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새벽 추위를 뚫고 생명의 양식을 구하려 나아온 성도님들을 진심으로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여러분 혹시 배 고프십니까? 위 속이 허전하신가요? 아니면 다른 무언가가 고프신가요? 군복무 시절, 제가 선임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은 놀림이 있었습니다. “식탐”食貪이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먹을 것에 욕심을 낸다는 지적이었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들었을 때마다 무척 불쾌해 했습니다. 아무리 군대라도 그렇지 없는 말로 사람 괴롭힌다고 여겼습니다.
하지만 전역을 하고 시간이 흘러 그 때를 곱씹어 보면 볼수록 문득 이렇게 깨달았습니다. ‘아, 내가 식탐이 있긴 했구나.’ 동시에 그 때 내가 왜 그랬을까를 궁금해 하며 의아함에 빠졌습니다.
그러다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그 오랜 물음의 답을 찾았습니다. 어느날 라디오방송에서 음식량을 통제하지 못하고 무절제하게 먹는, 이른바 “폭식증”에 대한 다음과 같은 전문가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뇌 속에 만족을 느낄 수 있는 호르몬이 세르토닌 등이 있는데, 이런 호르몬들이 주로 잘 분비되고 포만감을 느끼는 부위랑 사랑의 만족을 느끼는 부위가 인접해 있다는 게 사실 비극입니다. 그래서 내가 사랑에 고픈 건데, 그것을 배가 고픈 걸로 착각할 가능성이 많습니다.”
이 설명이 이해되십니까? 사람들이 배고픔을 잘 못 참고 지나치게 먹을 것으로 스트레스를 풀려는 것은 단순히 소화기관으로서 배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랑과 인정에 대한 목마름 때문입니다.
돌이켜 보면 제 인생 중 유일하게 “식탐”을 가졌던 군 복무기간 동안, 다들 비슷하겠지만 이러저러한 이유로 스트레스를 참 많이 받았습니다. 그렇지만 군대 안에서 딱히 스트레스를 풀만한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대신 PX가 생활관과 가깝고 규모도 제법 컸기 때문에 자주 갔습니다. 그러면서 더더욱 먹을 것에 집착했었습니다. 하지만 전역한 후 서서히 자존감을 회복하면서 식탐이 눈 녹듯이 사라졌습니다. 그 결과 저는 배고픔과 애정결핍의 상관관계를 쉽게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다시 묻겠습니다. 혹시 배 고프십니까? 그렇다면 그러한 여러분의 배고픔은 적절한 영양소를 보충하기 위한 몸의 자연스러운 생리현상 인가요? 아니면 제가 그러했듯,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의 굶주림인가요?
이와 관련하여 우리가 주목해야 할 성경 속 사건이 있습니다. 바로 “오병이어”입니다. 한 소년이 아낌없이 내어 놓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 어른만 오천 명이 먹고도 남은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런데 오병이어 사건 역시도 단순히 하나님께서 신비한 방법으로 많은 먹을 것들을 주신 신기한 일이라고만 이해하면 곤란합니다. 우리는 오병이어 이적을 경험한 사람들이 계속해서 음식을 기대하며 찾아왔을 때, 그런 그들의 마음을 꿰뚫어 보시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요한복음 6장 35절 말씀 읽어드리겠습니다.
3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손으로 사람들에게 건네는 어떤 먹을거리가 아니라 그분 존재 자체가 “생명의 떡”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는 사람들은 절대로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예배하며 하나님을 가까이 한다고해서 굶주림이 즉각 해결 되지 않습니다. 여전히 우리는 하루 세 번 공복감을 느끼고 밥을 먹어야 합니다. 심지어 가난 때문에 제 때, 제대로 먹지 못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생명의 떡”에서 떡을 수식하는 “생명”의 의미를 좀 더 자세히 곱씹어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약 성경을 기록한 그리스어에는 “생명”을 뜻하는 여러 낱말이 있습니다. 특별히 그 중에서 요한복음에서 자주 등장하며 강조하는 그리스어 단어가 바로 <조에>입니다. 쉽게 풀이하면 “하나님만의, 하나님 고유의 진정한 생명”입니다. 코끝으로 오가는 숨결에 달린 육체의 생명과는 대조되는 의미입니다. 이러한 <조에>, 참 생명이 결정적으로 드러난 사건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 자기 자신을 가리켜 “참 생명의 떡”, 즉 <조에>의 떡이라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은 단순히 백성의 생물학적 배고픔만을 해결하는 분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몸을 가진 인간의 연약한 실존과 현실 속 필요를 무시하지 않으십니다. 사람들이 배고픔으로 겪는 고통과 그것을 채우는 것의 의미를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동시에 치명적인 굶주림에서 구하는, 사람을 진실로 사람답게 하는 생명을 말씀 하십니다. 도무지 채울 길을 찾지 못해 비슷한 호르몬을 뇌에서 뿜어내게 하려고 필요 이상 꾸역꾸역 배를 불리면서까지 갈구하는 사랑을 보여 주셨습니다.
성경이 가르쳐주는 구원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보이신 사랑으로 우리의 몸과 마음의 모든 배고픔이 넉넉하게 해결되는 은혜입니다. 그 근거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선한 사랑에 있음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여러 모양의 배고픔으로 고통 받을 때, 그것을 우리가 원하는 시간에, 원하는 방식으로 해결하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모든 아픔을 먼저 아시고 참으로 먹이시며 돌보시는 주님의 위대한 손길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저마다의 굶주림에 관한 관심을 넘어, 온 세계를 넉넉히 배 불리시는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다함께 51절 말씀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1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
우리는 이 말씀에서 사람들을 참된 생명으로 살리시는 예수님의 방법은 바로 십자가임을 다시금 분명히 확인합니다. 마침 어제, 주일예배 시간 우리는 함께 성찬에 참여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을 가리켜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입니다. 그 떡이 십자가 위에서 찢겨 피 흘려 돌아가셨습니다. 그 보혈의 은혜로 죄인을 구원하셨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렇게 주님께서 죽임 당하시면서까지 이루시는 구원의 범위를 확인해야 합니다. 바로 “세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특정한 개인이나 민족, 더 나아가 사람만이 아닌 온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이십니다. 주님께서는 그 모든 세계를 다스리시고 사랑하시며 또 구원하시어 살리시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우리는 나 개인만의 혹은 교회만의 생명과 구원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됩니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 어린 다스림의 대상을 쉽게 단정하거나 제한해서도 안 됩니다.
온 세상 모든 사람과 창조 세계를 구별 없이 사랑하시고, 그들을 살리시는 하나님의 한없이 드넓은 마음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의 생명과 돌봄이 필요한 모든 사람, 심지어 우리가 멀리하고 배척하는 사람들까지도 기꺼이 껴안을 수 있는 용기를 지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가 이 땅에 가득히 흘러 넘칠 수 있도록 생명을 향한 여정을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모든 걸음을 기쁘게 받으시어 주님의 나라를 아름답게 이루어 가실 줄 믿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혹시 지금 배 고프십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배고픔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인간은 배를 불리면서 배만이 아닌 영혼 깊은, 존재의 굶주림마저 채우려 몸부림치는 연약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의 모든 처절한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구하시려 이 땅에 오셨습니다. 우리와 똑같이 허기와 갈증으로 고통받는 사람이 되셨습니다. 십자가에 달려 온 세상을 살리는 참 생명의 떡으로 당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으시고 친히 우리를 당신께로 이끌어 주십니다.
그 주님 안에서 진정한 배부름과 넉넉함을 발견하시고 누리시길 바랍니다. 또한 여러 굶주림으로 고통당하는 온 세계를 먹이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생명의 양식을 전하고 나누는 하나님의 사랑스런 아들, 딸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자녀의 배고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는 사랑의 주 하나님
살아가며 때때로 여러 모양의 굶주림을 겪습니다. 먹을 게 부족해서, 숱한 좌절과 실패를 겪어서, 자존감이 떨어져서 영혼 깊은 허기를 느끼곤 합니다.
하지만 저희 공허한 몸과 마음을 참으로 넉넉하게 채우시고, 죽음에서 살리시려 당신 자신을 내어 주신 위대하고 풍성한 사랑을 찬양합니다. 따스한 품 안으로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에 날마다 겸손히 귀 기울이게 하시고, 주님의 높고 깊은 부활 생명을 날마다 기쁨으로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본격적인 설교 준비는 본문 선택에서 시작합니다. 설교자들 대부분 여기서부터 고민합니다. 때문에 설교학 수업이나 설교학 교과서 모두 다양한 설교 본문 선택 방법을 제시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 정과, 성경을 순서대로 강해, 주제에 따른 시리즈 등 다양한 방식이 존재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각각 성향과 교회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특히나 교육전도사 사역 중인 신대원생들을 비롯해 설교자로서 첫걸음을 뗀 이들에게 권합니다. ‘주어진 설교 본문’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취향과 자기 세계가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더 관심을 두는 영역이 있고, 더욱 마음이 가는 본문이 있습니다. 이 자체는 자연스럽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자기 색깔을 강화해 나만의 설교 체계를 만드는 것도 어떤 면에서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지역 교회 설교자는 ‘보편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설교단 위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마주합니다. 설교의 지평을 넓히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걸 위해 설교 본문을 자기 입맛대로 고르기보다는 체계적이고 균형 있고 폭넓게 구성된 틀을 따르는 걸 권하고 싶습니다.
대표적인 도구가 바로 ‘성서 정과’(lectionary)입니다. 교회력에 따라 3년 주기로 돌아가는 성경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서 ‘예수님의 승천 후 성령강림’ 기념하는 성령강림절과 이후 비절기기간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복음을 일관된 흐름을 따라 더듬어 갈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실천신학연구소에서 매년 발간하는 “예배와 강단”이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홈페이지도 강력히 추천합니다(링크: https://lectionary.library.vanderbilt.edu/).
저는 교육전도사 시절 대구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님을 통해 성서정과를 접했습니다. 이후 교육부 설교 본문을 성서정과를 따라 했습니다. 거의 매주 낯설고 어려운 본문과 마주했습니다. 이를 묵상하고 해석해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게 무척 힘겨운 숙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하고 분투한 시간을 통해 많은 성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작성한 원고들은 시간이 흘러 전임전도사와 부목사 시절 설교 원고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설교 본문을 자기 취향이 아닌 ‘주어진 본문’으로 하길 거듭 권합니다. 물론 때에 따라, 목회 현장에 맞게 설교자의 강점을 드러내는 본문을 설교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계속 설교하게 되면 결국 한계에 빠집니다. 설교자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도 더 넓은 시야로 설교할 수 있는 본문 선택 체계를 고민하시길 바랍니다. 꼭 성서정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성경별로 전체를 읽는 강해 설교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 밖의 여러 공교회적인 설교 본문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설교가 설교자 개인에 갇히지 않도록 보편적인 세계와 맞닿는 노력입니다. ‘낯선 하나님’과 마주하는 노력이 신학의 성장을 가져오듯이, ‘낯선 본문’과 씨름하는 몸부림이 설교의 성숙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분투하며 생긴 근육들이 설교자로서 진정한 내공을 쌓고 자존감을 높이게 합니다. 물론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애씀과 수고가 아름다운 말씀의 결실로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그런 당신을 응원합니다.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질문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하여 숨었을 때,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또한 그의 아들 가인에게는 다음과 같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처럼 인간에게 질문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질문’이란 1차적으로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아는 이에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연약한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의 또 다른 기능을 알게 됩니다. 바로 ‘확인’입니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종종 ‘나 사랑해?’라는 질문이 오고 갑니다. 분명 사랑해서 만나고 결혼했는데 자기에 대한 감정을 왜 계속 물어보는 것일까요? 나를 향한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동서양의 위대한 스승들이 문답을 통해, 제자들이 무지함을 깨닫고 지혜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하시는 이유는 답을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확인시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 속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에 귀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야곱은 인생의 벼랑 끝에 홀로 서 있습니다. 지난 날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쳐 머물렀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청춘을 다 바쳐 마침내 많은 가족과 가축 떼를 이루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수성가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그 모두는 단순한 피붙이와 재산이 아닙니다. 치열한 삶의 전투 끝에 얻은 소중한 전리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잃을 위기에 빠졌습니다. 야곱은 지금 형 에서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야곱은 자신의 복을 가로채어 굴욕적인 패배감을 안겨준 동생입니다. 따라서 그는 강렬한 증오심에 불타올랐습니다. 심지어는 복수를 이루기 위해, 아버지 이삭이 빨리 세상을 떠나길 고대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야곱이 형에게로 향하는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까요? 깊은 염려와 불안 속에 애타게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 때문에 본문 바로 앞에는 금세 닥쳐올 재난을 철저히 대비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가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에서가 400명이나 되는 패거리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 앞에서는 그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얍복 나루에 홀로 남아 몸부림치며 절규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 그와 씨름하였습니다. 24절에 기록된 그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 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합니다. 여러 맥락을 종합해 보면 그분 자체를 하나님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권위와 권한을 위임받은 대행자, 곧 ‘천사’로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까닭에 호세아 12장 4절에도 그를 가리켜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내용 흐름을 따라 편의상 ‘하나님’으로 부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붙잡으며 간구하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 부러뜨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자신을 놓지 않고 있는 야곱에게 주님께서는 불쑥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당혹스럽지 않으십니까? 한 인간이 처한 극한 절망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난데없이 야곱의 이름을 물어보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정말 몰라서 그러셨을까요? 분명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이름, ‘야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말은 그의 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형과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부모는 ‘발꿈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케브>에서 유래하여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을 가진 <야아코브>, 우리말 음역으로는 ‘야곱’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말은 관용적으로 ‘남을 걸어 넘어뜨리는 자, 혹은 속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이와 같은 야곱의 뜻을 ‘어떻게든 이기려 몸부림치는 사람’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그의 삶은 자기 이름처럼 성공을 향한 치열한 욕망과 좌절로 어지럽게 뒤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서라면 형은 물론이고 시각 장애가 있는 연로한 아버지를 속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외삼촌과 사촌들의 눈치를 살피며 지내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자기 못지않게 탐욕으로 가득한 라반의 교활한 속임수에 빠져 번번이 인생의 쓴맛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결론적으로 깨달은 것은 자신이 여전히 위태로운 패배자 신세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야곱은 가족을 데리고 외삼촌의 집에서 급히 탈출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반의 추격에 붙잡히긴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입니다. 형을 속였던, 과거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로 또 다른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있어 그의 이름은 단순히 자기를 향해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화려한 승리자가 되길 꿈꾸었으나 끝없이 좌절과 마주했던, 그의 내밀한 인격과 존재를 가장 정확히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야곱’이라는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야곱’은 과연 무엇입니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초라함. 지나온 시간 가운데 새겨진 가장 경멸 어린 패배의 자취, 여전히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수도 없이 할퀴고 지나가는 좌절의 상처들, 그 모든 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내 안의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름을 물으신 까닭이 과연 무엇일까요? 정확하게는 그 질문을 통해 야곱이 무엇을 확인하고 깨우치길 바라셨을까요?
그것은 “야곱”으로서 나, 사람들 앞에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 나를 주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온갖 실패와 좌절로 지쳐 쓰러져 울고 있는 나를 아무런 편견 없이 따뜻하게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야곱을, 적어도 당신에게만은 감추지 말고 솔직히 드러내길 바라십니다.
관련해서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을 통해 널리 알려진 스캇 펙 박사의 또 다른 저서 “거짓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 정신적 성장에는 자신이 성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불완전함의 증거를 없애 버리려 드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악한 사람들의 도덕성을 이해하는 데는 ‘이미지’, ‘외형상’,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말들이 퍽 중요하다. 그들은 선해지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겉으로 선해 보이려는 욕망은 불처럼 강하다. 그들의 ‘선함’이란 모두 가식과 위선의 수준에서 선함일 뿐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거짓이다. 그들이 ‘거짓의 사람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이 거짓은 남을 속이려는 것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속이려는 것일 때가 훨씬 많다. 그들은 자기 비난의 고통이라면 절대 참지 못하며 참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거느리고 살아가는 예의와 매너는 자신들을 의로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울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 안의 야곱 때문에 괴로워하며 움츠러들며, 자연스럽게 나오는 방어기제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그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영혼의 방향이 정반대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야곱에게 얽매여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은 저마다의 야곱을 증오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겸허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추시는 선한 진리의 빛을 향해 나아가,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내시는 위대한 사랑의 시선 앞에 자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정직히 마주하여 ‘저의 이름은 야곱’이라고 마침내 토로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28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자기 이름을 고백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바꾸시는 모습이 익숙합니다. 주님께서는 앞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름 짓기’의 참된 의미를 더욱 정확히 알기 위해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를 살펴봐야 합니다. 화면보시면서 먼저 3~5절 함께 읽겠습니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을 때 그냥 ‘밝아져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빛’이라는 ‘이름’을 정확히 부르셨습니다. 이어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또,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며’ 그 둘의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이어서 6~10절 읽겠습니다.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둘째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가리켜 ‘하늘’이란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또한, 셋째 날에도 뭍을 향해 “땅”으로, 많은 물은 “바다”로 이름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한 마디로 ‘이름 짓는 일’ 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피조물의 이름을 지으심으로 천지창조의 서막을 널리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어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은 단순한 호칭 변화가 아닙니다. 그 안에, 야곱을 향한 당신의 창조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쓰라린 좌절과 실패를 가지고 나아온 야곱을 결코 지난날의 모습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온 생명과 의지를 다 해 이스라엘로 기어이 변화시키고, 새롭게 창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을 살아가며 저마다의 얍복 나루에 지쳐 쓰러져있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야곱으로 겪었던 모든 비참한 패배를 두 눈에 담으시며 이스라엘로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시선을 보내시며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심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름은 28절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간이 어찌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져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호칭의 배경이 되는 24절과 25절의 ‘씨름하다’입니다. 이 동사의 히브리어 어근 <아바크>는 성경 전체에서 본문에만 단 두 번 등장합니다. 즉, 오직 야곱에게만 해당하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야곱을 가리키는 원어와 자음이 매우 흡사합니다. 이것은 그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히브리적인 언어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다.”라는 문장을 “야곱이 야곱 했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의 이러한 어휘 사용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야곱이 살아온 삶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어떻게든 이기려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간의 우애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었습니다. 어떤 속임수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번번이 비참한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수도 없이 빼앗겼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얍복 강가에서 치명적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싸움입니다. 이기려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런 그를 위해 져 주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승리에는 막중한 대가가 뒤따랐습니다. 주님은 그의 허벅지 관절을 부러뜨리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31절 기록과 같이 평생 신체장애를 안고 살았습니다. 굉장히 모순되는 장면입니다. 분명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기세등등한 새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겉모습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승자의 화려한 영광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마치 시합 중에 심각한 부상을 당해 쓰러진 격투기 선수처럼 영락없는 패배자의 몰골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얍복 나루’ 경험이 있습니다. 학업과 취업과 승진 등, 그토록 간절히 손에 넣길 원하며 애써 발버둥 쳤지만 끝내 닥쳐온 패배의 순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결과, 내면의 엉덩이뼈가 부러진 채 크나큰 고통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사랑하는 승리교회 성도 여러분,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비참한 절뚝거림은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비록 미처 다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지만, 여전히 패배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를 위해 기꺼이 져 주시는 하나님의 드넓은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다소 뜻밖의 엉뚱한 내용을 알려줍니다. 32절 말씀 다 함께 읽겠습니다.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이 구절에는 창세기를 하나의 책으로 최종 정리한 사람이 등장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은 단지 한 개인의 호칭으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은 이 땅 위에 역사상 실존했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당신의 다스림을 이루어 가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이름은 시조의 이름을 딴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아닙니다. 손자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얍복 나루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을 때 그분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훗날 이 땅에 세울 언약공동체를 향한 그분의 기대와 소망이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즉,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펼쳐 보이실 다스림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관련해서 32절에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라는 기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과연 언제일까요? 학자들 대부분은 창세기가 완성된 때를 바벨론 포로기로 추정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던 때, 다음으로 역사적으로 가장 절뚝거리던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포로민 가정의 남루한 식탁에서 주고받았던 대화를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자녀가 질문합니다. “아빠, 우리는 왜 옆 마을 친구네 집처럼 아무거나 마음데로 먹을 수 없어요?” 그러자 가난한 아버지는 비장하지만 따뜻한 음성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옛날 옛날에 우리 조상중에 야곱이라는 분이 계셨단다. 그 분이 얍복 강가에서 혼자 남아 있었던 일이야” 이런 대화가 흔하게 이어졌을 겁니다.
이렇듯 32절에 기록된 음식 규정은, 모세율법의 다른 규칙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의미심장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본질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얍복 나루 사건을 날마다 명심하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조상들이 이룩한 화려한 업적만이 아니라 비참한 좌절과 실패를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일상의 성례전이 펼쳐지는 식사 시간, 야곱의 부러진 엉덩이뼈를 떠올렸습니다. 지쳐 쓰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신 주님의 위대한 창조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패배할 때에, 진정 승리한다는 진리를 함께 나누며 서로 위로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힘겨웠던 시절, 대대로 전해오는 야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안에서 현재 자신들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참된 희망을 말씀 가운데 새롭게 발견하였습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의 드넓은 품에 안겼습니다. 그 뜻을 위한 민족적인 소명을 붙잡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첫 번째 이스라엘은 시간이 흘러 그 고귀한 정체성을 놓쳐버렸습니다. 힘겨웠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성전을 복구하자 이제 걸음걸이를 완전히 회복했다는 오만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엄중한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로서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고 전하셨습니다.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참된 이스라엘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믿고 따른다면, 이스라엘을 나의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면, 마땅히 그 안에 담긴,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깨닫고 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구원의 감격과 내면의 위로만 누리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교회 생활만을 열심히 하여 어리석은 교만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참 이스라엘’로서 구원받은 자의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온전하고 향기로운 삶으로 그분의 나라를 넓혀가길 기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을 본받아 기꺼이 져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무력하게 의지를 꺾는 패배주의에 빠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태와 태만을 정당화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공을 향한 숭배를 멈추고 승리에 취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정당하게 경쟁해서 필요한 걸 얻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자녀들이 가능한 한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받도록 격려하는 것, 이왕이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도록 노력하고, 승진 혹은 사업의 번창을 위해 애쓰고 수고해서 거기에 합당한 성과를 누리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세속적인 성공과 승리만을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하며, 패배와 좌절을 추하게 부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토록 사회적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무나 조심스러운 문제입니다. 억울한 비난도 많습니다. 함부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럼에도 가슴 아프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 어떻게든 이기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참된 승리인지 진리의 말씀을 통해 차분히 깨달아 알기보다는, 어리석은 탐욕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극히 기본적인 상식과 원칙마저 함부로 무시합니다. 심지어 헛되고 헛된 성공을 위해서라면 복음마저도 제멋대로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기꺼이 양보하고 손해 보며 살아야 합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능력과 지혜를 알기 때문에 참고 품으며, 한 걸음 더 물러서 져주어야 합니다. 분에 넘치도록 지나치게 높이 오르고 과도하게 움켜쥐기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나 이 사회의 경쟁에서 밀려난 연약한 이웃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얍복 나루 너머 골고다 언덕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실패해야 참으로 승리하며, 온전히 죽어야 진정 살아나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패배자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언제나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복음만이 우리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새롭게 창조하며 진정한 회복을 안겨줄 줄 믿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질문을 듣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며 야곱처럼 저마다의 얍복 나루 위에 지쳐 쓰러진 자녀를 향해 주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그 음성 앞에 주저 없이 ‘제 이름은 야곱’이라고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영혼 깊이 꽁꽁 싸매어두었던 멍들고 무너진, 있는 그대로 나를 주님 앞에 정직히 드러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다.’
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실패입니다. 패배입니다. 또한 좌절입니다.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고 굴욕을 겪었고 절망에 허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저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이름에 담긴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기꺼이 져 주시는 놀라운 사랑에 항복합니다. 그 사랑으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저희 모두도 그 사랑 가운데 어리석은 탐욕에서 벗어나 물러서고 양보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참된 이스라엘이 되게 하옵소서. 나누고 섬겨야 진정 승리하는, 복음의 신비를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