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2월 21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이사야 43장 14~21절 “새로운 새로움”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시린 새벽을 깨우고 당신 품으로 나아온 자녀의 발길을 주님께서 기뻐 맞아 주실 줄 믿습니다. 본문 18~19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일을 기억하지도, 옛날 일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전 일”과 “옛날 일”에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대입하시겠습니까? 많은 분이 너무나 비참했던 과거의 장면을 떠올리실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소년 시절 이 말씀은 언제나 제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습니다. 이 구절을 가사로 한 찬양을 즐겨 불렀습니다. 그 시절, 무척 초라했던 저에게 주님께서 언젠가 행하실 화려한 새 일을 몹시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십니까? 우리는 때때로 거짓에 은혜 받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본래의 의도와 맥락을 무시하고 읽을 때, 성경을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실수를 종종 범하곤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언자가 포로 생활 중인 이스라엘을 향해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고 외친 “이전 일”과 “옛날 일”은 흔히 오해하듯이 어두운 지난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화려한 승리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16~17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이 두 구절이 묘사하는 찬란했던 과거가 무엇인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다름 아닌 출애굽 사건의 절정인, 홍해 바다가 갈라진 이적입니다. 앞에는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최정예부대가 쫓아오는 긴박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셨습니다.
그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살아났고, 파라오의 군대는 홍해에 잠겨 전멸하였습니다. 이 극적인 장면은 ‘구원자’ 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출애굽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한 동시에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홍해 위에서 주님께서 구원자이심은 물론이고 ‘창조주’이심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참고해야 할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1장 1, 2절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천지창조에 대한 분명한 선언과 더불어 그 창조사건 이전의 상황을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 속의 수면, 즉 물 위에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시는 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구약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서아시아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결코 단순한 상황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묘사하는 “물”은 동네 개울이나 옹달샘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를 가리킵니다. 그 자체로 “절망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즉, 땅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더욱 심화시키는 장소가 바로 이 ‘거대한 물’, 곧 바다 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수면 위를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께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말 ‘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이란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깊고 어두운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쪽에서부터 서서히, 그리고 강렬히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바람의 실체는 곧 성령님입니다. 흑암의 바다가 가진 힘은 성령님이 일으키신 바람으로 말미암아 차츰 균열과 위기에 빠져듭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 2절에서 묘사하는 천지창조 직전의 상황입니다.
놀랍게도 이 장면은 홍해 바다가 갈라진 이적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에서 힘겹게 포로 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으로부터 전해진 천지창조와 출애굽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깨달음에 이르렀을까요? 이 두 사건의 연속성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진정 드러내 보이시려는 깊은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곧 우리를 살리신 분이시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라는 가슴 떨리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님의 ‘창조’와 ‘구원’ 사이의 긴밀하고 역동적인 상관관계입니다. 따라서 본문 15절에서 당신을 가리켜 “창조주”라고 일컬으신 하나님께서, 홍해 사건을 언급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의 창조와 구원이 분명, 한 뿌리로부터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왜 하나님께서는 아프고 우울한 기억이 아닌 감격적인 “출애굽 사건”을 잊으라 하셨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왜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또 다른 희망의 약속인지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주셨던 놀라운 은혜들을 잊으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난 날 홍해 바다 위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곧, 모든 혼돈과 공포를 제압하는 창조와 함께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사람에게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은혜로운 경험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새로움으로 사람들을 향해 달려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와 같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창조적인 상상력의 일부가 소개돼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절 후반 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구약성경 특유의 반복, 강조 법으로 20절에 계속하여 등장합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렇게 19절에 이어 20절이 계속 증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바벨론 포로 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사막 길에 강물이 흘러넘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강물로 말미암아 포로 귀환 행렬에 참여한 무리가 목마름을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는 사막 생태계를 구성하는 승냥이와 타조 역시도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높인다는 파격적인 묘사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언자의 외침이 이루어 진다면, 그 언젠가 사막의 모든 생명체가 풍요로운 강물로 말미암아 소생과 회복을 경험한다면, 그 광야가 이전과 같겠습니까? 여전히 사람들 눈에 황무지로 보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닙니다. 광야는 더 이상 광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과 전혀 다른, 회복의 땅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새로운 구원은, 단지 그들이 겪는 고통의 일부를 고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상상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늘 행복한 추억들로 가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권면합니다. 더 이상 지난날에 얽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더욱이 옛 신앙 경험으로 오늘 우리 가운데 새롭게 이루실, 주님의 구원을 제한하지 말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이집트 탈출과 바벨론 포로 귀환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하는 새로운 희망으로 이끌어 주실 줄 분명히 믿습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 때, 말 그대로 얼떨결에 과대표를 맡았습니다. 4학년 과대는 졸업 여행과 졸업 앨범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됩니다. 하지만 주변 선후배들의 도움 덕분에 무난히 한 해를 보냈습니다. 저로서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나름의 값진 인생 성취였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 후 한 참 동안 그 성공의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한동안 저에게 이런 말버릇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뜬금없이 불쑥, “사실, 제가 4학년 때 ‘과대’를 했었는데요. ......, 제가 예전에 ‘과대’ 했었을 때......, 제가 ‘과대’ 했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이렇게 알게 모르게 ‘과대’였던 과거를 계속 언급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불필요한 자기 자랑을 비장하게 늘어 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내면이 몹시 비루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과거의 ‘은혜로운 추억들’까지도 과감히 떨쳐버리시길 바랍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그 모든 ‘옛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검은 바다 위를 가르신 주님의 창조가 여전히 살아 숨 쉬어, 모든 삶의 여정을 날마다 새롭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를 더욱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앞에 주님께서 열어 가시는 새로운 길과 강물로 말미암아, 참 생명의 질서가 회복되는 이적을 함께 바라보며 거기에 기꺼이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흑암을 뚫고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홍해를 가르고 백성을 이끄신 구원의 주님께 남은 일생을 내어 드려는 우리 모두 되길 바랍니다. 지음 받은 목적대로 온 삶을 통해 진정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열린 길을 지나 우리에게 새로운 새로움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
주님께서 행하실 새로운 은혜를 기대합니다. 그 소망 가운데 지난날의 아픔뿐만 아니라 영광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하옵소서. 인간의 경험이 하나님의 얼굴 전체를 그려낼 수 없음을 명심하며 주님의 새로운 새로움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새롭게 열어주실 길을 기쁨으로 걸으며, 날마다 찬송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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