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8월 19일 수요일

창세기 32장 22~32절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라"

포항제일교회 수요기도회, 2020년 8월 19일, 목사 정대진
창세기 32장 22~32절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라"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우리는 오늘 함께 읽은 말씀에서 ‘벼랑 끝에 홀로 서 있는 가장’을 발견합니다. 바로 야곱입니다. 지난 날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쳐 머물게 되었습니다. 거기에서 자신의 모든 청춘을 다 바쳐 마침내 많은 가족과 가축 떼를 이루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수성가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있어 그 모두는 단순한 피붙이와 재산이 아닙니다. 치열한 삶의 전투 끝에 얻은 소중한 전리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잃을 위기에 빠졌습니다. 야곱은 지금 형 에서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야곱은 자신의 복을 가로채어 굴욕적인 패배감을 안겨준 동생입니다. 따라서 그는 강렬한 증오심에 불타올랐습니다. 심지어는 복수를 이루기 위해, 아버지 이삭이 빨리 세상을 떠나길 고대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야곱이 형에게로 향하는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까요? 깊은 염려와 불안 속에 애타게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 때문에 본문 바로 앞에는 금세 닥쳐올 재난을 철저히 대비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가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에서가 400명이나 되는 패거리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 앞에서는 그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야곱은 결국 얍복 나루에 홀로 남아 몸부림치며 절규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 그와 씨름하였습니다. 24절에 기록된 그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 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합니다. 여러 맥락을 종합해 보면 그분 자체를 하나님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하나님께로부터 권위와 권한을 위임받은 대행자, 곧 ‘천사’로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까닭에 호세아 12장 4절에도 그를 가리켜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내용 흐름을 따라 쉬운 이해를 위해 오늘 설교에서는 편의상 ‘하나님’으로 부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붙잡으며 간구하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 부러뜨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자신을 놓지 않고 있는 야곱에게 주님께서는 불쑥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당혹스럽지 않으십니까? 한 인간이 처한 극한 절망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난데없이 야곱의 이름을 물어보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정말 몰라서 그러셨을까요? 분명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이름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말은 그의 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형과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부모는 ‘발꿈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케브>에서 유래하여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을 가진 <야아코브>, 우리말 음역으로는 ‘야곱’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말은 관용적으로 ‘남을 걸려 넘어뜨리는 자, 혹은 속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이와 같은 야곱의 뜻을 ‘어떻게든 이기려 몸부림치는 사람’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그의 삶은 자기 이름처럼 성공을 향한 치열한 욕망과 좌절로 어지럽게 뒤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서라면 형은 물론이고 시각 장애가 있는 연로한 아버지를 속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외삼촌과 사촌들의 눈치를 살피며 지내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자기 못지않게 탐욕으로 가득한 라반의 교활한 속임수에 빠져 번번이 인생의 쓴맛을 경험했습니다. 결론적으로 그가 깨달은 것은 자신이 여전히 위태로운 패배자 신세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야곱은 가족들을 데리고 외삼촌의 집에서 급히 탈출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반의 추격에 붙잡히긴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 과거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로 또 다른 절망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있어 그의 이름은 단순히 자기를 향해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화려한 승리자가 되길 꿈꾸었으나 끝없이 좌절과 마주했던, 그의 내밀한 인격과 존재를 가장 정확히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야곱’이라는 그의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야곱’은 과연 무엇입니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초라함. 지나온 시간 가운데 새겨진 가장 경멸 어린 패배의 자취, 여전히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수도 없이 할퀴고 지나가는 좌절의 상처들, 그 모든 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내 안의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름을 물으신 까닭이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야곱”으로서의 나, 사람들 앞에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주님께서 그 누구보다 더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온갖 실패와 좌절로 지쳐 쓰러져 울고 있는 나를 아무런 편견 없이 따뜻하게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각자의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야곱을, 적어도 당신에게만은 감추지 말고 솔직히 드러내길 바라십니다.


관련해서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을 통해 널리 알려진 스캇 펙 박사의 또 다른 저서 “거짓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한 사람들을 나머지 모든 사람들과 확연히 구별해 주는 것은 그들이 특정한 유형의 고통으로부터 부득부득 피하여 달아나려 한다는 사실이다. (중략) 그들이 참을 수 없는 고통은 특정한 고통 하나뿐이다. 자신의 양심을 직시하는 고통, 자신의 죄성과 불완전함을 인정하는 고통이다.   

자기 성찰에서 오는 이 특정한 고통을 피할 수만 있다면 거의 못할 일이 없는 게 그들이고 보면, 일반적인 상황에서 정신 치료를 가장 완벽하게 거부하는 사람들이 바로 악한 사람들이다. 악한 사람들은 빛을 미워한다. 자기 모습을 비춰 주는 착한 선의 빛, 자신을 드러내는 성찰의 빛, 자신의 기만을 들춰내 버리는 진리의 빛을 그들은 죽도록 싫어한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 안의 야곱 때문에 괴로워하며 움츠러드는 것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그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영혼의 방향이 정반대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야곱에게 얽매여 사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은 저마다의 야곱을 증오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겸허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추시는 선한 진리의 빛을 향해 나아가, 나를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내시는 위대한 사랑의 시선 앞에 나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하나님과 정직히 마주하여 ‘저의 이름은 야곱’이라고 마침내 토로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28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자신의 이름을 고백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나님에 의한 개명이 낯설지는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앞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름 짓기’의 참된 의미를 더욱 정확히 알기 위해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를 살펴봐야 합니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을 때 그냥 ‘밝아져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빛’이라는 ‘이름’을 정확히 부르셨습니다. 이어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또,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며’ 그 둘의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둘째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가리켜 ‘하늘’이란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또한, 셋째 날에도 뭍을 향해 “땅”으로, 많은 물은 “바다”로 이름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한 마디로 ‘이름 짓는 일’ 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피조물의 이름을 지으심으로 천지창조의 서막을 널리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어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은 단순한 호칭 변화가 아닙니다. 그 안에, 야곱을 향한 당신의 창조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쓰라린 좌절과 실패를 가지고 나아온 야곱을 결코 지난날의 모습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온 생명과 의지를 다 해 이스라엘로 기어이 변화시키고, 새롭게 창조하시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을 살아가며 저마다의 얍복 나루에 지쳐 쓰러져있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야곱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비참한 패배감을 두 눈에 담으시며 이스라엘로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시선을 보내시며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심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한 편, ‘이스라엘’의 의미에 대해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름은 28절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간이 어찌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져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호칭의 배경이 되는 24절과 25절의 ‘씨름하다’입니다. 이 동사의 히브리어 어근 <아바크>는 성경 전체에서 본문에만 단 두 번 등장합니다. 즉, 오직 야곱에게만 해당되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야곱을 가리키는 원어와 자음이 매우 흡사합니다. 이것은 그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히브리적인 언어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다.”는 문장을 “야곱이 야곱 했다.”라고 이해해도 무리가 아닙니다.

창세기 저자의 이러한 어휘 사용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야곱이 살아온 삶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어떻게든 이기려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는 부모 형제간의 우애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었습니다. 어떤 속임수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번번이 비참한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수도 없이 빼앗겼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치명적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싸움입니다. 이기려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런 그를 위해 져 주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승리에는 막중한 대가가 뒤따랐습니다. 주님은 그의 허벅지 관절을 부러뜨리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31절의 기록과 같이 평생 신체장애를 안고 살 게 되었습니다. 굉장히 모순되는 장면입니다. 분명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기세등등한 새 이름을 가졌는데 겉모습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승자의 화려한 영광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시합 중에 심각한 부상을 당해 쓰러진 격투기 선수처럼 영락없는 패배자의 몰골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얍복 나루’ 경험이 있습니다. 성장 과정에서의 결핍, 도무지 남들에게 말 못할 가정 문제, 학업과 취업과 승진 등, 그토록 간절히 손에 넣길 원하며 애써 발버둥 쳤지만 끝내 닥쳐온 패배의 순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결과, 내면의 엉덩이뼈가 부러진 채 크나큰 고통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그 모든 비참한 절뚝거림은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라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비록 미처 다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지만, 여전히 패배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를 위해 기꺼이 져 주시는 하나님의 드넓은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그런데 본문의 마지막은 다소 뜻밖의 엉뚱한 내용을 알려줍니다. 32절 말씀 다 함께 읽겠습니다.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이 구절에는 창세기를 하나의 책으로 최종 정리한 사람이 갑자기 등장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은 단지 한 개인의 호칭으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은 이 땅 위에 역사상 실존했고 오늘까지 이어지는 국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당신의 다스림을 이루어 가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이름은 시조의 이름을 딴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아닙니다. 손자 ‘야곱’의 새로운 이름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얍복 나루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을 때 그분의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훗날 이 땅에 세울 언약공동체를 향한 그분의 기대와 소망이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즉,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펼쳐 보이실 다스림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관련해서 32절에서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라는 기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과연 언제일까요? 대부분의 학자는 창세기의 완성을 바벨론 포로기로 추정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던 때 다음으로 역사적으로 가장 절뚝거리던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포로민 가정의 남루한 식탁에서 주고받았던 대화를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왜 우리는 이웃 마을 친구들처럼 아무거나 마음데로 먹지 못하냐고 어린 아들과 딸이 천진난만한 눈망울로 물어봅니다. 그러자 가난한 부모는 주린 배를 부여잡고, 비장하지만 따뜻한 음성으로 야곱의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렇듯 32절에 기록된 음식 규정은 매우 의미심장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민족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본질은 그들이 얍복 나루 사건을 날마다 명심하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조상들이 이룩한 화려한 업적만이 아니라 비참한 좌절과 실패를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일상의 성례전이 펼쳐지는 식사 시간, 야곱의 부러진 엉덩이뼈를 떠올렸습니다. 지쳐 쓰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신 주님의 위대한 창조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패배할 때에 진정 승리한다는 진리를 함께 나누며 서로 위로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힘겨웠던 시절, 대대로 전해오는 야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안에서 현재 자신들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참된 희망을 말씀 가운데 새롭게 발견하였습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의 드넓은 품에 안겼습니다. 그 뜻을 위한 민족적인 소명을 붙잡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첫 번째 이스라엘은 시간이 흘러 그 고귀한 정체성을 놓아 버리고 말았습니다. 힘겨웠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성전을 복구하자 이제 걸음걸이를 완전히 회복했다는 오만에 빠졌습니다. 그리하여 엄중한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로서의 자격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고 전하셨습니다.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참된 이스라엘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믿고 따른다면, 그리하여 이스라엘을 나의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면, 마땅히 그 안에 담긴,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깨닫고 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구원의 감격과 내면의 위로만 누리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교회 생활만을 열심히 하여 어리석은 교만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참 이스라엘’로서 구원받은 자의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온전하고 향기로운 삶으로 그분의 나라를 넓혀가길 기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을 본받아 기꺼이 져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무력하게 의지를 꺾는 패배주의에 빠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태와 태만을 정당화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공을 향한 숭배를 멈추고 승리에 취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정당하게 경쟁해서 필요한 걸 얻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가능한 한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받도록 격려하는 것, 이왕이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도록 노력하고, 승진 혹은 사업의 번창을 위해 애쓰고 수고해서 거기에 합당한 성과를 누리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입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세속적인 성공과 승리만을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하며, 자연스러운 패배와 좌절을 추하게 부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 개신교가 이토록 사회적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무나 조심스러운 문제입니다. 함부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럼에도 가슴 아프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많은 교회가 어떻게든 이기려 한다는 현실입니다. 무엇이 참된 승리인지 진리의 말씀을 통해 차분히 깨달아 알기보다는, 어리석은 탐욕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극히 기본적인 상식과 원칙마저 함부로 무시합니다. 심지어 헛되고 헛된 성공을 위해서라면 복음마저도 제멋대로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기꺼이 양보하고 손해 보며 살아야 합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능력과 지혜를 알기 때문에 탐욕을 뿌리치고 한 걸음 더 물러설 줄 알아야 합니다. 분에 넘치도록 지나치게 높이 오르고 과도하게 움켜쥐기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나 이 사회의 경쟁에서 밀려난 연약한 이웃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얍복 나루 너머 골고다 언덕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실패해야 참으로 승리하며, 온전히 죽어야 진정 살아나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패배자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언제나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복음만이 우리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새롭게 창조하며 진정한 회복을 안겨줄 줄 믿습니다.


이제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이 땅 위를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얍복 나루 위에 지쳐 쓰러진 야곱의 절망 앞에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곤 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삶의 자리에서 우리의 이름을 물으시는 하나님의 질문을 듣게 됩니다. 그 음성 앞에 주저 없이 ‘저의 이름은 야곱’이라고 진심으로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다."


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저의 이름은 야곱입니다. 실패입니다. 패배입니다. 또한 좌절입니다.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고 굴욕을 겪었고 절망에 허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저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이름에 담긴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기꺼이 져 주시는 놀라운 사랑에 항복합니다. 그 사랑으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저희 모두도 그 사랑 가운데 어리석은 탐욕에서 벗어나 물러서고 양보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참된 이스라엘이 되게 하옵소서. 나누고 섬겨야 진정 승리하는, 복음의 신비를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찬란한 패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0년 8월 10일 월요일

열왕기상 19장 9~18절 "여백 신앙"

2020년 8월 9일, 포항제일교회 주일 3부예배, 목사 정대진
열왕기상 19장 9~18절 "여백 신앙"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영성작가 헨리 나우웬은 내적 성숙을 위한 고독의 길을 이렇게 명료하게 정리했습니다. 저는 20대 중반에 이 구절을 읽고 큰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제 인생을 바꾼 한 문장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doing nothing, being useless를 말하곤 합니다. 해당 단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더 긴급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라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일들에 도움이 되기보다 종종 방해 되곤 합니다. 
We always seem to have something more urgent to do and ‘just sitting there’ and ‘doing nothing’ often disturbs us more than it helps.

하지만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쓸모없이 존재하고 침묵하는 것은 모든 기도의 핵심에 속합니다. 
But there is no way around this. Being useless and silent in the presence of God belongs to the core of all prayer. 

처음부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신의 무질서한 소음을 더 크게 듣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In the beginning we often hear our own unruly noises more loudly than God’s voice. This is at times very hard to tolerate.

(중략)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침묵의 시간이 우리를 조용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But slowly, very slowly, we discover that the silent time makes us quiet and deepens our awareness of God.

그러고 나서 곧 우리는 분주함으로 빼앗긴 순간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Then, very soon, we start missing these moments when we are deprived of them,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깨닫기 전에, 점점 더 많은 침묵 속에 이끌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곳에 더 가까이 가도록 내면의 추진력이 발달하게 됩니다."
and before we are fully aware of it an inner momentum has developed that draws us more and more into silence and closer to that still point where God speaks to us.

저는 오랫동안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doing many-thing, being use-full”,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해야 한다고 오해했습니다. 기도는 무조건 크고 오래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 때문에 고3부터 대학교 2학년까지 매일 한 시간 이상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지금 제 목소리가 이렇게 느끼하게 된 이유입니다.

게다가 또래 그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오전예배는 물론이고 저녁예배와 수요, 금요 기도회를 적어도 제 의지로는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뜨거운 성령체험과 극적인 간증에 심취하며 각종 부흥회와 찬양 집회를 부지런히 쫓아다녔습니다. 그렇게, 청소년 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 흔히 “은혜 받았다”고 말하는 감정적인 신앙 경험을 맹목적으로 추구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과거를 이야기하면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분들이 종종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겨운 아픔을 느낍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 지난날의 그 종교 행위들은 건강한 신앙이 아니라 끔찍한 강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깊고 풍성한 사랑을 올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저를 다그치는 분이라고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저의 연약한 자아가 존재했습니다. 주님의 무한한 은혜보다는, 나의 열정과 헌신이 신앙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고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다닐수록 복음을 통해 해방과 평화를 누리기보다는 도리어 자신을 옭아매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기대했던 화려한 성공과 성취보다는 심각한 고통과 절망에 빠져들었습니다.

그러나 정말 감사하게도 하나님께서는 저를 일찌감치 신학의 길로 인도하셔서 진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라”는 이 따스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무언가를 많이 해내고 쓸모 있게 존재하라는 거짓 신앙과 단호히 결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함에 짓눌리기보다는 그분의 위대함에 기꺼이 안기게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낍니다. 그의 삶과 사역에는 성경 속 그 누구 못지않게 눈부신 이적들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가 폭군 아합 왕에게 온 이스라엘 가운데 몇 년 동안 극심한 가뭄이 들 거라고 예고하자 그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사르밧 마을에 사는 과부가 한 줌의 보릿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배불리 먹을 수 있게 하였습니다. 심지어는 그 과부의 아들이 숨을 거두자 그를 다시 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엘리야의 힘 있고 화려한 사역들은 갈멜산에서 거둔 승리에서 찬란한 절정에 이릅니다. 이날,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은 종일토록 자신들의 신을 향해 자해 하면서까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 엘리야가 제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순식간에 그곳에 불이 내려왔습니다. 그리하여 주님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라 것과 엘리야는 그분의 종이라는 사실을 공개적으로 명확히 드러내 보여주었습니다.

물론 이 사건의 주체는 엘리야가 아닌 하나님입니다. 그 역시도 감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황홀한 승리의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엘리야는 몹시 의기양양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야말로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했던 삶입니다. 어쩌면 이제 아합과 이세벨이 고개를 숙이고 자기를 고분고분 따를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권력은 결코 탐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맹렬하게 반격하였습니다. 갈멜산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은 기가 꺾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냉혹한 살기를 내뿜으며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전해 듣자 엘리야에게 조금 전까지의 호기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죽음을 갈구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천사를 보내 먹을 것을 주며 위로하셨습니다. 기운을 차린 그를 호렙산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바로 그곳에서 나눈 주님과 엘리야의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9절과 13절에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두 번이나 똑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바로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입니다. 이 구절을 새번역 성경은 원문과 좀 더 가깝게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로 옮겼습니다.

그러자 엘리야는 하나님의 반복되는 같은 질문에 역시 동일한 답을 10절과 14절에서 계속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간단명료한 물음과는 달리 엘리야의 대답은 무척 장황합니다. 이를 통해 그의 내면에 응어리진 본심을 발견하게 됩니다. 화면 보시면서 10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 함께 읽겠습니다.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새번역 성경)

우리는 여기서 문장의 주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내가” 열정을 불태웠고, “나만” 남았고, “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 시대, 엘리야만큼 열심히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와 달리 온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에 빠졌고 심지어 예언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엘리야 혼자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이세벨이 보낸 군사들이 일으키는 자욱한 흙먼지와 요동치는 말발굽 소리 앞에 너무나 위태롭습니다.

그런데 그가 힘겹게 토로하는 이 사실이 진실이 아닌 까닭이 무엇일까요? 어느 샌가 그의 내면에 하나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누가 뭐래도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 중 한 사람입니다.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그가 보인 찬란한 희생과 눈부신 업적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강력한 사람의 능력도 하나님의 권능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의 총명도 하나님의 지혜 앞에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막중한 사명감에 짓눌린 나머지 그만 그 진리를 잊고 말았습니다. 자신의 삶 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주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나의 열심과 열정만이 기울어져 가는 민족을 되살릴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겼습니다. 

허나 현실은 너무나 잔인하고 가혹했습니다. 눈앞에 살아있는 권력자 이세벨과 그가 섬기는 우상 바알과 아세라에 비해 하나님은 너무나 무력하고 초라하게만 보였습니다. 대체 내가 지금까지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는 허무함과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자책하였습니다. 그런 자신을 가여워하며 억울함 속에 하염없이 몸부림 쳤습니다.

정리하자면 엘리야는 ‘나’라는, ‘자아’라는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내면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은 사라진 채 오로지 나로만 가득한 ‘과잉 신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 극심한 탈진과 끝없는 절망 가운데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산 앞에 세우시며 당신의 뜻을 더욱더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본문 9절과 10절, 그리고 13절과 14절에서 주님과 엘리야 사이의 같은 질문과 동일한 답변이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사이에 위치하는 11~12절을 통해 핵심 주제를 드러내는 문학 구조를 이룹니다. 이 두 구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섰고 그 앞을 주님이 지나갔습니다. 그러자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이어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불”이 타올랐습니다. 하나같이 커다랗고 강력한 자연현상입니다. 이 모두는 지난날 그가 보여준 눈부신 이적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동안 그가 행했던 화려한 사역들을 상징적으로 눈앞에 펼쳐 보여줍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곳에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셨을까요? 12절에 보면 불 다음으로 “세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마치 속삭이듯 작고 부드러운 소리’입니다. 이 음성은 앞서 나타난 웅장한 바람과 지진과 불과는 명백히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미미하고 고요한 목소리를 통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크고 화려한 겉모습에 눈길을 뺏길 때는 결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내 안의 탐욕스런 소음에 귀를 가릴 때는 절대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속삭이듯 작고 고요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오직! 침묵할 때에만 들을 수 있습니다.

엘리야는 눈부신 성공의 주인공으로 살아오며 어느샌가 하나님을 오해하였습니다. 열심히 많은 일을 쓸모 있게 하는 것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면을 차분하게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주님께서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듯 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두는, 여백 신앙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물론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더는 크고 강력한 이적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뜻이 결코 아닙니다. 뜨겁게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이 침묵 기도보다 저급하다는 의미가 절대로 아닙니다. 다만,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경청할 수 있도록 우리의 존재와 삶 속에 여백을 비워두어야 합니다. 

신앙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나의 의지와 노력이 아니라 주님의 신실한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참된 침묵을 실천해 나가며 우리 각자와 공동체를 향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본문에서 엘리야와 이스라엘을 향해 세미하게 말씀하신 주님의 뜻은 15~18절에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우선 주목해야 할 말씀은 “너는 네 길을 돌이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 방향의 전환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엘리야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을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그 속에 감추어진 탐욕과 교만을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종으로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소명은 세 사람에게 기름 붓는 것으로 구체화 됩니다. 바로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입니다. 하사엘은 가장 극심하게 대립 했던 강적 아람의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외교와 전쟁을 상징합니다. 예후는 폭군 아합을 끌어내리고 뒤를 이을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를 대표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완성할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사엘을 사용하시고, 그 후에는 예후를, 그 다음에는 엘리사를 통해 마침내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엘리야는 어느샌가 잊어버린 소중한 진리를 자신의 온몸을 통해 명확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백성들의 모든 삶과 생명을 직접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사실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그동안 나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나 홀로 전부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빠졌습니다. 나마저 사라지면 당장 이스라엘이 몰락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조금의 여유조차 사치로 여겼습니다.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내달려야 한다고 스스로 몰아 붙였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엘리야를 향해 바알을 섬기지 않는 칠천 명을 이스라엘 가운데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무슨 뜻이겠습니까? 엘리야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자기가 만든 틀에 갇히지 말고, 좁은 생각과 경험에 얽매이지 말고 천천히 넓게 바라보라고 주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그가 앞서 로뎀 나무 아래에서 경험하였듯이, 가끔은 잠시 멈추어 쉬어가도 된다고 다독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멀리 떠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분명히 살아계신 당신의 통치를 믿고 의지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과잉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기꺼이 내려놓고 비워내는 여백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진정 노력해야 할 목표는 무언가를 채우고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기꺼이 비우고 지워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인간이 감히 덧칠할 수 없는 무한한 넓이와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설교 준비를 위해 본문 말씀을 묵상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논어(論語)구절이 있었습니다. 바로 자한(子罕)편 제4장입니다.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子絶四(자절사)러시니 毋意(무의), 毋必(무필), 毋固(무고), 毋我(무아)러시다” 

뜻은 이러합니다.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단절하셨다. 사사로운 의견이 없으셨으며,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이 없으셨으며, 고집함이 없으셨으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으셨다.” (국역: 이기동)

비록 유학의 가르침지만 우리 역시 가슴 깊이 간직해야 할 소중한 경구입니다.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면 이기적인 욕심과 아집과 오만을 단호히 끊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주님의 선하신 손길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우지 않고서는 절대로 채울 수 없습니다. 

이러한 깨우침은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구원이자 희망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만이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삶과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여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8절에 다음과 같은 찬양을 남깁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비우시어 철저히 무력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 사람이 되셔서 당신을 온전히 낮추시고 복종하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이 위대한 복음이 온 세상을 위한 우리 주님의 여백 위에 솟아올랐음을 반드시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날마다 분명히 돌이켜 봐야 합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추악한 야망을 붙잡을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탐욕을 그럴듯한 신앙 논리로 포장하며 스스로 속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교묘한 죄악을 단호히 분별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욕망을 숭배한다면, 열정을 다해 달려가면 갈수록 자신과 공동체를 파멸로 몰아넣기 때문입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헨리 나우웬의 글을 마저 읽어 드리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비추어서 귀 기울여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고독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분 앞에서 그저 가만히 머무르는 것입니다. 
What do we do in our solitude? the first answer is nothing. Just be present to he One who wants your attention and listen!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쓸모없는” 존재감 속에서 명확하게, 우리는 힘과 통제에 대한 망상을 점점 죽이며 우리 존재의 중심에 숨겨진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It is precisely in this "useless" presence to God that we can gradually die to our illusions of power and control and give ear to the voice of love hidden in the center of our being.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는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노력과 커다란 세심함을 필요합니다. 
But "doing nothing, being uesless" in not as passive as it sounds. In fact it requires effort and great attentiveness.

그것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현존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경청을 요구합니다."
It calls us to an active listening in which we make ourselves available to God's healing presence can be made new.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화려한 무언가를 당장 이루어 내라는 조바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릇된 탐욕을 끊어내야 합니다. 뿌리 깊은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대신, 저마다의 내면과 세상의 혼란스러운 소음 사이를 헤치며 들려오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귀 기울이시길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 오늘 주신 말씀의 핵심을 가장 명징하게 정리한 한 문장을 마음 깊이 간직하며 살아가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기도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엘리야처럼 너무나 분주하고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이루어 내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눌려 몹시 지친 나날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신앙조차 그 어리석은 기준으로 비교하고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시나브로 나지막이 다가오심을 주신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주님의 크고 위대한 계획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 진리를 따라 나 자신을 우상화하는 과잉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욕망과 자아를 비워내는 여백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여백으로 이 땅에 오시고 그 여백을 살아내고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0년 8월 2일 일요일

누가복음 13장 10~17절 "눈길과 손길"

2020년 7월 31일, 포항제일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3장 10~17절 "눈길과 손길"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아멘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네 시골 마을에서는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과 여건이 몹시 미비했습니다. 그 때문에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지적장애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지극히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대신, 가정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의 멸시와 천대 속에 온갖 고통을 받으며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비극적인 상황에 부닥친 한 여인의 모습을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내용 중에 있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너그럽게 이해 부탁드립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요
동네에서는 악귀 들린 년 혹은 미친년으로 통한다
빈농에서 자라나 이웃 마을 빈농의 총각에게
시집간 지 이레 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새색시 품을 파고드는 신랑에게
갑자기 금침 밑에 감춰둔 식칼을 꺼내 위협하고
시모 밥그릇에 몰래 똥을 누어 조반상에 올려놓아
시집살이 보름도 못 채우고 소박맞은 후
친정 오라비 그늘에 들어 애옥살이하면서
정신병원 근처에도 못 가 본 채
살얼음 잡힌 동네 개천에서 가끔씩 벌거벗고 목욕하다
난폭한 오라비 매질에라도 걸리면
푸른 멍 두드러기 돋아난 얼굴 부끄러워
치렁대는 긴 머리단으로 살포시 가리고

여러분이 만약 이런 사람과 마주한다면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이성은 마땅히 그를 도와주고 따뜻하게 보살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타인의 불행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이익과 감정을 우선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악귀 들린 미친 여자로 대하며 싸늘한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헌신적인 사랑을 베풀어야 할 가족이 누구보다 흉포한 손길을 휘둘렀습니다.

따라서 그녀가 온갖 종류의 폭력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지옥과 같은 시간을 보냈음을 행간 속에서 충분히 짐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건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아무도 헤아려주지 못할 설움을 묵묵히 삭이며 살아갈 뿐입니다.

단지 문학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처럼 당연히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많은 성도님 역시도 지난날, 어쩌면 지금 그런 가혹한 시련 가운데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계실 것입니다. 그 절망에 대한 유일한 답을 기도와 찬양 가운데 하나님으로부터 찾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이셨을 줄 압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도 끔찍한 외면과 소외를 겪으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많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에 대해 본문 11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그녀는 자신의 몸을 가눌 수 없는 중증 장애를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앓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너무나 가련하고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주위 사람들과 신앙 공동체의 세심한 돌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러한 도움을 주저하게 하는, 더 정확히는 혐오하고 꺼리게 되는, 그녀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귀신 들림’입니다.

이 때, 그녀를 사로잡은 ‘귀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이단이 그러하듯이 성경의 맥락과 상황을 무시한 채 지나치게 귀신의 존재를 의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대로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영적 존재를 부정하는 것도 그릇된 태도입니다. 대신 ‘귀신’이라는 언급을 통해 말씀이 드러내려 하는 바를 신중히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의 경우 귀신은 한 여인에게 신체적인 질병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는 실체입니다. 귀신들림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치유가 필요한 병자가 아니라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더러운 존재로 낙인 찍혔습니다. 비록 본문이 직접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 그녀를 덮친 가혹한 폭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녀의 억누른 절망역시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더욱더 끔찍한 점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 그 여인이 속한 신앙 공동체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회당입니다. 회당은 유대인 마을의 중심에서 신앙을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그녀가 사람들의 모멸적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에 있었던 까닭은 분명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희망을 찾고 싶어서입니다.

회당장은 그러한 회당을 관리하는 행정가이자 종교지도자입니다. 그는 마땅히 구약성경에 기록된, 약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귀신들려 장애로 신음하는 여인의 아픔을 헤아려 줘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따뜻한 섬김으로 그녀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회당장으로서의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의 행동을 합니다. 회당장은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놀라운 치유의 순간에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몹시 분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척 황당합니다. 1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은 왜 다른 날이 아닌, 하필 안식일에 병을 고쳤는지 거칠게 따져 물었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에게는 한 여인이 귀신들려 질병으로 신음하는 것보다 종교 질서가 더 중요했습니다. 안식일의 정신 대신 안식일 관련 율법들을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다. 말씀의 핵심보다 문자를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회당으로 눈물지으며 찾아온 그녀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것은 평소 회당에서 그 여인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한 마디로, 사람 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의 경건한 분위기를 망치는 사탄의 딸이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습니다. 하루속히 치우고 싶은 짐 더미에 불과했습니다. 

물리쳐야 할 대상은 분명 귀신입니다. 장애 여성인 그녀는 피해자이자 약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공동체의 선을 해치는 가해자 취급을 당했습니다. 마치 그녀 자체가 귀신인 양 멸시와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그녀에게 내미셨습니다. 12~13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아니라 그 여인에게 눈길을 보내고 말을 건네셨습니다. 단지 사탄이 물러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따뜻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는 그녀를 휘감은 귀신이 아니라 병으로 고통당하는, 그녀의 아픔을 먼저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추한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본질을 들여다보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행동이 아니라 그녀가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결핍과 아픔을 눈에 담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뒤틀린 몸에 직접 손을 얹으셨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얼마든지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손길을 일부러 건네셨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너무나 오랜만에 친근한 온기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신도 마땅히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할, 뜨거운 피와 살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의 존재를 새롭게 하는 중요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16절 말씀 다 함께 읽겠습니다.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그녀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호칭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바로 당시 유대교의 일그러진 신앙을 뒤집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브라함의 혈통인 자신들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특히나 민족의 위기를 겪으면서 아브라함의 자녀다운 행동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율법이 악용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드러나는 안식일 규정입니다.

그렇다면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눈에 귀신들린 여인은 결코 구원받는 아브라함의 딸일 수 없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런 그들의 오만을 비틀며 오히려 그녀야말로 진정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호칭이 신약 성경에서 오직 본문에만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비슷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도 누가복음에만 나오는데 바로 19장 9절에서 세리장 삭개오를 대상으로 합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 로마제국에 아부하는 삭개오 역시 그 시절 유대인들의 눈에는 절대로 구원받을 ‘아브라함의 자손’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그들에게만 그 영광스러운 호칭을 부여하였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외면되고 소외당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안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본문에 기록된 한 가련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은 편견을 넘어서는 무한한 은혜와 평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완성이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저는 감히 여러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아픔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참 많이 괴로우셨을 것입니다. 살아오고 살아가느라 무척 고생 많으셨습니다.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굴욕과 좌절 가운데 차가운 멸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 모양의 폭력 아래 무참하게 짓밟히기도 합니다. 그 결과,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눈물짓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읽은 말씀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우리에게 건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핵심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고 위중한 질병을 고치는 주님의 신기하고 강력한 이적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깊은 고통 한복판에 찾아오시는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담긴, 온 세상을 품으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참된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향해 따뜻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본색은 그가 다른 이들의 불행을 어떻게 대하는 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하려면 내 안의 어리석은 편견과 오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혐오스러운 겉모습이 아닌 그 내면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교회의 교회다움을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낡은 전통과 협소한 편견 가운데 약한 사람들을 함부로 밀어낸다면 본문 속 회당의 모습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가 전혀 없습니다. 그 대신, 우리는 예수님을 본받아 더욱더 넓은 품을 가져야 합니다. 힘겨워 하는 이들에게 보다 따스한 눈길과 손길을 전해야 합니다. 그렇게 섬김과 나눔의 샬롬 공동체를 우리 교회 안에 이루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본문을 통해 주님께서 당부하시는 소중한 부르심인줄 믿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시의 전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가계(家系)

- 조수순

연분홍 화장지로 우스꽝스럽게 접어 만든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소곳이 예배당 앞자리에 나와 앉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절절히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설교자의 말 끝마다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녀는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나님의 딸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요 
동네에서는 악귀들린 년 혹은 미친년으로 통한다
빈농에서 자라나 이웃 마을 빈농의 총각에게
시집간 지 이레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새색시 품을 파고드는 신랑에게
갑자기 금침 밑에 감춰둔 식칼을 꺼내 위협하고
시모 밥그릇에 몰래 똥을 누어 조반상에 올려놓아
시집살이 보름도 못 채우고 소박맞은 후
친정 오라비 그늘에 들어 애옥살이하면서
정신병원 근처에도 못 가 본 채
살얼음 잡힌 동네 개천에서 가끔씩 벌거벗고 목욕하다
난폭한 오라비 매질에라도 걸리면
푸른 멍 두드러기 돋아난 얼굴 부끄러워
치렁대는 긴 머리단으로 살포시 가리고
인적 드문 산모롱이를 돌아 예배당으로 오곤 하는데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나님의 딸이다
오늘 따라 홍조 띤 얼굴에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른 하나님의 아들 딸들과 똑같이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주기도문을 읊조리는 그녀는
(출처: <새가정>, 1988.03.29.)


삶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하염없이 헤쳐 가는 기나긴 여정입니다. 그렇게 애쓰는 가운데 때로는 아무에게도 위로와 공감과 도움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 칠수록 오히려 더 잔인한 폭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미시는 눈길과 손길로 말미암아 참된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 누가 뭐래도 우리는 모두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위대한 사랑의 하나님
이 시간 주신 말씀을 통해, 귀신들려 오랜 시간 중증 장애로 신음하던 여인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과 억압을 당했던 그녀에게 따뜻한 사랑의 손길과 눈길을 건네신 주님의 모습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로 부르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시는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통해 절망과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또한 다른 누군가를 복음의 능력을 통해 회복시키고 일으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온 세상의 참된 치유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로마서 2장 12~16절 "말씀을 행하는 자"

2020년 7월 24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로마서 2장 12~16절 "말씀을 행하는 자"

12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한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로마서 2장 1~11절 "심판이 있는 사랑"

2020년 7월 23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로마서 2장 1~11절 "심판이 있는 사랑"

1 그러므로 남을 판단하는 사람아, 누구를 막론하고 네가 핑계하지 못할 것은 남을 판단하는 것으로 네가 너를 정죄함이니 판단하는 네가 같은 일을 행함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