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8월 19일 금요일

창세기 10장 1~32절 "모순적인 현실에서"

2022년 8월 19일, 금,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0장 1~32절 "모순적인 현실에서"

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13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
15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19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31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창세기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인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노아의 아들들은 각각 거대한 민족을 이룹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그동안 상당한 오해를 받았습니다. 인류학적인 기록으로 잘못 이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종이 나뉘는 장면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즉, 셈은 황인종, 함은 흑인종, 야벳은 백인종의 조상으로 여깁니다. 너무나 허무맹랑한 궤변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꽤 오랜시간 이러한 낭설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심지어 인종차별을 정당화 하기도 했습니다. 

그 근거는 어제 읽은 9장 25절입니다. 여기서 노아는 둘째 아들 함을 저주합니다. 그러면서 함이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될거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저주대로 함의 자손들인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거리낌없이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신중히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논리를 성경으로 억지로 끼워 마친 사례입니다.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이런 견해가 왜 잘못되었을까요? 본문의 의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종’이라는 생물학적인 분류는 성경의 관심사가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에 익숙한 오늘날 우리의 시각입니다. 특히나 수천년이 흘러 대서양에서 이루어진 잔악무도한 흑인 노예무역에 대해 그들이 알고 평가할 리가 없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하고 그것을 처음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을 논하고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무엇이 더 중요했을까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 통치입니다. 본문에는 세 아들의 후손들이 퍼져나가 살았던 지역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 지역들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서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입니다. 당시 사람들로서는 세계 전체였습니다. 따라서 구약 학자들은 창세기 10장을 글자로된 ‘세계 지도’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다시금 되짚어 보시길 바랍니다. 온 땅에 죄가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다짐하셨습니다.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방주에 노아의 가족과 각종 동물들을 태우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온 땅이 물에 잠겼습니다. 세상이 황폐해 졌습니다.

그런 다음 인류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열어갑니다. 노아는 아담을 이은 인류의 두 번째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척박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말미암아 또 다른 생명의 길을 열어 가셨습니다. 다시금 구원의 뜻을 펼쳐보이셨습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와 같았던 재난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루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었습니다. 특별히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고 바벨론에서의 포로살이 했던 이스라엘에게 소중한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 어떤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더라도 주님께서 새힘을 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열어보이실 것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며 너무나 지치고 어려운 순간을 경험합니다. 풀 한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광야의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돌보심을 신뢰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계획을 기대하고 그 뜻을 따르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세기 10장의 족보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둘째, 함의 족보가 셈과 야벳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야벳의 후손은 2~5절, 셈의 후손은 21~31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함의 후손은 무려 6~20절까지 적혀있습니다. 절을 기준으로 단순하게 계산하면 셈과 야벳의 자손을 합한 것과 같습니다.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에게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준엄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창세기는 그런 함의 자손들을 비중있게 소개할까요?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8~9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전체적으로 족보가 이어지는 10장에서 잠시 흐름에 빗겨나 한 인물을 집중합니다. 그가 그만큼 주목할만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함의 손자 니므롯입니다. 그는 ‘용사’라는 칭호를 받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또한 용감한 사냥꾼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추정컨대 니므롯의 강력한 힘 덕분에 함의 후손들은 강성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상당한 모순을 발견합니다. 함의 자손들은 분명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의 신세가 되는게 맞아 보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함의 후손들의 위세에 셈과 야벳의 후손들이 기가 죽어 보입니다. 

이것은 셈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로서 더욱더 가슴 아프게 읽었을 대목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여러 제국에 의해 짓밟혔을 때, 그들 눈 앞의 또다른 니므롯의 폭력으로 신음할 때, 창세기 9장과 10장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둘 사이의 부조화로 인해 혼란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깊은 묵상을 통해 혼돈을 넘어서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합니다. 함도 니므롯도 이집트도 앗시리아도 바벨론도 로마도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제아무리 악하고 강한 용사가 기세등등하게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할지라도 그 역시 창조주의 손길 아래 있습니다. 그 어떤 거인도 하나님의 홍수 앞에 무력하게 휩쓸립니다. 

결국 살아남는 것은 미련할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했던 노아입니다. 주님의 뜻을 참으로 이어간 사람들은 미약해 보였던 셈과 야벳의 후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은 작고 연약해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끝내 승리합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어 당신의 통치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이시려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완전했습니다. 죄악 가운데 주님의 창조 계획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처절하게 죽임당하셨습니다. 마치 니므롯과 같은 강력한 함의 후손들에 의해 핍박당한 셈의 후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또 믿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패배를 통해 이 세상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죽음을 통해 찬란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홍수 이후의 그 어떤 황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일구는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 일에 당신의 자녀들을 참여 시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현실의 모순을 발견합니다. 악한 이들의 화려한 성공을 보며 갈등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참 승리자이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그 복음 가운데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구원의 복된 능력이 살아숨쉬기 때문입니다.

2022년 8월 18일 목요일

창세기 9장 18~29절 “보이는 것 너머”

2022년 8월 18일, 목,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9장 18~29절 “보이는 것 너머”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한 사람의 존재는 우주와 같습니다. 무한한 넓이와 깊이가 있습니다. 본문 속 노아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금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칭찬받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요? 그런 그를 과연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요?

바른 답을 찾기 위해 창세기를 읽는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엄밀한 과학 논증이나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책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한 성경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적절히 거리를 두고 얼마든지 해석 가능합니다.

동시에 유념해야 합니다. 우선 창세기의 이야기 자체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중간중간 우리의 선입견이나 판단을 집어 넣기 전에 분문이 들려주는 내용을 먼저 경청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해석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맥락에서 현재, 노아의 상황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그는 재난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사십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땅의 모든 생물들이 물에 잠겼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거대한 방주에 태운 동물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노아의 오랜 친구들, 친척들, 친밀하게 지냈던 마을 이웃들이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퍼부어대는 빗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이 방주를 뚫고 들려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잔인한 절규 속에 노아는 몸서리 치며 귀를 막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끔찍한 침묵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노아는 살아남았습니다. 가족들의 목숨은 무사히 건졌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비극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그전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때 그 참담한 순간이 불연 듯 떠오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주들의 귀여운 재롱이 주는 행복도 그 때 뿐입니다. 망가지는게 당연합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는 포도주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알콜 때문인지, 아픔 때문인지 정체를 알기 힘든 열기에 옷도 하나 둘 벗었습니다. 벌거 벗은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술주정을 하는 노인. 누가봐도 볼썽 사납습니다. 그가 설령 과거에 놀라운 일을 이룬 의인이라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추한 술주정뱅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노아를 대하는, 명백히 대조적인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술 취한 노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둘 째 아들 함입니다. 22절을 보면 함은 장막에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점잖게 완곡해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하체’에 해당하는 원문은 나체를 가리킵니다. 노아의 적나라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위신과 체면을 옷과 함께 모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보이는대로 함부로 판단했습니다. 곧바로 장막에서 나와 형과 동생에게 달려갑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비웃음을 가득합니다. 벌써부터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도착하자마자 노아의 추태를 폭로합니다.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우승꽝스러운 모습인지를 히히덕 거리며 떠들어댑니다.

그 말을 듣던 첫 째 셈과 막내 야벳의 표정은 금세 굳었습니다. 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장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들은 함과 전혀 다르게 처신합니다. 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하체’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나체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옷을 벗은 모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시련에 지쳐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인간의 가장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조롱하려고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가장 먼저 옷을 챙겼습니다. 수치스러운 아버지의 상태를 덮어줄 도구입니다. 그 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들들이 자기 몸을 봤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은 그럼에도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이 사실을 23절 후반부에서 강조합니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굳이 다시 언급합니다. 그들이 함의 경박한 행동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두 아들은 노아가 지나온 삶, 그로 인해 아픔으로 일그러진 내면을 바라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았습니다. 그 눈길을 따라 따뜻하고 사려깊게 아버지를 대했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함은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을 축복을 받습니다. 명확히 다른 태도에 따른 확연히 다른 결과입니다.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마치 혈기를 부렸다는 이유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자칫 운명론적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은 범위를 좁혀 묵상하고자 합니다. 본문은 재난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대하는 인류의 두 가지 태도를 고발합니다. 시련을 겪고 연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돌봐주는 것은 상식입니다. 너무나 명징한 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세상사는 늘 상식과 양심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훨씬더 많습니다.

아무런 죄 없이 끔찍한 폭력을 겪었음에도 공감을 받지 못할 때가 합니다. 심지어 억울한 모함을 겪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잔인한 조롱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념을 초월해 끝없이 반복해온 비극입니다. 그 가장 먼 과거에, 노아가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고 그런 그를 함은 비웃었습니다.

반면에 그런 노아와 같은 사람들을 품어준, 셈 그리고 야벳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상처를 헤집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 때나 차가운 도덕을 들이밀며 완벽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 없이 노아가 겪어온 고통어린 순간들을 보듬어 줍니다. 수치를 덮어줍니다. 굴욕을 씻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셈과 야벳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두 사람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의 어리석음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명심해야 합니다. 늘 셈과 야벳처럼 행동하거나, 항상 함처럼 처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는 모두 양 쪽을 수없이 오갑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비극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가 겪어왔던 절망적인 홍수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급기야 그렇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던 내면 깊은 아픔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허물을 덮어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이 시대의 노아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아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멸시 당하던 세리와 창기를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식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처참한 실패와 저주의 형틀로 봤던 십자가를 놀랍고 위대한 생명과 은혜의 상징으로 변화 시키셨습니다. 그러한 우리 주님을 본받아 이 시대의 셈과 야벳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2022년 8월 13일 토요일

영화 "헌트"(2022) 간략 리뷰



결국 오열했다.
어젯밤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다행히 거리가 한산했다.

이 영화는 매끄러운 상업영화다.
그래서 더 예리하게 내면 깊이 파고들어 왔다.
가까운 역사 속 여러 비극과 직면하게 했다.
숱한 희생자들과 마주하게 했다.

덕분에 오랜 고민을 끝맺었다.
사실 별건 아니다.
다만 아주 조금은 덜 부끄럽게 살길 다짐한다.

그렇게 "헌트"는 각별한 의미로 내게 다가왔다.
다양한 화제성과 별개로 특별하게 기억할 영화다.
내년 5월에 다시 보려 한다.
아마 그때도 울 것 같다.

계속 아파할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감독' 이정재가 참 고맙다.
그의 다음 작품을 진심으로 기대한다.

2022년 8월 4일 목요일

사무엘상 14장 43~52절 “사는 날 동안에”

2022년 8월 3일, 포항제일교회 수요기도회,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4장 43~52절 “사는 날 동안에”

43 사울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가 행한 것을 내게 말하라 요나단이 말하여 이르되 내가 다만 내 손에 가진 지팡이 끝으로 꿀을 조금 맛보았을 뿐이오나 내가 죽을 수밖에 없나이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하여 백성이 요나단을 구원하여 죽지 않게 하니라 
46 사울이 블레셋 사람들 추격하기를 그치고 올라가매 블레셋 사람들이 자기 곳으로 돌아가니라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49 사울의 아들은 요나단과 이스위와 말기수아요 그의 두 딸의 이름은 이러하니 맏딸의 이름은 메랍이요 작은 딸의 이름은 미갈이며 
50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그의 군사령관의 이름은 아브넬이니 사울의 숙부 넬의 아들이며 
51 사울의 아버지는 기스요 아브넬의 아버지는 넬이니 아비엘의 아들이었더라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당연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한 가지 여쭤보겠습니다. 만약 여러분의 자녀 혹은 손주가 납치되었다면 어떨 것 같으십니까? 이런 질문을 드리는 것 자체가 너무나 죄송합니다. 상상만 해도 무척 끔찍합니다. 그 순간, 누구나 피가 거꾸로 솟기 마련입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전혀 없습니다. 위험에 처한 내 아이를 한시바삐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게 됩니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그러나 늘 당연하지는 않습니다.

1973년 7월 10일 새벽, 이탈리아 로마에서 16살 청소년이 납치되었습니다. 마피아는 1,700만 달러, 지금 환율로도 220억이 넘는 거액을 몸값으로 요구했습니다. 그들이 이렇게 대담한 범행을 저지른 이유가 있습니다. 인질의 할아버지 존 폴 게티는 어마어마한 석유 재벌이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세계 최고의 부자로 기네스북에 오를 정도였습니다. 납치범들의 요구에 응할 여유가 충분히 있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는 무려 4개월이나 꿈쩍도 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범인들은 몸값을 320만 달러로 대폭 낮추었습니다. 게티는 그제야 협상에 응했습니다. 100만 달러를 더 깎아 220만 달러를 제시했습니다. 혹시 이유를 아십니까? 220만 달러까지 세금 공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220만 달러마저도 아이의 아버지, 즉 자기 아들에게 연 4% 이자로 빌려준 돈입니다. 

존 폴 게티는 거대한 미술관을 세울 정도로 값비싼 예술품 수집을 즐겼습니다. 또한 젊은 미녀들과 어울려 노는 데는 흥청망청 지출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납치당해 공포에 떠는 손자를 위해서는 자기 돈 단 한 푼도 쓰지 않았습니다.

마침내 그의 손자는 5개월 만에 겨우 풀려났습니다. 하지만 정신 충격으로 건강을 크게 잃었습니다. 후유증으로 오랫동안 고통을 겪다가 54세의 이른 나이에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몇 년 전, 영화로 만들어질 정도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 유명한 납치 사건입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탐욕의 노예가 된 인간이 과연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뚜렷이 확인하게 됩니다. 사람을 사람답게 만드는 지극히 당연한 덕목이 누구에게나 당연하지 않음을 아픈 마음으로 깨닫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도 최소한의 인간성마저 상실한 채 광기에 휩싸인 한 사람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바로 사울 왕입니다. 그는 지금 전쟁을 지휘하는 중입니다.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인 중 하나는 바로 보급입니다. 탁월한 지휘관이 통솔한다고 할지라도, 혹은 강력한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제대로 먹지 못한다면 백전백패합니다. 따라서 현재 사울에게 왕으로서 주어진 가장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바로 전쟁터에서 극한의 체력을 소모하는 병사들에게 안정적으로 먹을거리를 제공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사울은 상식과 전혀 다른 무모한 결정을 내렸습니다. 금식령입니다. 블레셋으로부터 승리를 거두기까지 아무것도 먹지 말라고 엄중하게 명령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이를 어기는 사람에게 ‘저주’를 선언했습니다. 이것이 더욱 심각한 문제입니다. 그가 제사장 권위를 함부로 훔쳐 또 다른 율법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이어서 참 묘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스라엘 군대가 수풀을 지날 때 하필 달콤하게 흐르는 꿀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왕의 명령 때문에 그 꿀을 먹을 수 없었습니다. 갈등과 굶주림 속에서 괴로워했습니다.

그런데 사울의 아들 요나단은 그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이 어리석은 결정을 내렸을 때, 부하와 함께 단둘이서 블레셋 군인 20명을 무찌르는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는 수풀 안에 있는 꿀을 주저 없이 지팡이로 찍어 먹었습니다. 이렇게 요나단은 전혀 의도치 않게 왕명을 어긴 불경건한 죄인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 사실이 금세 밝혀졌습니다. 요나단은 굳이 부정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이 무심결에 꿀을 먹었다고 솔직하게 고백하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놀라운 장면을 목격합니다. 그러한 자기 장남을 향해 사울이 격분합니다. 끝까지 자신의 우매한 고집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결코 해서는 안 될 말을 합니다. 본문 44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44 사울이 이르되 요나단아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그렇지 않으면 하나님이 내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아버지가 아들에게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고 서슴없이 외칩니다. 이렇게 독기 어린 말이 상식적으로 이해되십니까? 설령 자기 자녀가 맞아 죽을 죄를 지었어도 그것을 감싸주는 게 부모로서 마땅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이해할 여지는 있습니다. 군대를 통솔하는 왕으로서 질서를 지키고 싶었을 것입니다. 사심 없이 원칙을 세우길 바랐을 것입니다. 이를 통해 전쟁터의 기강을 굳건하게 유지하길 원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보편적인 상식에 합당한 명령일 경우 그러합니다.

사울의 명령은 정반대였습니다.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누가 봐도 죄 없는 요나단이 그 명령을 일부러 어기게 하셨을지 모릅니다. 사울이 자신의 과오를 깨닫고 뉘우칠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울은 정반대로 행동했습니다. 아들을 공개적으로, 그것도 하나님의 이름을 들먹이면서까지 저주하였습니다.

그러자 오히려 이스라엘 군대가 요나단의 결백을 적극적으로 옹호합니다. 왕의 말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은 엄연한 반역 행위입니다. 게다가 전쟁 중이기에 즉결처분 대상입니다. 목숨을 건 용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위험을 무릅쓰면서 사울 앞에 나섰습니다. 본문 4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5 백성이 사울에게 말하되 이스라엘에 이 큰 구원을 이룬 요나단이 죽겠나이까 결단코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여호와의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옵나니 그의 머리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할 것은 그가 오늘 하나님과 동역하였음이니이다.

사울을 제외한 모든 사람은 분명히 알고 있었습니다. 요나단은 결코 죄인이 아닙니다. 정반대로 그는 하나님과 철저히 함께한, 동역한 사람입니다. 하지만 탐욕에 눈먼 사울만은 그를 천하의 극악한 죄인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이를 통해 사울의 심리상태가 여실히 드러납니다. 그는 권력을 지키고 왕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그 누구도 이용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자기 욕망을 가로막는다면 무엇이든 걸림돌로 여겼습니다.

그는 자신을 위해 전쟁터까지 끌려와 충성하는 힘없는 백성의 굶주림을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뜻대로 행동하지 않는 맏아들에게 거침없이 막말을 퍼부었습니다. 심지어 하나님의 권위를 도둑질하여 제멋대로 휘둘렀습니다. 

지난날 사울은 겸손하고 신실하게 주님을 섬기며 백성을 사랑했었습니다. 그랬던 그가 이토록 추하게 변한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 원인을 본문 47~48절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47 사울이 이스라엘 왕위에 오른 후에 사방에 있는 모든 대적 곧 모압과 암몬 자손과 에돔과 소바의 왕들과 블레셋 사람들을 쳤는데 향하는 곳마다 이겼고 48 용감하게 아말렉 사람들을 치고 이스라엘을 그 약탈하는 자들의 손에서 건졌더라

사울은 즉위한 이후, 블레셋을 포함한 주변 국가들과 싸워 연전연승을 거두었습니다. 거듭되는 승리의 기쁨에 사로잡혔습니다. 오랜 적대국인 아말렉까지 쳐들어가 이겼습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사울의 이름을 부르며 열광합니다. 한없는 정복감과 억누를 수 없는 희열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사울은 점점 미쳐가기 시작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살피며 자신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기름 부음 받은 왕으로서 나라를 위해 묵묵히 섬겨야 할 다른 고된 일들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전쟁에 몰두했습니다. 용사들을 불러 모아 강한 군대를 키우는 일에 무엇보다 집중했습니다. 그 결과 사울은 승리에 취했습니다. 성공에 중독되었습니다. 이기는 것이 인생의 가장 중요한 목표가 되었습니다. 

오로지 승리만이 삶의 이유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숱하게 보내신 애정이 어린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대신 백성을 사지로 내몰았습니다. 그의 헛된 탐욕을 위해 고귀한 생명들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들의 죽음을 당연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사울은 그토록 열광하며 내달렸던 전쟁터에서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승리자의 함성을 외쳤던 그곳에서 패배자의 신음을 내뱉고 말았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왕으로서 당연한 소명에는 무관심하고 전혀 당연하지 않은, 철저히 은혜로 주어진 권력을 당연히 여긴 결과입니다.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는 전쟁터로 나서는 아버지를 붙잡고 울먹이는 어린아이들의 눈망울을 보셨습니다. 행군하는 군인들의 발걸음에 배인 공포를 함께 느끼셨습니다.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온 남편을, 아들을 부여잡고 흐느끼는 여인들의 절규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그들 모두는 사울의 강력한 권세에 눌려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임금 주위에서 아부하는 권력자들 누구도 그들의 탄식에 반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이 겪은 가혹한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사울의 일생을 관통한 범죄를 냉정하게 평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역사가를 통해 서늘한 문장으로 기록하셨습니다. 그 말씀을 성경에 담아 오늘 우리에게 들려주셨습니다. 52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52 사울이 사는 날 동안에 블레셋 사람과 큰 싸움이 있었으므로 사울이 힘 센 사람이나 용감한 사람을 보면 그들을 불러모았더라

여기서 ‘사는 날 동안에’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는 ‘모든 날에’라는 뜻입니다. 즉, 사울이 일평생 붙잡은 삶의 태도를 가리킵니다. 바로 전쟁입니다. 죽음과 폭력입니다.

반면 사울이 저주했던 그의 아들 요나단은 정반대의 신실한 삶을 살았습니다. 요나단은 사울의 맏아들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왕으로서 요구되는 훌륭한 인격과 실력을 두루 갖추었습니다.

본문에서 확인하듯 백성들의 진심 어린 존경과 지지도 한 몸에 받고 있었습니다. 즉, 요나단은 두말할 것도 없이 당연한 권력 계승자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주어진 특권을 결코 당연하게 여기지 않았습니다.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일생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요나단은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세우기를 원하시는 왕이, 자신이 아닌 다윗이라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습니다. 다윗을 위해 자신의 모든 권력을 기꺼이 양보하며 그를 지켜 주었습니다. 너무나 어리석고 미련한 모습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말씀과 뜻이 자기 개인의 성공보다 훨씬 더 소중하다는 진실을 굳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 따라 요나단은 성경 속 그 누구 못지않게 위대한 섬김과 희생을 이루었습니다.

이러한 요나단의 훌륭한 신앙과 성품이 고스란히 드러난 장면이 있습니다. 사무엘상 20장입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적개심이 극한으로 치달았습니다. 공공연히 그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결국 다윗은 사울을 피해 도망쳐 숨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요나단은 그 둘 사이에서 다윗을 보호하고 아버지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무척 애를 썼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사람 사이의 관계를 이제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사실을 끝내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요나단은 약속대로 다윗을 들판에서 만났습니다. 그는 운명의 거친 소용돌이에 휘말려 이제 다시는 다윗을 보지 못할 것을 직감했습니다. 함께 울며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이렇게 말합니다. 사무엘상 20장 42절을 새번역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42 그러자 요나단이 다윗에게 말하였다. "잘 가게. 우리가 서로 주님의 이름을 걸고 맹세한 것은 잊지 않도록 하세. 주님께서 나와 자네 사이에서뿐만 아니라, 나의 자손과 자네의 자손 사이에서도, 길이길이 그 증인이 되실 걸세." 다윗은 일어나 길을 떠났고, 요나단은 성 안으로 들어갔다.

아버지 사울과 달리 요나단이 추구한 삶의 기준은 다름 아닌 ‘주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마음을 바탕으로 자기를 살폈습니다. 다윗을 바르게 평가했습니다. 주님의 이름을 통해 자신과 다윗의 관계를 올바로 세웠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에게 기름 부으신 하나님의 섭리를 충실히 순종했습니다. 진리를 따르기 위해 과감히 손해를 감수했습니다. 누가 봐도 당연히 소유할 수 있는 권력과 재물을 주저 없이 포기했습니다.

이처럼 사울과 요나단은 비록 부자지간이지만, 그들은 사는 날 동안에 전혀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아버지 사울은 평생 자기만을 위해 무엇이든 움켜쥐려고 몸부림쳤습니다. 그렇지만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내려놓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 둘은 시간이 흘러 같은 날, 같은 곳 길보아 산 위에서 함께 숨을 거두었습니다. 요나단이 살아온 날들은 사울이 살아온 날들에 비하면 미련하고 초라해 보입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께서는 성경을 통하여 우리에게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요나단은 진실로 위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고 말입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 시간이 흘러 이 세상과 이별할 때, 반드시 누군가의 기억 속 한 모퉁이에 자리 잡게 될 것입니다. 그때, 여러분은 과연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기를 원하십니까? 더 나아가 우리가 이 땅에서 살아온 나날이 어떠했다고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기를 원하십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모든 기회와 소유를 당연히 여기고 오로지 자신만을 위해 사용한다면, 그리하여 끊임없이 다른 이들을 짓밟아 올라서고 힘을 모으는 데만 애를 쓴다면 그것은 마치, 지난날 사울이 걸었던 바로 그 어리석은 길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더 이상 또 다른 사울의 등장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이 시대의 요나단을 바로 우리 가운데 찾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결단해야 합니다.

분명 사람들로부터 왕이라 불렸고 또한 스스로 자신을 왕으로 여겼지만, 결코 진정한 왕일 수 없었던 사울 대신, 당연히 왕이 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참된 왕이신 주님의 뜻을 따라 주저 없이 왕의 길에서 벗어난 요나단의 길을 따라가야 합니다. 

이것은 또한 참 하나님이심에도 참 사람이 되시어 십자가에 오르셨던 예수님의 걸음과도 일치합니다. 요나단의 위대한 희생은 곧 주님의 십자가와 맞닿아 있습니다. 따라서 요나단의 죽음은 결코 허무한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십자가의 섬김과 나눔을 묵묵히 이어갈 때 부활의 하나님께서 진정한 생명과 희망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새롭게 하실 줄 믿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요나단의 삶을 통해 늘 명심해야할 부활신앙입니다.

이와 관련하여 귀감이 되는 한 인물의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바로 소설가 권정생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 일본 동경의 빈민가에서 나고 자라셨습니다. 광복 후에 한국으로 돌아오셨지만, 여전히 가난하게 지내셨습니다. 초등학교만 겨우 졸업하고 온갖 궂은일을 하셨습니다. 또한 결핵을 크게 앓으며 건강이 많이 상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안동 일직교회 문간방에 거주하며 종지기로 살았습니다. 선생님은 거기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의 시선으로 “강아지 똥”과 “몽실 언니”를 비롯한 여러 소설을 지었습니다. 그 책들을 통해 많은 사람에게 큰 감동을 주며 서서히 이름이 널리 알리셨습니다.

외람되지만 만약 제가 이때, 권정생 선생님이라면 이제 적당히 누리고 살 것 같습니다. 어릴 때부터 고생만 하며 살아오다 마침내 아름다운 문학을 꽃피워냈습니다. 그런 그가 조금 여유 있게 산다고 해서 함부로 비난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은 이익과 명예에 도무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 선생님의 해맑은 성품을 보여주는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습니다. 1995년, 아동문학의 대부인 윤석중 선생님께서 미리 알리지 않고 서울에서 안동까지 내려오셨습니다. 권위 있는 “새싹문학상”을 직접 수여하셨습니다. 하지만 권 선생님은 그 수상을 마치 형벌처럼 느꼈습니다. 결국 5일 뒤에 상패와 상금을 우편으로 되돌려 보냈습니다. 이 일을 두고 선생님은 수필에서 자기 생각을 다음과 같이 밝힙니다.

“인간은 누구나 스스로 성취한 노력의 대가로 만족해야지 다른 누구한테 평가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본다. (중략) 상을 주고받는 일이니 신문에 내고 많은 사람에게 알려야겠지만 세상은 그렇게 좋은 일만 있는 것이 아니다.

바로 열흘 전에 우리 이웃에선 잇따라 초상이 났다. (중략) 온통 이웃들이 슬픔에 잠겨 있는데 우리 집에 경사 났다고 축하 손님이 찾아왔으니 어찌 부담스럽지 않았겠는가.”(『우리들의 하느님』 148쪽)

여러분은 이러한 선생님의 행동과 생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저는 솔직히 답답합니다. 만약 제 친한 친구가 이렇게 처신한다면 버럭 소리 지를지 모릅니다. 제발 그러지 좀 말라고 너무 그렇게 고지식하게 살 필요 없다고 다그칠 것 같습니다. 정당하게 노력해서 얻은 결실이니 마음껏 즐겨도 된다고, 오히려 그게 더 맞는 거라고 한참 설득할 것 같습니다. 

그렇지만 동시에 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세상은 그런 순진무구한 바보들 덕분에 조금씩 아름답게 변화되어 왔습니다.

권정생 선생님은 당연히 움켜쥘 수 있는 화려한 성공과 출세를 조금도 당연하게 여기지 않으셨습니다. 어느 순간 사람들이 외면하고 무시하는 청명한 진리를 당연하게 여기셨습니다. 그렇기에 가난하고 연약한 이웃을 향한 따뜻한 공감을 평생 잃지 않으셨습니다. 재산 전부를 기증하고 마지막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검소한 모습으로 지내다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렇게 선생님께서 사는 날 동안에 이 땅에 남긴 발자취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진정 믿고 따르는 이의 삶이 얼마나 향기로울 수 있는지를 분명히 보여줍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권정생 선생님처럼 똑같이 고고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이 절대로 아닙니다. 당장 저부터 전혀 자신 없습니다. 다만, 삶의 지향점을 정직하게 돌이켜 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무엇을 당연하게 여기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 지를 살펴야 합니다.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혹시 남들보다 좀 더 높이 올라, 더욱 많은 돈을 손에 움켜쥐는 것이 아닙니까? 이를 위해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함부로 짓밟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 대신 좀 더 낮아지고 나누고 섬기기 위해 애써 노력해야 합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를 참으로 살리는 생명의 길이 놓여 있음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당연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욕망으로 넘실거리는 혼란스러운 시대일수록 더욱더 그러합니다. 그러므로 본문 속 사울과 요나단의 명징한 삶의 대조를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우리에게 전혀 당연하지 않은 은혜의 절정인 십자가를 영혼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당연히 이루고 전해야 할 부활 신앙을 날마다 곱씹어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향하는 곳마다 승리를 거두고 호화로운 풍요를 누리는 오늘날의 사울들이 끊임없이 우리를 멸시하고 조롱한다고 할지라도,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나의 모습이 때때로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하게 느껴질지라도 쉽게 좌절하거나 절망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참된 위로와 승리가 이 시대의 요나단으로 살아가는 우리의 모든, 사는 날 동안에 언제나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왕이신 하나님.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여기지 않고, 당연하지 않은 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때로는 저희조차 욕망에 눈이 어두워 진리를 거부하고 성공의 달콤한 결실에만 열을 올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참된 승리는 오직 주님의 십자가에 있음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사울의 어리석음을 물리치길 소망합니다. 사울처럼, 사는 날 동안에 탐욕이 이끄는 대로 내달리지 않게 하시옵소서. 
그 대신 요나단처럼 일평생 잠잠히 진리를 따르게 하여 주시옵소서. 기꺼이 낮아지고 내려놓으며 섬길 때 주어지는, 부활 생명을 풍성히 누리게 하여주시길 간절히 구합니다.
확연히 패배자로 보이는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부활의 참 승리를 이루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2년 8월 1일 월요일

영화 “한산”(2020) 리뷰




이 영화 속 이순신과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대비를 이동진 평론가는 이렇게 분석했다.
이순신은 자신의 약점을 인정하고 드러낼 줄 아는 사람이다.
반면 와키자카는 과거의 화려한 승리에 심취한 사람이다.
그런 면에서 영화 “한산”에서 먼저 눈에 띄는 것은 감독의 성숙한 태도다.

전작 “명량”은 1700만 명이 넘는, 한국 역사상 최고의 흥행 기록을 세웠다.
누구나 도취하기 쉬운,  어마어마한 성취다.
하지만 크게 두 가지 치명적인 결점을 보였다.
하나는 감정 과잉이고 다른 하나는 투박한 해전 묘사다.

그런데 “한산”은 이 둘을 발전적으로 극복했다.
격정적인 상황에서도 표현을 절제했다.
대신 당시 해전 전술을 역동적으로 상세히 묘사했다.
전작의 단점을 극복하려는 감독의 치열한 노력이 느껴졌다.

극 중 대사를 통해 표현한 이순신에 대한 감독의 이해도 마음에 와닿았다.
그는 “자기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고) 앞으로 나설 줄 아는 사람”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박해일의 연기도 무척 훌륭했다.
다른 주·조연들의 연기 조화도 참 좋았다.

다음 작품 “노량”이 무척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