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9월 24일 토요일

'봄날의 햇살'처럼.



'봄볕'.
군시절 지은 아호(雅號)다.
동토를 녹이고 새싹을 움트게 하는 햇살.
나는 그렇게 살고 싶었다.
그래서 반가웠다.

"(너는) 봄날의 햇살 같아"

그때의 다짐을 떠오르게 했다.
이내 무척 부끄러워졌다.








2022년 9월 20일 화요일

장사 해변에서.










대부분 10대 후반의 어린 학생들이었다.
군사 훈련도 충분히 받지 못했다.
72년 전 700여 명의 학도병이 이 바다에 도착했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두려움에 떨었을까?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들다.

막연히 알았던 역사다.
무심결에 수없이 지나친 장소다.
그러다 문득, 한 번은 와봐야겠다는 다짐을 했다.

잠시나마 이곳을 걷는 것이,
이름 없이 죽어간 그들을 기억하는 것이
몹시 미흡하나마 역사의 성과를 누리는 이의 책무이기 때문이다.

장사 상륙작전(나무위키)
https://han.gl/mcujj

2022년 8월 27일 토요일

나는 자주 틀린다.

어제 일이다.
번잡한 해변 길을 큰 차가 막고 있었다.
'윙바디'로 된 차 문이 열렸다.
비싼 차를 끌고 무개념으로 운전하는 걸로 보였다.
짜증스럽게 경적을 눌렀다.
후회했다.
어떤 어르신이 부축받고 내리셨다.
교통약자를 위해 특수 제작한 차였다.
부끄러움을 느끼며 액셀을 밟았다.
잊지 않으려 계속 중얼거렸다.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그리고 나는 자주 틀린다."

2022년 8월 19일 금요일

창세기 10장 1~32절 "모순적인 현실에서"

2022년 8월 19일, 금,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0장 1~32절 "모순적인 현실에서"

1 노아의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는 이러하니라 홍수 후에 그들이 아들들을 낳았으니
2 야벳의 아들은 고멜과 마곡과 마대와 야완과 두발과 메섹과 디라스요
3 고멜의 아들은 아스그나스와 리밧과 도갈마요
4 야완의 아들은 엘리사와 달시스와 깃딤과 도다님이라
5 이들로부터 여러 나라 백성으로 나뉘어서 각기 언어와 종족과 나라대로 바닷가의 땅에 머물렀더라
6 함의 아들은 구스와 미스라임과 붓과 가나안이요
7 구스의 아들은 스바와 하윌라와 삽다와 라아마와 삽드가요 라아마의 아들은 스바와 드단이며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10 그의 나라는 시날 땅의 바벨과 에렉과 악갓과 갈레에서 시작되었으며
11 그가 그 땅에서 앗수르로 나아가 니느웨와 르호보딜과 갈라와
12 및 니느웨와 갈라 사이의 레센을 건설하였으니 이는 큰 성읍이라
13 미스라임은 루딤과 아나밈과 르하빔과 납두힘과
14 바드루심과 가슬루힘과 갑도림을 낳았더라 (가슬루힘에게서 블레셋이 나왔더라)
15 가나안은 장자 시돈과 헷을 낳고
16 또 여부스 족속과 아모리 족속과 기르가스 족속과
17 히위 족속과 알가 족속과 신 족속과
18 아르왓 족속과 스말 족속과 하맛 족속을 낳았더니 이 후로 가나안 자손의 족속이 흩어져 나아갔더라
19 가나안의 경계는 시돈에서부터 그랄을 지나 가사까지와 소돔과 고모라와 아드마와 스보임을 지나 라사까지였더라
20 이들은 함의 자손이라 각기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21 셈은 에벨 온 자손의 조상이요 야벳의 형이라 그에게도 자녀가 출생하였으니
22 셈의 아들은 엘람과 앗수르와 아르박삿과 룻과 아람이요
23 아람의 아들은 우스와 훌과 게델과 마스며
24 아르박삿은 셀라를 낳고 셀라는 에벨을 낳았으며
25 에벨은 두 아들을 낳고 하나의 이름을 벨렉이라 하였으니 그 때에 세상이 나뉘었음이요 벨렉의 아우의 이름은 욕단이며
26 욕단은 알모닷과 셀렙과 하살마웻과 예라와
27 하도람과 우살과 디글라와
28 오발과 아비마엘과 스바와
29 오빌과 하윌라와 요밥을 낳았으니 이들은 다 욕단의 아들이며
30 그들이 거주하는 곳은 메사에서부터 스발로 가는 길의 동쪽 산이었더라
31 이들은 셈의 자손이니 그 족속과 언어와 지방과 나라대로였더라
32 이들은 그 백성들의 족보에 따르면 노아 자손의 족속들이요 홍수 후에 이들에게서 그 땅의 백성들이 나뉘었더라


창세기 10장은 노아의 세 아들, 셈과 함과 야벳의 족보를 기록합니다. 창세기 이야기에 따르면 이들은 인류의 새로운 시작입니다. 노아의 아들들은 각각 거대한 민족을 이룹니다.

사실 본문 말씀은 그동안 상당한 오해를 받았습니다. 인류학적인 기록으로 잘못 이해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인종이 나뉘는 장면으로 간주하기도 합니다. 즉, 셈은 황인종, 함은 흑인종, 야벳은 백인종의 조상으로 여깁니다. 너무나 허무맹랑한 궤변입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꽤 오랜시간 이러한 낭설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였습니다. 심지어 인종차별을 정당화 하기도 했습니다. 

그 근거는 어제 읽은 9장 25절입니다. 여기서 노아는 둘째 아들 함을 저주합니다. 그러면서 함이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될거라고 선언했습니다. 이러한 저주대로 함의 자손들인 아프리카 흑인들이 노예 생활을 하게 되었다고 거리낌없이 주장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성경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신중히 헤아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믿고 싶은 논리를 성경으로 억지로 끼워 마친 사례입니다. 그 중에서도 최악입니다.

이런 견해가 왜 잘못되었을까요? 본문의 의도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인종’이라는 생물학적인 분류는 성경의 관심사가 전혀 아닙니다. 그것은 과학에 익숙한 오늘날 우리의 시각입니다. 특히나 수천년이 흘러 대서양에서 이루어진 잔악무도한 흑인 노예무역에 대해 그들이 알고 평가할 리가 없습니다. 창세기를 기록하고 그것을 처음 읽었던 사람들에게는 그런 것을 논하고 따질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에게는 무엇이 더 중요했을까요?

바로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 통치입니다. 본문에는 세 아들의 후손들이 퍼져나가 살았던 지역들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그 지역들은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서아시아의 주요 도시들입니다. 당시 사람들로서는 세계 전체였습니다. 따라서 구약 학자들은 창세기 10장을 글자로된 ‘세계 지도’라고 부릅니다. 

창세기 이야기를 다시금 되짚어 보시길 바랍니다. 온 땅에 죄가 가득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심판을 다짐하셨습니다. 노아를 부르셨습니다. 그에게 방주를 만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 방주에 노아의 가족과 각종 동물들을 태우셨습니다. 그리고 40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온 땅이 물에 잠겼습니다. 세상이 황폐해 졌습니다.

그런 다음 인류는 노아와 그의 세 아들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열어갑니다. 노아는 아담을 이은 인류의 두 번째 시조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너무나 척박한 상황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로 말미암아 또 다른 생명의 길을 열어 가셨습니다. 다시금 구원의 뜻을 펼쳐보이셨습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와 같았던 재난을 겪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루말할 수 없는 위로를 주었습니다. 특별히 이집트에서 노예살이하고 바벨론에서의 포로살이 했던 이스라엘에게 소중한 희망을 주었습니다. 그들이 그 어떤 절망적인 환경에 처하더라도 주님께서 새힘을 주시고 새로운 기회를 열어보이실 것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살아가며 너무나 지치고 어려운 순간을 경험합니다. 풀 한포기 자랄 것 같지 않은 광야의 시간을 지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지만 창조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고 돌보심을 신뢰 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놀라운 계획을 기대하고 그 뜻을 따르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창세기 10장의 족보에서 주목할 부분이 있습니다. 바로 둘째, 함의 족보가 셈과 야벳보다 압도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한다는 사실입니다. 야벳의 후손은 2~5절, 셈의 후손은 21~31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반면 함의 후손은 무려 6~20절까지 적혀있습니다. 절을 기준으로 단순하게 계산하면 셈과 야벳의 자손을 합한 것과 같습니다.

상당히 역설적입니다. 함은 아버지 노아에게 치명적인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래서 준엄한 경고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왜 창세기는 그런 함의 자손들을 비중있게 소개할까요? 그 이유를 파악하기 위해 8~9절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두 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8 구스가 또 니므롯을 낳았으니 그는 세상에 첫 용사라 9 그가 여호와 앞에서 용감한 사냥꾼이 되었으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아무는 여호와 앞에 니므롯 같이 용감한 사냥꾼이로다 하더라

전체적으로 족보가 이어지는 10장에서 잠시 흐름에 빗겨나 한 인물을 집중합니다. 그가 그만큼 주목할만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는 함의 손자 니므롯입니다. 그는 ‘용사’라는 칭호를 받은 첫 번째 사람입니다. 또한 용감한 사냥꾼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합니다. 추정컨대 니므롯의 강력한 힘 덕분에 함의 후손들은 강성하였을 것입니다.

여기서 상당한 모순을 발견합니다. 함의 자손들은 분명 노아로부터 저주를 받아 형제들의 종의 신세가 되는게 맞아 보입니다. 하지만 정반대의 상황이 되었습니다. 오히려 함의 후손들의 위세에 셈과 야벳의 후손들이 기가 죽어 보입니다. 

이것은 셈의 자손으로 이루어진 이스라엘로서 더욱더 가슴 아프게 읽었을 대목입니다. 그들은 우상을 섬기는 여러 제국에 의해 짓밟혔을 때, 그들 눈 앞의 또다른 니므롯의 폭력으로 신음할 때, 창세기 9장과 10장을 떠올렸을 것입니다. 그 둘 사이의 부조화로 인해 혼란을 겪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깊은 묵상을 통해 혼돈을 넘어서는 놀라운 진리를 발견합니다. 함도 니므롯도 이집트도 앗시리아도 바벨론도 로마도 결국 하나님의 다스림 아래 있습니다. 제아무리 악하고 강한 용사가 기세등등하게 자신의 힘을 과시한다 할지라도 그 역시 창조주의 손길 아래 있습니다. 그 어떤 거인도 하나님의 홍수 앞에 무력하게 휩쓸립니다. 

결국 살아남는 것은 미련할정도로 하나님을 경외했던 노아입니다. 주님의 뜻을 참으로 이어간 사람들은 미약해 보였던 셈과 야벳의 후손들입니다. 마찬가지로 지금 당장은 작고 연약해 보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끝내 승리합니다. 주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어 당신의 통치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보이시려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또한 이스라엘 나라를 세우셨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불완전했습니다. 죄악 가운데 주님의 창조 계획을 온전히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오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처절하게 죽임당하셨습니다. 마치 니므롯과 같은 강력한 함의 후손들에 의해 핍박당한 셈의 후손들과 같은 모습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알고 또 믿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패배를 통해 이 세상은 가장 위대한 승리를 발견하였습니다. 그 놀라운 죽음을 통해 찬란한 구원을 얻게 되었습니다.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홍수 이후의 그 어떤 황량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생명을 일구는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그 일에 당신의 자녀들을 참여 시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현실의 모순을 발견합니다. 악한 이들의 화려한 성공을 보며 갈등하고 좌절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참 승리자이신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그 복음 가운데 우리를 일으켜 세우는 구원의 복된 능력이 살아숨쉬기 때문입니다.

2022년 8월 18일 목요일

창세기 9장 18~29절 “보이는 것 너머”

2022년 8월 18일, 목,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9장 18~29절 “보이는 것 너머”

18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19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20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21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22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24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25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26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27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28 홍수 후에 노아가 삼백오십 년을 살았고
29 그의 나이가 구백오십 세가 되어 죽었더라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아야 합니다. 사람은 더욱더 그러합니다. 한 사람의 존재는 우주와 같습니다. 무한한 넓이와 깊이가 있습니다. 본문 속 노아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지금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칭찬받던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망가졌을까요? 그런 그를 과연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요?

바른 답을 찾기 위해 창세기를 읽는 자세를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는 엄밀한 과학 논증이나 역사적 사실을 서술하는 책이 아닙니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고백한 성경입니다. 따라서 창세기의 모든 내용을 문자적으로 믿을 필요는 없습니다. 적절히 거리를 두고 얼마든지 해석 가능합니다.

동시에 유념해야 합니다. 우선 창세기의 이야기 자체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중간중간 우리의 선입견이나 판단을 집어 넣기 전에 분문이 들려주는 내용을 먼저 경청해야 합니다. 그 다음에 해석으로 넘어가야 합니다. 그렇다면 창세기 맥락에서 현재, 노아의 상황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그는 재난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사십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땅의 모든 생물들이 물에 잠겼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거대한 방주에 태운 동물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노아의 오랜 친구들, 친척들, 친밀하게 지냈던 마을 이웃들이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퍼부어대는 빗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이 방주를 뚫고 들려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잔인한 절규 속에 노아는 몸서리 치며 귀를 막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 보다 더 끔찍한 침묵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노아는 살아남았습니다. 가족들의 목숨은 무사히 건졌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비극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그전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때 그 참담한 순간이 불연 듯 떠오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주들의 귀여운 재롱이 주는 행복도 그 때 뿐입니다. 망가지는게 당연합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는 포도주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알콜 때문인지, 아픔 때문인지 정체를 알기 힘든 열기에 옷도 하나 둘 벗었습니다. 벌거 벗은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술주정을 하는 노인. 누가봐도 볼썽 사납습니다. 그가 설령 과거에 놀라운 일을 이룬 의인이라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추한 술주정뱅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본문은 그런 노아를 대하는, 명백히 대조적인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술 취한 노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둘 째 아들 함입니다. 22절을 보면 함은 장막에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점잖게 완곡해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하체’에 해당하는 원문은 나체를 가리킵니다. 노아의 적나라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위신과 체면을 옷과 함께 모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보이는대로 함부로 판단했습니다. 곧바로 장막에서 나와 형과 동생에게 달려갑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비웃음을 가득합니다. 벌써부터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도착하자마자 노아의 추태를 폭로합니다.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우승꽝스러운 모습인지를 히히덕 거리며 떠들어댑니다.

그 말을 듣던 첫 째 셈과 막내 야벳의 표정은 금세 굳었습니다. 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장막을 향해 달려갑니다. 그들은 함과 전혀 다르게 처신합니다. 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앞서 말씀 드렸다시피 ‘하체’로 번역한 히브리어는 나체를 가리킵니다. 단순히 옷을 벗은 모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시련에 지쳐 나락으로 떨어진 한 인간의 가장 초라하고 수치스러운 상태를 가리킵니다. 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고도 아무런 행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대로 방치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함께 조롱하려고 형제들에게 알렸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가장 먼저 옷을 챙겼습니다. 수치스러운 아버지의 상태를 덮어줄 도구입니다. 그 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입니다. 그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릅니다. 아들들이 자기 몸을 봤는지 아닌지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하지만 두 아들은 그럼에도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이 사실을 23절 후반부에서 강조합니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굳이 다시 언급합니다. 그들이 함의 경박한 행동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두 아들은 노아가 지나온 삶, 그로 인해 아픔으로 일그러진 내면을 바라 보았습니다. 겉으로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았습니다. 그 눈길을 따라 따뜻하고 사려깊게 아버지를 대했습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함은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을 축복을 받습니다. 명확히 다른 태도에 따른 확연히 다른 결과입니다.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 순간의 실수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마치 혈기를 부렸다는 이유로 가나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모세를 떠올리게 합니다. 자칫 운명론적으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이 시간은 범위를 좁혀 묵상하고자 합니다. 본문은 재난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대하는 인류의 두 가지 태도를 고발합니다. 시련을 겪고 연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돌봐주는 것은 상식입니다. 너무나 명징한 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세상사는 늘 상식과 양심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훨씬더 많습니다.

아무런 죄 없이 끔찍한 폭력을 겪었음에도 공감을 받지 못할 때가 합니다. 심지어 억울한 모함을 겪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잔인한 조롱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념을 초월해 끝없이 반복해온 비극입니다. 그 가장 먼 과거에, 노아가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고 그런 그를 함은 비웃었습니다.

반면에 그런 노아와 같은 사람들을 품어준, 셈 그리고 야벳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상처를 헤집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아무 때나 차가운 도덕을 들이밀며 완벽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말 없이 노아가 겪어온 고통어린 순간들을 보듬어 줍니다. 수치를 덮어줍니다. 굴욕을 씻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셈과 야벳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두 사람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의 어리석음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명심해야 합니다. 늘 셈과 야벳처럼 행동하거나, 항상 함처럼 처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는 모두 양 쪽을 수없이 오갑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비극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가 겪어왔던 절망적인 홍수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급기야 그렇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던 내면 깊은 아픔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허물을 덮어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이 시대의 노아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닙니다. 누구나 마찬가지입니다. 보이는 것 너머를 보아야 합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몸소 그렇게 행하셨습니다. 멸시 당하던 세리와 창기를 사랑으로 바라보시며 식탁으로 초대하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처참한 실패와 저주의 형틀로 봤던 십자가를 놀랍고 위대한 생명과 은혜의 상징으로 변화 시키셨습니다. 그러한 우리 주님을 본받아 이 시대의 셈과 야벳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