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6일 일요일

어눌한 이들을 위한 설교학 - 몸 글(1) 설교 본문 선택

어눌한 이들을 위한 설교학

정대진
 
몸 글(1) - 설교 본문 선택

본격적인 설교 준비는 본문 선택에서 시작합니다. 설교자들 대부분 여기서부터 고민합니다. 때문에 설교학 수업이나 설교학 교과서 모두 다양한 설교 본문 선택 방법을 제시합니다. 교회력에 따른 성서 정과, 성경을 순서대로 강해, 주제에 따른 시리즈 등 다양한 방식이 존재합니다. 정답은 없습니다. 각각 성향과 교회 상황에 맞게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조심스럽게 제안하고 싶습니다. 특히나 교육전도사 사역 중인 신대원생들을 비롯해 설교자로서 첫걸음을 뗀 이들에게 권합니다. ‘주어진 설교 본문’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 취향과 자기 세계가 있습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좀 더 관심을 두는 영역이 있고, 더욱 마음이 가는 본문이 있습니다. 이 자체는 자연스럽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한 자기 색깔을 강화해 나만의 설교 체계를 만드는 것도 어떤 면에서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지역 교회 설교자는 ‘보편 공동체’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설교단 위에서 각양각색의 사람들을 마주합니다. 설교의 지평을 넓히고자 부단히 노력해야 합니다. 그걸 위해 설교 본문을 자기 입맛대로 고르기보다는 체계적이고 균형 있고 폭넓게 구성된 틀을 따르는 걸 권하고 싶습니다.

대표적인 도구가 바로 ‘성서 정과’(lectionary)입니다. 교회력에 따라 3년 주기로 돌아가는 성경 본문입니다.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에서 ‘예수님의 승천 후 성령강림’ 기념하는 성령강림절과 이후 비절기기간으로 이어집니다. 이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복음을 일관된 흐름을 따라 더듬어 갈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실천신학연구소에서 매년 발간하는 “예배와 강단”이 여기에 도움을 줄 수 있습니다. 미국 밴더빌트 대학교에서 제공하는 홈페이지도 강력히 추천합니다(링크: https://lectionary.library.vanderbilt.edu/).

저는 교육전도사 시절 대구성서아카데미 정용섭 목사님을 통해 성서정과를 접했습니다. 이후 교육부 설교 본문을 성서정과를 따라 했습니다. 거의 매주 낯설고 어려운 본문과 마주했습니다. 이를 묵상하고 해석해 어린이와 청소년을 위한 설교 원고를 작성하는 게 무척 힘겨운 숙제였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고민하고 분투한 시간을 통해 많은 성장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렇게 작성한 원고들은 시간이 흘러 전임전도사와 부목사 시절 설교 원고의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설교 본문을 자기 취향이 아닌 ‘주어진 본문’으로 하길 거듭 권합니다. 물론 때에 따라, 목회 현장에 맞게 설교자의 강점을 드러내는 본문을 설교하는 것도 바람직합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계속 설교하게 되면 결국 한계에 빠집니다. 설교자 자신의 성장을 위해서도 더 넓은 시야로 설교할 수 있는 본문 선택 체계를 고민하시길 바랍니다. 꼭 성서정과가 아니어도 좋습니다. 성경별로 전체를 읽는 강해 설교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 밖의 여러 공교회적인 설교 본문을 참고할 수 있습니다.

핵심은 설교가 설교자 개인에 갇히지 않도록 보편적인 세계와 맞닿는 노력입니다. ‘낯선 하나님’과 마주하는 노력이 신학의 성장을 가져오듯이, ‘낯선 본문’과 씨름하는 몸부림이 설교의 성숙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게 분투하며 생긴 근육들이 설교자로서 진정한 내공을 쌓고 자존감을 높이게 합니다. 물론 어려운 길입니다. 하지만 그 모든 애씀과 수고가 아름다운 말씀의 결실로 이어지리라 믿습니다. 그런 당신을 응원합니다.



2024년 10월 4일 금요일

창세기 32장 22~32절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라"

2024년 10월 2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32장 22~32절 "이스라엘이라 부르리라"

22 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 새 
23 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24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25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 
26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 
27 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29 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 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 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질문을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아담이 범죄 하여 숨었을 때, 그에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네가 어디에 있느냐?’ 또한 그의 아들 가인에게는 다음과 같이 물으셨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이처럼 인간에게 질문하시는 주님의 모습을 볼 때마다 조금 의아한 생각이 들고는 합니다. 왜냐하면 ‘질문’이란 1차적으로 무엇인가를 모르는 사람이 그것을 아는 이에게 하는 행동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연약한 인간에게 질문을 던지셨을까요? 

우리는 여기에서 질문의 또 다른 기능을 알게 됩니다. 바로 ‘확인’입니다. 연인이나 부부 사이에 종종 ‘나 사랑해?’라는 질문이 오고 갑니다. 분명 사랑해서 만나고 결혼했는데 자기에 대한 감정을 왜 계속 물어보는 것일까요? 나를 향한 상대방의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서입니다. 공자나 소크라테스와 같은 동서양의 위대한 스승들이 문답을 통해, 제자들이 무지함을 깨닫고 지혜에 이르도록 가르치는 것도 이와 비슷한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질문하시는 이유는 답을 모르셔서가 아닙니다. 확인시키고 싶은 무언가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오늘 본문 속 야곱을 향한 하나님의 질문에 귀 기울여 보시길 바랍니다.


지금 야곱은 인생의 벼랑 끝에 홀로 서 있습니다. 지난 날 그는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쳐 머물렀습니다. 거기에서 모든 청춘을 다 바쳐 마침내 많은 가족과 가축 떼를 이루었습니다. 한 마디로 자수성가입니다. 그런 야곱에게 그 모두는 단순한 피붙이와 재산이 아닙니다. 치열한 삶의 전투 끝에 얻은 소중한 전리품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단 한 순간에 잃을 위기에 빠졌습니다. 야곱은 지금 형 에서를 향해 가는 길입니다. 그런데 에서에게 야곱은 자신의 복을 가로채어 굴욕적인 패배감을 안겨준 동생입니다. 따라서 그는 강렬한 증오심에 불타올랐습니다. 심지어는 복수를 이루기 위해, 아버지 이삭이 빨리 세상을 떠나길 고대하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는 야곱이 형에게로 향하는 심정이 과연 어떠했을까요? 깊은 염려와 불안 속에 애타게 마음을 졸였습니다. 그 때문에 본문 바로 앞에는 금세 닥쳐올 재난을 철저히 대비하는 야곱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가 제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에서가 400명이나 되는 패거리를 거느리고 오고 있다는 소식 앞에서는 그저 절망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야곱은 얍복 나루에 홀로 남아 몸부림치며 절규하였습니다. 그때, ‘어떤 사람’이 나타나 그와 씨름하였습니다. 24절에 기록된 그 상대가 정확히 누구인 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분분합니다. 여러 맥락을 종합해 보면 그분 자체를 하나님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대신, 하나님께로부터 직접 권위와 권한을 위임받은 대행자, 곧 ‘천사’로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그런 까닭에 호세아 12장 4절에도 그를 가리켜 ‘천사’라고 불렀습니다. 그렇지만 내용 흐름을 따라 편의상 ‘하나님’으로 부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을 붙잡으며 간구하는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내리쳐 부러뜨리셨습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자신을 놓지 않고 있는 야곱에게 주님께서는 불쑥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의 이름이 무엇이냐?”

당혹스럽지 않으십니까? 한 인간이 처한 극한 절망의 순간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왜 난데없이 야곱의 이름을 물어보셨을까요? 전지전능하신 주님께서 정말 몰라서 그러셨을까요? 분명 그럴 리가 없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그의 이름, ‘야곱’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야곱’이라는 말은 그의 출생과 관련이 있습니다. 쌍둥이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의 태에서부터 형과 싸움을 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형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습니다. 그렇기에 그의 부모는 ‘발꿈치’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아케브>에서 유래하여 ‘발꿈치를 잡은 자’라는 뜻을 가진 <야아코브>, 우리말 음역으로는 ‘야곱’으로 이름 지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말은 관용적으로 ‘남을 걸어 넘어뜨리는 자, 혹은 속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집니다. 

저는 이와 같은 야곱의 뜻을 ‘어떻게든 이기려 몸부림치는 사람’이라고 풀이하고 싶습니다. 그의 삶은 자기 이름처럼 성공을 향한 치열한 욕망과 좌절로 어지럽게 뒤 섞여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을 얻기 위해서라면 형은 물론이고 시각 장애가 있는 연로한 아버지를 속이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 결과 외삼촌과 사촌들의 눈치를 살피며 지내는 비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또한, 자기 못지않게 탐욕으로 가득한 라반의 교활한 속임수에 빠져 번번이 인생의 쓴맛을 경험했습니다. 그가 결론적으로 깨달은 것은 자신이 여전히 위태로운 패배자 신세라는 사실입니다. 

결국, 야곱은 가족을 데리고 외삼촌의 집에서 급히 탈출하였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반의 추격에 붙잡히긴 했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겨우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러나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것도 잠시입니다. 형을 속였던, 과거 자신이 저지른 악행의 결과로 또 다른 절망에 빠집니다.

그러므로 야곱에게 있어 그의 이름은 단순히 자기를 향해 다른 사람들이 부르는 호칭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누구보다 화려한 승리자가 되길 꿈꾸었으나 끝없이 좌절과 마주했던, 그의 내밀한 인격과 존재를 가장 정확히 상징하는 것이 바로 ‘야곱’이라는 이름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야곱’은 과연 무엇입니까? 결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나의 초라함. 지나온 시간 가운데 새겨진 가장 경멸 어린 패배의 자취, 여전히 내면 가장 깊은 곳에 자리 잡아 수도 없이 할퀴고 지나가는 좌절의 상처들, 그 모든 것이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내 안의 야곱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이름을 물으신 까닭이 과연 무엇일까요? 정확하게는 그 질문을 통해 야곱이 무엇을 확인하고 깨우치길 바라셨을까요?

그것은 “야곱”으로서 나, 사람들 앞에 포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 나를 주님께서 누구보다 잘 아시기 때문입니다. 삶의 온갖 실패와 좌절로 지쳐 쓰러져 울고 있는 나를 아무런 편견 없이 따뜻하게 바라보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는 마음 속 깊이 숨겨둔 야곱을, 적어도 당신에게만은 감추지 말고 솔직히 드러내길 바라십니다.


관련해서 소개하고 싶은 책이 있습니다. “아직도 가야 할 길”을 통해 널리 알려진 스캇 펙 박사의 또 다른 저서 “거짓의 사람들”입니다. 그는 여기서 하나님의 사랑과 반대되는 악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악한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직면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을 공격한다. 정신적 성장에는 자신이 성장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라는 사실에 대한 인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만약 그것을 인정하지 못한다면 자신의 불완전함의 증거를 없애 버리려 드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악한 사람들의 도덕성을 이해하는 데는 ‘이미지’, ‘외형상’, ‘겉으로 보기에는’ 같은 말들이 퍽 중요하다. 그들은 선해지려는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으면서 겉으로 선해 보이려는 욕망은 불처럼 강하다. 그들의 ‘선함’이란 모두 가식과 위선의 수준에서 선함일 뿐이다. 한마디로 그것은 거짓이다. 그들이 ‘거짓의 사람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사실 이 거짓은 남을 속이려는 것이기보다는 자기 자신을 속이려는 것일 때가 훨씬 많다. 그들은 자기 비난의 고통이라면 절대 참지 못하며 참으려 하지도 않는다. 그들이 거느리고 살아가는 예의와 매너는 자신들을 의로운 것처럼 보이게 하는 거울의 역할에 지나지 않는다.”

오해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내 안의 야곱 때문에 괴로워하며 움츠러들며, 자연스럽게 나오는 방어기제 자체가 악하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다만 그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영혼의 방향이 정반대로 향할 수 있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아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야곱에게 얽매여 사는 것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주님께서 진정 바라시는 것은 저마다의 야곱을 증오하거나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모습 그대로를 하나님 앞에 겸허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비추시는 선한 진리의 빛을 향해 나아가, 자신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보내시는 위대한 사랑의 시선 앞에 자기를 내려놓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정직히 마주하여 ‘저의 이름은 야곱’이라고 마침내 토로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놀라운 선언을 하셨습니다. 28절 다 함께 읽겠습니다.

28 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야곱이 자기 이름을 고백하였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새 이름을 주셨습니다. 바로 ‘이스라엘’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나님이 사람의 이름을 바꾸시는 모습이 익숙합니다. 주님께서는 앞서 ‘아브람’을 ‘아브라함’으로 ‘사래’를 ‘사라’로 이름을 바꾸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이름 짓기’의 참된 의미를 더욱 정확히 알기 위해 창세기 1장의 천지창조를 살펴봐야 합니다. 화면보시면서 먼저 3~5절 함께 읽겠습니다.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하나님께서 첫째 날 빛을 창조하셨을 때 그냥 ‘밝아져라’라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빛’이라는 ‘이름’을 정확히 부르셨습니다. 이어서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또,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며’ 그 둘의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이어서 6~10절 읽겠습니다.

6 하나님이 이르시되 물 가운데에 궁창이 있어 물과 물로 나뉘라 하시고 7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8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둘째 날이니라 9 하나님이 이르시되 천하의 물이 한 곳으로 모이고 뭍이 드러나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0 하나님이 뭍을 땅이라 부르시고 모인 물을 바다라 부르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둘째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궁창을 가리켜 ‘하늘’이란 이름을 지으셨습니다. 또한, 셋째 날에도 뭍을 향해 “땅”으로, 많은 물은 “바다”로 이름 지으셨습니다. 이것이 과연 무엇을 의미할까요? 하나님의 창조 사역은 한 마디로 ‘이름 짓는 일’ 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피조물의 이름을 지으심으로 천지창조의 서막을 널리 알리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지어주신 이스라엘이라는 새 이름은 단순한 호칭 변화가 아닙니다. 그 안에, 야곱을 향한 당신의 창조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쓰라린 좌절과 실패를 가지고 나아온 야곱을 결코 지난날의 모습으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당신의 온 생명과 의지를 다 해 이스라엘로 기어이 변화시키고, 새롭게 창조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또한 오늘을 살아가며 저마다의 얍복 나루에 지쳐 쓰러져있는 자녀들을 향한 하나님의 위대한 약속입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야곱으로 겪었던 모든 비참한 패배를 두 눈에 담으시며 이스라엘로 다시 일으켜 주십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시선을 보내시며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가심을 굳게 믿으시길 바랍니다.


여기서 더 나아가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의 의미에 대해 좀 더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 이름은 28절의 설명과 같이,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연약한 인간이 어찌 감히 전능하신 하나님과 맞서 싸워 이길 수 있을까요?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일까요? 바로 ‘하나님께서 져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주목해야 할 점은 이 호칭의 배경이 되는 24절과 25절의 ‘씨름하다’입니다. 이 동사의 히브리어 어근 <아바크>는 성경 전체에서 본문에만 단 두 번 등장합니다. 즉, 오직 야곱에게만 해당하는 독특한 단어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야곱을 가리키는 원어와 자음이 매우 흡사합니다. 이것은 그의 이름을 가지고 하는 히브리적인 언어유희로 볼 수 있습니다. 즉, “야곱이 하나님과 씨름했다.”라는 문장을 “야곱이 야곱 했다.”라고 이해할 수 있습니다.

창세기 저자의 이러한 어휘 사용의 의도가 무엇일까요? 지금까지 야곱이 살아온 삶의 특징을 함축적으로 보여 주기 위함입니다.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는 ‘어떻게든 이기려 몸부림쳤던 사람’입니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부모 형제간의 우애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었었습니다. 어떤 속임수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간절한 바람과는 달리 번번이 비참한 패배를 경험했습니다.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했고 피땀 흘려 번 돈을 수도 없이 빼앗겼습니다. 그러다 마침내 얍복 강가에서 치명적인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그 결정적인 순간에 자기에게 가장 익숙한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바로 싸움입니다. 이기려 몸부림치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놀랍게도 그런 그를 위해 져 주셨습니다.

하지만 야곱의 승리에는 막중한 대가가 뒤따랐습니다. 주님은 그의 허벅지 관절을 부러뜨리셨습니다. 그 결과 그는 31절 기록과 같이 평생 신체장애를 안고 살았습니다. 굉장히 모순되는 장면입니다. 분명 하나님과 싸워 이겼다는, 이스라엘이라는 기세등등한 새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겉모습은 너무나 비참합니다. 승자의 화려한 영광은 전혀 보이지 않습니다. 그 대신 마치 시합 중에 심각한 부상을 당해 쓰러진 격투기 선수처럼 영락없는 패배자의 몰골입니다.

마찬가지로 저를 비롯한 모든 사람은 누구나 저마다의 ‘얍복 나루’ 경험이 있습니다. 학업과 취업과 승진 등, 그토록 간절히 손에 넣길 원하며 애써 발버둥 쳤지만 끝내 닥쳐온 패배의 순간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 결과, 내면의 엉덩이뼈가 부러진 채 크나큰 고통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참으로 사랑하는 승리교회 성도 여러분,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비참한 절뚝거림은 우리에게 진정한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입니다. 비록 미처 다 이해할 수 없고 헤아릴 수 없지만, 여전히 패배자의 초라한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우리를 위해 기꺼이 져 주시는 하나님의 드넓은 품에 안기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마지막은 다소 뜻밖의 엉뚱한 내용을 알려줍니다. 32절 말씀 다 함께 읽겠습니다.

32 그 사람이 야곱의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쳤으므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

이 구절에는 창세기를 하나의 책으로 최종 정리한 사람이 등장해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먼저 주목해야 할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존재입니다.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은 단지 한 개인의 호칭으로 머물지 않았습니다. 훗날 이스라엘은 이 땅 위에 역사상 실존했고 지금까지 이어지는 국가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조금 이상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선택하시고 그의 자손들을 통하여 당신의 다스림을 이루어 가기 원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나라의 이름은 시조의 이름을 딴 ‘아브라함’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아들 ‘이삭’도 아닙니다. 손자 ‘야곱’의 새 이름 ‘이스라엘’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얍복 나루에서,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바꾸셨을 때 그분 마음속에 무엇이 있었겠습니까? 훗날 이 땅에 세울 언약공동체를 향한 그분의 기대와 소망이 뜨겁게 살아 숨 쉬고 있었습니다. 즉, 본문에 기록된 사건은 한 개인의 운명을 넘어 하나님께서 이 땅에 펼쳐 보이실 다스림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관련해서 32절에 눈 여겨 봐야 할 대목이 있습니다. 바로 “이스라엘 사람들이 지금까지 허벅지 관절에 있는 둔부의 힘줄을 먹지 아니하더라”라는 기록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금’은 과연 언제일까요? 학자들 대부분은 창세기가 완성된 때를 바벨론 포로기로 추정합니다. 즉,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노예로 지내던 때, 다음으로 역사적으로 가장 절뚝거리던 비참한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어느 포로민 가정의 남루한 식탁에서 주고받았던 대화를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또랑또랑한 눈망울로 자녀가 질문합니다. “아빠, 우리는 왜 옆 마을 친구네 집처럼 아무거나 마음데로 먹을 수 없어요?” 그러자 가난한 아버지는 비장하지만 따뜻한 음성으로 이렇게 이야기를 들려주기 시작합니다. “사랑하는 아들아, 딸아, 옛날 옛날에 우리 조상중에 야곱이라는 분이 계셨단다. 그 분이 얍복 강가에서 혼자 남아 있었던 일이야” 이런 대화가 흔하게 이어졌을 겁니다.

이렇듯 32절에 기록된 음식 규정은, 모세율법의 다른 규칙들과 마찬가지로 매우 의미심장한 무게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을 이스라엘답게 하는 본질은, 그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얍복 나루 사건을 날마다 명심하는 데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조상들이 이룩한 화려한 업적만이 아니라 비참한 좌절과 실패를 기억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위대한 일상의 성례전이 펼쳐지는 식사 시간, 야곱의 부러진 엉덩이뼈를 떠올렸습니다. 지쳐 쓰러져 있는 그에게 다가오신 하나님의 사랑을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었습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변화시키신 주님의 위대한 창조를 마음에 새겼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참으로 패배할 때에, 진정 승리한다는 진리를 함께 나누며 서로 위로하였습니다. 

그렇게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장 힘겨웠던 시절, 대대로 전해오는 야곱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안에서 현재 자신들이 겪는 고난의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그 결과, 참된 희망을 말씀 가운데 새롭게 발견하였습니다. 온 세상을 통치하시는 주님의 드넓은 품에 안겼습니다. 그 뜻을 위한 민족적인 소명을 붙잡고 다시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첫 번째 이스라엘은 시간이 흘러 그 고귀한 정체성을 놓쳐버렸습니다. 힘겨웠던 포로 생활을 마치고 성전을 복구하자 이제 걸음걸이를 완전히 회복했다는 오만에 빠졌습니다. 그 결과 엄중한 심판을 받고 이스라엘로서 자격을 잃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새로운 이스라엘을 세우고 전하셨습니다. 당신을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하는 모든 사람을 참된 이스라엘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우리가 이 복음을 믿고 따른다면, 이스라엘을 나의 전 존재를 변화시키는 진정한 이름으로 받아들인다면, 마땅히 그 안에 담긴, 하나님 나라를 올바로 깨닫고 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결코 우리가 구원의 감격과 내면의 위로만 누리길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저 교회 생활만을 열심히 하여 어리석은 교만에 빠지는 것을 바라지 않으십니다. 그 대신, ‘참 이스라엘’로서 구원받은 자의 올바른 정체성을 가지고 온전하고 향기로운 삶으로 그분의 나라를 넓혀가길 기대하십니다. 

그렇다면 이스라엘로 살아간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할까요? 주님을 본받아 기꺼이 져주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무력하게 의지를 꺾는 패배주의에 빠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나태와 태만을 정당화하라는 말은 더더욱 아닙니다. 성공을 향한 숭배를 멈추고 승리에 취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정당하게 경쟁해서 필요한 걸 얻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오히려 칭찬받아 마땅합니다. 자녀들이 가능한 한 열심히 공부해서 높은 성적을 받도록 격려하는 것, 이왕이면 좋은 직장에 취직하도록 노력하고, 승진 혹은 사업의 번창을 위해 애쓰고 수고해서 거기에 합당한 성과를 누리려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습니다. 

그러나 알게 모르게 세속적인 성공과 승리만을 내 인생의 궁극적인 목적으로 여기고, 이기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하며, 패배와 좌절을 추하게 부인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오늘날 한국 교회가 이토록 사회적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된 이유가 무엇일까요? 너무나 조심스러운 문제입니다. 억울한 비난도 많습니다. 함부로 일반화해서는 안 됩니다. 다만 그럼에도 가슴 아프게 반성해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교회 안과 밖에서 어떻게든 이기려 한다는 사실입니다. 무엇이 참된 승리인지 진리의 말씀을 통해 차분히 깨달아 알기보다는, 어리석은 탐욕을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가고 있습니다. 지극히 기본적인 상식과 원칙마저 함부로 무시합니다. 심지어 헛되고 헛된 성공을 위해서라면 복음마저도 제멋대로 왜곡하기도 합니다.

그 대신, 우리는 기꺼이 양보하고 손해 보며 살아야 합니다. 힘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용기가 부족해서가 아닙니다. 오히려 진정한 능력과 지혜를 알기 때문에 참고 품으며, 한 걸음 더 물러서 져주어야 합니다. 분에 넘치도록 지나치게 높이 오르고 과도하게 움켜쥐기 위해 애쓰지 말아야 합니다. 특히나 이 사회의 경쟁에서 밀려난 연약한 이웃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돌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할 때 비로소 얍복 나루 너머 골고다 언덕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실패해야 참으로 승리하며, 온전히 죽어야 진정 살아나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마주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이 세상 가장 위대한 패배자로 다가오신 예수님의 사랑을 언제나 가슴 깊이 품고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그 복음만이 우리를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새롭게 창조하며 진정한 회복을 안겨줄 줄 믿습니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의 질문을 듣습니다. 이 땅을 살아가며 야곱처럼 저마다의 얍복 나루 위에 지쳐 쓰러진 자녀를 향해 주님은 “네 이름이 무엇이냐”라고 물으십니다. 그 음성 앞에 주저 없이 ‘제 이름은 야곱’이라고 대답하시길 바랍니다. 영혼 깊이 꽁꽁 싸매어두었던 멍들고 무너진, 있는 그대로 나를 주님 앞에 정직히 드러내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다.’


기도  
이스라엘의 하나님
제 이름은 야곱입니다. 실패입니다. 패배입니다. 또한 좌절입니다. 너무나 많은 눈물을 흘렸고 굴욕을 겪었고 절망에 허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저희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셔서 참으로 감사합니다. 그 이름에 담긴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기꺼이 져 주시는 놀라운 사랑에 항복합니다. 그 사랑으로 온 세상을 새롭게 하시는 창조의 손길을 의지합니다.
저희 모두도 그 사랑 가운데 어리석은 탐욕에서 벗어나 물러서고 양보하는 삶을 살게 하옵소서. 참된 이스라엘이 되게 하옵소서. 나누고 섬겨야 진정 승리하는, 복음의 신비를 온전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찬란한 패배를 통해 세상을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9월 19일 목요일

"행복한 소망인으로 향하는 여정", 『아직, 소망이 있다』(IVP, 2024) 서평

행복한 소망인으로 향하는 여정
- 제임스 패커·캐롤린 나이스트롬, 『아직, 소망이 있다』(IVP, 2024) 서평

정대진

절망 중에 만난 책
소망이 없었다.
육군 일병 시절이다. 휴가 첫날 들른 서점에서 책 하나가 처진 내 어깨를 두드렸다. ‘제임스 패커’라는 저자 이름과 ‘소망’이라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이 두 가지만으로 충분했다. 바로 집어 들어 계산대 위에 올려놓았다. 그만큼 소망에 굶주렸었다.

그전까지 내게 기독교 신앙은 평면이었다. 지극히 단순했다. 하나님은 열심히 부르짖어 기도하면 들어주시고 응답하는 분이었다. 그 매끈한 틀은 자대 배치와 함께 산산이 부서졌다. 내면 이곳저곳에 유리 조각이 박혔다. 마음벽을 타고 흐르는 피를 닦으며 깨달았다. 지금껏 굳게 붙잡았던 신앙 체계는 허상이었다. 적나라하게 드러난 나는 목사가 되기에 결함투성이였다. 깊은 절망이 밀려왔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절망 사이 갈라진 틈으로 조금씩 빛줄기가 들이쳤다. 소망이 무너져 내려 다시 소망이 솟아올랐다. 익숙했던 신념이 무너지는 고통을 통해 암흑 속 균열을 발견했다. 대학 입학 후 조금씩 익혀 갔던 신학이라는 은혜 덕분이다. 낯선 하나님을 만나는 연습을 했다. 뒤돌아보며 깨닫는다. 모든 게 소망을 발견하는 훈련이었다.

그 훈련 가운데 만난 여러 스승 중 한 분이 제임스 패커다. 그는 영국에서 태어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캐나다로 건너가 리젠트 칼리지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존 스토트와 함께 이른바 ‘20세기 복음주의’ 거장으로 불리고, 대표작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현대 고전으로 꼽힌다. 나 역시 이 책을 통해 익숙함 너머에 존재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어렴풋하나마 알아 가기 시작했다. 내 신학 토대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끼쳤으며, 뭔지 모를 포근함을 느꼈다. 그가 ‘소망’을 주제로 쓴 책을 주저 없이 붙잡은 이유다.

불완전한 사람들을 위한 진정한 소망
제임스 패커는 진정한 ‘소망’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성경 인물 8명을 주목한다. 삼손, 야곱, 마노아의 아내, 요나, 마르다, 도마, 시몬 베드로, 느헤미야다. 저자는 그들을 ‘불완전한 사람들’로 이해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들을 ‘어떻게 만지시고 사용하셨는지’를 주목한다. 이는 저자가 부제, ‘How God Touches and Uses Imperfect People’를 통해 밝힌 저술 의도다. 그는 서론에서 이렇게 구체적으로 서술한다.

“이 모든 열등감을 치료하기 위한 최종적인 해결 방안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사실을 늘 기억하는 것입니다. 당신의 하나님은, 당신이 인생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거나, 당신도 그런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만큼 훌륭한 부류의 사람들 못지않게, 부적응자와 외톨이와 낙오자를 사랑하시고, 구속하시며, 용서하시고, 회복시키시며, 보호하시고, 지켜 주시며, 사용하신다는 사실입니다.…모든 그리스도인은 ‘소망을 품은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부름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이 책을 사용하셔서 많은 사람들을 행복한 소망인으로 변화시키시기를 기도합니다.” (34-35쪽)

저자가 다룬 여덟 인물 중, 두 사람을 절망에서 새롭게 일으킨 소망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먼저 야곱이다. 그는 ‘재물욕’과 ‘하나님을 향한 마음’을 동시에 지닌 “혼합형 인간”이다. 또한 창세기 12~50장을 관통하는 ‘역기능 가족’ 이야기의 중심이다. 그는 희생자이면서 가해자다. 어머니에게 편애를 받고 일그러진 성품으로 자라 편애하는 남편이자 아버지가 되었다. 형의 복을 훔쳤으나 외삼촌에게 착취당했다.

하나님은 그런 야곱과 함께하시고 마침내 나타나셨다. 얍복강 나루에서 홀로 남은 그와 밤새 씨름하셨다. 그의 허벅지 관절을 부러뜨려 다리를 절게 하셨다. 패커는 이 장면을 해설하며 빛나는 통찰을 드러낸다. “그의 자아가 최후를 맞는 순간이라고 여겨졌던 상황이 실제로는 진정한 복의 시작이 되었습니다”(79쪽). 나는 이 문장에서 정확히 나 자신을 발견하며 몰입했다. 성경이 알려 주는, ‘진정한 소망이 시작하는 이치’를 깨달았다.

다음으로 시몬 베드로의 소망이다. 저자는 그의 특성을 이렇게 세 가지로 정리한다. 첫째, 그는 탁월한 지도자다. 둘째, 영적 지도자 역할을 위해 과감히 희생한 사람이다. 셋째, 예수님의 충성스러운 추종자다. 이 모두를 종합하면 상당히 훌륭하고 영웅적이다. 실제로 그는 많은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하지만 십자가 사건 직전에 베드로가 지닌 제자도의 처참한 실상이 드러났다. 그는 어리석었고 실패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며 저주하고 맹세까지 하였다. 베드로는 비탄에 빠져 상심한 채 울부짖었다. 이 장면을 두고 저자는 이렇게 서술한다. 

“하나님은 자비로우셔서, 우리 마음으로부터 자기 확신을 꺼내 부수어 버리기 위해 실패를 허용하십니다. 그렇게 하신 후에 우리에게 새로운 시야, 즉 우리 자신을 신뢰하기보다는 하나님을 신뢰하는 새로운 인생관이 생겼을 때 우리를 들어서 사용하십니다.” (251-252쪽)

요한복음 21장은 베드로에게 다가가신 예수님의 경이로운 자비를 분명하게 보여 준다. 주님은 시몬에게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다. 베드로는 비참한 기억에 짓눌린 채 사랑을 고백한다. 같은 질문과 대답이 세 번 이어졌다. 이 대화를 통해 예수님은 자신을 세 번 부인했던 베드로의 쓰라린 기억을 씻어 주셨다. 

그 결과, 그의 ‘연약한 충성’은 ‘정직한 충성’을 거쳐 ‘견고한 충성’이 되어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는 일꾼이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말년에 쓴 두 편지, 베드로전후서를 통해 성도를 생생하게 권면하고 격려하였다. 이러한 베드로의 이야기를 통해 나는 목회자로서 가져야 할 건강한 충성의 의미를 곱씹을 수 있었다. 약함 가운데, 반석 같은 베드로처럼 변화됨을 기대하는 소망을 품었다.

저마다의 결핍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소망의 길잡이
나머지 여섯 명의 성경 인물 역시 저자는 깊은 통찰로 들여다본다. 저마다 겪은 고통과 결핍, 그리고 그 모두를 덮는 소망을 감동적으로 설명한다. 그러면서도 신학적 깊이와 균형을 유지한다. 해당 본문의 표면에만 시선이 머물지 않는다. 깊이에 다다른다. 각 인물을 둘러싼 상황과 사건을 탄탄한 신학에 근거해 입체적으로 재구성한다. 내가 그랬듯 이 책을 읽는 누구나 저마다의 다양한 약점을 마주할 것이다. 동시에 결핍을 딛고 일어설 나만의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현실에 지쳐 소망이 짓밟힌 이들이 이 책을 읽어야 하는 이유다. 

이 책의 장점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탁월한 주제를 전개하는 형식 또한 무척 훌륭하다. 자연스럽게 성경 곳곳을 넘나든다. 구약 인물의 경우 신약성경과 유기적인 관계를 풀어낸다. 가령 삼손과 예수님을 비교하고, 야곱에게서 예수님의 화해 사역을 발견한다. 예화도 인상적이다. 그는 존 던과 키플링과 엘리어트가 쓴 시, 존 버니언과 입센과 C. S. 루이스가 지은 소설을 적절히 인용하여 문학적 품격을 높인다. 여러 선교사를 언급하며 각 본문을 선교적 시각으로 이해한다. 북아일랜드 분쟁과 코소보 학살 등 당면한 현실적인 문제를 언급하며 교회의 사회적 책임을 일깨운다. 게다가 곳곳에 유머도 녹아 있다. 이 모든 게 어우러져 포근하면서도 기품 있는 설교를 완성했다.

설교자로서 나는 이 책에 참 많은 빚을 지고 있다. 신학과 문학이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는, 내가 꿈꾸는 설교의 원형을 여기서 처음 발견했다. 그런 까닭에 주위 목회자들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사역에 지쳐 흔들리는 소명을 붙잡을 힘과 용기를 이 책을 통해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훌륭한 설교 교재로서 큰 도움을 받을 것이다.

소그룹을 맡아 고군분투하는 이들에게도 마찬가지다. 각 장마다 ‘기도문’과 ‘연구 질문’, ‘기도 제목’, ‘기록과 적용’을 제시한다. 공저자로 이름을 올린 캐롤린 나이스트롬의 공헌이다. 이를 통해 이 책은 한 사람의 독자를 넘어 공동체의 소망을 회복하는 든든한 길잡이 역할을 한다. 이 책을 여러 명이 함께 읽고 나누고 함께 기도할 때, 모임 가운데 참 소망이 풍성하게 흘러넘치는 모습을 기대할 수 있다. 

소망이 사치인 시대에 더욱 절실한 소망
다시 군대 시절 이야기다. 휴가 복귀 후 선임들 눈치를 살피며 조금씩 이 책을 들춰 보다가 마침내 다 읽었던 날을 기억한다. 먹먹한 감동을 품고 경계근무 초소에 올라갔다. 유리 조각들이 별처럼 반짝이며 밤하늘에 흩어졌다. 문득, 어두운 평면 너머 아득하게 펼쳐진 공간이 보였다. 거대한 다면체 별자리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온 우주에 얽힌 따뜻한 소망 이야기를 내 귓가에 속삭이며 위로해 주었다.

그 순간 하나님에 대한 실망이 녹아내리는 걸 느꼈다. 책 내용을 곱씹으며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절망에 균열을 내며 진정한 소망을 전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고 기도했다. 불완전한 나를 하나님께서 계속 만지시고 사용하시길 구했다. 물론 그 후로 상황이 극적으로 달라지지는 않았다. 여전히 어렵고 힘든 순간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날, 나는 ‘행복한 소망인’으로 첫걸음을 내디뎠다. 제임스 패커가 이 책을 통해 의도한 바가 내게 이루어졌다.

그때로부터 20년이 흘렀다. 삶이 서툴던 신학생은 어느새 기성세대 문턱에 들어선 40대 목사가 되었다. 그 시절과 다른 이유로 절망하고 그때와 다른 이유로 소망을 꿈꾼다. 삶의 거친 매듭마다, 이 책을 통해 얻은 소망이 큰 힘이 되었다. 목회자로서 소명과 인격과 설교에 가장 큰 영향을 받았다. 그런 이유로 주변에 적극 추천하고 선물했다. 그랬던 책이 ‘아직, 소망이 있다’라는, 더욱 적절한 제목과 보다 세련된 편집으로 다시 돌아왔다. 이 책을 통해 한국 교회에 다시금 소망이 물결치길 기도한다.

소망이 사치인 시대를 살고 있다. 기후재난이 날로 심해지고 있다. 세계 곳곳에 갈등과 긴장이 격하게 치닫고 있다. 한국 교회의 쇠락은 거스를 수 없는 거센 파도처럼 보인다. 각 개인의 삶에도 여러 모양의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불안과 염려로 가득한 세상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망을 꿈꾸고 증언하는 게 바로 그리스도인의 사명과 책임이다. 오랜만에 감격스레 이 책을 펼쳐 읽고 더욱 생생한 감동을 느끼며 깨닫는 결론이다. 책장을 덮으며 기도하듯 이렇게 읊조렸다. 
아직, 소망이 있다.


필자 소개: 정대진
시편 131편 찬송처럼, 크고 놀라운 일을 이루려 하기보다는 젖 뗀 아이와 같은 고요와 평온을 지닌 목사가 되길 꿈꾼다. 자기를 돌아보는 정갈한 글쓰기로 빚어낸 설교를 하고자 애쓰고 있다. 그 결실로 『하나님의 이름들, 그 맥락과 의미』(좋은씨앗, 2023)을 출간했다.

장로회신학대학교 구약학 석사(Th.M)를 졸업하고, 같은 학교 목회신학박사 과정(Th.D. in Min.)에서 ‘목회와성서’ 전공으로 균형 있는 성경 연구를 이어 가고 있다. 영남 지역 전통 교회들을 거쳐 현재 일산 승리교회 교구목사로 섬기며 배우는 중이다.


기사링크
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306623

2024년 8월 29일 목요일

베드로전서 5장 7~11절, “주께 맡기라”

2024년 8월 2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베드로전서 5장 7~11절, “주께 맡기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고난은 교회의 정체성은 시작부터 핍박을 겪었습니다. 사도 베드로는 환난 당하는 교인들에게 편지로 격려하였습니다. 바로 “베드로 전후서”입니다. 베드로는 힘겹게 신앙을 지켜가는 교회를 향해 무엇을 권면했을까요? 9절 말씀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베드로는 교회를 위협 하는 악을 무시하거나 도망하거나 혹은 굴복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대적하라.”라고 가르칩니다. 그 방법이 중요합니다. 바로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입니다. 신앙을 빼앗으려는 악한 세력을 이기는 올바른 길은 직접 일대일로 맞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가진 믿음을 더욱 단단하게 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실 오늘 본문 내용은 우리에게 그리 잘 와 닿지 않을 수 있습니다. 저마다 어느 정도 어려움은 있겠지만, 그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종교의 자유를 누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닌 한 강제로 신앙을 뺏기거나 믿음 때문에 생명의 위협을 받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울부짖는 사자와 같은 악한 권세는 또 다른 방식으로 여전히 교회를 삼키려 합니다. 좀 더 낮아지고 섬기는 하나님의 다스림이 아니라, 세상의 잘못된 욕망을 따르도록 끊임없이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 모두가 좀 더 풍요롭고 여유롭게 사시길 진심으로 축복합니다. 가능하면 자녀, 손주들이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을 나와 번듯한 직장을 다니길 소망합니다. 또한 많은 사람에게 우러름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랍니다.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망 자체를 애써 부정할 필요 없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처럼 지나치게 많이 움켜쥐고 좀 더 높이 올라가는 것만을 행복의 기준과 인생 목표로 삼지 말아야 합니다. 세속적인 유치한 잣대로 함부로 다른 사람을 무시하고 억누르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한 태도는 돈과 명예라는 이 시대의 우상에 굴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시고 살아내신 하나님 나라는 기꺼이 자기를 비워내고 낮아지는 삶의 방식입니다. 탐욕으로 가득한 세상 질서와는 전혀 반대되는 어렵고 위험한 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신앙생활 역시 모양과 환경은 다르지만 그 옛날, 끔찍한 시련과 마주했던 믿음의 선배들과 근본적으로 동일합니다. 

모두가 한 쪽 눈만을 가진 나라에서는 두 눈 가진 사람은 바보 취급을 당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간다는 것은 분명 거슬리고 거북해 보이기 마련입니다. 세상의 질서처럼 탐욕을 따르지 않고 미련하게 낮추고 비우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본문을 통해 바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의 음성에 귀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직접 그 모든 어려움과 고난을 겪으시고 마침내 십자가 위에서 죽임 당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주님은 온갖 시련을 겪는 자녀들을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베드로는 절망에 맞서 굳센 믿음으로 싸우는 고난 받는 성도들을 향해, 그들이 끝까지 지켜야 할 소중한 희망을 이야기 하였습니다. 

10, 11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베드로는 먼저, 그들을 향해 “잠깐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위로합니다. 성도의 고난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잠깐’입니다. 여기서 잔인한 의문을 떠오릅니다. 과연 그 “잠깐”이 언제까지일까요? 차마 남들에게 말 못할 여러 아픔에 신음하며 주님께 묻게 됩니다. “하나님, 잠깐이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대부분은 건강이나 경제적 어려움 혹은 가정 문제 등으로 오랫동안 간절히 기도한 내용들이 하나쯤은 있으실 겁니다. 더러 금세 응답받기도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1, 2년은 물론이고 10년, 20년, 심지어 평생 동안 간절히 구해도 끝나지 않은 아픔도 적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무한한 시간 안에서 인간의 그 어떤 영원함도 결국 유한합니다.  제 아무리 영겁과 같은 시간의 무게도 주님의 위대한 다스림 가운데 반드시 힘을 잃습니다. 그 어떤 고통스런 시간도 참된 은혜로 변화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바로 베드로가 본문에서 말하는 ‘잠깐’의 의미입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는 베드로후서 3장 8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본문 말씀을 통해 고난 당한 성도들이 귀 기울여야 할 또 다른 소망이 있습니다. 고통 받는 자녀들을 “모든 은혜의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부르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에 휩싸인 성도를 직접, 온전하고 굳건하게, 강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십니다. 

앞서, 9절 말씀을 통해 확인했습니다. 우는 사자와 같은 마귀를 이기는 길은 직접 맞서 싸우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단단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일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고난 받는 자녀의 믿음을 직접 굳세게 하십니다. 베드로는 본문 11절에서 그 놀라운 은혜에 감격하며, 세상을 이기는 진정한 힘과 능력이 주님께 영원히 있음을 찬양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오랜 시간 그 끔찍한 핍박 속에서도 교회가 오늘날까지 살아 숨 쉬는 이유입니다. 만약 고난을 이겨내는 믿음이 전적으로 인간에게만 달려 있다면 이 세상에 과연 누가 신앙을 지킬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그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분이 영원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이시라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주님께서 항상 함께하시고 붙잡아 주시기에, 죄악으로 물든 이 세상의 거짓과 불의와 폭력에 기꺼이 맞서 싸울 수 있습니다.

따라서 언제나 영혼 깊이 새겨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를 꿈꾸고 소망하며 이 땅을 살아갈 때, 분명 허무함과 좌절과 아픔을 겪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우리를 결코 홀로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 모든 시련을 헤쳐갈 믿음 역시 주님께서 직접 부어 주십니다. 그러므로 절망 가운데 지치고 괴로울 때 우리를 품으시는 하나님을 잠잠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결론적으로 본문 7절에 담긴 베드로의 외침에 귀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사도행전과 1세기 역사 기록을 통해 확인 할 수 있듯이 환난과 핍박에도 성도들은 담대하게 믿음을 지켰습니다. 끔찍한 고난 속에서도 주님만 바라보며 찬양을 드렸습니다. 그렇게 놀라운 신앙을 어떻게 지킬 수 있었을까요? 교회가 거대한 시련 속에서도 권능의 하나님께서 분명히 자신들과 항상 함께 계시고 돌보심을 믿고, 그 주님께 모든 염려를 맡겼기 때문입니다.

관련하여 한 가지 이야기를 나누고 설교를 마무리하겠습니다. 20세기를 대표하는 영성 작가인 ‘헨리 나우웬’은 어느 책에서 매우 인상적인 대화를 들려주었습니다. <사진 PPT> 여러분 모두 지금 화면에 보시는 것처럼, 서커스단이 펼치는 아름답고도 놀라운 “공중그네 묘기”를 텔레비전에서 한 번쯤 보셨을 겁니다. 

어느 날 헨리 나우웬이 세계적인 공중그네단의 공연을 보았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연한 기회로 그 팀 리더와 함께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로트라이히’ 라는 이름의 리더가 그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저는 공중 비행을 할 때 저를 붙잡아 주는 사람을 전적으로 신뢰합니다. 사람들은 저를 위대한 스타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진짜 스타는 저를 잡아주는 죠입니다. 

그는 1초의 몇 분의 몇까지 맞출 만큼 정확하게 제가 갈 자리에 와 있어야 하고, 제가 그네에서 길게 점프할 때 공중에서 저를 잡아채야만 하니까요.”

그러자 헨리 나우웬은 ‘어떻게 그게 가능한 지’ 물었습니다. 로트라이히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공중을 나는 사람은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붙잡아 주는 사람이 모든 것을 합니다. 이것이 공중그네의 비밀입니다. 

죠에게 날아갈 때 저는 그저 팔하고 손만 뻗으면 됩니다. 그 다음엔 그가 저를 잡아 무대 앞으로 안전하게 끌어가 주기를 기다리면 됩니다.”

이 말을 들은 나우웬은 무척 놀라워하였습니다. 정말 그가 공중 위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는지 되물었습니다. 이 질문에 그는 이렇게 답합니다. 

“그렇습니다, 최악의 실수는 공중을 나는 사람이 붙잡아주는 사람을 잡으려 드는 것입니다. 저는 절대 죠를 잡으려 들면 안 됩니다. 저를 붙잡는 것은 죠의 임무입니다. 

만약 제가 죠의 손목을 잡는다면 그의 손목이 부러지거나 제 손목이 부러지고 말겁니다. 그렇게 되면 둘 다 끝장입니다. 

공중 비행을 하는 사람은 날기만 하고, 붙잡아 주는 사람은 붙잡기만 해야 합니다. 공중 비행을 하는 사람은 붙잡아줄 사람이 자기를 위해 제 자리에 와 있다는 것을 반드시 믿고 자신의 팔을 뻗어야 합니다.”  

이 세상을 하나의 거대한 서커스 공연장이라고 가정해 보겠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믿고 소망하는 교회는 그 어떤 비난과 공격에도 불구하고 우직하게 공중 그네를 타는 부활 공동체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런 우리를 도무지 이해하지 못한 채 비웃거나 심지어 미워하기도 합니다. 솔직히 우리 자신도 다른 이들의 화려한 성공을 바라보며 부러워하곤 합니다. 때때로 초라한 자기 모습에 실망하거나 좌절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공중 그네의 가장 중요한 비밀을 마음 깊이 곱씹어 보시길 바랍니다. 열심히 연습한 데로 최선을 다해 힘껏 하늘로 날아오른 뒤에는, 자신을 붙잡는 사람을 향해 그저 손과 팔을 뻗어야만 합니다. 아무런 노력 없이 게으르게 지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다만, 인생 여정 가운데 인간의 능력과 경험과 배경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 대신 우리를 붙잡으시는 하나님을 향해 잠잠히 전 존재와 온 인격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만약 그러지 않고 내 방법과 욕심으로 하나님을 억지로 움켜쥐려 드는 것은 최악의 실수라는 사실 또한 명심해야 합니다. 그 대신, 불안과 염려 가운데 떨고 있는 우리를 붙잡아주시려 하나님께서 항상 제 자리를 지키고 계심을 굳게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 손을 뻗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사정없이 곤두박질하는 듯 한 아찔한 인생의 추락 속에서, 자녀의 고난 가운데 늘 함께 하시는 하나님, 성도의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하나님, 영원한 권능을 가지신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삶의 모든 순간을 그분의 드넓은 팔에 내어 맡기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넘어지는 자녀를 붙잡으시려 변함없이 제 자리를 지키시는 놀라운 구원의 하나님. 
주님을 믿고 따르는 길은 곧 우는 사자처럼 저희를 노려보는 여러 모양의 악한 세력과 마주하는 일임을 찢긴 마음을 안고 고백합니다. 하나님, 모든 시험과 고난 속에서도 절망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믿음을 굳세게 하시는 주님의 권능으로 승리하게 하여주시옵소서. 삶의 자리를 은혜와 평안으로 지켜 보호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2024년 8월 28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목사 정대진
이사야 43장 1~7절 “두려워하지 말라”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3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요 네 구원자임이라 내가 애굽을 너의 속량물로, 구스와 스바를 너를 대신하여 주었노라 
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7 내 이름으로 불려지는 모든 자 곧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창조한 자를 오게 하라 그를 내가 지었고 그를 내가 만들었느니라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고된 인생 여정을 이어갑니다. 나그네의 숙명이 있습니다. 바로 두려움입니다. 저마다의 광야를 지나는 사람은 누구나 두려움에 빠집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첫 번째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1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1 야곱아 너를 창조하신 여호와께서 지금 말씀하시느니라. 이스라엘아 너를 지으신 이가 말씀하시느니라. 너는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향해 하나님께서 그들을 창조하셨음을 반복하며 강조합니다. 여기서 “창조”로 옮긴 히브리어 단어 <바라>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 나오는 ‘창조’와 동일합니다. 여기서 주목할 사실이 있습니다. 이 단어는 오직 하나님만을 주어로 사용하는 특별한 성격을 지닙니다.

저는 우리나라 화가 중에 이중섭 화백의 그림을 참 좋아합니다. 예전에 기념 전시회를 관람하며 그의 작품들을 차분하게 다시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서 새삼 제 눈을 강렬히 사로잡은 그림이 있었습니다. 바로 화면에 보시는 “두 아이”라는 제목의 작품입니다. <그림 PPT>

이중섭 화백은 캔버스나 종이가 아니라 담배갑 속에 있는 얇은 은박지에 이 그림을 그려졌습니다. 1950년대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가난한 미술가에게 마음껏 그림을 그릴 재료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은박지 위에 자신만의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표현하였습니다. 

이런 작품들을 조금 거창하게 “은지화”(銀紙畵)라고 부릅니다. 미술평론가인 김주삼씨에 따르면 이것은 세계적으로 유례 없는 독특한 표현기법입니다. 그래서 뉴욕현대미술관은 지난 1955년, 한국인 화가 그림으로는 최초로 그의 은지화 세 점을 구입했습니다. 은지화는 다른 누구도 감히 함부로 흉내 낼 수 없는 오직 “이중섭”만이 주어가 되는 아름답고 독창적인 예술품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모두는 하나님께서 지으신 소중한 작품입니다. 가끔 자신이 너무나 초라한 은박지처럼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의 섬세한 손길 가운데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기꺼이 모든 두려움을 이겨 낼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인간의 연약한 내면을 누구보다 잘 알고 도우는 창조주이시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까닭은 하나님께서 신실하게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2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이 구절은 본문이 놓인 문맥과 상황을 고려해 이해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은 마침내 바벨론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주님은 그 광야 길에서 “물과 불”로부터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고대 사회에서 그 둘은 가장 대표적인 자연재해 요소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 섬 지방 대부분은 여전히 무속 신앙이 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오늘날 조선, 항해 기술이 월등히 발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바다로 나아간다는 것은 여전히 공포입니다. 압도적인 자연의 위력과 마주하기 때문입니다. 하물며 수천 년 전에 큰 물을 건넌다는 것은 훨씬 더 두렵고 위험천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성경의 지리 배경인 광야는 밤이 되면 추위가 몰려와서 불을 지피는 것이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런데 잠시라도 불을 소홀히 다뤄서 다른 곳에 옮겨 붙으면 무척 끄기 어렵습니다. 메마른 땅에 삽시간에 불이 번지고 맙니다. 따라서 고대 서아시아 사람들에게 있어 물과 마찬가지로 무척 까다롭고 다스리기 어려운 크나큰 두려움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렇기에 하나님께서는 “물과 불”이라는, 생생한 공포의 실체를 명확하게 언급하십니다. 과거 출애굽 여정에서도 그러하셨듯이 두려움을 이겨 낼 안전을 약속하셨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가며 겪을 모든 위험으로부터 든든하게 지켜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두려움에 떨게 하는 구체적인 “물과 불”은 과연 무엇입니까? 섬뜩하게 새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금세라도 삼킬 것처럼 달려드는 인생의 파도는 무엇입니까? 살기로 가득한 붉은 눈으로 여러분을 노려보는 삶의 불길은 무엇입니까? 

누구에게도 쉽게 말 못할 가정 문제로 남몰래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계시지는 않으십니까? 도무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막막하고 불안하지는 않으십니까? 힘겨운 건강 문제로 염려하고 있진 않으십니까?

그런 여러분 모두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 번 선언합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 어떤 물과 불 속에도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구해주십니다. 언제나 함께 하시며 삶의 길을 올바르게 인도해 주십니다. 

마지막, 세번째로 우리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입니다. 5, 6절 말씀 다함께 한 목소리로 읽겠습니다. 

5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네 자손을 동쪽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쪽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쪽에게 이르기를 내놓으라 남쪽에게 이르기를 가두어 두지 말라 내 아들들을 먼 곳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며 

하나님께서는 동서남북, 온 사방에서 예루살렘으로 당신 백성을 불러 모을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여기서 그들을 가리키는 호칭을 주목해야 합니다. 바로, “내 아들들”, “내 딸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단순히 마음에 쏙 드는 최상급 피조물로 대하지 않으십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인간으로서는 과분한 복입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보다 더 감당 못할 은혜를 주셨습니다. 바로 사람을 당신의 아들, 딸로 삼으신 결단입니다. 

부모에게 이웃집 예쁜 아이와 우리 집 못난 자녀의 차이가 무엇이겠습니까? 무한한 사랑의 대상이냐 아니냐입니다. 아무리 귀여워도 옆집 아이를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사람은 없습니다. 반면에 말 안 듣고 속상하게 해도 내 자식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부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자녀로 부르셨습니다. 그 결과 바보 같은 십자가 사랑이 이루어졌습니다. 

저는 군악대에서 군복무를 했습니다. 그 때 가장 중요한 일과는 각종 군 행사에서 연주할 행진곡을 연습하는 일이었습니다. 특별히 4성 장군이신 저희 부대 사령관님이 참석하는 행사 전날에는 무척 긴장하며 악보를 외웠습니다. 그런 날에는 평소 좀처럼 합주실에서 뵙기 힘들었던 군악대장님이 손수 연습을 지도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매우 인상적인 일이 있었습니다. 군악대장님이 초등학교 저학년 외동딸을 데리고 합주실에 오셨습니다. 아마도 급한 사정으로 딸을 맡겨둘 곳이 마땅치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편의상 그 아이의 이름을 가명으로, “영희”라고 부르겠습니다. 대장님은 딸을 한쪽 구석에 앉히고서는 무척 근엄한 얼굴로 지휘봉을 움직였습니다. 그러다가 대원들의 연주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며 점점 인상을 찌푸렸습니다. 마침내 언성을 높여 부대원들을 크게 꾸짖었습니다. 정적이 흘렀습니다. 그 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앳된 음성이 툭 튀어 나왔습니다.

“아빠! 너무 심한 거 아니야?”

바로 군악대장의 어린 딸, 영희의 천진난만한 목소리였습니다. 의외로 “딸 바보”셨던 대장님은 멋쩍은 미소를 보이셨고, 군악대원은 일시에 웃음을 터뜨렸습니다. 덕분에 나머지 연습을 무사히 마쳤습니다.

여기서 한 번 생각해 볼 부분이 있습니다. 그 날, 그곳에서 군악대장의 말과 행동이 “너무하다.”라고 생각한 사람은 영희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연습 도중에 부대원 중 한 명이, 그것도 이등병이 ‘대장님! 거, 너무 심한 거 아닙니까?’라고 말한다면 그 병사는 어떻게 될까요? 상상만으로도 소름 끼칩니다. 그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깊고 깊은 어둠의 나락에 빠져들 겁니다. 

더 정확히는 애초에 그런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엄두조차 낼 수 없습니다. 이등병에게 군악대장이란, 두려움으로 맺어진 철저한 계급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같은 말을 영희가 했을 때는 전혀 불이익이 없었습니다. 마음이 풀어졌습니다. 왜 그럴까요? 바로 사랑하는 ‘딸’이 한 말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당신의 아들, 딸로 삼아 주셨습니다. 얼마나 놀랍고 위대한 은혜입니까? 더욱이 본문 속 이스라엘 상황을 다시금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왜 그들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불러 모으셨을까요? 

이스라엘이 오랫동안 하나님을 대적하고 그분 뜻을 업신여겨 심판을 받았습니다. 나라를 잃고 포로가 되어 뿔뿔이 흩어졌습니다. 당신 백성을 사랑하는 아들딸로 여기며 불러 모으신 하나님의 모습 이면에는, 당신의 사랑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멸시하는 인간의 어리석음과 죄악이 녹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이 우리를 한없이 사랑하시는 까닭은 사랑 받을 만 해서가 결코 아닙니다. 너무도 연약하고 부족하지만, 전혀 사랑스럽지 못한 죄악으로 가득하지만, 그럼에도 우리를 사랑하시고 당신 곁으로 불러 모으셨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인생 여정은 언제, 어느 곳을 지나든지 우리를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함께 걷고 있음을 분명히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따라서 “두려워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을 그 어떤 순간에도 마음 깊이 품고 담대히 나아가시길 축복합니다. 


우리는 나그네입니다. 걸음마다 불안과 염려로 가득합니다. 그 모든 두려움 가운데 우리의 창조주이시고 신실한 인도자이시며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함께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떤 순간에도 주님의 작품이자 자녀 된 기쁨과 감사를 끌어 안으시길 소망합니다. 그 믿음으로 삶의 여정을 힘차게 이어가는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사랑으로 자녀들을 지으시고 날마다 돌보시는 아버지 하나님.
인생의 고된 나그네 길을 지나며 두려움에 사로잡힙니다. 수없이 지치고 낙심합니다. 그런 저희를 주님께서 내버려 두지 않으시고 신실하게 지켜 보호하심을 믿습니다. 
하나님과 함께 기쁨으로 믿음의 길을 걷기 원합니다. 그 어떤 광야 길에도 주님의 은혜와 평강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