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2월 29일 금요일

창세기 35장 1~7절 "벧엘의 하나님"

2023년 12월 2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35장 1~7절 "벧엘의 하나님"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2 야곱이 이에 자기 집안 사람과 자기와 함께 한 모든 자에게 이르되 너희 중에 있는 이방 신상들을 버리고 자신을 정결하게 하고 너희들의 의복을 바꾸어 입으라
3 우리가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자 내 환난 날에 내게 응답하시며 내가 가는 길에서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께 내가 거기서 제단을 쌓으려 하노라 하매
4 그들이 자기 손에 있는 모든 이방 신상들과 자기 귀에 있는 귀고리들을 야곱에게 주는지라 야곱이 그것들을 세겜 근처 상수리나무 아래에 묻고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6 야곱과 그와 함께 한 모든 사람이 가나안 땅 루스 곧 벧엘에 이르고
7 그가 거기서 제단을 쌓고 그 곳을 엘벧엘이라 불렀으니 이는 그의 형의 낯을 피할 때에 하나님이 거기서 그에게 나타나셨음이더라


‘그리고, 그리하여, 그럼에도,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한글 성경은 생략했지만 구약 원문에는 1절 앞에 접속사가 붙어있습니다. 우리말 접속사는 ‘그리고’나 ‘그러나’처럼 순접 혹은 역접 의미가 명확합니다. 반면 한 글자로 된 히브리어 접속사는 뜻이 명쾌하지 않습니다. 맥락에 따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 자체로 삶의 모호함과 모순을 드러냅니다. 다만 앞 단락과 긴밀하게 이어져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이를 통해 본문이 직전 사건과 역동적으로 이어져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 때 야곱은 지금까지 살아오며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었습니다. 그의 가족이 가나안 땅, 세겜에 정착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난 일입니다. 막내딸 디나가 그곳 추장의 아들, 하몰에게 몹쓸 짓을 당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오빠들이 사악한 꾀를 내어 세겜 남자들을 몰살시켰습니다. 

거대한 공포가 야곱을 사로잡았습니다. 이제 막 새로운 마을에 터를 잡고 살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 먼저 살던 사람들과 원만히 잘 지내야 합니다. 거창한 명분을 떠나 가족 전체의 생존이 걸린 일입니다. 그런데 철없는 아들들이 혈기를 못 이겨 끔찍한 살육과 약탈을 저질렀습니다. 이제 복수는 시간 문제입니다. 세겜 성읍에 살아남은 사람들이 평소 가깝게 지낸 다른 부족에게 도움을 청하는 순간, 그 즉시 모든 게 끝장입니다. 게다가 야곱은 이 사건을 통해 족장이자 아버지로서 자기 권위가 바닥에 떨어졌다는 뼈아픈 현실을 마주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야곱을 짓누른 한없는 절망을 감히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불행 가운데 지쳐 쓰러진 야곱에게, 마치 문장과 문장을 잇는 접속사가 그러하듯 가장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1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하나님이 야곱에게 이르시되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서 거기 거주하며 네가 네 형 에서의 낯을 피하여 도망하던 때에 네게 나타났던 하나님께 거기서 제단을 쌓으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일어나 벧엘로 올라가 거기에서 살라고 야곱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 또한 덧붙입니다. 벧엘은 지난날 그가 주님께 예배한 곳입니다. 본문 7절은 이러한 1절과 정확하게 대칭을 이룹니다. 야곱은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여 벧엘에서 제단을 쌓았습니다. 그곳 이름을 ‘엘 벧엘’, 즉 “벧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따라서 주님은 단순히 물리적인 이동을 명령한 게 아닙니다. 벧엘이라는 공간이 상징하는 눈부신 은혜를 회복하라는 뜻입니다.

그런 까닭에 주님께서 벧엘과 함께 언급한 시간 배경을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1절과 7절 모두, 야곱이 하나님을 예배한 그 시절을 이렇게 정리합니다. 바로 ‘형의 낯을 피해 도망하던 때’입니다. 그가 과거에 경험했던 가장 어둡고 비참했던 시간입니다. 관련해서 창세기 28장 10절 이하 내용을 주목해야 합니다.

그 때 야곱은 어머니 리브가와 모의하여 아버지 이삭을 속였습니다. 쌍둥이 형 에서가 받을 축복을 가로챘습니다. 에서는 분노하며 동생을 죽이려 했습니다. 사냥으로 단련한, 풍채 좋은 근육질 몸은 그의 말이 허풍이 아님을 보여 주었습니다. 에서 손에 잡힌다면, 그의 사냥감이 된 토끼나 노루처럼 야곱이 피를 흘릴 게 분명했습니다. 리브가는 이 상황을 그냥 내버려 둘 수 없었습니다. 야곱을 오빠 라반의 집으로 피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야곱은 유복한 족장 아들에서, 한순간에 도망자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밤을 맞이합니다. 그를 둘러싼 자연환경 자체가 암울한 자기 인생을 낱낱이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사방은 어둠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저 멀리 어디선가 정체 모를 섬뜩한 소리가 들려옵니다. 언제 맹수가 덮칠 지 모릅니다. 어디서 강도떼가 튀어 나올지도 모릅니다. 설령, 외삼촌이 살고 있는 하란에 무사히 도착한다 할지라도, 어머니 바람처럼 그곳에서 안전할 거라는 보장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야곱이 베고 누운 돌덩어리의 딱딱하고 싸늘한 촉감이 그의 마음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습니다. 앞날이 막막하기만 합니다. 온갖 염려가 그의 내면에 엄습합니다. 어쩌면 그의 눈가에 흐른 눈물이 뺨을 타고 돌베개를 축축이 적셨을지 모릅니다. 대체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수없이 돌이켜 보며 자책했을 것입니다. 그렇게 그는 번민과 절망 속에 지쳐 잠들었습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 때, 꿈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합니다. 조금 길지만 창세기 28장 12~15절을 화면 보시면서 다함께 읽겠습니다.

12 꿈에 본즉(보라!, 히 ‘베힌네’) 사닥다리가 땅 위에 서 있는데 그 꼭대기가 하늘에 닿았고 또 본즉(보라!, 히 ‘베힌네’) 하나님의 사자들이 그 위에서 오르락내리락 하고 13 또 본즉(보라!, 히 ‘베힌네’)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보라!, 히 ‘베힌네’)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꿈에서 야곱은 하늘에 닿은 계단을 보았습니다. 이를 두고 개역개정성경은 ‘사닥다리’라고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서아시아에서 발굴한 고대 유적처럼 층계나 경사면으로 이해하는 게 더 정확합니다. 거기를 천사들이 오르락내리락하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꼭대기에 서서 말씀하셨습니다. 야곱이 공포에 사로잡혀 불안해하는, 영혼 가장 깊은 아픔을 어루만지고 위로하십니다.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언약하신 복을 내려주셨습니다. 그에게 땅과 자손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은혜를 선언하십니다. 바로 언제 어디서나 야곱과 함께 하겠다는 ‘임재’입니다. 그런데 앞서 화면으로 보신대로 여기서 “보라!”라는 뜻의 히브리어 감탄사 <베힌네>가 무려 네 번이나 나옵니다. 하나님을 만난 야곱이 느낀 경이로움을 강조 하는 표현합니다. 게다가 28장 11절에서 야곱이 ‘한 곳에 이르렀다.’라는 문장의 원문은, 그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그 곳에 도착했음을 암시합니다. 
 
정리하자면 야곱은 가장 위험하고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을 마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순간 그는 감격하기보다는 두려워하고 놀랐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우리는 지금 수천 년의 역사와 전통, 그리고 거대한 문화와 체계 속에서 기독교 신앙을 믿고 고백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에게 야훼 신앙은 할아버지로부터 시작해 이제 겨우 3대에 이른 가족 종교입니다. 

어머니로부터 자신의 특별한 출생 과정과 하나님의 언약에 대해 듣긴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생생히 경험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습니다. 그의 인생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입니다. 온 우주를 다스리시고 나와 동행하시는 하나님을 깊고 깊은 어둠 속에서 마침내 만났습니다. 그런 까닭에 야곱은 창세기 28장 16절에서 이렇게 고백합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6 야곱이 잠이 깨어 이르되 여호와께서 과연 여기 계시거늘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그리고 나는, 나는 그것을 몰랐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화면에 밑줄로 표시한 마지막 문장, “내가 알지 못하였도다.”를 원문에서 곧바로 옮기면 “그리고 나는, 나는 그것을 몰랐다.”입니다. 1인칭을 연달아 두 번 반복하는 독특한 표현입니다. 이를 통해 야곱은 자기가 하나님의 임재를 몰랐음을 거듭 강조합니다. 치명적인 무지함을 처절히 인정합니다. 그의 고백으로 말미암아 깨닫습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만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누구보다 바로 나 자신을 넘어서야 합니다. 나에 대한 생각을 멈추고, 내 슬픔과 고통에 집착하는 걸 그만해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의 온 인격과 존재가 진실로 하나님을 향해 활짝 열립니다.

그 결과 야곱은 하나님과 함께 나그네 길을 계속 걸어갈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돌베개를 세워 그 위에 기름을 부으며 주님을 예배했습니다. 원래 ‘루스’로 불리던 그 땅 이름을 ‘하나님의 집’이라는 뜻인 ‘벧엘’로 바꾸고 진심 어린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그 후 20년 세월이 흘렀습니다. 삶은 여전히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습니다. 그러다 아들들이 세겜에서 범죄를 저질러, 이제 온 가족이 어떤 끔찍한 고초를 겪을지 모르는, 암담한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께서 또다시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벧엘로 돌아가라고 말씀 하십니다. 거기서, 그 옛날 형을 피해 도망칠 때 나타나셨던 당신께 예배하라고 명령하십니다. 그 순간 야곱은 아마도 과거로 돌아갔을 것입니다. 그날 밤의 냉기와 허기와 피로가 생생하게 떠올랐습니다. 그 때의 극심한 절망과 두려움이 다시금 가슴 깊이 사무쳤습니다. 그리고 그 모두를 압도하는 주님의 찬란하고 따스한 생명에 휩싸였습니다. 이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에는 죽음에서 일으켜 세우는 위대한 생명과 능력이 있음을 반드시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야곱은 가족 모두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본문 3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 이제 우리는 이 곳을 떠나서, 베델로 올라간다. 거기에다 나는, 내가 고생할 때에 나의 간구를 들어 주시고, 내가 가는 길 어디에서나 나와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신, 그 하나님께 제단을 쌓아서 바치고자 한다."

여기서 야곱은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며 눈물겨운 신앙 고백을 남깁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가 고생할 때에 간구를 들어주시고, 가는 길 어디에서나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셨다는 간증입니다. 같은 은혜가 야곱의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모두에게도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그런데 동시에 충격적인 사실을 본문에서 확인합니다. 바로 이어지는 4절을 보면 그의 가족들이 어마어마 양의 이방 신상과 장식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샌가 그들의 내면 속에 하나님이 사라진 증거입니다. 

그 대신 우상이 유혹하는 탐욕과 헛된 풍요가 그 자리를 대신 차지 했습니다. 더욱 정확히는 ‘나’로 가득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더 이상 주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자기 감정과 어리석은 욕망에 충실했습니다. 그 결과 야곱의 아들들은 돌이킬 수 없는 폭력과 죄악을 저지르고, 공동체 전체를 위기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렇지만 먼저 다가와 말씀하시는 하나님, 지난날 함께 하신 언약을 되새겨 주신 그 하나님께서는 결코 그들을 위험 가운데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5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5 그들이 떠났으나 하나님이 그 사면 고을들로 크게 두려워하게 하셨으므로 야곱의 아들들을 추격하는 자가 없었더라

야곱은 세겜을 떠나며 몹시 근심하고 걱정했습니다. 어린 아이와 여성을 포함한 많은 무리가 멀리 이동할 때는 언제나 외부 공격에 약하기 마련입니다. 야곱 가족이 외적의 칼과 창을 무서워하는 게 당연합니다. 그러나 정반대로 주변 성읍 사람들이 야곱 가족에게 크게 겁을 내었습니다. 공포의 전환이자 두려움의 반전입니다. 하나님께서 함께하신 결과입니다. 지난날 벧엘에서 도망자 야곱을 구하신 주님이 여전히 그와 동행하셨습니다. 시련에서 구하시고 다시 일으켜 주셨습니다.

이 놀라운 은혜와 구원을 완성하시고, 온 세상에 전하시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주님께서 지신 십자가는 온 우주를 뒤덮는 공포의 절정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또 다른 루스에서 밤을 보내며 싸늘한 돌베게를 베고 누울 때가 있습니다. 여러 모양의 세겜을 지나며 두려움에 벌벌 떨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 깊고 깊은 죽음과 절망 속으로 주님께서 따스하게 임재하심을 믿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그 모든 절망을 뒤엎는 위대한 생명과 희망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믿는 사람들은 어떤 시련에도 쉽게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고생할 때에 간구를 들어주는 주님. 가는 길 어디에서나 항상 함께 다니면서 보살펴 주시는 주님만을 높여 예배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헛된 자아와 욕망을 날마다 더욱 내려 놓으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세겜을 떠나 벧엘을 향해 날마다 묵묵히 발걸음 내딛길 소망합니다.

물론 그 길에 여전히 많은 아픔이 놓여 있을 것입니다. 앞으로도 분명 설움에 사무쳐 눈물 흘릴 날이 찾아 올 것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리고, 그래서 벧엘의 하나님께서 오늘도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기도
벧엘의 하나님
깊은 밤 돌베개를 베고 스산하게 잠들던 도망자 야곱에게, 온 가족에게 닥친 위기 가운데 두려워 떨던 야곱에게, 따스한 임재로 다가오신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말씀으로 깨닫게 하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또한 저희의 모든 실패와 좌절 가운데에도 항상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생명의 말씀을 마음 깊이 새기며 어리석은 아집과 교만을 물리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공허한 우상을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만을 향해 온 마음을 열고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언제나 사랑으로 동행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3년 12월 26일 화요일

목회전문대학원 박사과정 "목회와성서"전공 합격

 



장신대 구약학 선생님들의 숙원 중 하나는 목회신학박사과정(Th.D. in Min.)에 성서학 전공 개설이었습니다.

김진명 교수님께서 목회전문대학원장으로 수고하시며 마침내 그 일을 이루셨습니다.

참으로 뜻깊게도 그 결과 이번 입시에 처음 생긴 "목회와성서" 전공에 합격하여 내년부터 공부를 다시 이어갑니다.

2019년 구약학 석사 졸업 후 5년만입니다. 그간 다음 학위 과정 진학을 두고 겪은 많은 고민과 어려움을 돌아보며 하나님의 신실한 인도하심을 고백합니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음에도 학업을 적극 지지해 주신 승리교회 박규성 위임목사님과 교인들의 격려 덕분입니다.

김진명 교수님께 석사 논문에 이어서 한 번 더 논문지도를 받을 기회를 얻어 더욱 기쁘고 감사합니다.

합격 사실을 들으시고 곧바로 전화하시어 진심으로 축하하시는 스승의 음성을 들으며 제자로서 다시금 자부심을 느낍니다.

존경하는 스승을 본받아 성경 본문을 진지하게 연구한 결실을 성도들과 진솔하게 나눌 수 있길 기대합니다.

2023년 12월 23일 토요일

영화 윈드리버(wind river, 2016) 리뷰



언젠가부터 내게 겨울 영화는 "윈드 리버"다.
그 어떤 영화보다 설원 풍경을 생생히 보여준다.
마치 화면 밖으로 냉기를 뿜어내는 것만 같다.
거기에는 비릿한 피 내음이 섞여 있다.
여전히 진행 중인, 아메리카 선주민의 참상을 생생히 알려준다.

그리고 그 참혹한 폭력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자신과 싸우는 숭고한 강인함을 보여준다.
그녀와 그들에게서 역사상 또 다른 거대 악과 맞섰던 이름 모를 이들의 희생을 기억한다.
또한 가까운 일상 속 여러 모양으로 존재하는 불의한 억압에 신음했던 순간을 떠올린다.

그렇기에 영화가 시작하며 등장하는 이 자막이 세차게 마음을 두드렸다.
"실화를 바탕으로 함"(Inspired by actual events)
동시에 묵직한 위로와 소명을 얻는다.
아파하는 이들과 함께 울고, 옆에 나란히 앉는 사람이 되길 다짐한다.

마침 어제(22일)는 '동지'였다.
한 해 중 밤이 가장 긴 날이다.
동시에 차츰 빛이 생명력을 회복하는 날이다.
온 우주를 압도하는 위대한 역설이다.
가장 깊은 어둠을 통과해야 비로소 참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다.
성탄의 신비가 바로 여기에 있다.

추위에 떨다 문득 생각나 찾아본 영화를 통해 뜻밖의 공감각적인 통찰에 이르렀다.
매끈한 장르영화의 덕목을 지키면서도 생생한 주제 의식을 보여준 테일러 쉐리던의 탁월한 각본과 연출 덕분이다.
여름에는 또 다른 그의 각본작 "로스트 인 더스트"(2016)를 다시 보려 한다.

그리고 내 인격과 목회와 설교 또한 냉기와 온기 그리고 어둠과 빛을 두루 아우르며 누군가에게 참 위로를 안겨 줄 수 있기를 소망한다.

2023년 12월 14일 목요일

룻기 4장 13~22절 "일상을 살다가"

2023년 12월 13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룻기 4장 13~22절 "일상을 살다가"

13 이에 보아스가 룻을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그에게 들어갔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게 하시므로 그가 아들을 낳은지라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16 나오미가 아기를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니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18 베레스의 계보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출산은 어느 공동체나 감격스러운 사건입니다. 특히 베들레헴과 같은, 농경 사회는 더욱 그러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오늘 본문이 묘사하는 장면은 뭔가 의아합니다. 먼저 16절을 보면 나오미가 아기 오벳을 ‘받아 품에 품고 그의 양육자’가 되었습니다. 할머니가 손자를 끌어안고 돌보는 단순한 행동이 아닙니다. 해당 원문은 이 아기에 대한, 나오미의 상당한 권리를 암시합니다.

더욱 놀라운 장면이 17절에 나옵니다. 이웃 여인들이 몰려와 이렇게 말합니다.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엄밀하게 따지면, 오벳에게 나오미는 어머니의 전 남편의 어머니입니다. 둘 사이에는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그 아기를 가리켜 마을 사람들은 ‘나오미의 아들’이라고 말했을까요? 14절 말씀과 같이 오벳은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무척 복잡한 상황이 얽혀 있습니다. 단순하게 눈에 보이는 데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한 아기가 그들에게 오기까지, 룻기 이야기 전체를 다시금 되짚어 봐야 합니다. 그 시작은 무척 어둡고 절망적입니다. 기근이 몰아닥쳐 극심한 가난을 겪었습니다. 나오미가족은 고심 끝에 이방 땅 모압으로 이주했습니다. 하지만 부푼 기대와 달리 나오미는 그곳에서 극한 역경과 시련을 겪었습니다. 바로 남편과 두 아들의 죽음입니다.

이제 그녀 곁에는 자기처럼 과부가 된 며느리 둘만 덩그러니 남아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이런 상황에 놓이게 되면 아득한 절망에 빠집니다. 하물며 고대 서아시아에서는 생존 자체가 위협받을 정도로 너무나 위태로운 처지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오미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 했습니다. 대신 모압 출신 두 며느리에게는 살던 곳에 그대로 남으라고 말합니다. 앞날이 창창한 젊은 그들에게 자신이 짐만 될 뿐 아무런 도움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나오미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결국 며느리 중 하나인 오르바는 죄송함을 무릅쓰고 모압에 남았습니다. 하지만 룻은 나오미와 함께 낯선 땅 베들레헴으로 향했습니다. 그 결정으로 말미암아 절대 녹록지 않은 현실과 마주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 많으신 늙고 힘없는 시어머니를 홀로 보내는 것이 내키지 않았습니다. 영혼 깊은 곳에서 울려 퍼지는 어떤 무언가가 그녀를 움직였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지극히 상식적이고 안전한 삶을 거부했습니다. 살던 곳에 그대로 남아 자기 삶을 지탱해 줄 또 다른 남자와 결혼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과부 시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험난한 길을 선택하였습니다. 게다가 그곳은 자신과 같은 이방 사람들에게 철저히 배타적인 이스라엘입니다.


마침내 룻은 베들레헴에 도착했습니다. 절망을 딛고 다시 일어나 일상을 이어가기 시작합니다. 추수하는 들녘으로 찾아가 이삭을 주었습니다. 그곳에는 자신과 같은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일부러 남겨진 곡식이 있었습니다. 놀랍게도 이스라엘이 섬기는 야훼 하나님께서 율법으로 그 행동을 명령하셨습니다. 룻은 들판에서 자기를 향한 주님의 뜻밖의 사랑을 조금씩, 몸소 경험 하였습니다. 그녀는 그 따스한 돌보심을 통해 살아갈 희망을 차츰 발견했습니다. 

이뿐만이 아닙니다. 그곳에서 룻은 예상하지 못한 운명적인 인물을 만납니다. 바로 ‘보아스’입니다. 그 땅의 주인인 보아스는 마침 룻에 관한 소문을 이미 들었습니다. 그녀를 반갑게 알아보았습니다. 나오미를 위한 룻의 갸륵한 마음을 어여쁘게 여겼습니다. 그녀에게 친절한 도움을 베풀어 주었습니다.

한껏 밝아진 표정으로 집에 돌아온 룻은, 그날 자기가 겪었던 일들을 시어머니에게 들려주었습니다. 그러자 나오미는 크게 환한 미소를 지었습니다. 왜냐하면 보아스는 죽은 남편 엘리멜렉의 친척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에게는 삶의 터전을 잃은 나오미와 룻을, 레위기 25장의 희년법에 따라 도와줄 의무가 있었습니다. 

희년법에 따르면 이스라엘 가운데 누군가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부득이하게 땅을 팔고 빚을 지었을 때 가까운 가족이나 친척이 빚을 대신 갚아 주어야 합니다. 그 혈육을 가리켜 개역개정 성경은 “기업 무를 자”로 옮겼습니다. 하지만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고엘>은 쉽게 단정하기 어려운, 훨씬 더 복잡한 의미를 지닙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고엘’에게 철저히 희생이 따른다는 사실입니다. 반면에 혜택과 권리는 지극히 적습니다. 더구나 룻기에서 고엘 제도는 신명기 25장의 수혼법과 결합되어 독특한 형식으로 발전했습니다. 그 결과 도움이 필요한 친척에게 대를 이을 아들이 없는 경우, 출산과 양육의 책임까지 떠맡습니다. 본문 앞에 등장하는 어느 이름 모를 친척이 자기가 가진 우선권을 주저 없이 포기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보아스는 놀랍게도 그 무거운 의무를 기꺼이 수행했습니다. 성문 앞에 마을 장로 열 명을 모셔 공식 절차까지 번거롭게 밟았습니다. 그 결과, 마침내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아기가 바로 오벳입니다. 그런 까닭에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오벳은 그녀에게 “생명의 회복자”이자 “노년의 봉양자”가 됩니다.

따라서 이 모든 과정을 잘 알고 있는 베들레헴의 아낙네들은 마치 자기 일 인양 함께 기뻐하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본문 14,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여인들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찬송할지로다 여호와께서 오늘 네게 기업 무를 자가 없게 하지 아니하셨도다 이 아이의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 유명하게 되기를 원하노라 15 이는 네 생명의 회복자이며 네 노년의 봉양자라 곧 너를 사랑하며 일곱 아들보다 귀한 네 며느리가 낳은 자로다 하니라 

이처럼 룻기는 성경 전체에서 단연 눈에 띄는, 훈훈한 사랑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언제 읽어도 마음 따뜻해지곤 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룻기는 매우 의미심장한 내용으로 끝을 맺었습니다. 본문 17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7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이것이 룻기가 결론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핵심입니다. 바로 오벳이 이새의 아버지라는 사실입니다. 즉, 지금 나오미의 품에 안긴 간난 아기는 바로 다윗의 할아버지입니다. 다윗은 잘 알다시피 이스라엘 역사 속에 가장 위대한 왕이자 메시아를 예고하는 인물입니다. 

바로 여기에 룻기의 중심 주제가 담겨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자는 유다의 아들 베레스의 족보를 인용합니다. 그러면서 다윗의 이름을 굳이 한 번 더 언급하고 책을 마무리합니다. 본문 18~2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8 베레스의 계보(히, 톨르도트)는 이러하니라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19 헤스론은 람을 낳았고 람은 암미나답을 낳았고 20 암미나답은 나손을 낳았고 나손은 살몬을 낳았고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18절에 등장하는 ‘계보’는 룻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입니다. 본문에서 ‘계보’로 옮긴 히브리어는 <톨르도트>입니다. 이 단어를 중요하게 자주 사용한 성경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입니다. 창세기는 아담과 노아를 비롯한 여러 조상의 족보를 기록했습니다. 그런데 그중에서 이 <톨르도트>가 가장 먼저 나오는 구절이 있습니다.  바로 창세기 2장 4절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것이 천지가 창조될 때에 하늘과 땅의 ‘내력’(תּוֹלְדוֹת)이니 여호와 하나님이 땅과 하늘을 만드시던 날에”

창세기는 우리에게 두 가지 창조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하나는 1장 2절에서 2장 3절까지, 일곱 날에 걸친 창조입니다. 그런데 히브리 문학은 중요한 주제일수록 같은 내용을 변형해서 반복하는 독특한 강조법을 사용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창조를 다른 관점에서 2장 4절부터 서술합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이야기에 주님이 아담과 하와를 지으시고 두 사람과 맺은 언약, 그리고 그들이 그 언약을 깨뜨린 죄악과 징벌, 그럼에도 한결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묘사합니다. 즉, ‘언약’과 ‘범죄’과 ‘사랑’이라는 창세기의 핵심 신학이 여기에 담겨 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중요한 내용을 시작하며 창세기는 그 ‘내력’을 뜻하는 ‘톨르도트’를 같은 창세기 속 다른 톨르토트와 다르게 표기하여 구별하였습니다. 발음은 같지만 중간에 히브리어 알파벳 <봐브>(וֹ)가 추가되었습니다.

다시 룻기로 돌아오겠습니다. 앞서 말씀드린 것처럼 이 책을 끝맺으며 베레스의 족보가 등장합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단어를 다른 구약 본문들처럼 평범하게 적어도 내용 전달에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룻기는 본문 외에 창세기 2장 4절에만 나오는 톨르도트 표기법을 굳이 가져다 썼습니다. 그러면서 베레스에서 다윗으로 이어지는 족보를 기록하며, 룻기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주제를 드러내었습니다.

다분히 의도적인 어휘사용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바로 창조신앙과 연결입니다. 이와 관련해 이스라엘 텔아비브 대학교 교수인 랍비인 “즈비 론”의 견해를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해당 유대 문헌을 비교 검토하며 아담의 죄를 해결할 메시아를 기다리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와 룻기 사이의 관계를 주목하였습니다. 그 결과 그는 이렇게 결론 내립니다. 

“랍비들은 룻기의 족보가 메시아의 오심을 정점으로 하는 창세기의 천지창조 이야기를 드러내는 방식으로 쓰였다고 이해했다.” - Zvi Ron

이를 통해 룻기가 가진 막중한 무게감을 깨닫게 됩니다. 얼핏 보면 이 책은 옛날 어느 시골 마을에서 일어난 소박한 동화처럼 들립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온 우주를 아우르는 하나님의 창조와 다스림과 구원을 향한, 간절하고 뜨거운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놀라운 복음의 주인공으로 룻과 보아스를 부르셨습니다. 그들을 통해, 당신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따스한 돌보심을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이야기를 오늘 우리에게까지 들려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한 번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이 모두가 그 두 사람이 커다란 야망을 품고 애써 노력한 결과일까요? 자기 이름을 드높이고자 치밀하게 계획하여, 이를 앙다물고 맹렬히 달려간 끝에 얻은 결실일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룻이 홀로된 시어머니를 모시고 그 가냘픈 어깨에 무거운 봇짐을 짊어졌을 때, 뿌연 모래 먼지 사이를 헤치고 마침내 낯선 땅 베들레헴에 겨우 도착했을 때, 우락부락하게 생긴 근육질의 거친 농사꾼들 사이를 두려움을 이겨내고 지나가 떨리는 손으로 이삭을 주었을 때, 훗날 자기 이름을 딴 성경책에 그 위대한 희생이 기록되어 수 천 년 동안이나 전해져 내려올 것을 과연 알고 있었겠습니까?

보아스가 보리밭 한쪽에서 애처롭게 이삭을 줍는 룻을 처음 보았을 때, 그런 그녀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세심하게 배려하며 따로 먹을 것을 챙겨 주었을 때, 성문 앞에서 의아해하는 친척의 양보를 받아내고 마침내 결혼에 이르렀을 때, 과연 자신이 메시아의 조상으로 성경에 족보가 기록되는 어마어마한 영광을 누리리라고 과연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결코 아닙니다. 그들은 그저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곁에 있는 연약한 이들을 묵묵히 섬겼을 뿐입니다. 룻과 보아스는 험난한 위험과 시련 속에서도 맡겨진 일상을 진리 가운데 담담하게 이어갔습니다. 그런 그들의 평범한 하루하루를 주님께서 기뻐 받으셨습니다. 그 결과, 더없이 눈부시게 찬란한 구원 여정이 온 우주 가운데 드넓게 펼쳐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룻기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참된 믿음과 순종을 올바로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굉장히 신비롭고 초월적인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를 향해 끊임없이 ‘일상을 살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감당 못할 거창한 희생과 헌신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기인에 가까운 금욕과 자기 절제를 바라지도, 결벽적인 도덕성을 강요하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오늘 본문이 기록한, 한 아기가 그들에게 오기까지 펼쳐진 이야기처럼, 날마다 우리 눈앞에 놓인 일상을 소중히 가꾸길 여기길 바라십니다.


몇 년 전, 진료 중에 환자가 휘두른 흉기에 목숨을 거둔 임세원 교수님을 많은 분이 기억하실 겁니다. 뉴스를 듣고 마음이 아파 검색하다가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과거 우울증에 걸린 경험이 있었습니다. ‘정신질환을 앓는 정신건강전문의’, 이 끔찍한 삶의 모순이 그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했습니다.

하지만 교수님은 자신의 아픔을 애써 감추지 않았습니다. 환자들을 돕기 위해 진솔한 고백을 담은 책을 출간했습니다. 바로 이 책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입니다. 이 중에서 오랫동안 저에게 깊은 여운을 남긴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출구가 없는 답답한 상황에 놓인 사람들, 바꿔 말해 희망을 상실하고 우울해진 사람들은 일상의 많은 것을 포기하거나 중단한다. 일상을 바로 쳐다볼 수 없어서, 이런 절박한 상황에 내가 일상적인 일들을 하는 게 정상적이지 않은 것 같아서 그럴 것이다. 

그러나 일을 그만두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고, 취미생활을 끊고……. 그렇게 일상의 소중한 것들을 하나하나 정리하다 보면, 어느 순간 자신의 존재, 즉 삶 그 자체마저 중단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하지만 이런 경우, 상황을 점점 더 나쁘게 만드는 요인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상황을 비관적으로 느끼고 자신의 일상 여러 부분을 하나씩 그만두는 과정 자체가 우울감을 더 악화시킨다. 

우리 삶에 좋은 일만 있을 수 있을까? 그런 일은 천국에서나 가능할 것이다. 단언컨대, 현실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없다. 나쁜 일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으며, 때때로 우리는 지독하게 운 나쁜 일을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거듭 강조하다시피 나쁜 일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은 그 자체의 크기로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사건에 대한 나 자신의 반응으로 인해 결정된다.

보통 사람의 정신력은 그리 강하지 않다. 때문에 우리가 삶을 살아가며 적당한 수준의 사기를 유지하려면 반드시 긍정적인 경험이 필요하다. (중략) 일상에 즐거움을 주는 소소한 활동들, 이를테면   

친구와 전화로 수다 떨기 
동료들과 점심으로 특별한 음식 먹어보기
애완견과 공원 산책하기 
좋아하는 스포츠 팀 경기를 보며 응원하기 
밤 9시, 치킨을 배달시켜 손에 양념을 잔뜩 묻히며 먹기   

좋은 기분을 느끼는 순간순간이 곧 행복이라는 커다란 퍼즐의 한 조각, 한 조각들이다. 그 조각들이 모여 행복의 큰 그림을 완성할 수 있다

임세원 <죽고 싶은 사람은 없다> 中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다시 말씀드립니다. 일상을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무엇보다 일상을 일구고 가꾸고 지켜내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향한 주님의 뜻은 누가 봐도 화려한 업적이나 성과 혹은 극적인 체험이나 간증보다, 지겹게 반복되는 뻔하디 뻔한 매일 삶 속에 생명력 있게 흐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초라하고 비참하고 눈물겨운 나날이야말로, 도무지 부정할 수 없는 나 자신의 처절한 한계와 결핍과 마주하는 하루하루야말로, 복음을 깨달아 누리고 실천하는 삶의 가장 근본적인 토대입니다. 더 없이 드높고 찬란한 하나님 나라를 가슴에 품을수록 우리 발은 더욱더 굳게 땅을 딛고 있어야 합니다. 비장하게 움켜쥔 주먹을 내려놓고 부드러운 사랑의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 가운데 하나님 마음을 품고 연약한 이웃을 향한 섬김과 나눔을 묵묵히 실천해야 합니다.

우리의 그 모든 일상 조각들이 하나하나 모여, 하나님 나라의 위대한 그림을 완성한다는 진리를 분명히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것이 바로 한 아기 ‘오벳’이 단지 룻의 평범한 아들로 그치지 않고 나오미의 기업 무를 자이자 다윗의 할아버지임을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까지 거듭 강조하며 분명히 전해주는 이유입니다.

오벳이 나오미의 품에 안긴 후 약 천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 한 아기가 태어났습니다. 출생은 누구에게나 경이로운 사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 아기를 둘러싼 상황은 뭔가 기이합니다. 탁월한 학식과 지혜를 가진 동방 박사들이 찾아와 경배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대받던 목자들도 그 아기에게 찾아와 찬송하였습니다. 그를 향해 천사들이 온 우주를 울리는 아름다운 찬양을 드렸습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헤롯 왕궁이 공포에 잠겨 끔찍한 폭력을 저질렀습니다.

이처럼 이 땅에 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은 삶의 시작부터, 인생의 모든 높이와 깊이와 넓이를 아우르셨습니다. 그리고 저잣거리에서 사람들과 함께 부대끼며 치열한 일상을 살아가셨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부활 하시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렇게 창세기에서 룻기를 거쳐 온 인류가 그토록 갈망하며 기다린 메시아가 바로 당신이심을 명백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나의 유일한 구세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그분을 내 일상의 주인으로 모심을 의미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행하시고 룻기가 알려주듯이 날마다 일상을 일구어 가며 그 안에 담긴 복음의 본질을 발견하고 전하는 삶을 뜻합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마음 깊이 품으시기 바랍니다. 그리하여 그 어떤 시련에도 믿음으로 걸어가는, 일상의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하나님.
때때로 살아가며, 사사시대와 같은 위기와 혼란을 마주하고는 합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룻과 보아스가 그러했듯이 진리를 따라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길 다짐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섬김과 나눔을 결코 잊지 않으시고 그것을 통하여 귀한 생명의 열매를 맺어주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 가운데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을 사랑으로 품고 섬기는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되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일상을 넘어 일상 가운데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3년 12월 11일 월요일

목회와 균형(스쿼트를 배우며)

 


오늘 헬스장에서 트레이너분께 스쿼트를 제대로 배웠다. 그러면서 흥미로운 사실을 다시 확인했다. 예전에 스쿼트에 관해 다음과 같은 설명을 흔히 들었다. 바로, "무릎이 발끝보다 더 나오면 안 된다."이다. 그동안 이걸 의식하며 집에서 스쿼트를 했다. 하지만 이건 '옛날 상식'이다. 지나치지만 않으면 된다. 전체적인 자세와 균형이 더 중요하다. 이미 낡은 이론을 너무 의식하면 오히려 제대로 운동할 수 없다. 불현듯 목회 현장에서 겪었던 여러 씁쓸한 상황이 떠올랐다. 몇몇 얼굴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비유하면 이렇다. "무릎이 발끝보다 더 나오면 안 된다"와 같은 이야기를 무척 비장하게 자주 말했다. 다른 사람이 하는 말을 전혀 듣지 않았다. 헛웃음 나는 소신을 가르치려 들기 좋아했다. 그러면서 정작 전반적인 운동 체계는 전혀 관심 없었다. 대신 특정 자세, 그것도 잘못된 동작 하나에만 지나치게 집착했다. 심지어는 그 틀린 운동 동작조차 제대로 못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에게는 핏대를 높이며 상식 이하의 무례한 언행을 보이곤 한다. 치명적인 열등감과 낮은 지적 능력과 부적절한 권위 의식이 빚어낸 결과다. 영혼이 뒤룩뒤룩 비대해 벌어진 끔찍한 비극이다. 그들을 떠올릴 때마다 화나기보다 점점 딱하고 안쓰럽다. 모든 운동 자세를 다 완벽히 소화할 순 없다. 하지만 꾸준히 배우고 자기를 돌아보며 땀을 흘리고 싶다. 마찬가지로 목회도 그렇게 하고 싶다. 적어도 영혼이 불쌍한 사람은 되지 말자. 소름 끼치도록 소스라치게 무서운 일이다.

사진 출처: Unsplas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