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14일 목요일

룻기 4장 13~22절 "일상을 살다가"

2023년 12월 13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룻기 4장 13~22절 "일상을 살다가"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출산은 어느 공동체나 감격스러운 사건입니다. 특히 베들레헴과 같은, 농경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장면은 뭔가 의아합니다. 먼저 16절을 보면 나오미가 아기 오벳을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끌어안고 돌보는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해당 원문은 이 아기에 대한, 나오미의 상당한 권리를 암시합니다.

더욱 놀라운 장면이 17절에 나옵니다. 이웃 여인들이 몰려와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오벳에게 나오미는 어머니의 전 남편의 어머니입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아기를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말했을까요? 14절 말씀과 같이 오벳은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무척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습니다.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데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한 아기가 그들에게 오기까지, 룻기 이야기 전체를 다시금 되짚어 봐야 합니다. 그 시작은 무척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기근이 몰아닥쳐 극심한 가난을 겪었습니다. 나오미가족은 고심 끝에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 달리 나오미는 그곳에서 극한 역경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바로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입니다.

이제 그녀 곁에는 자기처럼 과부가 된 며느리 둘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아득한 절망에 빠집니다. 하물며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너무나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 했습니다. 대신 모압 출신 두 며느리에게는 살던 곳에 그대로 남으라고 말합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그들에게 자신이 짐만 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오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며느리 중 하나인 오르바는 죄송함을 무릅쓰고 모압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와 함께 낯선 땅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 결정으로 말미암아 절대 녹록지 않은 현실과 마주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 많으신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홀로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어떤 무언가가 그녀를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안전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살던 곳에 그대로 남아 자기 삶을 지탱해 줄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과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자신과 같은 이방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이스라엘입니다.


마침내 룻은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나 일상을 이어가기 시작합니다. 추수하는 들녘으로 찾아가 이삭을 주었습니다. 그곳에는 자신과 같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남겨진 곡식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섬기는 야훼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그 행동을 명령하셨습니다. 룻은 들판에서 자기를 향한 주님의 뜻밖의 사랑을 조금씩, 몸소 경험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 따스한 돌보심을 통해 살아갈 희망을 차츰 발견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룻은 예상하지 못한 운명적인 인물을 만납니다.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 땅의 주인인 보아스는 마침 룻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녀를 반갑게 알아보았습니다. 나오미를 위한 룻의 갸륵한 마음을 어여쁘게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친절한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집에 돌아온 룻은, 그날 자기가 겪었던 일들을 시어머니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크게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삶의 터전을 잃은 나오미와 룻을,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에 따라 도와줄 의무가 있었습니다. 

희년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가운데 누군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득이하게 땅을 팔고 빚을 지었을 때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빚을 대신 갚아 주어야 합니다. 그 혈육을 가리켜 개역개정 성경은 “기업 무를 자”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엘>은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훨씬 더 복잡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고엘’에게 철저히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혜택과 권리는 지극히 적습니다. 더구나 룻기에서 고엘 제도는 신명기 25장의 수혼법과 결합되어 독특한 형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도움이 필요한 친척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경우, 출산과 양육의 책임까지 떠맡습니다. 본문 앞에 등장하는 어느 이름 모를 친척이 자기가 가진 우선권을 주저 없이 포기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놀랍게도 그 무거운 의무를 기꺼이 수행했습니다. 성문 앞에 마을 장로 열 명을 모셔 공식 절차까지 번거롭게 밟았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가 바로 오벳입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오벳은 그녀에게 “생명의 회복자”이자 “노년의 봉양자”가 됩니다.

따라서 이 모든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베들레헴의 아낙네들은 마치 자기 일 인양 함께 기뻐하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본문 14,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이처럼 룻기는 성경 전체에서 단연 눈에 띄는, 훈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언제 읽어도 마음 따뜻해지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룻기는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본문 17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이것이 룻기가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바로 오벳이 이새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즉,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간난 아기는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다윗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왕이자 메시아를 예고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여기에 룻기의 중심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유다의 아들 베레스의 족보를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이름을 굳이 한 번 더 언급하고 책을 마무리합니다. 본문 18~2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베레스의 계보(히, 톨르도트)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8절에 등장하는 ‘계보’는 룻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본문에서 ‘계보’로 옮긴 히브리어는 <톨르도트>입니다. 이 단어를 중요하게 자주 사용한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입니다. 창세기는 아담과 노아를 비롯한 여러 조상의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이 <톨르도트>가 가장 먼저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2장 4절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תּוֹלְדוֹת)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세기는 우리에게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는 1장 2절에서 2장 3절까지, 일곱 날에 걸친 창조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문학은 중요한 주제일수록 같은 내용을 변형해서 반복하는 독특한 강조법을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를 다른 관점에서 2장 4절부터 서술합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이야기에 주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두 사람과 맺은 언약, 그리고 그들이 그 언약을 깨뜨린 죄악과 징벌, 그럼에도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합니다. 즉, ‘언약’과 ‘범죄’과 ‘사랑’이라는 창세기의 핵심 신학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시작하며 창세기는 그 ‘내력’을 뜻하는 ‘톨르도트’를 같은 창세기 속 다른 톨르토트와 다르게 표기하여 구별하였습니다. 발음은 같지만 중간에 히브리어 알파벳 <봐브>(וֹ)가 추가되었습니다.

다시 룻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을 끝맺으며 베레스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를 다른 구약 본문들처럼 평범하게 적어도 내용 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룻기는 본문 외에 창세기 2장 4절에만 나오는 톨르도트 표기법을 굳이 가져다 썼습니다. 그러면서 베레스에서 다윗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기록하며, 룻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드러내었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어휘사용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바로 창조신앙과 연결입니다. 이와 관련해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교 교수인 랍비인 “즈비 론”의 견해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해당 유대 문헌을 비교 검토하며 아담의 죄를 해결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룻기 사이의 관계를 주목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랍비들은 룻기의 족보가 메시아의 오심을 정점으로 하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쓰였다고 이해했다.” - Zvi Ron

이를 통해 룻기가 가진 막중한 무게감을 깨닫게 됩니다. 얼핏 보면 이 책은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소박한 동화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온 우주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림과 구원을 향한, 간절하고 뜨거운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복음의 주인공으로 룻과 보아스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따스한 돌보심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까지 들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모두가 그 두 사람이 커다란 야망을 품고 애써 노력한 결과일까요? 자기 이름을 드높이고자 치밀하게 계획하여, 이를 앙다물고 맹렬히 달려간 끝에 얻은 결실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룻이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그 가냘픈 어깨에 무거운 봇짐을 짊어졌을 때, 뿌연 모래 먼지 사이를 헤치고 마침내 낯선 땅 베들레헴에 겨우 도착했을 때,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육질의 거친 농사꾼들 사이를 두려움을 이겨내고 지나가 떨리는 손으로 이삭을 주었을 때, 훗날 자기 이름을 딴 성경책에 그 위대한 희생이 기록되어 수 천 년 동안이나 전해져 내려올 것을 과연 알고 있었겠습니까?

보아스가 보리밭 한쪽에서 애처롭게 이삭을 줍는 룻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며 따로 먹을 것을 챙겨 주었을 때, 성문 앞에서 의아해하는 친척의 양보를 받아내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을 때, 과연 자신이 메시아의 조상으로 성경에 족보가 기록되는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리리라고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곁에 있는 연약한 이들을 묵묵히 섬겼을 뿐입니다. 룻과 보아스는 험난한 위험과 시련 속에서도 맡겨진 일상을 진리 가운데 담담하게 이어갔습니다. 그런 그들의 평범한 하루하루를 주님께서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더없이 눈부시게 찬란한 구원 여정이 온 우주 가운데 드넓게 펼쳐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룻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과 순종을 올바로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굉장히 신비롭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일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 못할 거창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기인에 가까운 금욕과 자기 절제를 바라지도, 결벽적인 도덕성을 강요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오늘 본문이 기록한, 한 아기가 그들에게 오기까지 펼쳐진 이야기처럼, 날마다 우리 눈앞에 놓인 일상을 소중히 가꾸길 여기길 바라십니다.


몇 년 전, 진료 중에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거둔 임세원 교수님을 많은 분이 기억하실 겁니다. 뉴스를 듣고 마음이 아파 검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과거 우울증에 걸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정신질환을 앓는 정신건강전문의’, 이 끔찍한 삶의 모순이 그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자신의 아픔을 애써 감추지 않았습니다. 환자들을 돕기 위해 진솔한 고백을 담은 책을 출간했습니다. 바로 이 책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입니다. 이 중에서 오랫동안 저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출구가 없는 답답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바꿔 말해 희망을 상실하고 우울해진 사람들은 일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중단한다. 일상을 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이런 절박한 상황에 내가 일상적인 일들을 하는 게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취미생활을 끊고……. 그렇게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 즉 삶 그 자체마저 중단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 상황을 점점 더 나쁘게 만드는 요인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비관적으로 느끼고 자신의 일상 여러 부분을 하나씩 그만두는 과정 자체가 우울감을 더 악화시킨다. 

우리 삶에 좋은 일만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천국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단언컨대, 현실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때때로 우리는 지독하게 운 나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다시피 나쁜 일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그 자체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으로 인해 결정된다.

보통 사람의 정신력은 그리 강하지 않다. 때문에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적당한 수준의 사기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긍정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중략) 일상에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활동들, 이를테면   

친구와 전화로 수다 떨기 
동료들과 점심으로 특별한 음식 먹어보기
애완견과 공원 산책하기 
좋아하는 스포츠 팀 경기를 보며 응원하기 
밤 9시, 치킨을 배달시켜 손에 양념을 잔뜩 묻히며 먹기   

좋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순간이 곧 행복이라는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들이다. 그 조각들이 모여 행복의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임세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일상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무엇보다 일상을 일구고 가꾸고 지켜내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은 누가 봐도 화려한 업적이나 성과 혹은 극적인 체험이나 간증보다, 지겹게 반복되는 뻔하디 뻔한 매일 삶 속에 생명력 있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초라하고 비참하고 눈물겨운 나날이야말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나 자신의 처절한 한계와 결핍과 마주하는 하루하루야말로, 복음을 깨달아 누리고 실천하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더 없이 드높고 찬란한 하나님 나라를 가슴에 품을수록 우리 발은 더욱더 굳게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비장하게 움켜쥔 주먹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마음을 품고 연약한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을 묵묵히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의 그 모든 일상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여,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그림을 완성한다는 진리를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한 아기 ‘오벳’이 단지 룻의 평범한 아들로 그치지 않고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이자 다윗의 할아버지임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거듭 강조하며 분명히 전해주는 이유입니다.

오벳이 나오미의 품에 안긴 후 약 천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출생은 누구에게나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기를 둘러싼 상황은 뭔가 기이합니다. 탁월한 학식과 지혜를 가진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대받던 목자들도 그 아기에게 찾아와 찬송하였습니다. 그를 향해 천사들이 온 우주를 울리는 아름다운 찬양을 드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헤롯 왕궁이 공포에 잠겨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이처럼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삶의 시작부터, 인생의 모든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셨습니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부활 하시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렇게 창세기에서 룻기를 거쳐 온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며 기다린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심을 명백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내 일상의 주인으로 모심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행하시고 룻기가 알려주듯이 날마다 일상을 일구어 가며 그 안에 담긴 복음의 본질을 발견하고 전하는 삶을 뜻합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마음 깊이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어떤 시련에도 믿음으로 걸어가는, 일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때때로 살아가며, 사사시대와 같은 위기와 혼란을 마주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룻과 보아스가 그러했듯이 진리를 따라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길 다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섬김과 나눔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귀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주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 가운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으로 품고 섬기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상을 넘어 일상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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