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9월 16일 토요일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민음사) 간단 서평

소설이 읽고 싶었다.
긴 호흡으로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여유가 도무지 없었다.
사임하고 임지를 옮길 때가 좋은 기회였다.

일부러 중편을 골랐다.
하지만 여전히 여유는 없었다.
이사 준비로 바빴다.
중간 정도 읽고 부임했다.
부임 후에도 적응하느라 정신없었다.

이 책 자체가 읽기 난해하기도 했다.
익숙하지 않은 러시아 이름의 많은 인물들이 어지럽게 등장했다.
사건을 단락으로 나누지 않고 한 호흡으로 잇는 바람에 흐름을 따라잡기 힘들었다.

그러나 다시 책을 펼치고 끝내 다 읽게 하는 굳건한 힘을 느꼈다.
척박한 환경 속에 드러나는 인간의 다양한 본성.
그리고 이리저리 흔들리면서 사람다움을 꿋꿋하게 지키는 것의 위대함을 깨닫는다.

그중에서도 잠깐 등장하는 어느 노인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아래).
나 역시 그처럼 품격을 지닌 '꼿꼿함'을 지키고 싶다.
치열한 현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지키려 분투하는 이들에게 적극 권하고 싶은 위대한 소설이다.

덧. 위키피디아 등을 통해 간략한 인물 소개를 확인하고 읽기를 권한다.

"슈호프는 오늘 처음으로 그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되었다. 수용소 내의 죄수들이 모두 새우등처럼 허리를 굽히고 있는 반면에, 이 노인은 유독 허리를 꼿꼿하게 세우고 있다. 의자에 앉은 모습을 보니, 의자에 뭘 기대고 앉은 것처럼 꼿꼿하게 앉아 있다. 

머리카락은 이미 모두 빠져서 이발할 필요도 없어진 지 오래다. 수용소에서 하도 잘 먹은 탓에 머리가 모두 빠진 모양이다. 그는 식당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과 하등의 관계가 없다는 듯, 슈호프 머리 너머 어느 곳인가 먼 허공을 바라보고 있다. 

그는 끝이 다 닳은 나무 수저로 건더기도 없는 국물을 단정한 모습으로 먹는다. 다른 죄수들처럼 국그릇에 얼굴을 처박고 먹는 것이 아니라, 수저를 높이 들고 먹는다. 이는 아래위로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뼈처럼 굳은 잇몸으로 딱딱한 빵을 먹고 있다. 

얼굴에는 생기라고는 하나도 찾을 수가 없다. 그래도 어딘가 당당한 빛이 있다. 산에서 캐낸 바위처럼 단단하고 거무스름하다. 쩍쩍 갈라진 거무스름한 손은 그가 걸어온 수십 년의 감옥살이를 통해, 한 번도 가벼운 노동이나 사무직 같은 것을 얻어 일한 적이 없이, 생고생만 했다는 것을 증명해 준다. 

하지만 그는 전혀 굴하지 않는 얼굴을 하고 있다. 어떤 타협도 하려 들지 않는다. 300그램의 빵만 하더라도, 다른 죄수들처럼 더러운 식탁에 아무렇게나 내려놓지 않고, 깨끗한 천을 밑에 깔고 그 위에 내려놓는다."

2023년 8월 27일 일요일

사무엘상 16장 1절, "한 왕을 보았느니라"

2023년 8월 23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16장 1절, "한 왕을 보았느니라"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아마 이 자리에 계신 많은 분이 공감하실 겁니다. 아들을 군대에 보낸 부모 마음은 항상 불안합니다. 이새가 그랬습니다. 게다가 전쟁 중입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깊은 염려에 빠졌습니다. 그런 까닭에 군복무 중인 아들들을 먹이고, 그들 지휘관을 대접할 어마어마한 양의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그런데 전쟁터인 엘라 골짜기는 그가 살고 있는 베들레헴에서 서쪽으로 약 23km 정도에 위치합니다. 우리 교회를 기준으로 하면, 직선거리로 광화문까지입니다. 무거운 짐을 지고 걸어가기에는 꽤 멉니다. 그뿐만 아니라 그사이에는 메마르고 거친 산줄기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강도를 비롯한 여러 위험이 있습니다. 나이 많은 이새가 도무지 직접 갈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보통 자기 대신 누구를 보낼까요? 종을 보내거나 아니면 건장한 아들에게 심부름 시키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는 막내 다윗을 불렀습니다. 그런데 이 때 다윗은 몇 살이었을까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가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12~14절에 보면, 그에게는 형 일곱이 있었고 그 중 3명이 군대에 끌려갔습니다. 따라서 넷째 형부터는 입영 대상 기준이 아닙니다. 이를 토대로 여러 정황을 종합해보면 당시 다윗은 갓 어린아이티를 벗은 10대 초중반 소년이었을 것입니다.

이새는 이미 다 큰 아들들은 지극정성으로 배려했습니다. 하지만 가장 어리고 힘없는 막내에게는 정반대로 막 대합니다. 그의 여린 어깨 위에 육중한 짐을 들려 힘겹고도 고된 여정을 혼자 보냈습니다. 이 상황이 이해되십니까? 그뿐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전쟁터에서 매우 비참한 광경을 목격합니다. 블레셋 장수 골리앗이 감히 하나님의 군대를 날마다 모독했습니다. 하지만 이스라엘 군대에서 누구 하나 당당히 맞서 싸우지 못했습니다. 다윗은 그 모습에 거룩한 분노를 느꼈습니다. 분연히 일어나 골리앗과 대결을 자원합니다. 

그렇지만 제아무리 잔악무도한 사울 왕이더라도 뽀얀 살결의 소년이 저 괴물 같은 골리앗과 싸우겠다고 나서는 걸 차마 허락하지 못했습니다. 바로 그때, 다윗이 사울을 설득하기 위해 들려준 그의 이야기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기서 그 시절, 어린 다윗의 일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사무엘상 17장 34~35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34 다윗이 사울에게 말하되 주의 종이 아버지의 양을 지킬 때에 사자나 곰이 와서 양 떼에서 새끼를 물어가면 35 내가 따라가서 그것을 치고 그 입에서 새끼를 건져내었고 그것이 일어나 나를 해하고자 하면 내가 그 수염을 잡고 그것을 쳐죽였나이다

잘 알다시피, 그는 아버지의 양 떼를 돌보는 목동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양 떼를 이끌고 다녔던 유다 광야는 푸른 풀이 아름답게 우거진 한가로운 목장이 아닙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그곳에는 험악한 사자나 곰이 빈번하게 출몰하였습니다. 맹수들이 양뿐만 아니라 다윗의 목숨까지도 해치러 달려드는 매우 위험천만한 광야입니다. 

이 역시 상식적으로 이해되십니까? 만약 여러분이라면 아무리 집안 경제 사정이 어렵다 한들, 어린 아들에게 돈 벌어오라며 음산한 길거리에 아무렇지 않게 내보낼 수 있으십니까? 정상적인 부모라면 결코 할 수 없는 행동입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을 오늘날 인권 기준으로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의 유년 시절을 묘사하는 성경의 태도는 일관됩니다. 바로 부모로부터 당한 철저한 배제와 소외입니다. 그는 자라가며 마땅한 돌봄과 사랑을 받지 못한 채, 초라하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사무엘이 집에 찾아왔음에도 형들과는 달리 초대받지 못한 장면이 대표적입니다.

그런 까닭에 다윗은 시편 27편 10절에 다음과 같은 눈물겨운 고백을 남겼습니다.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내면서도 다윗은 아름다운 신앙을 꿋꿋하게 지켰습니다. 본문 바로 뒤에는 하나님의 영이 떠난 자리에 악령이 틈타 깊은 고통에 시달리는 사울의 모습이 등장합니다. 신하들은 탁월한 수금 연주자 한 명을 곁에 두어서 그 음악 소리를 통해 고통을 이겨내시라고 건의했습니다.

그 의견을 받아들인 사울의 허락 아래 찾은 적임자가 바로 다윗입니다. 이는 그가 이스라엘 최고의 수금 연주자로 인정받았음을 뜻합니다. 이러한 그의 수금 실력은 기본적으로 어떤 사실을 알려줄까요? 당연히 그 악기를 날마다 부단히 연습했음을 의미합니다.

음악가들이 흔히 하는, 이런 말이 있습니다. ‘하루 연습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 연습 안 하면 스승이 알고, 삼일 연습 안 하면 관객이 안다.’ 마찬가지로 다윗이 왕 앞에 수금을 들고 설 수 있었던 까닭은, 그가 그 악기를 항상 가까이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사울의 신하들이 단순히 능숙한 연주자를 찾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악령이 떠나갈 정도로 성령 충만한, 영의 찬양을 들려줄 사람을 구했습니다. 따라서 다윗은 어릴 때부터 날마다 수금을 들고 하나님께 온전한 찬양을 쉼 없이 드린 예배자였습니다. 그런 까닭에 사무엘상 16장 18절에, 다윗을 가리켜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신다.”라고 소개하였습니다.


이제 본문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은 본래 순박했습니다. 하지만 그가 권력을 손에 쥔 후 차츰 하나님과 멀어지고 심지어는 대적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러한 사울 대신에 다른 왕을 세우길 원하셨습니다. 당신이 선택한 누군가에게 기름을 부으라고 사무엘에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안에 매우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본문 말씀을 다시 한번 다함께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 너는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 내가 너를 베들레헴 사람 이새에게로 보내리니 이는 내가 그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느니라 하시는지라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중에서 “한 왕을 보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왕은 현재 이스라엘을 다스리는 사울이 아니라 나중에 새로 즉위할 다른 왕을 가리킵니다. 그렇다면 “보았다.”가 아니라 “볼 것이다.”라는, 미래 의미로 표현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이런 경우 히브리어 문법상 보통 ‘미완료 동사’로 적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반대로 과거 혹은 현재 사건을 뜻하는 ‘완료형’으로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미래 사건을 마치 이미 일어난 것처럼, 완료형으로 생생하게 묘사하는 경우를 가리켜 ‘예언적 완료형’(perfectum propheticum)이라고 부릅니다. 특별히 하나님의 확고한 의지와 결심을 드러내는 구약 성경 특유의 표현법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말씀하신 “한 왕”은 누구일까요? 그는 분명히 다윗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아직 그는 왕이 되기는커녕 다윗이라는 이름조차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때 그는 어떤 모습이었나요?

앞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다윗은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지극히 마땅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한 채, 유다 광야에서 외롭게 지냈습니다. 그곳에서 밤낮으로 참혹한 더위와 추위를 이겨내며, 저 멀리 들리는 맹수들의 섬뜩한 울음소리 가운데 아버지의 양 떼를 지켰습니다. 그렇게 그는 무수한 좌절로 얼룩진 비참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다윗은 그럼에도, 그 모든 고난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절망하거나 원망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날마다 수금을 손에 움켜 쥐며 잠잠히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황량한 광야 한복판에서 눈물 맺힌 두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찬양 소리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그 눈망울에 당신의 두 눈을 맞추셨습니다. 그리고 떨리는 음성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이 선언은 하나님의 위대한 감탄이자 의지입니다. 사람들 눈에 다윗은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은 초라한 아이였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눈에는 이미 왕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날, 마치 어린 다윗과 같은 고통스러운 나날을 보내진 않으셨습니까? 그 시절, 힘겹게 거닐었던 여러분의 유다 광야는 어디입니까? 혹시 그 아픔이 여전히 내면 깊숙한 어두운 곳을 찌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오늘 말씀을 통해 반드시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모습으로 있건 간에, 다른 수많은 사람으로부터 그 어떤 멸시를 당하든 간에 상관없이, 온전히 주님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날마다 하나님 나라를 묵묵히 일구어 나갈 때, 주님께서는 그런 우리를 향한 위대한 뜻과 계획을 예언적 완료형으로 선언하십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항상 믿음으로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이렇듯 본문은 다윗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눈길을 묘사합니다. 이 안에 담긴 위대한 사랑을 발견합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지 말고 묵상의 걸음을 더욱더 멀리 내디뎌야 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부르심은 한순간의 ‘완성’이 아니라 평생에 걸친 ‘과정’이라는 진리입니다.

다윗을 향한 주님의 찬란한 계획이 선명하게 드러났습니다. 위대한 예언자이며 제사장이자 사사인 사무엘이 직접 그의 머리 위에 기름 부었습니다. 심지어 거인 골리앗을 쓰러뜨리는 감격스러운 승리를 거두어 많은 백성의 환호와 지지를 한 몸에 받았습니다. 그를 왕으로 눈여겨보시고 부르신 하나님 말씀이 금세 이루어질 것 같았습니다. 그가 지금 당장 권력을 손에 쥔다고 해도 그리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다윗은 순탄하게 왕이 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한참 동안 먼 길을 돌아, 무려 약 10년간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임금이 되기는커녕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미친 척까지 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다윗은 혹독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왕이 되었습니다. 그 후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통치를 실현하며 메시아를 예고하는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두 가지 중대한 잘못 때문에 하나님의 준엄한 심판을 받았습니다. 바로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를 뺏은 것과 온 이스라엘 가운데 군사로 모을 수 있는 사람의 숫자를 헤아린 것입니다.

이 두 사건에는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시대 권력자의 지극히 당연한 행동이라는 사실입니다. 왕이 눈에 띄는 여인을 마음대로 곁에 두는 사례는 역사책에 부지기수로 많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여인이 유린당하는 끔찍한 성범죄가 일어났습니다. 밧세바가 대표적인 희생자입니다.

또한 나라의 군사력을 확인하는 것은 어찌 보면 군 통수권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왕으로서 가장 중요한 책무는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켜 보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 엄중히 금지하신 까닭이 있습니다. 어느 순간, 현실을 핑계로 하나님보다 창과 칼과 병거를 더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다윗의 이 두 가지 죄에 분노하신 근본적인 이유가 있습니다. 그가 도망자 시절은 물론이고 왕관을 머리 위에 얹은 그 순간에도, 여전히 왕으로서 ‘과정’에 있음을 잊어버린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어느샌가 다윗은 자기도 모르게 스스로 왕으로 ‘완성’ 되었다고 착각했습니다. 그 결과, 주변 다른 나라 왕들과 같은 죄악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사울과 다윗의 차이는 바로 여기에서 극명하게 나뉩니다. 사울은 하나님께서 반복하신 경고를 끝까지 거부한 채 자신이 이미 왕이 다 되었다고 여겼습니다. 어떻게든 왕권을 움켜쥐고 놓지 않으려, 탐욕을 향해 맹렬히 달려갔습니다. 그 결과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반면 다윗은 자신이 아직 왕이 아닌, ‘왕이 되어가는 존재’임을 하나님 앞에 겸허히 인정하고 회개하였습니다. 아무런 자격 없던, 초라한 목동을 이 자리로 부르시고 이끄신 주님의 놀라운 은총과 다시 마주했습니다. 그리하여 순박한 소년의 미소를 되찾았습니다.

열왕기상 1장은 그러한 다윗의 말년을 기록합니다. 1~4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 다윗 왕이 나이가 많아 늙으니 이불을 덮어도 따뜻하지 아니한지라 2 그의 시종들이 왕께 아뢰되 우리 주 왕을 위하여 젊은 처녀 하나를 구하여 그로 왕을 받들어 모시게 하고 왕의 품에 누워 우리 주 왕으로 따뜻하시게 하리이다 하고 3 이스라엘 사방 영토 내에 아리따운 처녀를 구하던 중 수넴 여자 아비삭을 얻어 왕께 데려왔으니 4 이 처녀는 심히 아름다워 그가 왕을 받들어 시중들었으나 왕이 자리는 같이 하지 아니하였더라

그는 몹시 늙어서 이불을 덮어도 냉기를 느낄 정도로 기력이 많이 쇠하였습니다. 신하들은 고민에 빠져 여러 차례 논의 끝에 묘수를 찾았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에서 가장 예쁜 처녀, 아비삭을 구해다가 다윗이 그녀를 안고 따뜻하게 주무시게 하는 것입니다.

당시 왕으로서 그리 문제 될 것이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더구나 그녀는 밧세바와 달리 유부녀도 아니었습니다. 율법 기준에도 비난거리가 아닙니다. 하지만 다윗은 이 땅에서 숨을 거두는 그 날까지, 결코 아비삭과 잠자리를 함께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다윗이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기가 아직 왕이 아니라 평생 주님 앞에서 왕이 되어가는 사람이라는 진리를 내면 깊이 간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추악한 죄악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비참하게 희생당한 우리야와 능욕을 겪은 밧세바의 고통을 마음에서 지우지 않았습니다.

늙은 왕의 품에 어린 소녀를 안기려는 계획은 중년 남성 정치가들 입장에서는 탁월한 판단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 결정에 따라 진행할 과정과 결과는 여전히 참담합니다. ‘미모’는 철저히 주관적입니다. ‘이스라엘의 가장 예쁜 처녀’라는 기준은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따라서 고관대작의 여식으로 결정될 리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아비삭은 지방 권력자에게 저항할 수 없는 가난하고 힘없는 집의 딸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다윗은 이기적인 편의에 취해 그런 내밀한 현실을 모른척하지 않았습니다. 어린 소녀가 감당하기 버거운 공포와 수치심을 무시하지 않았습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그리 대단한 허물이 아니더라도 말씀 앞에 겸손히 자신을 다스렸습니다. 아비삭의 몸에 욕망 어린 손길을 뻗는 대신, 자신이 오래전 앞서 경험했던 하나님의 따스한 눈길을 그녀에게 전해 주었습니다.

다윗은 그렇게 자기 삶을 마무리 했습니다. 초라한 소년 목동을 왕으로 세우신 놀라운 사랑의 시선에 일평생 응답하며 살아갔습니다. 맡겨진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를 묵묵히 전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윗은 구약과 신약을 잇는 가장 중요한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었습니다.


부득이 제 이야기를 하는 것을 너그럽게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 설교 초안은 제가 대학 시절에 했던 묵상을 바탕으로 합니다. 그때 저는 목회자가 되길 꿈꾸며 신학을 전공했습니다. 하지만 무척 많은 한계를 절감했습니다. 너무나 괴로운 시간을 보내며 수 없이 절망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 이루 말할 수 없는 힘과 용기를 얻었습니다.

그 후 시간이 흘러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가운데 목사 안수를 받았습니다. 그 후 한동안은 저를 향해 “목사님”이라고 부르는 소리가 몹시 어색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차츰 목사로 불리는 게 익숙해졌습니다. 

그러나 오늘 함께 읽은 말씀과 지금까지 저를 신실하게 이끄신 주님의 손길을 통해 절절히 고백합니다. 저는 일평생 그저 ‘목사가 되어가는 사람’이지 결코 그 어떤 순간도 ‘목사로 완성된 사람’이 아닙니다. 그리고 어느샌가 ‘이제 목사가 다 되었다.’고 착각하는 순간, 저를 목회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과 가장 멀어지며 변질된다는 진실 또한 엄중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 아래 일평생 그리스도인이 되어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에서 신앙의 완성을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사도 바울 역시 빌립보서 3장 12절에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나는 이것을 이미 얻은 것도 아니며, 이미 목표점에 다다른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를 사로잡으셨으므로, 나는 그것을 붙들려고 좇아가고 있습니다.”(새번역 성경)

그러므로 너무 교만하거나 안주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지나치게 스스로 실망하거나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중심을 보시는 신실하신 주 하나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향한 우리의 모든 여정 가운데 언제나 함께하시기 때문입니다. 그와 같은 주님의 눈길을 신뢰하며 주어진 일상을 다윗처럼 날마다 희망차게 일구어 나가시길 바랍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향해 오늘도 하나님께서 따스한 사랑의 목소리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


기도
자녀들의 중심을 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그 옛날, 거친 광야에서 외로이 눈물을 삼키는 어린 다윗을 향해 ‘내가 한 왕을 보았느니라.’라고 말씀하신 주님 음성에 귀 기울입니다. 하나님께서 저희가 저마다 지니는 힘겨움과 아픔 또한 누구보다 잘 아시고 위로하시며 새로운 삶의 길로 이끄실 줄 믿습니다. 주님을 신뢰하며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찬양과 기도의 삶을 살게 하옵소서. 
또한 주님의 부르심은 완성이 아니라 평생에 이르는 과정임을 고백합니다. 은총의 긴장과 균형을 지켜가며 좌절과 교만을 넘어 참된 구원의 여정을 향해 발걸음을 내딛게 하여 주시옵소서. 어린 다윗과 같이 연약하고 소외된 이웃을 위해 더욱더 섬김과 나눔을 이어가게 하옵소서.
참 생명의 길을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열어 보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3년 8월 18일 금요일

포항-일산 이사를 마치고.



나에겐 고향이 없다.
굳이 따지면 '대전'이다.
성장기 대부분을 거기서 보냈다.
하지만 좋은 기억이 거의 없다.
짙은 소묘 같은 일상이 이어졌다.

첫 번째 그림부터 그랬다.
좁은 용달 트럭의 진동이 지금도 생생하다.
부모님은 경남 섬마을에서 나고 자라 부산에서 사셨다.
낯선 대전에 어린 두 남매를 데리고 이사하셨다.
단칸방의 어두운 공기가 다섯 살 아이 마음에 목탄화처럼 새겨졌다.
지워내고 덧칠하는 데 꽤 오랜 시간과 노력이 들었다.

이사를 마쳤다.
어제(17일) 오전 포항에서 이삿짐을 포장하고 일산으로 향했다.
아쉬움에 일부러 장사 해변을 들린 뒤 꽤 먼 거리를 달렸다.
6살 아들 기억에 오래오래 생생히 남을 것이다.
하지만 오래전 나와는 상황이 전혀 다르다.

이사하게 된 이유와 준비하는 과정 모두가 그저 감사하다.
교회의 세심한 배려 덕분에 쾌적한 사택으로 원활하게 잘 이사했다.
가는 길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세 가족이 싼타페를 타고 오붓하고 편하게 이동했다.

물론 알고 있다.
아들이 느끼는 건 전혀 다르다.
포항에서 차가 출발할 때, 가는 길 중간중간 인하는 "이사 가기 싫어!"라고 소리 질렀다.
어쨌든 그 아이에게는 이별과 새로운 환경이 슬프고 두려울 것이다.
어른의 눈높이로 함부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다만 이곳에서 펼쳐질 삶이 인하에게는 화사한 빛깔의 수채화 같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 내가 아들에게 푸른 물감 같은 아빠이길 소망한다.
부디 인하에게는 고향이 있었으면 좋겠다.

2023년 8월 7일 월요일

포항제일교회 사임

 

대학 시절부터 '서울을 벗어나는 것만으로도 이 시대를 위한 나름의 섬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결심 따라, 안수받은 이후 줄곧 영남권에서 부목사 생활을 했습니다.
하지만 돌이켜볼수록 제가 오만했다는 걸 깨닫습니다. 오히려 서울을 벗어났기에 누리는 게 훨씬 더 많았습니다. 너무나 좋은, 많은 성도님에게 과분한 사랑을 받았습니다. 아름다운 자연을 가까이 접했습니다. 소중한 동역자들을 만났습니다.
특별히 포항에서는 개교회를 넘어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지도력을 발휘하시는 박영호 담임목사님 곁에서 많은 것을 성찰하고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평소 안 쓰던 근육을 키우고, 둔했던 감각을 깨우며 목회자로서 한 걸음 더 내디딜 수 있어 무척 감사했습니다.
아쉽게도 지난 3년 7개월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포항제일교회를 떠납니다. 하나님의 선한 손길을 따라 일산 승리교회 교구 목사로 부임합니다. 다음 주일(13일)에 인사를 먼저 드리고 돌아와 17일에 이사할 예정입니다. 새롭게 열어갈 여정을 위해 기도 부탁드립니다.

2023년 7월 23일 일요일

마태복음 22장 34~40절 “가장 큰 계명, 사랑”

포항제일교회 수요기도회, 2023년 7월 19일, 목사 정대진
마태복음 22장 34~40절 “가장 큰 계명, 사랑”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이런 상상을 한 번 해보시길 바랍니다. 어디까지나 상상입니다. 우리 교회 아동부 어린이 한 명이 무더위에 지치고 너무 배가 고팠습니다. 잠시 이성을 잃고 땅바닥에 있던 못을 주어서 예배당 벽에 이렇게 낙서 했습니다.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

그리고 이 천년이 흘렀습니다. 서기 4023년입니다. 우리교회 예배당이 무너지지 않고 형체를 잘 지킨 채 발견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듣고 세계 여러 나라의 고고학자들이 몰려왔습니다. 그들은 2023년 대한민국 포항 기독교인의 생활상을 알기 위해 발굴을 시작했습니다.

그러다 건물 벽 한쪽에 새겨진, 당시 기준으로는 고대 한국어로 쓴 짧은 문장을 발견합니다. 무엇이죠? “아, 정말 배고파 죽겠다.”입니다. 좀 더 상상을 발전시켜 보겠습니다. 그 때 남미 대륙에 사는 한 청년이 자기 시대 언어로 번역한 발굴 기록을 읽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판단을 내렸을까요? 아마도 이렇게 생각하기 쉬울 겁니다.

“아, 이 천년 전에 동아시아에 있었던 한국이라는 나라는 ‘배고파 죽겠다.’라고 괴로워하며 글자를 새길 정도로 무척 굶주리고 가난한 나라였구나!”

사실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못 이해하는 까닭이 무엇일까요? 2023년 대한민국과 4023년 남미 사이에는 너무나 많은 문화 차이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저러해서 죽겠다.’라는 국어 표현에는 우리나라의 오랜 아픈 역사가 녹아 있습니다. 가난과 전쟁과 질병 등으로 너무나 많은 사람이 아까운 목숨을 잃어야 했던 험난한 세월이 담겨 있습니다. 다른 나라의 옛 문장에 담긴 이러한 배경을 무시한다면 분명 오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문자’는 치명적인 한계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언어는 사람들 사이에 가장 많이 사용하는 대화 수단입니다. 하지만 맥락에서 벗어날 경우 뜻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그런 까닭에 오랫동안 가깝게 지낸 가족이나 친구라 할지라도 사소한 말실수로 관계가 틀어지곤 합니다. 이 사실을 성경을 읽을 때도 분명히 유념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방금 드린 이야기처럼 동아시아와 남미 사이, 이 천년의 문화와 역사 차이는 필연적으로 의사소통의 오해와 왜곡을 가져옵니다. 마찬가지로 신약 성경의 경우 지금으로부터 약 2천년 전에 완성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역사를 기준으로 보면 삼국 시대가 막 시작될 때였습니다. 즉 박혁거세가 알에서 태어나고 주몽이 활을 쏘며 고구려를 세울 때와 동시대를 배경으로 합니다. 심지어 구약 성경은 그보다 훨씬 이전에, 너무나 먼 옛날에 기록하고 편집되었습니다. 게다가 고대 서아시아와 유럽의 언어인 히브리어, 아람어, 헬라어로 적혔습니다. 우리가 가진 한글 성경은 그것을 ‘번역’한 책입니다.


정리하자면 성경은 절대로 하늘로부터 한 순간에 쿵! 하고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오늘날과 전혀 다른 전통과 상황 속에서 상당히 이질적인 ‘언어’로 기록되었습니다. 물론 성경을 반드시 원전으로만 봐야하고 번역 성경은 무가치하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우리 손에 들린 성경책을 사랑하고 여기에 담긴 말씀을 날마다 꾸준히 읽으며 바르게 묵상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성경이 ‘언어로서 한계’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꼭 명심해야 합니다. 마치 예수님이 참 하나님이면서 참사람이듯, 성경도 신비로운 모순과 조화 가운데 주님의 말씀을 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성경에 대한 이런 기초 상식을 무시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됩니다. 그들은 말씀 전체가 보여주는 커다란 그림과 풍경에는 관심 없습니다. 그 대신 성경을 문자적으로만 해석하며 무리한 자기 신념을 고집합니다. 그러다 보니 어느 순간, 말씀이 본래 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한 참 멀어져 있습니다. 분노와 증오에 가득차서 다른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하고 공격합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 말씀을 경청하기 보다는 수단으로 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도 성경을 왜곡하며 자신의 어리석은 목적을 위해 이용하려 했던 사람들의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34~3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34 예수께서 사두개인들로 대답할 수 없게 하셨다 함을 바리새인들이 듣고 모였는데 35 그 중의 한 율법사가 예수를 시험하여 묻되 36 선생님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니이까

본문 말씀은 마태복음 22장 15절부터 시작하는 ‘논쟁 단락’안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대제사장과 장로들에 둘러싸여 당신의 권위를 변론하셨습니다. 22장 15~22절은 로마황제에게 바치는 세금에 대한 논란을 들려줍니다. 본문 바로 앞인 23~33절은 부활을 오해한 사두개인들을 논박하는 주님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다음으로 바리새인이 등장합니다. 그들로서는 평소 대립했던 사두개인들의 논리가 무참히 깨지는 모습을 보며 몹시 통쾌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예수라는 사나이는 몹시 성가신 존재였습니다.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과는 정반대로, 그가 성경을 문자적으로 완벽히 지키는 것에 전혀 관심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대신 세세한 율법 조항들을 가볍게 무시했습니다. 창기와 세리들과 어울리며, 당시 신앙 전통으로 볼 때, 경악스러운 죄를 서슴없이 저질렀습니다. 

그런 까닭에 바리새인 중 ‘한 율법사’가 대표선수로 나섰습니다. 주님께 나아가 공개적으로 질문을 던집니다. 성경에서 어느 말씀이 가장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런데 이 질문은 당시 랍비들 사이에서 가장 뜨겁게 토론하던 주제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본문 속 율법사의 의도는 정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다는, 답을 듣는 게 아닙니다.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예수의 수준과 실력을 만 천하에 드러내 망신 주려는 게 그의 목적이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히 교활한 계략입니다. 그들이 보기에 예수님은 제대로 교육받지 못한 일자무식 나사렛 촌놈입니다. 지금까지는 그럴듯한 속임수로 무지몽매한 백성을 속였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말씀에 대해 깊은 토론을 시작하면 금세 바닥을 드러낼 거라고 율법사는 기대했습니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께서 자칫 어설프게 대답했다가는 성경에 대해 무지한 사람으로 공격당할 수 있습니다. 또한 지금까지 군중들을 열광시킨 주님의 가르침과 비유를 한 순간에 평가절하 할 수 있는 위기입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바리새인들의 도전에 예수님은 어떻게 대답하셨을까요? 37~39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38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39 둘째도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예수님은 먼저 신명기 6장 5절을 언급하셨습니다. 사람들이 지켜야할 가장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은 우리의 전 존재와 온 인격을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주님은 레위기 19장 18절을 인용하면서 “이웃 사랑”을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눈 여겨 볼 점은, 그 사이에 있는 “둘째도 그와 같으니”입니다. 이를 통해 이웃 사랑은 앞서 말한 하나님 사랑보다 한 층 낮은 차원이 아니라,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선언하셨습니다.

즉,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분리 할 수 없는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 정작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이웃을 함부로 대한다면그것은 거짓입니다. 또한 하나님을 올바로 알고 섬기지 않으면서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 할 수 없습니다. 자기의와 만족에 취한 그릇된 이웃사랑에서 벗어나 참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먼저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고 그 사랑을 닮아가야 합니다.

이 모두를 끝맺는, 40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40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모든 성경의 “강령”(綱領)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강령”이라고 번역한 헬라어는 <크레만타이>입니다. 이 단어를 우리말로 곧바로 옮기면 “걸려 있다” 혹은 “의존 하다”라는 뜻입니다.

커튼과 커튼 봉의 관계를 생각해 보시면 좀 더 이해하기 쉬우실 겁니다. 아무리 값비싼 좋은 커튼을 구입한다 할지라도 잘못된 봉에 끼우면 본래의 기능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튼튼한 막대기에 제대로 걸려있을 때 비로소 커튼은 커튼다울 수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성경 전체의 모든 구절이 기대어 걸려있는 ‘핵심’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수님의 대답을 들으며 중요한 의문이 떠오릅니다. 과연 이 사실을 율법사와 바리새인들이 몰랐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만을 사랑하라는 신명기 6장 5절은 이른바 <쉐마>이라고 불리는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아침, 저녁으로 하루에 두 번씩 암송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메주자’라고 불리는 작은 상자에 넣어 출입구에 붙여 두었습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레위기 19장 18절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레위기는 구약 성경의 중심입니다. 그 중에서도 19장이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십계명을 실천하는 구체적인 조항들이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은 단순히 레위기 19장 18절, 한 구절만이 아니라 19장 전체를 인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기록한 이웃 사랑은 십계명을 바탕으로 할 때에만, 정확히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시 율법학자들에게 너무나 친숙한 사실이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유대인들에게 가장 존경받는 랍비 아키바 역시 ‘이웃사랑’이 최고의 율법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예수님 말씀은 대단히 신선하고 기상천외한 게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을 비롯한 그 시대 종교 기득권들에게 너무나 뻔하고 익숙한 진리였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탐욕에 눈이 어두워 정작 복음의 본질을 놓치고 말았습니다. 당연한 진리가 그들에게는 더 이상 당연하지 않았습니다. 어느샌가 그럴듯한 거짓이 복음을 대신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주님은 지극히 평범하고 담백한 진리를 통해 그들의 위선과 거짓을 폭로하셨습니다.


사실 본문에 등장하는 바리새인들은 어찌 보면 굉장히 존경스러운 신앙 지도자들입니다. 이들은 로마의 침략으로 멸망직전에 이른 이스라엘을 구하기 위해 열정적인 신앙을 불태웠습니다.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 있습니다. 성경의 모든 구절에 대한 절대적인 복종입니다. 특별히 본문에 등장하는 ‘율법사’는 오늘날 신학자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필사할 뿐만 아니라 율법을 해석하는 권한을 가졌습니다. ‘글자’를 읽을 수 있는 사람이 5%도 되지 않았던 그 시절입니다. 실로, 막강한 권위였습니다. 문제는 율법사들이 하나님 말씀으로 오히려 많은 사람을 괴롭혔다는 사실입니다.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성경의 각종 정결 규정을 100% 완벽하게 지킬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요? 특별히 물이 부족한 사막 지대에서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여유로운 부자들을 제외하고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가난하고 힘없는 절대다수의 백성은 먹고 살기위해 어쩔 수 없이 율법을 어기는 경우가 허다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약자들을 향해 바리새인들과 율법학자들은 말씀으로 위로 하기는커녕 함부로 비난하고 무시했습니다. 그들이 믿음 없는 더러운 사람들이라며 상처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럴수록 자신의 경건함을 더욱 내세우고 으스대기 일쑤였습니다.

결론적으로 바리새인들은 성경 글자에는 철저히 집착했지만 정작 그 본질인 “사랑”은 놓치고 말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연약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오히려 말씀을 이용해 그들을 착취하고 억눌렀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의 뜻마저 왜곡시키며 복음을 대적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렇기에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계명이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예수님 말씀은, 바리새인들의 추악한 죄악을 향한 날카로운 지적입니다. 그들은 당대 최고의 신학교육을 받은 종교엘리트라는 자부심에 취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말씀의 본질에는 무관심했습니다. 권위를 함부로 휘두르며 거룩한 소명을 모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로는 그럴듯하게 떠들어 댔지만 실상 하나님을 온전히 따르지 않았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라고 거창하게 외쳤지만 정작 본인들이 주위 사람을 섬기지 않았습니다.


그런 까닭에 굳게 붙잡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곧, 말씀이십니다. 주님은 성경의 핵심에 대해 단지 입술로만 정리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본질인 “사랑”을 이 땅에서 직접 살아내셨습니다. 모든 죄인을 살리기 원하셨습니다.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리하여 온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놀랍고도 위대한 사랑의 영원한 증거를 몸소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 전체가 증언하는 가장 중요한 복음은 너무나 연약하고 초라한 죄인인 우리에게 하나님께서 먼저 행하신 찬란한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그 크신 주님의 사랑에 대한 인간의 지극히 당연한 반응이자 부르심입니다. 이와 같은 소중한 진리를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성경이 보여주는 거대한 세계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참으로 말씀하고자 하시는 사랑의 음성에 귀 기울일 수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흔히 “성경적으로” 혹은 “성경대로”라는 말을 자주 듣습니다. 정말 귀한 태도입니다. 인간의 연약한 이성과 경험이 아닌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 말씀에 근거하여 삶의 방향을 결정하려는 자세는 그 자체로 너무나 훌륭합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성경대로’라고 말은 하지만 실은 정반대인 경우를 종종 보게 됩니다. 자기 뜻과 욕심을 고집하기 위해 성경 구절을 억지로 들이밀며 그 권위를 훔쳐 휘두르는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많은 성경지식을 자랑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게 있습니다. 바로 마음 중심에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십자가 사랑을 품고 겸손히 그리고 잠잠히 말씀에 귀 기울이는 것입니다. 

‘성경대로’라는 말은 ‘사랑으로’라는 조건과 합할 때 비로소 생명력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보다 사랑의 의미를 올바로 깨닫고 실천하기 위해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막연하고 모호한 감정적인 사랑이 아니라, 이기적인 탐욕으로 포장한 사랑이 아니라, 참 사랑을 말씀을 통해 발견해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그러했듯이 거짓을 몰아내고 어둠을 이겨내며 절망에 맞서는, 진리와 빛과 희망의 사랑을 성경을 읽으며 내 삶 깊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 사랑이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긍정하게 합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내 모든 좌절과 한계를 십자가 그늘 아래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탐욕을 위해 말씀을 이용하려는 바리새인의 길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경이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아름다움과 거룩함을 갖춘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진리를 믿음으로 분명히 고백하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경 안에 인간의 실수가 조금도 담겨있지 않거나 모든 내용이 과학이나 역사적으로 완벽한 것은 아닙니다.

여기에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놀랍고도 깊은 뜻 가운데 굳이 연약한 인간의 언어를 사용하시어 사람들에게 말을 걸어오셨습니다. 그렇다면 성경을 통해 진정 바라보아야 하는 것은 눈앞에 보이는 글자가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사랑이야말로 성경을 올바르게 해석하는 유일한 통로입니다. 오직 사랑만이 죽은 문자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어 하나님의 따스한 음성으로 변하게 합니다.


성경은 마치 창문과 같습니다. 창문은 분명 창문이어서 어쩔 수 없이 얼룩과 금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을 그러한 흠결을 보고 창문 자체를 무시하거나 외면 해 엉뚱한 곳을 바라보곤 합니다. 반면에 다른 어떤 사람들은 창문 유리 혹은 창틀에만 눈길을 멈추고 거기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창문이 있는 까닭은 결코 그 자체에 있지 않습니다. 그 너머 아름다운 풍경과 햇살을 전해주는 것이 창문의 존재 이유입니다. 이 사실을 바르게 아는 지혜로운 사람들은 창문의 흠집으로 그 전체 가치를 폄하하지 않습니다. 혹은 유리의 값어치에만 지나치게 몰두하지도 않습니다. 창문 너머의 아름다운 세상을 바라봅니다.

성경을 대하는 바른 태도도 이와 비슷합니다. 비록 상상 속 이야기이지만 4023년에 발견한, 이천년 전 먼 나라에 지어진 예배당의 발굴기록을 읽는 사람은 벽 한 쪽 구석에 있는 작은 낙서에 연연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짧은 문장을 두고, 독단적인 이해와 고집으로 제멋대로 해석해서는 더더욱 안 됩니다. 그 대신 건물 전체의 아름다움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배당이 오랜 시간 품어온 따스한 이야기와 존재 목적을 기억하며 그 의미를 천천히 곱씹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성경의 문자 혹은 부분적인 내용에 집착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당신의 놀라운 사랑과 하나님 나라를 온전히 바라보길 기대하십니다. 

이와 같은 주님의 마음을 가슴 깊이 품으며 날마다 성경을 가까이 하시길 바랍니다. 말씀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항상 새롭게 확인하시길 소망합니다. 그렇게 하나님과 이웃을 더욱 올바르게 섬기고 사랑하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말씀하시는 하나님.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언어를 사용하시어 성경을 기록하시고 우리 손에 전해주신 이유를 다시금 확인하였습니다. 말씀에 담긴 주님의 위대한 사랑을 바르게 깨닫고 경험하며 그 뜻 가운데 하나님과 이웃을 온전히 사랑하게 하옵소서.
성경을 왜곡하고 이용하려는 어리석은 탐욕을 멈추고, 진리 가운데 겸손히 주님께 나아가길 원합니다. 말씀을 날마다 가까이 하는 거룩한 습관을 지키며, 그 안에 담긴 놀랍고 풍성한 세계를 맛보고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