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28일 일요일

마태복음 1장 18~25절 "성탄의 조연"

2025년 12월 25일,정배교회 성탄절 예배,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1장 18~25절 "성탄의 조연"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22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니 이르시되
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24 요셉이 잠에서 깨어 일어나 주의 사자의 분부대로 행하여 그의 아내를 데려왔으나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먼저, 준비한 영상 다함께 보겠습니다.

https://www.youtube.com/watch?v=1TWNKUETHdg

이 광고를 다들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2010년 남아공 월드컵 당시 상당한 화제를 모은 외환은행의 CF 입니다. 나레이션 카피를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2002년, 2006년 그는 한 골도 넣지 못했다.
하지만 모든 골의 뒤엔 그가 있었다."

광고라는 매체의 특성상 자세히 설명하진 않았지만, 이 짧은 화면이 우리에게 주는 메시지의 의미는 분명합니다. 이영표 선수는 지난 2002년과 2006년 월드컵에 단 한 골도 넣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골의 뒤에서 그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습니다. 벌써 20년이 훌쩍 지나서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2002년 월드컵에서 가장 극적인 장면인 포르투칼전의 박지성의 골과 이탈리아전의 안정환의 골 모두 이영표가 어시스트 하였습니다.

따라서 월드컵에서 이영표가 직접 넣은 골이 없다고 해서 축구 선수로서의 그의 기량과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가 맡은 중간 수비수로서 자리는 화려한 스트라이커와는 달리 골을 넣을 기회가 적었을 뿐입니다. 그는 자기 위치와 상관없이 주어진 역할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는 비록 득점을 얻는 화려한 순간에는 분명 조연이었습니다. 하지만 경기 전체의 흐름에서는 중요한 자리를 지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비단 축구만 아니라 삶의 여러 현장 모두에게 해당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소위 말하는 ‘인생의 주인공들’ 즉,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과도한 찬사를 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유명한 연예인이나 대기업 회장들을 비롯해서 남들 눈에 띄는 화려한 명성을 날리는 이들만을 우러러 볼 때가 참 많이 있습니다.

물론 그러한 사람들의 치열한 노력에 대해 존경을 표시하고 그들로부터 배울 것을 배우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성공의 원인이 모두 그들의 순수한 노력에만 있다고 믿는 것은 굉장히 어리석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결코 단순하지 않고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군가가 화려하게 남들보다 앞서 있고 눈에 띈다는 것은 가려진 곳에서 알게 모르게 그들의 성공을 도운 수많은 아름다운 조연들이 있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지금 우리는 기쁘고 복된 성탄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 날은 예수님께서 우리 가운데 한 아기로 오신 것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세상에 기꺼이 사람의 연약함을 입고 다가오신 예수님의 위대한 은혜와 사랑을 깊이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예수님께서 이 땅 가운데 올 수 있도록 위대한 헌신을 했던 아름다운 조연이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 말씀은 18절 말씀에서 시작하는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태어)나심”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예수님의 탄생을 위해 헌신한 여러 사람들의 소중한 이야기가 담겨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요셉의 희생을 세 가지로 살펴보길 원합니다. 요셉을 통해 아기 예수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우리가 지녀야 할 삶의 태도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첫 째, 요셉은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에는 “의로움”으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다함께 18, 19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8 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19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 그를 드러내지 아니하고 가만히 끊고자 하여 

18절 말씀에 따르면 요셉과 마리아는 이미 ‘약혼’한 상태입니다. 유대인들은 옛날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달리 부모에 의한 일방적인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당사자들의 동의를 얻어서 약혼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아와 요셉은 억지로가 아니라 서로가 원하고 사랑해서 약혼한 사이입니다. 

그런데 그 마리아가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임신을 했습니다. 게다가 변명이랍시고 임신했다는 얼토당토 않는 말을 하였습니다. 자신이 임신한 게 다른 남자를 가까이 해서가 아니라 성령님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합니다. 그때, 그런 얘길 듣는 요셉은 어떤 생각이 들었을까요? 그는 아마도 이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아, 마리아가 나를 사랑하는 줄 알았는데 다른 남자랑 눈이 맞더니 별 이상한 핑계를 대는 구나.’

그리고 동시에 남자로서 도무지 참기 어려운 분노와 배신감에 치를 떨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가 제사장에게 이 사실을 고발해서 마리아에게 벌을 준다 해도 그 누구도 뭐라 말할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지만 약혼한 상태라 할지라도 다른 남자와 사랑을 나누는 것은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 죽을 정도로 나쁜 죄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때는 모세 율법이 문자 그대로 지켜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하지만 돌에 맞아 죽지는 않더라도 그 시대 여성이 그러한 잘못이 들통나면 더 이상 결혼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곧 경제적으로 의지할 곳을 잃고 매우 가난하게 살아야 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따라서 요셉은 이러한 사회적, 종교적 여건을 통해 얼마든지 마리아에게 협박하거나 복수 할 수 있었습니다.

게다가 아직 천사가 나타나 사건의 실상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주기 전입니다. 그럼에도 요셉은 지극히 자연스런 분노와 원망으로 마리아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에 19절 말씀에 따르면 ‘가만히 끊고자’했습니다. 이 때 “가만히 끊는다.”에 해당되는 그리스어 원문을 직역하면, ‘그녀를 비밀스럽게 놓아주기로 결심했다.’ 즉, 남몰래 약혼을 취소한다는 뜻을 가집니다. 

그렇게 되면 남들 보기에 요셉은 결혼 전에 마리아를 임신시켜 놓고도 제멋대로 파혼한 파렴치한 사람이 됩니다. 그렇다면 마리아는 아무런 벌을 받지 않게 되고 오히려 요셉이 책임감 없는 약혼자라며 남들에게 욕을 먹는 상황이 됩니다. 그러나 요셉은 마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했기 때문에 자신의 감정과 사회적인 평판보다는 그녀의 안전을 먼저 생각하며 걱정했습니다. 그래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그녀 마리아를 살리고자 기꺼이 자기 감정을 희생하였습니다. 그런 요셉을 가리켜 성경은 ‘의로운 사람’이라고 기록합니다.


둘 째, 요셉은 아기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 안에 있었을 때는 “인내”로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마리아의 임신으로 무척 힘들어하는 요셉에게 하나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셔서 위로의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본문 20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0 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 이르되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하나님께서는 요셉에게 마리아가 다른 남자의 아기를 가진 것이 아니라, 바로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임신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요셉은 그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여 마침내 마리아와 결혼을 하였습니다. 그후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까지 요셉이 어떻게 하였는지에 대한 아주 놀라운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2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이 말씀에 따르면 요셉은 “아들을 낳기까지” 즉, 예수님께서 태어나시기 전까지 마리아와 잠자리를 같이 하지 않았습니다. 부부 사이의 성은 결혼이라는 거룩하고 아름다운 언약이 안겨주는 소중한 선물이자 특권입니다.

하지만 요셉은 마리아가 그녀의 몸에 아기 예수님을 가진 8개월 동안 동침하지 않았습니다. 결혼한 성인 남성으로서 당연히 누릴 수 있는 아내에 대한 소중한 권리를 희생했습니다. 만약 임신한 기간 동안 한 번이라도 잠자리를 같이 한다면, 그 아기는 훗날 사람들로부터,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 요셉의 아들로 오해받을 가능성이 무척 높습니다.

그런 까닭에 요셉은 예수님께서 성령님을 통해 한 여인의 몸에 오셨다는 놀라운 은혜와 신비를 지키기 위해 애썼습니다. 자신의 자연스런 욕구를 참아내고 인내하며 자신을 희생하였습니다.


셋 째, 요셉은 아기 예수님께서 태어나셨을 때는 “양보”하며 자신을 희생했습니다.

누가복음 1장 59~63절은 세례요한의 부모가 아들의 이름을 짓는 장면이 기록돼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그의 어머니인 엘리사벳이 하나님께서 천사를 통해 말씀 하신대로 아들의 이름을 ‘요한’으로 지으려 하였습니다. 그러자 친척들이 반대하면서 아버지와 같이 ‘사가랴’라고 지으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통해 당시 문화를 알 수 있습니다.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한 아기의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을 단순히 부모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어떤 누군가의 이름을 짓는다는 것은 그의 소속을 확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기는 단순히 부모님만의 소유가 아닙니다. 많은 친척을 이루는 한 가문의 소속입니다. 그런 까닭에 아기의 이름을 짓는 다는 것은 여러 가지를 많이 고려해야 하는 복잡하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그것은 요셉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게다가 예수님은 요셉의 첫 번째 아들입니다. 따라서 이름을 짓는데 고려 해야 할 일들이 더욱 많았을 것입니다. 분명 그 스스로 짓고 싶은 이름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셉은 큰 아들의 이름을 자기 마음대로 혹은 친척들과 가문의 뜻대로 짓지 않았습니다. 21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땅에 보내시는 당신 아들의 이름을 천사를 통하여 요셉에게 분명히 알려주셨습니다. 바로 “예수”입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예수”라는 이름을 지어주셨습니다. 이것은 “구원”이라는 뜻을 가지는데, 당시 이스라엘에서  흔히  불리던 이름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평범한 이름으로 당신의 아들이 이 세상 속에서 불리게 하셨습니다. 그 이름을 통해 주님은 당신 백성을 향한 구원을 분명히 선언하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마음과 뜻을 요셉은 함부로 무시하거나 잊어버리지 않고 분명히 순종하였습니다. 다시 한 번 25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5 아들을 낳기까지 동침하지 아니하더니 낳으매 이름을 예수라 하니라

마침내 마리아가 아들을 낳자 요셉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그대로 그의 이름을 “예수”라고 지었습니다. 이것은 동시의 그의 믿음의 고백이기도 합니다. 사람들 보기에는 이 아기가 자신의 큰 아들로 보이겠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통해 아기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이심을 그 “이름 지음”을 통해 드러내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분명, 아들에 대한 아버지로서의 권한을 양보하고 포기한 위대한 희생이자 섬김이었습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름의 뜻과 같이 “하나님의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고 예언자 이사야가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생생한 증거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우리에게 성탄절의 참 주인공이 되셨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서 주인공으로 살지 않으셨습니다. 많은 사람의 인기와 환호를 받았지만 끊임없이 당신을 낮추며 사회 주변의 소외된 이들을 향해 나아가셨습니다. 허무한 탐욕을 멀리하고 내려놓으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 나라 복음을 따른다면 우리 역시 예수님처럼, 그리고 요셉처럼 묵묵히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사람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인정받으려 몸부림 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세상이 알아주지 않고, 때로 무시하고 조롱한다 할지라도 묵묵히 맡겨진 섬김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아기로 오신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 나라는 결코 주인공들만의 세상이 아닙니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힌 수많은 조연들의 위대한 헌신으로 이루어진 세계라는 사실을 믿음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 자신이 비록 사람들의 눈에는 어리석고 못난 이 세상의 단역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님 나라의 은혜와 생명과 신비 안에서는 하늘의 별과 같이 찬란한 주인공과 같다는 아름다운 진리를 마음 깊이 새겨야 합니다.


2013년에 이영표 선수가 은퇴하고 가진 기자회견 장에서 사회자가 그에게 그동안 ‘박지성이라는 그늘에 가려져 있는 게’ 아쉽지 않았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 제가 박지성이라는 그늘에 가려져 있었습니까? 
어쩐지 항상 시원하다 했습니다. 저는 그늘을 좋아합니다. 
그늘은 서늘해서 낮잠을 자기도 좋습니다. 
누군가 제게 그늘을 허락한다면 그 사람에게 감사해 할 것입니다.”

저는 이 인터뷰 기사를 읽으면서 참 훌륭한 신앙인의 모습을 발견했습니다. 이 땅에 이루어가는 하나님 나라의 의미를 정확히 이해하고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소중히 깨달으며 성실히 수행했기 때문입니다. 또한 성탄의 위대한 조연이었던 요셉의 삶을 오늘날 어떻게 적용해야할 지를 보여주는 좋은 예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온 세상을 향한 구원의 드라마는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한 없이 초라한 말모이 통에서 무력한 한 아기로 태어나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예수님께서 이처럼 낮아짐의 역할을 몸소 감당하신 성탄 사건 자체가 우리 마음속에 중요한 울림을 전하며 그리스도인의 올바른 삶의 태도를 알려줍니다. 그것은 사람들에 의해 주목받지 못하고 오히려 잊혀지고 무시당하는 역할이라 할지라도 각자 주어진 삶의 자리를 믿음으로 지켜가는 것입니다.

때로는 십자가와 같은 어둠과 고통과 절망에 몰리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끝내 부활의 생명과 영광이 우리를 품어 않으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희생과 섬김을 통해 찬란한 하나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전하시고 이루시기 위해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의 모습을 기억하며 성탄절을 맞이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다시 오시는 예수님의 은혜 안에서 참된 조연이자 주연으로서 저마다의 삶의 자리를 지켜나가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기도
죄인들을 위해 희생하시고 섬기신 하나님. 
아기 예수님의 태어남 위해서 의로움으로 인내로 그리고 양보로 희생했던 요셉의 모습을 말씀으로 살펴보았습니다. 하나님 나라 안에서 조연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뒤쳐지고 패배하는 어리석은 길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자신의 생을 더욱 온전한 주연으로 살아가는 은혜의 여정이라는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합니다. 그 진리 가운데 우리에게 참 자유와 해방을 주시고 성탄절을 더욱 의미 있게 맞이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 아기로 우리에게 오셨고 또한 하나님 나라의 참된 주인공으로 다시 오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24장 1~33절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2025년 12월 29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4장 1~33절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찬송가 379, 382장

아브라함이 나이가 많아 늙었습니다. 이 땅에서 주어진 생을 마감할 날이 점점 다가옵니다. 이제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바로 아들 이삭의 혼인입니다. 어렵게 낳은 언약의 아들인데 아직 배우자를 만나지 못했습니다. 단지 며느리를 맞아들이고 손주를 얻는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언약을 이어가는 사명 수행입니다.

이 막중한 임무를 위해 아브라함은 평소 깊이 신뢰하던 늙은 종에게 맡깁니다. 자기 허벅지 밑에 손을 넣으라고 합니다. 여기서 허벅지는 남성의 성기를 완곡히 표현한 말입니다. 정확히는 할례 받은 흔적에 손을 대게 하여 주님과 맺은 언약을 거듭 확인시키는 행동입니다. 그런 까닭에 며느리의 조건을 단호하게 언급합니다. 3~4절 읽겠습니다.

3 내가 너에게 하늘의 하나님, 땅의 하나님이신 여호와를 가리켜 맹세하게 하노니 너는 내가 거주하는 이 지방 가나안 족속의 딸 중에서 내 아들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지 말고 4 내 고향 내 족속에게로 가서 내 아들 이삭을 위하여 아내를 택하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맺으신 언약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즉, 땅과 후손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가나안 땅에서 뿌리내릴 후손들입니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하신 약속에 가나안 사람들은 해당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종은 힘겨운 수고를 감수하며 아브라함의 고향으로 떠납니다. 이러한 여정 자체가 늙은 종에게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런데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있습니다. 설령 그곳에 도착한다 할지라도, 역시나 함께 먼 길을 돌아와 주인의 아들 이삭과 결혼할 여자를 만날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그런 까닭에 종은 주인의 고향에 도착해 우물가에서 이렇게 기도합니다. 14절 읽겠습니다.

14 한 소녀에게 이르기를 청하건대 너는 물동이를 기울여 나로 마시게 하라 하리니 그의 대답이 마시라 내가 당신의 낙타에게도 마시게 하리라 하면 그는 주께서 주의 종 이삭을 위하여 정하신 자라 이로 말미암아 주께서 내 주인에게 은혜 베푸심을 내가 알겠나이다

그는 우물에 찾아온 소녀에게 물을 요청할 계획을 세웁니다. 당시 광야 지방에서 일상적인 풍경입니다. 그렇다면 대부분 나그네를 위해 물을 대접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낙타에게까지 물을 주는, 더욱 따뜻한 마음과 정성을 지닌 처녀라면 하나님께서 이삭의 아내로 예비하신 사람이라고 알겠다는 내용입니다. 

보통 형식적인 호의는 베풀 수 있지만 무더운 날 낯선 사람을 향해 그 정도 섬김으로 다가가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종의 기도가 이루어졌습니다. 정말로 한 소녀가 다가와 그뿐만 아니라 자원하여 낙타들에게도 물을 길어다 주어 마시게 하였습니다. 게다가 그 소녀 리브가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의 손녀입니다. 주님께서 세우신 언약의 대상입니다. 이삭의 완벽한 아내감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이 모든 상황에 감사와 영광을 돌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주인의 온 가족, 그리고 이 사명을 위해 섬긴 자기에게 은혜 베푸셨음을 감격하며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언약을 지키려 수고한 백성을 향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새삼 확인 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세우신, 하나님 나라 복음의 언약으로 날마다 세밀하게 지켜 돌보심을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과 세운 언약을 충실히 따르시길 다짐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신실하게 살아가는 삶의 길을 묵묵히 내딛으시길 바랍니다. 비록 험하고 고통스럽고 너무나 막막하지만, 그 길 끝에 도저히 알지 못했던 놀라운 은혜가 이루어 질 줄 믿습니다.


기도
언약하시고 그 언약을 이루시는 주 하나님
주님을 따르며 막막한 걸음을 내디뎠던 어느 이름 모를 종의 수고와 기도를 신묘한 손길로 응답하셨음을 말씀을 통해 확인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과의 언약을 소중히 지키는 저희 삶 가까이에 오셔서 모든 만남을 선하게 이끄실 줄 믿습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세미한 손길 가운데 위로와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리브가처럼 몸과 마음이 주린 이들을 향해 진실한 섬김으로 다가가, 은혜의 통로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참고문헌: 김세권 『삶을 흔드는 창세기 읽기』(크리쿰북스, 2017)

2025년 12월 26일 금요일

누가복음 2장 8~21절 “하늘과 땅을 잇다”

2025년 12월 27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2장 8~21절 “하늘과 땅을 잇다” 

어제에 이어 성탄을 기록한 같은 본문을 한 번더 읽고 묵상하려고 합니다. 누가복음 이야기에서 성탄 소식을 가장 먼저 들은 사람들은 밤에 밖에서 양을 지키던 목자들입니다. ‘밤’과 ‘밖’. 우리말로 한 글자씩 옮긴 이 두 단어는 깊은 상징을 지닙니다. 즉 어둡고 추운 시각, 안전한 울타리 밖으로 밀려난 사람들입니다.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지닌 위대한 복음은 바로 그렇게 스산하고 쓸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을 우선으로 하는 진리입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알려 줍니다. 다윗의 동네, 즉 베들레헴에서 그들을 위한 구주가 태어났습니다. 오랫동안 기다려온 그리스도입니다. 그런데 일반적인 기대와 달리 강보에 싸여 구유위에 누워 있는 아기의 모습으로, 지극히 무력하고 무지한 상태로 이 땅에 찾아오셨습니다. 그 모습이 온 세상의 표징입니다. 그런 다음에 갑자기, 군대와 같은 수많은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하니라

성탄의 복음을 함축적으로 알려주는 위대한 찬송입니다. ‘하늘에는 영광, 땅에는 평화’라고 정리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탄생은 하늘과 땅을 잇고 온 우주 가득 공명을 울렸습니다. 뻔하고 당연한 듯한 종교 개념으로 단순히 넘기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하나에 담긴 깊은 진리를 음미해야 합니다.

먼저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지극히 높은 곳에서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우리가 ‘영광’이라는 말을 쉽게 연상하는 장면 중 하나는 시상식입니다. 자기 분야에서 탁월한 성과를 거둔 이들이 종종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고 말합니다. 너무나 겸손하고 아름다운 신앙고백입니다. 동시에 유의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보기에 지극히 작은 모습으로 누워있는 아기의 모습 또한 하나님의 영광입니다. 더욱 정확히는 자기를 낮추고 남고 내려놓는 모습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께 닿는 영광의 길이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합니다.

동시에 아기 예수님의 탄생이 사람들 중에 ‘평화’를 안겨줍니다. 이것은 다분히 당시 로마 제국의 선전 구호에 대한 저항입니다. 세계사를 통해 접하듯이 로마 제국은 강력한 군사력과 많은 재물로 지중해 세계를 통일했습니다. 마침내 전쟁을 그치고 평화를 가져왔다고 자랑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피로 쌓은 거짓 평화입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십자가와 부활의 길로,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참된 평화를 이루었습니다. 성탄은 그 평화 여정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른다면, 아기 예수님의 탄생을 진정 나의 기쁜 소식으로 받아들인다면, 마땅히 주님께서 이루신 영광과 평화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세상이 꾸며내고 윤색한 영광이 아니라, 힘과 폭력으로 이룬 침묵으로 포장한 평화가 아니라, 진정 하나님이 바라고 기뻐하시는 영광, 주님께서 희생으로 이루신 참된 평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그 길에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성탄 찬송을 하나님께 드리며 우리가 걸어야 할 길입니다. 그 여정을 함께 마음 모아 믿음으로 담대히 걸어가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기도
영광과 평화의 주 하나님
하늘에서 천군천사들이 아름답게 부른 찬송을 마음으로 기울여 듣십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찬양을 영혼 깊이 새기길 소망합니다. 세상이 꾸며내는 거짓 영광과 평화가 아닌, 아기 예수님의 탄생,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온전히 드러내신 참된 영광과 평화를 누리고 전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25일 목요일

누가복음 2장 8~21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2025년 12월 26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2장 8~21절 “큰 기쁨의 좋은 소식” 찬송가 108, 109장

어색하시겠지만 아직 성탄절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교회 전통은 예수님의 탄생을 1월 6일 주현절 전까지 계속 기념하고 축하와 축복을 나눕니다. 성탄의 기쁨을 계속 간직하셔도 괜찮습니다. 쉬이 꺼뜨리지 마시고 구유 위에 오신 아기 예수님의 그윽한 온기를 마음에 계속 품으시길 축복합니다.

누가복음의 이야기 흐름에서 예수님의 탄생 소식을 처음 들은 사람들은 목자들입니다. 그들은 밤에 들에서 양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그 시대 목자는 오늘날처럼 ‘목축업’이라는 여러 직업 중 하나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가장 천대받고 소외된 사람들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천사가 다가와 외칩니다.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여기서 먼저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목자들은 무서워했습니다. 두려움에 떨고 있었습니다. 상상해 보면 자연스럽습니다. 깊은 밤 천사가 돌연히 나타난다는 것은 황홀한 경험 이전에 충격과 공포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해당됩니다. 온 세상을 구원하는 놀랍고 위대한 복음은 인간의 불안과 염려를 넘어 찾아옵니다. 그렇다면 인생이 흔들리는 경험, 삶이 무너지고 위태해지는 순간이야말로 오히려 우리를 살리는 은혜의 순간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그때, 천사가 선언합니다. “온 백성에게 미친 큰 기쁨의 좋은 소식”입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는 복음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계십니다. 온 세상을 살리는 주님의 구체적인 계획이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주의해야 합니다. 그 소식을 가장 처음들은 사람들은 앞서 말씀 드린대로 온 백성 중에서 가장 낮고 천한 위치에 있던 목자들입니다.

그렇다면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로 말미암은 복음의 깊은 속성을 발견합니다. 화려한 로마 제국의 정점에 있는 황제와 정반대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더욱더 기뻐 반길 소식입니다. 따뜻한 아랫목에서 풍요롭고 여유로울 때가 아니라 깊은 밤 추위와 가난 속에 떨 때 영혼 깊이 사무치는 진리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온 세계를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더럽고 초라한 말 모이통에 연약한 모습으로 누워계십니다. 그 모습이 사람들에게 ‘표적’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이 분명히 알아 볼 수 있는 하나님의 의도를 발견하는 선명한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성탄의 복음을 더욱 마음에 곱씹으시길 바랍니다. 두려워 떨 때, 궁핍하고 초라할 때, 인생의 한기로 스산할 때, 한 아기로 강보에 싸여 누워 있는 예수님, 주위의 동물 울음 소리에도 새근새근 고요하게 잠들어 계신 아기 예수님을 마음에 품으시길 바랍니다. 인생 한복판에 찾아오시어 사람들의 희노애락에 함께 하신 우리 주님을 마음 높여 찬양하시길 바랍니다. 천사가 들려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으로 날마다 평안을 누리고 전하는 모두가 되시길 소망합니다. 


기도
세상 제일 낮은 곳으로 오시어 가장 높은 구원을 이루신 하나님
늦은 밤 양을 지키던 목자들에게 전해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또한 저희를 위한 복음 임을 고백합니다. 깊은 어둠 속에 두려워 떨 때, 천대와 무시를 당할 때, 궁핍과 공허함으로 주릴 때, 저희를 품어 안으시고 일으키시는 주님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워있는 아기 예수님의 모습을 더욱 또렷이 마음에 새기게 하여 주시옵소서. 성탄의 복음으로 참 소망을 품게 하시고, 주위 사람들에게 생명의 온기를 나누고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목회 일기] "우리 동네 목사님"





대학 시절 기형도 시인이 쓴, "우리 동네 목사님"을 우연히 읽었다.
시가 그리는 이야기 자체는 암울했다. 
하지만 그 안에 묘사된 목사님의 진솔한 모습이 두고두고 마음에 울림으로 남았다.
이후 누군가 내게 목회자로서 꿈을 물을 때면 주저 없이 '동네 목사'라고 답하곤 했다.

어느샌가 조금씩 흐려졌던 그 꿈을 정배교회에서 이루었다.
담임목사로 부임 후 교회가 속한 정배 1리는 물론이고 주변 마을들을 다니며 인사를 다녔다.
마침, 연말이어서 마을 총회와 노인회 총회에 분주하게 참석했다.
그러면서 '정배교회 담임목사'라는 자리가 동네에서 지니는 위치와 무게감을 조금씩 느꼈다.

오늘(12/24) 참석한, 교회 바로 옆에 있는 정배초등학교 졸업식에서 더욱 환연히 실감했다.
내빈석에서 이장님들을 비롯한 마을 유지분들과 민망하게 나란히 앉았다.
교회를 대표해 장학금 증서를 전달하러 단상에 올랐다.

불현듯, 20여 년 전 읽었던 그때 그 시가 떠올랐다.
나를 '동네 목사'로 부르시고 이곳에 보내신 은혜를 고백한다.
동시에, 시와는 달리 쓸쓸함을 거둬내고 행복한 모습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기억되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