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1월 5일 월요일

창세기 29장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2026년 1월 6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9장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찬송가 299, 300장

야곱은 벧엘을 떠나 다시금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 허겁지겁 무겁게 걸음을 옮겼습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의 충만한 임재를 경험하긴 했지만 다시금 현실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전히 많은 불안과 염려가 그의 마음을 짓눌렀습니다. 그의 눈에 우물이 보였습니다. 고대 서아시아에서 우물은 단순히 물을 긷는 곳만이 아니라 정보를 공유하는 장소입니다. 야곱은 그곳에 모인 목자들에게 어디서 왔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들은 ‘하란’에서 왔다고 답을 합니다. 그는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다는 감격적인 사실을 안도하며 확인하였습니다.

바로 거기서 야곱은 라반의 딸 라헬을 만났습니다. 무사히 도망을 마쳤다는 안도감, 뒤늦게 찾아온 공포, 어머니를 향한 그리움 등이 복잡하게 마음에 뒤엉켰을 겁니다. 그 순간, 그의 눈 앞에 있는 라헬은 단순한 친척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희망 그 자체입니다. 그런 까닭에 라헬과 운명적인 사랑에 빠집니다. 게다가 그녀의 고운 외모는 그의 마음에 더욱 불을 지켰습니다. 

그런 까닭에 성경 전체에서 가장 낭만적인 문장이 본문에 나옵니다. 바로 “칠년을 며칠 같이”입니다. 라헬을 아내로 얻기 위해 라반에게 노동한 7년의 긴 세월을 야곱은 불과 짧은 사나흘로 여겼습니다. 누군가를 향한 진실한 사랑을 눈부시게 묘사한 문장입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씁쓸한 상실과 아픔이 존재합니다. 바로 라헬의 언니 레아가 겪은 고통입니다. 

17절은 레아를 가리며 ‘시력이 약하다.’라고 소개합니다. 해당하는 히브리어 원문의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새번역과 공동번역 성경은 둘 다 ‘눈매가 부드럽다’라고 옮겼습니다. 그런데 문맥과 맥락상 라헬의 예쁜 외모와 대조하는, 그리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겉모습을 묘사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게다가 라반이 야곱을 속여 억지로 그의 침실에 레아를 들여보냈습니다. 그럴 정도로 그녀는 정상적인 과정으로 결혼하기 힘든 결격사유가 있었음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습니다.

레아는 자라오며 끊임없이 동생과 비교당하며 마음에 수없이 많은 멍이 들었을 겁니다. 결정적으로 라헬 대신 첫날 밤을 치른 다음날 아침, 당황하고 분노하는 야곱을 보며 이루 말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꼈을 겁니다. 당연히 그 이후에도 정상적으로 부부간의 정을 나눌 리가 없습니다. 레아는 아무런 잘못이 없지만 야곱으로서는 그녀가 칠 년을 더 노동하게 한 원망의 대상이기 때문입니다. 한 여자로서 너무나 비참하고 힘겨운 인생입니다. 동시에 성경은 그런 레아를 향한 놀라운 은혜를 함께 기록합니다. 31절 함께 읽겠습니다.

31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 라헬은 자녀가 없었더라

창세기를 비롯해 성경 전체에서 무수히 반복되는 하나님의 행동이 있습니다. 주님은 자녀들의 아픔을 보고 들으시고 반응하십니다. 레아에게도 그러하셨습니다. 그녀의 사랑 받지 못함을 보셨습니다. ‘사랑 받지 못하다.’는 이 문장 안에 너무나 짙은 상처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단순히 남녀 간의 감정 문제가 아닙니다. 레아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깊고 깊은 절망을 드러내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습니다. 무려 여섯 아들을 낳았습니다. 게다가 그 중 유다의 아들로 메시아가 태어나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우리가 사랑 받지 못함을 보셨고 보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도무지 해결되지 못하고 지우지 못한 영혼 깊은 상처를 들여다 보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그 사랑에 응답하시어 사랑의 열매를 안겨주신다는 사실 또한 마음 깊이 품고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하나님 나라 복음을 전하셨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 지를 온 세상에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삶의 모든 비참한 좌절과 아픔을 이겨내고 생명의 통로로 살아가는 저희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참 사랑의 주 하나님.
가족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힘들고 눈물겨운 삶을 살아왔던 레아의 아픔을 주님께서 보시고 응답하셨음을 말씀으로 살펴보았습니다. 아름답고 위대한 생명의 결실을 그녀에게 안겨주셨듯이 저희에게 아기 예수님을 보내주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예수님께서 전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모든 슬픔을 이겨내고, 새로운 길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6년 1월 4일 일요일

창세기 28장 “가장 깊은 밤에 이룬 만남”

2026년 1월 5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8장 “가장 깊은 밤에 이룬 만남” 찬송가 390, 393장

결국 야곱은 도망칩니다. ‘야곱을 죽이겠다.’라는 에서의 다짐이 허언이 아니라는 걸 리브가는 잘 알고 있었습니다. 아들들이 서로를 죽고 죽이는 비극이 일어나게 둘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로서 최선은 야곱을, 멀리 있는 오빠 라반의 집으로 피신 보내는 것입니다. 야곱은 한 순간에 도망자 신세가 됩니다. 부유한 족장 가문에 태어나 어머니의 보호 아래 삶의 온기를 즐기던 그가 두려움과 불안에 사로잡혀 돌을 베개 삼아 처량하게 광야에서 잠 들었습니다. 

그런 야곱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꿈에서 하나님의 천사들이 하늘과 땅을 오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12절에 그 모습을 묘사하며 언급한 ‘사닥다리’, 즉 사다리는 다소 불확실한 번역입니다. 고대 서아시아 유물에서 흔히 보이는 층계로 이해하는 게 자연스럽습니다. 천사들이 수직이 아니라 경사를 타고 오고 갔습니다. 이 모습이 알려주는 바는 분명합니다. 그는 지금 홀로 있지 않습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십니다. 조금 길지만 13~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3 또 본즉 여호와께서 그 위에 서서 이르시되 나는 여호와니 너의 조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라 네가 누워 있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14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이 되어 네가 서쪽과 동쪽과 북쪽과 남쪽으로 퍼져나갈지며 땅의 모든 족속이 너와 네 자손으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15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너를 지키며 너를 이끌어 이 땅으로 돌아오게 할지라 내가 네게 허락한 것을 다 이루기까지 너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당신을 두고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이라고 소개합니다. 야곱 입장에서는 ‘할아버지의 하나님, 아버지의 하나님’입니다. 이어서 3대에 걸쳐 반복되는 언약을 말씀 하십니다. 땅과 자손으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사실 야곱 입장에서는 너무나 막막한 이야기입니다. 당장 목숨이 위태롭습니다. 고생 끝에 외삼촌 라반이 살고 있는 하란에 도착한다 할지라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만남이 그의 마음에 생생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감탄사’를 주목해야 합니다. 먼저 12절에 “꿈에 본즉”, “또 본즉” 이렇게 ‘본즉’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옵니다. 13절에도 앞부분에 “또 본즉”이라고 나옵니다. 그리고 개역개정 성경이 따로 번역을 하지 않았지만 같은 히브리어 단어가 15절 앞부분에도 한 번 더 나옵니다. 그런데 이 말은 단순히 ‘본다’라는 동사가 아닙니다. “보라!”라는 의미의 감탄사입니다. 그냥 “와!”라고 옮길 수도 있습니다. 

야곱은 경외감에 연신 탄성을 내뱉었습니다. 더 이상 하나님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들려준 이야기 속의 신이 아닙니다. 그의 삶 깊숙이 찾아오셔서 위대한 약속을 선언하고 이끌어주시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이 때, 야곱의 상황을 다시금 염두에 둬야 합니다. 그가 주님을 만나고자 애쓰고 부르짖었을 때가 아닙니다. 아브라함의 손자라는 우월감에 취해, 그럴듯한 종교의식을 치르고 있을 때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완전히 지워진 채, 인생의 가장 깊은 어둠 속에 허우적 거릴 때입니다. 바로 그 때 주님이 돌연히 야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란으로 숨 가쁘게 달리다 지쳐 어두운 밤을 만나곤 합니다. 돌의 싸늘하고 딱딱한 촉감에 머리를 누이며 시린 잠을 청하곤 합니다.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그 절망의 가장 깊은 중심에서 하나님의 위대한 희망이 움터 오릅니다. 도저히 주님의 손길을 기대할 수 없는 어둠 한복판에서 따스한 언약이 선포됩니다. 마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이 지닌 위대한 역설과 같은 이치입니다. 이와 같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새 힘과 용기를 품고 살아가는 모두가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벧엘의 하나님
인생의 깊고 깊은 밤, 돌베개를 베고 잠든 야곱에게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을 말씀으로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저희 삶의 가장 어두운 순간에 비추실 찬란한 영광을 기대하고 소망합니다. 십자가와 부활로 선언하신 위대한 언약을 마음에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인생 여정에 돌연히 찾아오시는 주님과 만남을 소중히 여기며 새 힘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6년 1월 2일 금요일

창세기 27장 “욕망을 넘어서는 신뢰”

2026년 1월 3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7장 “욕망을 넘어서는 신뢰” 찬송가 542, 543장

창세기 27장은 25장과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미 이삭의 쌍둥이 아들, 야곱과 에서의 출생 그리고 성장한 후 극명히 다른 두 사람의 성향을 확인하였습니다. 에서는 태어나면서부터 온몸에 붉은 털로 가득한, 외향적인 사냥꾼입니다. 그는 아버지 에서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반면 형의 발뒷꿈치를 잡고 태어난 야곱은 조용하고 차분하여 집안일에 능숙한 사람입니다. 그는 어머니 리브가의 편애를 받았습니다. 둘 사이의 극명한 성격차이는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기고 붉은 죽에 동생에 팔아넘긴 사건으로 상징적으로 드러납니다.

시간이 흘러 이삭이 무척 노쇠해 졌습니다. 차츰 죽음이 가까웠다는 사실을 점점 더 짙게 흐려지는 시야로 확인했습니다.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아버지로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사랑하는 에서를 부릅니다. 바로 축복입니다.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별거 아닌, 말 몇마디 덕담으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제사장에 준하는 권위를 부여했던 옛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의식입니다. 

에서는 이삭에게 평소처럼 사냥을 해서 그가 평소 즐기는 맛있는 요리를 해 달라고 합니다. 음식을 먹고 마음껏 축복하겠다고 약속합니다. 여기서 확인할 수 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이삭의 왜곡된 사랑입니다. 분명 쌍둥이가 아내 뱃속에 있을 때, 주님께로부터 ‘큰 자가 어린 자를 섬기리라’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하지만 무척 엄중한 자녀 축복의식을 두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다른 가족과 전혀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평소 자기 뱃속을 흡족하게 채운 큰 아들에 대한 편애로 일방적으로 결정했습니다.

아내 리브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편이 큰 아들에게 속닥거리는 소리를 듣고 계획을 세웁니다. 함께 주방일을 하며 정이 듬뿍 든 둘째 야곱을 부릅니다. 집에서 키우는 염소 새끼 두 마리를 가져오라고 하였습니다. 야곱이 형인척 동물 가죽을 입고, 리브가가 요리한 평소 이삭이 좋아하는 음식을 가지고 아버지에게 가라고 말했습니다. 그녀 또한 이삭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묻지도, 가족과 상의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감정에 따라 음모를 꾸며 아들과 함께 남편을 속였습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말 그대로 하였습니다. 혹여나 아버지가 자기를 알아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침을 꼴깍 삼키고, 음식을 든 손을 바들바들 떨며 아버지의 장막에 들어갔습니다. 이삭은 목소리를 듣고 의아해했으나 야곱이 몸에 두른 털을 만지고 에서로 여겼습니다. 본문에서 이삭은 계속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언급합니다. 앞서 보여준 에서의 식탐이 아버지 영향 아래 있음을 암시합니다. 이삭 역시 맛있는 음식이 안겨주는 욕망에 마음이 뺏겨 하나님의 언약 안에 가정을 화평하게 이끌 책임을 소홀히 하고 말았습니다.

이후 벌어진 일들을 우리는 이미 창세기를 통해 잘 알고 있습니다. 형이 동생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 벌여졌던 비극이 다시 일어날 위기에 처했습니다. 이를 막기 위해 리브가는 야곱을 멀리 있는 오빠 집에 보냅니다. 그후 야곱과 다시는 만나지 못합니다. 눈물 겨운 생이별입니다. 야곱은 부모의 집을 떠나 눈물겨운 고생을 합니다. 에서와 화해하기 까지 생의 먼길을 돌아갑니다. 

이렇듯 온 집안을 덮친 비극의 뿌리는 가족들이 성급하게 저마다의 욕망을 따라 움직인데 있습니다. 그들은 차분히 각자와 가정을 향한 하나님의 뜻을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당장의 감정과 욕구를 더 우선시 하였습니다. 그 결과 가족 모두가 깊은 고통과 슬픔에 잠기고 말았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을 끊임없이 조급하게 몰아붙입니다. 당하거나 뺏기지 않으려면 서둘러 음모를 꾸미고 꾀를 내야 한다고 닦달합니다. 그러한 세상의 소음과 내면을 불안을 말씀으로 내려 놓으시길 바랍니다. 잠잠히 말씀과 기도로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놀라운 계획을 이끄시고 이루시는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며 나아가는 오늘 하루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신실하게 언약을 이루시는 하나님
저마다의 얕은 계산과 조급한 욕망으로 결국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이삭 가족이 겪은 비극을 말씀으로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의 어리석음을 반복하지 않게 하여 주시옵소서. 마음 깊은 교훈을 삼으며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가정과 이웃과 교회를 평강으로 돌보는 지혜와 믿음을 주시옵소서. 보내신 공동체를 향한 주님의 놀라운 언약을 신실하게 이루는 자녀로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창세기 26장 “그 밤에 나타나신 하나님”

2026년 1월 2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6장 “그 밤에 나타나신 하나님” 찬송가 433, 438장

하나님께서 이삭에게 복을 주셨습니다. 아버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농사와 목축 모두 성공적인 결실을 그에게 안겨주었습니다. 그 결과 많은 종도 두었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그로 인해 그가 겪었던 시련 또한 함께 묘사합니다.

흔히 오해하듯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의 결과는 화려한 번영이 아닙니다. 그 반대입니다. 이삭은 그가 머물러 살던 블레셋 사람들에게 시기를 받았습니다. 특히나 26장 1절에 따르면 그곳에 큰 흉년이 있었기에 더욱더 이삭의 성공을 눈에 가시처럼 여겼습니다. 급기야 그들은 아브라함의 종들이 팠던 이삭의 모든 우물을 막았습니다.

매우 치졸한 행동입니다. 우물은 광야 생활에서 생존을 좌우하는 매우 중요한 자원입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우물을 관리할 힘은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이삭을 가만히 두고만 볼 수 없었습니다. 자기들이 소유할 수 없다면 망쳐버리는 몹시 악한 행동을 실천으로 옮겼습니다. 더 나아가 그들의 왕 아비멜렉은 이삭을 그 땅에서 쫓아냈습니다.

이러한 장면을 통해 분명히 확인하게 됩니다.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더 나아가 하나님께 복과 은혜를 입었기에 오히려 억울한 시련을 겪게 됩니다. 동시에 깨달음에 이릅니다. 갑작스럽게 엄습하는 고난은 역설적으로 우리가 주님께 사랑받는 자녀라는 사실을 증명해 줍니다. 따라서 도무지 납득하지 못할 고통 가운데 오히려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도무지 기대 못한 눈부신 영광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이삭은 고난의 여정을 떠납니다. 16절에 보면 아비멜렉이 그에게 자기들보다 크게 강성했다고 말합니다. 이삭이 가진 많은 종들을 불러 모아 위협하고 싸움을 벌인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더 이상 그를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그랄 골짜기로 떠납니다. 묵묵히 참고 인내하며 다툼을 피했습니다. 많은 손해를 감수하고 희생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시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골짜기에서 새로 판 우물을 그랄 목자들이 탐내 시비를 걸었습니다. 결국 이삭은 또 다른 우물을 팠습니다. 그 우물마저도 또 분쟁 거리가 되었습니다. 이삭은 한 번 더 우물을 팠습니다. 성경이 이 상황을 상세하게 묘사하진 않습니다. 하지만 우물을 옮길 때 마다 무척 많은 번민과 고민이 그를 덮였을 겁니다. 이루 말할 수 없이 비참하고 초라했을 것입니다. 마침내 모든 고난이 멈추었습니다. 안도와 탄식이 뒤섞인 밤 하나님께서 그에게 찾아와 말씀 하십니다. 24절 함께 읽겠습니다.

24 그 밤에 여호와께서 그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네 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이니 두려워하지 말라 내 종 아브라함을 위하여 내가 너와 함께 있어 네게 복을 주어 네 자손이 번성하게 하리라 하신지라

하나님께서 이삭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에게 나타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위로하십니다.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마찬가지로 자손이 번성하는 복을 약속하십니다. 주님의 위대한 언약이 아버지를 거쳐 이삭에게 눈부시게 드러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거듭 명심해야 합니다. 이토록 찬란한 장면은 이삭을 한없이 비참하게 한 고난 끝에 피어올랐습니다. 참고 물러서고 내어줄 때 진정 승리하고 성취하였습니다. 마치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 보여주는 위대한 역설과 비슷합니다.

그러므로 연거푸 우물을 빼앗긴 이삭과 같은 상실과 아픔, 불안과 공포에 빠질 때, 주님께서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세우신 언약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길 바랍니다.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복을 주시고 생명이 번성하게 되는 은혜를 더하여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참 승리의 주 하나님
하나님이 주시는 참된 복과 영광은 시련과 패배와 좌절의 현실을 딛고 찾아온다는 진리를 말씀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연달아 우물을 뺏긴 이삭에게 주님께서 찾아오시어 위로하셨듯이, 오늘 저희 삶 깊숙이 다가오시어 ‘두려워 말라’라고 위로하심을 믿습니다. 말씀으로 참된 힘을 얻게 하시며, 십자가의 복음으로 새해를 힘차게 열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31일 수요일

2025년 감사, "두 개의 골짜기"



 
10년 전 일이다. 우연히 만난 어른께서 당신 방에 걸린, 겸재 정선의 "금강전도" 가리키며 내게 말씀하셨다.
"자네, 산이 왜 아름다운지 아는가?
굽이굽이 골짜기가 있기 때문이라네"
그 순간, 인생을 조망하는 값진 깨우침을 얻었다.

지난 한 해, 내 목회 여정에 가장 깊은 골짜기가 움푹 패였다.
애처로운 영혼이 비장하게 외치는 압박을 받았다.
그 어이없는 파장에 거칠게 휩쓸렸다.
감사하게도 그 물결로 말미암아 정배교회 담임 청빙을 받았다.

허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청빙 결정 후 사임 날까지 또 다른 골짜기가 새겨졌다.
헛헛한 쓴웃음을 내쉬며 어지럽게 소용돌이에 휩쓸렸다.
또한 감사하게도 그 모두를 덮는, 과분한 환대와 사랑 속에 부임하고 적응하는 중이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한 해를 보냈다.
두 개의 골짜기를 힘겹게 지나며 더욱 다져지고 단단해져 가고 있음을 느낀다.
예상치도 못한 기괴한 시련에 대한 아픔과, 그로 말미암아 내게 가장 합당한 길로 이끄시는 은혜를 동시에 고백한다.

그렇게 지나온 시간에 소중한 힘이 되준 사랑하는 이들과 벗들에게, 한 해를 마무리하며 진심으로 감사를 표한다.
골짜기를 아우르는 웅장한 산 풍경을 바라볼 수 있어서, 인생의 진정한 아름다움에 생생히 눈을 뜰 수 있어서 참으로 감사하다.
그리고 내게 (그가 업신여겼던) '글쓰기'라는 무기가 있어 더욱 감사하다.

덧. 이 글도 그가 몰래 훔쳐볼 지 궁금하다.
지난번처럼 또다시 실수로 '좋아요'를 누른다면, 굳이 취소하지 말기 바란다. 그게 더 측은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