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일 일요일

창세기 29장 1~14절, “만남이라는 은혜와 모순”

2022년 9월 28일, 수,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9장 1~14절, “만남이라는 은혜와 모순”

1 야곱이 길을 떠나 동방 사람의 땅에 이르러
2 본즉 들에 우물이 있고 그 곁에 양 세 떼가 누워 있으니 이는 목자들이 그 우물에서 양 떼에게 물을 먹임이라 큰 돌로 우물 아귀를 덮었다가
3 모든 떼가 모이면 그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그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는 우물 아귀 그 자리에 다시 그 돌을 덮더라
4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내 형제여 어디서 왔느냐 그들이 이르되 하란에서 왔노라
5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그들이 이르되 아노라
6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 그가 평안하냐 이르되 평안하니라 그의 딸 라헬이 지금 양을 몰고 오느니라
7 야곱이 이르되 해가 아직 높은즉 가축 모일 때가 아니니 양에게 물을 먹이고 가서 풀을 뜯게 하라
8 그들이 이르되 우리가 그리하지 못하겠노라 떼가 다 모이고 목자들이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겨야 우리가 양에게 물을 먹이느니라
9 야곱이 그들과 말하는 동안에 라헬이 그의 아버지의 양과 함께 오니 그가 그의 양들을 치고 있었기 때문이더라
10 야곱이 그의 외삼촌 라반의 딸 라헬과 그의 외삼촌의 양을 보고 나아가 우물 아귀에서 돌을 옮기고 외삼촌 라반의 양 떼에게 물을 먹이고
11 그가 라헬에게 입맞추고 소리 내어 울며
12 그에게 자기가 그의 아버지의 생질이요 리브가의 아들 됨을 말하였더니 라헬이 달려가서 그 아버지에게 알리매
13 라반이 그의 생질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그를 영접하여 안고 입맞추며 자기 집으로 인도하여 들이니 야곱이 자기의 모든 일을 라반에게 말하매
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지금 야곱은 도망치는 중입니다. 잠시라도 머뭇거려서는 안 됩니다. 형 에서의 칼에 언제 목숨을 잃을지 모릅니다. 살 길은 하나입니다. 어머니의 당부를 따르는 것입니다. 바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의 도피입니다. 

얼핏 단순하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하지만 야곱이 살았던 고대 서아시아 지방의 생활을 생각해보면 그리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때는 지금과 같이 통신과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친척집이라고 할지라도 그곳으로 향하는 길에 여러 위험요소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게다가 지금 야곱은 혈혈단신입니다. 갑작스러운 위급상황에 대응할 힘이 없습니다.

하지만 어제 읽은 본문처럼, 야곱은 그 절망적인 사막 한가운데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습니다. 주님께서 동행하신다는 약속을 받았습니다. 그 희망을 마음에 품고 야곱은 마침내 외삼촌이 사는 마을에 도착 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끝은 아닙니다. 본문의 여러 정황상 야곱은 외삼촌과의 교류가 적었습니다. 라반을 만나기 쉬운 상황이 아닙니다. 여전히 긴장을 늦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때마침 그가 숨을 돌리고 있는 우물가에 어느 목자들이 양떼를 몰고 다가왔습니다. 야곱은 그 목자들에게 연거푸 질문을 던집니다. 4절과 5절과 6절 모두 같은 문장으로 시작합니다. 바로 “야곱이 그들에게 이르되”입니다. 구약 원문에는 각 구절 앞에 우리말의 ‘그리고’와 비슷한 접속사가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번역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그들에게 물었다.’ 이 말이 무려 세 번이나 연달아 반복됩니다. 야곱은 목자들의 대답을 듣자마자 황급히 다음 질문을 쏟아냈습니다. 이것은 그의 절박한 생존 본능을 드러냅니다. 지금까지 야곱이 얼마나 마음 졸이고 두려움에 사로잡혔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그 가운데 야곱은 목자들에게 이렇게 물었습니다. “너희가 나홀의 손자 라반을 아느냐?” 당시에는 오늘처럼 성과 이름이 뚜렷하게 나뉘어지지 않았습니다. ‘나홀의 손자 라반’처럼 아버지나 조부모의 이름을 앞에 붙여 격식을 갖추었습니다. 야곱으로서는 매우 절실한 질문입니다. 반드시 외삼촌 라반을 만나야하는 급박함을 담아 물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들이 이렇게 대답합니다. ‘아노라’. 이 짧은 대답에 야곱은 저절로 안도의 숨을 쉬었을 것입니다. 긴장이 풀려 다리가 후들거렸을 지도 모릅니다. 이어서 더욱 극적인 상황이 그에게 펼쳐 졌습니다. 그의 딸, 즉 라반의 딸이 지금 양을 몰고 오고 있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구태여 다른 사람들에게 안내를 부탁할 필요가 없습니다. 라반의 딸 라헬이 집에 돌아갈 때 같이 가면 됩니다. 그녀의 모습이 가까이 보일수록, 이제 살았다고 비로소 실감하였을 것입니다.

야곱은 라헬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이윽고,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며 한참을 울었습니다. 이 장면을 본문 11절은 야곱이 ‘소리 내어 울며’라고 기록합니다. 여기에 해당되는 구약 원문을 직역하면 ‘소리 높여 울어’입니다. 이 순간, 그 어떤 체면이 들어설 공간이 없습니다. 죽음의 손길에서 벗어나 마침내 생의 영역에 들어섰습니다. 본능만이 그를 압도합니다. 짙은 회한이 내면에 회몰아 칩니다. 낯선 우물가에서 야곱은 한 마리 짐승처럼 꺼이꺼이 울고 말았습니다.

그런 야곱을 라헬이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습니다. 야곱은 감정을 추스르고 그제야 자기를 소개 합니다. 자신이 라반의 조카이자, 리브가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알려주었습니다. 그 얘기를 들은 라헬이 곧바로 아버지에게 달려갔습니다. 라반 역시 야곱의 소식을 듣고 달려와 그를 환하게 맞이 하였습니다. 야곱은 이제 마침내 웃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껏 자신이 겪은 일들을 외삼촌에게 들려줍니다. 어떤 이유로 이곳에 오게 되었는지를 설명합니다.

그 모든 이야기를 듣은 라반의 대답이 본문 14절에 기록되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라반이 이르되 너는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하였더라 야곱이 한 달을 그와 함께 거주하더니

라반이 야곱에게 말합니다. “참으로 내 혈육이로다.” 원문을 곧바로 옮기면 이렇습니다. “분명히 너는 내 뼈이고 내 살이야”, 나그네에게 이 이상으로 힘이 되는 말이 없습니다. 그 순간 야곱은 또 다시 뜨거운 눈물을 흘렸을지도 모릅니다. 자신을 죽이려던 가족의 살벌한 손길에서 벗어나 힘겨운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기를 환대하는 또 다른 가족의 따뜻한 손길을 경험하였습니다.

만약 창세기가 여기서 끝난다면 야곱 이야기는 훈훈한 결말을 지을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정반대입니다. 이후 야곱은 긴 시간동안 라반에게서 혹독한 착취를 경험합니다. 심지어 라반으로부터 도망쳐, 과거 자기를 죽이려 했던 에서에게로 돌아갈 결심을 할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를 질문하게 됩니다. 두려움에 가득찬 눈길을 하고 앙상한 몰골로 찾아온 조카를 포근하게 감싸준 라반의 행동이 위선이었을까요? 그가 전혀 진심없이 가식적으로 그를 대한 것일까요? 섣불리 그렇다고 답하긴 어렵습니다. 물론 라반이 순박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건 분명합니다. 그는 집요할 정도로 계산적인 사람입니다. 철저히 목적지향적인 성격을 지녔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문에 나오는, 라반이 보여준 선의 자체를 무시할 근거는 성경에서 찾기 힘듭니다. 라반에게 야곱은,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연민을 자아내는 불쌍한 조카였습니다. 즉, 라반이 유독 이중적이고 표리부동한 사람이어서 본문 전후로 야곱에게 다른 태도를 보인게 아닙니다. 사람은 누구나 본래 그러합니다. 저를 포함해 예외는 없습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늘 관용적인 사람도, 항상 옹졸한 사람도 없습니다. 다만 자기의 치명적인 이익이 걸려 있을 때, 마음 깊은 열등감을 건드릴 때, 감정과 이익을 우선하는 것이 연약한 죄인의 본성입니다. 따라서 명심해야 합니다. 때로 우리는 누군가에게 야곱이면서 동시에 라반이 됩니다. 항상 피해자이거나 가해자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내가 본문 속 야곱처럼 외롭고 어려운 처지에 놓였을 때, 라반과 같은 이의 도움을 바라는 것 너무나 자연스럽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분명 사람의 손을 통해 이 냉혹한 세상 속에 온기를 전해주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명심해야 합니다. 그렇다고해서 라반이 하나님은 아닙니다. 사람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가 라반처럼 약한 사람에게 무언가 베풀 위치가 되었을 때 도움을 베푸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러면서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주의해야 합니다. 자칫 우월감을 갖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보상을 바라지 말아야 합니다. 자기의에 도취되지 말아야 합니다. 다만 섬김의 소명을 허락하신 주님의 뜻을 잠잠히 따라야 합니다.

그렇기에 본문을 통해 더욱더 깊이 마음에 새기며 묵상해야 할 주제가 있습니다. 바로 만남의 섭리입니다. 야곱은 고단한 삶 속에서 라반을 만나 감격했습니다. 라반 역시 그를 반갑게 맞이하며 모처럼 가족간의 정을 나누었습니다. 이 만남은 그 후로 야곱에 인생에 다양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신비로운 임재의 새로운 문을 열었습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주님께서는 삶속에 다양한 만남을 허락하셨습니다. 반갑고 값진 만남처럼 보이지만 쓰라린 아픔을 남기기도 합니다. 당황스럽고 불쾌한 만남 같지만 훗날 진심으로 감사를 드리기도 합니다. 현실의 모순처럼 사람사이의 만남도 혼란스럽기만 합니다. 

그럴수록 예수님께서 본을 보이신대로 겸손과 친절로 주위 사람들을 따뜻하게 비추시길 바랍니다. 그 가운데 우리가 진실로 의존할 대상이자 날마다 깊이 만나야 할 존재는 오직 하나님 이심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주님께서 오늘 하루도 소중한 만남의 여정을 신실하게 이끄실 줄 믿습니다.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