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6일 수요일

창세기 40장 1~8절 "해석은 하나님께"

2022년 10월 26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창세기 40장 1~8절 "해석은 하나님께"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4 친위대장이 요셉에게 그들을 수종들게 하매 요셉이 그들을 섬겼더라 그들이 갇힌 지 여러 날이라

5 옥에 갇힌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 두 사람이 하룻밤에 꿈을 꾸니 각기 그 내용이 다르더라

6 아침에 요셉이 들어가 보니 그들에게 근심의 빛이 있는지라

7 요셉이 그 주인의 집에 자기와 함께 갇힌 바로의 신하들에게 묻되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삶은 난해합니다.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근심하는 근본적인 이유입니다. 아무리 높은 지위와 많은 재산을 가지고 있다고 할지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본문에는 이집트의 두 관원장이 등장합니다. 각각 파라오의 술과 떡을 맡았습니다. 이미 잘 알고 계시듯이 이 둘은 말단 실무자가 아닙니다. 핵심 관료입니다. 술과 떡이 상징하는 바를 총괄하는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술 맡은 관원장’은 파라오가 마실 술을 미리 맛보는 일을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 술은 단순한 알콜음료가 아닙니다. 당시 국가 운영에서 가장 중요한 두 행사는 제사와 연회입니다. 그 자리에서 술은 중심 역할을 합니다. 그렇다면 술 맡은 관원은 왕의 측근으로서 국가제의를 주관한 사람입니다.


‘떡 굽는 관원장’은 파라오가 먹을 음식을 미리 맛보는 일을 합니다. 해당 원문을 ‘어전 탁자에서 근무하는 서기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가 흔히 오해하듯 평범한 요리사가 아니라는 뜻입니다. 파라오는 단순한 황제가 아닙니다. 이미 이집트에서 숭배 대상으로 신격화 된 존재입니다. 그런 파라오의 식사를 관리한다는 것은 술 맡은 관원장과 마찬가지로 임금의 핵심 측근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이 두 사람은 지금까지 거대한 제국의 풍요를 누려왔습니다. 황제의 후광을 등지고 강력한 권력을 휘둘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둘의 눈치를 보며 허리를 숙였습니다. 잘 보이기 위해 온갖 입에 발린 말을 했습니다. 온 집안이 값비싼 선물로 가득했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는 화려하고 풍요로운 삶입니다.


그러나 인생에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두 관원장은 금세 심각한 위기에 처합니다. 아찔하도록 가파른 추락을 경험합니다. 본문 1~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그 후에 애굽 왕의 술 맡은 자와 떡 굽는 자가 그들의 주인 애굽 왕에게 범죄한지라 2 바로가 그 두 관원장 곧 술 맡은 관원장과 떡 굽는 관원장에게 노하여 3 그들을 친위대장의 집 안에 있는 옥에 가두니 곧 요셉이 갇힌 곳이라


이들의 상황을 세 단어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바로 ‘범죄’와 ‘분노’와 ‘투옥’입니다. 두 사람이 이집트 왕 파라오에게 ‘범죄’하였습니다. 그러자 파라오는 그들에게 ‘분노’했습니다. 그 결과 ‘투옥’, 즉 감옥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두 사람이 왕에게 정확히 어떤 잘못을 저질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정말 감옥에 갇힐 만한 흉악한 죄를 지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동서고금의 기나긴 역사를 통해 알고 있습니다. 절대군주의 사법 판단은 정확하지 않습니다. 임금의 이익과 감정 때문에 무고한 사람을 벌주고 잡아 가두는 경우를 수 없이 발견합니다.


어쩌면 두 관원장은 정적들에 의해 억울하게 모함을 받았을 지도 모릅니다. 그러지는 않더라도 과거에는 무사히 넘어갔던 일들이 갑자기 문제가 되어 벌을 받게 됐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정확한 인과관계는 알 수 없습니다. 엄연히 상상의 영역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인생은 난해하다는 사실입니다.


불과 얼마전까지 임금과 내가 이만큼 가까운 사이라고 자랑하며 떵떵 거리던 사람들이 한 순간에 나락으로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언제 사형장으로 끌려갈지 모릅니다. 이집트 왕궁에서 보냈던 찬란한 일상과 감옥에서 지내는 음습한 하루가 극명하게 대비됩니다. 이처럼 무거운 현실 한복판에서 두 사람은 수 없이 많은 물음표에 둘러싸였을 것입니다. 대체 지금, 이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고 헤쳐나가야 할지 알지 못합니다. 그들이 소유했던 지식과 부귀영화가 이제는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그저 깊은 어둠 속에서 짙은 한 숨만 내쉴 뿐입니다.


이와같은 삶의 복잡다단함은 꿈에서도 이어집니다. 어느날 두 사람이 같은 날 꿈을 꾸었습니다. 옛 사람들은 현대인들 보다 훨씬 더 꿈에 대해 막중하게 의미부여를 했습니다. 당연히 자고 일어나 서로 꿈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런데 비슷한 처지에 있는 두 사람의 꿈이 서로 정반대였습니다. 더욱더 혼란스럽습니다. 대체 뭐가 뭔지 모르겠습니다. 길몽과 흉몽의 경계가 아리송합니다. 눈을 뜨고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잠에 들어서도 인생의 난해함을 절감했습니다.


우리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인생은 사기꾼의 궤변 속에서만 명쾌합니다. 누구나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과거의 아픔이 있습니다. 너무나 막막한 앞날에 대한 염려로 근심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지금, 복잡한 실타래 같은 번민에 둘러싸여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셨을지도 모릅니다. 그런 까닭에 우리는 인생의 암흑을 만난 두 관원장에게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들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사람에게 당신의 종을 붙여주셨습니다. 바로 요셉입니다. 마침 그들이 투옥된 곳은 친위대장, 즉 ‘보디발’의 집 안에 있는 감옥이었습니다. 그곳에 요셉이 먼저 갇혀 있었습니다. 보디발은 요셉으로 하여금 자신의 옛 동료 두 사람을 수종들게 했습니다. 고위 관료출신 범죄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어느날 요셉은 자신이 모신 두 어른의 얼굴 색이 창백하게 변한 것을 발견합니다. 그리고 이렇게 질문합니다. “어찌하여 오늘 당신들의 얼굴에 근심의 빛이 있나이까?” 어떻게 보면 상당히 당돌합니다. 예로부터 질문할 수 있는 권한은 힘있는 사람에게 있습니다. 비록 지금 함께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하지만 두 사람과 요셉은 배경과 지위가 전혀 다릅니다. 그들 눈에 요셉은 엄연히 외국인 노예 출신의 어린 범죄자입니다. 호의라 할지라도 자기들 낯빛을 두고 질문하는게 불쑥 언짢을 수 있습니다. 평소라면 무례하다고,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버럭 화를 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체면을 따질 때가 아닙니다. 인생의 거친 소용돌이에 휘말려, 한치 앞을 모르는 그들로서는 어떻게든 답을 찾아야 합니다. 요셉에게라도 뭔가 도움을 얻을지 모른다는 기대가 움터 올랐습니다. 본문은 그들 사이의 대화를 이렇게 기록합니다. 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8 그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청하건대 내게 이르소서


두 관원장이 눈물겨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꿈을 꾸었으나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고대인들인 꿈에 대해 굉장한 의미 부여를 했습니다. 꿈을 어떻게 푸느냐에 따라 인생이 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그런데 절체절명의 순간 도무지 알 수 없는 꿈을 꾸었습니다. 


단순히 간밤에 꾸었던 꿈의 해몽 문제가 아닙니다. 꿈이 상징하는, 삶의 처절한 난제를 부여잡고 내뱉는 호소입니다. 두 사람은 싸늘한 의문의 늪에서 평생 헤어나오기 힘든 모든 인류를 대표해 절규하며 묻고 있습니다. “이를 해석할 자가 없도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 그 두 사람에게, 그리고 우리 모두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지 아니하니이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신 말씀을 통해 반드시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걷잡을 수 없이 가다오는 참혹한 삶의 모든 시련과 절망에 대한 해석은 오직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몸소 인류의 가장 커다란 모순을 짊어지고 십자가 위에서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입니다. 부활이라는 더없이 찬란한 해답을 온 우주에 보여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때때로 납득하기 힘든 아픔에 허덕일 때 더욱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처절한 죽음을 통해 전하신 하나님 나라 복음 만이 인생의 가장 근본적인 어둠을 물리치는 진정한 능력임을 믿습니다. 무덤을 비우시고 다시 사신 참 생명 만이 우리 앞을 가로막는 번민에서 벗어나게 하는 영원한 소망임을 믿습니다.


삶은 여전히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해석은 하나님께 있습니다. 우리가 염려를 이겨내고 하나님께서 주신 꿈을 품을 수 있는 이유입니다. 그 주님께 오늘 하루도 기도로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창세기 39장 11~23절 "밑바닥에서도 여전히 함께"

2022년 10월 25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창세기 39장 11~23절 "밑바닥에서도 여전히 함께"


11 그러할 때에 요셉이 그의 일을 하러 그 집에 들어갔더니 그 집 사람들은 하나도 거기에 없었더라

12 그 여인이 그의 옷을 잡고 이르되 나와 동침하자 그러나 요셉이 자기의 옷을 그 여인의 손에 버려두고 밖으로 나가매

13 그 여인이 요셉이 그의 옷을 자기 손에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감을 보고

14 그 여인의 집 사람들을 불러서 그들에게 이르되 보라 주인이 히브리 사람을 우리에게 데려다가 우리를 희롱하게 하는도다 그가 나와 동침하고자 내게로 들어오므로 내가 크게 소리 질렀더니

15 그가 나의 소리 질러 부름을 듣고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도망하여 나갔느니라 하고

16 그의 옷을 곁에 두고 자기 주인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려

17 이 말로 그에게 말하여 이르되 당신이 우리에게 데려온 히브리 종이 나를 희롱하려고 내게로 들어왔으므로

18 내가 소리 질러 불렀더니 그가 그의 옷을 내게 버려두고 밖으로 도망하여 나갔나이다

19 그의 주인이 자기 아내가 자기에게 이르기를 당신의 종이 내게 이같이 행하였다 하는 말을 듣고 심히 노한지라

20 이에 요셉의 주인이 그를 잡아 옥에 가두니 그 옥은 왕의 죄수를 가두는 곳이었더라 요셉이 옥에 갇혔으나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어제 읽은 창세기 39장 1~10절은 요셉이 지닌 위대한 신앙을 보여줍니다. 그는 형들로부터 노예로 팔리는 극심한 고난을 겪었습니다. 이집트의 화려한 제국 종교에 둘러 싸였습니다. 그리고 극적인 성공을 통해 상당한 권력과 재물을 손에 쥐었습니다. 자칫 방탕해지기 쉬운 상황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바르게 세웠습니다.


이런 요셉의 신앙은 유혹 가운데 빛납니다.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운 그에게 보디발의 아내가 동침을 요구합니다. 그러자 요셉은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라고 답합니다. 그의 고결한 신앙이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더욱 혹독한 시련을 겪습니다.


보디발 아내는 탐욕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요셉이 보인 뜻 밖의 반응으로 자존심에 상처를 입었을 지 모릅니다. 어느날 작정하고 계획을 꾸몄습니다. 하인들을 모두 집에서 내보내고 요셉을 기다렸습니다. 일하러 들어온 그의 옷을 붙잡고 또 다시 동침을 제안합니다. 


이 때 요셉은 단호하게 행동합니다. 죄를 지을 일말의 여지도 남겨두지 않습니다. 그녀와 더 이상 실랑이를 벌이지 않습니다. 욕망으로 불타오른 사람과는 더 이상 대화와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걸 요셉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고대 이집트 사람들의 의복은 사막 지역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한 벌로 이루어져 있었습니다. 요셉은 보디발 아내 손에 자기 옷을 버려두고 밖으로 뛰어 나갔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곧바로 요셉에게 누명을 뒤집어 씌었습니다. 하인들을 집 안으로 불러모았습니다. 그들에게 거짓말을 합니다. 진실과 정 반대로, 요셉이 자기에게 동침을 요구했다고 말합니다. 자기가 소리질렀더니 그가 도망갔다고 음해 해습니다. 보디발이 집으로 돌아오자 같은 모함을 반복했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을 가지게 됩니다. 과연 보디발 아내의 말을 하인들과 보디발이 있는 그대로 믿었을까요?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오시며 많이 경험하셨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 눈은 대부분 비슷합니다. 노회한 군인이자 정치가인 보디발이 노예 요셉을 신임 하고 가정 총무로 세웠습니다. 그동안 요셉이 얼마나 성실하고 진실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런 요셉에 대한 평가는 다른 하인들도 비슷했을 것입니다. 그런 그들이 주인 마님의 명령에 따라 집 밖으로 나갔을 때, 이 후 벌어질 상황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입니다. 게다가 그녀의 대담한 행동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성적 방종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을 가능성도 무척 높습니다. 


심지어 보디발 조차 자기 아내의 행실을 일찌감치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결정적인 정황이 있습니다. 바로 요셉을 살려둔 것입니다. 아내 말이 정말 사실이라면 요셉은 얼마든지 즉결처분 대상입니다. 고대 사법체계에서 그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이 자체로 보디발의 상당한 선의가 드러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런 처벌을 내리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권력의 정점에 있는 보디발로서는 체면을 구기는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요셉을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요셉 입장에서는 나름 호의를 입은게 사실입니다. 어쨌든 목숨은 구했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시련입니다. 형들에게서 살해 위협에 받은 후 낯설고 먼 땅에 노예로 팔려왔습니다. 아버지의 극진한 사랑을 받고 부족함 없이 자라온 요셉에게는 절망 그 자체였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고통을 딛고 일어났습니다. 좀 살만해졌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런 죄 없이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습니다.


오랜 옛날에는 지금과 달리 ‘교정인권’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습니다. 감옥 안에서 보내는 삶은 분명 우리가 상상하는 그 이상으로 처참했을 것입니다. 요셉은 이미 바닥을 경험했습니다. 노예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바닥에서 더 밑으로 내려가는 상황을 감옥에서 맞이했습니다. 누구라도 쉽게 살아갈 의욕을 잃을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요셉은 그곳에서 또 다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합니다. 놀라운 반전을 거듭 맞이합니다. 본문 21~23절 다같이 읽겠습니다. 


21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사 간수장에게 은혜를 받게 하시매 22 간수장이 옥중 죄수를 다 요셉의 손에 맡기므로 그 제반 사무를 요셉이 처리하고 23 간수장은 그의 손에 맡긴 것을 무엇이든지 살펴보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이라 여호와께서 그를 범사에 형통하게 하셨더라


요셉은 앞서 보디발의 집에서 경험한 상황을 감옥에서도 다시 겪습니다. 보디발이 요셉을 신뢰했습니다. 자기 집 운영 대부분을 그에게 맡겼습니다. 마찬가지로 간수장이 요셉을 신임합니다. 감옥 행정 전반을 요셉에게 맡겼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고 그에게 인자를 더하셨기 때문입니다. 언제나 그와 동행하시고 한없는 사랑과 긍휼로 품으셨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주신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어떤 절망도 결코 절망이 아닙니다. 인생의 그 어떤 밑바닥 속에도 주님께서 늘 풍성한 사랑으로 항상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명백한 증거입니다. 십자가의 어둠이 짙으면 짙을수록 부활의 빛은 더욱더 찬란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부활의 생명은 더욱더 아름답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셉과 같은 인생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늘 명심해야할 복음입니다. 그러므로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겪는 절망과 고통을 딛고 이루시는 주님의 참된 형통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관련해서 시 한편을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문재 시인의 시 “농담”입니다.


농담


– 이문재


문득 아름다운 것과 마주쳤을 때

지금 곁에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면 그대는

사랑하고 있는 것이다


​그윽한 풍경이나

제대로 맛을 낸 음식 앞에서

아무도 생각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은 정말 강하거나

아니면 진짜 외로운 사람이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시의 마지막 연을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종소리를 더 멀리 보내기 위하여

종은 더 아파야 한다


오해를 피하기 위해 말씀드립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겪는 고통에 대해 조심해야 합니다. 함부로 평가하거나 훈계하지 말아야합니다. 마찬가지로 아픔 자체를 미화할 필요는 없습니다. 일부러 아플 필요는 없습니다. 그건 어떤 면에서 자기 학대입니다. 하지만 살아가며 도무지 피할 수 없고 납득하기 힘든 고난이 찾아올 때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의미 없는 고통은 없습니다. 주님의 넓은 품 안에서 분명 그러합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내밷는 신음을 절대로 낭비하지 않으십니다. 


따라서 인간의 예상을 훌쩍 넘어서는 주님의 광대한 은혜를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아픔을 통해 주님께서 온 세상에 들려주실 청아한 종소리를 사모하시길 바랍니다. 그 믿음 가운데 요셉처럼 하나님의 참된 형통을 경험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창세기 39장 1~10절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2022년 10월 24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창세기 39장 1~10절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신학대학원 필수과목 중에 “선교학 개론” 수업이 있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선교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고 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해외 선교사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 물으셨습니다. 다양한 답이 남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건강 관리나 안정적인 재정 후원 등이 거론되었습니다. 물론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본인 경험을 이야기 하시면서 한 가지를 언급하셨습니다. 바로 ‘자기 예배’입니다.


선교사로서 외국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익명성’을 지니게 됩니다.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아직 교회가 없는 곳도 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릴 사람들이 주위에 없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스스로 정한 시간에 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을 무릅쓰고 자기 예배를 성실히 드린 선교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됩니다. 반대로 자기 예배가 무너지면 선교사로서 자질과 영성도 함께 붕괴됩니다.


굳이 선교사를 예를 들지 않더라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홀로 멀리 출장을 갔을 때 예배 드리는 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여러 핑계를 대며 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또한 타지 혹은 해외에 보낸 자녀가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노심초사하며 걱정하는 부모님들도 흔히 보게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요셉이 보여주는 신앙은 거의 기적과도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수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기독교라는 거대한 종교 안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라는 탄탄한 조직이 있고 성경이라는 위대한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과 비교하면 요셉 당시 야훼 신앙은 이제 겨우 4대째 내려온 가족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와 전통은 고사하고 종교로서 그럴듯한 외형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부모 아브라함, 할아버지 이삭,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유목민들의 전통에 따라 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뿐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알아왔습니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파도 앞에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사그라들것처럼 보이는 신앙입니다.


그러다가 형들의 음모로 이집트에 팔려왔습니다. 그 형들도 똑같이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그들 역시 아버지 야곱과 함께 주님께 제사를 지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하나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을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즉, 같은 야훼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다가 포기하고 노예로 팔아버리는 후안무치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상황 자체가 요셉으로서는 신앙을 저버리게 하는 환경입니다. 나를 이토록 위험에 몰아넣는 원수같은 형들이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기란 너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채색옷을 빼앗기고 웅덩이 안에 있었을 때, 제발 나를 구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이 원하는 대로 응답받지 못했을 때 어쩌면 하염없는 원망이 솟구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이집트에 도착했습니다. 이집트는 한마디로 화려한 신들의 제국입니다.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토대는 휘황찬란한 종교였습니다. 누구라도 압도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아무런 의지할 데 없이 노예로 끌려온 젊은 요셉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게다가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집트 신들 앞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마음까지 뺏기기 마련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로 팔려갔으나 그곳에서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주인은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군주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기 마련입니다. 보디발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눈부신 제국 핵심에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런 보디발의 눈에 들었습니다. ‘가정 총무’라는 파격적인 승진을 했습니다. 본문 6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신분만 노예일 뿐입니다. 보디발의 철저한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집트의 어지간한 귀족 못지 않은 부귀영화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외람되지만 만약 제가 이 때 요셉이라면 쉽게 안주할 것 같습니다. 때때로 형들에 대한 복수심은 타오르겠지만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인생입니다. 딱히 남부러울 게 없습니다. 얼마든지 배불리 먹고 즐길 수 있습니다. 집안의 다른 종들은 물론이고 보디발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이집트 귀족들도 요셉의 눈치를 보고 마음에 들려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나 내면이 풀어지기 마련입니다. 자기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하나님은 이제 안중에 없습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풍요에 눈이 멀기 쉽습니다. 쓰디쓴 과거를 지워버리기 위해서라도 주님은 잊고 마음 내키는대로 살기 쉬운 환경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놀랍게도 이 모든 위기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기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런 요셉의 신앙이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바로 보디발 아내의 유혹입니다. 


방금 읽어드린 본문 6절 후반부에서 요셉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그의 빼어나고 아름다운 용모가 보디발의 아내를 사로잡았습니다. 여러번 그에게 동침을 요구합니다. 혈기왕성한 청년 요셉으로서 참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주인에 대한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셉의 행동은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그 바탕에는 주님을 향한 놀랍도록 순수한 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앞서 길게 설명드린대로 지금 요셉의 삶은 하나님을 지워버리기 쉬운 환경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자기를 버리셨다고 충분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 깊이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를 놓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장 요셉이 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응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만의 방법으로 그가 처한 깊은 어둠과 절망 속에 빛과 희망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요셉은 그 사랑에 반응 했습니다. 안겼습니다. 주님과 신실하게 동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이런 요셉의 신앙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게 하려는 온갖 시련과 유혹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때마다 우리와 언제나 동행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누리고 죄를 물리치며 은혜의 길을 걷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2022년 10월 21일 금요일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2022) 간략 리뷰

 


마치, 따뜻하고 사려 깊고 유쾌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연출, 극본, 연기, 촬영, 음악 등 모든 게 그저 참 좋았다.

덕분에 고단한 삶을 이겨내는 커다란 위로와 깨우침을 얻었다.

"이상하고 별나지만, 가치 있고 아름다운" 모든 삶을 진심으로 응원한다.

2022년 10월 2일 일요일

창세기 29장 1~14절, “만남이라는 은혜와 모순”

2022년 9월 28일, 수,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9장 1~14절, “만남이라는 은혜와 모순”

1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4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9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10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11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13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지금 야곱은 도망치는 중입니다. 잠시라도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형 에서의 칼에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살 길은 하나입니다. 어머니의 당부를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의 도피입니다. 

얼핏 단순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야곱이 살았던 고대 서아시아 지방의 생활을 생각해보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때는 지금과 같이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친척집이라고 할지라도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여러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야곱은 혈혈단신입니다. 갑작스러운 위급상황에 대응할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 읽은 본문처럼, 야곱은 그 절망적인 사막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동행하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희망을 마음에 품고 야곱은 마침내 외삼촌이 사는 마을에 도착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끝은 아닙니다. 본문의 여러 정황상 야곱은 외삼촌과의 교류가 적었습니다. 라반을 만나기 쉬운 상황이 아닙니다. 여전히 긴장을 늦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그가 숨을 돌리고 있는 우물가에 어느 목자들이 양떼를 몰고 다가왔습니다. 야곱은 그 목자들에게 연거푸 질문을 던집니다. 4절과 5절과 6절 모두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입니다. 구약 원문에는 각 구절 앞에 우리말의 ‘그리고’와 비슷한 접속사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들에게 물었다.’ 이 말이 무려 세 번이나 연달아 반복됩니다. 야곱은 목자들의 대답을 듣자마자 황급히 다음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이것은 그의 절박한 생존 본능을 드러냅니다. 지금까지 야곱이 얼마나 마음 졸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야곱은 목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당시에는 오늘처럼 성과 이름이 뚜렷하게 나뉘어지지 않았습니다. ‘나홀의 손자 라반’처럼 아버지나 조부모의 이름을 앞에 붙여 격식을 갖추었습니다. 야곱으로서는 매우 절실한 질문입니다. 반드시 외삼촌 라반을 만나야하는 급박함을 담아 물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노라’. 이 짧은 대답에 야곱은 저절로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을 지도 모릅니다. 이어서 더욱 극적인 상황이 그에게 펼쳐 졌습니다. 그의 딸, 즉 라반의 딸이 지금 양을 몰고 오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구태여 다른 사람들에게 안내를 부탁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반의 딸 라헬이 집에 돌아갈 때 같이 가면 됩니다. 그녀의 모습이 가까이 보일수록, 이제 살았다고 비로소 실감하였을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윽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한참을 울었습니다. 이 장면을 본문 11절은 야곱이 ‘소리 내어 울며’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구약 원문을 직역하면 ‘소리 높여 울어’입니다. 이 순간, 그 어떤 체면이 들어설 공간이 없습니다.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나 마침내 생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본능만이 그를 압도합니다. 짙은 회한이 내면에 회몰아 칩니다. 낯선 우물가에서 야곱은 한 마리 짐승처럼 꺼이꺼이 울고 말았습니다.

그런 야곱을 라헬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야곱은 감정을 추스르고 그제야 자기를 소개 합니다. 자신이 라반의 조카이자, 리브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라헬이 곧바로 아버지에게 달려갔습니다. 라반 역시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그를 환하게 맞이 하였습니다. 야곱은 이제 마침내 웃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자신이 겪은 일들을 외삼촌에게 들려줍니다. 어떤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듣은 라반의 대답이 본문 14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라반이 야곱에게 말합니다.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분명히 너는 내 뼈이고 내 살이야”, 나그네에게 이 이상으로 힘이 되는 말이 없습니다. 그 순간 야곱은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죽이려던 가족의 살벌한 손길에서 벗어나 힘겨운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를 환대하는 또 다른 가족의 따뜻한 손길을 경험하였습니다.

만약 창세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야곱 이야기는 훈훈한 결말을 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이후 야곱은 긴 시간동안 라반에게서 혹독한 착취를 경험합니다. 심지어 라반으로부터 도망쳐, 과거 자기를 죽이려 했던 에서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두려움에 가득찬 눈길을 하고 앙상한 몰골로 찾아온 조카를 포근하게 감싸준 라반의 행동이 위선이었을까요? 그가 전혀 진심없이 가식적으로 그를 대한 것일까요? 섣불리 그렇다고 답하긴 어렵습니다. 물론 라반이 순박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집요할 정도로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철저히 목적지향적인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에 나오는, 라반이 보여준 선의 자체를 무시할 근거는 성경에서 찾기 힘듭니다. 라반에게 야곱은,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연민을 자아내는 불쌍한 조카였습니다. 즉, 라반이 유독 이중적이고 표리부동한 사람이어서 본문 전후로 야곱에게 다른 태도를 보인게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래 그러합니다. 저를 포함해 예외는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늘 관용적인 사람도, 항상 옹졸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의 치명적인 이익이 걸려 있을 때, 마음 깊은 열등감을 건드릴 때, 감정과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연약한 죄인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명심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야곱이면서 동시에 라반이 됩니다. 항상 피해자이거나 가해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본문 속 야곱처럼 외롭고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라반과 같은 이의 도움을 바라는 것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사람의 손을 통해 이 냉혹한 세상 속에 온기를 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라반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라반처럼 약한 사람에게 무언가 베풀 위치가 되었을 때 도움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 우월감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에 도취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섬김의 소명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잠잠히 따라야 합니다.

그렇기에 본문을 통해 더욱더 깊이 마음에 새기며 묵상해야 할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만남의 섭리입니다. 야곱은 고단한 삶 속에서 라반을 만나 감격했습니다. 라반 역시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모처럼 가족간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이 만남은 그 후로 야곱에 인생에 다양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임재의 새로운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삶속에 다양한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반갑고 값진 만남처럼 보이지만 쓰라린 아픔을 남기기도 합니다. 당황스럽고 불쾌한 만남 같지만 훗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기도 합니다. 현실의 모순처럼 사람사이의 만남도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럴수록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대로 겸손과 친절로 주위 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추시길 바랍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진실로 의존할 대상이자 날마다 깊이 만나야 할 존재는 오직 하나님 이심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하루도 소중한 만남의 여정을 신실하게 이끄실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