깝게 지낸 가족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사소한 말실수로 관계가 틀어지곤 합니다. 이 사실을 성경 해석에도 분명히 유념해야 합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금 드린 이야기처럼 동아시아와 남미 사이, 이 천년의 문화와 역사 차이는 필연적으로 의사소통의 오해와 왜곡을 가져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에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기준으로 보면 삼국 시대가 막 시작할 때입니다. 즉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고 주몽이 활을 쏘며 고구려를 세울 때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심지어 구약 성경은 그보다 훨씬 전에, 너무나 먼 옛날에 기록, 편집했습니다. 게다가 서아시아와 유럽의 고대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로 적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한글 성경은 그것을 ‘번역’한 책입니다.
정리하자면 성경은 절대로 하늘로부터 한순간에 쿵! 하고 이 세상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와 전혀 다른 전통과 상황 속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성경을 반드시 원전으로만 봐야 하고, 번역 성경은 무가치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린 성경책을 사랑하고 여기에 담긴 말씀을 날마다 꾸준히 읽으며 바르게 묵상해야 합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 성경이 ‘언어로서 한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면서 참사람이듯, 성경 역시 신비로운 모순과 조화 속에 생명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에 대한, 이런 기초 상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들은 말씀 전체가 보여주는 원대한 그림과 풍경에는 관심 없습니다. 대신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며 무리한 자기 신념을 고집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주님이 본래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참 멀어져 있습니다. 어리석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서 성경을 들이밀며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기 보다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도 성경을 왜곡하며 자신의 어리석은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4~36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22장 15절부터 시작하는 ‘논쟁 단락’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둘러싸여 당신의 권위를 변론하셨습니다. 22장 15~22절은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논란을 들려줍니다. 본문 바로 앞인 23~33절은 부활을 오해한 사두개인들을 논박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으로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사두개인과 평소 대립하던 사이입니다. 현재 온 민족이 처한 위기에 대한 진단과 대안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런 까닭에 두 집단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두개인의 논리가 무참히 깨지는 모습을 보며 바리새인은 몹시 통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예수라는 사나이는 몹시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과는 정반대로 이해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완벽히 지키는 것에 전혀 관심 없었습니다. 세세한 율법 조항들을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그들 눈에 더럽기 그지 않는 창기와 세리들과 서슴없이 어울렸습니다. 당시 신앙 전통으로 볼 때, 경악스러운 죄를 거침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리새인 중에 ‘한 율법사’가 대표선수로 나섰습니다. 주님께 나아가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에서 어느 말씀이 가장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발하고 날카로운 질문이 아닙니다.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 가장 뜨겁게 토론하던 주제입니다. 따라서 본문 속 율법사의 의도는 정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다는, 답을 듣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예수의 수준과 실력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망신 주려는 게 그의 의도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교활한 계략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자무식 나사렛 촌놈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럴듯한 속임수와 능숙한 언변으로 무지몽매한 백성을 속였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말씀에 대해 깊은 토론을 시작하면 그 사기꾼이 금세 바닥을 드러낼 거라고 율법사는 기대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이 때 자칫 어설프게 대답했다가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사람으로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군중을 열광시킨 주님의 가르침이 한순간에 평가절하 될 수 있는 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37~3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먼저 신명기 6장 5절을 언급하시며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전 존재와 온 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면서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눈 여겨볼 점은, 그 사이에 있는 “둘째도 그와 같으니”입니다. 이를 통해 이웃 사랑은 앞서 말한 하나님 사랑보다 한 층 낮은 차원이 아니라,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이웃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섬기지 않으면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와 자기만족에 취한 그릇된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 모두를 끝맺는, 40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성경의 “강령”(綱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령”이라는 다소 어려운 한자말로 번역한 헬라어는 <크레만타이>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곧바로 옮기면 “걸려있다.” 혹은 “의존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화면으로 보시는 빌딩은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입니다. 지상 163층에 828m로, 현재 기준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합니다.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한 번쯤을 보셨을 겁니다. 어쩌면 직접 가보신 분도 계실 겁니다. 이러한 마천루를 올려다보면 현대 건축기술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어떻게 저렇게 높은 건물이 강한 바람과 지진에도 불구하고 우뚝 서 있을 수 있을까요? 바로 그 중심에 있는 “코어월”(core wall) 덕분입니다. 우리말로 거칠게 옮기면 ‘핵심 벽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련해서 다음 사진 보시겠습니다.
실제 부르즈 할리파의 코어월입니다. 가장 핵심에 있는 기둥을 중심으로 빌딩 전체의 무게 균형을 설계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다 할지라도 중심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어떤 건물도 제대로 세울 수 없습니다. 척추와 같은 핵심 벽체를 땅에 깊이 박아 튼튼하게 올릴 때, 쓰러지지 않고 본래 모습을 갖추고 자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경 전체의 모든 구절이 기대어 걸려있는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이라는 위대한 건물의 중심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핵심 축이 바로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며 중요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이 사실을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은 이른바 <쉐마>이라고 불리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메주자’라고 부르는 작은 상자에 넣어 출입구에 붙여 두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는 구약 성경의 중심입니다. 그 중에서도 19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십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조항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레위기 19장 18절, 한 구절만이 아니라 19장 전체를 인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이웃 사랑은 십계명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랍비 아키바 역시 ‘이웃 사랑’이 최고의 율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예수님 말씀은 낯선 교훈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정작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진리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샌가 그럴듯한 거짓이 복음을 대신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담백한 진리를 통해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셨습니다.
사자성어 중에 ‘대미필담’(大味必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맛이란 반드시 淡白(담백)하다.”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과 물을 떠올리면 금세 이해하실 겁니다. 단순히 요리에 대한 교훈을 넘어 인생의 깊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에 자극적이고 화려한 무언가에 쉽게 현혹됩니다. 하지만 가장 뻔하고 평범하게 들리는 진리, ‘사랑’에 참 진리가 담겨 있다는 진실을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 확인합니다.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어찌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침략으로 멸망 직전에 이른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열정적인 신앙을 불태웠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입니다. 거창하고 비장한 신앙 생활을 강요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사’는 오늘날 신학자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필사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5%도 되지 않았던 그 시절입니다. 실로, 막강한 권위였습니다. 문제는 율법사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의 각종 정결 규정을 100%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특별히 물이 부족한 사막 지대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절대다수의 백성은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어기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약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말씀으로 위로 하기는커녕 함부로 비난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믿음 없는 더러운 사람들이라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의 경건함을 더욱 내세우고 으스대기 일쑤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성경 글자에는 철저히 집착했지만 정작 그 본질인 “사랑”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이용해 그들을 착취하고 억눌렀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마저 왜곡시키며 복음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추악한 죄악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은 종교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말씀의 본질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권위를 함부로 휘두르며 거룩한 소명을 모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는 그럴듯하게 떠들어 댔지만 실상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거창하게 외쳤지만 정작 본인들이 주위 사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더욱 굳게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 그 분의 인격과 삶이 곧, 말씀입니다. 주님은 성경의 핵심에 대해 단지 입술로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본질인 “사랑”을 이 땅에서 직접 살아내셨습니다. 모든 죄인을 살리기 원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의 영원한 증거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복음은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한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찬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크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자 부르심입니다. 이와 같은 소중한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이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성경적으로” 혹은 “성경대로”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정말 귀한 태도입니다. 인간의 연약한 이성과 경험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삶의 방향을 결정하려는 자세는 그 자체로 너무나 훌륭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대로’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정반대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자기 뜻과 욕심을 고집하기 위해 마음에 드는 성경 구절 몇 개를 억지로 들이밀며, 그 권위를 훔쳐 휘두르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지식을 자랑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마음 중심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십자가 사랑을 품고 겸손히 그리고 잠잠히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대로’라는 말은 ‘사랑으로’라는 조건과 합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지닙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사랑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탐욕으로 포장한 사랑이 아니라, 참 사랑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러했듯이 거짓을 몰아내고 어둠을 이겨내며 절망에 맞서는, 진리와 빛과 희망의 사랑을 성경을 읽으며 내 삶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긍정하게 합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좌절과 한계를 십자가 그늘 아래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탐욕을 위해 말씀을 이용하려는 바리새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갖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를 믿음으로 분명히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 안에 인간의 실수가 조금도 담겨있지 않거나 모든 내용이 과학이나 역사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놀랍고도 깊은 뜻 가운데 굳이 연약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어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진정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글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죽은 문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으로 변하게 합니다.
성경은 마치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은 분명 창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얼룩과 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그러한 흠결을 보고 창문 자체를 무시하거나 외면 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곤 합니다.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창문 유리 혹은 창틀에만 눈길을 멈추고 거기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문이 있는 까닭은 결코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포근한 풍경과 햇살을 전해주는 것이 창문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창문의 흠집으로 그 전체 가치를 폄하하지 않습니다. 혹은 유리의 값어치에만 지나치게 몰두하지도 않습니다. 창문 너머의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봅니다.
성경을 대하는 바른 태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비록 상상 속 이야기이지만 4023년에 발견한, 이천년 전 먼 나라의 예배당 발굴기록을 읽는 사람은 벽 한 쪽 구석에 있는 작은 낙서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짧은 문장을 두고, 독단적인 이해와 고집으로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 대신 건물 전체의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배당이 오랜 시간 품어온 따스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 의미를 천천히 곱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의 문자 혹은 부분적인 내용에 집착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바라보길 기대하십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품으며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새롭게 확인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올바르게 섬기고 사랑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언어를 사용하시어 성경을 기록하시고 우리 손에 전해주신 이유를 다시금 확인하였습니다. 말씀에 담긴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바르게 깨닫고 경험하며 그 뜻 가운데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옵소서.
성경을 왜곡하고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탐욕을 멈추고, 진리 가운데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는 거룩한 습관을 지키며, 그 안에 담긴 놀랍고 풍성한 세계를 맛보고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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