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3월 27일 일요일

누가복음 18장 31~43절 "믿음과 구원"

2022년 3월 4일, 금,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8장 31~43절 "믿음과 구원"

31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데리시고 이르시되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32 인자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져 희롱을 당하고 능욕을 당하고 침 뱉음을 당하겠으며
33 그들은 채찍질하고 그를 죽일 것이나 그는 삼 일 만에 살아나리라 하시되
34 제자들이 이것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말씀이 감취었으므로 그들이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35 여리고에 가까이 가셨을 때에 한 맹인이 길 가에 앉아 구걸하다가
36 무리가 지나감을 듣고 이 무슨 일이냐고 물은대
37 그들이 나사렛 예수께서 지나가신다 하니
38 맹인이 외쳐 이르되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거늘
39 앞서 가는 자들이 그를 꾸짖어 잠잠하라 하되 그가 더욱 크게 소리 질러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지라
40 예수께서 머물러 서서 명하여 데려오라 하셨더니 그가 가까이 오매 물어 이르시되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이미 잘 알고 계시듯이 마태, 마가, 누가, 이 세 권의 복음서를 ‘공관복음’이라고 부릅니다. 공관복음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갈릴리에서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행기 형식으로 이야기 구조를 이룹니다. 그들의 걸음이 예루살렘과 가까워지면 질수록 십자가와 부활을 향한 분위기가 점점더 엄중하게 무르익는 형식입니다.

본문 35절은 예수님 일행이 여리고 가까이에 도착했다고 알려줍니다. 여리고는 예루살렘 동쪽에 위치하여 관문 역할을 하는 성입니다. 따라서 여리고 근처에 왔다는 것은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굉장히 비장한 순간입니다. 제자들 역시 상당한 결의에 차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에게 웬 훼방꾼이 나타났습니다. 한 시각 장애인이 다가왔습니다. 어떤 소문을 들었는지 몰라도 무척 흥분한 표정이었습니다. 지팡이를 든 손을 힘차게 휘저으며 이렇게 목 놓아 외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러나 제자들은 그 외침에 관심이 없습니다. 그를 불쌍히 여길 마음도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예루살렘에서 곧 이룰 큰 일에 온 신경을 곤두세웠습니다. 한시 바삐 예루살렘 궁궐로 달려갈 생각에 흥분 해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 시각장애인을 따뜻하게 품어주지 않았습니다. 차분한 위로를 건네지 않았습니다. 적절한 격려를 베풀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꾸짖었습니다. 조용히 하라고 했습니다. 어딜 감히 예수님 앞에 그렇게 무례하게 행동하냐며 몹시 언짢아 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시각 장애인은 시련에 아랑곳 하지 않았습니다. 더욱더 힘차게 울부짖으며 다시 한번 더 외쳤습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마침내 그 목소리가 예수님께 닿았습니다. 가시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신께 가까이 데려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와 이렇게 대화를 나눕니다. 41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41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이르되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주님께서 물으셨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얼핏 황당하게 들립니다. 너무 뻔한 질문이기 때문입니다. 장애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그 장애로부터 회복되기 원합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이러한 질문이 폭력적으로 들리기도 합니다. 어찌보면 조롱하는 것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가 원하는 것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그래서 거침없이 단순 명료한 문장으로 자신의 소원을 말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이 때, 그 시각장애인의 모습이 상상이 되십니까? 떨리는 목소리, 촉촉이 젖은 눈망울, 바들거리는 온 몸. 우리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성경이 알려주는 부분적인 정보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그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어떤 고통을 이겨내 왔는지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고대 세계에서 장애인으로서 짊어져야 했던 고단한 삶의 무게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습니다. 관련해서 요한복음 9장 1~2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1 예수께서 가시다가, 날 때부터 눈먼 사람을 보셨다. 2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어느날 예수님과 제자들이 길가에서 선천적 시각 장애인을 보았습니다. 그를 두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렇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이 사람이 눈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누구의 죄 때문입니까? 이 사람의 죄입니까? 부모의 죄입니까?’ 과학이 발달한 오늘날의 기준으로는 어처구니 없는 질문입니다. 하지만 당시로서는 매우 심각한 논쟁거리였습니다.

장애를 곧바로 ‘죄’와 연결 시켰습니다. 그 결과 공동체 안에서 심각한 차별과 폭력을 겪었습니다. 따라서 본문 속 시각 장애인이 말한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는 단순히 신체 기능의 회복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그의 전 생애를 관통하는 눅눅한 설움, 절절한 고통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은 그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본문 42~4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42 예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하시매 43 곧 보게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를 따르니 백성이 다 이를 보고 하나님을 찬양하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시각장애인에게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유념해야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장애인은 본문 어디에서도 “믿습니다!”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굳센 신앙을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저 불쌍히 여겨달라고 부르짖은 후 눈을 뜨고싶다고 말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뜬금없이 그의 ‘믿음’을 언급하셨을까요?

우리는 이를 통해 성경이 알려주는 ‘믿음’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됩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은 막연한 자기 확신이 아닙니다. 맹목적인 신념도 아닙니다. 세상 모두가 나를 부정하지만 예수님만은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품어줄 것을 신뢰하는 태도입니다. 그리하여 기꺼이, 담대하게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믿음입니다.

더욱더 놀라운 점은 그의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렀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통해 성경이 말하는 구원에 대해서도 그 뜻을 보다 정확하게 깨닫게 됩니다. 흔히 오해하듯이 구원은 단순히 죽어서 천국에 가는 것만이 아닙니다. 물론 그러한 내세의 소망 역시 하나님께서 베푸시는 구원의 소중한 일부입니다. 그 자체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구원을 이해할 때 우리의 시선이 죽음 이후만을 가리켜서는 곤란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시각 장애인처럼 당장 눈 앞의 현실을 헤쳐가기도 버거운 사람들에게 죽음 이후를 논하는 것은 사치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지금과 영원, 땅과 하늘을 아우르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생명력을 드러내시기 위해 한 시각 장애인의 시력을 회복시키시는 놀라운 이적을 일으키셨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의 질병과 장애가 치유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현혹시키는 사람들을 주의해야 합니다. 다만 본문 속 이적에 담긴 ‘위로’를 발견해야 합니다. 그 장면을 지켜본 사람들이 예수님을 따르며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하나님의 다스림이 지금,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것을 경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분명 주님 나라 전체의 한 조각에 불과합니다. 아직 모든 구원이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안에서 충분히 믿음으로 기다릴 소망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이 기꺼이 예배하는 마음의 기쁨을 회복하였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도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오늘 함께 읽은 성경이 보여준 한 시각장애인의 아름다운 믿음을 닮아가길 원합니다. 그 믿음을 저와 여러분의 삶을 통해 진심으로 고백하길 소망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에게 하나님께서 온전한 구원을 이루실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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