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월 25일 토요일

창세기 31장 묵상

5 그러고는 그들에게 말했다. “내가 장인어른의 얼굴빛을 살펴보았어요. 나를 대하시는 것이 엊그저께 같지 않아요. 그러나 내 아버지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셨어요."

12b "라반이 너에게 한 짓을 내가 다 보았다. 13 나는 베델의 하나님이다. 네가 거기서 기둥에 기름을 붓고, 거기서 나에게 단단히 약속했지. 이제 일어나 이 땅에서 빠져나가 네가 태어난 곳으로 가거라.’”

24 그런데 하나님이 시리아 사람 라반에게 그날 밤 꿈에 오셔서 말씀하셨다. “조심해라. 야곱에게 좋게든 나쁘게든 아무 말도 하지 않도록 해라!”

42 "제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자 이삭이 무서워했던 분이 저를 위해 주지 않으셨더라면, 이제 장인어른이 저를 빈털터리로 내보내셨을 것입니다. 제가 고생하고 손이 닳도록 일한 것을 하나님이 보셨고, 지난밤에 판가름하셨습니다.”
창세기 31장 5, 12b~13, 24, 42절(새한글 성경)

[묵상]
야곱에게 라반은 구원자이자 독재자이다. 삼촌이며 장인이자 가혹한 착취를 일삼는 악덕 기업주이다.

야곱에게 절대적인 존재인 라반의 얼굴빛이 변했다. 그가 처한 상황이 더욱 어두워질 신호이다. 하지만 '아버지의 하나님'이 그와 함께하신다.

하나님은 지금껏 라반이 한 짓을 보셨다. 그뿐만 아니라 라반에게 나타나 야곱을 보호하신다.

이 모든 은혜의 바탕에는 지난날 야곱이 베델에서 했던 언약이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아브라함과 이삭과 맺은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당장 우리 눈앞의 라반이 아무리 강력해 보여도 두려워하지 말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보시고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 하시어 선을 이루신다.

라반이 되는 걸 두려워하자.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맺으신 언약을 명심하자. 벧엘에서 주님께서 보이신 신실하심을 신뢰하자.

2025년 1월 24일 금요일

민수기 27장 1~11절, "담대한 기도"

2025년 1월 20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민수기 27장 1~11절, "담대한 기도"

1 요셉의 아들 므낫세 종족들에게 므낫세의 현손 마길의 증손 길르앗의 손자 헤벨의 아들 슬로브핫의 딸들이 찾아왔으니 그의 딸들의 이름은 말라와 노아와 호글라와 밀가와 디르사라 
2 그들이 회막 문에서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과 지휘관들과 온 회중 앞에 서서 이르되 
3 우리 아버지가 광야에서 죽었으나 여호와를 거슬러 모인 고라의 무리에 들지 아니하고 자기 죄로 죽었고 아들이 없나이다 
4 어찌하여 아들이 없다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이 그의 종족 중에서 삭제되리이까 우리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우리에게 기업을 주소서 하매 
5 모세가 그 사연을 여호와께 아뢰니라 
6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7 슬로브핫 딸들의 말이 옳으니 너는 반드시 그들의 아버지의 형제 중에서 그들에게 기업을 주어 받게 하되 그들의 아버지의 기업을 그들에게 돌릴지니라 
8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사람이 죽고 아들이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딸에게 돌릴 것이요 
9 딸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10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그의 아버지의 형제에게 줄 것이요 
11 그의 아버지의 형제도 없으면 그의 기업을 가장 가까운 친족에게 주어 받게 할지니라 하고 나 여호와가 너 모세에게 명령한 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판결의 규례가 되게 할지니라


이른 새벽, 갈급한 마음으로 예배로 나아가는 걸음을 주님께서 기뻐 받으실 줄 믿습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에 있는 민수기 26장은 두 번째 인구 조사를 기록하였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민수기”라는 우리말 성경의 이름 자체가 ‘백성의 숫자를 센 기록’이라는 뜻입니다. 이는 우리나라 신앙 조상들이 민수기의 핵심을 백성의 수를 헤아린 것으로 이해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내용은 민수기가 지닌 삶의 자리를 보여줍니다. 바로 철저한 가부장 문화입니다.

이스라엘의 족보는 남성들의 이름을 기록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람들의 숫자 역시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계산합니다. 이것을 좀 극단적으로 이해하자면, 당시 사람들은 성인 남성만을 완전한 한 인격으로 여겼음을 보여줍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의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하나님의 말씀이지만 사람들의 손길을 거쳐 완성되었습니다. 따라서 성경 안에는 그 시대의 한계와 약점이 녹아있습니다. 그러 까닭에 남성 중심의 서술이 자주 등장합니다. 그 대표적인 대목이 바로 본문 앞, 26장의 인구조사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에 바로 이어지는 27장은 매우 도발적인 내용을 보여 줍니다. 요셉의 아들인 므낫세 지파의 자손들 중 슬로브핫의 딸 다섯 명이 모세와 제사장 앞에 찾아와 자신들의 억울함을 하소연 하였습니다. 본문 3~4절을 새한글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3 “우리 아버지는 광야에서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는 여호와께 맞서 모였던 고라흐 무리에 들지는 않았고, 자신의 죄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없습니다. 4 아들이 없다고 아버지 이름을 가문 가운데서 빼내려 하시다니, 어떻게 그럴 수 있나요? 아버지가 차지했던 땅을 우리에게 주셔서, 우리가 아버지 형제분들 가운데 머물게 해 주십시오.”

우리는 이와 같은 탄원을 통해 26장에 기록된 인구 조사의 성격을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단순한 통계 파악이 아닙니다. 가나안에 들어가 땅을 분배하기 위한 사전작업이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말씀드렸다시피 그 목록은 남자들 위주로 기록되었습니다. 따라서 아버지나 아들, 혹은 남자 형제가 없는 여인들은 약속의 땅에 들어가도 삶의 기반을 갖지 못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슬로브핫의 딸들은 생존권을 요구하며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중요한 대목이 있습니다. 성인 남성을 기준으로 한 인구 조사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시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민수기 26장 1~2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1 염병 후에 여호와께서 모세와 제사장 아론의 아들 엘르아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2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의 총수를 그들의 조상의 가문을 따라 조사하되 이스라엘 중에 이십 세 이상으로 능히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를 계수하라 하시니”

이 말씀을 보면 “전쟁에 나갈 만한 모든 자” 즉, 성인 남성이라는 기준을 어떤 사람이 아닌, 주님께서 정하셨습니다. 그런데 슬로브핫의 딸들은 그 기준에 반기를 들었습니다. 즉,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문을 제기 하였습니다. 게다가 그들이 자신들의 억울함을 토로하는 장소는 모세가 혼자 있는 집무실이 아닙니다. 본문 27장 2절에 따르면 그곳은 모세와 제사장 엘르아살은 물론이고, 이스라엘의 온 회중이 모인 회막문 앞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슬로브핫의 딸들은 온 이스라엘 백성 앞에서 감히 하나님의 말씀에 반기를 드는 위험천만한 행동을 감행하였습니다. 그날 회막 문에 모인 백성 사이에 몰아닥친 싸늘한 냉기를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사람들 대다수는 그 여인들을 노려보며 불쾌함과 노여움을 감추지 않았을 겁니다. 거기에 조금이라도 불꽃이 튀었다가는 어떤 폭력적인 상황이 일어날지 아무도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하지만 그들은 기꺼이 위험을 감당하였습니다. 그만큼 지금 그들의 삶에 닥친 어려움이 극에 달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장면은 우리로 하여금 올바른 기도의 자세를 다시 돌아보게 합니다. 본문을 비롯한 성경 곳곳의 기록들, 그 중에서도 시편에 담긴 탄원시들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되는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는 기도는 얌전한 종교의식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점잔을 빼면서 고상한 모습으로 기도할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아무런 욕망이 없는 창백한 사람으로 자기를 속이는 기도 역시 바라지 않으십니다.

지금 저마다의 삶 속에서 부딪히는 가장 치열한 문제들, 우리 내면을 갉아 먹는 제일 힘겨운 상황들, 존재와 믿음의 중심을 흔드는 험난한 문제들을 있는 그대로 안고 주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그 모든 것을 과감히 그리고 솔직하게 토로해야 합니다. 담대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우리 삶을 진정으로 변화시키는 하나님의 손길이 온전히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본문 5절 말씀에 따르면 모세는 슬로브핫의 딸들이 외친 사연을 주님께 전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7절 말씀을 새한글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7 “슬로브핫의 딸들이 옳은 말을 한 것이다. 아버지가 차지했던 땅을 그 딸들에게 주어서, 딸들이 아버지 형제들 가운데서 머물게 해 주어라. 아버지가 나누어 받은 땅이 딸들에게 넘어가게 해 주어라.

슬로브핫의 딸들이 담대하게 요구한 내용에 대해 하나님은 불쾌해 하거나 분노하지 않으셨습니다. 도리어 그들의 기도에 경청하셨을 뿐만 아니라 앞서 당신께서 하신 말씀을 수정하셨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의 오류를 인정하셨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처럼 말을 바꾸시는 하나님의 모습이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어쩌면 이러한 장면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신뢰를 흔드는 변덕스러운 모습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사랑이신 하나님의 성품 자체는 결코 변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그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다가오시는 말씀과 행동은 역동적으로 달라집니다. 그 대상이 너무나 연약한 죄인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까이 다가오시며 당신을 낮추시는 주님의 모습은 시시각각 다를 수 밖에 없습니다.

바로 여기에 연약한 우리가 감히 하나님께 당돌히 기도할 수 있는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화석처럼 굳은 얼굴로 다가오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은혜의 규칙과 신앙의 방식은 결코 그 자체가 영원불변한 족쇄가 아닙니다. 저마다 복잡한 삶 속에 구하는 기도에 따라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또 바꾸길 원하시는 것이 주님의 뜻이자 죄인들을 향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이렇듯 본문 속에 기록된, 용기있는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자녀들의 곤란한 처지에 귀 기울이시며 구체적인 삶의 길을 배려하시는 하나님. 우리의 모든 기도에 귀 기울이시며 언제나 반응하고 응답하시는 주님께 온 마음을 열고 달려 나가는 모두가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하며 축복합니다.

기도
자녀들이 드리는 어떤 기도에도 언제나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저마다 짊어진 고단한 삶의 무게를 주님께서 그 누구보다 잘 아실 줄 믿습니다. 험난한 아픔과 시련을 가지고 주님께 나아가 당돌한 기도를 드린 슬로브핫의 딸들처럼 우리 역시 담대히 하나님께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온전한 응답을 경험하는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월 20일 월요일

창세기 30장 묵상

22 하나님이 라헬을 기억하셨다. 하나님이 그의 말을 들어 주셔서 아기집을 열어 주신 것이다. 23 그래서 라헬이 아이를 가져 아들을 낳고는 말했다. “하나님이 나의 창피함을 없애 주셨구나.” 24 아이의 이름을 요셉이라고 지어 부르면서 말했다. “여호와께서 내게 아들을 하나 더해 주시기를!”
창세기 30장 22~24절, 새한글 성경

<묵상>
얼핏 감동적인 기도 응답처럼 보인다. 물론 사실이다. 난임으로 수치 당하던 라헬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기억하사 그녀에게 아들을 주셨다. 매우 극적인 순간이다.

하지만 창세기 이야기는 요셉 출산을 둘러싼 자매간 치열한 경쟁을 함께 보여준다. 성경은 영웅주의를 경계한다. 라헬을 숭고한 신앙인으로 꾸미지 않는다. 욕망에 사로잡힌 연약한 본성을 함께 기록한다.

이러한 현실성이 성경을 읽는 이들에게 더 큰 위로를 준다. 애써 자신을 포장할 필요 없다. 완벽해지려 몸부림치지 말아야 한다. 대신 자신을 잘 들여다보며 그을린 영혼으로 하나님께 토로해야 한다.

그런 우리 탄식을, 헛헛한 공백을,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기억하신다.

2025년 1월 18일 토요일

창세기 29장 묵상

31 여호와께서 보시니, 레아가 사랑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아기집을 열어 주셨다. 그러나 라헬은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창세기 29장 31절, 새한글 성경

<묵상>
하나님께서 보셨다. 남편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초라함을, 여동생과 비교당하는 비참함을.

'그래서' 주님은 레아의 아기집을 열어주셨다. 영광스러운 생명의 선물을 안겨주셨다.

'그러나' 그녀의 동생, 남편의 극진한 사랑을 받던 라헬은 정작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 라헬만의 또 다른 절망에 빠졌다.

인생의 빛깔은 단색이 아니다. 내내 눈부시거나 항상 음울하지 않다. 찬란한 성취에 으쓱거리거나 처량한 실패에 움츠러들지 말자.

그래서, 그러나, 하나님께서 다양한 접속사로 우리 삶을 조율하고 이끌어 가신다. 사랑 어린 눈길로 바라보시고 품어주신다.

예수님이 살았던 세상(IVP, 2024) 서평






나는 신학교에서 흙 내음을 맡았다. 예수님은 유령이 아니다(마 14:26~27). 땅을 밟고 햇살을 받으며 살아가셨다. ‘살아감’, 예수님과 그분의 복음을 이해하기 위한 핵심이다. 1세기 서아시아와 로마의 시대상을 알아야 하는 이유다. 그런 까닭에 『예수님이 살았던 세상』 출간 소식을 듣고 무척 반가웠다.

다루는 주제뿐만 아니라 책의 만듦새도 무척 마음에 들었다. 아들이 좋아했던 각종 ‘도감’과 비슷하다. 큼지막한 종이에 예수님 당시 시대상이 세련된 삽화와 편집으로 펼쳐져 있었다. 어린아이가 신비로운 눈길로 공룡과 중장비의 세계에 빠져들 듯, 나는 책장을 넘기며 예수님이 살았던 세상을 흥미롭게 들여다보았다.

이 책의 가장 큰 장점은 ‘정리’다. 성경 배경을 소개하는 학술서는 많다. 대부분 유익하지만, 방대한 양에 위축되거나 가독성이 떨어진다. 반면에 이 책은 복음서를 읽으며 자연히 궁금해지는 정보들을 일목요연하게 추렸다. “유대 민족”, “로마의 통치 체계”와 같은 거시적인 사회 체계뿐만 아니라 “식물”, “어업”, “농업”과 같은 생활상도 함께 소화한다. 결정적으로 “십자가 처형”과 “죽음과 매장”에 대해 매력적인 그림과 함께 설명하며, 예수님의 복음을 생생하게 드러내고자 하는 책의 목적을 분명히 한다.

두 저자의 안내를 따라 매력적인 여행을 하며 소원이 생겼다. 이제 막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어린 아들도 언젠가 이 흥미로운 여정에 함께 하길 바랐다. 문득, 책의 첫 장에서 저자가 아들들과 부모님께 바친 감사의 글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직접 언급하진 않았지만, 어린이 혹은 청소년 그리스도인들이 성경 속 세계에 호기심을 품고 보다 흥미롭게 ‘탐험’하길 바라는 의도가 뜨겁게 와 닿았다.

저자는 그런 바람을 책의 가장 마지막 문단에서 이렇게 애정을 담아 적는다.

“자, 그럼 이제 여러분이 직접 복음서를 읽어보세요! 예수님에 관한 이야기들과 예수님이 하신 이야기들, 그리고 예수님이 언급하신 사물들에 대해 읽고 생각해 보세요. 꾸준히 읽으세요! 탐구를 계속하고, 배우기를 멈추지 마세요!”

정확히 내가 아들에게, 그리고 이제 막 신앙 여정에 발걸음을 내디딘 이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이 글을 쓰며 깨닫는다. 나는 이 책의 내용과 형식 못지않게 저술 태도에 크게 감동했다. 저자들과 같은 포근한 마음으로 예수님이 살았던 세상에서 펼쳐진 아름다운 복음 이야기를 증언하는 것이 목회자로서 가장 중요한 소명임을 다시금 확인한다.

언젠가 아들이 이 책을 펼쳐 들고 흥미롭게 이쪽저쪽을 들춰보았으면 좋겠다. 예수님을 유령으로 오해해 겁에 질려 허공에 손을 휘두르지 않길 바란다. 그 대신 주님의 손을 맞잡고 뜨거운 체온을 느끼며 함께 걸어가길 기대한다. 그렇게 복음을 품고 자기에게 주어진 세상을 생기있게 살아가길 축복한다. 아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다른 이들 역시 흙냄새를 맡길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