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10월 26일 수요일

창세기 39장 1~10절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2022년 10월 24일, 포항제일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창세기 39장 1~10절 "언제라도 하나님 앞에"


1 요셉이 이끌려 애굽에 내려가매 바로의 신하 친위대장 애굽 사람 보디발이 그를 그리로 데려간 이스마엘 사람의 손에서 요셉을 사니라

2 여호와께서 요셉과 함께 하시므로 그가 형통한 자가 되어 그의 주인 애굽 사람의 집에 있으니

3 그의 주인이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하심을 보며 또 여호와께서 그의 범사에 형통하게 하심을 보았더라

4 요셉이 그의 주인에게 은혜를 입어 섬기매 그가 요셉을 가정 총무로 삼고 자기의 소유를 다 그의 손에 위탁하니

5 그가 요셉에게 자기의 집과 그의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여호와의 복이 그의 집과 밭에 있는 모든 소유에 미친지라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7 그 후에 그의 주인의 아내가 요셉에게 눈짓하다가 동침하기를 청하니

8 요셉이 거절하며 자기 주인의 아내에게 이르되 내 주인이 집안의 모든 소유를 간섭하지 아니하고 다 내 손에 위탁하였으니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10 여인이 날마다 요셉에게 청하였으나 요셉이 듣지 아니하여 동침하지 아니할 뿐더러 함께 있지도 아니하니라



신학대학원 필수과목 중에 “선교학 개론” 수업이 있었습니다. 한 학기 동안 선교에 대해 많은 것을 고민하고 배웠던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교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에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인상적인 내용이 있었습니다. 


교수님께서는 학생들에게 해외 선교사에게 무엇이 가장 중요한 지 물으셨습니다. 다양한 답이 남았습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건강 관리나 안정적인 재정 후원 등이 거론되었습니다. 물론 다 맞는 말이었습니다. 그런데 교수님께서는 본인 경험을 이야기 하시면서 한 가지를 언급하셨습니다. 바로 ‘자기 예배’입니다.


선교사로서 외국에 있으면 자연스럽게 ‘익명성’을 지니게 됩니다.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거의 없습니다. 게다가 아직 교회가 없는 곳도 있습니다. 함께 모여 예배드릴 사람들이 주위에 없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스스로 정한 시간에 홀로 예배를 드려야 합니다. 하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이것을 무릅쓰고 자기 예배를 성실히 드린 선교사는 하나님께 쓰임을 받게됩니다. 반대로 자기 예배가 무너지면 선교사로서 자질과 영성도 함께 붕괴됩니다.


굳이 선교사를 예를 들지 않더라도 비슷한 경험을 하셨을 것입니다. 홀로 멀리 출장을 갔을 때 예배 드리는 게 쉬운일이 아닙니다. 여러 핑계를 대며 쉬고 싶은 마음이 듭니다. 또한 타지 혹은 해외에 보낸 자녀가 신앙 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노심초사하며 걱정하는 부모님들도 흔히 보게됩니다.


그렇다면 본문에서 요셉이 보여주는 신앙은 거의 기적과도 같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우리는 수천년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기독교라는 거대한 종교 안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라는 탄탄한 조직이 있고 성경이라는 위대한 경전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과 비교하면 요셉 당시 야훼 신앙은 이제 겨우 4대째 내려온 가족 종교에 지나지 않습니다.


역사와 전통은 고사하고 종교로서 그럴듯한 외형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습니다. 조부모 아브라함, 할아버지 이삭, 아버지 야곱으로부터 전해들은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전부입니다. 유목민들의 전통에 따라 그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뿐입니다. 요셉은 그렇게 어릴 때부터 하나님을 알아왔습니다. 바람 앞에 촛불처럼, 파도 앞에 모래성처럼 한순간에 사그라들것처럼 보이는 신앙입니다.


그러다가 형들의 음모로 이집트에 팔려왔습니다. 그 형들도 똑같이 야곱의 아들들입니다. 그들 역시 아버지 야곱과 함께 주님께 제사를 지냈던 사람입니다. 아버지가 들려주는 하나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이고 아멘을 외쳤던 사람들입니다. 즉, 같은 야훼 신앙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런 형들이 동생을 죽이려다가 포기하고 노예로 팔아버리는 후안무치한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이 상황 자체가 요셉으로서는 신앙을 저버리게 하는 환경입니다. 나를 이토록 위험에 몰아넣는 원수같은 형들이 믿는 하나님. 그 하나님을 계속 신뢰하기란 너무나 어려웠을 것입니다. 채색옷을 빼앗기고 웅덩이 안에 있었을 때, 제발 나를 구해 달라고 주님께 간절히 기도했을 것입니다. 결국 요셉이 원하는 대로 응답받지 못했을 때 어쩌면 하염없는 원망이 솟구쳤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이집트에 도착했습니다. 이집트는 한마디로 화려한 신들의 제국입니다. 거대한 제국을 유지하는 토대는 휘황찬란한 종교였습니다. 누구라도 압도될 수 밖에 없습니다. 하물며 아무런 의지할 데 없이 노예로 끌려온 젊은 요셉이라면 더더욱 그러할 것입니다. 게다가 주인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이집트 신들 앞에 머리를 숙일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 점점 마음까지 뺏기기 마련입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요셉은 비록 노예로 팔려갔으나 그곳에서 기적적인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주인은 파라오의 경호대장인 보디발입니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절대군주와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이 실질적인 권력을 쥐기 마련입니다. 보디발이 그런 사람입니다. 그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눈부신 제국 핵심에 있었습니다. 


요셉은 그런 보디발의 눈에 들었습니다. ‘가정 총무’라는 파격적인 승진을 했습니다. 본문 6절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6 주인이 그의 소유를 다 요셉의 손에 위탁하고 자기가 먹는 음식 외에는 간섭하지 아니하였더라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신분만 노예일 뿐입니다. 보디발의 철저한 신임을 얻었습니다. 이집트의 어지간한 귀족 못지 않은 부귀영화가 그에게 주어졌습니다. 외람되지만 만약 제가 이 때 요셉이라면 쉽게 안주할 것 같습니다. 때때로 형들에 대한 복수심은 타오르겠지만 이대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운 인생입니다. 딱히 남부러울 게 없습니다. 얼마든지 배불리 먹고 즐길 수 있습니다. 집안의 다른 종들은 물론이고 보디발에게 잘 보이고 싶어하는 이집트 귀족들도 요셉의 눈치를 보고 마음에 들려할 것입니다.


이런 상황이 되면 누구나 내면이 풀어지기 마련입니다. 자기를 고통으로 몰아넣은 하나님은 이제 안중에 없습니다. 현재 나에게 주어진 풍요에 눈이 멀기 쉽습니다. 쓰디쓴 과거를 지워버리기 위해서라도 주님은 잊고 마음 내키는대로 살기 쉬운 환경입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놀랍게도 이 모든 위기와 유혹에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자기 신앙을 지켰습니다. 아버지께로부터 물려받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놓지 않았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그런 요셉의 신앙이 결정적으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바로 보디발 아내의 유혹입니다. 


방금 읽어드린 본문 6절 후반부에서 요셉의 외모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요셉은 용모가 빼어나고 아름다웠더라” 그의 빼어나고 아름다운 용모가 보디발의 아내를 사로잡았습니다. 여러번 그에게 동침을 요구합니다. 혈기왕성한 청년 요셉으로서 참기 어려운 유혹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주인에 대한 신의를 지켰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요셉의 행동은 단순한 도덕이 아닙니다. 그 바탕에는 주님을 향한 놀랍도록 순수한 신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본문 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9 이 집에는 나보다 큰 이가 없으며 주인이 아무것도 내게 금하지 아니하였어도 금한 것은 당신뿐이니 당신은 그의 아내임이라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앞서 길게 설명드린대로 지금 요셉의 삶은 하나님을 지워버리기 쉬운 환경입니다. 주님께서 먼저 자기를 버리셨다고 충분히 오해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의 마음 깊이 하나님을 모셨습니다. 언제 어디서나,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않습니다. 


이유는 분명합니다. 주님께서 먼저 그를 놓치 않으셨기 때문입니다. 비록 당장 요셉이 원하고 이해할 수 있는 방법으로 응답하지는 않으셨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은 당신만의 방법으로 그가 처한 깊은 어둠과 절망 속에 빛과 희망으로 다가 오셨습니다. 요셉은 그 사랑에 반응 했습니다. 안겼습니다. 주님과 신실하게 동행했습니다. 그러므로 이렇게 담대히 외쳤습니다.


“그런즉 내가 어찌 이 큰 악을 행하여 하나님께 죄를 지으리이까?”


이런 요셉의 신앙이 바로 우리의 신앙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 하루도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으로부터 멀리하게 하려는 온갖 시련과 유혹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럴때마다 우리와 언제나 동행하시는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고 의지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날마다 하나님과 친밀한 사귐을 누리고 죄를 물리치며 은혜의 길을 걷는 모두가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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