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6일 월요일

[영화 리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2013)

[영화 리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2013)
- 장 마크 발레(Jean-Marc Vallee, 1963~2021) 감독을 추모하며.



한 사람의 인격은 그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한 영화의 깊이는 인생의 비극을 대하는 태도로 가늠할 수 있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이 성숙한 예술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대표작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2013)을 뒤늦게 봤다.

앞서 보았던 그의 후속작 "와일드"(Wild, 2014) 그리고 "데몰리션"(Demolition, 2015)과 이어지는 주제 의식에 공감했다.

한 사람이 가진 날 것 그대로의 존재, 미美와 추醜를 동시에 보여주는 태도가 참 좋았다.
삶을 너무 비장하지도 가볍지도 않게 관조하는 자세가 마음에 와닿았다.
그것을 드러내는 매튜 맥커너히와 자레드 레토의 연기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밀려드는 여운을 느꼈다.
그렇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제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없다.
작년 말, 심장마비로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영화감독 장 마크 발레를 다시금 진심으로 추모한다.

그의 영화에 담긴, 사람과 세상을 향한 깊고 따뜻한 시선을 조금이라도 닮아가길, 그렇게 성숙한 사람이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2022년 5월 21일 토요일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참된 승리자”

2022년 5월 20일, 금,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참된 승리자”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인생은 경주입니다. 저마다 주어진 삶의 트랙위를 힘차게 달립니다. 하염없이 땀이 솟구칩니다. 심장은 세차게 요동칩니다. 어떤 누군가는 환호 소리와 함께 결승선을 통과합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허탈하게 마지막으로 들어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중간에 넘어져 탈락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판정 혹은 석연찮은 진행으로 억울한 결과를 감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는 이유입니다. 4년에 한번, 월드컵과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온 세계가 들썩입니다. 각종 프로경기에 구름같은 관중이 몰립니다.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거대한 산업을 이룹니다. 운동 경기의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까요? 인생과 가장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본능이 그 안에 꿈틀거립니다.

따라서 운동 경기에 열광하는 것은 오늘날 만이 아닙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세계 곳곳에는 여러 시합이 열렸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로마 제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제국의 종교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운동 경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스트미아 제전’입니다. 2년에 한번씩 포세이돈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습니다. 고린도는 이 화려하고 장엄한 시합을 후원하는 도시였습니다. 이 사실에 고린도 시민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비유를 사용합니다. 본문 24~25절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수천년이 지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피부에 쉽게 와 닿는 설명입니다. 세계 정상급의 기량을 펼쳐보이는 운동 선수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지 언론 보도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훈련량을 소화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생활의 많은 부분을 엄격하게 단속합니다. 

물론 그러지 않더라도 타고난 재능으로 좋은 결과를 보이는 선수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깐일 뿐입니다. 모든 일에 오랫동안 꾸준히 절제하며 노력하지 않고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명예로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승리자의 관은 결국 썩어 없어지고 맙니다. 눈부신 명예는 금세 녹슬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바라며 달려가는 상은 참되고 영원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당부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묵묵히 이어갈 것을 간곡히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전념해야할 인생의 승부는 과연 무엇일까요?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주는 목표하는 상뿐만 아니라 시합의 내용 또한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본문 19절과 23절 다시 한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왜 사람들은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돈을 오르고 싶어할까요? 인생의 시합에서 승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가난하고 배움이 적을수록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 한 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뼈아픈 현실입니다. 반대로 성공하면 할수록, 마음대로 내키는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납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더 많이 이기고 성취하길 갈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 문화와 로마 문화 모두 정통한 사람입니다. 양쪽 세계 모두 발을 걸치고 있습니다. 또한 율법과 십자가 복음, 모두의 핵심을 꿰뚫어보았습니다. 역시나 양쪽 모두 능통합니다. 따라서 사도는 이러한 자신의 배경과 실력을 이용해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약삭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자유를 누리며 원하는 것을 손에 움켜 쥘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무슨 까닭에 그는 그렇게 험난한 인생길을 선택했을까요? 목적은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얻기 위함입니다. 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락된 자유를 내려놓고 섬김의 종이 되는 것이 곧 복음의 복에 동참하는 것임을 사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렇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 말씀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며 평생 이어 가야할 승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맹렬히 달려가야할 목표는 세상과 정반대입니다. 모두가 우러러 보는 높은 지위가 아닙니다. 반짝이는 황금이 아닙니다. 물론 돈과 권력의 필요를 아예 부정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라는 뜻도 전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이만큼 세속적으로 성공했으니 그만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거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가장 궁극적인 지향점, 영혼의 가장 깊은 초점이 십자가를 향해야 합니다. 더욱더 낮아지고 나누고 섬기는 일에 무엇보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인생의 성패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습니다.

인생은 경주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호흡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은 삶이라는 이름의 경기를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극이 일어납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은 참된 시합의 내용과 승부를 정반대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리하여 헛된 상장에 목숨을 겁니다. 그 결과 무리하게 자신을 소진합니다. 다시 일어나기 힘든 부상을 입기도 합니다. 혹은 반칙을 하며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위대한 십자가를 통해 마침내 이루신 부활의 복음을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자유를 절제할 때, 진정 자유롭다는 진리의 신비를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위대한 패배자이신 주님께서 그런 우리 모두를 참으로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3~18절 "위대한 ‘그러나’"

2022년 5월 19일, 목,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고린도전서 9장 13~18절 "위대한 ‘그러나’"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러.나.’, 그러나는 우리말의 역접 접속사입니다. 세 글자로 이루어진 이 단어에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을 뒤 엎어버립니다.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본문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그러나’를 사용합니다. 바로 15절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렇게 편지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이 때부터 바울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바울이 왜 ‘그러나’를 사용했는지, 그가 하나도 쓰지 않은 ‘이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전반부에 해당하는 13~14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이 짧은 두 구절에 바울은 구약과 신약을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먼저 13절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여기에 히브리 문학 특유의 병렬법이 나타납니다. 같은 개념을 비슷한 두 단어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즉, ‘성전의 일’이나 ‘제단에서 섬기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는 것’과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 또한 동일한 일입니다.

바울이 상기시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율법의 제사 제도와 제사장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제사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제사를 전적으로 섬길 제사장과 레위인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맡겨진 사명을 오롯이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생활을 보장하셨습니다.

얼핏 세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전혀 게의치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제사법을 통해 구약 성경의 현실성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허공 가운데 붕뜨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고단한 세상 살이 한복판에 뿌리 내리길 바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전에서 일하고 제단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그 성직을 통해 삶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구약만이 아닙니다. 14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가르침을 계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 또한 그 생활을 보장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명확히 합니다. 다른 직업 없이 하나님의 일만을 하는 사람에게 교회가 적절히 보상 해야함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 자체를 전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언급하며 막강한 권위도 부여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위대한 접속사를 인용합니다. 바로 ‘그러나’입니다.

15절 앞부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 심지어 모세 율법과 예수님까지 인정한 권한을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선교 여행 기간동안 경비를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물론 바울역시 필요할 때, 일정 부분 다른 사람들의 후원과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완전히 자기 힘만으로 사역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일관적이고 분명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로서 마땅히 받을 수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과감히 내려 놓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은 남달리 우월한 도덕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초인적인 절제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그를 강렬히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16절 말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를 연상시키는 고백입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서 예언자는 이렇게 절절히 토로합니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복음이란 단단히 결심하고 절대 전하지 않으려 해도, 결국 외칠 수 밖에 없는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마치 마음에 불을 붙이는 것 같고 골수에 사무치기 때문입니다.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답답해 견딜 수 없습니다. 마침내 그 모든 어려움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17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이렇게 담담히 선언합니다.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헬라어 원문은 여기서 ‘받았다’는 동사를 ‘현재완료직설법’로 표현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순간적’인 동시에 ‘지속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돌연히 예수님을 만난 것은 분명 지난 날,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 날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그의 삶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전도자로서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고백을 남겼습니다. 본문 1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이 구했던 상, 그가 바라고 원했던 보상은 넉넉한 재물이나 사람들의 환호 혹은 눈부신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너무나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초라하고 별 볼일 없게 여겨집니다. 

실제 바울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주변부에 있던,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철저히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일생동안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갖은 오해와 무시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를 위대한 사도로 기억하고 존경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그.러.나.’의 신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나’의 원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희망을 세상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복음을 진심으로 믿고 고백한다면, 일상 속에 ‘그러나’를 실천해야 합니다. 누구나 크든 작든 속한 공동체에서 허락된 권한이 있습니다. 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도 대놓고 뭐라할 사람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약한 이들을 늘 배려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누구나 손에 든 재물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다 건강하게 하는 일에 소비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항상 둘러보고 즐겁게 나누어야 합니다.

이처럼 날마다 ‘그러나’의 길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바울의 삶을 닮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울을 높이 쓰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 참 은혜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022년 4월 11일 월요일

[서평] 한자(기원과 그 배경) - 시라카와 시즈카

시라카와 시즈카 <한자 - 기원과 그 배경>(서울: AK, 2017) 서평

작년 가을 한자 공부를 결심했다.
글자를 기계적으로 외우고 싶지는 않았다.
한자의 '의미' 또한 알고자 이 책도 함께 샀다.
올해 들어 손 놓고 있다가 어제 밤에 마저 읽었다.

이 책은 한문학의 세계적 거장인 저자가 지은 유일한 대중서다.
하지만 이 안에는 저자의 진지한 학문 자세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러한 태도가 내게는 내용보다 훨씬 더 흥미로웠다.

기존, 한문 연구에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고전은 중국 후한의 유학자 허신이 지은 <설문해자>(說文解字)다.
가장 오래된 부수별 자전인 이 책은 각 한자의 본래 뜻과 구조를 해석하여 서술하였다.
서기 100년부터 시작해 21년 만에 완성한 역작이다.
오늘날에도 자주 인용하는 유의미한 기록이다.
그러나 치명적인 약점이 있다.
한자의 원형인 은나라 갑골문자를 모르고 한 해석이다.

저자는 설문해자 때보다 천년을 앞서는 갑골문을 치밀하게 연구하였다.
특별히 그 안에 담긴 한자의 제의적 특성을 정리하였다.
그 결과, 허신의 오류를 치밀하게 논박하며 한자의 근원적 성격을 알려주었다.

이는 성경 해석에서도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을 준다.
내 짧은 견해로 근본주의 개신교 신학의 가장 큰 맹점은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지나친 권위 부여다.
물론 험난한 시대적 모순을 뚫고 진리를 지켜내었던 그들의 몸부림을 진심으로 존경한다.
그들의 저작은 여전히 읽고 연구해야 할 충분한 가치를 지닌다.

그러나 개혁자들의 신학을 절대화하여 그것을 기준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데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마치, 주 후 1세기의 허신이 자기보다 천 년 전에 존재했던 은나라 갑골문자를 몰랐듯이 16~17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오늘날 우리보다 훨씬 더 성경 시대의 역사와 문화에 무지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해석의 근원적인 토대는 후대 막강한 권위를 가진 신학적 사변이 아니다.
성경이 처음 기록되고 전승되고 완성되고 읽혔던 당시 사람들의 삶과 정신이다.
고대 서아시아의 문헌, 그리고 로마 시대의 사회사를 연구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그러한 연구에도 한계가 있다.
애초에 성경에 대한 완벽한 해석이라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근원'을 향한 일관된 탐구가 그 어떤 신학적 노력보다 우선해야 하는 것은 분명하다.
결국 막연한 짐작에 근거한 매끈하고 감동적인 해설이 아닌, 옛 세계의 투박한 정서와 맞닿은 평범한 해석이 쉽게 멈추지 않는 묵직한 울림을 안겨준다.

서평을 흉내낸 잡설을 늘어놓으며 무엇보다 자신의 한계를 절감한다.
무려 6년이나 걸려 분에 넘치게 구약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여전히 서아시아의 역사와 전통에 대해 너무나 무지하다.

이렇듯 시라카와 시즈카의 <한자>는 한문뿐만 아니라 옛 문자를 다루는 모든 학문에 유의미한 성찰을 주는 책이다.
그의 다른 책들도 기회 되는 데로 찾아 읽고 싶다.
그리고 저자를 조금이라도 닮고 흉내 내며 성경을 진득하게 공부하고 싶다.



도서 정보
http://aladin.kr/p/dUldy

2022년 3월 31일 목요일

히브리서 11장 8~16절, “믿음을 따라 살다가”

2022년 3월 30일, 포항제일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히브리서 11장 8~16절, “믿음을 따라 살다가”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는 믿음을 따라 멀리 떠나왔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1889년 10월 2일, 한 호주 청년이 부산항에 내렸습니다. 긴장과 설렘이 섞인 표정 위로 낯선 가을 바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죠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입니다. 데이비스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젊은 나이에 교육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가정을 꾸리고 여유를 누리며 살아도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가슴 깊이 간직했던 소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파의 일꾼으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였습니다. 어느 날 조선선교의 필요성과 급박성을 호소하는 글을 읽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단의 제1호 조선선교사로 파송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구한말 참으로 척박했던 이 땅에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그는 금세 다른 선교사들과 친해지고 선교사공의회의 서기가 될 정도로 실력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데이비스는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더욱더 험난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서울에는 선교사들이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새로운 선교지를 찾기 위해 도보로 기나긴 답사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선택한 곳은 바로 영남지방이었습니다. 부산을 목적지로 하고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주간의 무리한 여정 가운데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그 결과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폐렴까지 겹쳤습니다. 겨우 부산에 도착하긴 했지만 금세 사경을 헤맸습니다. 결국 다음 날인 1890년 4월 5일, 그가 조선 땅을 밟은 지 육 개월 만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서른세 살 이었습니다.

너무나 황망한 죽음입니다. 앞날이 촉망받는 유능한 청년이 과감히 헌신하며 선교지로 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당연히 그에게 커다란 성과를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희생에 따른 결실을 얻기는커녕 채 꽃 피우기도 전에 허무한 결과를 맞닥뜨리곤 합니다. 힘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만의 경우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다는 것은 곧 ‘떠남’을 의미합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격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죄의 질서와 이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뜻한 풍요를 주었던 익숙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기회와 소유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 극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정반대입니다. 더 큰 상실을 겪고 방황 하곤 합니다. 후회가 밀려올 때도 많습니다. 떠나온 그곳을 계속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있습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믿음 여정의 이면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모순을 성경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 역시 고향을 벗어나 멀리 떠나왔습니다. 하지만 별 이룬 것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차근히 돌이켜보면 너무나 스산한 인생을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였을 때 ‘야훼’라는, 너무나 낯선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지목하여 부르셨습니다. 그 만남은 지금까지 그가 익히 알아왔던 모든 신들이 거짓이었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방황하며 오랫동안 갈구했던 참 진리를 마침내 발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은 명확합니다. 바로 큰 민족을 이루어 그의 이름을 널리 떨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지금껏 그저 아들 하나만이라도 낳아서 자기 이름을 이어주길 간절히 바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다른 높은 차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치 한 모금의 생수를 구한 사람에게 드넓은 호수를, 한 움큼의 흙을 원한 사람에게 드높은 산을 허락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과감히 믿음의 여정을 떠났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우리가 두고두고 본받을 만한 너무나 위대한 신앙의 한 장면입니다. 믿음에 관한 성경에서 가장 눈부신 묘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냉정하게 물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받은 것을 정말 얻었을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수천 년 간의 종교전통을 잠시 멀리 치워두고 철저히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주님의 찬란한 언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대신 숱한 시련과 마주했습니다. 권력자들의 기세에 눌려 아내를 누이라고 무려 두 차례나 속이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자식처럼 키운 조카 롯에게 배신당해 많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타들어가는 속을 부여잡고 아무리 기다려도 사라의 태는 도무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나이 백 살에 아들 하나를 힘들게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삭을 불태워 바치라는 잔인한 요구를 하나님께로부터 듣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그 사건의 훈훈한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의 목숨은 무사히 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날, 그 모리아 산 위에서 아브라함의 내면 전체가 얼마나 끔찍하게 뒤틀렸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기나긴 나그네 길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내 사라가 먼저 누워 있는 막벨라 굴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모습을 창세기 25장 9절은 이렇게 쓸쓸하게 묘사합니다. 

9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고요히 잠든 아브라함의 곁을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지켜주었습니다. 물론 장례식에 이 두 사람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후처 그두라를 통해 낳은 자녀들과 여러명의 종들도 분명 함께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온전히 이을 아들은 알다시피 이삭 혼자입니다. 게다가 이삭 역시 아버지처럼 결혼하고 꽤 오랜 뒤에 느지막이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생전에 직접 눈으로 본 명실상부한 후손은 이삭과 야곱과 에서, 이렇게 겨우 세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눈에는 평범한 장례식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식의 숫자를 망자의 명예와 동일시했던 옛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단순히 넘길 장면이 아닙니다. 다른 족장들은 당시 대가족 문화를 따라 적어도 수십 명, 많으면 백 명이 훌쩍 넘는 자손들에 둘러싸여 성대하게 장사를 치렀을 것입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아브라함의 장례 풍경은 지극히 초라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허다한 별이나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는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큰 민족을 이루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는 언약이 공허한 허풍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아브라함 부부가 이 땅에서 걸어왔던 고단한 인생길을 본문 13절 전반부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새번역)

너무나 아프고 쓰린 문장입니다. 비장하고 서글픈 삶의 질곡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감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따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13절 전체를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정확히 꿰뚫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그 시대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아들을 줄줄이 낳아 으스대고 떵떵거리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히는 언약의 깊이를 헤아렸습니다. 거기에 온 삶을 걸고 진심을 담아 아멘을 외쳤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바로 ‘나그네’입니다.

이것을 14절은 ‘본향 찾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삶의 결정적 운명과 진정한 평가가 지금, 이곳에서 끝나지 않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당장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돈과 명예가 있는지를 따지고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고된 나그네 생활을 주저 없이 포기 했을 것입니다. 수천 년 전에 이미 고도의 문명을 이루었던 고향 땅 우르에 돌아가 다시금 안락한 삶을 누리려 하였을 것 입니다.

대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하늘 고향, 즉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본문 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 부부의 시선은 더 먼 곳을 향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기꺼이 이루실 언약의 절정입니다. 그 하늘 본향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저 멀리에 있습니다. 지금 이 곳에서 볼 때는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흐릿하게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11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미쁘심, 즉 신실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대단하지 않은 인생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삶의 순간순간, 그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과의 동행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벧엘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 조카 롯에게 바보처럼 다 양보하고 황량한 땅에 남겨진 그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셨을 때, 어느 한 낮에 세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 오셔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갓 태어난 아들 이삭의 신비로운 눈망울과 마주쳤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시작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점점 더 깨달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비록 사람들 눈에는 그의 죽음이 허망해 보일지 모릅니다. 막벨라 굴 앞에서의 한적한 장례식 모습이 그런 감정을 더욱 부추깁니다. 어쩌면 그를 두고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위대한 언약을 완전하게 이루시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어스름하게 보았던 하나님 나라를 또렷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막연하게 경험했던 주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이루어가셨습니다. 세상의 질서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이시며 몸소 나그네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길 끝에,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하는 까닭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문을 억지로 억누르는 무모한 의지력이 아닙니다. 무작정 내달리는 맹신도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생의 그 어떤 모래 바람과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하늘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토록 사모했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 곧 새 예루살렘을 요한계시록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계시록 21장 2~4절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성도라 할지라도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여전히 질병은 몸과 마음을 괴롭힙니다. 가난은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줍니다. 가족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고통으로 내몹니다. 때로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복음이 공허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거짓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처참한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아픔이 가득합니다. 그것에 비해 주님은 너무나 무기력한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쉽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현실을 도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세만을 바라보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믿음을 따라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다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직접 닦아주시는 하나님, 새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신실하신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믿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으시고 진정한 결실을 이루심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해 드렸던 죠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그를 파송한 고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데이비스가 숨을 거두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890년 5월 7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해외선교위원회에서는 우리가 한국에 보낸 첫 번째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의 죽음이라는 큰 손실을 기록할 것을 원한다. 그의 열성적 헌신, 학자로서의 탁월한 재능, 주목할 만한 지속적인 신앙생활, 다른 사람에 대한 강렬한 영향력 등은 새로운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스데반이 일찍 부름을 받고 안식과 보상을 받았던 것처럼 데이비스를 분명하게 축복하셨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감화를 받아 그의 정신을 알리고 그의 열심을 본받아 우리의 옛 형제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영광의 왕관을 받기를 바란다.”

호주 장로교는 이 때부터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조선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곳곳에 교회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민족의 고난에 함께하며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넓게 보자면 우리 포항제일교회도 그 영향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분명 허망해 보이지만 결코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눈부신 복음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그 중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어진 삶의 현장에 충실하되 눈길은 하늘 본향을 향해야 합니다. 주님의 언약을 깊이 헤아리고 진심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 땅에서 믿음 따라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처럼 남루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앙 여정을 기쁨으로 묵묵히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언약을 맺으시며 마침내 새예루살렘을 완성시키실 그 하나님께서 참으로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길 소망합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본향을 사모하며 인생의 발걸음을 옮기는 나그네임을 고백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거두는 약속의 결실은 작고 초라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저희를 통해 이루실 주님의 다스림은 지극히 크고 위대하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 따라 주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고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약 하신 그대로 새예루살렘을 완성하시고 그 안으로 저희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