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4일 월요일

창세기 50장 15~21절 "선으로 바꾸사"

2025년 2월 24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50장 15~21절 "선으로 바꾸사"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기도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성도님들께 차츰 다가오는 봄날과 같은 따뜻한 은혜가 함께 하길 축복합니다.

야곱이 죽었습니다. 총리 부친의 죽음을 추모하는 장엄한 장례로 온 나라가 들썩였습니다. 하지만 유족의 분위기는 무척 서늘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애도는 사치입니다. 슬퍼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보다 훨씬 더 큰 공포가 그들을 압도했습니다. 바로 동생 요셉의 복수입니다. 그들은 수십 년 전 자기들이 저지른 행동이 얼마나 추악한 짓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날 형들은 아버지가 끔찍이 아끼는 동생, 요셉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아버지에게는 피 묻은 옷을 들고 가, 그가 짐승에 물려 죽었다고 속였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살인 미수와 청소년 인신매매와 기만죄입니다. 그 결과 아버지와 동생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시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막강한 권력자로 등장 해 형들에게 자기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큰 충격에 빠져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요셉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창 45:4). 짧은 문장 안에 그동안 겪었던 험난한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5장 5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복수심을 접었습니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이 장면이 형들의 기억에 선명히 남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감정과 기대는 쉽게 깨지기 마련입니다. 형들이 보기에 요셉의 호의는 어쩌면 아버지 야곱을 위한 한시적인 배려와 위선일지도 모릅니다. 설령 진심이라 하더라도, 아버지가 안 계신다면 싸늘한 분노로 금세 바뀔 수 있습니다. 

마침내 야곱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러 복잡한 생각이 그들 마음을 헤집으며 소용돌이 쳤습니다. 본문 15절 말씀과 같이, 당대 최강 제국의 절대 권력자인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는다면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요셉을 찾아가 간곡히 비는 겁니다. 16~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의 화려한 총리 관저 안이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습니다. 형들이 요셉 앞에 고개를 숙인 채 바들바들 떨며 야곱의 유언을 언급합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그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명분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요셉에게 형들을 용서하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제발 지난날 자기들이 행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사실, 믿기 어렵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할 중요한 말을 직접 하지 않고, 굳이 오랫동안 불신했던 다른 아들들에게 했을 리 없습니다. 

요셉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립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형들에게 속 마음을 거듭 털어 놓습니다. 20~21절 말씀을 화면 보면서 새한글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20 형님들이 뜻하신 것은 저를 두고 나쁜 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뜻하신 것은 그것을 좋은 일로 바꾸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보시다시피 많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해 주셨습니다. 21 이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형님들을 계속 잘 모시고 형님들의 어린아이들도 잘 돌보아 드리겠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위로하며 형들의 마음에 와닿도록 말했다.

앞서 읽어드린 45장 5절을 반복하는 내용입니다. 그 날, 오랜 세월이 지나 형들을 다시 만나 요셉이 했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그들을 용서하였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혀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광기에 휩싸여 원한을 갚으려 않았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성숙한 태도입니다. 너무나 놀랍고 기적적인 장면입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을 겁니다. 때때로 바람처럼 화가 마음에 불어왔을 겁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여러분이 요셉이라고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형들에게 사로잡혀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상인들에게 끌려 낯선 땅에 도착했을 때,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때, 자기의 꿈 해몽으로 풀려난 왕실 관리가 은혜를 저버리고 방치 했을 때, 그의 마음에 몰아닥쳤을 분노를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한 사람이 도무지 감당하기 벅찬 고통의 절정입니다. 복수하고 싶은 여러 얼굴이 끊임없이 아른거렸을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절망을 겪은 누구나 그렇듯 미움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 겁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수없이 자책했을 겁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기세등등 해 오만하게 굴었던 어린 시절을 두고 부끄러움에 사무쳤고, 보디발의 집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눈치껏 행동하지 못했던 완고함을 후회하며, 파라오의 술을 담당하는 신하에게 단단히 확답을 받지 못한 미련함을 괴로워하며 거듭 곱씹었을 겁니다.

하지만 요셉은 마침내 비극을 딛고 일어났습니다. 지난 날 겪었던 참혹한 폭력을 극복했습니다.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하늘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비추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미래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회복과 반전의 길이 열립니다.

총리가 되기 전 요셉의 일생은 패배와 좌절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철부지로 자란 청년이 미숙한 판단으로 여러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순진하게 이용당하며 짓 밟혔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자기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겪은 고난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지나온 아픔을 새롭게 돌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미래가 인간의 과거를 변화시켰습니다.

요셉의 꿈풀이는 주술이나 점술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꿈을 꾸고 해석하며 주님으로부터 다가오는 미래를 느꼈습니다. 그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숨결로 호흡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악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십니다. 그 어떤 어둠도 하나님은 빛으로 바꾸십니다. 그 어떤 절망도 하나님은 희망으로 바꾸십니다. 이러한 진리가 그로 하여금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버티고 살아남게 하였습니다. 찬란한 용서와 사랑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형들과 조카들을 끝까지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며 위로합니다.

20세기에 여러 처참한 전쟁 범죄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이른바 ‘홀로코스트’라고 부르는, 나찌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 그리고 거대한 폭력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처절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러운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토록 거대한 비극을 통과한 사람들이 어떻게 아픔을 이겨내었을까요? 그 끔찍한 상처를 딛고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영국 최고 랍비를 역임한 조너선 색스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구약 성경 연구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 받고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그는 유대인 대량 학살의 생존자들이 어떻게 삶에 대한 애착을 지킬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오랜 탐구 끝에 마침내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가 책에 쓴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그들 대부분은 과거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혼인한 배우자들에게도, 또한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창조했다. 그들은 그곳의 언어와 관습을 새로 배웠다. 직업을 찾았고, 경력을 쌓았다. 혼인해서 아이들을 낳았다. 자기 가족을 잃은 생존자들은 서로에게 확대된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았지, 뒤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우선 그들은 미래를 건설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때로 40년이나 50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그 다음에는 세상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리는 먼저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과거를 슬퍼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미래로부터의 부르심으로 들어오신다. 마치 그 분이 시간의 먼 지평선으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여정을 떠나도록, 그리고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그것을 위해 창조된 과업을 실행하도록 우리를 손짓해서 부르시는 것을 듣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것이 바로 소명의 참 뜻이다. 소명은 문자적으로 ‘부르심, 사명이며, 우리를 호출하는 과업이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여기에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며,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업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과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흔히 많은 시간이 걸리며 잘못된 출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 각자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행하도록 부르시는 무엇인가가 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그 미래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완성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중략) 먼저 미래를 건설하라. 그 다음에 과거를 슬퍼할 수 있다.”

유대인 인종학살과 같은 참극은 아니더라도, 야곱과 같은 비극은 아니더라도, 땅을 밟고 살아가는 누구나 아픔을 품고 있습니다.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후회와 원망으로 가득합니다. 내가 겪은 끔찍한 폭력을 떠올립니다. 동시에 좀 더 강하고 현명하지 못했던 자신을 꾸짖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실패하고 끝난 삶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더욱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 안에 담긴 놀라운 신비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곳에 나를 세우신 뜻을 살피며 부르심에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시간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미래 속에서, 과거의 그 어떤 절망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눈물도 계속 흐르지 않습니다. 그 모두는 아름다운 변화의 재료가 됩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인생의 거대한 폭풍에 휩쓸릴 때,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깊고 깊은 아픔 속에 괴로울 때, 지나간 날에 대한 후회로 힘겨울 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행하신 놀라운 은혜를 마음에 품으시길 바랍니다. 몸소 사람이 되어 온갖 상처를 입으며 이 땅을 딛고 살아가신 예수님께서 열어 보이실 미래를 기대하며 다시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세상은, 사람은 우리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생명과 구원과 희망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온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요셉이 험난한 인생을 거치며 피운 용서의 꽃을 바라봅니다. 그가 고단한 시련을 통과하며 맺은 사랑의 열매를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저희 삶에도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열어가실 미래로 과거의 아픔을 넘어서며,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은혜로 현재의 고난 가운데 주시는 소명을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2월 22일 토요일

이사야 43장 14~21절 “새로운 새로움”

2025년 2월 21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이사야 43장 14~21절 “새로운 새로움”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시린 새벽을 깨우고 당신 품으로 나아온 자녀의 발길을 주님께서 기뻐 맞아 주실 줄 믿습니다. 본문 18~19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일을 기억하지도, 옛날 일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전 일”과 “옛날 일”에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대입하시겠습니까? 많은 분이 너무나 비참했던 과거의 장면을 떠올리실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소년 시절 이 말씀은 언제나 제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습니다. 이 구절을 가사로 한 찬양을 즐겨 불렀습니다. 그 시절, 무척 초라했던 저에게 주님께서 언젠가 행하실 화려한 새 일을 몹시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십니까? 우리는 때때로 거짓에 은혜 받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본래의 의도와 맥락을 무시하고 읽을 때, 성경을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실수를 종종 범하곤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언자가 포로 생활 중인 이스라엘을 향해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고 외친 “이전 일”과 “옛날 일”은 흔히 오해하듯이 어두운 지난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화려한 승리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16~17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이 두 구절이 묘사하는 찬란했던 과거가 무엇인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다름 아닌 출애굽 사건의 절정인, 홍해 바다가 갈라진 이적입니다. 앞에는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최정예부대가 쫓아오는 긴박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셨습니다. 

그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살아났고, 파라오의 군대는 홍해에 잠겨 전멸하였습니다. 이 극적인 장면은 ‘구원자’ 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출애굽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한 동시에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홍해 위에서 주님께서 구원자이심은 물론이고 ‘창조주’이심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참고해야 할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1장 1, 2절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천지창조에 대한 분명한 선언과 더불어 그 창조사건 이전의 상황을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 속의 수면, 즉 물 위에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시는 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구약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서아시아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결코 단순한 상황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묘사하는 “물”은 동네 개울이나 옹달샘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를 가리킵니다. 그 자체로 “절망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즉, 땅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더욱 심화시키는 장소가 바로 이 ‘거대한 물’, 곧 바다 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수면 위를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께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말 ‘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이란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깊고 어두운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쪽에서부터 서서히, 그리고 강렬히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바람의 실체는 곧 성령님입니다. 흑암의 바다가 가진 힘은 성령님이 일으키신 바람으로 말미암아 차츰 균열과 위기에 빠져듭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 2절에서 묘사하는 천지창조 직전의 상황입니다. 

놀랍게도 이 장면은 홍해 바다가 갈라진 이적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에서 힘겹게 포로 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으로부터 전해진 천지창조와 출애굽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깨달음에 이르렀을까요? 이 두 사건의 연속성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진정 드러내 보이시려는 깊은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곧 우리를 살리신 분이시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라는 가슴 떨리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님의 ‘창조’와 ‘구원’ 사이의 긴밀하고 역동적인 상관관계입니다. 따라서 본문 15절에서 당신을 가리켜 “창조주”라고 일컬으신 하나님께서, 홍해 사건을 언급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의 창조와 구원이 분명, 한 뿌리로부터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왜 하나님께서는 아프고 우울한 기억이 아닌 감격적인 “출애굽 사건”을 잊으라 하셨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왜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또 다른 희망의 약속인지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주셨던 놀라운 은혜들을 잊으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난 날 홍해 바다 위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곧, 모든 혼돈과 공포를 제압하는 창조와 함께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사람에게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은혜로운 경험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새로움으로 사람들을 향해 달려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와 같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창조적인 상상력의 일부가 소개돼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절 후반 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구약성경 특유의 반복, 강조 법으로 20절에 계속하여 등장합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렇게 19절에 이어 20절이 계속 증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바벨론 포로 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사막 길에 강물이 흘러넘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강물로 말미암아 포로 귀환 행렬에 참여한 무리가 목마름을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는 사막 생태계를 구성하는 승냥이와 타조 역시도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높인다는 파격적인 묘사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언자의 외침이 이루어 진다면, 그 언젠가 사막의 모든 생명체가 풍요로운 강물로 말미암아 소생과 회복을 경험한다면, 그 광야가 이전과 같겠습니까? 여전히 사람들 눈에 황무지로 보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닙니다. 광야는 더 이상 광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과 전혀 다른, 회복의 땅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새로운 구원은, 단지 그들이 겪는 고통의 일부를 고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상상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늘 행복한 추억들로 가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권면합니다. 더 이상 지난날에 얽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더욱이 옛 신앙 경험으로 오늘 우리 가운데 새롭게 이루실, 주님의 구원을 제한하지 말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이집트 탈출과 바벨론 포로 귀환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하는 새로운 희망으로 이끌어 주실 줄 분명히 믿습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 때, 말 그대로 얼떨결에 과대표를 맡았습니다. 4학년 과대는 졸업 여행과 졸업 앨범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됩니다. 하지만 주변 선후배들의 도움 덕분에 무난히 한 해를 보냈습니다. 저로서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나름의 값진 인생 성취였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 후 한 참 동안 그 성공의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한동안 저에게 이런 말버릇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뜬금없이 불쑥, “사실, 제가 4학년 때 ‘과대’를 했었는데요. ......, 제가 예전에 ‘과대’ 했었을 때......, 제가 ‘과대’ 했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이렇게 알게 모르게 ‘과대’였던 과거를 계속 언급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불필요한 자기 자랑을 비장하게 늘어 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내면이 몹시 비루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과거의 ‘은혜로운 추억들’까지도 과감히 떨쳐버리시길 바랍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그 모든 ‘옛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검은 바다 위를 가르신 주님의 창조가 여전히 살아 숨 쉬어, 모든 삶의 여정을 날마다 새롭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를 더욱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앞에 주님께서 열어 가시는 새로운 길과 강물로 말미암아, 참 생명의 질서가 회복되는 이적을 함께 바라보며 거기에 기꺼이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흑암을 뚫고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홍해를 가르고 백성을 이끄신 구원의 주님께 남은 일생을 내어 드려는 우리 모두 되길 바랍니다. 지음 받은 목적대로 온 삶을 통해 진정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열린 길을 지나 우리에게 새로운 새로움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 
주님께서 행하실 새로운 은혜를 기대합니다. 그 소망 가운데 지난날의 아픔뿐만 아니라 영광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하옵소서. 인간의 경험이 하나님의 얼굴 전체를 그려낼 수 없음을 명심하며 주님의 새로운 새로움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새롭게 열어주실 길을 기쁨으로 걸으며, 날마다 찬송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2025년 2월 19일 수요일

일산 동네서점 "라비브북스"

 

대학 동기가 일산에 "라비브북스"라는, 동네 서점을 열었다는 소식을 몇 년 전에 들었다.

시간이 흘러 일산 사람이 되어, 문득 예전 그 소식이 떠올랐다. 미루다 오늘에야 방문했다.

듣던 대로 무척 아늑한 공간이다. 구석구석 세심한 고민과 배려를 느꼈다. 좋은 책과 아름다운 음악과 향긋한 커피가 조화를 이룬다.

내가 사는 도시에 이런 안온한 공간이 있다는 건 참 반가운 일이다. 출판 시장이 점점 위축되는 시대에 라비브북스가 생명력 있게 잘 살아남길 응원한다.

장소정보 https://naver.me/IFg4oVwH

2025년 2월 18일 화요일

책 추천, "목회자의 자녀로 산다는 것"(좋은씨앗, 2018)





오늘 뜻밖의 반가운 책 선물을 받았습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의 아들이 PK, 즉 '목회자 자녀'를 주제로 지은 책입니다.

문득 지금까지 미처 신중히 고민하지 못했던 걸 확인하였습니다.
제 아들은 PK라는, 제가 겪지 못했던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간다는 사실입니다.

아직 8살 어린 나이지만 저와 똑 닮은 외모 탓에, 길 가던 권사님도 한눈에 알아보고, "어머, 네가 정 목사님 아들이구나"라는 얘길 들으며 조금씩 부담을 받는 걸 옆에서 느낍니다.
아버지이자 목사로서, 이에 대해 충분히 이해해야 할 필요를 깨달았습니다.

이 책은 그런 저에게 충분한 안내와 도움을 제공할 것을 기대합니다.
동시에 PK로 태어나 자란 이들에게는 공감을 나눌 따뜻한 이야기를 품고 있습니다.
관심 있는 이들에게 적극 추천합니다.

"목회자가 깨달아야 할 것은, 자신의 첫 번째 부르심은 교회가 아니라 자기 가족이라는 점이다. 물론 교회도 부르심이다. 그리고 이 둘의 균형을 맞추는 건 엄청나게 어려운 일이다.

다른 많은 직종에서 그런 것처럼 목회자의 일도 때로는 무시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집중을 요구한다. 그러나 누구든 결혼해서 부모가 되면 가족이 1순위가 되어야 한다.

가족은 옆으로 밀어 놓고 목회를 '주된' 혹은 '진짜' 부르심으로 대한다면 그것은 잘못이다. 목회자는 가정과 목회 모두와 적절히 관계를 맺으며 이중의 부르심을 이행해야 한다."

- 바너버스 파이퍼 <목회자의 자녀로 산다는 것> 150쪽

구매 링크 http://aladin.kr/p/2LmaV

2025년 2월 17일 월요일

영화 "브루탈리스트" 그리고 "동주"


무려 3시간 30분을 넘는 긴 영화다.
이례적으로 '인터미션'까지 있다.
이 때문에 망설이며 극장을 찾았다.
그리고 납득했다.
어떤 이야기는 상당한 물리적 양이 필요하다.
그제야 안겨주는 깊은 울림이 있다.
3시간 넘는 대작 영화가 존재하는 이유다.
이 영화가 장차 고전이 될 영화로 극찬받는 이유다.

주인공 라즐로 토스는 일생에 거쳐 겹겹의 고난을 통과한다.
시대와 개인에게 유무형의 가혹한 폭력을 당한다.
처참하게 짓밟히고 무너진다.
심지어 스스로 자신을 학대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꿋꿋하게 자기 건축 철학을 지킨다
숭고한 예술세계를 구현해 나간다.
시련과 직면하여 승화시킨 결과다.

오늘(2월 16일)은 시인 윤동주의 기일이다.
집에 들어와 영화 "동주"(2016)의 마지막 20분 분량을 봤다.
어김없이 눈물이 흘렀다.
시인은 황포한 시대에 짓눌리며 부끄러움에 괴로워했다.
그 고통을 이겨내며 그는 아름다운 시를 마침내 세상에 남겼다.
"브루탈리스트"의 주인공과 이어지는 대목이다.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을 감히 라즐로 토스나 윤동주에 비할 수 없다.
실은 정반대다.
풍요로운 시대에 태어나 살아가며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그럼에도 삶은 고통이다.
누구나 그렇듯 내면 여기저기에 흉터가 있다.
두 영화와 두 인물을 통해 나를 스쳐 간 아픔을 새롭게 마주 보았다.
그리고 진리를 거듭 확인했다.
그 어떤 폭력도 나를 영원히 무너뜨릴 수 없다.
새로운 예술의, 새롭게 살아갈 희망의 토대와 근거가 된다.

이러한 통찰을 영화 "브루탈리스트"로 안겨준 젊은 거장 "브래디 코베"의 차기 작품들에 기대를 표한다.
이 시대의 라즐로 토스와 윤동주에게, 그리고 저마다의 혹독한 계절을 통과하는 이들을 위로한다.
암울할 시대를 이겨낸 젊은 시인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며, 어둠을 내몰고 아침을 기다리길 다짐한다.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