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6월 14일 화요일

따뜻한 품에서 놓아주기


인하는 포항제일교회 부설 유치원을 다닌다.
덕분에 출근하며 등원도 함께 한다.
차에서 내려줄때마다 곧바로 내게 이렇게 말한다.
"아빠 안아줘"
아들을 번쩍 안고, 그 뭉클한 온기를 느끼며 유치원 문 앞까지 데려다준다.

이 이야기를 들은 아내는 혼자 보내라고 한다.
하지만 그럴 생각은 없었다.
이런 날이 머지 않아 끝날 걸 알기 때문이다.
내가 안아 줄 수 있는 인하의 몸무게, 그리고 나에게 폭 안기는 인하의 마음이 그리 오래 가진 않을 것이다.
이 행복을 누릴 수 있을 때까지 실컷 누리고 싶었다.

그런데 막연히 예상했던 순간이 불쑥 찾아왔다.
오늘은 인하가 차에서 내리기 전에 이렇게 말했다.
"아빠가 유치원 가방 메주면, 인하가 여기서부터 혼자 걸어갈게."
훌쩍 커버린 아들이 대견하면서도 어딘가 서운했다.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이미 인하는 그 자체로 하나의 훌륭한 인격체다.
더 이상 내 품 안에 가둘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나에게서 벗어나 훨훨 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
쓸쓸하고 아프더라도 그것이 아비가 할 역할이다.
내 뜻, 바람과 다르게 자라더라도 인하가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자기만의 날갯짓을 한다면 그걸로도 충분히 내 할 몫을 한 것이다.

물론 내일 다시 인하가 마음을 바꿔, 내 품에 안긴 채 유치원에 갈 수도 있다.
하지만 오늘 아침, 아들은 자기도 모른 채 묵직한 메시지를 툭 안겼다.
그 덕에 새삼 명심한다.
언제든 아들이 기댈 따뜻한 품을 갖자.
동시에 떠나 보낼 준비를 하자.

2022년 6월 8일 수요일

데일 카네기 <성공대화론> 中

"청중의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당신이 그들보다 훨씬 우월하다고 과시하는 것이다. 여러 사람 앞에서 말을 할 때 당신은 진열장 안에서 자신의 인격을 샅샅이 드러내는 것과 같다. 조금이라도 허세를 부리는 것은 치명적이다. 

반면에 겸손함은 신뢰와 호감을 불러온다. 비굴하지 않으면서도 겸손해 보일 수 있다. 스스로 완벽하지 않고, 한계가 있다고 암시한 상태에서 최선을 다하겠다는 태도를 보여주면 청중은 당신을 좋아하고, 존경할 것이다."

- 설교자로서 가슴깊이 명심해야 할 진리다.

2022년 6월 6일 월요일

[영화 리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2013)

[영화 리뷰]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2013)
- 장 마크 발레(Jean-Marc Vallee, 1963~2021) 감독을 추모하며.



한 사람의 인격은 그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통해 드러난다.

마찬가지로 한 영화의 깊이는 인생의 비극을 대하는 태도로 가늠할 수 있다.

"장 마크 발레" 감독이 성숙한 예술가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의 대표작 "달라스 바이어스 클럽"(Dallas Buyers Club, 2013)을 뒤늦게 봤다.

앞서 보았던 그의 후속작 "와일드"(Wild, 2014) 그리고 "데몰리션"(Demolition, 2015)과 이어지는 주제 의식에 공감했다.

한 사람이 가진 날 것 그대로의 존재, 미美와 추醜를 동시에 보여주는 태도가 참 좋았다.
삶을 너무 비장하지도 가볍지도 않게 관조하는 자세가 마음에 와닿았다.
그것을 드러내는 매튜 맥커너히와 자레드 레토의 연기에 진심으로 탄복했다.

엔딩 크레딧과 함께 밀려드는 여운을 느꼈다.
그렇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를 받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이제 더 이상 그의 새로운 작품을 볼 수 없다.
작년 말, 심장마비로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다.
위대한 영화감독 장 마크 발레를 다시금 진심으로 추모한다.

그의 영화에 담긴, 사람과 세상을 향한 깊고 따뜻한 시선을 조금이라도 닮아가길, 그렇게 성숙한 사람이 되길 진심으로 소망한다.


2022년 5월 21일 토요일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참된 승리자”

2022년 5월 20일, 금,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고린도전서 9장 19~27절 “참된 승리자”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0 유대인들에게 내가 유대인과 같이 된 것은 유대인들을 얻고자 함이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는 내가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나 율법 아래에 있는 자 같이 된 것은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22 약한 자들에게 내가 약한 자와 같이 된 것은 약한 자들을 얻고자 함이요 내가 여러 사람에게 여러 모습이 된 것은 아무쪼록 몇 사람이라도 구원하고자 함이니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26 그러므로 나는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 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 같이 아니하며
27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


인생은 경주입니다. 저마다 주어진 삶의 트랙위를 힘차게 달립니다. 하염없이 땀이 솟구칩니다. 심장은 세차게 요동칩니다. 어떤 누군가는 환호 소리와 함께 결승선을 통과합니다. 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허탈하게 마지막으로 들어옵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중간에 넘어져 탈락하기도 합니다. 잘못된 판정 혹은 석연찮은 진행으로 억울한 결과를 감내하기도 합니다.

이것이 바로 사람들이 스포츠 경기에 열광하는 이유입니다. 4년에 한번, 월드컵과 올림픽이 열릴 때마다 온 세계가 들썩입니다. 각종 프로경기에 구름같은 관중이 몰립니다. 천문학적인 돈이 오가는 거대한 산업을 이룹니다. 운동 경기의 무엇이 이토록 사람들을 울고 웃게 만들까요? 인생과 가장 닮아 있기 때문입니다. 길게 설명할 필요 없이 직관적으로 감정을 이입하게 하는 본능이 그 안에 꿈틀거립니다.

따라서 운동 경기에 열광하는 것은 오늘날 만이 아닙니다.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세계 곳곳에는 여러 시합이 열렸습니다. 본문의 배경이 되는 로마 제국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 문화를 받아들여 제국의 종교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운동 경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이스트미아 제전’입니다. 2년에 한번씩 포세이돈을 기념하기 위해 열렸습니다. 고린도는 이 화려하고 장엄한 시합을 후원하는 도시였습니다. 이 사실에 고린도 시민들은 상당한 자부심을 가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이 친숙하게 받아들일 비유를 사용합니다. 본문 24~25절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릴지라도 오직 상을 받는 사람은 한 사람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상을 받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25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그들은 썩을 승리자의 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수천년이 지난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도 피부에 쉽게 와 닿는 설명입니다. 세계 정상급의 기량을 펼쳐보이는 운동 선수들이 얼마나 치열하게 자기 관리를 하는 지 언론 보도를 통해 쉽게 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상상도 못할 어마어마한 훈련량을 소화합니다. 뿐만 아니라 사생활의 많은 부분을 엄격하게 단속합니다. 

물론 그러지 않더라도 타고난 재능으로 좋은 결과를 보이는 선수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잠깐일 뿐입니다. 모든 일에 오랫동안 꾸준히 절제하며 노력하지 않고는, 소수에게만 허락된 명예로운 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얻은 승리자의 관은 결국 썩어 없어지고 맙니다. 눈부신 명예는 금세 녹슬어 버립니다. 그러나 성도들이 바라며 달려가는 상은 참되고 영원합니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당부합니다. 믿음의 경주를 묵묵히 이어갈 것을 간곡히 권면합니다. 그렇다면 성도들이 전념해야할 인생의 승부는 과연 무엇일까요?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의 경주는 목표하는 상뿐만 아니라 시합의 내용 또한 세상과 전혀 다릅니다. 

본문 19절과 23절 다시 한번 다 같이 읽겠습니다.

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3 내가 복음을 위하여 모든 것을 행함은 복음에 참여하고자 함이라

왜 사람들은 그렇게 높은 지위에 오르고 많은 돈을 오르고 싶어할까요? 인생의 시합에서 승자가 되고 싶어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간단합니다. 편해지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나의 눈치를 보게 됩니다. 가난하고 배움이 적을수록 억울한 일을 당해도 말 한 마디 제대로 할 수 없는 것이 뼈아픈 현실입니다. 반대로 성공하면 할수록, 마음대로 내키는대로 할 수 있는 일들이 늘어납니다. 그런 까닭에 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더 많이 이기고 성취하길 갈구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정반대로 살았습니다. 그는 유대 문화와 로마 문화 모두 정통한 사람입니다. 양쪽 세계 모두 발을 걸치고 있습니다. 또한 율법과 십자가 복음, 모두의 핵심을 꿰뚫어보았습니다. 역시나 양쪽 모두 능통합니다. 따라서 사도는 이러한 자신의 배경과 실력을 이용해 자기에게 유리한대로 약삭빠르게 움직일 수 있었습니다. 얼마든지 자유를 누리며 원하는 것을 손에 움켜 쥘 수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스스로 모든 사람의 종이 되었습니다. 무슨 까닭에 그는 그렇게 험난한 인생길을 선택했을까요? 목적은 분명합니다. 많은 사람들을 얻기 위함입니다. 보다 더 많은 이들에게 하나님 나라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허락된 자유를 내려놓고 섬김의 종이 되는 것이 곧 복음의 복에 동참하는 것임을 사도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그렇게 행하셨기 때문입니다. 빌립보서 2장 5~8절 말씀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닮아가고자 분투하는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이 땅에 살아가며 평생 이어 가야할 승부의 핵심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모습을 지니셨으나 그것을 당연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당신을 비워 종의 모습을 취하셨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낮추셨습니다. 심지어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습니다.

따라서 성도가 맹렬히 달려가야할 목표는 세상과 정반대입니다. 모두가 우러러 보는 높은 지위가 아닙니다. 반짝이는 황금이 아닙니다. 물론 돈과 권력의 필요를 아예 부정하라는 뜻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의 필요를 완전히 무시하라는 뜻도 전혀 아닙니다.

다만 내가 이만큼 세속적으로 성공했으니 그만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거라고 착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삶의 가장 궁극적인 지향점, 영혼의 가장 깊은 초점이 십자가를 향해야 합니다. 더욱더 낮아지고 나누고 섬기는 일에 무엇보다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인생의 성패가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승리의 월계관을 쓸 수 있습니다.

인생은 경주입니다. 이 땅에 태어나 호흡을 시작하는 순간부터 모든 사람은 삶이라는 이름의 경기를 시작합니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극이 일어납니다. 어리석은 인간의 욕망은 참된 시합의 내용과 승부를 정반대로 오해하곤 합니다. 그리하여 헛된 상장에 목숨을 겁니다. 그 결과 무리하게 자신을 소진합니다. 다시 일어나기 힘든 부상을 입기도 합니다. 혹은 반칙을 하며 다른 사람을 걸려 넘어지게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참된 승리자,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주님께서 당신의 위대한 십자가를 통해 마침내 이루신 부활의 복음을 마음에 새기시길 바랍니다. 모든 사람을 위해 자유를 절제할 때, 진정 자유롭다는 진리의 신비를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위대한 패배자이신 주님께서 그런 우리 모두를 참으로 이기게 하실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9장 13~18절 "위대한 ‘그러나’"

2022년 5월 19일, 목,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고린도전서 9장 13~18절 "위대한 ‘그러나’"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15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또 이 말을 쓰는 것은 내게 이같이 하여 달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차라리 죽을지언정 누구든지 내 자랑하는 것을 헛된 데로 돌리지 못하게 하리라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로다
17 내가 내 자의로 이것을 행하면 상을 얻으려니와 내가 자의로 아니한다 할지라도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그.러.나.’, 그러나는 우리말의 역접 접속사입니다. 세 글자로 이루어진 이 단어에는 강력한 힘이 있습니다. 앞서 이야기한 내용을 뒤 엎어버립니다. 진정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알려줍니다.

마찬가지로 사도 바울도 본문에서 매우 의미심장하게 ‘그러나’를 사용합니다. 바로 15절입니다. 그는 고린도 교회를 향해 이렇게 편지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이 때부터 바울의 진심이 드러납니다. 따라서 본문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 바울이 왜 ‘그러나’를 사용했는지, 그가 하나도 쓰지 않은 ‘이것’은 과연 무엇인지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먼저 전반부에 해당하는 13~14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3 성전의 일을 하는 이들은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으며 제단에서 섬기는 이들은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14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이 짧은 두 구절에 바울은 구약과 신약을 명쾌하게 정리합니다. 먼저 13절을 자세히 보겠습니다. 여기에 히브리 문학 특유의 병렬법이 나타납니다. 같은 개념을 비슷한 두 단어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방식입니다. 즉, ‘성전의 일’이나 ‘제단에서 섬기는’ 것은 같은 말입니다. 그리고 ‘성전에서 나는 것을 먹는 것’과 ‘제단과 함께 나누는 것’ 또한 동일한 일입니다.

바울이 상기시키는 것은 분명합니다. 바로 율법의 제사 제도와 제사장 사이의 관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제사법’을 알려주셨습니다.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제사를 전적으로 섬길 제사장과 레위인을 세우셨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이 맡겨진 사명을 오롯이 감당할 수 있도록 적극적으로 생활을 보장하셨습니다.

얼핏 세속적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들은 먹고사는 문제에 전혀 게의치 않아야 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제사법을 통해 구약 성경의 현실성을 확인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뜻이 허공 가운데 붕뜨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고단한 세상 살이 한복판에 뿌리 내리길 바라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전에서 일하고 제단에서 섬기는 사람들이 그 성직을 통해 삶을 이어가게 하셨습니다.

구약만이 아닙니다. 14절에 보면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와 같이’ 주께서도 복음 전하는 자들이 복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명하셨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가르침을 계승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십자가와 부활, 즉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는 사람 또한 그 생활을 보장 받아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명확히 합니다. 다른 직업 없이 하나님의 일만을 하는 사람에게 교회가 적절히 보상 해야함을 분명히 인정합니다. 그 자체를 전혀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언급하며 막강한 권위도 부여합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놀라운 반전이 일어납니다. 위대한 접속사를 인용합니다. 바로 ‘그러나’입니다.

15절 앞부분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이것을 하나도 쓰지 아니하였고”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당연한 권리, 심지어 모세 율법과 예수님까지 인정한 권한을 하나도 쓰지 않았습니다. 

이 사실을 사도행전에서 분명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3차에 걸친 선교 여행 기간동안 경비를 스스로 마련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물론 바울역시 필요할 때, 일정 부분 다른 사람들의 후원과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가 완전히 자기 힘만으로 사역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의 태도는 일관적이고 분명했습니다. 복음 전하는 자로서 마땅히 받을 수 있는 것을 당연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권한을 과감히 내려 놓았습니다.

이것은 바울은 남달리 우월한 도덕성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가 초인적인 절제력이 있어서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복음이 그를 강렬히 사로잡았기 때문입니다. 16절 말씀,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6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그것이 나에게 자랑거리가 될 수 없습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그것을 해야만 합니다. 내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나에게 화가 미칠 것입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를 연상시키는 고백입니다. 예레미야 20장 9절에서 예언자는 이렇게 절절히 토로합니다.

9 내가 다시는 여호와를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나의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치니 답답하여 견딜 수 없나이다

복음이란 단단히 결심하고 절대 전하지 않으려 해도, 결국 외칠 수 밖에 없는 살아있는 진리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마치 마음에 불을 붙이는 것 같고 골수에 사무치기 때문입니다.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답답해 견딜 수 없습니다. 마침내 그 모든 어려움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선포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17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이렇게 담담히 선언합니다. “나는 사명을 받았노라” 헬라어 원문은 여기서 ‘받았다’는 동사를 ‘현재완료직설법’로 표현합니다. 과거에 있었던 일이 현재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순간적’인 동시에 ‘지속적’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돌연히 예수님을 만난 것은 분명 지난 날,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은 그 날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 이후,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그의 삶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렇기에 복음전도자로서 너무나 위대하고 아름다운 고백을 남겼습니다. 본문 1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그런즉 내 상이 무엇이냐 내가 복음을 전할 때에 값없이 전하고 복음으로 말미암아 내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아니하는 이것이로다

바울이 구했던 상, 그가 바라고 원했던 보상은 넉넉한 재물이나 사람들의 환호 혹은 눈부신 명예가 아니었습니다. 자신에게 있는 권리를 다 쓰지 않는 것입니다. 어찌보면 너무나 미련하고 어리석게 보입니다. 초라하고 별 볼일 없게 여겨집니다. 

실제 바울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당시 로마 사회에서 주변부에 있던, 교회 공동체 안에서도 철저히 소외된 사람이었습니다. 일생동안 외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갖은 오해와 무시를 당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그를 위대한 사도로 기억하고 존경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가 ‘그.러.나.’의 신비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 따라 살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러나’의 원리를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습니다. 부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과 희망을 세상에 전하게 하셨습니다.

이러한 복음을 진심으로 믿고 고백한다면, 일상 속에 ‘그러나’를 실천해야 합니다. 누구나 크든 작든 속한 공동체에서 허락된 권한이 있습니다. 그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러도 대놓고 뭐라할 사람 없는 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겸손히 약한 이들을 늘 배려하고 존중해야 합니다. 누구나 손에 든 재물을 원하는 대로 사용할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을 보다 건강하게 하는 일에 소비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아픔을 항상 둘러보고 즐겁게 나누어야 합니다.

이처럼 날마다 ‘그러나’의 길을 선택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바울의 삶을 닮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울을 높이 쓰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 참 은혜와 평화를 누리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