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7일 수요일

창세기 17장 “전능하신 하나님”

2025년 12월 18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7장 “전능하신 하나님” 

어제 읽은 창세기 16장의 마지막 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16 하갈과 아브람 사이에 이스마엘이 태어날 때에, 아브람의 나이는 여든여섯이었다.

바로 다음절인 오늘 본문 17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불과 1절 사이에 13년의 세월이 훌쩍 지나갔습니다. 여든 여섯 살이었던 아브람이 구십 구세가 되었습니다. 더욱더 쇠약해진 노인이 되었습니다. 그 뿐만 아니라 여전히 이루어지지 않은 하나님의 언약에 마음이 무너져 내리며 내면에도 깊은 주름살이 잡혔을 겁니다. 그런 아브람을 향해 하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을까요? 1절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1 아브람이 구십구 세 때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너는 내 앞에서 행하여 완전하라

주님께서 당신을 이렇게 소개하십니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이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말씀이 아브라함에게는 어떻게 들렸을까요? 더 큰 상실과 좌절로 다가왔을 것입니다. 그토록 전능하신 하나님이 정작 당신이 약속하신 언약을 아직 이루어주지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이름을 바꾸면서까지, “여러 민족의 아버지”가 될거라는 주님의 말씀이 그에게는 전혀 위로가 되지 않았습니다. 때문에 매우 도발적인 반응을 합니다. 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7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으며 마음속으로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출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엎드려 웃었습니다. 기쁨으로 짓는 미소가 아닙니다. 쓰디쓴 냉소입니다. 꿈과 기대가 산산이 무너지고 부서진 노인이 할 수 있는 마지막 저항입니다. 그런 까닭에 18절에, 자조적으로 말합니다.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 그러자 하나님은 단호하게 내년에 사라가 낳을 이삭을 통해 언약을 이루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아브라함은 집안 모든 남자와 함께 할례를 행하였습니다. 철저히 무력한 순간입니다. 움직일 수 없이 그저 아파하고 신음할 뿐입니다. 이 상황이 그에게 어떻게 다가왔을까요? 너무나 큰 상징과 교훈을 안겨줍니다. 바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은 지극한 무력함을 통해 다가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 아브라함에게 당신을 가리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전능하심은 아브라함의 소원을 마법처럼, 그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식으로 즉각 이루는 권능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실망을 끼치고 좌절을 안긴, 철저한 절망과 무능의 얼굴을 하고 다가오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그러합니다.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에 비참한 모습으로 매달려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은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이 놀라운 복음을 마음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굳게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그 전능하심이 지닌 입체성을 성경으로 온전히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권능은 때로 너무나 쓰라리고 허무하고 불쾌하게 다가온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합니다. 주님의 전능은 지극히 무력하고 무능한 얼굴로 나타나는 진리를 품어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십자가로 드러나신 하나님의 참된 능력이 오늘도 우리를 새롭게 하며 진실로 살릴 줄 믿습니다. 그 믿음을 함께 고백하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전능하신 주 하나님
마치 아브람이 그러하였듯, 저희가 살아가며 경험하는 주님의 얼굴은 때로 너무나 무능하고 무심해 보일 때가 있습니다. 저희의 간절한 바람과 소망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는 냉기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하지만 철저히 무력한 모습으로 구원을 이루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봅니다. 하나님께서 행하시는 참된 구원은 힘겨운 공백을 통과한다는 진리를 깨닫습니다. 
그 믿음을 붙잡고 살아가며 겪는 그 어떠한 시련도 담대히 딛고 일어날 힘을 주시옵소서. 저희의 연약한 기대를 넘어서는 주님의 때와 방법을 신뢰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16일 화요일

창세기 16장 “살피시는 하나님”

2025년 12월 17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6장 “살피시는 하나님” 찬송가 365, 363장

어제 읽은 창세기 15장은 계속된 난임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아브람에게 다가오신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별을 마음에 품고 믿음을 지니고 의롭게 인정받은 아브람의 모습이 나옵니다. 성경에 기록된 눈부시게 위대한 장면입니다. 하지만 바로 다음 장인 오늘 본문에서 아브람은 아내 사래의 권유의 따라 이집트 출신 여종 하갈과 동침하였습니다.

분명 칭찬받은 믿음을 지녔으나 여전히 흔들리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그런 아브람을 함부로 비난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가 그러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성경은 그런 아브라함의 연약함과 현실 속 갈등을 그대로 보여주며 우리를 위로합니다. 동시에 그 결과 겪었던 거친 시련 또한 보여 줍니다.

하갈이 임신한 사실을 알고 여주인 하갈을 멸시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래는 가만히 있지 않고 하갈을 ‘학대’하였습니다. 여기서 ‘학대’에 해당하는 단어는 출애굽기에서 이스라엘 백성의 노예 생활을 묘사할 때도 등장합니다. 그만큼 하갈은 너무나 혹독한 핍박을 받고 무거운 배를 잡고 도망칩니다. ‘임산부 도망자’라는 가장 비참한 처지에 놓입니다. 

그런 하갈에게 하나님이 다가와 말을 거십니다. 8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8 이르되 사래의 여종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그가 이르되 나는 내 여주인 사래를 피하여 도망하나이다

하나님이 물으십니다. “하갈아 네가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가느냐” 쉽게 지나칠 수 있겠지만 너무나 중요한 대화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물론이고 고대 서아시아 문헌에서 신이 여성에게 이름을 부르며 말을 건네는, 유일한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그녀는 이른바 아브라함의 정통 족보에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심지어 아브라함의 불신앙을 드러낸 행동의 대상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하갈에게 다가와 아픔에 귀 기울이셨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낳을 아들의 이름을 ‘이스마엘’이라고 지어주셨습니다. “하나님이 들으심”이라는 뜻입니다. 구체적으로 주님께서 그녀의 고통을 들으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하갈은 자신이 입은 은혜를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13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하갈이 자기에게 이르신 여호와의 이름을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 하였으니 이는 내가 어떻게 여기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을 뵈었는고 함이라

하갈은 자신이 만난 하나님을 가리켜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역시도 오늘 우리에게는 별거 아닌 장면으로 쉽게 지나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서아시아에서 여성이 감히 하나님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행동이었습니다.

이처럼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하나님과 하갈 사이의 파격적인 만남과 대화를 소개합니다. 주님은 아브람과 그의 아들들만이 아니라 천대받고 학대당한 이방인 여성에게 다가오셔서 사랑으로 품어주셨습니다. 이러한 은혜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하나님께서 죄인을 살리시려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몸소 나무에 달려 저주받은 모습으로 숨을 거두셨습니다. 그러한 희생으로 온 세상을 구하셨습니다.

이를 통해 주님께서 베푸시는 사랑의 깊이와 넓이가 얼마나 무한한지를 거듭 깨닫습니다. 인간은 어리석은 기준으로 쉽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고 제한합니다. 심지어 구원과 신앙에 있어서도 함부로 누군가를 배제하고 밀어내고는 합니다. 그렇지만 본문은 우리에게 더욱더 커다란 마음으로 주위에 고통당하는 이들의 신음에 귀 기울이고 안고 보듬어 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주님은 바로 우리의 고통을 들으시는, ‘나를 살피시는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기도 가운데 내뱉는 신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하나님의 따스한 숨결을 느끼시길 바랍니다. 그 은혜로 말미암아 새 힘을 얻고 주님의 뜻을 따라 사랑을 이루고 전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저희 삶의 모든 아픔을 살피시는 하나님
임신으로 부푼 배를 부여잡고 도망치는 하갈처럼, 때로 저희도 끝없는 좌절과 절망 가운데 깊이 빠지곤 합니다. 그런 저희의 모든 신음을 주님께서 들으시고 응답하심을 믿습니다. 그 사랑에 감긴 무한한 넓이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진심으로 깨닫게 하여 주시옵소서. 받은 은혜를 명심하며 주위에 있는 소외되고 아파하는 이들에게 따뜻한 도움과 섬김의 손길을 건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15일 월요일

창세기 15장 “별처럼 새긴 믿음”

2025년 12월 16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5장 “별처럼 새긴 믿음” 

하나님께서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나타나 말씀 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 뿐만이 아니라 아브람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근거를 알려 주십니다. 바로 하나님게서 그의 방패이자 상급, 즉 ‘보상’이기 때문입니다. 언제 들어도 큰 위로와 희망을 주는 말씀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의문이 생깁니다. 현재 아브람은 두려운 상황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제 읽은 14장은 그가 거둔 놀라운 승리를 보여줍니다. 그 결과 많은 전리품을 챙겼고 살렘왕 멜기세덱의 축복까지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그를 향해 ‘두려워 하지말라’라고 말씀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적어도 겉으도 드러난 조건을 가리키는 말은 아닙니다. 사람들이 흔히 두려워하는 요소들, 이를테면 건강이나 재산에 문제는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브람은 무얼 두려워 했을까요? 아브람 스스로 답 합니다. 2~3절 함께 읽겠습니다.

2 아브람이 이르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 하나이까 나는 자식이 없사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이니이다 3 아브람이 또 이르되 주께서 내게 씨를 주지 아니하셨으니 내 집에서 길린 자가 내 상속자가 될 것이니이다

아브람은 곧바로 자기 후계 문제를 두고 이야기 합니다. 그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예전에 말씀 드린대로 고대에는 신에게 받은 저주로 여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그 시대 자녀가 없는 집은 입양하여 상속자를 세우는 일이 보편적이었습니다. 아브람 역시 흔한 풍속을 따라 다메섹 사람 엘리에셀을 세웠습니다. 그럼에도 마음 깊은 공허함이 찾아왔습니다. 분명 하나님께서 자녀를 약속하셨으나 여전히 묵묵부답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실망과 서운함이 아브람을 비롯한 모든 인류가 품은 두려움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단호하게 말씀 하십니다. 엘리에셀이 상속자가 아닙니다. 그의 몸에서 태어날 아들이 그의 상속자입니다. 이런 눈부신 약속을 확실히 아브람의 영혼에 심으시고자 하나님은 그를 데리고 밖으로 나가셨습니다.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별을 가리키며 그의 자손이 별들처럼 셀 수 없이 많을 거라고 알려주십니다. 

그 별들이 아브람의 마음에 하나씩 들어와 박혔습니다. 그의 내면에 영롱한 빛을 비추었습니다. 그 빛깔이 하나씩 모여 ‘믿음’을 안겨주었습니다. 이 위대한 장면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본문 6절 함께 읽겠습니다.

6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이른바 ‘이신칭의’라는 성경 전체의 가장 위대한 복음을 드러내는 구절입니다. 특히나 바울이 로마서에 인용하며 기독교 신앙의 핵심에 서게 됩니다. 주님을 향한 인간의 믿음 그리고 그런 인간의 의롭게 여기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어 보석같이 찬란하게 빛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돌이켜 보게 됩니다.

그런데 동시에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본문은 하나님과 아브람 사이에 첫 번째 대화입니다. 그전까지는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에 아브람이 묵묵히 경청할 따름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아브람의 마음을 덮친 의심과 회의와 좌절이 깊고 깊어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자 그는 낱낱이 토로 하였습니다. 그런 그의 한탄을 하나님은 억누르거나 다그치지 않았습니다. 묵묵히 들으시고 밖으로 이끄시어 별을 보여주시며 그에게 믿음을 안겨 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 전체에서 가장 위대하다는 칭송을 받는 아브라함의 믿음은 의심을 통과한 신앙이라는 걸 발견합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자연스러운 감정을 배제하고 현실을 무시하며 억지로 이 앙다물며 외치는 ‘아멘’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여전히 두렵고 아프고 괴롭우며 원망과 탄식이 계속 흘러나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당신이 펼치시는 손가락을 따라 하늘을 바라보며 잠잠히 믿음을 품기를 바라십니다. 그런 우리의 믿음을 주님께서 의롭게 여기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저마다의 하늘 위에 뜬 별을 바라보며 신앙의 여정을 이어가길 축원 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아브라함의 영혼 깊은 두려움을 보시고, ‘두려워 말라’라고 위로하시는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솔직한 실망과 원망을 담은 진솔한 기도를 드립니다. 그런 저희 걸음을 이끄시어 손수 믿음을 아로새겨 주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참되고 진실한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14일 일요일

열왕기상 19장 9~18절 "핵심 가치2: 여백 – 여백 신앙"

2025년 12월 14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열왕기상 19장 9~18절 "핵심 가치2: 여백 – 여백 신앙"

9 엘리야가 그 곳 굴에 들어가 거기서 머물더니 여호와의 말씀이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0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13 엘리야가 듣고 겉옷으로 얼굴을 가리고 나가 굴 어귀에 서매 소리가 그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엘리야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14 그가 대답하되 내가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 열심이 유별하오니 이는 이스라엘 자손이 주의 언약을 버리고 주의 제단을 헐며 칼로 주의 선지자들을 죽였음이오며 오직 나만 남았거늘 그들이 내 생명을 찾아 빼앗으려 하나이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헨리 나우웬은 내면 성숙을 위해 가야 할 고독한 길을 이렇게 간단명료하게 정리했습니다. 누구나 때때로 인생을 뒤흔드는 문구를 만나곤 합니다. 저에게는 이 영어 단어 네 개가 그러했습니다. 20대 중반 이 문장을 읽고 너무나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해당 단락을 읽어드리겠습니다.

우리는 항상 더 긴급한 일을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가만히 앉아 있다.’라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그 일들에 도움이 되기보다 종종 방해 되곤 합니다. 
하지만 이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하나님의 현존 앞에서 쓸모없이 존재하고 침묵하는 것은 모든 기도의 핵심에 속합니다. 
처음부터 우리는 종종 하나님의 음성보다 자신의 무질서한 소음을 더 크게 듣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받아들이기 매우 어렵습니다.
(중략) 그러나 천천히, 아주 천천히, 침묵의 시간이 우리를 조용하게 만들고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깊게 하는 것을 발견합니다. 그러고 나서 곧 우리는 분주함으로 빼앗긴 순간들을 그리워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완전히 깨닫기 전에, 점점 더 많은 침묵 속에 이끌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그곳에 더 가까이 가도록 내면의 추진력이 발달하게 됩니다.

저는 오랫동안 신앙 성장을 위해서는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해야 한다고 오해했습니다. 기도는 무조건 크고 오래 해야 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고3부터 입대 전까지 3년간 매일 한 시간 이상 우렁차게 통성기도를 했습니다. 그 결과 장신대가 있는 광장동 소음 민원의 주범이었습니다. 지금도 그곳 주민들에게 죄송합니다.

게다가 청소년 때부터 또래 그 누구보다 성경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그리고 주일 오전 예배는 물론이고 저녁 예배와 수요, 금요 기도회를 적어도 제 의지로는 단 한 번도 빠진 적이 없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뜨거운 성령 체험과 극적인 간증에 심취하며 각종 부흥회와 찬양 집회를 부지런히 쫓아다녔습니다. 그렇게, 10대 중반부터 20대 초반까지 흔히 “은혜 받았다”라고 말하는 감정적인 신앙 경험을 맹목적으로 추구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과거를 이야기하면 어릴 때부터 신앙생활을 참 열심히 잘했다고 칭찬하시는 분들이 계십니다. 하지만 저는 지난 시절을 떠올릴 때마다 눈물겨운 아픔을 느낍니다. 적어도 저에게 있어 지난날 그 종교 행위들은 건강한 신앙이 아니라 완고한 강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때 저는 하나님의 깊고 풍성한 사랑을 올바로 깨닫지 못했습니다. 주님은 저를 다그치는 분이라고 오해했습니다. 

하나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저의 연약한 자아가 존재했습니다. 주님의 무한한 은혜보다는, 나의 열정과 헌신이 신앙의 승패를 좌우하는 중요한 조건이라고 착각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고 무모한 몸부림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회를 열심히 다니면 다닐수록 복음을 통해 해방과 평화를 누리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을 옭아매는 고통에 시달렸습니다. 맹목적인 신앙 생활의 결과로 기대했던 화려한 성공과 성취보다는 심각한 좌절과 절망에 빠졌습니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주님께서는 저를 일찌감치 신학교로 이끄시어 진리의 바다가 얼마나 넓은지를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라”는 이 따스한 문장을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무언가를 많이 해내고 쓸모 있게 존재하라는 거짓 신앙과 단호히 결별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대함에 짓눌리지 않고 그분의 위대함에 기꺼이 안겼습니다.

그런 까닭에 저는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예언자 엘리야의 모습에서 깊은 공감과 연민을 느낍니다. 그의 삶과 사역에는 성경 속 그 누구 못지않게 눈부신 이적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그가 폭군 아합 왕을 향해 온 이스라엘에 몇 년 동안 극심한 가뭄이 들 거라고 예고한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또한 한 줌의 보릿가루와 적은 기름으로 사르밧 마을에 사는 과부를 배불리 먹였습니다. 심지어는 그 과부의 아들이 숨을 거두자 다시 살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엘리야의 힘 있고 화려한 사역들은 갈멜산에서 거둔 승리에서 찬란한 절정에 이룹니다. 이날, 바알과 아세라 예언자들은 종일 자신들의 신을 향해 자해 하면서까지 간절히 부르짖었습니다. 자기 확신과 열정으로 가득한 종교 행위의 절정입니다. 그렇지만 그들은 아무런 답을 얻지 못했습니다. 반면, 엘리야가 제단을 회복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자 순식간에 그곳에 불이 내려왔습니다. 그리하여 주님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하나님이시라는 진리가 명확히 드러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엘리야는 그러한 주님의 신실한 종이라는 사실 또한 공개적으로 인정받았습니다.

물론 이 사건의 주체는 하나님입니다. 엘리야 역시 감히 부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렇지만 황홀한 승리 한 복판에 서 있었던 엘리야는 몹시 의기양양했습니다. 그야말로 “많은 것을 하고, 쓸모 있게 존재”했던 삶입니다. 어쩌면 이제 아합과 이세벨이 고개를 숙이고 자기를 고분고분 따를 거라 기대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습니다. 악한 권력은 결코 탐욕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맹렬하게 반격하였습니다. 갈멜산에서 당한 패배에도 불구하고 왕비 이세벨은 기가 꺾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더욱 냉혹한 살기를 내뿜으며 엘리야를 반드시 죽이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 이야기가 엘리야에게 전해졌습니다. 그러자 조금 전까지 보였던 호기로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습니다. 대신 로뎀나무 아래에 쓰러져 죽음을 갈구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를 내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천사를 보내 먹을 것을 주며 위로하셨습니다. 기운을 차린 그를 호렙산으로 부르셨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바로 그곳에서 주님과 엘리야가 나눈 대화를 담고 있습니다. 9절과 13절에 하나님은 그에게 두 번이나 같은 질문을 하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이 구절을 원문과 좀 더 가깝게 새번역 성경은 이렇게 옮겼습니다. “너는 여기에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

그러자 엘리야는 하나님께서 반복하시는 질문에 역시 동일한 답을 10절과 14절에서 계속합니다. 그런데 주님의 간단명료한 물음과는 달리 엘리야의 대답은 무척 장황합니다. 이를 통해 그의 내면에 응어리진 본심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10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10 엘리야가 대답하였다. "나는 이제까지 주 만군의 하나님만 열정적으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은 주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주님의 제단을 헐었으며, 주님의 예언자들을 칼로 쳐서 죽였습니다. 이제 나만 홀로 남아 있는데, 그들은 내 목숨마저도 없애려고 찾고 있습니다."(새번역 성경)

우리는 여기서 문장의 주어를 주목해야 합니다. 엘리야는 이렇게 하소연합니다. “내가” 열정을 불태웠고, “나만” 남았고, “내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이것은 분명 사실입니다. 그 시대, 엘리야만큼 열심히 주님을 위해 헌신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와 달리 온 이스라엘은 우상 숭배에 빠졌고 심지어 예언자들을 살해하였습니다. 엘리야 혼자만 겨우 살아남았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마저도 이세벨이 보낸 군사들이 일으키는 자욱한 흙먼지와 요동치는 말발굽 소리 앞에 너무나 위태롭습니다.

그런데 그가 힘겹게 토로하는 이 사실이 진실이 아닌 까닭은 무엇일까요? 어느샌가 그의 내면에 하나님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엘리야는 누가 뭐래도 성경에 등장하는 가장 위대한 예언자 중 하나입니다. 어둡고 혼란한 시대에 그가 보인 찬란한 희생과 눈부신 업적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강력한 사람의 능력도 하나님의 권능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그 어떤 사람의 총명도 하나님의 지혜 앞에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엘리야는 막중한 사명감에 짓눌린 나머지 그만 진리를 잊고 말았습니다. 자기 삶 속에 하나님의 자리를 내어주지 못했습니다.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나의 열심과 열정만이 기울어져 가는 민족을 되살릴 유일한 희망이라고 여겼습니다. 

허나 현실은 잔인하고 가혹합니다. 눈앞에 살아있는 권력자 이세벨과 그가 섬기는 우상 바알과 아세라에 비해 하나님은 너무나 무력하고 초라하게만 보였습니다. 대체 내가 지금까지 무얼 했는지 모르겠다는 허무함과 후회가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미련함과 어리석음을 끊임없이 자책하였습니다. 그런 자신을 가여워하며 억울함 속에 하염없이 몸부림 쳤습니다.

정리하자면 엘리야는 ‘나’라는, ‘자아’라는 가장 치명적이고 위험한 우상 숭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내면에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은 사라진 채 오로지 나로만 가득한 ‘과잉 신앙’에 사로잡혔습니다. 그 결과 극심한 탈진과 끝없는 절망 가운데 허우적거렸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그를 호렙산에 세우시며 당신 뜻을 더욱더 분명하게 알려 주셨습니다. 앞서 말씀 드린대로 본문 9절과 10절, 그리고 13절과 14절에서 주님과 엘리야 사이에 같은 질문과 동일한 답변이 병행을 이루고 있습니다. 따라서 그 중간에 위치하는 11~12절을 통해 핵심 주제를 드러내는 문학 구조를 이룹니다. 이 두 구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11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가서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라 하시더니 여호와께서 지나가시는데 여호와 앞에 크고 강한 바람이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나 바람 가운데에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바람 후에 지진이 있으나 지진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며 12 또 지진 후에 불이 있으나 불 가운데에도 여호와께서 계시지 아니하더니 불 후에 세미한 소리가 있는지라 

엘리야가 “여호와 앞에서 산에” 서자 주님이 그 곁을 지나갔습니다. 그때 산을 가르고 바위를 부수는 “크고 강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이어서 “지진”이 일어났으며 “불”이 타올랐습니다. 하나같이 크고 강력한 자연현상입니다. 이 모두는 지난날 그가 보여준 눈부신 이적들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동안 그가 행했던 화려한 사역들을 상징적으로 눈앞에 펼쳐 보여줍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그곳에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셨을까요? 12절에 보면 불 다음으로 “세미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원문을 직역하면 ‘마치 속삭이듯 작고 부드러운 소리’입니다. 이 음성은 앞서 나타난 웅장한 바람과 지진과 불과는 명백히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로 그 미미하고 고요한 목소리를 통해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세상의 크고 화려한 겉모습에 눈길을 뺏길 때는 결코 하나님의 세미한 소리를 들을 수 없습니다. 내 안의 억척스러운 소음에 귀를 가릴 때는 절대로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속삭이듯 작고 고요하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목소리는 오직 침묵할 때만 들을 수 있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더 이상 크고 강력한 이적을 일으키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뜨겁게 기도하며 찬양하는 것이 침묵 기도보다 저급하다는 의미도 아닙니다. 간절히 부르짖으면서도 얼마든지 내면을 비울 수 있습니다. 반대로 입을 다물고 잠잠히 기도하더라도 교만으로 가득할 위험이 있습니다. 목소리 크기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핵심은 여백입니다. 세미하게 들려오는 음성을 경청하는 영혼의 공간입니다. 

엘리야는 눈부신 성공의 주인공으로 살아오며 어느샌가 하나님을 왜곡하였습니다. 열심히 많은 일을 쓸모 있게 하는 것에 자신의 존재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러느라 어느새 내면을 차분히 돌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이세벨의 말 한마디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습니다. 그런 그를 향해 주님은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듯 하며 하나님의 자리를 비워두는, 여백 신앙을 일깨워 주셨습니다.

신앙의 주체는 오직 하나님입니다. 믿음의 본질은 나의 의지와 노력이 아니라 먼저 다가오신 주님의 신실한 은혜라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그 가운데 참된 침묵을 실천해 나가며 우리 각자와 공동체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히 엎드려야 합니다. 그리고 그 뜻을 담대하게 이루어 나가야 합니다.

본문에서 엘리야와 이스라엘을 향해 세미하게 말씀하신 주님의 뜻은 15~17절에 구체적으로 드러납니다. 다 함께 읽겠습니다.

15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람의 왕이 되게 하고 16 너는 또 님시의 아들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고 또 아벨므홀라 사밧의 아들 엘리사에게 기름을 부어 너를 대신하여 선지자가 되게 하라 17 하사엘의 칼을 피하는 자를 예후가 죽일 것이요 예후의 칼을 피하는 자를 엘리사가 죽이리라 

우선 주목해야 할 말씀은 15절의 “너는 네 길을 돌이켜”입니다. 이것은 단순히 지리적인 방향 전환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이제껏 살아온 방식을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그 속에 감추어진 탐욕과 교만을 낱낱이 드러내셨습니다. 따라서 당신의 종으로서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길을 걸어가라고 부르셨습니다.

그 사명은 세 사람에게 기름 붓는 것으로 구체화 됩니다. 바로 하사엘과 예후와 엘리사입니다. 하사엘은 가장 극심하게 대립 했던 강적, 아람의 새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외교와 전쟁’을 상징합니다. 예후는 폭군 아합을 끌어내리고 뒤를 이을 왕으로서 이스라엘의 ‘정치’를 대표합니다. 엘리사는 엘리야의 사역을 완성할 예언자로서 이스라엘의 ‘신앙’을 나타냅니다.

하나님께서는 먼저 하사엘을 사용하시고, 그 후에는 예후를, 그 다음에는 엘리사를 통해 당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이 과정에서 엘리야는 어느샌가 잊어버린 소중한 진리를 온 몸과 마음으로 명확하게 깨달았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 백성의 모든 삶과 생명을 직접 주관하시고 다스리신다는 진리입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엘리야는 그동안 나 혼자 살아남았기 때문에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고, 나 홀로 전부 해내야 한다는 강박에 빠졌습니다. 나마저 사라지면 당장 이스라엘이 몰락할 것 같습니다. 심지어 하나님도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에 사로잡혔습니다. 조금의 여유조차 사치로 여겼습니다. 좀 더 빨리 좀 더 멀리 내달려야 한다고 자기를 몰아 붙였습니다. 그런 엘리야를 향해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18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하지만 하나님은 바알을 섬기지 않는 칠천 명을 이스라엘 가운데 남겨 두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구약성경에서 숫자 표기는 정확한 통계 표시가 아닙니다. 문학적 상징을 드러내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기서 ‘칠천’이라는 숫자도 완전수 7에 천을 곱한, 굉장히 많은 사람을 가리키는 의미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엘리야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스스로 만든 틀에 갇히지 말고, 좁은 생각과 경험에 얽매이지 말고 천천히 넓게 주위를 둘러보라고 주님께서 말씀 하십니다. 그가 앞서 로뎀 나무 아래에서 경험하였듯이, 가끔은 잠시 멈추어 쉬어가도 된다고 다독이십니다. 때로는 하나님이 멀리 떠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럴지라도 분명히 살아계신 당신의 다스림을 믿고 의지하라고 당부하십니다. 

그러므로 과잉 신앙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주님을 온전히 신뢰하며 기꺼이 내려놓고 비워내는 여백 신앙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이들이 진정 노력해야 할 목표는 거창한 무언가를 채우고 드러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 대신 기꺼이 비우고 지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는 인간이 감히 덧칠할 수 없는 무한한 넓이와 깊이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본문 말씀을 묵상하며 자연스럽게 떠오른 논어(論語) 구절이 있었습니다. 자한(子罕)편 제4장입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바른 태도를 세우는 데 큰 도움을 준 문장입니다.

“子絶四(자절사)러시니 毋意(무의), 毋必(무필), 毋固(무고), 毋我(무아)러시다” 

성균관대학교 이기동 교수님께서 이렇게 번역하셨습니다. 

“공자께서는 네 가지를 단절하셨다. 사사로운 의견이 없으셨으며, 반드시 해야 된다는 것이 없으셨으며, 고집함이 없으셨으며,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 없으셨다.”

진리를 따라 살아가려면 이기적인 욕심과 아집과 오만을 단호히 끊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위해서는 먼저 나 자신을 비우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주님의 선하신 손길을 붙잡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비워야만 비로소 채울 수 없습니다. 

이러한 깨우침은 진리 그 자체이신 예수님을 떠오르게 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온 세상의 유일한 구원이자 희망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만이 모든 사람에게 마땅히 찬양과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까닭이 무엇일까요? 예수님의 삶과 복음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여백을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5~8절에 아름다운 찬양을 남겼습니다.

5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6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7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8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자신을 비우시어 철저히 무력한 종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참 사람이 되시어 당신을 온전히 낮추시고 복종하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부활하시어 하나님 나라를 완성하셨습니다. 따라서 십자가는 온 세상 가장 위대한 여백입니다. 부활은 바로 그 여백을 뚫고 솟아오른 찬란한 생명과 희망입니다. 이 위대한 복음을 마음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동시에 날마다 분명히 돌이켜 봐야 합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따른다고 말은 하면서도 여전히 추악한 야망을 붙잡을 때가 많습니다. 심지어 그러한 탐욕을 그럴듯한 신앙 논리로 포장하며 자기를 속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교묘한 죄악을 단호히 분별하고 물리쳐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하나님이 아닌 욕망을 숭배한다면, 열정을 다해 달려가면 갈수록 허무한 좌절에 이르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저마다의 호렙 산 위에 서 있는 우리를 향해 오늘도 말씀하시는 주님의 뜻에 가만히 귀 기울여야 합니다.

이러한 ‘여백’이 바로, 지난주에 나눈 ‘일상’에 이어 우리 정배교회가 나아가야 할 핵심 가치 중 하나입니다. 사실 이 둘은 하나로 이어집니다. 건강한 일상에는 반드시 여백이 필요합니다. 무언가로 빼곡히 들어찬 삶은 결국 무너지고 지치기 마련입니다. 좀 더 멀리, 건강히 나아가기 위해서는 지우고 비우는 연습이 필요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온갖 이벤트와 프로그램으로 가득하고, 각종 사역으로 교인들을 몰아붙이는 교회에는 하나님께서 일하실 공간이 없습니다. 거창한 무언가를 이루고 해내려 하기 전에 우리 정배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먼저 귀 기울여야 합니다. 잠잠히 침묵하며 들뜨고 분주한 마음을 내려놓고 비워내며 긴 호흡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 결과 이 시대의 하사엘, 예후, 엘리사에게 기름 붓는 사명을 묵묵히 감당해야 합니다. 그런 우리 교회의 여정을 하나님께서 참으로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헨리 나우웬의 글을 마저 읽어 드리겠습니다. 본문 말씀에 비추어서 귀 기울여 들어보시길 바랍니다.

고독 가운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 번째 답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당신에게 관심을 가지고 귀를 기울이는 분 앞에서 그저 가만히 머무르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을 향한 “쓸모없는” 존재감 속에서 명확하게, 우리는 힘과 통제에 대한 망상을 점점 죽이며 우리 존재의 중심에 숨겨진 사랑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는 얼핏 생각하는 것처럼 수동적이지 않습니다. 사실, 노력과 커다란 세심함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현존이 우리를 새롭게 할 수 있도록 적극적인 경청을 요구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 말씀 드립니다. 화려한 무언가를 당장 이루어 내려는 조바심을 물리쳐야 합니다. 그릇된 탐욕을 끊어내야 합니다. 뿌리 깊은 자기연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그 대신, 혼란스러운 우리 내면과 세상의 소음 사이를 헤치며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에 온 몸과 마음을 여시길 바랍니다. 이와 같은 진리를 가장 명료하게 정리한 한 문장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부디 저에게 그러했듯 이 안에 담긴 복음이 성도님들 삶에 맑은 울림을 안겨주길 축원합니다.

“doing nothing, being useless”
“아무것도 하지 않고 쓸모없이 존재하기”

기도
세미한 음성으로 말씀하시는 하나님. 
엘리야처럼 너무나 분주하고 치열하게 살아왔습니다. 무언가를 많이 이루어 내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강박에 눌려 몹시 지친 나날을 보냈습니다. 심지어 신앙조차 그 어리석은 기준으로 비교하고 판단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크고 강한 바람도 지진도 불도 아닌 세미한 음성으로 시나브로 나지막이 다가오심을 주신 말씀을 통해 깨닫습니다. 미처 알지 못했던 주님의 크고 위대한 계획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 진리를 따라 나 자신을 우상화하는 과잉 신앙에서 벗어나 하나님 앞에 어리석은 욕망과 자아를 비워내는 여백 신앙을 지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정배교회가 여백의 소중함을 깨닫고 비움의 아름다움을 실천하는 공동체 되길 소망합니다. 맡겨진 사명을 성실히 감당하면서도 동시에, 주님께서 저희를 통해 이루실 일들에 잠잠히 순종하도록 지우고 비우는 일에도 최선을 다하는 균형과 믿음을 주시옵소서.
가장 아름답고 놀라운 여백으로 이 땅에 오시고, 그 여백을 살아내고 전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창세기 14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2025년 12월 15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4장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이틀 전 토요일에 읽은 창세기 13장은 재산이 늘어 종들 사이에 다툼이 생기자 결국 따로 살게 된 아브람과 그의 조카 롯의 모습을 보여 줍니다. 아브람은 롯을 아버지처럼 키운 삼촌이었지만 조카에게 선택권을 양보합니다. 그러자 롯은 화려하고 풍요로운 소알 땅을 선택합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롯은 그곳에서 전쟁에 휘말리는 힘겨운 처지에 놓입니다.

14장 전반부는 여러 임금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그 지역에서 강력한 힘을 가졌던 엘람왕 그돌라오멜을 배신한 왕들과 여전히 그를 추종하는 왕들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습니다. 그 전쟁에 롯이 살고 있는 소돔과 고모라 왕도 참여하였습니다. 그 결과 소돔이 침략당해 롯이 사로잡히고 그의 재산도 뺏겼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아브람이 집에서 키우고 훈련시킨 군사 318명을 데리고 쫓아가 롯은 물론이고 그의 가족과 재산을 모두 찾아온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이 모든 숨 가쁜 상황이 마칠 때 한 인물이 등장합니다. 18~19절 함께 읽겠습니다.

18 살렘 왕 멜기세덱이 떡과 포도주를 가지고 나왔으니 그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 19 그가 아브람에게 축복하여 이르되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 아브람에게 복을 주옵소서

살렘 왕 멜기세덱이 전투를 마치고 기진맥진해 돌아온 아브람을 맞이합니다. 떡과 포도주를 가져와 베풀며 쉬게 합니다. 여기서 멜기세덱에 관한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는 왕이면서 제사장입니다. 그러한 제사장의 권위로 아브람을 축복합니다. 사실 고대 역사에서 흔히 발견하는 장면입니다.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은 사회에서 왕이 제사장을 겸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러한 멜기세덱이 섬기는 신이 그 지역 사회의 다른 우상이 아니라, 아브람과 같은 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18절은 멜기세덱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라고 소개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어지는 19절에 멜기세덱의 축복문에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여’라고 부릅니다. 그러자 아브람은 22절에 “천지의 주재이시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여호와께 내가 손을 들어 맹세하노니”라고 화답합니다.

이러한 대화를 통해 무엇을 알 수 있을까요? 아브람을 부르고 이끄신 하나님, 온 우주를 지으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만, 그의 시대에만 나타내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이미 그보다 훨씬 전에 온 우주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며 수많은 이들에게 앞서 당신의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살렘 왕 멜기세덱입니다. 

이처럼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은 이 시대와 지역을 초월해, 역사와 우주를 다스리십니다. 그러한 권능으로 전쟁에 휩싸인 아브람과 롯을 구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이 곧 우리의 하나님 이심을 고백합니다. 때로 전쟁과 같은 삶의 순간을 경험합니다. 거친 현실의 물결에 휩싸이기도 합니다. 그 막막하고 괴로운 순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축복합니다. 

주님의 드넓은 구원과 강력한 팔이 오늘도 우리 삶에 동참하시며 구하시고 지키실 줄 믿습니다.


기도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
왕들의 이해타산과 권력다툼에 휘말려 고난을 겪은 롯을 아브람을 통해 구하신 하나님, 마찬가지로 저희 삶에 경험하는 여러 전쟁 가운데 주님께서 함께하시고 구하실 줄 믿습니다. 저희의 이해와 경험을 초월하는 지극히 높으신 주님의 뜻을 믿고 의지합니다. 그 믿음 따라 오늘 하루도 참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