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5월 28일 수요일

룻기 4장 1~12절 "이름이 남겨질 때와 지워질 때"

2025년 5월 28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룻기 4장 1~12절 "이름이 남겨질 때와 지워질 때"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2 보아스가 그 성읍 장로 열 명을 청하여 이르되 당신들은 여기 앉으라 하니 그들이 앉으매
3 보아스가 그 기업 무를 자에게 이르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온 나오미가 우리 형제 엘리멜렉의 소유지를 팔려 하므로
4 내가 여기 앉은 이들과 내 백성의 장로들 앞에서 그것을 사라고 네게 말하여 알게 하려 하였노라 만일 네가 무르려면 무르려니와 만일 네가 무르지 아니하려거든 내게 고하여 알게 하라 네 다음은 나요 그 외에는 무를 자가 없느니라 하니 그가 이르되 내가 무르리라 하는지라
5 보아스가 이르되 네가 나오미의 손에서 그 밭을 사는 날에 곧 죽은 자의 아내 모압 여인 룻에게서 사서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야 할지니라 하니
6 그 기업 무를 자가 이르되 나는 내 기업에 손해가 있을까 하여 나를 위하여 무르지 못하노니 내가 무를 것을 네가 무르라 나는 무르지 못하겠노라 하는지라
7 옛적 이스라엘 중에는 모든 것을 무르거나 교환하는 일을 확정하기 위하여 사람이 그의 신을 벗어 그의 이웃에게 주더니 이것이 이스라엘 중에 증명하는 전례가 된지라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9 보아스가 장로들과 모든 백성에게 이르되 내가 엘리멜렉과 기룐과 말론에게 있던 모든 것을 나오미의 손에서 산 일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고
10 또 말론의 아내 모압 여인 룻을 사서 나의 아내로 맞이하고 그 죽은 자의 기업을 그의 이름으로 세워 그의 이름이 그의 형제 중과 그 곳 성문에서 끊어지지 아니하게 함에 너희가 오늘 증인이 되었느니라 하니
11 성문에 있는 모든 백성과 장로들이 이르되 우리가 증인이 되나니 여호와께서 네 집에 들어가는 여인으로 이스라엘의 집을 세운 라헬과 레아 두 사람과 같게 하시고 네가 에브랏에서 유력하고 베들레헴에서 유명하게 하시기를 원하며
12 여호와께서 이 젊은 여자로 말미암아 네게 상속자를 주사 네 집이 다말이 유다에게 낳아준 베레스의 집과 같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라


예배로 나아오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삶의 여러 고난과 염려 가운데 하나님의 따스한 은혜가 가득 하시길 소망합니다.

방금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보아스가 나오미와 룻을 돕기 위해, 어느 친척과 율법 절차를 밟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오랫동안 교회를 다니신 분들에게는 무척 익숙한 장면일 겁니다. 그런데 솔직히 이 내용이 정확히 이해되십니까? 저는 예전에 어떤 계기가 있어 이 본문을 오랜 시간 붙잡고 씨름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결론은 ‘잘 모르겠다.’입니다.

대충 쉽게 넘어가서 그렇지, 여기에는 너무나 많은 난제와 논쟁거리가 있습니다. 나오미는 먹을 게 없어 부득이 며느리를 시켜 남의 밭에서 이삭을 줍게 했습니다. 그런 그녀가 팔려고 내 놓았다는 그 땅의 실체는 무엇일까요? 율법에 따라 친척으로서 감당해야 할 책임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요? 그리고 대체 그 의무가 나오미의 며느리인 룻을 아내로 맞아들이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하나하나 따져보면 이해하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룻기가 다루고 있는 이 모든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는 것이 무척 난감합니다.

이처럼 문제가 복잡할수록 해결을 위해서는 먼저 명확한 본질에 집중해야 합니다. 룻기 해석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룻기가 ‘이름’이라는 주제를 매우 특별하게 다룬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룻기는 그 어떤 성경보다 이름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따라서 이야기의 절정에 이르러 이름에 대한 언급을 거듭 반복합니다. 

먼저 본문 5절을 보면, 보아스는 친척에게 룻을 아내로 맞아들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죽은 사람의 ‘이름’을 세우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10, 11절에 의하면, 보아스는 성문 앞에서 다른 친척과 모든 공적 절차를 마치고 결과를 선포하면서 ‘이름’을 두 번이나 연거푸 언급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보아스를 향해, 그 자리에 증인으로 모인 마을 사람들이 그의 ‘이름’이 명예롭게 알려지길 축복합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본문 다음에 이어지는 4장 14절에 보면, 룻이 낳은 아기에게 마을 여인들이 복을 빌어줍니다. 앞서 보아스가 성문에서 받은 축복 내용과 마찬가지로 그 아이 또한 ‘이름’을 널리 떨치게 되길 기원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아기의 이름 ‘오벳’을 누가 지어주었는지 아십니까? 누굴까요? 아버지 보아스? 어머니 룻? 할머니 나오미? 모두 아닙니다. 17절에 의하면, 아기의 이름을 동네 여인들이 지어주었습니다. 룻기의 주제를 선명하게 드러내는, 성경 속 유일한 장면입니다. 이 맥락 속에서 ‘다윗’이라는 위대한 이름이 등장합니다. 구약 원문에서 룻기의 가장 마지막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다비드>, 즉 다윗입니다. 룻기는 다윗의 이름으로 이 놀랍고 아름다운 이야기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이렇듯 룻기는 성경 속 그 어느 책보다 ‘이름’에 대해 신중하게 접근합니다. 왜냐하면, 옛 사람들에게 이름은 단지 한 사람을 향해 부르는 호칭으로 그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의 가장 내밀하고 본질적인 존재 자체를 뜻합니다. 다른 사람이 함부로 흔들 수 없는, 진정한 인격을 가리킵니다. 따라서 이름은 반드시 후손들에게 기억되고 전해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주저 없이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바로 룻기가 알려주는 건강한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이를 유념하며 오늘 본문이 두 사람의 이름을 매우 대조적으로 대한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어느 친척 그리고 보아스 입니다. 먼저, 보아스와 성문에서 마주했던 그 친척의 이름을 끝내 알 수 없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합니다. 별거 아닌 걸로 쉽게 넘길 수도 있습니다. 사실 성경에는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에도 정작 그 이름은 모르는 사람이 무수히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익명의 친척을 바라보는 성경의 시선은 단순하지 않습니다. 매우 싸늘합니다.

왜 그럴까요? 그 친척은 가족으로서 책임은 쉽게 저버리고 오로지 자기 재산을 지키는 데만 열중 했습니다. 더 정확히는 말씀에 담긴 하나님의 뜻보다는 돈을 더 소중하게 여겼습니다. 

그러한 삶의 태도는 보아스의 주도면밀한 대화법을 통해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그가 친척에게 건넨 제안은 크게 두 부분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처음에는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의 땅 이야기만 했습니다. 사사시대 베들레헴 마을에서 희년법이 어떻게 실행되었는지는 구체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 분명 책임을 맡은 친척이 어느 정도 손해를 감수해야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아마도 길게 보았을 때는 그 친척에게도 어느 정도 이익이 돌아왔을 것입니다. 게다가 마을 사람들의 이목을 무시하기 어려웠기에, 설령 밑지는 계약이라 할지라도 그가 감수할 만한 수준은 되었을 겁니다.

그런 까닭에 그 친척은 긴장을 풀고 선뜻 책임을 지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보아스는 그에게 나오미와 관련한 모든 진실을 공개합니다. 바로 며느리, 모압 여인 룻의 존재입니다. 그녀를 아내로 맞아 아이를 낳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막대한 양육비용이 소요됩니다. 게다가 그 아이의 호적은 자기가 아닌 죽은 엘리멜렉의 이름으로 이어집니다. 결국 그에게 아무런 이득이 없습니다. 철저히 희생만 요구당할 뿐입니다.

그러자 그 친척은 지금껏 그나마 지켜왔던 체면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발끈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을 확고히 거부합니다. 본문 8절 함께 읽겠습니다.

8 이에 그 기업 무를 자가 보아스에게 이르되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하고 그의 신을 벗는지라

그 친척은 성문 앞에서 모든 절차를 마치며 보아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너를 위하여 사라” 얼핏 듣기에 상당히 점잖은 표현입니다. 하지만 구약 원문에서 이 문장의 맥락과 분위기는 너무나 싸늘합니다. 그런 까닭에 “너나 사라!”라고 의역하는 학자도 있습니다. 상당히 일리있는 주장입니다. 그만큼 그의 태도가 매우 신경질적이고 예민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때, 보아스가 그 행동을 의도적으로 유도했다는 사실을 주의해야 합니다. 그는 충분히 반응을 예상했습니다. 좁은 마을 공동체에서 오랜 시간 가까이 지내며, 그의 성품과 가치관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 친척은 재산 축적을 삶의 최우선 순위로 여겼습니다. 중요한 선택의 순간마다 돈을 기준으로 삼았습니다. 

사실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며 돈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사람은 저를 포함해 아무도 없습니다. 문제는 재물에 대한 그 친척의 어리석은 집착입니다. 그 결과 물질을 손에 들려주신 주님의 부르심에 귀를 막았습니다. 힘겨운 가난으로 고통 받는 가족의 아픔에 눈을 감았습니다. 희년법에 담긴 놀라운 은혜를 무시했습니다. 따라서 그가 부린 욕심의 파장은 단지 한 개인의 내면에만 머물지 않았습니다. 한 가정을 넘어, 공동체를 향해 심각한 위기를 조성했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핵가족을 넘어 1인 가정이 보편화 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배경을 이루는 고대의 대가족 사회는 그렇지 않습니다. 가족 개념이 친족에 머물러 있지 않습니다. 현대인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넓은 범위를 가집니다. 지파를 넘어 온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언약 아래 한 가족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말 성경에서 편의상 ‘친척’으로 번역한 히브리어 단어 대부분은 직역하면 ‘형제’라는 뜻입니다. 구약 성경은 형제와 친척을 크게 구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 이름 모를 친척은 형제로서 주어진 의무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눈앞의 가족을 넘어서는, 진정한 가정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지치고 상한 이들을 향한 주님의 뜻에 전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을 회복시키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무시했습니다. 

가난하고 젊은 여자 룻이 위험을 무릅쓰고 거친 남정네들 사이를 오가며, 이삭을 줍는 고단한 현실에 함께 아파하지 않았습니다. 이방 땅에서 남편과 두 아들을 잃고 돌아와, 그 이름을 이어줄 자손이 없는 눈물겨운 절망에 공감하지 않았습니다. 대신 오로지 돈 밖에 몰랐습니다. 그저 자기 재산을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어쩌면 그는 성문에서 집으로 돌아가 안도의 한숨을 내 쉬었을지도 모릅니다. 마침 바보처럼 후덕한 보아스 덕분에 심각한 위기를 넘겼다고 여겼을 겁니다. 재산을 무사히 지켰을 뿐만 아니라, 큰 창피도 겪지 않았다고 안심했을 것입니다.

사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습니다. 신명기 25장 9절에 기록된 율법에 따르면, 형제의 이름을 이어가는 의무를 행하지 않는 자에게 치욕적인 형벌이 공개적으로 시행됩니다. 피해를 겪은 과부가 마을 장로들 앞에서 그의 신발을 벗기고 얼굴에 침을 뱉습니다. 그를 가리켜 “그의 형제의 집을 세우기를 즐겨 아니하는 자”라고 동네 사람들을 향해 선언합니다.

룻기의 그 친척 역시 이러한 율법을 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문 앞에서 어떤 처벌도 받지 않았습니다. 마치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듯, 순탄하게 넘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그는 미처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가장 치명적인 심판을 받았습니다. 무엇일까요? 그의 이름이 지워졌습니다.

분명 그 친척에게도 이름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후대 사람들은 끝내 그 이름을 알 수 없습니다. 룻기는 단지 그의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정도로 머물지 않습니다. 철저히 은폐합니다. 마치 그가 애초에 이 세상에 존재 하지 않았던 것처럼 이름을 제거해 버렸습니다. 과장이 아닙니다. 관련해서 룻기 4장 1절을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 보아스가 성문으로 올라가서 거기 앉아 있더니 마침 보아스가 말하던 기업 무를 자가 지나가는지라 보아스가 그에게 이르되 아무개<히, 플로니 알모니>여 이리로 와서 앉으라 하니 그가 와서 앉으매

보아스는 지난 밤 타작마당에서 룻과 맺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성문에 올라가, 문제의 그 친척을 발견했습니다. 이 장면을 묘사하는 룻기 기록 방식을 유심히 봐야합니다. 이때, “보아스가 그 사람을 불렀다.”라고, 보아스의 동작과 행동을 설명하지 않습니다. 마치 따옴표를 넣듯이 일부러 명칭을 직접 인용합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문장 안에 정작 그의 이름은 없습니다. 그 대신 뭐가 적혀 있죠? “아무개여!”라는 이상한 호칭입니다.

이 ‘아무개’에 해당하는 독특한 히브리어는 <플로니 알모니>입니다. 굳이 직역하자면 ‘어떤 무엇’(such a one)정도로 옮길 수 있습니다. 구약 성경에서 본문을 포함해 단 3번만 나오는 매우 희귀한 표현입니다. 그것도 하나는 사물(삼상 21:3), 다른 하나는 장소(왕하 6:8)를 가리킵니다. 해당 구절에서 각각 ‘아무거나’, ‘아무데나’라는 의미로 사용 되었습니다. 사람을 지칭하는 경우는 본문이 유일합니다. 이렇게 난해한 까닭에 개역개정 성경은 ‘아무개’라고 번역 했습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보아스가 많은 사람이 오가는 성문 앞에서 그 친척을 향해 실제로 <플로니 알모니>라고, “어떤 무엇아!” 혹은 “아무개야!”라고 불렀을 리가 없습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하지만 룻기는 그의 이름을 무가치한 대상으로 여깁니다. 마치 공중파 TV에서 비속어가 나올 때 “삐~”소리로 음소거 처리 하듯이, 그의 이름을 지워버립니다. 이와 같은 세밀한 어휘사용에 룻기 저자의 명백한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물론 당사자는 모릅니다. 그렇지만 그는 성경에서, 본래 불려야 할 이름이 사라지는 엄중한 처벌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묵상하며 문득 떠오른, 옛 현인의 가르침이 있습니다. 도덕경 73장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천망회회 소이불실”(天網恢恢 疏而不失), “하늘의 그물은 너무나 넓어 성글어 보여도 아무도 놓치지 않는다.”라는 뜻 입니다. 그 친척은 당대에는 주변 사람들에게 처세에 능한 사람으로 평가 받았을지 모릅니다. 약삭빠르게 처신해 위기를 넘겨 여유를 누린 사람으로 인정 받았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에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하여 어떤 면에서 그는 가장 치명적인 심판을 받고 말았습니다.


반면에 보아스의 이름은 그 친척과 명백히 대조적으로 기록됩니다. 앞서 자세히 살펴본 것처럼, 그 날 성문에서 맺은 거래는 누가 봐도 그에게 상당히 손해입니다. 사실 철저한 약자인 이방 여인 룻의 형편 따위는 그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습니다. 전날 밤, 아무도 안 보는 들판에서 맺은 약속쯤이야 얼마든지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마을 공동체 안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가진 보아스에게 누구도 감히 항의하거나 비난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보아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힘을 결코 함부로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내려 놓았습니다. 굳이 번거롭게 다른 친척의 양보를 받아내면서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책임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간혹 룻기를 삼류 로맨스 소설처럼 여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유한 중년 남성인 보아스가 젊고 예쁜 룻을 보고 반해서 손해를 무릅쓰고 사랑을 이루어 냈다고 해석하기도 합니다. 

명백한 오해입니다. 룻기는 그렇게 단순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복잡다단하고 치열한 현실을 반영합니다. 보아스가 감수한 막대한 희생을 보여줍니다. 재정적인 이익과 손해의 측면에서 보면, 오히려 그 친척이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게다가 정세가 불안했던 사사시대에 이스라엘과 모압은 긴장 관계에 놓여 있었습니다. 따라서 모압 여인과 혼인하여 아기를 낳는 건 상당히 위험한 결정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보아스는 어려움에 빠진 사람들을 돕는 일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희년 법에 따라 공동체를 회복시키는 사명 앞에 머뭇거리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참 생명을 가장 구체적으로 드러내는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이름을 성경이 기록한 방식을 주목해야 합니다. 보아스는 그 이름 모를 친척과는 정반대로 메시아의 족보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룻기의 마지막 두 구절인 4장 21~22절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21 살몬은 보아스를 낳았고 보아스는 오벳을 낳았고 22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을 낳았더라

보아스는 룻기에서 단지 등장인물로만 언급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위대한 임금인 다윗의 이름으로 끝맺는 족보에 두 번이나 거듭 이름이 나옵니다. 즉, 보아스는 베들레헴 마을의 유능하고 인자한 아저씨로 동네 사람들의 기억에만 머물다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다윗과 나란히 이름이 언급되는 훌륭한 어른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오벳은 보아스와 룻이 낳은 아들이긴 하지만 앞서 확인한 바와 같이 엘리멜렉의 대를 잇는 인물입니다. 엄밀하게 율법 기준으로 따지면, 오벳은 족보상으로는 보아스의 아들이 아닙니다. 원칙대로는 엘리멜렉과 나오미의 아들이자, 룻의 첫 남편인 말론의 아들로 기록되어야 합니다. 그 이름 모를 친척이 책임을 거부한 가장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그런데 왜 룻기는 마지막 단락에 이르러, 성문 앞에서의 치열한 논의와 정반대로 결론지었을까요?

이것은 룻기를 둘러싼 가장 치열한 논쟁 거리 중 하나입니다. 저 역시 이를 두고 오랫동안 깊이 고민하였습니다. 그러다 여러 연구를 참고하여 마침내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보아스가 살던 사사시대에는 분명 오벳이 말론의 아들로 여겨졌을 것입니다. 아마도 당시 족보에는 율법에 따라 기록되었을 겁니다. 

그러나 룻과 보아스의 아름다운 이야기가 율법의 문자를 뛰어 넘어 오랜 세월을 지나 살아남았습니다. 수백 년이 지나 바벨론에서 비참한 포로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위로와 희망을 안겨 주었습니다. 그 이야기를 계속 전하기 위해 기록으로 남기기 시작했습니다. 결론에 이르러 이름과 이름이 이어지는 족보에 다다랐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창세기를 비롯한 다른 구약 성경의 족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듯이, 성경 속 족보는 엄밀하게 정확한 가계 정보를 보여주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드러내는 도구입니다. 따라서 맥락과 의도에 따라 다양하게 변형됩니다. 

그런 까닭에 룻기를 최종 완성한 편집자들은, 엘리멜렉의 아들 말론이 아니라 보아스를 오벳의 진정한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그를 다윗의 증조할아버지로 인정하였습니다. 그의 감격적인 헌신을 새로운 족보에 새겨 넣었습니다. 마침내 따뜻한 사랑이 싸늘한 문자를 이겼습니다. 치열한 희생이 완고한 규칙을 뛰어넘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것으로 끝이 아닙니다. 마태 공동체가 이 땅에 오신 주님의 삶과 가르침을 복음서로 정리하였습니다. 그 첫 장을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합니다. 거기에 룻기의 족보를 인용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 5절과 6절 상반부를 읽어 드리겠습니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6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보아스는 룻과 함께, 다윗의 할아버지인 이새를 낳은 오벳의 아버지로, 성경에 다시 한 번, 주님의 거룩한 족보에 등장합니다.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가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모범적으로 앞서 실천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놀라운 헌신과 희생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무엇보다 선명하게 드러내 보였기 때문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는 본문 말씀을 통해 깨닫게 됩니다. 보아스에게 책임을 떠넘긴 그 친척처럼, 이름에 담긴 누군가의 인격과 존엄을 가볍게 여긴 사람은 결국 자신의 이름이 지워지는 치욕을 겪게 됩니다. 반면에 보아스처럼 다른 사람의 이름을 소중히 여기며 그 어떤 어려움에도 맡은 바 소임을 묵묵히 지키는 사람에게는 그가 전혀 상상할 수 조차 없었던 영광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므로 보아스는 단지 나오미와 룻, 가련한 두 과부의 인생만 구하지 않았습니다. 고된 삶의 현실 속에 아파하며 회복을 갈구하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눈물겨운 희망을 보여 주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진정한 기업 무를 친척으로, 참된 보아스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름이 사라지고 뺏긴 이들을 사랑으로 돌보셨습니다. 저마다의 들판에 외롭게 던져진 모든 이들을 당신의 생명조차 아끼지 않고 구하셨습니다. 우리의 이름을 따뜻하게 부르시며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시고 완성하셨습니다.

부디 저와 여러분 모두가 보아스와 같은 신앙의 향기를 지니길 축복합니다. 때로는 우리의 이름이 세상 속에 파묻힌 것 같은 순간이 있습니다. 내 존재가 현실이 짓밟히고 짓이겨 진 것처럼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위로와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 어떤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품고 묵묵히 섬김과 사랑을 실천할 때, 주님은 그런 우리의 이름을 당신 마음에 소중히 새기실 줄 믿습니다. 그 믿음을 굳게 다짐하며 참으로 승리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생명의 주 하나님
선을 행하고 나누길 좋아했던 보아스의 위대한 신앙을 마음에 새깁니다. 동시에 그와 정반대로 재물에 소망을 두었던 어느 이름 모를 친척의 어리석은 탐욕을 발견합니다. 하나님께서 보아스의 이름은 성경 안에 찬란하게 새기시고 그 친척의 이름은 지우신 뜻 앞에 겸손히 자신을 돌아봅니다. 주님께서 원하고 바라시는 나눔과 섬김을 신실하게 이루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첨언.

이 설교는 내게 각별한 의미가 있다.
내 석사 논문을 기반으로 원고를 작성했기 때문이다.

내게 구약학 석사 과정은 다른 무엇보다 설교자로서 말씀의 본질을 붙잡는 태도를 훈련하는 기간이었다.
특히나 지도 교수이신 김진명 선생님께서 손수 본을 보이신 모습을 통해 더욱 그러했다.

그 덕분에 룻기를 깊이 묵상하고 연결하며 깊은 위로와 깨달음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신기하게도, 훗날 제안 받은 집필 주제인 "하나님의 이름"과도 연결된다.

코스웍과 논문 작성, 모두가 벅차고 힘겨웠지만 그 덕분에 많은 걸 배우고 성장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나를 계속 훈련 시키시고, 당신의 선한 뜻에 맞게 사용하실 줄 믿는다.



2025년 5월 16일 금요일

사도행전 10장 1~16절 “낯선 하나님의 부르심”

2025년 5월 16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10장 1~16절 “낯선 하나님의 부르심”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3 하루는 제 구 시쯤 되어 환상 중에 밝히 보매 하나님의 사자가 들어와 이르되 고넬료야 하니
4 고넬료가 주목하여 보고 두려워 이르되 주여 무슨 일이니이까 천사가 이르되 네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상달되어 기억하신 바가 되었으니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7 마침 말하던 천사가 떠나매 고넬료가 집안 하인 둘과 부하 가운데 경건한 사람 하나를 불러
8 이 일을 다 이르고 욥바로 보내니라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15 또 두 번째 소리가 있으되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 하더라
16 이런 일이 세 번 있은 후 그 그릇이 곧 하늘로 올려져 가니라


하루의 시작을 주님께 내어 드리는 성도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성경을 읽을 때 각 책을 대표하는 구절을 파악하는게 중요합니다. 사도행전의 경우 어떤 말씀이 이 책 전체의 핵심을 보여줄까요? 여러 의견이 있겠지만, 단연코 1장 8절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부활 하신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남기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복음이 가진 무한한 확장성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서의 삶과 가르침을 통해 구약 성경의 핵심 사상과 전통을 이어가셨습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구원의 대상을 파격적으로 넓히셨습니다. 더욱 정확하게는 창조주 하나님이 본래 뜻하신 구원의 광활한 속성을 몸소 확증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만 구원하신다고 오랫동안 믿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육체적 혈통을 타고났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당신의 이름을 믿고 따르는 모든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드넓은 품에 안길 수 있다고 선언하셨습니다. 복음은 더 이상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힘차게 뻗어나갑니다.


사도행전은 이와 같은 광활한 선교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기록한 책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본문 앞에 있는, 지난 월요일에 함께 읽은 9장에서는 이방인의 사도로 부름 받은 바울의 극적인 회심과 복음 전도를 소개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바울은 기독교 신앙공동체에서 아직 비주류 외부인입니다. 많은 존경을 받고 있는 바나바의 보증이 있긴 했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교인들의 마음에는 상당한 경계심이 남아 있었습니다.

게다가 그 때는 아직 기존의 유대교와 기독교의 차이가 불분명하던 시대입니다. 사도행전은 물론이고 신약의 여러 서신서들을 통해서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 당시 상당수 기독교인들은 여전히 구약 성경의 사고방식으로 예수님의 복음을 이해했습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도 예수님의 동생 야고보를 중심으로 한, 예루살렘의 유대계 기독교인들이 더욱 그러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까지 뻗어간다는 진리를 이해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심지어 노골적인 거부감을 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울과 같은 외부인이 아니라 모든 교인이 권위를 인정하는 핵심 리더의 전적인 인정이 필요 했습니다. 그 적임자가 바로 베드로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행전의 저자는 바울의 회심에 이어, 베드로의 획기적인 인식 변화를 의도적으로 연달아 보여줍니다. 이러한 의도를 위해 등장시킨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고넬료입니다. 본문 1절 다시 한 번 더 다같이 읽겠습니다.

1 가이사랴에 고넬료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달리야 부대라 하는 군대의 백부장이라

본문 1절은 고넬료의 사회적 지위를 알려줍니다. 그는 가이사랴에 주둔 중인 로마군 장교입니다. 로마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을 기반으로 제국을 확장시켜 왔습니다. 그런 로마에서 해외 분쟁지역에 파병한 장교는 당대 최고 엘리트로서 상당한 부와 명예를 누렸습니다. 게다가 일반적으로 몇 년 안에 고국으로 돌아가 상당히 높은 위치에 오르게 됩니다. 그것은 곧 그가 복음 전파에 매우 유용한 영향력을 가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본문 1절은 바로 그와 같은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기록합니다.

놀라운 점은 그러한 로마 장교가 하나님을 경외하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당시 이방인들 가운데에는 로마의 다신교 문화에 환멸을 느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다신교와 정반대의 유일신 신앙을 가진 유대교에 호감을 가지고 회당 예배에 참였습니다. 고넬료가 바로 그런 경우 였습니다.


본문 2절은 그의 신앙을 소개합니다.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2 그가 경건하여 온 집안과 더불어 하나님을 경외하며 백성을 많이 구제하고 하나님께 항상 기도하더니

우리말 번역으로는 “하나님 경외”와 “백성 구제”와 “항상 기도하는 것”이 같은 무게를 가지고 나란히 이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헬라어 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 경외”가 상위 개념이고 “백성 구제”와 “기도”는 하위 개념입니다. 즉, 고넬료는 하나님을 경외하기 때문에, 그 결과로 약자들을 돕고 늘 기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 까닭에 천사 역시도 4절에서 그의 “기도와 구제”가 하나님 앞에 드려졌다고 말하였습니다.

이 대목에서 다시금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신앙은 수직적인 기도와 종교 생활만이 아닙니다. 그와 동시에 수평적인 나눔과 섬김의 균형을 갖춰야 합니다. 고넬료는 비록 로마인이었지만 회당 예배에 낭독된 율법을 통해 이와 같은 구약의 핵심을 정확히 이해했고 그것을 실천하였습니다. 그 결과 복음의 무한한 지평을 넓히는 역사적인 인물로 하나님께 쓰임 받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진실로 온전히 경외하시길 축복합니다. 율법적인 종교 생활에만 치우치거나, 혹은 지나치게 사회 봉사에만 열을 올리는 양극단의 오류를 물리치시길 바랍니다. 말씀을 온전히 읽고 묵상하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조화를 이루길 소망합니다. 그와 같은 아름다운 균형으로 진정 건강하고 폭넓은 신앙을 지켜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고넬료에 대해서 우리가 주의를 놓쳐서는 안 될 사실이 있습니다. 그는 아직 유대교인입니다. 그는 여전히 예수님을 모른 채 진리의 절반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에게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일방적으로 찾아 오셨습니다. 5~6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5 네가 지금 사람들을 욥바에 보내어 베드로라 하는 시몬을 청하라 6 그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유숙하니 그 집은 해변에 있다 하더라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베드로가 살고 있는 도시와 머무르고 있는 집 주인의 이름을 정확히 일러 주셨습니다. 그 곳으로 부하들을 보내라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고넬료로 하여금 베드로를 통해 예수님을 알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것은 거듭 말씀드리지만 아직 유대교 신앙에 갇혀 있던 그로서는 완전히 새로운, 낯선 진리와의 만남입니다.


이는 또한 베드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게다가 하나님께서는 더욱 충격적인 방식으로 그에게 무척 생소한 진리를 알려주셨습니다. 조금 길지만 9~1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9 이튿날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성에 가까이 갔을 그 때에 베드로가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가니 그 시각은 제 육 시더라 10 그가 시장하여 먹고자 하매 사람들이 준비할 때에 황홀한 중에 11 하늘이 열리며 한 그릇이 내려오는 것을 보니 큰 보자기 같고 네 귀를 매어 땅에 드리웠더라 12 그 안에는 땅에 있는 각종 네 발 가진 짐승과 기는 것과 공중에 나는 것들이 있더라 13 또 소리가 있으되 베드로야 일어나 잡아 먹어라 하거늘 14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속되고 깨끗하지 아니한 것을 내가 결코 먹지 아니하였나이다 한대

어느 날 베드로는 제 육시에 기도하려고 지붕에 올라갔습니다. 이것은 율법 전통에 따른 기도 시간입니다. 게다가 이 때 “제 육시”는 오늘날로 따지면 12시, 즉 정오입니다. 태양이 작렬 하는 서아시아에서 한낮에 지붕에 올라 기도하는 것은 너무나 힘겨운 일입니다. 이러한 베드로의 태도는 그가 여전히 유대교 경건 전통에 익숙해 있음을 보여줍니다.

그런 그가 기도 중에 환상을 보았습니다. 하늘에서 큰 보자기가 내려왔는데 거기에는 율법이 금지한 음식들이 담겨 있었습니다. 그런 음식들은 먹지 않는 것이 그동안 그에게 익숙한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에게 매우 생경하고 불쾌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바로 그 부정한 음식들을 먹으라는 명령입니다. 그 명령을 두고 베드로는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라고 무려 세 번이나 거부하였고 그럴 때마다 하늘에서는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네가 속되다 하지 말라”는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이렇게 세 번에 걸친 ‘반복’이 의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단호하고도 굳건한 의지 표현입니다. 익숙한 편견과 고정관념으로는 도무지 받아들일 수 없는, 주님의 확고한 뜻입니다.

분량상 읽진 않았지만, 이러한 환상의 의미를 사도행전 10장 17절 이하의 본문을 통해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고넬료와의 만남을 통해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렇듯 베드로와 고넬료의 만남은 두 사람 모두에게 있어 낯선 진리의 받아들이는 것을 뜻했습니다. 그리고 그 만남을 통해 복음은 더욱 본격적으로 혈통과 지역과 계급의 경계를 넘어 역동적으로 전파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러한 본문 속 장면은 안일하고 관성적인 신앙을 뒤흔듭니다. 신앙인으로서 분명히 지녀야할 중요한 태도가 있습니다. 바로 낯선 하나님을 맞아들일 용기입니다. 만유의 하나님께서는 결코 인간의 좁은 경험과 지식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사람의 그 어떤 무엇에도 얽매이지 않으시는 주님께서는 오늘도 새로운 얼굴로 다가오십니다. 때때로 그 얼굴에는 결코 예상치 못했던 고난의 상처가 남아있기도 합니다. 소름끼치게 여윈 뺨을 타고 시련의 눈물이 흘러내리기도 합니다. 그 얼굴로 너무나 당황스런 요구를 하십니다. 그런 주님을 향해 우리는 베드로처럼 “결코 그럴 수 없다고” 외치곤 합니다.

그렇지만 부디 명심하시길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먼저 십자가 위에서 낯선 하나님을 몸소 만나셨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대신해, 골고다 언덕 위에서 숨을 거두시며 하늘을 향해 울부짖으셨습니다. 극도의 공포와 고독을 통해 온 세상을 구원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서 가장 낯설고 추하고 끔찍한 복음 한 복판에 몸소 서 계셨기에 우리는 부활의 찬란한 생명과 영광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하루도 뜻밖의 방식으로 다가오는 저마다의 십자가를 기쁨으로 짊어지시길 바랍니다. 살아가며 도무지 예상 못했던 고난이 툭툭 다가오곤 합니다. 전혀 상상할 수 없던 시련이 덮쳐올 때가 있습니다. 그러한 인생의 시리도록 낯선 장면들이 너무나 아프고 허탈하게 합니다. 그렇지만 신실하신 하나님의 손길 아래, 그 모든 순간이 알알이 이어져 끝내 우리를 진정한 복음의 증인으로 바로 세울 줄 믿습니다. 이와 같은 진리 앞에 고개를 숙이며 이 시대의 고넬료이자 베드로로 참된 경건을 지켜나가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바라며 축복합니다.


기도
만유의 주 하나님
주님을 참으로 경외하기에 구제와 기도를 실천한 고넬료의 신앙을 본받기 원합니다. 기꺼이 낯선 하나님의 모습을 받아들여 열방을 향한 복음 전파에 걸음을 내디딘 베드로의 결단을 닮아가길 소망합니다.
편협하고 익숙한 고집으로 주님의 뜻을 제한하는 어리석음을 물리치게 하옵소서. 날마다 새롭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구원을 신뢰하며, 오늘의 아픔을 이겨내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5월 14일 수요일

사도행전 9장 19~31절 "용기와 위로의 복음"

2025년 5월 12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도행전 9장 19~31절 "용기와 위로의 복음"

19 음식을 먹으매 강건하여지니라 사울이 다메섹에 있는 제자들과 함께 며칠 있을새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25 그의 제자들이 밤에 사울을 광주리에 담아 성벽에서 달아 내리니라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28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29 또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고 헬라파 유대인들과 함께 말하며 변론하니 그 사람들이 죽이려고 힘쓰거늘
30 형제들이 알고 가이사랴로 데리고 내려가서 다소로 보내니라
31 그리하여 온 유대와 갈릴리와 사마리아 교회가 평안하여 든든히 서 가고 주를 경외함과 성령의 위로로 진행하여 수가 더 많아지니라


이 새벽, 주님께 나아온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아름다운 5월 봄 햇살과 같은 따뜻한 은혜가 모두에게 함께하시길 소망합니다.

오늘 본문은 복음의 본질과 실천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바울은 교회를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예수님을 만나고 눈이 멀었습니다. 아나니아는 사울의 눈을 뜨게 하라는 주님의 부름 받고 이를 실행하였습니다. 아나니아로서는 여러모로 위험하고 힘겨운 명령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그의 순종으로 말미암아 바울을 통한 위대한 선교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은 그렇게 극적으로 변화된 바울이 전한 복음의 내용과 그로 말미암은 고난을 기록하였습니다. 20절과 22절 다시 한 번 더 다같이 읽겠습니다.

20 즉시로 각 회당에서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먼저 20절에 따르면 바울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 하였습니다. 또한 22절에 의하면 바울은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였습니다. 이 두 구절을 통해 분명히 파악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사울이 주저 없이 즉각 전파하고 증언하였던 복음의 핵심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진리입니다.

이러한 그의 외침은 사실 우리에게 조금 식상할 수 있습니다. 오랫동안 교회에 출석하며 신앙 용어에 익숙한 현대 그리스도인으로서는 그리 새로울 게 없는, 뻔한 말로 들리기도 있습니다. 하지만 바울이 활동하던 시대에는 몹시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예수님의 삶과 죽음을 목격 한 사람들이 여전히 많이 살아있고,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의 경계가 흐릿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변방 지역의 천대받던 동네 출신의 목수로서 나무에 매달려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 시대 이스라엘의 일반적인 인식에서 그런 자는 주님께 저주를 받은 사람입니다.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거나 그리스도 일 수 없습니다. 특히나 과거 다윗 왕과 같은 강력한 전제군주로서의 메사아를 고대했던, 당시 유대교의 시각에서는 극심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로마제국의 입장에서도 얼토당토 않는 황당한 소리였습니다. 그들은 막강한 군사력과 거대한 행정력에 기반 한 제국의 평화를 선전하며 차츰 황제를 신성화했습니다. 로마에게는 황제야말로 진정 신의 아들이며 주님이었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은 그 시절 가장 격렬한 반 제국 혁명이 수시로 일어났던 곳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라는, 바울이 외친 원시복음은 제국의 질서를 위협하는 반란군의 불온한 구호로 들리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격렬한 반응이 사울에게 쏟아졌습니다. 21절과 22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21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22 사울은 힘을 더 얻어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언하여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먼저 21절에 보면 바울이 외친 복음을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였다”고 적었습니다. 그리고 22절에 의하면, 예수님의 관한 바울의 증언으로 “유대인들이 당혹스러워” 했습니다. 

이 뿐만이 아닙니다. 그는 더욱 심각한 위협을 겪습니다. 23,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23 여러 날이 지나매 유대인들이 사울 죽이기를 공모하더니 24 그 계교가 사울에게 알려지니라 그들이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까지 지키거늘

이 두 구절에 따르면 유대인들은 사울의 암살을 모의하고 그를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또한 29절에도 그를 향한 살해 계획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굉장히 놀랍고 두려운 상황입니다. 유대인들이 바울에게 느낀 엄청난 배신감과 분노의 결과입니다.

이렇듯 회심 직후 바울이 전파하고 증언했던 원초적인 복음으로 말미암아 많은 유대인이 놀라고 당혹해 했습니다. 그 결과 살해위협이라는, 몹시 공포스러운 상황에 놓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은 오늘날 비교적 안전한 환경에서 편하게 신앙생활 하는 우리의 안일함에 경종을 울립니다. 우리는 본문 앞에서 끊임없이 되물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고 고백하는 복음은 과연 세상을 놀라고 당혹스럽게 했던, 바울이 외친 진리의 핵심과 맞닿아 있습니까? 아니면 혹시 탐욕에 부합하는 감언이설은 아닐까요?

물론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나라의 복음은 결코 엄숙하고 비장한 의무가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성경이 알려주는 복음은 온갖 굴레와 억압에서 해방시키는 기쁨입니다. 그 분명한 결실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모든 죽음과 절망을 이기신 주님의 진정한 생명과 희망이 끝내 이룬 승리입니다. 부활은 온 우주를 찬란하게 휘감는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그러한 부활에 이르는 유일한 과정이 바로 십자가입니다. 십자가는 좀 더 많이 움켜쥐고 좀 더 높이 오르기 위해 추하게 몸부림치는 이 세상의 욕망과 필연적으로 어긋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말하는 핵심입니다. 따라서 그 진리에 새롭게 두 눈을 뜬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22~24절에 다음과 같이 기록합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22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그러므로 진리를 가슴에 품고 그것을 이루며 살아갈 때, 때때로 도무지 납득하기 힘든 고난이 찾아온다 할지라도 쉽게 절망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모든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십자가 복음으로 이끄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이러한 진리를, 목숨을 건 위험 속에서도 끝내 포기하지 않고 굳게 붙잡고 담대히 전했습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매우 혼란스럽고 모순적인 처지에 놓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바울은 예수님의 복음으로 말미암아 온갖 어려움을 겪었음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정작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 함께 할 수 없었습니다. 사도들이 여전히 의심의 눈으로 그를 경계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러한 그들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할 바는 아닙니다. 사람은 그리 쉽게 변하는 존재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복음을 향한 박해에서 순종으로, 한 사람의 가치관과 세계관이 완전히 바뀐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닙니다. 게다가 이 모든 것이 예루살렘 교회를 소탕하려는 모종의 음모로 볼 수도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바울은 자신의 모든 것을 내 던지며 예수님을 따랐지만 정작 그분의 제자 공동체에는 받아들여지지 못한 채 따돌림과 의심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그런 그를 도와 준 은인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그리고 바나바를 통해 복음을 온전히 믿고 따르는 사람들의 올바른 태도와 실천을 배울 수 있습니다. 본문 26~27절 함께 읽겠습니다.

26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27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사도행전 4장 36~37절에 잘 나와 있듯이 바나바의 본명은 “요셉”입니다. 하지만 매우 독특하게도, “위로의 아들”이라는 뜻을 지닌 별명인 “바나바”가 이름보다 더욱 널리 불려 졌습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그 별명에 담긴 그의 성품과 인격을 모두가 주저 없이 인정했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사실을 방금 읽은 말씀이 선명하게 드러내 보입니다. 사도들 역시 바나바의 인품을 진심으로 존경하며 그의 의견을 존중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나바가 직접 바울의 결백을 보증하자 마침내 비로소 바울은 교회 공동체에 속할 수가 있었습니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인들 역시 오늘날의 바나바로, 또 다른 “위로의 자녀”로 인정받으며 살도록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누군가 가진 신앙의 건강함은 단순히 그가 얼마나 열심히 교회 생활을 했느냐로 판단할 수 없습니다. 과연 그와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은 사람인지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웃을 위해 인내하고 섬기고 사랑하지 못하면서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성경 전체에서 연약한 이웃을 향한 하나님의 일관된 관심이 기록돼 있는 이유도, 예수님께서 율법을 요약하시며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대등한 위치에 두신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이는 또한 바나바가 한때 자신의 동료들을 가차 없이 억압했던 원수인 바울을 향한 초인적인 용서와 관용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즉, 바나바의 훌륭한 성품은 바울이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과 연결됩니다. 달리 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이시라는, 바울이 전한 복음을 진실로 내면 깊이 받아들이는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를 보여줍니다. 바로 진정한 위로의 사람으로 주위를 둘러보며 따뜻한 손길을 내밀어야 합니다. 그런 실천 가운데, 나 자신이 하나님의 무한한 용서와 사랑의 대상임을 분명하고 겸손히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오늘 하루, 복음의 본질을 고민하며 위로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특별히 우리 보다 약한 이들을 가슴에 품으며 좀 더 손해 보고 낮아지며 섬기는 삶을 살아가길 희망합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 모두의 믿음을 기억하시고 날마다 선한 은혜의 길로 인도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바울이 그 어떤 어려움에도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그리스도시라는, 복음의 핵심을 담대하게 전한 용기를 닮아가기 원합니다. 또한 십자가 사랑을 마음에 품고 위로를 베푼 바나바의 섬김과 실천을 따르기 원합니다. 
복음의 본질을 늘 영혼 깊숙이 간직하며, 그 뜻을 이루며 살아가는 승리교회 온 성도 되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4월 17일 목요일

바벨에 깔리다


오늘 아침, 벤치프레스를 하다가 바벨에 깔렸다. 운동을 시작하고 처음 겪는 상황이다. 새롭게 세트와 횟수를 구성하는 바람에 생긴 시행착오다. 무리해서 바벨을 밀어 올리다 결국 힘이 빠졌다. 다행히 다치진 않았다. 솔직히 창피한 마음이 더 컸다. 바로 맞은편 기구에서 누군가 운동하셨다. 그분이 허둥대는 내 모습을 보고 놀라셨다. 서둘러 상황을 수습했다. 당황스럽지만 왠지 모를 뿌듯함을 느꼈다. 자신을 칭찬했다. 그만큼 계속 나아가고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힘에 부쳐 중력에 짓눌릴 때가 있을 거다. 그 바람에 민망한 상황을 겪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다치기도 할 거다. 그래도 괜찮다. 나는 다시 일어나 호흡을 가다듬고 또다시 바벨을 밀어 올릴 거다. 매번 한계를 마주할 테지만 계속 포기하지 않고 도전할 거다. 내가 운동하는 이유다.

2025년 4월 7일 월요일

김진명 교수님






오랜만에 선생님을 찾아뵈었다.
선생님은 늘 그러하셨듯, 성경 구절을 풍성하게 인용하며 내게 다정하게 말씀하셨다.

"로마서 8장 28절 말씀을 명심하세요.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룹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게 가장 중요합니다.
하나님 사랑만 포기하지 않으면 결국 모든 게 선을 이룹니다."

이어서 연구실 벽에 걸린, 당신이 그린 그림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림을 그릴 때 바탕색, 구도, 수정 사항을 미리 구상하고 붓을 듭니다.
터치 하나하나에 다 의미가 있죠.
하물며 인생 전체를 그려가시는 하나님께서 목사님의 모든 상황을 사용하시어 선을 이루실 줄 믿고 기대합니다."

그런 다음 이번에 나온 저서에 서명해 선물 해 주셨다.
식사 자리에서도 내 얘기를 경청하시며 적절한 조언과 위로를 해 주셨다.
그뿐만 아니라 손수 수저를 놓아 주셨고, 국을 퍼 주셨다.

선생님은 한결같이 몸소 인격과 말씀의 본을 보여주신다.
뵐 때마다 뭉클한 감동과 함께 겸허히 가르침에 경청하게 된다.
여러모로 기꺼이 닮고 싶은 어른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다는 건 참 감사한 일이다.

선생님의 제자답게, 나 또한 누군가에게 참된 위로와 희망으로 안겨주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