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31일 목요일

히브리서 11장 8~16절, “믿음을 따라 살다가”

2022년 3월 30일, 포항제일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히브리서 11장 8~16절, “믿음을 따라 살다가”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는 믿음을 따라 멀리 떠나왔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1889년 10월 2일, 한 호주 청년이 부산항에 내렸습니다. 긴장과 설렘이 섞인 표정 위로 낯선 가을 바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죠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입니다. 데이비스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젊은 나이에 교육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가정을 꾸리고 여유를 누리며 살아도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가슴 깊이 간직했던 소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파의 일꾼으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였습니다. 어느 날 조선선교의 필요성과 급박성을 호소하는 글을 읽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단의 제1호 조선선교사로 파송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구한말 참으로 척박했던 이 땅에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그는 금세 다른 선교사들과 친해지고 선교사공의회의 서기가 될 정도로 실력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데이비스는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더욱더 험난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서울에는 선교사들이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새로운 선교지를 찾기 위해 도보로 기나긴 답사여행을 떠났습니다. 그가 선택한 곳은 바로 영남지방이었습니다. 부산을 목적지로 하고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주간의 무리한 여정 가운데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그 결과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폐렴까지 겹쳤습니다. 겨우 부산에 도착하긴 했지만 금세 사경을 헤맸습니다. 결국 다음 날인 1890년 4월 5일, 그가 조선 땅을 밟은 지 육 개월 만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서른세 살 이었습니다.

너무나 황망한 죽음입니다. 앞날이 촉망받는 유능한 청년이 과감히 헌신하며 선교지로 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당연히 그에게 커다란 성과를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희생에 따른 결실을 얻기는커녕 채 꽃 피우기도 전에 허무한 결과를 맞닥뜨리곤 합니다. 힘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만의 경우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다는 것은 곧 ‘떠남’을 의미합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격적으로 고백한다는 것은 죄의 질서와 이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뜻한 풍요를 주었던 익숙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기회와 소유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 극적인 보상이 주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정반대입니다. 더 큰 상실을 겪고 방황 하곤 합니다. 후회가 밀려올 때도 많습니다. 떠나온 그곳을 계속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존재 자체를 의심하기도 있습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믿음 여정의 이면입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모순을 성경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 역시 고향을 벗어나 멀리 떠나왔습니다. 하지만 별 이룬 것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차근히 돌이켜보면 너무나 스산한 인생을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였을 때 ‘야훼’라는, 너무나 낯선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지목하여 부르셨습니다. 그 만남은 지금까지 그가 익히 알아왔던 모든 신들이 거짓이었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방황하며 오랫동안 갈구했던 참 진리를 마침내 발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은 명확합니다. 바로 큰 민족을 이루어 그의 이름을 널리 떨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지금껏 그저 아들 하나만이라도 낳아서 자기 이름을 이어주길 간절히 바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다른 높은 차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치 한 모금의 생수를 구한 사람에게 드넓은 호수를, 한 움큼의 흙을 원한 사람에게 드높은 산을 허락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과감히 믿음의 여정을 떠났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우리가 두고두고 본받을 만한 너무나 위대한 신앙의 한 장면입니다. 믿음에 관한 성경에서 가장 눈부신 묘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냉정하게 물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께로부터 약속받은 것을 정말 얻었을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수천 년 간의 종교전통을 잠시 멀리 치워두고 철저히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주님의 찬란한 언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대신 숱한 시련과 마주했습니다. 권력자들의 기세에 눌려 아내를 누이라고 무려 두 차례나 속이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자식처럼 키운 조카 롯에게 배신당해 많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타들어가는 속을 부여잡고 아무리 기다려도 사라의 태는 도무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나이 백 살에 아들 하나를 힘들게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삭을 불태워 바치라는 잔인한 요구를 하나님께로부터 듣게 됩니다. 물론 우리는 그 사건의 훈훈한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의 목숨은 무사히 건졌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그날, 그 모리아 산 위에서 아브라함의 내면 전체가 얼마나 끔찍하게 뒤틀렸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기나긴 나그네 길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내 사라가 먼저 누워 있는 막벨라 굴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모습을 창세기 25장 9절은 이렇게 쓸쓸하게 묘사합니다. 

9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고요히 잠든 아브라함의 곁을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지켜주었습니다. 물론 장례식에 이 두 사람만 있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후처 그두라를 통해 낳은 자녀들과 여러명의 종들도 분명 함께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온전히 이을 아들은 알다시피 이삭 혼자입니다. 게다가 이삭 역시 아버지처럼 결혼하고 꽤 오랜 뒤에 느지막이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생전에 직접 눈으로 본 명실상부한 후손은 이삭과 야곱과 에서, 이렇게 겨우 세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눈에는 평범한 장례식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식의 숫자를 망자의 명예와 동일시했던 옛 사람들에게는 절대로 단순히 넘길 장면이 아닙니다. 다른 족장들은 당시 대가족 문화를 따라 적어도 수십 명, 많으면 백 명이 훌쩍 넘는 자손들에 둘러싸여 성대하게 장사를 치렀을 것입니다. 

그것과 비교하면 아브라함의 장례 풍경은 지극히 초라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허다한 별이나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는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큰 민족을 이루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는 언약이 공허한 허풍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아브라함 부부가 이 땅에서 걸어왔던 고단한 인생길을 본문 13절 전반부는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습니다.”(새번역)

너무나 아프고 쓰린 문장입니다. 비장하고 서글픈 삶의 질곡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감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따를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본문 13절 전체를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정확히 꿰뚫어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그 시대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아들을 줄줄이 낳아 으스대고 떵떵거리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히는 언약의 깊이를 헤아렸습니다. 거기에 온 삶을 걸고 진심을 담아 아멘을 외쳤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바로 ‘나그네’입니다.

이것을 14절은 ‘본향 찾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삶의 결정적 운명과 진정한 평가가 지금, 이곳에서 끝나지 않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당장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돈과 명예가 있는지를 따지고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고된 나그네 생활을 주저 없이 포기 했을 것입니다. 수천 년 전에 이미 고도의 문명을 이루었던 고향 땅 우르에 돌아가 다시금 안락한 삶을 누리려 하였을 것 입니다.

대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하늘 고향, 즉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본문 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 부부의 시선은 더 먼 곳을 향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이 기꺼이 이루실 언약의 절정입니다. 그 하늘 본향은 공간적으로나 시간적으로나 저 멀리에 있습니다. 지금 이 곳에서 볼 때는 까마득하기만 합니다. 흐릿하게만 보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11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미쁘심, 즉 신실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대단하지 않은 인생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삶의 순간순간, 그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과의 동행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벧엘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 조카 롯에게 바보처럼 다 양보하고 황량한 땅에 남겨진 그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셨을 때, 어느 한 낮에 세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 오셔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갓 태어난 아들 이삭의 신비로운 눈망울과 마주쳤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시작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점점 더 깨달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비록 사람들 눈에는 그의 죽음이 허망해 보일지 모릅니다. 막벨라 굴 앞에서의 한적한 장례식 모습이 그런 감정을 더욱 부추깁니다. 어쩌면 그를 두고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위대한 언약을 완전하게 이루시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어스름하게 보았던 하나님 나라를 또렷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막연하게 경험했던 주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이루어가셨습니다. 세상의 질서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이시며 몸소 나그네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길 끝에,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하는 까닭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포항제일교회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문을 억지로 억누르는 무모한 의지력이 아닙니다. 무작정 내달리는 맹신도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생의 그 어떤 모래 바람과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하늘 본향을 향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그토록 사모했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 곧 새 예루살렘을 요한계시록은 구체적으로 이렇게 묘사합니다. 계시록 21장 2~4절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성도라 할지라도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여전히 질병은 몸과 마음을 괴롭힙니다. 가난은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줍니다. 가족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켜 고통으로 내몹니다. 때로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일 때가 있습니다. 복음이 공허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거짓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처참한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아픔이 가득합니다. 그것에 비해 주님은 너무나 무기력한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쉽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현실을 도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세만을 바라보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믿음을 따라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다 죽어간 모든 사람들의 눈물을 직접 닦아주시는 하나님, 새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신실하신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믿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으시고 진정한 결실을 이루심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해 드렸던 죠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그를 파송한 고국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데이비스가 숨을 거두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890년 5월 7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해외선교위원회에서는 우리가 한국에 보낸 첫 번째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의 죽음이라는 큰 손실을 기록할 것을 원한다. 그의 열성적 헌신, 학자로서의 탁월한 재능, 주목할 만한 지속적인 신앙생활, 다른 사람에 대한 강렬한 영향력 등은 새로운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스데반이 일찍 부름을 받고 안식과 보상을 받았던 것처럼 데이비스를 분명하게 축복하셨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감화를 받아 그의 정신을 알리고 그의 열심을 본받아 우리의 옛 형제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영광의 왕관을 받기를 바란다.”

호주 장로교는 이 때부터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조선선교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습니다. 곳곳에 교회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민족의 고난에 함께하며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넓게 보자면 우리 포항제일교회도 그 영향아래 있습니다. 

따라서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분명 허망해 보이지만 결코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눈부신 복음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그 중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또한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어진 삶의 현장에 충실하되 눈길은 하늘 본향을 향해야 합니다. 주님의 언약을 깊이 헤아리고 진심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 땅에서 믿음 따라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처럼 남루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앙 여정을 기쁨으로 묵묵히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언약을 맺으시며 마침내 새예루살렘을 완성시키실 그 하나님께서 참으로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길 소망합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본향을 사모하며 인생의 발걸음을 옮기는 나그네임을 고백합니다. 비록 이 세상에서 거두는 약속의 결실은 작고 초라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저희를 통해 이루실 주님의 다스림은 지극히 크고 위대하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 따라 주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고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약 하신 그대로 새예루살렘을 완성하시고 그 안으로 저희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2년 3월 27일 일요일

누가복음 23장 1~12절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을 때”

2022년 3월 23일, 수,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23장 1~12절 “두 사람이 친구가 되었을 때”

1 무리가 다 일어나 예수를 빌라도에게 끌고 가서
2 고발하여 이르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우리 백성을 미혹하고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하며 자칭 왕 그리스도라 하더이다 하니
3 빌라도가 예수께 물어 이르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대답하여 이르시되 네 말이 옳도다
4 빌라도가 대제사장들과 무리에게 이르되 내가 보니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하니
5 무리가 더욱 강하게 말하되 그가 온 유대에서 가르치고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하여 여기까지 와서 백성을 소동하게 하나이다
6 빌라도가 듣고 그가 갈릴리 사람이냐 물어
7 헤롯의 관할에 속한 줄을 알고 헤롯에게 보내니 그 때에 헤롯이 예루살렘에 있더라
8 헤롯이 예수를 보고 매우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9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아니하시니
10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서서 힘써 고발하더라
11 헤롯이 그 군인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예수님은 우리의 왕이십니다. 오직 주님만이 우리가 참으로 믿고 따를 삶의 주인입니다. 그 누구보다 예수님의 다스림을 신뢰하고 의지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죄인으로 최급당하며 고난 당하셨습니다. 그 가운데 본문은 두 명의 권력자를 등장시킵니다. 바로 총독 빌라도와 분봉왕 헤롯입니다. 이 두 사람과의 대조를 통해 왕이신 예수님이 펼치는 다스림의 본질을 깨닫게 됩니다.

어제 읽은 본문인 누가복음 22장 마지막 단락에서 대제사장 무리는 자기들만의 재판에서 예수님에 대한 판결을 끝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하는 신성모독자로 자백을 받아냈다고 판단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권한이 없었습니다. 따라서 로마 총독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끌고가 고발했습니다. 

고발 내용이 본문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자기들 재판에서는 나오지 않았던 허위사실을 교묘하게 껴 넣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백성들이 로마 황제에게 세금을 내지 못하게 선동했다는 음해입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지로 로마 역시 조세 정책에 심혈을 기울여 관심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제사장들의 의도는 뻔합니다. 예수는 이렇게 로마에도 위험한 인물이니 얼른 처형시키라는 메시지입니다. 하지만 총독 빌라도는 예수님을 직접 심문한 다음에 이렇게 선언합니다. “이 사람에게 죄가 없도다!” 이 장면은 얼핏 빌라도를 의인처럼 보이게 합니다. 분노에 가득찬 제사장들에 둘러싸여 홀로 진리를 지키는 훌륭한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빌라도는 단순한 인물이 아닙니다. 로마의 정교한 인재 양육 시스템이 낳은 엘리트입니다. 게다가 당시 제국 전체에서 가장 치열한 저항이 빈번하게 일어난 유대땅에 총독으로 파견된 것은 우연이 아닙니다. 그는 동물적인 정치감각을 가진 사람입니다. 따라서 빌라도가 예수님의 무죄를 선언한 것은 순수한 의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둘러싼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교활한 음모를 직감했기 때문입니다. 괜히 함부러 끼어들었다가는 큰 화를 입을게 분명했습니다.

빌라도가 순순히 자기들 뜻에 따르지 않자 유대교 지도자들은 즉각 반발합니다. 더욱 강한어조로 빌라도에게 예수님을 고발합니다. 그가 고향 갈릴리에서부터 시작해서 온 백성들을 현혹시키고 선동했다고 말합니다. 이 때, ‘갈릴리’라는 지명을 듣는 순간 빌라도는 곧바로 살길을 찾았습니다. 예수가 갈릴리 사람인지를 되물어 확인했습니다. 

마침 갈릴리를 다스리는 분봉왕 헤롯이 유월절을 맞아 예루살렘에 나와 있었습니다. 빌라도는 좋은 기회라고 여기며 예수님을 헤롯에게 보냈습니다. 예수님과 관련된 복잡한 소동에서 벗어나 책임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반면 헤롯은 그런 예수님을 부담스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기뻐했습니다. 이 역시 주님을 향한 순수한 호의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향한 호기심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관리하는 갈릴리에서 주로 활동했던 예수님에 대한 얘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역에 대해 부담을 가지고 위협으로 느낄법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예수님의 이적에 흥미를 느끼고 관심을 가졌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뜻하지 않게 빌라도를 통해 예수님과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치 중학생이 유명 마술사를 마주하듯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신비한 능력을 보여주길 바랐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앞선 두 차례의 재판 때와는 달리 침묵을 지켰습니다. 탐욕으로 가득찬 권력자의 놀이거리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헤롯의 감정이 싸늘하게 바뀌었습니다. 미소로 가득찼던 얼굴이 금세 모욕감으로 일그러졌습니다. 자리에 동행했던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그틈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평소에는 헤롯을 업신여겼던 그들이 갑자기 친근감을 표시하며 가까이 다가가 침을 튀기며 예수님을 모함하였습니다. 

유대지도자들의 바람은 이루어 졌습니다. 헤롯은 처음 예수님을 맞이했을 때와 달리 태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분노에 가득 차 올라 곁에 있던 군인들과 함께 예수님을 핍박하였습니다. 업신여기며 희롱하였습니다. 업신여김과 희롱, 개역개정 성경은 조금 점잖고 가볍게 번역했지만 당시 상황은 분명 처참했을 것입니다. 

절대 권력자가 자신을 옹호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무력한 죄인을 얼마나 잔인하게 대했을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더군다나 예수님은 그에게 굴욕감을 안겨주었습니다. 따라서 헤롯은 복수심에 불타 끔찍한 폭력과 인격모독을 가했을 것입니다. 그런 다음 헤롯은 예수님을 도로 총독 빌라도에게 돌려 보냈습니다. 

그런데 이 때, 이 두 사람에 대한 누가의 증언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1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2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였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

헤롯과 빌라도는 본래 원수사이입니다. 근본적으로 친해질 수 없는 사이입니다. 관련해서 당시 역사를 조금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보면 동방박사들의 방문을 받고 후에 베들레헴의 어린 남자 아이들을 살해한 ‘헤롯 대왕’이 등장합니다.

헤롯대왕이 죽은 후 그의 세 아들이 이스라엘을 각각 나누어서 다스렸습니다. 그 중 둘째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가 본문에 나오는 갈릴리를 맡았던 분봉왕 헤롯입니다. 그의 형이자 헤롯대왕의 첫 째 아들인 헤롯 아르켈라오는 본래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한 넓은 땅을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너무 심하게 폭정을 해서 로마 제국이 그를 강제로 추방합니다. 그런 다음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총독을 보냈습니다. 그때부터 예루살렘을 로마가 직접 통치했습니다. 빌라도는 그러한 로마의 식민 정책에 따라 주후 26년 파견된 총독이었습니다.

따라서 빌라도와 헤롯은 출신 배경과 문화와 정치적인 목표가 극명하게 다릅니다. 치열한 경쟁자였습니다. 둘다 매우 노련한 안목 그리고 불타오르는 야망을 가졌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상대의 빈틈을 노려 무너뜨리기 위해 혈안이 돼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이 그날, 예수님이 처형당했던 그날 하루 만큼은 친구가 되었습니다. 무슨 의미일까요? 예수님에 대한 생각이 서로 일치 했습니다. 두 권력자에게 예수님은 ‘중립지대’였습니다. 예수님에게 십자가를 지게 하는 것이 두 사람 모두에게 이익일 뿐 적어도 손해는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과 갈릴리를 모두 혼잡하게 하는 예수를 얼른 처단하는게 제국의 질서에 부합하고 황제에게 잘 보이는 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빌라도가 본문 앞부분에서 주님을 잠시 변호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가 헤롯과 나눈 악수를 통해 결코 진심은 아니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금세 변할, 그 순간만의 처세에 불과했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을 통해 세속의 권력이 가진 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평소 으르렁거리다가 탐욕을 이루기 위해 한 마음이 되는 정치인들을 역사적으로 수없이 발견하곤 합니다. 기득권을 끝까지 놓지 않으려 죄없는 사람들을 무참히 짓밟는 권력자들을 흔하게 목격하고는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추악한 지도자들에 의해 십자가에 오르셨습니다. 하지만 그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시어 당신이야말로 온 땅을 참으로 다스리시는 진정한 왕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본문 말씀이 폭로하는 빌라도와 헤롯의 악독함과 정반대되는 예수님의 다스림을 신뢰해야 합니다.

주님은 약한 사람을 보살피십니다. 가난한 이들과 함께 아파하십니다. 가장 소외되고 무시당하는 이들을 향해 항상 시선을 고정하고 그들의 편이 되어 주십니다. 겉으로 보이는 재산과 학벌이 아니라 존재 자체를 소중히 여겨주시고 보듬어 주십니다. 

우리는 다른 누구도 아닌 오직 예수님의 다스림을 전하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오늘 하루도 헤롯과 빌라도의 통치를 거부하고 십자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바랍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누가복음 22장 63~71절 “하나님의 아들”

2022년 3월 22일, 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22장 63~71절 “하나님의 아들”

63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
64 그의 눈을 가리고 물어 이르되 선지자 노릇 하라 너를 친 자가 누구냐 하고
65 이 외에도 많은 말로 욕하더라
66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들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들여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변함없는 사실입니다. 동시에 인간이 감히 다 헤아릴수 없는 무한한 깊이와 넓이를 가진 진리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핍박하고 죽음으로 내 몰았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 말씀은 이스라엘 사람들에 의한 예수님의 심판을 기록합니다. 감람산에서 붙잡히신 예수님은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 갔습니다. 동이 트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 들이 모여 공회를 소집했습니다. 예수님을 피고인으로 세우고 재판이 시작되었습니다. 유대 지도자들은 불필요한 심문으로 시간을 허비하지 않았습니다. 곧바로 사안의 핵심을 질문합니다.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입니다.

질문도 답도 모두 두 개입니다. 그런데 그 둘은 각각 다른 내용이 아닙니다. 같은 주제를 다른 표현으로 반복해서 강조하는 대화를 누가는 보여주고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은 누구신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참으로 누구이신지를 죄악에 눈먼 사람들은 결코 깨달을 수 없습니다. 그 결과 참담한 결과를 선택했다는 사실을 본문을 알려 줍니다.

먼저 첫 번째 질문과 답을 보시겠습니다. 본문 67~68절, 다시 한 번 다같이 읽겠습니다.

67 이르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대답하시되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 68 내가 물어도 너희가 대답하지 아니할 것이니라

공회에 모인 사람들이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 시간끌지 말고 얼른 자백하라는 종용입니다. 의도는 분명합니다. 예수님을 ‘자칭 메시아’로 몰고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에게는 신성모독이고 로마에게는 체제 전복을 꿈꾸는 반란 죄입니다. 

갈릴리 사람들 역시 예수님을 가리켜 메시아로 부르며 많은 기대를 걸었습니다. 심지어 예루살렘에 입성할 당시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호산나!’ 우리를 구원하소서!라고 외쳤습니다. 게다가 예수님 자신도 직간접적으로 여러 차례 스스로를 메시아 혹은 그리스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제사장들은 금세 원하는 답을 들을거라 기대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맞다, 틀리다. 단순하게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의 의도에 쉽게 휘말려들지 않았습니다. 대신 그들과 당신 사이의 거대한 벽이 있음을 알려줍니다. 주님과 제사장들 사이에 깊은 골이 존재하고 있음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말을 서로 나누어도 결코 메울 수 없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이 아무리 진리를 외쳐도 그들은 믿지 않을 것입니다. 원고와 피고가 바뀌어 예수님의 재판정에서 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심문한다면 그들은 어떤 답을 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서로를 이해하고 바라보는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가장 정확히는 예수님의 존재, 그분의 호흡과 인격과 생각이 사람들의 실존과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설령 누구보다 열심히 말씀을 연구한다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많은 백성들 위에 높이 올라 제사를 집례한다고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강력한 종교 권력을 쥐고 절대적인 권위를 부여받고 있을 지라도 그들은 예수님을 바로 알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가 바로 자기들 눈 앞에 있음에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예수님의 정체성을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순간이 언젠가 반드시 찾아옵니다. 69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69 그러나 이제부터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사장들의 심문을 회피하지 않았습니다. 모호한 말로 자기변호 하지 않았습니다. 당신께서 이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계실 것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 자리는 곧 하나님을 대신하여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그리스도의 공간입니다. 세상의 끝날, 주님의 뜻을 완성시키는 보좌입니다. 지금 당장은 제사장들이 재판장을 자처하며 예수님을 무릎꿇리고 죄인으로 몰아가지만 그 날에는 그들이 예수님의 심판 앞에 고개를 숙여야합니다.

따라서 이런 주님의 답이 제사장들에게는 황당하게 들렸습니다. 동시에 좋은 기회입니다. 더욱더 확실한 자백을 이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어지는 두 번째 대화가 담긴 70~71절 함께 읽겠습니다.

70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대답하시되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71 그들이 이르되 어찌 더 증거를 요구하리요 우리가 친히 그 입에서 들었노라 하더라

그들이 노골적으로 물었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때 예수님은 특이하게 답하십니다.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느니라” 공동번역은 이렇게 옮겼습니다.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너희가 말하였다.”

지금껏 제사장 무리가 예수님에게 한 말은 무엇일까요? 그들이 예수님을 가리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말한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예루살렘의 종교권력자들은 예수님을 철저히 부정하였습니다. 특히나 성금요일 재판정에서 그들은 주님을 처참히 능멸했습니다. 그들의 경험과 지식이 핍박과 고난을 부축였습니다. 

제사장들의 눈에 예수님은 결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을 자처하는 신성모독자에 불과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의 답을 듣고 마침내 자백을 얻었다며 총독 빌라도의 법정으로 넘겨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을 향한 그들의 모욕과 경멸이야말로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을 참으로 구원하는 그리스도는, 진정 온 세계를 다스리는 하나님의 아들은 가장 약하고 초라한 모습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원하고 기대했던 강한 용사로 이 땅에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을 압도하는 용맹한 힘과 권위를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대신 한 없이 낮은 자세로 약한 이들을 품고 섬겼습니다. 기꺼이 모욕 당하고 희생하셨습니다. 그 결과 십자가에서 죽임 당하셨습니다. 그렇지만 다시 살아나시어 하나님의 진정한 구원은 바로 그 죽음을 거쳐 이루어지는 생명의 복음을 온전히 알리셨습니다.

하지만 그 날, 공회에 모인 사람들은 이러한 진실을 미처할지 못했습니다. 정확히는 알려하지 않았습니다. 진리보다는 자신들의 이익과 욕심을 더 우선하였습니다. 욕망에 눈이 멀어 메시아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 끔찍한 죄인으로 성경에 기록되고 말았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주님을 위한 많은 일들을 한다고 하지만 정작 예수님을 올바로 알고 있는지 겸허히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원하는 예수님, 내가 바라는 주님의 모습을 먼저 그려놓고 거기에 예수님을 억지로 끼워맞추고 있지는 않은지 돌이켜 봐야 합니다.

그런 잘못을 반복할수록, 성경을 얘기하지만 정작 말씀에서 멀어지고, 복음을 외치지만 오히려 진리에서 떠나는 죄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 대신 십자가의 사랑을 묵묵히 가슴에 품고 실천하며 살아가야합니다. 그 누구보다 강하시지만 죄인을 구하시기 위해 약해지셨고, 그 누구보다 지혜롭지만 세상을 살리시기 위해 미련한 모습을 택하신 예수님만이 우리의 참 그리스도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22장 54~62절 “심히 울더라”

2022년 3월 21일, 월,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22장 54~62절 “심히 울더라”

54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
55 사람들이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함께 앉았는지라 베드로도 그 가운데 앉았더니
56 한 여종이 베드로의 불빛을 향하여 앉은 것을 보고 주목하여 이르되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하니
57 베드로가 부인하여 이르되 이 여자여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하더라
58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이르되 너도 그 도당이라 하거늘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아니로라 하더라
59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여 이르되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
60 베드로가 이르되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고 아직 말하고 있을 때에 닭이 곧 울더라
61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62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


한 남자가 흐느껴웁니다. 험한 뱃일로 거칠어진 몸이 주체없이 떨리고 있습니다. 통곡 소리가 새벽 어둠 사이를 가르고 울려퍼졌습니다. 그의 이름은 베드로입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단연 눈에 띄는 리더 중 한 명입니다. 

이 사실을 베드로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워 했습니다. 수많은 무리가 주님께로 몰려올 때 마치 자기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 한 마디에 갈릴리 백성들이 감동하는 것을 보았을 때 그의 마음도 한 없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어느샌가 모두가 예수님을 가리켜 메시아라고 외치며 왕으로 세우려 할 때 그의 숨겨둔 욕망이 마침내 무장해제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옆자리를 악착같이 지켰습니다. 12명 중 누구보다 출중한 제자로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려 애썼습니다. 자신의 존재감을 백성들 앞에 드러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미처 몰랐습니다. 탐욕에 취해 우쭐거리며 했던 그 행동들이 결국 그를 위험으로 몰아 넣고 말았습니다.

군중의 열광이 분노로 바뀌는 건 한 순간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시는 예수님을 향해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라고 사람들은 기뻐 외쳤습니다. 그러나 며칠 후 그들은 살기에 가득차 주님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그 결과, 예수님이 마침내 잡히고 말았습니다. 이제는 제자들 차례입니다. 누가봐도 그들은 공범입니다. 체포는 시간 문제 였습니다.

지금껏 경험하지 못했던 강렬한 공포와 긴장이 베드로의 온 몸을 사로 잡았습니다. 마지막 남은 양심을 따라 예수님을 멀찍이 쫓아가 대제사장의 집안으로 함께 들어가긴 했습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습니다. 지난밤 호언장담했듯이 주님께 가까이 다가가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편들 용기가 도무지 나지 않았습니다. 마침 사람들이 모여 불을 피워 한기를 쫓아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사이에 쭈뼛거리며 들어가 몸을 녹였습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며 잠시 멍하게 앉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함께 불을 쬐던 여종 하나가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그녀가 다른 사람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습니다.” 무척 역설적인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 잡하시기 전에는 그 분 가까이 있다는 것이 자랑 거리였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 곁에 서 있으려 애썼습니다. 

그 결과 그의 얼굴이 사람들에게 알려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정체성을 ‘예수님과 함께 있었던 사람’으로 파악했습니다. 베드로가 갈망했던 바람이 이루어진 셈입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소원이 그를 감당하기 벅찬 위험으로 몰아 넣었습니다. 따라서 어느 여종의 말을 베드로는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그를 알지 못하노라”

그러자 이번에는 다른 사람이 그를 알아보았습니다. “맞아, 당신도 그 예수의 무리 중 한 사람이야.” 이제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베드로에게 쏠렸습니다.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서로 은밀한 눈짓을 주고 받았습니다. 누군가 제사장을 부르러 달려가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겁에 질린 베드로는 더욱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이 사람아 나는 아닐세”

여기까지가 본문 58절입니다. 그 다음절인 59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한 시간쯤 있다가” 굉장히 긴박한 상황속에서 뜬금없이 누가복음은 한 시간의 여백을 남깁니다. 이 때 정확히 어떤 일들이 펼쳐졌는지 알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충분히 짐작은 가능합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의 가까운 제자라는 두 차례의 공개적인 지목, 이어지는 두 차례의 부인. 이런 상황속에서 사실은 명확하게 드러났습니다. 그가 아무리 부정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그 가운데 많은 실랑이가 오고 갔을 것입니다. 베드로 역시 예수와 마찬가지로 얼른 포승줄로 묶어 잡아가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일단 예수를 먼저 재판 한 다음에 결과를 보고 움직이자고 만류 했을 지도 모릅니다. 어찌 됐든지 간에 베드로의 신분과 곧 닥쳐올 위기는 분명해 보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두 차례의 부인 다음에 이어진 그 한 시간이 그에게는 어떤 때 보다 느리고 무겁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러한 재난을 확고히 하는 세 번째 증인이 등장합니다. 그가 이제 한 술 더 떠 ‘장담’하였습니다. 베드로가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갈릴리 사람이라는 사실을 지적합니다. 그 둘이 분명 함께 있었다고 못 박아 말합니다. 이제 베드로는 수긍할 법도 합니다. 그가 제자들 중에서도 앞장서서 예수님을 따랐던 제자라는 것은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진실입니다. 

그날 대제사장 집의 뜰에 모였던 사람들 중에 굳이 나서서 캐물었던 세 사람 외에 나머지 모두도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부인하면 할수록 모양만 우스울 뿐입니다. 어쩌면 베드로 자신이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었을 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의 생존욕구는 끝까지 거짓말을 내뱉게 했습니다. 갈릴리 사투리를 감추기 위해, 예루살렘 말투를 어설프게 흉내내며 이렇게 답합니다. “이 사람아 나는 네가 하는 말을 알지 못하노라”

바로 그때 닭 울음 소리가 울려퍼졌습니다. 그 소리가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을 찔렀습니다. 그의 양심을 일깨웠습니다. 불과 조금 전에, 예수님과의 식사자리에서 베드로는 어떤 상황이든 주님과 함께 하겠다는 자기의 각오를 분명히 보여주었습니다. 누가복음 22장 33~34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3 그가 말하되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 34 이르시되 베드로야 내가 네게 말하노니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 하시니라

그 말씀 그대로 베드로가 나는 예수를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하였습니다. 구약 성경 곳곳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3’은 완전수입니다. 즉, 베드로의 세 차례 부인은 예수님과의 관계에 대한 완전한 부정을 뜻합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예고하신 그대로 닭 울음 소리가 울려 퍼졌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셨습니다.

과연 어떤 눈빛이었을까요? 분명 글로 표현할 수 없는 많은 감정이 그 안에 담겨 있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어떤 변명도 부인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베드로는 그 형형한 눈망울에 항복하고 말았습니다.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습니다. 단순히 방금 전 식사자리에서 했던 말이 거짓말로 드러나 창피해서가 아닙니다. 자신이 얼마나 추악한 죄인인지, 자기 내면의 실상을 낱낱이 확인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지난 3년의 세월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을지 모릅니다. 배와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따랐던 순간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주님곁에서 들었던 놀랍고 감동적인 말씀들, 가까이에서 함께 목격했던 놀라온 이적들이 생각 났을 것입니다. 

하지만 어느샌가 나 정도면 충분히 괜찮은 제자라고 착각했습니다. 교만이 싹 터올랐습니다. 예수님과의 물리적 거리가 자신의 신앙을 증명한다고 오해 했습니다. 그러면서 추악한 야망을 정당화 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 들어가 지금까지의 공로를 인정받아 부와 명예를 누리고 싶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공과를 다투고 시기하고 경쟁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지금껏 예수님을 따른 것이 아니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주님을 이용하려 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복음 앞에 순종하기 보다는 그분을 내세워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베드로의 호언장담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 주님은 누구보다 잘 아셨습니다. 그렇기에 닭 울기전에 그가 당신을 부인하리라 말씀 하셨습니다. 그 이야기를 하셨을 때의 예수님의 마음이 얼마나 무거웠을지, 하지만 그럼에도 그런 못난 나를 끝까지 품어주신 사랑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를 베드로는 그 서늘한 닭 울음소리와 함께 명징하게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주체할 수 없이 울음을 터뜨리고야 말았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사순절은 눈물의 절기입니다. 우리는 울어야 합니다. 물론 인위적으로 감정에 메여 눈물흘리라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안의 베드로를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주님을 참으로 믿고 의지하기 보다는 복음을 도구 삼아 어리석은 욕망을 이루려 했던 탐욕을 돌이켜 봐야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헤아리기 보다는 그럴듯하게 목소리만 높이며 신앙을 증명하려 하진 않았는지 반성해야 합니다.

그렇게 진심어린 회개의 눈물을 흘린 이들에게 주님께서 새로운 길을 열어주실줄 믿습니다. 베드로를 다시 일으켜 세워 위대한 사도로 사용하신 하나님께서 우리가 흘린 참회의 눈물 또한 기뻐 받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오늘 하루도 이 혼탁한 시대를 정결케 하는 진리의 일꾼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소망합니다.

누가복음 18장 31~43절 "믿음과 구원"

2022년 3월 4일, 금,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8장 31~43절 "믿음과 구원"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이미 잘 알고 계시듯이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권의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기 형식으로 이야기 구조를 이룹니다. 그들의 걸음이 예루살렘과 가까워지면 질수록 십자가와 부활을 향한 분위기가 점점더 엄중하게 무르익는 형식입니다.

본문 35절은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 가까이에 도착했다고 알려줍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하여 관문 역할을 하는 성입니다. 따라서 여리고 근처에 왔다는 것은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굉장히 비장한 순간입니다. 제자들 역시 상당한 결의에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웬 훼방꾼이 나타났습니다. 한 시각 장애인이 다가왔습니다.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몰라도 무척 흥분한 표정이었습니다. 지팡이를 든 손을 힘차게 휘저으며 이렇게 목 놓아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제자들은 그 외침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길 마음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곧 이룰 큰 일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한시 바삐 예루살렘 궁궐로 달려갈 생각에 흥분 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시각장애인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았습니다. 차분한 위로를 건네지 않았습니다. 적절한 격려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꾸짖었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어딜 감히 예수님 앞에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냐며 몹시 언짢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각 장애인은 시련에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더 힘차게 울부짖으며 다시 한번 더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침내 그 목소리가 예수님께 닿았습니다. 가시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께 가까이 데려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이렇게 대화를 나눕니다. 4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얼핏 황당하게 들립니다. 너무 뻔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장애로부터 회복되기 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이 폭력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조롱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단순 명료한 문장으로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때, 그 시각장애인의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떨리는 목소리, 촉촉이 젖은 눈망울, 바들거리는 온 몸.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성경이 알려주는 부분적인 정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고통을 이겨내 왔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장애인으로서 짊어져야 했던 고단한 삶의 무게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관련해서 요한복음 9장 1~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1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어느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가에서 선천적 시각 장애인을 보았습니다. 그를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심각한 논쟁거리였습니다.

장애를 곧바로 ‘죄’와 연결 시켰습니다. 그 결과 공동체 안에서 심각한 차별과 폭력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본문 속 시각 장애인이 말한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는 단순히 신체 기능의 회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눅눅한 설움, 절절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42~4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시각장애인에게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유념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장애인은 본문 어디에서도 “믿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굳센 신앙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은 후 눈을 뜨고싶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뜬금없이 그의 ‘믿음’을 언급하셨을까요?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이 알려주는 ‘믿음’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막연한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맹목적인 신념도 아닙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부정하지만 예수님만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품어줄 것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그리하여 기꺼이, 담대하게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점은 그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해서도 그 뜻을 보다 정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구원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내세의 소망 역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소중한 일부입니다.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구원을 이해할 때 우리의 시선이 죽음 이후만을 가리켜서는 곤란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각 장애인처럼 당장 눈 앞의 현실을 헤쳐가기도 버거운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를 논하는 것은 사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과 영원, 땅과 하늘을 아우르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생명력을 드러내시기 위해 한 시각 장애인의 시력을 회복시키시는 놀라운 이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질병과 장애가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현혹시키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본문 속 이적에 담긴 ‘위로’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다스림이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 주님 나라 전체의 한 조각에 불과합니다. 아직 모든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충분히 믿음으로 기다릴 소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기꺼이 예배하는 마음의 기쁨을 회복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이 보여준 한 시각장애인의 아름다운 믿음을 닮아가길 원합니다. 그 믿음을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진심으로 고백하길 소망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