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2일 금요일

창세기 26장 “그 밤에 나타나신 하나님”

2026년 1월 2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6장 “그 밤에 나타나신 하나님” 찬송가 433, 438장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농사와 목축 모두 성공적인 결실을 그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종도 두었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그로 인해 그가 겪었던 시련 또한 함께 묘사합니다.

흔히 오해하듯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의 결과는 화려한 번영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이삭은 그가 머물러 살던 블레셋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았습니다. 특히나 26장 1절에 따르면 그곳에 큰 흉년이 있었기에 더욱더 이삭의 성공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아브라함의 종들이 팠던 이삭의 모든 우물을 막았습니다.

매우 치졸한 행동입니다. 우물은 광야 생활에서 생존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자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관리할 힘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삭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소유할 수 없다면 망쳐버리는 몹시 악한 행동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왕 아비멜렉은 이삭을 그 땅에서 쫓아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더 나아가 하나님께 복과 은혜를 입었기에 오히려 억울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동시에 깨달음에 이릅니다. 갑작스럽게 엄습하는 고난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따라서 도무지 납득하지 못할 고통 가운데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도무지 기대 못한 눈부신 영광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고난의 여정을 떠납니다. 16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그에게 자기들보다 크게 강성했다고 말합니다. 이삭이 가진 많은 종들을 불러 모아 위협하고 싸움을 벌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더 이상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랄 골짜기로 떠납니다. 묵묵히 참고 인내하며 다툼을 피했습니다. 많은 손해를 감수하고 희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시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골짜기에서 새로 판 우물을 그랄 목자들이 탐내 시비를 걸었습니다. 결국 이삭은 또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그 우물마저도 또 분쟁 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삭은 한 번 더 우물을 팠습니다. 성경이 이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물을 옮길 때 마다 무척 많은 번민과 고민이 그를 덮였을 겁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초라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모든 고난이 멈추었습니다. 안도와 탄식이 뒤섞인 밤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와 말씀 하십니다.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위대한 언약이 아버지를 거쳐 이삭에게 눈부시게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거듭 명심해야 합니다. 이토록 찬란한 장면은 이삭을 한없이 비참하게 한 고난 끝에 피어올랐습니다. 참고 물러서고 내어줄 때 진정 승리하고 성취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보여주는 위대한 역설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연거푸 우물을 빼앗긴 이삭과 같은 상실과 아픔, 불안과 공포에 빠질 때,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세우신 언약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복을 주시고 생명이 번성하게 되는 은혜를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참 승리의 주 하나님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과 영광은 시련과 패배와 좌절의 현실을 딛고 찾아온다는 진리를 말씀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연달아 우물을 뺏긴 이삭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시어 위로하셨듯이, 오늘 저희 삶 깊숙이 다가오시어 ‘두려워 말라’라고 위로하심을 믿습니다. 말씀으로 참된 힘을 얻게 하시며, 십자가의 복음으로 새해를 힘차게 열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31일 수요일

2025년 감사, "두 개의 골짜기"



 
10년 전 일이다. 우연히 만난 어른께서 당신 방에 걸린,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가리키며 내게 말씀하셨다.
"자네, 산이 왜 아름다운지 아는가?
굽이굽이 골짜기가 있기 때문이라네"
그 순간, 인생을 조망하는 값진 깨우침을 얻었다.

지난 한 해, 내 목회 여정에 가장 깊은 골짜기가 움푹 패였다.
애처로운 영혼이 비장하게 외치는 압박을 받았다.
그 어이없는 파장에 거칠게 휩쓸렸다.
감사하게도 그 물결로 말미암아 정배교회 담임 청빙을 받았다.

허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청빙 결정 후 사임 날까지 또 다른 골짜기가 새겨졌다.
헛헛한 쓴웃음을 내쉬며 어지럽게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또한 감사하게도 그 모두를 덮는, 과분한 환대와 사랑 속에 부임하고 적응하는 중이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한 해를 보냈다.
두 개의 골짜기를 힘겹게 지나며 더욱 다져지고 단단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예상치도 못한 기괴한 시련에 대한 아픔과, 그로 말미암아 내게 가장 합당한 길로 이끄시는 은혜를 동시에 고백한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에 소중한 힘이 되준 사랑하는 이들과 벗들에게,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골짜기를 아우르는 웅장한 산 풍경을 바라볼 수 있어서,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생생히 눈을 뜰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그리고 내게 (그가 업신여겼던) '글쓰기'라는 무기가 있어 더욱 감사하다.

덧. 이 글도 그가 몰래 훔쳐볼 지 궁금하다.
지난번처럼 또다시 실수로 '좋아요'를 누른다면, 굳이 취소하지 말기 바란다. 그게 더 측은하니까.

2025년 12월 30일 화요일

창세기 25장 “가볍게 여기다”

2025년 12월 30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5장 “가볍게 여기다” 찬송가 93, 94장

한 시대가 저물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이삭은 아내 리브가 사이에서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성경은 두 형제의 요란한 출생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22~23절 읽겠습니다.

22 그 아들들이 그의 태 속에서 서로 싸우는지라 그가 이르되 이럴 경우에는 내가 어찌할꼬 하고 가서 여호와께 묻자온대 23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두 국민이 네 태중에 있구나 두 민족이 네 복중에서부터 나누이리라 이 족속이 저 족속보다 강하겠고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 하셨더라

두 쌍둥이는 엄마 뱃속에서부터 격하게 싸웠습니다. 이로 인해 어머니 리브가가 하나님께 기도할 정도입니다. 두 아들 사이가 태어나기 전부터 얼마나 격렬한 갈등 관계였는지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답은 놀랍습니다. 쌍둥이는 태중에서만 싸우지 않습니다. 두 쌍둥이 모두, 각자 커다란 민족을 이루어 나뉘게 됩니다. 그런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길 것입니다. 즉, 형이 동생보다 낮아지게 됩니다. 기존 사회 질서를 뒤집어 지고 새로운 관계가 펼쳐질 것을 하나님은 예고하셨습니다.

마침내 출산일이 다가왔습니다. 첫째는 태어나면서부터 온 몸에 털이 나 있었습니다. 그 털 색깔이 붉어서, ‘붉다’라는 의미를 지은 ‘에서’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둘째는 그런 형의 발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런 까닭에 발꿈치를 잡다는 뜻의 ‘야곱’이라고 이름 지었습니다. 굉장히 상징적인 장면입니다. 막연히 출산 순간 벌어진 우스꽝스러운 해프닝이 아닙니다. 이 후 둘 사이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갈등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창세기는 금세 두 사람이 성인이 된 후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태어날 때와 마찬가지로 다 자라서도 둘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입니다. 에서는 익숙한 사냥꾼입니다. 외향적이고 활동적인 사람입니다. 반면 야곱은 내향적이고 조용한 성격입니다. 형과 달리 장막 안에서, 오늘날로 따지면 집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이런 두 사람의 기질 차이는 부모의 엇나간 편애로 이어집니다. 아버지 이삭은 장남 에서가 사냥해서 잡아온 고기를 좋아했습니다. 반면 어머니 리브가는 차남 야곱과 함께 집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며 정을 쌓았습니다. 야곱과 에서의 갈등이 부모에게로 번져나갈 것을 암시하는 장면입니다. 

급기야 결정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어느 날 사냥하고 돌아온 에서는 무척 허기져 했습니다. 고대의 사냥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은 체력과 집중력을 요구합니다. 너무나 지치고 피곤한 상태였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야곱이 죽을 쑤고 있었습니다. 극도의 공복감에 시달릴 때 눈 앞에 놓인, 막 요리한 음식이 지닌 강력한 힘을 쉽게 공감할 것입니다. 평소 거칠고 충동적인 성향의 에서는 더욱더 그러했습니다. 동생에게 붉은 죽을 달라고 합니다. 

야곱은 그에게 뜻 밖의 요구를 합니다. 바로 ‘장자의 명분’입니다. 그러자 에서는 조금도 주저함 없이 장자의 명분과 붉은 죽을 바꿉니다. 그 뿐만 아니라 32절에 보면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라고 말합니다. 당장 허기진 배를 채워줄 음식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장자의 명분보다 훨씬 더 유익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장자의 명분”이라는 말이 31~34절에 무려 넉 절에 걸쳐 한 번씩 계속 등장합니다. 에서의 우매함을 반복하여 지적합니다. 결정적으로 매듭짓는 34절 함께 읽겠습니다.

34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

창세기 저자는 에서가 저지른 치명적인 실수의 원인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바로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긴 것입니다. 더욱 정확하게는 아브라함의 장손으로, 이삭의 장남으로 태어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을 가볍게 여겼습니다. 자칫 운명론으로 이해할지 몰라 조심스럽지만, 하나님께서 리브가에게 예고한 대로 그가 동생에게서 밀려난 결정적인 이유입니다.

단지 특정 음식을 먹었느냐, 혹은 그 과정에서 실수를 했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에서의 일관된 삶의 태도를 보여줍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드러나는 내면의 중심을 보여줍니다. 그는 당장 먹고 사는 일에 급급하느라 중요하고 궁극적인 가치를 소홀히 하고 무시하였습니다. 그 결과 할아버지로부터 이어온 언약을 잇는 사명을 무시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말씀 가운데 우리 자신에게도 질문해야 합니다. 우리는 과연 인생에서 무엇에 무게를 두고 있습니다. 어느 것을 더 무겁게 여기고 어떤 것을 가볍게 여기고 있습니까? 제가 늘 강조하듯이 너무 비장하게 듣지 마시길 바랍니다. 현실을 살아가기에 자연스런 욕망에 눈이 가는 것 자체는 사실 자연스럽고 어떤 면에서는 당연합니다. 다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생명의 언약을 완성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나라 복음을 보다 더 인생의 중심에 두시길 바랍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드러난 참 진리를 진정 무겁게 여기시길 바랍니다.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 날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내렸던 무수한 선택들과 삶의 태도를 복음과 진리 가운데 되짚어 보고 새 해를, 새로운 마음으로 맞이하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저희 삶의 중심이신 주 하나님
한해의 마지막 날, 새벽을 깨워 말씀 앞에 나아가게 하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때로 저희 또한 에서와 같은 어리석음에 빠지기도 합니다. 당장의 허기에 지쳐 인생에서 진정 중요한 것을 가볍게 여길 때가 너무나 많습니다.
저희 연약함을 불쌍히 여기시고 삶의 초점을 하나님 나라 복음으로 정확히 맞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긍지를 소중히 품게 하시고 진리로 말미암은 참 생명과 기쁨 충만히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29일 월요일

창세기 24장 34~67절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2025년 12월 30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4장 34~67절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찬송가 304, 310장

어제 읽은 24장 전반부는 사라가 죽은 후 아브라함이 이삭의 아내를 구하는 내용을 기록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깊이 신뢰하는 종을 멀리 고향 땅으로 보내 막중한 임무를 맡깁니다. 종은 고된 여정 끝에 도착해 자기는 물론이고 낙타에게 까지 물을 주는 처녀를 곧 주인의 며느리감으로 알겠다는 기도를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응답하시어 나홀의 아들, 브두엘의 딸 리브가를 보내셨습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리브가의 오빠 라반의 초대를 받고 그의 집에 들어가 지금까지 자기가 겪은 일들을 고스란히 반복해 들려줍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그는 이렇게 마무리 합니다. 49절 함께 읽겠습니다. 

49 이제 당신들이 인자함과 진실함으로 내 주인을 대접하려거든 내게 알게 해 주시고 그렇지 아니할지라도 내게 알게 해 주셔서 내가 우로든지 좌로든지 행하게 하소서

여기서 주목해야 할 두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인자함과 진실함’입니다. 히브리어로는 각각 <헤세드>와 <에메트>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묘사할 때 자주 사용하는 표현입니다. 이 두 단어가 24장에서 이미 한 번 등장했습니다. 바로 27절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27 이르되 나의 주인 아브라함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나이다 나의 주인에게 주의 사랑과 성실을 그치지 아니하셨사오며 여호와께서 길에서 나를 인도하사 내 주인의 동생 집에 이르게 하셨나이다 하니라

종이 리브가를 만난 후 하나님을 찬양하며 “주의 사랑과 성실”을 언급합니다. 그 두 단어도 <헤세드>와 <에메트>입니다. 아브라함의 종은 분명히 고백합니다. 리브가를 만난건 우연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을 향한 한결같은 사랑과 주님의 성실하심 덕분입니다. 따라서 그는 리브가의 아버지와 오빠에게 단순히 딸을 달라고 요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계획에 동참하라고 당부합니다. 이러한 종의 설득에 가족들은 마음이 움직였습니다. 리브가를 그에게 내주었습니다.

하지만 이제 그녀를 언제 다시 볼지 모릅니다. 지금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가 아닙니다. 사랑하는 딸과 누이와 만날 기약을 잡기 어렵습니다. 그런 까닭에 열흘 만이라도 좀더 시간을 보내게 해달라고 아브라함의 종에게 간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종은 그럴 수 없다고 서두르며 거절하였습니다. 결국 리브가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의아하게도 그녀는 선뜻 종을 당장 따라나서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리브가는 가족들의 축복을 들으며 낙타를 타고 먼 길을 떠났습니다.

마침내 아브라함의 집에 도착하였습니다. 그 때, 성경 전체에서 가장 문학적으로 아름다운 장면이 펼쳐집니다. 해질 무렵 이삭은 들판을 거닐고 있었습니다. 그 때 저 멀리서 아버지가 보낸 종이 타고 온 낙타무리가 보였습니다. 그런 이삭을 리브가가 발견합니다. 종에게 저기 보이는 저 남자가 자기 남편될 사람인지 물었습니다. 그가 맞다고 하자 리브가는 너울로 얼굴을 가리며 신부로서 몸가짐을 정돈하였습니다. 낙타에서 내린 종은 이삭에게 그의 아내를 데려오기까지 있었던 일들을 들려주었습니다. 이 모든 상황을 매듭짓는 67절 함께 읽겠습니다.

67 이삭이 리브가를 인도하여 그의 어머니 사라의 장막으로 들이고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고 사랑하였으니 이삭이 그의 어머니를 장례한 후에 위로를 얻었더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베푸신 한결 같은 사랑과 신실함은 위로로 열매 맺었습니다. 어머니를 떠나 보내고 남은 천막은 물론이고 이삭의 공허한 영혼에도 리브가가 들어와 따스한 온기로 가득 채웠습니다. 이삭에게 그녀는 평범한 아내가 아니라 인자와 진실함으로 돌보시고 이끄시는 하나님의 생생한 손길 그 자체였습니다.

이와 같은 은혜가 우리 모두에게도 함께 하심을 믿습니다. 때론 저마다의 사라를 잃고 깊은 상심에 빠지곤 합니다. 저마다의 들판을 스산하게 배회하고는 합니다. 그런 모든 사람을 위해 예수님께서 구유에 누인 한 아기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주님의 사랑과 신실함을 온전히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와 같은 놀라운 은혜를 더욱더 우리 마음의 중심에 품고 간직하며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영원히 사랑과 성실하심으로 충만하신 주 하나님
아브라함 종의 걸음을 이끄시어 리브가를 이삭의 아내로 삼으신 그 모든 여정에 함께 하신 놀라운 은혜를 찬양합니다. 순간순간마다 주님의 인자하심과 신실하심으로 동행하였음을 말씀으로 확인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저희 인생길 역시 신실하신 사랑으로 날마다 함께 하심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이삭이 리브가를 통해 따뜻한 위로를 얻었듯이, 성탄의 주인으로 참 빛을 이 땅에 비춘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진실한 회복을 누리길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주위 사람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28일 일요일

마태복음 22장 34~40절 "가장 큰 계명, 사랑"

2025년 12월 28일, 정배교회 주일예배 설교,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2장 34~40절 "가장 큰 계명, 사랑"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우리 교회, 교회학교 학생 한 명이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잠시 이성을 잃고 땅바닥에 떨어져 있던 못을 주어서 예배당 벽에 이렇게 낙서 했습니다.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

그리고 이 천년이 흘러 서기 4025년이 되었습니다. 우리교회 예배당이 무너지지 않고 형체를 잘 지킨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세계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자기들 시대에서 2천년 전인 21세기 대한민국 기독교인의 생활상을 알기 위해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건물 벽 한쪽에 새겨진, 당시 기준으로는 고대 한국어로 쓴 짧은 문장을 발견합니다. 무엇이죠?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좀 더 상상을 발전시켜 보겠습니다. 그 때 남미 대륙에 사는 한 청년이 이 발굴에 대한 번역 기록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판단을 내릴까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아, 이 천년 전에 동아시아에 있었던 한국이라는 나라는 ‘배고파 죽겠다.’라고 괴로워하며 글자를 새길 정도로 무척 굶주리고 가난한 나라였구나!’

여러분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오해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2025년 대한민국과 4025년 남미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문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저러해서 죽겠다.’라는 우리말 강조 표현에는 이 땅의 아픈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가난과 질병과 전쟁 등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던 험난한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옛 문장에 담긴 이러한 배경을 모른 채 글자만 쳐다본다면 분명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것은 성경을 읽을 때도 흔히 생기는 오류입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문자’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사람 사이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화 수단입니다. 하지만 맥락에서 벗어나면 뜻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가깝게 지낸 가족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사소한 말실수로 관계가 틀어지곤 합니다. 이 사실을 성경 해석에도 분명히 유념해야 합니다.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금 드린 이야기처럼 동아시아와 남미 사이, 이 천년의 문화와 역사 차이는 필연적으로 의사소통의 오해와 왜곡을 가져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은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에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기준으로 보면 삼국 시대가 막 시작할 때입니다. 즉,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고 주몽이 활을 쏘며 고구려를 세울 때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심지어 구약 성경은 그보다 훨씬 전에, 너무나 먼 옛날에 기록, 편집했습니다. 게다가 서아시아와 유럽의 고대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로 적었습니다. 우리가 가진 한글 성경은 그것을 ‘번역’한 책입니다.

정리하자면 성경은 절대로 하늘로부터 한순간에 쿵! 하고 이 세상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우리와 전혀 다른 전통과 상황 속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성경을 반드시 원전으로만 봐야 하고, 번역 성경은 무가치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지금 우리 손에 들린 성경책을 사랑하고 묵상해도 충분히 신앙의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다만 그러기 위해, 성경이 ‘언어로서 한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면서 참사람이듯, 성경 역시 신비로운 모순과 조화 속에 생명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에 대한, 이런 기초 상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납니다. 그들은 말씀 전체가 보여주는 원대한 그림과 풍경에는 관심 없습니다. 대신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며 무리한 자기 신념을 고집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주님이 본래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참 멀어져 있습니다. 어리석은 분노와 증오로 가득 차서 성경을 들이밀며 다른 사람을 함부로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기 보다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도 성경을 왜곡하며 자신의 어리석은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4~36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22장 15절부터 시작하는 ‘논쟁 단락’ 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둘러싸여 당신의 권위를 변론하셨습니다. 22장 15~22절은 로마 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논란을 들려줍니다. 본문 바로 앞인 23~33절은 부활을 오해한 사두개인들을 논박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다음으로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그들은 사두개인과 평소 대립하던 사이입니다. 현재 온 민족이 처한 위기에 대한 진단과 대안이 전혀 달랐습니다. 그런 까닭에 두 집단 사이에는 늘 팽팽한 긴장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두개인의 논리가 무참히 깨지는 모습을 보며 바리새인은 몹시 통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예수라는 사나이는 몹시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과는 정반대로 이해하고 가르쳤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완벽히 지키는 것에 전혀 관심 없었습니다. 세세한 율법 조항들을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그들 눈에 더럽기 그지 않는 창기와 세리들과 서슴없이 어울렸습니다. 당시 신앙 전통으로 볼 때, 경악스러운 죄를 거침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리새인 중에 ‘한 율법사’가 대표선수로 나섰습니다. 주님께 나아가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에서 어느 말씀이 가장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기발하고 날카로운 질문이 아닙니다.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 가장 뜨겁게 토론하던 주제입니다. 따라서 본문 속 율법사의 의도는 정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다는, 답을 듣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예수의 수준과 실력을 만천하에 드러내어 망신 주려는 게 그의 의도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교활한 계략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자무식 나사렛 촌놈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럴듯한 속임수와 능숙한 언변으로 무지몽매한 백성을 속였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말씀에 대해 깊은 토론을 시작하면 그 사기꾼이 금세 바닥을 드러낼 거라고 율법사는 기대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이 때 자칫 어설프게 대답했다가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사람으로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군중을 열광시킨 주님의 가르침이 한순간에 평가절하 될 수 있는 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37~3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먼저 신명기 6장 5절을 언급하시며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라고 하셨습니다. 바로, 우리의 전 존재와 온 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명령입니다.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이어서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면서 “이웃 사랑”을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눈 여겨볼 점은, 그 사이에 있는 “둘째도 그와 같으니”입니다. 이를 통해 이웃 사랑은 앞서 말한 하나님 사랑보다 한 층 낮은 차원이 아니라,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이웃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섬기지 않으면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와 자기만족에 취한 그릇된 이웃 사랑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 모두를 끝맺는, 40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성경의 “강령”(綱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령”이라는 다소 어려운 한자말로 번역한 헬라어는 <크레만타이>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곧바로 옮기면 “걸려있다.” 혹은 “의존 하다.”라는 뜻입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사진을 준비했습니다. 화면으로 보시는 빌딩은 두바이에 있는 “부르즈 할리파”(Burj Khalifa)입니다. 지상 163층에 828m로, 현재 기준 세계 최고 높이를 자랑합니다. TV를 비롯한 각종 매체에서 한 번쯤을 보셨을 겁니다. 어쩌면 직접 가보신 분도 계실 겁니다. 이러한 마천루를 올려다보면 현대 건축기술에 경이로움을 느낍니다. 

어떻게 저렇게 높은 건물이 강한 바람과 지진에도 불구하고 우뚝 서 있을 수 있을까요? 바로 그 중심에 있는 “코어월”(core wall) 덕분입니다. 우리말로 거칠게 옮기면 ‘핵심 벽체’ 정도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관련해서 다음 사진 보시겠습니다. 


실제 부르즈 할리파의 코어월입니다. 가장 핵심에 있는 기둥을 중심으로 빌딩 전체의 무게 균형을 설계한 것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 화려한 장식으로 꾸민다 할지라도 중심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어떤 건물도 제대로 세울 수 없습니다. 척추와 같은 핵심 벽체를 땅에 깊이 박아 튼튼하게 올릴 때, 쓰러지지 않고 본래 모습을 갖추고 자기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경 전체의 모든 구절이 기대어 걸려있는 ‘핵심’이라는 뜻입니다. 즉, 성경이라는 위대한 건물의 중심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핵심 축이 바로 ‘사랑’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진리를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은 이른바 <쉐마>이라고 불리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메주자’라고 부르는 작은 상자에 넣어 출입구에 붙여 두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는 구약 성경의 중심입니다. 그 중에서도 19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십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조항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레위기 19장 18절, 한 구절만이 아니라 19장 전체를 인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이웃 사랑은 십계명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사실입니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랍비 아키바 역시 ‘이웃 사랑’이 최고의 율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예수님 말씀은 낯선 교훈이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그 시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정작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진리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샌가 그럴듯한 거짓이 복음을 대신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담백한 진리를 통해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셨습니다.

사자성어 중에 ‘대미필담’(大味必淡)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정말 좋은 맛이란 반드시 淡白(담백)하다.”이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먹어도 질리지 않는, 밥과 물을 떠올리면 금세 이해하실 겁니다. 단순히 요리에 대한 교훈을 넘어 인생의 깊은 지혜를 담고 있습니다. 사람은 연약하기에 자극적이고 화려한 무언가에 쉽게 현혹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요란한 이벤트와 프로그램으로 소란스럽지만 정작 본질을 놓치는 모습을 종종 목격하곤 합니다. 그 대신 가장 뻔하고 평범하게 들리는 진리, ‘사랑’에 참 진리가 담겨 있다는 진실을 우리 주님의 말씀으로 거듭 확인합니다.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어찌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침략으로 멸망 직전에 이른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열정적인 신앙을 불태웠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입니다. 거창하고 비장한 신앙 생활을 강요했습니다. 특별히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사’는 오늘날 신학자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필사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5%도 되지 않았던 그 시절입니다. 실로, 막강한 권위였습니다. 문제는 율법사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의 각종 정결 규정을 100%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특별히 물이 부족한 사막 지대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절대다수의 백성은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어기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약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말씀으로 위로 하기는커녕 함부로 비난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믿음 없는 더러운 사람들이라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의 경건함을 더욱 내세우고 으스대기 일쑤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성경 글자에는 철저히 집착했지만 정작 그 본질인 “사랑”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이용해 그들을 착취하고 억눌렀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마저 왜곡시키며 복음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추악한 죄악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은 종교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말씀의 본질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권위를 함부로 휘두르며 거룩한 소명을 모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는 그럴듯하게 떠들어 댔지만 실상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거창하게 외쳤지만 정작 본인들이 주위 사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더욱 굳게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 자체, 그 분의 인격과 삶이 곧, 말씀입니다. 주님은 성경의 핵심에 대해 단지 입술로만 설명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아기로 이 땅에, 우리와 가장 가까이에 찾아오셔서 당신의 위대한 사랑을 보이셨습니다. 복음의 본질인 “사랑”을 이 땅에서 직접 살아내셨습니다. 모든 죄인을 살리기 원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의 영원한 증거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복음은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한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찬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크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자 부르심입니다. 이와 같은 소중한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이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성경적으로” 혹은 “성경대로”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정말 귀한 태도입니다. 인간의 연약한 이성과 경험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삶의 방향을 결정하려는 자세는 그 자체로 너무나 훌륭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대로’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정반대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자기 뜻과 욕심을 고집하기 위해 마음에 드는 성경 구절 몇 개를 억지로 들이밀며, 그 권위를 훔쳐 휘두르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 지식을 자랑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마음 중심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십자가 사랑을 품고 겸손히 그리고 잠잠히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대로’라는 말은 ‘사랑으로’라는 조건과 합할 때 비로소 생명력을 지닙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사랑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탐욕으로 포장한 사랑이 아니라, 참 사랑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러했듯이 거짓을 몰아내고 어둠을 이겨내며 절망에 맞서는, 진리와 빛과 희망의 사랑을 성경을 읽으며 내 삶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긍정하게 합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좌절과 한계를 십자가 그늘 아래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탐욕을 위해 말씀을 이용하려는 바리새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갖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를 믿음으로 분명히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 안에 인간의 실수가 조금도 담겨있지 않거나 모든 내용이 과학이나 역사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놀랍고도 깊은 뜻 가운데 굳이 연약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어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진정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글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죽은 문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으로 변하게 합니다.


성경은 마치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은 분명 창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얼룩과 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그러한 흠결을 보고 창문 자체를 무시하거나 외면 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곤 합니다.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창문 유리 혹은 창틀에만 눈길을 멈추고 거기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문이 있는 까닭은 결코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건너편에 있는 포근한 풍경과 햇살을 전해주는 것이 창문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창문의 흠집으로 그 전체 가치를 폄하하지 않습니다. 혹은 유리의 값어치에만 지나치게 몰두하지도 않습니다. 창문 너머의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봅니다.

성경을 대하는 바른 태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비록 상상 속 이야기이지만 4025년에 발견한, 이천년 전 먼 나라의 예배당 발굴기록을 읽는 사람은 벽 한 쪽 구석에 있는 작은 낙서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짧은 문장을 두고, 독단적인 이해와 고집으로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 대신 건물 전체의 웅장한 모습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배당이 오랜 시간 품어온 따스한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그 의미를 천천히 곱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의 문자 혹은 부분적인 내용에 집착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바라보길 기대하십니다. 

어느새 한 해의 마지막을 향해 갑니다. 2025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마지막 주일 예배를 드립니다. 지난 1년을 돌아보고 새해를 맞이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다름아닌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에 담긴 찬란하게 눈부신 사랑으로 지나온 아픔과 좌절, 기쁨과 감사를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또한 사랑으로 말씀하신 희망으로 2026년을 맞이하는 모두가 되길 소망합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품으며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새롭게 확인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올바르게 섬기고 사랑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언어를 사용하시어 성경을 기록하시고 우리 손에 전해주신 이유를 다시금 확인하였습니다. 말씀에 담긴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바르게 깨닫고 경험하며 그 뜻 가운데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옵소서.
성경을 왜곡하고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탐욕을 멈추고, 진리 가운데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는 거룩한 습관을 지키며, 그 안에 담긴 놀랍고 풍성한 세계를 맛보고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