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6월 15일 목요일

첫 책, "하나님의 이름들, 그 맥락과 의미"(좋은씨앗) 출간






마침내 저의 (공식적인) 첫 책이 출간되었습니다.
작년 4월, 출판사로부터 뜻밖의 제안을 받고 어렵게 집필하며 보낸 지난 시간이 먹먹하게 스쳐갑니다.
오랫동안 작가를 꿈꾸고, 어설프게 흉내를 내다가 마침내 제 책을 손에 쥐게 되어 감개무량합니다.
책에 대한 자세한 소개와 정보는 아래 링크에 있습니다.
한번 살펴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그리고 아낌없는 격려에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위기보다 더 큰 위기”

2023년 6월 14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애가 4장 1~10절 “위기보다 더 큰 위기”

1 슬프다 어찌 그리 금이 빛을 잃고 순금이 변질하였으며 성소의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쏟아졌는고
2 순금에 비할 만큼 보배로운 시온의 아들들이 어찌 그리 토기장이가 만든 질항아리 같이 여김이 되었는고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5 맛있는 음식을 먹던 자들이 외롭게 거리 거리에 있으며 이전에는 붉은 옷을 입고 자라난 자들이 이제는 거름더미를 안았도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10 딸 내 백성이 멸망할 때에 자비로운 부녀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자기들의 자녀들을 삶아 먹었도다


본문 1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1 아, 슬프다. 어찌하여 금이 빛을 잃고, 어찌하여 순금이 변하고, 성전 돌들이 거리 어귀마다 흩어졌는가?

예언자는 무심한 듯 툭 언급하고 지나갑니다. 하지만 여기에는 유다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은 충격적인 사건이 짧지만 생생하게 묘사됩니다. 바로 성전 파괴입니다. 늠름하게 자기 자리를 지켜야 할 성전의 벽돌들이 산산이 무너져 저잣거리에 널 부러져 있습니다. 바벨론에 의한 침략이 지금까지 겪었던 외적의 침입과 근본적으로 다른 이유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단순한 종교 건축물이 아닙니다. 그들이 알고 믿고 있는 세계 전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성전을 통해 주님이 지으시고 다스리시고 머무시는 온 우주를 경험했습니다. 그러한 성전이 바벨론 군대의 군홧발에 무참히 짓밟혔습니다. 그때 유다 사람들이 겪었던 충격과 공포는 현대인들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절망 그 자체입니다. 삶을 지탱해온 모든 세계가 산산이 부서졌습니다. 믿고 의지할 단 한 줌의 희망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성전 파괴’라는 결정적인 재난의 종지부를 찍기 전에 이미 끔찍한 재난이 예루살렘을 휩쓸고 지나갔습니다. 바로 ‘굶주림’입니다. 예레미야애가의 역사적 배경은 느부갓네살이 지휘한 바벨론 군대가 주전 587년 1월부터 18개월동안 진행한 포위 작전입니다. 무려 1년 6개월입니다. 봉쇄당한 채로 지내기에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긴 시간입니다. 극심한 궁핍이 성안을 휘몰아쳤습니다.

그때 유다가 겪은 굶주림이 얼마나 컸냐면 고대 사회의 견고한 신분질서를 무너뜨릴 정도였습니다. 그 모습을 본문은 생생히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7~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7 전에는 존귀한 자들의 몸이 눈보다 깨끗하고 젖보다 희며 산호들보다 붉어 그들의 윤택함이 갈아서 빛낸 청옥 같더니 8 이제는 그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그들의 가죽이 뼈들에 붙어 막대기 같이 말랐으니 어느 거리에서든지 알아볼 사람이 없도다 9 칼에 죽은 자들이 주려 죽은 자들보다 나음은 토지 소산이 끊어지므로 그들은 찔림 받은 자들처럼 점점 쇠약하여 감이로다

비참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한 사람이 겪는 가장 비극적인 죽음은 아사(餓死), 즉 ‘굶어 죽는 것’입니다. 예언자 또한 차라리 칼에 찔려 죽는게 배고파 죽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정도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고 자부했던 예루살렘에서 몇 사람만이 아니라, 온 백성이 극심한 굶주림에 몸부림 쳤습니다. 뽀얀 살결을 자랑했던 귀족들의 얼굴이 숯보다 검고, 포동포동했던 살갗이 막대기처럼 말랐습니다.

공동체 전체가 경험하는 끔찍한 비극입니다. 예레미야 또한 예외가 아닙니다. 이 와중에 옳고 그름을 따질 겨를이 없습니다. 어떻게든 살아남는 게 우선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일단은 어깨를 마주해야 합니다. 서로 좋게좋게 토닥여야 합니다. 비록 갑싼 자기연민일지라도 함께 울며 보듬어야 합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 험난한 위기 속에서도 위험을 감수하고 냉철하게 진리를 분별했습니다. 올곧은 진실을 전했습니다. 설령 그것이 가까이 있는 사람들을 불편하게 하고 심지어 자신을 위협할지라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본문 6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6 전에 소돔이 사람의 손을 대지 아니하였는데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이제는 딸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예언자는 서슬퍼런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내 백성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무겁도다” ‘소돔’이 의미하는 바를 잘 아실겁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도시 이름입니다. 끔찍한 죄악으로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은 곳입니다. 상징성이 너무나 명확합니다. 그런데 예레미야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의 죄가 소돔의 죄악보다 더 무겁다고 단호하게 선언했습니다. 

가뜩이나 바벨론 군대에 의해 포위당해 두려워 떨었던 유다 백성들로서는 너무나 불쾌한 헛소리였습니다. 예언자를 향해 격분해 달려들어도 할 말이 없는 망발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예레미야가 어떤 핍박을 겪을지 그는 스스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가 이렇게 예루살렘의 죄악을 지적한 근거가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 3~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 들개들도 젖을 주어 그들의 새끼를 먹이나 딸 내 백성은 잔인하여 마치 광야의 타조 같도다 4 젖먹이가 목말라서 혀가 입천장에 붙음이여 어린 아이들이 떡을 구하나 떼어 줄 사람이 없도다

자녀를 향한 부모의 희생과 사랑은 천륜입니다. 심지어 들개들도 그러합니다. 아무리 굶주려도 새끼들에게 빈젖이라도 물렸습니다. 하지만 유다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배고파 울부짖는 자녀들을 내팽개치고 자기 배만 채우려 했습니다. 심지어 인간다움을 포기하는 극악한 짓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이를 두고 예언자는 3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백성은 잔인하기만 하구나”

위기가 누군가의 진면목을 드러냅니다. 평소 말끔한 행색과 교양 있는 몸가짐을 한다 할지라도 어려움에 닥쳤을 때, 인격의 밑바닥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종종 발견합니다. 민족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유다, 그중에서도 예루살렘성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를 입었다는 자부심으로 가득했습니다. 하지만 고난을 겪자 소름끼치는 잔인함을 드러납니다. 율법에 담긴 섬김과 나눔의 정신과 정반대입니다.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기는커녕 짐승만도 못한 자들이었습니다.

따라서 진정한 시련은 강한 외적의 침입이 아닙니다. 그들이 성 주위를 꽁꽁 에워싸는게 아닙니다. 몇 날 며칠 배고픔이 이어지는 게 아닙니다. 약자를 돌보지 않는, 그들의 비루한 인격과 거짓 신앙입니다. 바벨론 군대가 쳐들어오기 이전에 그 처참한 내면세계과 죄악으로 인해 남유다는 이미 심판을 받았습니다. 우둔한 마음이 애써 부정하고 진리를 외면했을 뿐입니다.

그런 까닭에 절망 속에 처절히 몸부림 칠 때 오히려 희망이 있습니다. 내 추악한 실상을 마주하는 고통 가운데 다시 시작할 길이 열립니다. 내 더러운 죄악과 직면할 때 비로소 참으로 새로워지는 생명의 씨앗이 싹터옵니다. 본문 6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6 예전에는 저 소돔 성이 사람이 손을 대지 않아도 순식간에 무너지더니, 내 백성의 도성이 지은 죄가 소돔이 지은 죄보다 크구나.

다시 말씀 드립니다. “내 백성의 도성이 지은 죄가 소돔이 지은 죄보다 크구나”라는 예언자의 노래는 유다 사람들을 분노하게 했습니다. 결국 예레미야를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렇게 그는 허무하고 비참하게 숨을 거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그를 통해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마침내 살아 남았습니다. 쓰라린 진리가 마침내 달콤한 거짓을 이겨냈습니다. 진심으로 죄를 고백하고 뉘우치며 삶의 방향을 되돌리는 이들을 향해 비추는 은혜의 물결이 온 세상에 흘러넘쳤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 복음을 생생하게 증명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소돔과 나와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히 명심해야 합니다. 저를 비롯해, 아무도 예외가 없습니다. 너무나 괴롭고 불편한 진실입니다. 하지만 바로 여기에 우리를 살리는 진정한 생명과 희망이 있음을 믿습니다.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이 우리의 전 존재를 넉넉히 품으시기 때문입니다. 그 주님과 동행하며 참으로 하나님의 자녀이자 백성답게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55~66절 "깊고 깊은 구덩이에서"

2023년 6월 13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애가 3장 55~66절 "깊고 깊은 구덩이에서"

55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60 그들이 내게 보복하며 나를 모해함을 주께서 다 보셨나이다
61 여호와여 그들이 나를 비방하며 나를 모해하는 모든 것
62 곧 일어나 나를 치는 자들의 입술에서 나오는 것들과 종일 나를 모해하는 것들을 들으셨나이다
63 그들이 앉으나 서나 나를 조롱하여 노래하는 것을 주목하여 보옵소서
64 여호와여 주께서 그들의 손이 행한 대로 그들에게 보응하사
65 그들에게 거만한 마음을 주시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리소서
66 주께서 진노로 그들을 뒤쫓으사 여호와의 하늘 아래에서 멸하소서


‘심히 깊은 구덩이’, 이 세 단어가 예언자가 처한 상황을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가장 낮은 구덩이’입니다. 금방 연상하는 장면이 있으실 겁니다. 연세가 있으신 분들은 시골 마을 우물에 빠져 울다가 어른들이 꺼내준 경험 혹은 이야기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역사책과 뉴스에서 구덩이가 끔찍한 사건의 배경으로 자주 등장합니다. 혹은 조직폭력배를 다룬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깊은 구덩이는 그 자체로 극심한 공포를 안겨줍니다. 깜깜한 암흑, 축축한 벽의 질감, 정체 모를 벌레가 윙윙거리며 내는 소리, 그 모든 게 심장을 조여옵니다. 조금이라도 빨리, 어떻게든 그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밖에 없습니다. 어쩌면 구덩이는 이 땅에서 죽음과 가장 가까운 공간인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어제 읽은 53, 54절은 예언자가 놓은 상황을 더욱 자세하게 묘사합니다. 대적자들이 그를 구덩이에 넣은 것으로 모자라서 돌을 던졌습니다. 여기서 돌이, 구약 원문에는 ‘단수’ 즉, 한 개로 적혀 있습니다. 아마도 구덩이에서 나올 수 없게 막아놓은 커다란 돌덩이로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그 안에는 머리까지 물이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여호와여 내가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주의 이름을 불렀나이다”라는 본문의 첫 구절은 그 자체로 너무나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특별히, 예레미야애가 전체의 주제와 구조로 볼 때 더욱 강렬한 울림을 줍니다. 애가는 바벨론 침략에 의해 남유다가 겪은 참상을 다룹니다. 온 민족이 겪은 처참한 고난입니다. 

예레미야는 이러한 참상을 매우 정교한 운율에 따라 노래하였습니다. 전체 다섯 장 중에서 1, 2, 4, 5장은 히브리어 알파벳 숫자에 맞춰 모두 22절입니다. 그런데 가운데 있는 3장은 여기에 3을 곱한 66절입니다. 형식 자체가 예레미야애가 전체에서 3장이 핵심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중에서도 가장 마지막 단락입니다. 즉, 애가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본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갑자기 초점이 예언자 한 사람에게로 좁아집니다. 온 민족 누구나 예외 없는 고난을 겪고 있습니다. 그로 인한 비탄을 노래합니다. 그러다가 제일 결정적인 대목에서 ‘나의 아픔’을 토로합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4장과 5장에서 예루살렘성을 비롯한 민족 전체로 시야가 확대됩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께서는 전체가 겪는 어려움 속에서 개개인을 주목하시기 때문입니다. 조금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개인’이라는 존재가 발견된 것은 근대 이후입니다. 옛사람들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저마다 겪는 고난에 대해, 적어도 오늘날처럼은 큰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가령 외적의 침입으로 마을이 몰살된다면, 그곳에 사는 한 사람은 피할 수 없는 비극입니다. 모두가 겪은 슬픔을 두고, 그것도 왕족이나 귀족인 아닌 평범한 사람이 ‘내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오래전 사람들에게는 어색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언자는 남유다가 예루살렘 성전과 함께 파멸되는 고통을 노래 하는 와중에 자기가 빠졌던 깊은 구덩이를 이야기합니다. 왜 그랬을까요? 주님께서는 지금 내가 신음하며 흘리는 눈물을 거대한 강물의 한 부분으로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 하나하나를 함께 아파하며 들어다보십니다. 예언자는 그 사랑을 신뢰했습니다. 그 가운데 자기 아픔에만 집착하지 않고 온 백성을 향한 주님의 뜻과 마음을 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깊고 깊은 구덩이에 빠져 있지는 않으십니까? 예레미야처럼 매우 심각한 공포는 아닐 수 있습니다. 정말 문자 그대로 까마득한 어두운 구덩이 빠져, 물이 머리까지 차고 돌덩이가 머리 위로 막히는 경험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실 겁니다. 하지만 질병, 돈, 가족 간의 불화 등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신음하며, 정말 죽을 것만 같은 순간을 겪었거나, 겪고 있는 분들이 많으실 겁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심히 깊은 구덩이에서 당신의 이름을 불렀던 한 사람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모습을 본문 말씀을 통해 분명히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본문 56~5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56 주께서 이미 나의 음성을 들으셨사오니 이제 나의 탄식과 부르짖음에 주의 귀를 가리지 마옵소서 57 내가 주께 아뢴 날에 주께서 내게 가까이 하여 이르시되 두려워하지 말라 하셨나이다 58 주여 주께서 내 심령의 원통함을 풀어 주셨고 내 생명을 속량하셨나이다 59 여호와여 나의 억울함을 보셨사오니 나를 위하여 원통함을 풀어주옵소서

이 넉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56 '살려 주십시오. 못들은 체 하지 마시고, 건져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57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58 주님, 주님께서 내 원한을 풀어 주시고, 내 목숨을 건져 주셨습니다. 59 주님, 주님께서 내가 당한 억울한 일을 보셨으니, 내게 바른 판결을 내려 주십시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들이 울부짖으며 간구하는 목소리를 들으십니다. 가까이 오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이 원초적인 복음을 신뢰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잘 알고 있습니다. 분명한 복음이지만 막상 진심으로 믿고 의지하기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여전히 우리는 구덩이 속을 지나기 때문입니다.

애초에 고즈넉한 호숫가나, 푸르른 평야만을 지난다면 의심할 필요없습니다. 그 정도는 아니라도, 적어도 평평한 길만 무던히 걸어도 괜찮습니다. 그런데 깊고 깊은 수렁 속에 몰아놓고, 거기서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나를 향해 ‘두려워 말라’고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때로는 서운한 게 사실입니다. 솔직히 잔인하기까지 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복음을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어두운 수렁에 잠기셨습니다. 십자가는 높이 들린 구덩이입니다. 예수님은 죽임당하시어 암흑으로 가득한 동굴 무덤에 누으셨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부활은 지금도 저마다의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는 모든 사람을 향한 위대한 희망의 선언입니다. 

오늘 하루, 이 생명의 복음을 더욱 마음 깊이 붙잡으시길 바랍니다. 여전히 물이 목 위로 차오르는 순간을 지납니다. 그 섬뜩한 냉기가 온몸과 마음을 얼어붙게 합니다. 빛 한 줌 들어 오지 않는 깜깜한 암흑 속에서 무서움에 떨고는 합니다. 머리 위를 가로막은 육중한 돌덩이가 이제는 다 끝났다고, 포기하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습니다. 하지만 변함없는 하나님의 사랑을 끝까지 신뢰하는 이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올곧게 따르는 이들에게 그 모든 흑암을 뛰어넘는 희망의 빛줄기가 가득히 비쳐옴을 믿습니다.

본문 55~57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고 마치겠습니다.

55 주님, 그 깊디 깊은 구덩이 밑바닥에서 주님의 이름을 불렀습니다. 56 '살려 주십시오. 못들은 체 하지 마시고, 건져 주십시오' 하고 울부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 간구를 들어 주셨습니다. 57 내가 주님께 부르짖을 때에, 주님께서 내게 가까이 오셔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예레미야애가 3장 40~54절 "실망과 마주하여, 절망을 넘어"

2023년 6월 12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예레미야애가 3장 40~54절 "실망과 마주하여, 절망을 넘어"

40 우리가 스스로 우리의 행위들을 조사하고 여호와께로 돌아가자
41 우리의 마음과 손을 아울러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들자
42 우리의 범죄함과 우리의 반역함을 주께서 사하지 아니하시고
43 진노로 자신을 가리시고 우리를 추격하시며 죽이시고 긍휼을 베풀지 아니하셨나이다
44 주께서 구름으로 자신을 가리사 기도가 상달되지 못하게 하시고
45 우리를 뭇 나라 가운데에서 쓰레기와 폐물로 삼으셨으므로
46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47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50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실 때까지니라
51 나의 성읍의 모든 여자들을 내 눈으로 보니 내 심령이 상하는도다
52 나의 원수들이 이유없이 나를 새처럼 사냥하는도다
53 그들이 내 생명을 끊으려고 나를 구덩이에 넣고 그 위에 돌을 던짐이여
54 물이 내 머리 위로 넘치니 내가 스스로 이르기를 이제는 멸절되었다 하도다


본문을 시작하는 두 구절, 40~41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40 지나온 길을 돌이켜 살펴보고, 우리 모두 주님께로 돌아가자. 41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우리의 마음을 열고, 손을 들어서 기도하자.

성경 전체에서 비슷한 내용을 많이 보셨을 것입니다. 지나온 길을 돌이켜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가자는 촉구, 주님을 향해 마음을 열고 기도하자는 권면.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합니다. ‘익숙함’은 자연스러운 연상으로 이어집니다. 즉, 회개하며 기도하는 이들을 하나님께서 따뜻하게 맞아주실 것을 예상합니다. 하지만 본문은 그런 우리의 기대를 여지없이 무너뜨립니다. 본문 42~44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42 "우리가 주님을 거슬러 죄를 지었고, 주님께서는 우리를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43 주님께서 몹시 노하셔서, 우리를 쫓으시고, 사정없이 죽이셨습니다. 44 주님께서 구름을 두르셔서, 우리의 기도가 주님께 이르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예언자 예레미야는 거침없이 한탄하며 토로합니다. 주님께서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죽음에 이르게 하셨습니다. 구름으로 기도를 막으셨습니다. 백성의 탄식을 듣지 않으셨습니다. 얼마나 끔찍한 고통입니까? 이 이상의 절망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를 통해 알게 됩니다. 앞서 40~41절에 기록한 회개와 기도의 촉구는 지금이 아니라, 지난 날에 있었던 입입니다.

바로 바벨론에 의해 남유다가 망하기 직전 상황입니다. 거대한 혼돈이 예루살렘을 덮쳤습니다. 거짓이 난무했습니다. 진리가 무너졌습니다. 강력한 제국의 침략을 앞두고 어떻게 위기를 이겨내야 할지 혼란스럽기만 했습니다. 지도자들도 갈팡질팡 했습니다. 하지만 예레미야는 하나님의 선명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길을 알고 있었습니다. 바로 바벨론을 향한 투항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유다 사람들로서는 불편한 진실이었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귀를 즐겁게 해줄 말을 기대했습니다. 마음을 시원하게 할 달콤한 거짓에 더 열광했습니다. 그 결과 거짓 예언자들이 득세했습니다. 다 잘 될 거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웃으며 외쳤습니다. 당당히 승리 할 거라고 위로하고 다독였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은 영혼이 마취되어 점점 죄악에 물들어 갔습니다. 더욱 맹렬히 파멸을 향해 달려갔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피를 토하며 재앙을 경고하고 회개를 촉구하는 예레미야의 모습을 상상 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는 홀로 외로이 진리를 외쳤습니다. 제발 돌이켜 회개하고 주님께 돌아가자고, 하늘에 계신 하나님께 두 손을 높이 들고 기도하자고 소리 높였습니다. 그렇지만 그 결과 그에게 돌아온 것은 싸늘한 비웃음과 핍박이었습니다. 

어쩌면 여기까지는 그런대로 괜찮을 수 있었습니다. 예레미야가 정말 두려워한 게 있습니다. 그가 선포한 심판 예고가 정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유다는 멸망을 하게 달려갔습니다. 바벨론과 무모한 싸움을 벌였습니다. 그 결과 처참한 패배를 경험합니다. 그 장면을 본문 46~49절이 묘사합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46 우리의 모든 원수들이 우리를 향하여 그들의 입을 크게 벌렸나이다 47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멸망이 우리에게 임하였도다 48 딸 내 백성의 파멸로 말미암아 내 눈에는 눈물이 시내처럼 흐르도다 49 내 눈에 흐르는 눈물이 그치지 아니하고 쉬지 아니함이여

같은 본문을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46 우리의 모든 대적이 우리를 보고서 입을 열어 놀려댔습니다. 47 우리에게 남은 것이라고는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폐허뿐입니다. 48 내 백성의 도성이 파멸되니, 나의 눈에서 눈물이 냇물처럼 흐릅니다. 49 눈물이 걷잡을 수 없이 쉬지 않고 쏟아집니다.

그야말로 완벽한 절망 그 자체입니다. 그들에게 남은 것은 두려움과 함정과 파멸과 폐허뿐입니다. 아무런 희망이 없습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집니다. 입에서 나오는 건 탄식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위대한 신앙 고백을 남깁니다. 본문 50절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50 주님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립니다.

화면 보시면서 다함께 읽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예레미야는 한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좌절의 극한을 경험했습니다. 그의 일생은 눈물로 가득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하나님께 거침없이 원망해야 합니다. 특히나 주님께서 회개를 거절하시고 기도를 듣지 않으셨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레미야는 주님께서 하늘에서 살피시고, 돌아보시기를 기다렸습니다. 

너무나 눈부신 신앙 고백입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가요? 예언자는 어떻게 그 처참한 상항속에서도 여전히 하나님의 통치와 돌봄을 기대했을까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 안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그 어떤 절망도 반드시 끝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위대한 다스림 안에서 그 어떤 상처와 고통도 분명 아름다운 영광으로 변화되기 때문입니다.

예레미야의 믿음 또한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는 어리석은 망상에 사로잡히지 않았습니다. 무모한 신앙으로 허무한 꿈을 꾸지 않았습니다. 그가 온 삶을 다해 외친 진리가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주님의 십자가는 이 세상의 가장 깊은 어둠이자 죽음입니다. 하지만 다시 사신 주님이 그 어둠과 죽음을 이기고 참 빛과 죽음을 이 땅에 전해 주셨습니다.

예레미야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직접 알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주님을 가까이하며, 그 마음을 통해 진리의 본질을 호흡했습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쓰러져도 영영 넘어지지 않는 진정한 구원을 발견했습니다. 힘을 잃은 모든 사람을 일으키는 참된 능력을 깨달아 알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나 예레미야와 같은 고난을 겪고 있진 않으십니까? 바벨론 군대에 의해 무너진 예루살렘과 같은 거대한 시련은 아닌지 모릅니다. 하지만 분명 저마다 눈물지으며 하나님께 간절히 구하는 기도 제목이 있으실 겁니다. 하염없이 눈물을 쏟게 만드는 깊은 상처가 하나쯤은 있으실 겁니다. 그 가운데 결코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위대한 예언자가 고백했듯이, 주님께서 우리 모두를 날마다 살피시고 돌아보시기 때문입니다.


2023년 4월 25일 화요일

황동수, 이상호 <석탄사회>(서울: 동아시아, 2022) 서평


작년 겨울, 제가 몸담은 교회 안수집사님으로부터 본인이 공저하신 이 책을 선물 받았습니다.
분주한 시간을 지나 이제야 단행본을 읽을 여유가 생겼습니다.
지난 주일과 월요일 이틀에 걸쳐 이 책을 읽었습니다.
처음에는 막연한 예의와 의무감을 펼쳤지만, 점점 몰입해 책장을 넘겼습니다.

이것이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저처럼 과학과 공학에 무지한 사람들도 편하게 이해할 수 있도록 쉬운 문체로 차근하게 논지를 전개합니다.
이를 통해 산업과 환경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를 고찰할 시야를 틔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뜻 밖에도 역사를 이해하는 중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철'은 오랜 시간 인류와 함께한 물질입니다.
철을 만드는 과정이 어렵고 큰 노력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막연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그 과정을 자세히 설명합니다.

"중세 시대에는 철 1킬로그램을 생산하기 위해서 무려 1,000킬로그램의 숯이 필요했습니다. 숯 1,000킬로그램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1제곱킬로미터(약 30만 평)가 넘는 산림이 필요했습니다(참고로 경기도 용인시 에버랜드의 총면적이 약20만평입니다.)." 21~22쪽.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철 생산을 둘러싼 갈등과 긴장을 보다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자연스럽게 석탄의 의미를 깨우쳐 줍니다.
오늘날 석탄은 대기오염을 일으키는, 석유에 밀려 한물간 연료라는 인식이 강합니다.
하지만 석탄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산림 파괴를 막는, 당시로서는 '친환경적인' 물질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석탄이 산업혁명 시기에 활용되지 않았다면, 산업혁명 이전에 일어났던 산림 파괴도 억제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24쪽.

결정적으로 역사 속 석탄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리합니다.

"많은 과학자와 사회학자들은 급격한 사회변화에 대한 시발점을 단순화해서 말하자면 '증기기관'이 아니라 '석탄'이라고 주장합니다." 38쪽.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늘날 석탄으로 인한 대기오염과 기후 위기 문제를 가볍게 볼 수 없습니다.
저자들도 모두 인정하는 바입니다.
하지만 기존 산업 질서를 과격하게 흔들며 '소재'로서 석탄의 기여를 무조건 무시하는 것에 대한 우려를 표합니다.

"탄소중립이 우리가 추구하고 나아가야 할 목표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쉽지 않더라도 나라의 산업 경쟁력을 유지하면서 탄소중립을 이끌어 내는 방안을 고민해야할 것입니다. 

(중략) '에너지원'으로서의 석탄은 점차적으로 사라져야 하겠지만, '소재'로서의 석탄은 우리나라와 인류의 지속 가능한 자원으로 활용되는 귀중한 물질이므로 이 '소재'를 어떻게 환경친화적으로 활용할 것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이 필요합니다." 65쪽.

환경운동의 목적이 지구 자원의 '지속 가능성'이라면, 그러한 환경운동의 '지속 가능성'을 위한 현실적인 우려와 대안을 제시하는 점이 여러모로 흥미로웠습니다.

즉, 지나치게 이상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태양열 발전을 비롯해 소위 '친환경'을 표방한 기술의 위험성도 인정해야 합니다. 또한 산업체계와 공학에 대한 깊은 이해를 바탕으로 할 때, 기후 위기를 극복하고 생태 질서를 회복하는 길에 한 걸음 더 나아갈 수 있다는 깨우침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현재 기술로 태양광 1메가와트 발전설비 건설에 필요한 대지 면적은 1만 5,617제곱미터이며, 이를 약 44만대의 필요량을 고려해서 수식으로 계산해 보면 우리나라 면적의 약 7퍼센트를 활용해야만, 현재 우리가 쓰는 전력을 모두 태양광 에너지로 전환할 수 있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습니다. (중략) 하지만 국토의 70퍼센트가 산지인 우리나라의 형편상 국토 면적의 7퍼센트는 전혀 작은 면적이 아닙니다." 158~59쪽.

"현재 미래 신기술로 화두가 되는 것은 '수소환원제철'입니다. 수소를 에너지원으로 삼아, 탄소 소모가 일어니지 않는 철강을 만들기 위한 기술이지요. 하지만 수소환원제철만을 통해서 철강을 생산할 경우, 이 철강을 우리가 지금까지 활용했던 철강 규격으로 제조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지하고 정책적으로 기술 개발에 임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현재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정책은 '탄소제로'가 아니라 '탄소중립'입니다." 175쪽.

"왜 인류가 나무와 석탄으로 제철을 시작하게 되었으며, 왜 인류가 원유를 열망하게 되었는지 근본적인 해석을 동반하지 않은 채 단순히 제거 대상으로서 화석연료를 바라본다면 또다시 같은 결론을 반복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190쪽.

평소 낯설고 무지한 영역이기에 더욱더 집중해 읽을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해당 분야에 대한 저자들의 전문성과 관록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끝으로, 이를 통해 '과학적 태도'의 중요성을 실감한 것이 가장 유익한 배움이었습니다. '환경 보전'을을 비롯해, 내가 꿈꾸고 지향하는 바가 숭고할수록 현실 문제를 과학과 정확한 수치로 진단하는 게 무척 중요합니다. 따라서 관련 공부를 틈틈이 할 것을 다짐하게 되었습니다.

생각의 폭을 넓히고 실천의 방향을 점검하게 하는 이 책을 진심으로 추천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