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3월 9일 목요일

사무엘상 20장 1~11절 "죽음과 가까운 이에게"

2023년 3월 7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20장 1~11절 "죽음과 가까운 이에게"

1 다윗이 라마 나욧에서 도망하여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가 무엇을 하였으며 내 죄악이 무엇이며 네 아버지 앞에서 내 죄가 무엇이기에 그가 내 생명을 찾느냐
2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되 결단코 아니라 네가 죽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크고 작은 일을 내게 알리지 아니하고는 행하지 아니하나니 내 아버지께서 어찌하여 이 일은 내게 숨기리요 그렇지 아니하니라
3 다윗이 또 맹세하여 이르되 내가 네게 은혜 받은 줄을 네 아버지께서 밝히 알고 스스로 이르기를 요나단이 슬퍼할까 두려운즉 그에게 이것을 알리지 아니하리라 함이니라 그러나 진실로 여호와의 살아 계심과 네 생명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4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5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내가 마땅히 왕을 모시고 앉아 식사를 하여야 할 것이나 나를 보내어 셋째 날 저녁까지 들에 숨게 하고
6 네 아버지께서 만일 나에 대하여 자세히 묻거든 그 때에 너는 말하기를 다윗이 자기 성읍 베들레헴으로 급히 가기를 내게 허락하라 간청하였사오니 이는 온 가족을 위하여 거기서 매년제를 드릴 때가 됨이니이다 하라
7 그의 말이 좋다 하면 네 종이 평안하려니와 그가 만일 노하면 나를 해하려고 결심한 줄을 알지니
8 그런즉 바라건대 네 종에게 인자하게 행하라 네가 네 종에게 여호와 앞에서 너와 맹약하게 하였음이니라 그러나 내게 죄악이 있으면 네가 친히 나를 죽이라 나를 네 아버지에게로 데려갈 이유가 무엇이냐 하니라
9 요나단이 이르되 이 일이 결코 네게 일어나지 아니하리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확실히 결심한 줄 알면 내가 네게 와서 그것을 네게 이르지 아니하겠느냐 하니
10 다윗이 요나단에게 이르되 네 아버지께서 혹 엄하게 네게 대답하면 누가 그것을 내게 알리겠느냐 하더라
11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오라 우리가 들로 가자 하고 두 사람이 들로 가니라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다윗이 말했습니다. 주님의 살아계심을 두고 한 맹세입니다. 게다가 사랑하는 친구, 요나단의 생명까지 걸었습니다. 한 사람이 내뱉을 수 있는 가장 비장한 신음입니다. 처참한 심정이 고스란히 드러납니다. 감히 다 헤아릴 수 없는 끝없는 절망을 발견합니다.

다윗은 비참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부모로부터 제대로 돌봄받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사무엘로부터 기름 부음 받았습니다. 골리앗을 이기는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온 백성으로부터 열광을 한 몸에 받는 주인공이 되었습니다. 게다가 사울의 딸 미갈과 결혼하였습니다. 천대받던 목동이었던 그가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극적인 신분상승입니다. 누구나 부러워할 만한 성공입니다.

그러나 희열을 잠시뿐 입니다. 행복은 위태로웠습니다. 어느 순간 그를 쳐다보는 사울의 눈빛이 매섭게 변했습니다. 증오를 감추지 않았습니다. 급기야 사울은 다윗을 향해 단창을 던졌습니다. 그를 반드시 죽이고 말겠다는 적개심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다윗은 황급히 도망쳤습니다. 첫 번째 은신처는 사무엘이 있는 라마 나욧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고 또 자연스럽습니다.

다윗은 그곳에서 약간의 희망을 품었을 것입니다. 사울이 사무엘에게는 최소한의 예의를 지킬 거라 기대했을 것입니다. 사무엘의 중재를 통해 사울이 화를 풀고 화해하길 바랐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다윗이 사무엘과 함께 있는 것을 뻔히 알고도 사울은 무려 세 차례나 군대를 보냈습니다. 심지어 뜻대로 일이 풀리지 않자 직접 말을 거세게 몰아 달려왔습니다.

그 말발굽 소리에 다윗의 마음은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모든 희망이 물거품처럼 사라졌습니다. 자기가 이제 비참한 도망자 신세가 되었다는 사실을 절감했습니다. 물론 사울의 계획이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 가운데 무너져 내렸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위험이 남아있습니다. 다윗은 사무엘의 집에서 도망쳤습니다. 누군가를 향해 급히 달려갑니다. 바로 요나단입니다. 이어서 두 사람은 눈물겨운 대화를 나눕니다. 본문 1~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 다윗이 라마의 나욧에서 빠져 나와 집으로 돌아온 다음에, 요나단에게 따져 물었다. "내가 무슨 못할 일을 하였느냐? 내가 무슨 몹쓸 일이라도 하였느냐? 내가 자네의 아버님께 무슨 잘못을 저질렀기에, 아버님이 이토록 나의 목숨을 노리시느냐?" 2 요나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자네를 죽이시다니,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내가 분명히 말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큰 일이든지 작은 일이든지, 나에게 알리지 않고서는 하시지를 않네. 그런데 우리 아버지가 이 일이라고 해서 나에게 숨기실 까닭이 무엇이겠는가? 그럴 리가 없네.”

다윗은 자신의 억울함을 강변합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냐고 따졌습니다. 사울이 이렇게까지 집요하게 죽이려 할 정도로,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는지 흐느끼며 물었습니다. 그러자 요나단이 다독입니다. 절대 그럴 리 없다고 말합니다. 그는 사울이 믿고 의지하는 장남이기 때문입니다. 동시에 가장 든든한 참모입니다. 아버지가 설마 자기에게 말하지 않고 다윗을 해칠 이유가 없다고 설득합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요나단의 말이 다윗에게 위로가 되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다윗은 더 큰 절망을 느꼈습니다. 요나단은 상황 파악을 전혀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다윗은 섬뜩한 현실을 그에게 알려줍니다. 요나단이 다윗을 너무나 아낀다는 사실을 사울이 잘 알고 있습니다. 따라서 다윗 살해 계획을 성공시키기 위해, 그 일 만큼은 아들에게 철저히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미리 알게 되면 요나단이 어떻게든 자기 뜻을 방해할 게 뻔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울의 행동을 세 사람의 관계를 통해 곱씹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사울이 왜 요나단에게 자기 뜻을 감추면서까지, 다윗을 죽이려 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물론 가장 분명한 이유는 그의 권력욕입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뺏길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입니다. 명백한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걸로 끝이 아닙니다. 다윗을 향한 사울의 적개심 이면에는 아들을 향한 사랑이 있습니다.

왕조 국가에서 왕의 장남은 권력 계승 1순위입니다. 누가 봐도 요나단은 사울의 뒤를 이어 자연스럽게 왕위에 오를 사람입니다. 게다가 지도자로서 탁월한 성품과 실력도 두루 갖췄습니다. 그가 왕관을 머리 위에 쓴다고 해서 비난하거나 조롱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당연한 미래입니다.

그런데 사울의 눈앞에 엉뚱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비천한 목동 출신 다윗입니다. 그를 향해 백성들이 환호성을 지릅니다. 사울은 문득 깨달았습니다. 내 아들이 다윗에게 권력을 뺏길지도 모릅니다. 목숨까지 잃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요나단이 다윗을 아끼고 신뢰합니다. 아버지의 명령까지 거부하며 그를 싸고 돌았습니다. 도무지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모르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결국 사울을 결단합니다. 아들 대신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로 각오합니다. 백성들의 원성을 감수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마침내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사무엘과 그의 선지 생도들이 머무는 곳을 급습했습니다. 너무나 참담한 비극입니다. 그 시린 어둠을 뚫고 다윗이 달려와 요나단에게 이렇게 외칩니다.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그제야 비로소 요나단은 현실을 직면합니다. 다윗과 사울 사이에 있는 자신의 처지를 실감했습니다. 이때 그는 과연 어떻게 해야할까요? 어떤 선택을 하는 게 그에게 유리했을까요? 답은 분명해 보입니다. 미래 권력으로서, 위협이 될 다윗을 없애야 합니다. 심지어 그게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아버지의 바람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죽이는 게 그에게 당장 이익일지는 모릅니다. 가정을 평화롭게 하는 길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뜻은 아닙니다. 그 쓰디쓴 진리를 요나단은 집어삼켰습니다. 기꺼이 고단하고 불편한 삶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다윗을 향해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4절, 함께 읽겠습니다. 

4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네 마음의 소원이 무엇이든지 내가 너를 위하여 그것을 이루리라

요나단은 다윗을 위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약속합니다. 그는 바보가 아닙니다. 그 결정이 자신을 얼마나 위험에 빠뜨릴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부와 명예를 한순간에 잃을지도 모릅니다. 요나단은 왜 그렇게 어리석은 선택을 했을까요?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다윗이라는 한 개인에 대한 호감 때문만이 아닙니다. 다윗을 기름 부으시고 택하신 하나님의 계획을 요나단이 신뢰한 까닭입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두려움에 계속 몸을 떨었습니다. 이윽고 명민한 머리를 돌렸습니다. 사울의 정확한 뜻을 파악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요나단의 도움을 구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절망이 다윗을 엄습합니다. 결국 이렇게 요나단과 대화를 나눕니다. 8절 후반부와 9절 초반부를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무슨 허물이 있다면, 자네가 직접 나를 죽이게. 나를 자네의 아버님께로 데려갈 까닭이 없지 않은가?” 
요나단이 대답하였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걸세.”

본문에 기록된 요나단과 다윗 사이의 긴 대화를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이 말합니다. “나와 죽음의 사이는 한 걸음 뿐이니라” 그러자 요나단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이렇게 단호하게 답합니다.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걸세”

어쩌면 지금 이 자리에도 죽음과 한 발짝 거리에 놓인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자칫 걸음을 잘못 디뎌 아득한 낭떠러지로 추락할 것 같은 절망에 빠진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결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 주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인간의 그 어떤 시련도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위대한 복음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이 시대의 요나단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어둡고 차디찬 죽음의 벽과 가까이에 있는 이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들을 함부로 평가하고 비난하고 조롱하여 더욱 고통으로 밀어 넣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마음에 품고 다가가야 합니다. 벼랑 끝에 몰린 사람에게 설 땅이 되어 주고, 무더위에 지친 누군가에게 그늘이 되며, 냉기로 움츠린 이들에게 따스한 햇볕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죽음의 질서를 물리치고 살림의 길을 여는, 이 시대의 요나단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사무엘상 19장 18~24절 “선지자 중에 있었던 사울”

2023년 3월 6일, 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9장 18~24절 “선지자 중에 있었던 사울”

18 다윗이 도피하여 라마로 가서 사무엘에게로 나아가서 사울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다 전하였고 다윗과 사무엘이 나욧으로 가서 살았더라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1 어떤 사람이 그것을 사울에게 알리매 사울이 다른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했으므로 사울이 세 번째 다시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22 이에 사울도 라마로 가서 세구에 있는 큰 우물에 도착하여 물어 이르되 사무엘과 다윗이 어디 있느냐 어떤 사람이 이르되 라마 나욧에 있나이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이스라엘 사람들이 수군대며 말했습니다. 본문 24절은 이를 가리켜 ‘속담’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많은 사람들이 계속 반복하는 말을 뜻합니다. 소문 혹은 한자어 회자(膾炙)와 비슷합니다. 그만큼, 사울이 선지자 무리에 섞여 있었던 이 사건이 온 이스라엘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만큼 충격적이었기 때문입니다.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이 속담,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가 본문에만 등장하지 않습니다. 이미 사무엘상 10장 12절에 나옵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2 그 곳의 어떤 사람은 말하여 이르되 그들의 아버지가 누구냐 한지라 그러므로 속담이 되어 이르되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하더라

이 구절은 사울이 기름 부음 받은 사건 흐름 속에 있습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정치 체계가 바뀌는 건,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서나 획기적인 변화입니다. 열두 지파의 느슨한 연대로 이루어진 이스라엘은 오랜 시간 사사들이 다스렸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강대국들이 등장하며 한계를 경험합니다.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왕’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마침내 사무엘도 동의했습니다.

그 순간, 온 백성의 관심은 하나로 모입니다. 과연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은 누구인가?입니다. 자세히는, 사사께서 과연 누구에게 기름부을까?입니다. 사무엘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거대한 시선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어마어마한 부담감을 느꼈습니다. 그런 까닭에 왕을 지목하시는 하나님 음성에 민감하게 귀를 기울였습니다. 왕에게 기름 부은 다음 절차를 진지하게 고민했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사울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부름 받았습니다. 그 때, 사울은 너무나 겸손한 청년이었습니다. 사무엘은 그에게 기름 부은 후에 벌어질 일을 예고합니다. 하나님의 영이 크게 임하여 선지자들과 함께 예언을 하고, 새 사람으로 변하게 됩니다. 그 말씀이 실제로 이루어졌습니다. 그러자 주위 사람들이 놀라서 이렇게 말합니다. “사울도 선지자들 중에 있느냐”

우발적인 발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모든 게 하나님의 깊은 계획 아래 있습니다. 이 속담에는 사울의 극적인 변화와 그를 향한 백성들의 기대가 담겨 있습니다. 사울이 공식적으로 즉위 하기에 앞서, 그가 얼마나 왕으로 적절한 인물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렇지만 시간이 흘러 우리는 사울의 안타까운 몰락을 발견합니다. 그는 다윗을 시기했습니다. 더 정확하게는 다윗을 사용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거부했습니다. 점점 미움이 싹터 올랐습니다. 심지어 자기 아들과 깊은 우정을 나누고, 딸과 결혼한 다윗을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다윗은 이 처참한 상황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사울의 광기를 돌이킬 수 없었습니다. 결국 다윗은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그때, 다윗이 처음으로 몸을 맡긴 사람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사무엘입니다. 마지막 사사이자 온 이스라엘이 가장 존경하는 지도자입니다. 관련해서 지금 우리가 읽고 있는 성경 제목이 ‘사무엘상하’라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역사에서 사무엘이 지닌 권위와 영향력이 막대하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따라서 다윗이 그런 사무엘에게 피신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사울이 사무엘에 대한 최소한의 존중을 보여줄 거라고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사울에게 기름 부은 사람이 바로 사무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구절에서 충격적인 내용을 발견합니다. 본문 19~20절 다시 한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9 어떤 사람이 사울에게 전하여 이르되 다윗이 라마 나욧에 있더이다 하매 20 사울이 다윗을 잡으러 전령들을 보냈더니 그들이 선지자 무리가 예언하는 것과 사무엘이 그들의 수령으로 선 것을 볼 때에 하나님의 영이 사울의 전령들에게 임하매 그들도 예언을 한지라

사울에게 다윗은 1급 반역범입니다. 국가 역량을 총동원해 다윗을 찾는데 혈안이 되었습니다. 결국 어느 요원을 통해 중요한 정보를 알아냅니다. 바로 사무엘과 함께 라마 나욧이라는 지역에 숨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때, 상식적으로 사울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요? 바로 ‘머뭇거림’입니다. 적어도, 최소한의 주저함은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사울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군사들을 보냈습니다.

이 사실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울의 정신세계는 무엇일까요? 얼른 다윗을 잡아 그를 제거하하는 것, 그래서 자기 권력을 강하게 움켜쥐는 게 인생의 최우선 순위였습니다. 그것을 방해하는 그 무엇도 거침없이 제거하려고 했습니다. 심지어 사무엘도 방해물에 해당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그것은 사무엘을 통해 자신에게 말씀하시는 주님 역시 그의 욕망 아래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의 어리석은 탐욕에 휘둘리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뜻을 당신의 방법대로 반드시 이루십니다. 사울의 명령을 받고 다윗을 향해 특공대가 출동했습니다. 그들은 이미 다윗이 얼마나 용맹한 군인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다윗을 보호하고 있는, 사무엘 제자들의 저항도 예측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분명 비장한 각오로 급습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혀 뜻밖의 상황이 펼쳐집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들을 압도합니다. 무기를 내려놓고 ‘예언’을 했습니다. 여기서 ‘예언’은 이사야나 예레미야와 같은 우리가 잘하는 훌륭한 예언자들이 했던 행동과 다릅니다. 히브리어 동사의 문법 형식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이런 경우 정상적으로 하나님을 대언하는 행위가 아닙니다. 자신을 통제할 수 없는 ‘황홀경’에 빠진 상태를 가리킵니다.

사울은 이 황당한 사태를 보고 받았습니다. 그래서 또 다른 별동대를 보냈습니다. 같은 일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세 번째로 보낸 부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답답하고 초조해진 사울은 직접 나섰습니다. 다윗이 숨어 있는, 사무엘의 거처 라마 나욧으로 몸소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사울 역시 앞서 보낸 부하들과 같은 경험을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압도 당합니다. 본문 23~2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사울이 라마 나욧으로 가니라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도 임하시니 그가 라마 나욧에 이르기까지 걸어가며 예언을 하였으며 24 그가 또 그의 옷을 벗고 사무엘 앞에서 예언을 하며 하루 밤낮을 벗은 몸으로 누웠더라 그러므로 속담에 이르기를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 하니라

치열하게 타오르던 권력욕, 걷잡을 수 없는 분노,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었던 증오. 그 모든게 무장해제 되었습니다. 주님의 손길에 사로잡혀 아무런 저항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옷을 벗은 채 하루종일 사무엘 앞에서 누웠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지만 옛날에는 특히 더 옷은 신분을 상징했습니다. 왕이 입는 곤룡포는 아무나 만질 수 없었습니다. 심지어 비슷한 색깔의 의복도 아무에게나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사울은 그 귀한 왕복을 주의 종 사무엘 앞에서 훌렁 벗어던졌습니다. 너무나 상징적입니다. 그의 그토록 집착해 마지않는 권력이 하나님 앞에서 너무나 허무한 것임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장면입니다.

이 때, 그에 대한 속담이 다시 나옵니다. “사울도 선지자 중에 있느냐”입니다. 이 말이 처음 등장했던 상황을 앞서 확인했습니다. 그 시절 사울은 순수한 청년이었습니다. 이 속담은 그런 사울을 향한 칭찬과 기대를 담고 있습니다. 반면 같은 속담이 이제는 비난과 조롱의 의미로 바뀌었습니다. 속담의 문장은 같지만 그 주인공의 인격과 성품이 완전히 뒤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합니다. 이기고 살아남은 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적었기 때문입니다. 그런 시각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역사 또한 다윗 편에서 일방적으로 사울을 폄훼한 기록이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저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물론 성경에는 사람의 손길이 묻어 있습니다. 하지만 승자의 기록은 아닙니다. 신자, 믿는 자들의 기록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윗의 추한 악행과 사울의 선한 공적 모두 담았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연약한 모든 인간은 때때로 다윗이 되었다가 사울이 되기도 합니다. 혹은 사울처럼 한 때는 순전한 신앙인이었으나 어느 순간 광기에 사로잡힌 악인으로 변하기 도합니다. 우리가 기도하며 깨어 있어야 할 이유입니다. 완벽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경건은 평생에 걸친 여정입니다. 그러므로 내 안의 이중성을, 내 안의 더러운 탐욕을, 내 안의 연약함을 마주 보시길 바랍니다.

그 모습 그대로 전능하신 하나님의 품으로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따뜻하게 안아 주십니다. 그 믿음 가운데 헛되고 헛된 탐욕에서 벗어나 생명의 복음을 누리고 전하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사무엘상 14장 1~23절 "참된 승리"

2023년 2월 16일, 수,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4장 1~23절 "참된 승리"

1 하루는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건너편 블레셋 사람들의 부대로 건너가자 하고 그의 아버지에게는 아뢰지 아니하였더라
2 사울이 기브아 변두리 미그론에 있는 석류나무 아래에 머물렀고 함께 한 백성은 육백 명 가량이며
3 아히야는 에봇을 입고 거기 있었으니 그는 이가봇의 형제 아히둡의 아들이요 비느하스의 손자요 실로에서 여호와의 제사장이 되었던 엘리의 증손이었더라 백성은 요나단이 간 줄을 알지 못하니라
4 요나단이 블레셋 사람들에게로 건너가려 하는 어귀 사이 이쪽에는 험한 바위가 있고 저쪽에도 험한 바위가 있는데 하나의 이름은 보세스요 하나의 이름은 세네라
5 한 바위는 북쪽에서 믹마스 앞에 일어섰고 하나는 남쪽에서 게바 앞에 일어섰더라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7 무기를 든 자가 그에게 이르되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8 요나단이 이르되 보라 우리가 그 사람들에게로 건너가서 그들에게 보이리니
9 그들이 만일 우리에게 이르기를 우리가 너희에게로 가기를 기다리라 하면 우리는 우리가 있는 곳에 가만히 서서 그들에게로 올라가지 말 것이요
10 그들이 만일 말하기를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하면 우리가 올라갈 것은 여호와께서 그들을 우리 손에 넘기셨음이니 이것이 우리에게 표징이 되리라 하고
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12 그 부대 사람들이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우리에게로 올라오라 너희에게 보여 줄 것이 있느니라 한지라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자에게 이르되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고
13 요나단이 손 발로 기어 올라갔고 그 무기를 든 자도 따랐더라 블레셋 사람들이 요나단 앞에서 엎드러지매 무기를 든 자가 따라가며 죽였으니
14 요나단과 그 무기를 든 자가 반나절 갈이 땅 안에서 처음으로 쳐죽인 자가 이십 명 가량이라
15 들에 있는 진영과 모든 백성들이 공포에 떨었고 부대와 노략꾼들도 떨었으며 땅도 진동하였으니 이는 큰 떨림이었더라
16 베냐민 기브아에 있는 사울의 파수꾼이 바라본즉 허다한 블레셋 사람들이 무너져 이리 저리 흩어지더라
17 사울이 자기와 함께 한 백성에게 이르되 우리에게서 누가 나갔는지 점호하여 보라 하여 점호한즉 요나단과 그의 무기를 든 자가 없어졌더라
18 사울이 아히야에게 이르되 하나님의 궤를 이리로 가져오라 하니 그 때에 하나님의 궤가 이스라엘 자손과 함께 있음이니라
19 사울이 제사장에게 말할 때에 블레셋 사람들의 진영에 소동이 점점 더한지라 사울이 제사장에게 이르되 네 손을 거두라 하고
20 사울과 그와 함께 한 모든 백성이 모여 전장에 가서 본즉 블레셋 사람들이 각각 칼로 자기의 동무들을 치므로 크게 혼란하였더라
21 전에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하던 히브리 사람이 사방에서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진영에 들어왔더니 그들이 돌이켜 사울과 요나단과 함께 한 이스라엘 사람들과 합하였고
22 에브라임 산지에 숨었던 이스라엘 모든 사람도 블레셋 사람들이 도망함을 듣고 싸우러 나와서 그들을 추격하였더라
23 여호와께서 그 날에 이스라엘을 구원하시므로 전쟁이 벧아웬을 지나니라


사람들은 영웅에게 열광합니다. 그의 눈부신 활약에 환호를 보냅니다. 찬란한 업적을 기립니다. 많은 나라의 전설에 영웅이 등장하는 이유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오늘날 영화와 드라마를 비롯한 대중매체에서 끊임없이 영웅을 소재로 다룹니다. 거대한 시련을 뚫고, 불가능한 상황을 이겨내고 극적인 승리를 이루는 주인공의 모습에 누구나 본능적으로 흥분하며 감동을 받습니다. 

그런 까닭에 자연스럽게 성경을 읽을 때도 영웅을 발견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 중에서도 가장 극적인 영웅담 중 하나입니다. 사무엘상 14장은 13장부터 시작한, 블레셋 전쟁 단락에 속해 있습니다. 블레셋은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이스라엘을 궁지에 몰아넣었습니다. 그 결과 모든 백성이 벌벌 떨었습니다. 분위기를 이어 블레셋 군대가 믹마스 어귀까지 내려왔습니다. 전쟁의 승패가 곧 가려질 것만 같습니다. 블레셋 임금이 승자의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금세 등장할 것 같습니다.

상황을 뒤집기 위해서는 용맹한 누군가 선봉에 서야 합니다. 이 사실을 군대 전체가 알고 있습니다. 다만 내가 아니기를 바랄 뿐입니다. 다행히 그 누군가가 마침내 용기를 내었습니다. 바로 사울의 아들 요나단입니다. 그는 가장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입니다. 막강한 권력 실세입니다. 굳이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됩니다. 최전방에서 조금 뒤로 물러서도 누가 뭐라고 할 사람 없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전투에 나온 것만으로도 자기가 할 도리는 다했습니다. 위험천만한 작전은 그간 혹독하게 훈련한 정예부대에게 맡겨도 됩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를 수행하는 가까운 부하 한 명만 데리고 조용히 적진을 향했습니다. 그 앞에는 여러 어려움이 놓여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이미 강한 무기와 많은 군인을 보유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공격하기 버겁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더 큰 장애물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견고한 자연 요새입니다. 

블레셋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부대에 들어가려면 좁은 길을 통과해야 합니다. 양쪽으로 가파른 바위가 있습니다. 그 사이를 지나가려는 시도 자체가 이미 모험입니다. 발견 즉시 적군이 쏜 화살을 맞을 수도 있습니다. 설령 무사히 넘어간다 해도 끝이 아닙니다. 수많은 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부하와 함께 그 모든 어려움을 이겨내고 마침내 블레셋 군대 앞에 섰습니다. 이때, 성경이 그들을 묘사하는 내용이 흥미롭습니다. 11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1 둘이 다 블레셋 사람들에게 보이매 블레셋 사람이 이르되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하고

기세등등한 블레셋 군인들이 바위 틈 사이를 빠져나온 두 사람을 보았습니다. 땀에 흠뻑 젖어 가쁜 숨을 몰아 쉬고 있었습니다. 블레셋 군대는 전혀 위협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비웃고 조롱합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보라 히브리 사람이 그들이 숨었던 구멍에서 나온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호칭, 그리고 구멍에 숨었다는 묘사 자체가 우습게 보며 비하하는 말투를 담고 있습니다. 

더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여기서 ‘히브리 사람’에 해당하는 원문 단어에 자음 하나만 추가하면 ‘생쥐’라는 뜻이 됩니다. 구약 성경 특유의 언어유희가 담겨 있습니다. 그렇다면 블레셋 군대가 요나단과 그의 부하를 향해 이렇게 야유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즉, “구멍에서 나온 생쥐들아! 공격하려면 공격하라!”(강사문)

정리하자면 요나단은 너무나 험난한 적군의 요새를 건너와 이미 몹시 지친 상황에서 극심한 모욕까지 받았습니다. 전투할 조건과 상황과 분위기, 그 모든 게 절대적으로 불리합니다. 그가 승리를 기대하는 건 무모한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미 패배가 기정사실로 보입니다.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내딛는 건 만용처럼 보입니다. 

그렇지만 요나단은 과감히 전진합니다. 그날 그는 약 20명의 적군을 무찔렀습니다. 그 결과 블레셋 군대 안에 공포를 불러 일으켰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죽이고 말았습니다. 전쟁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완연한 패배를 딛고 일어나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수많은 전설과 소설과 영화에서 보았던, 너무나 극적인 영웅담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요? 본문 말씀 역시 흔하디 흔한 영웅 이야기일까요? 우리 가슴을 흥분시키는 화려한 장면에서 잠시 물러나 호흡을 가다듬을 필요가 있습니다. 성경이 참으로 들려주는 핵심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물론 요나단은 훌륭합니다. 이스라엘을 이끌 탁월한 지도자이자 용맹한 장군입니다. 그를 향해 아무리 찬사를 보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그러나 한 개인으로서 요나단의 여러 자질보다 더 주목해야 할 게 있습니다. 바로 그의 신앙입니다. 정확히는 하나님의 신실함입니다. 오늘 본문에도 주님을 향한 요나단의 철저한 신뢰가 잘 드러나 있습니다. 즉, 본문에서 그가 거둔 승리는 근본적으로 요나단이 자신을 이끄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온전히 믿은 결과입니다. 6절, 함께 읽겠습니다. 

6 요나단이 자기의 무기를 든 소년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 할례 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이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

요나단이 적진을 향해 나아갔던 것은 사람의 숫자를 넘어서는 주님의 구원을 신뢰했기 때문입니다. 결정적으로 작전을 감행하는 결단 역시 그 한 사람의 판단이 아닙니다. 10~11절에 기록된 요나단의 말을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부하에게 말합니다. 요새를 통과해서 블레셋 군대 앞에 섰을 때, 적들이 두 사람을 향해 “올라오라!”라고 외치는 경우를 가정합니다. 그 소리를 적군을 요나단의 손에 넘기셨다는 표징으로 정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블레셋 군인들이 그들에게 “올라오라!”라고 소리쳤습니다. 

하지만 조금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이때 올라오라!는 소리는 두 사람을 향해 생쥐 같다고 비웃는 말투였습니다. 누구라도 주눅들고 겁먹을 만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요나단은 용기를 냈습니다. 사람들에게는 그 말이 조롱으로 들릴지 몰라도, 믿음으로 나아간 그에게는 주님께서 분명 함께 하신다는 선명한 증거였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요나단은 12절 후반부에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따라 올라오라 여호와께서 그들을 이스라엘의 손에 넘기셨느니라” 하나님은 그런 그의 믿음을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그의 삶 전체를 품으시고 당신의 뜻을 이루어 나가셨습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영웅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험난한 시련을 이겨내고 거둔 극적인 승리에 열광합니다. 심지어 성경에서도 영웅을 찾아내곤 합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만큼 삶이 고단하기 때문입니다. 내 모습이 영웅과는 전혀 거리가 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명심해야 합니다. 성경은 영웅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분의 놀라운 사랑이야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나단의 우람한 근육과 날렵한 몸놀림과 화려한 칼솜씨에 시선을 뺏기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그의 신앙을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그의 믿음을 닮길 소망해야 합니다. 현실의 참혹한 좌절과 처절한 굴욕과 쓰라린 상실 넘어서는 인생의 참된 승리를 주님께서 안겨주시기 때문입니다.

2023년 2월 7일 화요일

10년 전, 구약학 석사과정 입학


벌써 10년 전이다.

솔직히 입학하고 무척 후회했다.
참 많이 힘들고 버거웠다.
그 때문에 졸업도 오래 걸렸다.
하지만 내 인생에 가장 잘한 결정 중 하나다.
무엇보다 내 무지함을 처절하게 절감했다.
존경하는 스승을 만났다.
덕분에 성경의 드넓은 대양과 울창한 산맥을 마주했다.
슬슬 히브리어 문법책과 전공서를 다시 꺼내 봐야겠다.

슬램덩크와 나(출판 초고를 끝내고)


나는 농구가 싫었다.
가뜩이나 비참했던 시절이었다.
병약했던 나를 더 초라하게 했다.
때문인지 모른다.
또래들과 달리 슬램덩크에 흥미가 없었다.
서른이 돼서야 봤다.
극장판이 화제를 모을 때도 관심 없었다.
그러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나를 혹하게 했다.
"많이 울었다."고 했다.
지난 주일, 오랜 글 감옥에서 벗어났다.
울고 싶었다.
그날, 밤길을 걸어 영화관으로 향했다.
울지는 않았다.
대신, 충분히 위로받았다.
주인공 송태섭에게 자연스럽게 몰입했다.
그는 힘겨웠던 어린 시절을 농구공으로 이겨냈다.
나에겐 책이 도피처였다.
남들보다 많이 읽은 건 아니었다.
좋은 책을 잘 가려 읽은 것도 아니었다.
'게걸스럽다.'라는 표현이 적당하다.
그냥 책이 좋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적어도 책을 읽는 동안은 잠시 현실을 잊을 수 있었다.
그나마 거의 유일하게 잘한다고 칭찬받는 게 글쓰기였던 것도 이유였을 것이다.
막연히 작가가 되길 꿈꾸었다.
시간이 흘러 목사가 되었다.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걸로 대신 만족했다.
그러다 작년에 뜻하지 않은 출간 제안을 받았다.
성경 속 여러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책이었다.
여름부터 반년 넘게 원고를 썼다.
하필 복잡한 상황으로 몸도 마음도 무척 지쳤던 시간이었다.
소책자 분량이지만 버거웠다.
휴가 기간은 물론 월요일도 거의 매주 집필에 매달렸다.
하지만 돌이켜 보면 그 덕분에 많은 걸 이겨낼 수 있었다.
드디어 초고를 출판사에 보냈다.
송태섭은 마침내 신체 한계를 극복하고 산왕공고의 존 프레스를 뚫었다.
어린 시절부터, 슬픔을 이겨내려 몰두했던 드리블 연습 덕분이다.
극적인 역전승을 끌어낸 결정적인 장면이다.
감히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정식으로 계약한 집필을 힘겹게 끝낸 내 심정 같았다.
결과가 어떻게 될지는 모른다.
무명인에게 기회를 준 출판사에 손해가 없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저, 제법 긴 시간이 차곡히 쌓여 책 한 권을 낸 사실이 내겐 여러 의미로 먹먹하게 다가온다.
이젠 농구가 싫지 않다.
더 이상 그럴 이유가 없다.
물론 농구 코트 위를 달릴 일은 없을 것이다.
다만 언젠가 아들과 함께 "더 퍼스트 슬램덩크"를 함께 보며 이러저러한 얘기를 나누고 싶다.
아마도 그때, 눈물이 흐를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