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23일 월요일

사무엘상 20장 12~23절 "사랑이 그를 움직이다"

2024년 12월 23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사무엘상 20장 12~23절 "사랑이 그를 움직이다"

12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증언하시거니와 내가 내일이나 모레 이맘때에 내 아버지를 살펴서 너 다윗에게 대한 의향이 선하면 내가 사람을 보내어 네게 알리지 않겠느냐
13 그러나 만일 내 아버지께서 너를 해치려 하는데도 내가 이 일을 네게 알려 주어 너를 보내어 평안히 가게 하지 아니하면 여호와께서 나 요나단에게 벌을 내리시고 또 내리시기를 원하노라 여호와께서 내 아버지와 함께 하신 것 같이 너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니
14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17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18 요나단이 다윗에게 이르되 내일은 초하루인즉 네 자리가 비므로 네가 없음을 자세히 물으실 것이라
19 너는 사흘 동안 있다가 빨리 내려가서 그 일이 있던 날에 숨었던 곳에 이르러 에셀 바위 곁에 있으라
20 내가 과녁을 쏘려 함 같이 화살 셋을 그 바위 곁에 쏘고
21 아이를 보내어 가서 화살을 찾으라 하며 내가 짐짓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이쪽에 있으니 가져오라 하거든 너는 돌아올지니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네가 평안 무사할 것이요
22 만일 아이에게 이르기를 보라 화살이 네 앞쪽에 있다 하거든 네 길을 가라 여호와께서 너를 보내셨음이니라
23 너와 내가 말한 일에 대하여는 여호와께서 너와 나 사이에 영원토록 계시느니라 하니라  


사무엘상 20장은 다윗과 요나단 사이의 격정적인 대화를 기록합니다. 지금 두 사람의 처지는 완전히 정반대입니다. 다윗은 목숨을 위협받으며 왕에게 쫓기는 신세입니다. 그의 위험한 상황을 온 나라가 알고 있습니다. 다윗을 보호했다는 이유로 심지어 사무엘에게까지 사울이 군대를 보냈습니다. 하물며 평범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작은 호의라도 보였다가는 어떤 화를 입을지 모릅니다. 따라서 다윗은 이스라엘 전체에서 철저히 고립되어 절망에 빠졌습니다.

반면에 요나단은 이스라엘 왕세자입니다. 아버지 사울에 이어 머지않아 왕관을 머리에 쓸 사람입니다. 장차 권력을 물려받을 실세입니다. 게다가 블레셋과 전투에서 부하 한 명만 데리고 무려 적군 20명을 무찔렀습니다. 왕으로서 훌륭한 자질을 몸소 증명했습니다. 또한 아버지의 어리석은 명령으로 굶주린 군인들의 처지를 대변하는 따뜻한 인격까지 두루 갖추었습니다. 따라서 많은 백성이 요나단에게 기대를 걸었을 겁니다. 궁궐 안에 여러 대신들 역시 그에게 잘 보이려 노력했을 것입니다. 요나단은 누구에게도 아쉬울 게 없습니다. 남부러울 것 없이 부와 권력을 가득히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다윗은 오늘 본문 바로 앞 단락에서 요나단의 호의를 간청합니다. 어느 시대, 어느 나라나 권력자의 생각은 최고급 정보입니다. 사울이 정말 자기를 죽일 마음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합니다. 만약 왕의 살기가 진심이라면 부디, 앞서 맺은 약속을 기억해 달라고 호소합니다.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애원합니다. 그리고 혹시나 어떤 허물이 빌미가 되어 자기가 결국 죽게 된다면 차라리 요나단이 직접 처리해 달라고까지 당부합니다. 다윗의 처절한 무력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그의 절박함을 발견합니다. 다른 한 편으로, 요나단을 향한 그의 깊은 신뢰를 새삼 알게 됩니다.

그러자 요나단이 다윗을 안심시킵니다. 일단 다윗이 가장 궁금해하고 불안해하는 점을 정확히 다시 확인시킵니다. 그를 향한 아버지의 뜻을 분명히 파악해 보겠다고 알려줍니다. 요나단의 적극적인 경청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말을 흘려듣지 않고 있습니다. 공포에 떨고 있는 그의 내면을 먼저 따뜻하게 보듬어 줍니다.

이것만으로도 요나단의 훌륭한 성품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사실 요나단이 자기 이익을 위해서라면 아버지의 뜻을 따르는 게 훨씬 현명해 보입니다. 다윗을 없애는 게 여러모로 요나단에게 유리합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다윗을 기꺼이 보호합니다. 심지어 아버지에 맞서면서까지 다윗의 편이 되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요나단의 더욱 놀라운, 성숙한 인격을 알려줍니다. 본문 14~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너는 내가 사는 날 동안에 여호와의 인자하심을 내게 베풀어서 나를 죽지 않게 할 뿐 아니라 15 여호와께서 너 다윗의 대적들을 지면에서 다 끊어 버리신 때에도 너는 네 인자함을 내 집에서 영원히 끊어 버리지 말라 하고 16 이에 요나단이 다윗의 집과 언약하기를 여호와께서는 다윗의 대적들을 치실지어다 하니라

맥락을 덮어두고, 사람 이름을 지우고 이 세 절을 차근히 곱씹어 보시기 바랍니다. 보다 쉬운 이해를 위해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4 그 대신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내가 주님의 인자하심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해주게. 내가 죽은 다음에라도, 15 주님께서 자네 다윗의 원수들을 이 세상에서 다 없애 버리시는 날에라도, 나의 집안과 의리를 끊지 말고 지켜 주게." 16 그런 다음에 요나단은 다윗의 집안과 언약을 맺고 말하였다. “주님께서 다윗의 원수들에게 보복하여 주시기를 바라네.”

만약 이름이 적혀있지 않다면 마치 도망자가 권력자에게 호의를 구하는 걸로 들립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요나단이 다윗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지금 요나단과 다윗의 처지는 정반대입니다. 요나단은 부유한 왕세자이며 존경받는 장군입니다. 반면 다윗은 초라한 반역범 신세입니다. 그런데 요나단은 자기가 약자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다윗에게 주님의 인자하심을 누리게 해달라고 말합니다. 다윗이 아닌 요나단이, 도리어 ‘의리’를 지켜 달라고 간청합니다.

이유가 무엇일까요? 어떻게 이런 놀라운 상황이 펼쳐졌을까요? 요나단이 눈부시게 찬란한 신앙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살던 데로 살고 싶어 합니다. 특히나 남들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고 누리고 있다면 더욱 그러합니다. 생각하고 고민하기를 귀찮아 합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것을 당연하게 여깁니다. 달콤한 아부에만 귀를 기울입니다. 싫은 소리하는 사람들을 배척합니다. 요나단이 쉽게 빠질 수 있는 함정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요나단은 내면에서 욕망을 타고 들려오는 소음과 주위 사람들의 공허한 칭찬을 물리쳤습니다. 대신, 하나님의 뜻에 더 귀를 기울였습니다. 주님의 마음을 먼저 헤아렸습니다. 철저히 자기를 비우고 낮춰야 가능한 일입니다. 날마다 진리를 통해 자신을 정확히 마주한 결과입니다. 그런 까닭에 요나단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자신을 휘감은 부와 권력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명확히 깨달았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본질을 꿰뚫어 봤습니다. 다윗이 비록 지금 당장은 겁에 질린 눈길로 자기를 애처롭게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람들 눈에는 초라한 패배자입니다. 하지만 요나단은 하나님의 주권 가운데 다윗이 결국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예견하였습니다. 그가 위대한 지도자로 주님의 뜻을 이스라엘 가운데 펼칠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러한 요나단의 태도 덕분에 다윗은 분명 커다란 위로를 받았을 것입니다. 동시에 무척 놀라고 당황했을 것입니다. 그런 다윗을 향해 요나단은 자신의 결심을 거듭 다짐하며 약속합니다. 이 때, 그런 요나단을 묘사하는 성경의 기록이 무척 인상적입니다. 17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7 다윗에 대한 요나단의 사랑이 그를 다시 맹세하게 하였으니 이는 자기 생명을 사랑함 같이 그를 사랑함이었더라

요나단의 도무지 이해 못할, 위대한 행동과 태도를 성경은 간명하게 정리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아하바>입니다. 사무엘상하에 총 여섯 번 나옵니다. 그중에서 무려 다섯 번이 요나단의 사랑을 가리킵니다. 사무엘상하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 중에 요나단이 가장 훌륭한 사랑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요나단을 통해 성경이 알려주는 사랑의 모범을 발견합니다. 진실로 닮아가야 할 사랑의 본질을 깨달았습니다. 요나단에게 사랑은 충동적인 감정이 아닙니다. 맹목적인 집착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신 지혜를 통해 내린 가장 바람직한 결단입니다. 건강하고 합리적인 판단입니다. 위대한 신앙이 맺은 아름다운 결실입니다. 사랑이 그로 하여금 기꺼이 희생하게 했습니다. 사랑이 그를 움직여 섬김의 길을 걷게 했습니다. 사랑이 그를 뒤흔들었습니다. 그 결과 아버지 사울처럼 탐욕에 눈먼 괴물로 변하지 않았습니다. 끝까지 훌륭한 복음의 사람으로 일생을 살아갔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나단과 같이 사랑을 품고 살아가시길 축복합니다. 날마다 사랑의 씨앗을 뿌리고, 사랑의 꽃을 피우며, 사랑의 열매를 맺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시길 소망합니다. 사랑만이 이 냉혹한 세상을 이겨내는 힘이며, 사랑만이 어리석은 거짓에 속지 않게 나를 일깨우는 온전한 진리인 까닭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참 사랑을 전해주셨습니다. 그 사랑의 무게와 깊이를 십자가 위에서 보여주셨습니다. 우리에게 그 무엇보다 사랑을 실천하고 전할 것을 당부하셨습니다. 그 부르심 가운데 하루를 시작합니다. 오늘 저마다 분주한 일상을 살아가실 겁니다. 그 가운데 무엇보다 사랑의 향기를 더해가길 축복합니다. 사랑이라는 이름의 소명을 충실히 감당하시길 바랍니다.

주님께서 그런 우리의 사랑 어린 발길을 분명 기뻐하실 줄 믿습니다. 비록 다윗 같은 화려한 영웅이 되지 못한다 할지라도, 요나단처럼 수많은 손해와 아픔을 겪는다 할지라도, 사랑을 이루는 우리의 걸음이 마침내 이 세상 가장 아름다운 행진으로 완성된다는 소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저마다의 가슴 속에, 상처로 얼룩진 멍든 사랑의 흔적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눈부신 생명과 희망의 증거로 변화하기 때문입니다.


기도
위대한 사랑의 주 하나님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여, 사랑의 눈으로 다윗을 돌아보고 섬긴 요나단의 모습을 말씀을 통해 확인합니다. 저희 역시 세상의 헛된 탐욕을 물리치고 주님 뜻을 온전히 따르기 원합니다. 사랑으로 사랑을 알아가고 실천하길 소망합니다. 오늘 하루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몸소 보이신 위대한 사랑을 깨닫고 전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4년 12월 21일 토요일

클레어 키건, "이처럼 사소한 것들"(Small Things like These) 후기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이 소설을 향한 찬사에 둘러싸여 있었다.

마침, 이 책의 배경인 성탄절을 앞두고 있다.
마침, 잠깐 여유가 생겼다.
마침, 부담 없이 적은 분량이다.

리디북스에서 결재하고 전자책을 내려받았다.
매력적인 문장과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었다.
현실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돌아보는 생생한 울림을 느꼈다.
"앵무새 죽이기"(하퍼 리) 이후 참 오랜만에 받은 감동이다.

마침,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개봉 중이다.
마침, 영화 또한 호평을 받고 있다.
마침, 적절한 상영관을 발견해 감상했다.

처음 하는 경험이었다.
전날 다 읽은 책의 장면을 바로 다음 날 영상으로 감상했다.
아일랜드의 질감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촬영과 킬리언 머피를 비롯한 배우들의 호연에 감동이 증폭됐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리디북스의 TTS 기능으로 책을 다시 '들었다.'

매년 겨울, 성탄 트리에 불이 켜지고 캐럴이 들릴 때마다 이 책과 영화가 떠오를 것 같다.
주인공 빌 펄롱처럼 따뜻함과 배려를 지니고 용기를 낼 줄 아는 사람이 되고 싶다.
저자 클레어 키건처럼 굳건한 문장으로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다.

문득 주위를 돌아보니 마침, 낯설게 반가운 성탄의 온기에 둘러싸여 있었다.


"'이제 거의 다 왔어.' 펄롱이 기운을 돋웠다. '조금만 가면 집이야.'
두 사람은 계속 걸었고 펄롱이 알거나 모르는 사람들을 더 마주쳤다. 
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 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2024년 12월 14일 토요일

누가복음 13장 10~17절 "눈길과 손길"

2024년 12월 13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누가복음 13장 10~17절 "눈길과 손길"

10 예수께서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에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15 주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이끌고 가서 물을 먹이지 아니하느냐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7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매 모든 반대하는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니라 


한겨울 새벽 추위를 뚫고 하나님의 따뜻한 은혜를 사모해 모이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하더라도 우리네 시골 마을에서는 정신건강에 대한 인식과 여건이 몹시 부족했습니다.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방치된 지적장애인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들 대부분은 지극히 기본적인 인권조차 보호받지 못했습니다. 가정은 물론이고 마을 전체의 멸시와 천대 속에 살아가야 했습니다.

그렇게 비극적인 상황에 부닥친 한 여인의 모습을 어느 시인은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내용 중에 강단에서 적절하지 못한 다소 과격한 표현이 있어서 일부 순화했습니다.

그런데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요
동네에서는 악귀 들린 여자 혹은 미친 사람으로 통한다
빈농에서 자라나 이웃 마을 빈농의 총각에게
시집간 지 이레 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새색시 품을 파고드는 신랑에게
갑자기 금침 밑에 감춰둔 식칼을 꺼내 위협하고
시모 밥그릇에 몰래 오물을 담아 조반상에 올려놓아
시집살이 보름도 못 채우고 소박맞은 후
친정 오라비 그늘에 들어 애옥살이하면서
정신병원 근처에도 못 가 본 채
살얼음 잡힌 동네 개천에서 가끔씩 벌거벗고 목욕하다
난폭한 오라비 매질에라도 걸리면
푸른 멍 두드러기 돋아난 얼굴 부끄러워
치렁대는 긴 머리단으로 살포시 가리고

여러분이 만약 이런 사람과 마주한다면 어떻게 대하시겠습니까? 우리의 이성은 마땅히 그를 도와주고 따뜻하게 보살펴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하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인간의 악한 본성은 타인의 불행을 앞에 두고도 자신의 이익과 감정을 우선합니다. 동네 사람들은 그녀를 악귀 들린 미친 여자로 대하며 싸늘한 눈길을 보냈습니다. 그뿐만 아니라 사랑을 베풀어야 할 가족이 누구보다 흉포한 손길을 휘둘렀습니다.

따라서 그녀가 온갖 종류의 폭력에 시달리며 하루하루 지옥 같은 시간을 보냈음을 행간 속에서 충분히 짐작하게 됩니다. 그러나 어느 한 사람도 그녀를 불쌍히 여기고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건네는 사람이 없습니다. 그저 아무도 헤아려주지 못할 설움을 묵묵히 삭히며 살아갈 뿐입니다.

단지 문학 이야기만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이처럼 당연히 사랑과 보호를 받아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는 이웃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 자리에 계신 성도님들 역시 지난날, 어쩌면 지금 그런 시련 가운데 괴로워 하실지도 모릅니다. 그 절망에 대한 유일한 답을 말씀과 기도로 하나님께 찾기 위해 이른 새벽, 이 자리에 모이셨을 겁니다.


마찬가지로 오늘 본문에도 끔찍한 외면과 소외를 겪으며 힘겨운 나날을 보냈던 한 여인이 등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습니다. 그런데 그곳에는 많은 사람의 눈길을 사로잡은 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에 대해 본문 11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11 열여덟 해 동안이나 귀신 들려 앓으며 꼬부라져 조금도 펴지 못하는 한 여자가 있더라 

그녀는 자기 몸을 가눌 수 없는 중증 장애를 무려 열여덟 해 동안이나 앓고 있었습니다. 누가 봐도 너무나 가련하고 안타까운 상황입니다. 주위 사람들과 신앙 공동체의 세심한 돌봄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하지만 도움을 주저하게 하는, 더 정확히는 혐오하고 꺼리게 되는, 그녀에 대한 또 다른 사실이 있습니다. 바로 ‘귀신 들림’입니다.

이 때, 그녀를 사로잡은 ‘귀신’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많은 이단이 그러하듯이 성경의 맥락과 상황을 무시한 채 귀신의 존재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은 위험합니다. 반대로 현대 과학의 기준으로 영적 존재를 아예 부정하는 것도 그릇된 태도입니다. 대신 ‘귀신’이라는 언급을 통해 본문이 드러내려 하는 바를 신중히 헤아릴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의 경우 귀신은 한 여인에게 질병 이상의 고통을 안겨주는 실체입니다. 귀신 들림으로 말미암아 그녀는 치유가 필요한 병자가 아니라 공동체에 해를 끼치는 더러운 존재로 낙인 찍혔습니다. 비록 본문이 직접적으로 상세하게 묘사하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녀를 덮친 가혹한 폭력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 결과, 그녀의 억누른 절망 역시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더욱더 끔찍한 점은 그러한 시련 속에서 그 여인이 속한 신앙 공동체가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의 배경은 회당입니다. 회당은 유대인 마을의 중심에서 신앙을 공유하는 공간입니다. 그녀가 사람들의 모멸적인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기에 있었던 까닭은 분명합니다.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희망을 찾고 싶어서입니다.

회당장은 그러한 회당을 관리하는 행정가이자 종교 지도자입니다. 그는 마땅히 구약성경에 기록된, 약자를 돌보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귀신들려 장애로 신음하는 여인의 아픔을 헤아려 줘야 합니다. 구체적이고 따뜻한 섬김으로 그녀에게 다가가야 합니다. 그것이 회당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의무이자 책임입니다.

그러나 그는 정반대로 행동 합니다. 회당장은 그녀가 고통에서 벗어나는 놀라운 치유의 순간에 함께 기뻐하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몹시 분노하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무척 황당합니다. 14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4 회당장이 예수께서 안식일에 병 고치시는 것을 분 내어 무리에게 이르되 일할 날이 엿새가 있으니 그 동안에 와서 고침을 받을 것이요 안식일에는 하지 말 것이니라 하거늘 

회당장은 왜 다른 날이 아닌, 하필 안식일에 병을 고쳤는지 거칠게 따져 물었습니다. 이를 통해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그에게는 한 여인이 귀신들려 아파하며 내뱉는 신음보다 종교 질서가 더 중요했습니다. 안식일 정신 대신 안식일 율법을 철두철미하게 지켰습니다. 말씀의 핵심보다 문자를 더 소중히 여겼습니다. 따라서 자신의 회당으로 눈물지으며 찾아온 그녀의 고통에는 전혀 관심 없었습니다.

이 장면은 평소 회당에서 그 여인이 어떤 대접을 받았는지 단적으로 보여줍니다. 한 마디로, 사람 취급 하지 않았습니다. 회당의 경건한 분위기를 망치는 사탄의 딸이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었습니다. 하루속히 치우고 싶은 짐 더미에 불과했습니다. 

물리쳐야 할 대상은 분명 귀신입니다. 장애 여성인 그녀는 피해자이자 약자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도리어 공동체의 선을 해치는 가해자 취급을 당했습니다. 마치 그녀가 귀신인 양 멸시와 폭력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그녀에게 내미셨습니다. 12~13절 제가 읽겠습니다.

12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13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지라 

여기서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귀신이 아니라 그 여인에게 눈길을 보내고 말을 건네셨습니다. 사탄이 물러갔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녀에게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라고 따뜻하게 선언하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주님은 그녀를 휘감은 귀신이 아니라 병으로 고통당하는, 아픔을 먼저 바라보셨기 때문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추한 외모가 아니라 내면의 본질을 들여다보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괴상한 행동이 아니라 그녀가 가장 절박하게 느끼는 결핍과 설움을 눈에 담으셨습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녀의 뒤틀린 몸에 직접 손을 얹으셨습니다. 전능하신 주님께서는 말씀만으로도 얼마든지 낫게 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따뜻한 손길을 일부러 건네셨습니다. 그 결과, 그녀는 너무나 오랜만에 친근한 온기를 생생히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자기도 마땅히 사람으로 대접받아야 할, 뜨거운 피와 살을 지닌 존재라는 사실을 다시금 명확하게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여기서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의 존재를 새롭게 하는 중요한 선언을 하셨습니다. 16절 말씀 다 함께 읽겠습니다.

16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이 매임에서 푸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예수님은 그녀를 가리켜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러한 호칭이 의도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바로 당시 유대교의 일그러진 신앙을 뒤집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구원이 아브라함의 혈통인 자신들에게 독점적으로 주어졌다고 믿었습니다. 특히나 민족의 위기를 겪으면서 아브라함의 자녀다운 행동을 엄격하게 제한하고 강조했습니다. 그것을 위해 율법을 악용하였습니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오늘 본문에 드러나는 안식일 규정입니다.

그렇다면 회당에 모인 사람들의 눈에 귀신 들린 여인은 결코 구원받은 아브라함의 딸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은 그런 그들의 오만을 비틀었습니다. 오히려 그녀야말로 진정 아브라함의 딸이라고 힘주어 말했습니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아브라함의 딸’이라는 호칭이 신약 성경에서 오직 본문에만 등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와 비슷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표현도 누가복음에만 나옵니다. 바로 19장 9절에서 세리장 삭개오를 가리킵니다. 동족의 피를 빨아 로마제국에 아부하는 삭개오 역시 그 시절 유대인들의 눈에는 절대로 구원받을 ‘아브라함의 자손’일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누가복음은 이 두 사람에게만 그 영광스러운 호칭을 부여하였습니다. 사람들에 의해 외면되고 소외당했지만, 예수님의 사랑에 안긴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주님께서는 본문에 기록된 한 가련한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어리석은 편견을 넘어서는 무한한 은혜와 평화를 보여 주셨습니다. 그 완성이 바로 우리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는 감히 여러분 내면 깊은 곳에 있는 아픔을 다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분명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참 많이 괴로우셨을 겁니다. 살아오고 살아내느라 무척 고생 많으셨습니다. 미처 다 헤아릴 수 없는 굴욕과 좌절 가운데 차가운 멸시를 받을 때가 있습니다. 심지어 여러 모양의 폭력에 무참하게 짓밟히기도 합니다. 그 결과,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마음의 흉터를 어루만지며 눈물짓는 경험을 한 번쯤은 하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눈길과 손길을 건네시는 예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본문의 핵심은 단순히 귀신을 쫓아내고 위중한 질병을 고치는 주님의 신기하고 강력한 이적이 아닙니다. 마음속에 켜켜이 쌓인 깊은 고통 한복판에 찾아오시는 우리 주님의 위대한 사랑입니다. 그 사랑에 담긴, 온 세상을 품으시는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은혜 가운데 참된 회복과 치유를 경험하시길 소망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본받아 주변의 소외된 이웃을 향해 따뜻한 나눔과 섬김을 실천하시길 바랍니다. 한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본색은 그가 다른 이들의 불행을 어떻게 대하는 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믿음을 더욱 온전하게 하려면 내 안의 어리석은 편견과 오만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혐오스러운 겉모습이 아닌 그 내면의 아픔에 귀를 기울이며 예수님처럼 사랑으로 다가가야 합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시의 전체를 읽어드리겠습니다.

하나님의 가계(家系)

- 조수순

연분홍 화장지로 우스꽝스럽게 접어 만든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소곳이 예배당 앞자리에 나와 앉아
울먹이는 목소리로 절절히 기도하고
찬송 부르고
설교자의 말 끝마다 아멘으로 화답하는 그녀는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나님의 딸이다
그런데
집에서는 천덕꾸러기요
동네에서는 악귀 들린 여자 혹은 미친 사람으로 통한다
빈농에서 자라나 이웃 마을 빈농의 총각에게
시집간 지 이레 만에 정신이상을 일으켜
새색시 품을 파고드는 신랑에게
갑자기 금침 밑에 감춰둔 식칼을 꺼내 위협하고
시모 밥그릇에 몰래 오물을 담아 조반상에 올려놓아
시집살이 보름도 못 채우고 소박맞은 후
친정 오라비 그늘에 들어 애옥살이하면서
정신병원 근처에도 못 가 본 채
살얼음 잡힌 동네 개천에서 가끔씩 벌거벗고 목욕하다
난폭한 오라비 매질에라도 걸리면
푸른 멍 두드러기 돋아난 얼굴 부끄러워
치렁대는 긴 머리단으로 살포시 가리고
인적 드문 산모롱이를 돌아 예배당으로 오곤 하는데
누가 뭐래도 당당한 하나님의 딸이다
오늘 따라 홍조 띤 얼굴에
큼지막한 장미 두 송이를 머리에 꽂고
다른 하나님의 아들 딸들과 똑같이
또랑또랑한 음성으로 주기도문을 읊조리는 그녀는


삶이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비극을 하염없이 헤쳐 가는 기나긴 여정입니다. 그렇게 애쓰는 가운데 때로는 아무에게도 위로와 공감과 도움을 받지 못하기도 합니다. 고통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면 칠수록 오히려 더 잔인한 폭력 앞에 속절없이 무너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주님께서 사랑으로 내미시는 눈길과 손길로 말미암아 참된 희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 누가 뭐래도 우리는 모두 당당한,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딸이기 때문입니다.


기도
위대한 사랑의 주 하나님
주신 말씀을 통해, 귀신 들려 오랜 시간 중증 장애로 신음하던 여인을 치유하고 회복시키신 예수님의 모습을 발견하였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외면과 억압을 당했던 그녀에게 따뜻한 사랑의 눈길과 손길을 건네신 주님의 모습을 마음에 새깁니다. 그녀를 ‘아브라함의 딸’로 부르시며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주시는 위대한 은혜를 바라봅니다.
그러한 주님의 사랑을 통해 절망과 고통에서 벗어나길 원합니다. 또한 다른 누군가를 복음의 능력으로 회복시키고 일으키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4년 12월 13일 금요일

창세기 22장 1~14절 "보시는 하나님"

2024년 12월 11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22장 1~14절 "보시는 하나님" 

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일러 준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종과 그의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이 자기에게 일러 주신 곳으로 가더니
4 제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 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 하나님이 그에게 일러 주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 곳에 제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 놓고 그의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제단 나무 위에 놓고
10 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니
11 여호와의 사자가 하늘에서부터 그를 불러 이르시되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시는지라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매
12 사자가 이르시되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그에게 아무 일도 하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까지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내가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을 아노라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살펴본즉 한 숫양이 뒤에 있는데 뿔이 수풀에 걸려 있는지라 아브라함이 가서 그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을 대신하여 번제로 드렸더라
14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 이레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되리라 하더라


때로 어떤 만남은 성경을 보는 눈을 전혀 다르게 만듭니다. 저에게는 아들이 그랬습니다. 이미 여러 차례 말씀 드렸지만 저는 결혼하고 8년 만에 아빠가 되었습니다. 살짝 아브라함 될 뻔했습니다. 아들을 품에 안고 영롱한 눈망울을 들여다보다가 문득 경악하는 성경 속 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입니다. 아브라함이 모리아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모습입니다. 

혹여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 슬픔도 감당하기 벅찹니다. 하물며 아들의 심장에 칼을 겨누는 아비의 심정은 도무지 상상하지 못할 고통입니다. 그래서 창세기 22장은 많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립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는가?”를 묻게 합니다. 하나님의 선하신 성품에 의문을 품게 합니다. 언약하신 사랑과 모순인 것 같습니다. 그만큼 본문 속 주님의 요구가 매우 잔인합니다.

그런데 과연 아브라함도 지금 우리처럼 충격을 받았을까요?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물론 아브라함 역시 무척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처럼’은 아닐 수 있습니다. 옛 이스라엘 주변 세계에서 신에게 장남을 바치는 인신 제사는 익숙한 관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끔찍한 일들이 어떻게 가능 했을까요? 고대 세계에서 제사는 일종의 거래입니다. 신에게 정성을 바친 만큼 보상을 기대했습니다. 자식은 한 개인과 나라의 중대사를 앞두고 막대한 대가를 바라며 바칠 만한 극상의 제물입니다. 물론 보편 타당한 인권에 어긋납니다. 어떤 설명도 현대인의 충격을 완전히 해소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 속 옛 사람들에게는 그 비극 또한 삶의 일부였습니다.

아브라함도 그러했습니다.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을 도무지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묵직한 이물감 하나가 그의 마음에 자리 잡았습니다. 바로 혼돈입니다. 아브라함은 당시에 이미 거대한 규모를 갖춘 풍요로운 도시, 갈대아 우르 출신이었습니다. 그 문명의 중심에는 다양한 종교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야훼 하나님을 만나 과감히 고향을 떠나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창세기 18장 19절에 따르면, 주님은 여느 거짓 우상들과는 전혀 다른, “옳고 바른” 참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아들을 바치라는 하나님의 요구를 듣고 어쩌면 이렇게 중얼거렸을지도 모릅니다. ‘아, 야훼도 다른 신들과 같구나.’ 주님의 성품이 모호하게 생각되었을 것입니다. 거센 파도가 내면을 덮쳤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흐릿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복잡한 마음으로 무거운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창세기 22장은 그가 모리아산으로 향하는 여정을 기록합니다. 그중에서 4절이 인상적입니다. 이 구절은 이렇게 다시 옮길 수 있습니다.

삼 일째 되는 날에 아브라함이 비로소 그의 눈을 들었다. 그리고 멀리 있는 그곳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눈을 들었다’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동사는 문법상 과거의 ‘일회적 행동’을 뜻합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번제로 바치기 위해 길을 떠나 사흘째 되는 날에 ‘비로소’ 눈을 들었습니다. 

이런 문법 사용은 그의 내면을 가득 채운 갈등과 고통을 세심하게 표현합니다. 물론 아브라함이 문자 그대로 내내 땅만 쳐다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으로부터 시선을 회피했습니다. 침묵하며 힘없이 고개를 숙인 채 모리아산으로 향했습니다. 거부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명령에 대한 나름의 저항이었는지도 모릅니다.

마침내 목적지에 다다랐습니다. 아브라함은 말씀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습니다. 동행한 종들에게는 나귀와 함께 기다리라고 말합니다. 이제 그는 아들과 단둘이 산에 오릅니다. 그 모습을 6절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가져다가 그의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여기에 제사용품 세 가지가 등장합니다. 번제 나무와 불과 칼입니다. 레위기 제사법에 따르면 번제는 단순히 제물을 태우는 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제사장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는 당사자가 칼로 제물을 조각내야 합니다(레 1:5-9). 따라서 아버지와 아들이 모리아산을 오르는 이 모습은 삶의 비극을 응집한 장면입니다. 아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자신을 불사를 나무를 어깨에 멨습니다. 아버지는 아들의 숨을 끊고 시신을 토막낼 칼을 손에 들었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물로 바친 자식을 남김없이 태울 불씨를 챙겼습니다.

이때 이삭은 과연 몇 살이었을까요? 유대교 전통에 따른 랍비 주석에 의하면 37세입니다. 물론 정확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이삭은 시신을 완전히 태울 정도로 꽤 많은 양의 나뭇짐을 짊어질 만큼 장성했다는 사실입니다. 반면 아브라함은 기력이 쇠한 노인입니다. 이삭은 자기보다 나이 많은 아버지를 무시하며 얼마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순종합니다. 그 결과 이삭은 이 사건의 또 다른 주요 인물로 등장합니다.

창세기 22장 7~8절은 두 사람이 나눈 슬픈 대화를 들려줍니다. 7절 제가 읽겠습니다.

7 이삭이 그 아버지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이르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이르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이르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이삭이 부릅니다. “내 아버지여.” 아브라함이 대답합니다. “내 아들아.” 서로를 향한 호칭에서 많은 감정을 느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힘겹게 이삭의 아버지가 되기까지 펼쳐졌던 가슴 저린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아들로서 지닌 자부심과 신뢰가 스며 있습니다. 오랜 시간에 걸쳐 둘 사이에 가득 쌓인 추억이 담겨 있습니다. 이를 통해 창세기는 부자지간의 애틋한 정서를 더욱더 또렷하게 부각합니다.

그런 다음 이삭은 집에서 출발할 때부터 생긴 의문을 꺼냅니다. 아버지의 체면을 생각해 차마 종들 앞에서 묻지 못한 질문입니다.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아브라함은 묵묵히 내딛던 걸음을 멈추고 생각에 잠겼습니다. 이제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차가운 진실을 모두 말할 수도 없습니다. 그는 신음하듯 대답합니다. 8절 함께 읽겠습니다.

8 아브라함이 이르되 내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히, 이르에>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화면 계속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장은 사실 해석하기가 모호합니다. 개역개정 성경은 “내 아들아”를 아버지가 아들을 부르는 호칭으로 이해했습니다. 여기에는 혹시나 주님이 제물을 준비하실 수 있다는 소망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번역입니다. 

하지만 원문을 보면 “내 아들아”가 문장의 가장 마지막인 “번제할 어린 양”과 붙어 있습니다. 어순을 고려하면 “하나님이 번제를 위한 어린 양으로 내 아들을 준비하실 것이다”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약간의 논쟁은 있지만 두 가지 번역이 모두 가능합니다. 아브라함은 힘겨운 고뇌 끝에 일부러 모호하게 대답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마침내 하나님이 말씀하신 곳에 도착했습니다. 거기서 제단을 쌓습니다. 이삭이 지고 온 장작을 그 위에 벌여놓습니다. 그런 다음 아브라함이 아들을 결박합니다. 여기서 ‘결박’으로 옮긴 히브리어는 ‘아케다’입니다. 이 단어는 창세기 22장에 기록된 ‘이삭의 번제 사건’ 전체를 가리키는 별칭이 되었습니다. 

가장 상징적인 장면이기 때문입니다. 아버지는 주름진 떨리는 손으로 아들을 힘껏 묶으며 자기 마음 또한 꽁꽁 싸맵니다. 아들은 글썽이는 아버지의 눈망울을 애써 외면하며 도무지 이해할 길 없는 비극에 묵묵히 동참합니다. 상상만 해도 숨이 멎을 것 같습니다. 이 순간 두 사람은 인생의 거친 물살에 휩쓸려 이유 없이 고통당하는 모든 사람을 대표합니다.

비극은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움켜쥡니다. 아들이 고통 없이 숨을 거두도록 미리 생각해두었던 급소를 노려봅니다. 이윽고 절규하며 칼을 내리꽂습니다. 그 순간, 하늘에서 천사가 황급히 그를 부르며 행동을 멈추게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여 ‘외아들까지도 아끼지 않은’ 그의 행동을 칭찬합니다. 이어서 아브라함은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발견했습니다. 아들 대신 그 숫양을 번제로 드립니다. 그때 이 모든 사건을 정리하는 주님의 이름이 등장합니다. 14절 함께 읽겠습니다.

아브라함이 그 땅 이름을 여호와(야훼) 이레(히, 이르에, 능동태 미완료, “보신다.”)라 하였으므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이 이르기를 여호와의 산에서 준비(히, 예라에, 수동태 미완료, “보이신다.”)되리라 하더라(창 22:14).

아브라함은 자기 인생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펼쳐진 그 땅의 이름, 정확히는 그 땅에 임하신 주님을 가리켜 ‘여호와 이레’, 즉 ‘야훼 이레’라고 불렀습니다. 여기서 ‘이레’는 히브리어 <이르에>의 우리말 음역입니다. 한국 교회 교인들은 해당 구절 속 설명을 통해 그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로 ‘준비’입니다. ‘여호와 이레’를 자연스럽게 ‘예비하시는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이유입니다. 맥락상 자연스러운 번역입니다. 이삭을 대신해 제물로 바칠 숫양을 미리 마련하신 주님의 은혜를 잘 표현합니다. 따라서 앞서 살펴본 8절에 나오는 ‘이르에’ 역시 ‘준비’로 옯겼습니다.

그런데 사실 조금 아쉬운 번역입니다. 히브리어 동사 <이르에>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는 ‘보다’이기 때문입니다. 14절 화면 다시 부탁드립니다. 따라서 14절에서 ‘야훼 이레(이르에)’는 ‘주님이 보신다’(the Lord sees)로, ‘준비’(예라에)는 ‘(주님이) 보이신다’(the Lord is seen)로 옮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준비와 공급은 그 결과입니다. 그 전에 눈길이 먼저 있었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을 향한 주님의 시선을 마음에 품고 그 잔인한 시간을 돌이켜 봐야 합니다. 그래야 ‘야훼 이레’에 담긴 은혜를 더욱 온전히 마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보셨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바치라는 도무지 납득할 수 없는 명령에 혼란스러워하는 그를 보셨습니다. 당신을 향한 실망감에 사무쳐 깊은 밤 장막 밖을 스산하게 서성이는 그를 보셨습니다. 불안한 눈동자로 의아하게 쳐다보는 사라를 애써 외면하며 이삭과 함께 길을 나서는 그를 보셨습니다. 고개를 푹 숙인 채 서늘한 침묵을 이겨내며 걸음을 옮기는 그를 보셨습니다. 이삭과 마지막일지 모르는 애틋한 대화를 떨리는 목소리로 나누는 그를 보셨습니다. 제단을 쌓고 나무 장작을 펼쳐 놓고 자기 자식을 묶는 그를 보셨습니다. 마침내 울부짖으며 이삭을 칼로 찌르려는 그를 보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당신을 보이셨습니다.

흔히 창세기 22장을 두고 아브라함의 초인적 믿음과 그에 대한 하나님의 보상으로 이해합니다. 물론 틀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런 시각은 자칫 믿음을 공로로 변질시킬 위험을 초래합니다. 이 이야기의 목적은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복종하는 아브라함의 영웅적 의지를 보여주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이 보시고, 보이시고, 필요한 도움을 보내신다는 복음을 깨우치는 것이 핵심입니다.

앞서 주님은 우상들과 비슷해 보였습니다. 그들의 명령과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은 명령으로 아브라함을 혼란에 밀어 넣었습니다. 하지만 고뇌의 한복판에서, 그 깊은 절망을 통해 눈부신 진리가 드러났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분명 우상들과 다르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무고한 생명이 억울하게 피 흘리는 비극을 절대로 가만두고 보지 않는다는 진실을 또렷이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그런 까닭에 ‘야훼 이레’ 사건은 레위기 18장과 20장에 기록된 인신 제사 금지 명령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집니다. 

그럼에도 우리의 질문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어떻게 그러실 수 있느냐고 여전히 따져 묻게 됩니다. 그러한 의문은 타당합니다. 그런 까닭에 ‘야훼 이레’ 하나님의 구원은 모리아산에서 한 개인만을 향하지 않았음을 유념해야 합니다. 신비롭게도 훗날, 그 산 위에 성전이 세워졌습니다. 그곳에 주님이 영광 가운데 임재하셨습니다(대하 3:1, 7:1-3). 그리고 더 시간이 흘러 모리아 산을 마주 바라보는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셨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듯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을 나무에 결박하셨습니다. 아브라함과는 달리 아들의 완전한 죽음을 목격하셨습니다. 창세기 22장은 골고다에서 비로소 완성되었습니다. 그리고 부활을 통해 그 모든 절망과 혼돈을 넘어서는 생명의 은총을 온 세상에 보여주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어려움에 부닥친 자녀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단지 ‘준비’하신다고 기대해서는 안 됩니다. 수풀에 뿔이 걸린 숫양을 예비하셨다는 결론으로 섣불리 달려가서도 안 됩니다. 그 대신 주님이 아브라함과 함께 걸으셨던 모든 과정을 차근히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야훼 이레’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이스라엘뿐 아니라 나의 하나님이심을 진심으로 고백해야 합니다.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눈길을 발견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보십니다. 하나님은 자녀의 난치병 진단을 듣고 싸늘한 병원 계단에 주저앉아 오열하는 어머니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부당한 해고 통보를 받고 창백한 회사 건물 밖을 힘 없이 나오는 아버지를 보십니다. 하나님은 오랜 시간 품어온 꿈을 결국 포기하고 시큰한 가로등 불빛 아래를 배회하는 우리의 아들, 딸을 보십니다. 하나님은 요양원 창문 밖으로 외롭게 핀 들꽃을 쓸쓸히 쳐다보는 노인을 보십니다. 보시고, 보이시고, 보내십니다.

그렇게 나를 바라보시고 당신을 보이시는 하나님의 시선을 마주하길 바랍니다. 그 눈길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의 믿음을 닮아가게 됩니다. 우리를 참으로 살리시는 주님의 돌보심을 깨닫게 됩니다. 자녀를 위해 준비하신 진정한 은혜의 길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삭을 바치라는 명령을 들은 아브라함처럼 번민이 마음에 사무칠 때, 하나님의 이름 ‘야훼 이레’를 부르며 기도해야 합니다. 모든 혼란을 딛고 일어나 믿음의 여정을 꿋꿋이 이어 나가야 합니다. 그 길 끝에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오롯이 드러난 참 생명이 풍성하게 흘러넘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은 하나님의 눈물겨운 사랑을 마음 깊이 품으시길 바랍니다. 이를 통해 시련을 딛고 담대히 발걸음을 내딛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야훼 이레’, 보시는 주 하나님.
아브라함의 번민을 발견합니다. 그를 덮친 깊은 슬픔과 아픔을 들여다봅니다. 너무나 무겁고 힘겹게 모리아산으로 향했을 그의 걸음을 지켜봅니다. 사랑하는 아들을 결박하고 칼을 겨누며 무너졌을 마음을 헤아려봅니다. 하지만 주님이 그 모든 일을 보고 계셨음을 믿습니다. 그리고 끝내 당신을 보이시고 은혜를 예비해 주신 사랑을 기억합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닮아가길 소망합니다. 참된 순종을 통해 온전한 믿음의 본을 보인 아브라함의 삶을 마음에 새기길 원합니다. 아브라함과 더불어 하나님의 구원을 올바로 깨닫고 전하는 믿음의 자녀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세상의 모든 결박과 죽음을 이기고 부활 생명을 이루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2024년 11월 30일 토요일

룻기 1장 1~6절 “돌보시는 하나님”

2024년 11월 29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룻기 1장 1~6절 “돌보시는 하나님”

1 사사들이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유다 베들레헴에 한 사람이 그의 아내와 두 아들을 데리고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
2 그 사람의 이름은 엘리멜렉이요 그의 아내의 이름은 나오미요 그의 두 아들의 이름은 말론과 기룐이니 유다 베들레헴 에브랏 사람들이더라 그들이 모압 지방에 들어가서 거기 살더니
3 나오미의 남편 엘리멜렉이 죽고 나오미와 그의 두 아들이 남았으며
4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 지 십 년쯤에
5 말론과 기룐 두 사람이 다 죽고 그 여인은 두 아들과 남편의 뒤에 남았더라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추운 날씨에도 잠을 깨우고 일어나 기도의 자리로 나아오신 성도님들을 환영하고 축복합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들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흉년’이라는 말의 무게가 그리 무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불과 몇십년 전만 하더라도 그렇지 않았습니다. 철저하게 농업에 의지한 사회에서 추수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고통과 비극 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 여러 곳에서 흉년으로 말미암은 시련을 생생하게 들려 줍니다.

그 중 하나가 룻기의 배경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문장이 본문외에는 창세기에만 단 두 번 등장합니다. 바로 창세기 12장 10절과 26장 1절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0 그 땅에 기근이 들었으므로 아브람이 애굽에 거류하려고 그리로 내려갔으니 이는 그 땅에 기근이 심하였음이라

1 아브라함 때에 첫 흉년이 들었더니 그 땅에 또 흉년이 들매 이삭이 그랄로 가서 블레셋 왕 아비멜렉에게 이르렀더니

이 구절들은 아브라함과 이삭이 겪은 흉년을 묘사합니다. 둘에게 분명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바로 흉년 자체는 비극 이지만 하나님께서 이를 통해 당신의 커다랗고 놀라운 계획을 이루셨다는 사실입니다. 기근으로 이집트와 블레셋에 피신했지만 하나님의 극적인 도우심을 체험하고 복을 누렸습니다.

룻기 저자가 창세기에만 나오는 이 두 문장을 굳이 가져와 나오미가 겪은 흉년을 묘사한 의도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도 고난은 찾아옵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시련 가운데 함께 하시어 백성을 위한 당신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결국 나오미는 기근을 피하기 위해 고향 베들레헴을 떠나 모압으로 향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러한 엘리멜렉 가족의 이사를 성경이 비난하지 않는 다는 사실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람들은 다른 누군가 고통을 겪을 때 위로와 공감을 하기도 하지만 정반대로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물론 우리는 죄에 둔감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거슬렀을 때 명백히 심판하시는 공의를 무시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사람들이 함부로 판단할 수 없는 삶의 복잡한 현실을 명심해야 합니다. 엘리멜렉 가족의 모압 이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 행동을 비판하는 것은 적어도 룻기의 의도는 아닙니다. 

룻기를 자세히 살펴보면, 날카로운 율법으로 그들을 정죄하는 문장을 단 하나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 대신 하나님의 드넓은 사랑을 보여줍니다. 룻기는 정죄의 돌을 퍼붓는 세상 속에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신 포근한 안전지대 입니다. 비난의 칼날이 오가는 사막 속 시원한 오아시스입니다.

모압의 경우 분명 이방 민족이 살고 있는 이방 땅입니다. 하지만 이스라엘과 모압은 복잡한 관계를 유지 했습니다. 다윗이 모압을 공경하기도 했지만 그보다 앞서서는 자기 가족을 모압왕에게 피신시키기도 했습니다. 즉 쉽게 판단할 수 없는 문제입니다. 게다가 북부 모압은 7~800미터의 고원지대에서 비가 넉넉히 내리는 풍요로운 땅입니다. 굶주림을 겪는 가족이 살기 위해 그곳으로 이사하는 것은 어쩌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관련해서 주목해야 할 단어가 있습니다. 1절에서 “모압 지방에 가서 ‘거류’하였는데”에 나오는 “거류”입니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 단어는 <구르>입니다. 성경에서 나그네 살이를 묘사할 때 사용됩니다. 놀라운 사실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의 여정을 바로 이 <구르>로 묘사했다는 점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이삭, 야곱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거칠게 정리하자면 창세기는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이곳 저곳을 다니며 ‘거류’했던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렇게 룻기는 일부러 창세기의 상황을 연상시키는 단어와 문장을 사용하였습니다. 엘레멜렉과 나오미가 믿음이 없고 욕망에 속아 모압을 향한게 아닙니다. 마치 아브라함처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삶의 굴곡을 겪으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모압에 가서 살게 되었음을 알려줍니다.

그렇지만 시련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남편이 그만 숨을 거두었습니다. 든든한 두 아들 또한 결혼 후 모두 세상을 떠났습니다. 결국 남은 건 과부 신세가 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두 며느리 룻과 오르바 밖에 없습니다. 도무지 가늠하기 조차 힘든 절망입니다. 고통이 끊임없이 휘몰아 쳤습니다. 

얼마전 교인 장례를 위해 벽제 화장장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저희 앞 순서에 평소와 다른 빛깔의 울음소리가 들렸습니다. 스산한 공기가 순식간에 뒤덮였습니다. 곧바로 어린 아이의 관이 들어왔습니다. 어른들의 겨우 절반 크기였습니다. 저는 차마 계속 쳐다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습니다. 혹시나 영정을 볼까봐 눈을 감았습니다. 이제 겨우 7살된 제 아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아들이 저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는 것을 상상만해도 끔찍한 고통입니다. 너무나 조심스럽지만 어쩌면 이 자리에도 그런 아픔을 겪으신 분들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한 인간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가장 무거운 슬픔을 견뎌내시느라 무척 힘드셨을 것입니다.

하물며 나오미는 남편에 이어 두 아들을 잃었습니다. 게다가 고대 서아시아의 유목 문화는 여자들만으로는 생존 자체가 위협이 되는 상황입니다. 어쩌면 나오미에게 가족과 이별한 슬픔은 사치였을 지도 모릅니다. 당장 어떻게 먹고 살아야 하는 지가 시급한 문제입니다. 가슴이 한 없이 짓눌렸을 것입니다. 고향을 떠나 모압에 머물며 살며 지금에 이르기까지 지난 세월들 돌아보며 부질없는 후회와 자책을 반복했을지 모릅니다. 그러면서 어쩌면 하나님을 원망했을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시련은 시련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고통은 고통으로 머물지 않습니다. 폭풍과 같은 비극을 겪은 인간은 생각 속에서 다시 그 소용돌이 안으로 뛰어듭니다. 당장 내 몸과 마음에 입은 상처를 치료하기도 벅찬데 굳이 그 이유를 찾아 덧없이 헤매입니다. 스스로 자기를 정죄하고 비난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여인이 경험하는 가장 깊고 깊은 절망 속에서 나오미가 어떻게 반응했는 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본문 6절 함께 읽겠습니다. 

6 그 여인이 모압 지방에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듣고 이에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여

우리가 가진 개역개정 성경은 국어 어법을 살려서 원인을 먼저 설명하고 그 결과 나오미가 어떻게 행동했는지를 묘사합니다. 하지만 구약 원문은 그렇지 않습니다. 나오미의 행동을 먼저 보여주고 그 이유를 알려줍니다. 총신대 구약학 김지찬 교수님의 번역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그녀가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 하였다.
모압 지방에서 들었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나오미는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속에 주저 앉아 있지 않았습니다. 마냥 슬퍼하고 눈물만 흘리지 않았습니다. 일어나 돌아오려 하였습니다. ‘일어나다.’, ‘돌아오다.’ 너무나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동사입니다. 우리 자신의 경험으로나 역사를 볼 때마다 위기를 이겨내는 가장 중요한 행동입니다. 어둠 속에서 일어나 빛을 향해 돌아가야 합니다. 누구나 다 인정하는 명백한 진리입니다.

그러나 문제가 있습니다. 어렵다는 사실입니다. 모두 알고는 있습니다. 다리에 힘을 주고 질척이는 현실의 땅을 딛고 일어나야 합니다. 하나님의 생명과 은혜를 향해 돌이켜 나아가야 합니다. 하지만 그러기에는 너무나 지칠 때가 많습니다. 도무지 힘이 나지 않고 의지가 꺾입니다. 어느샌가 고통에 익숙해져 비극의 구덩이 한 가운데 고개를 숙이고 계속 누워있는게 더 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나오미는 어떻게 그런 놀라운 결단을 내릴 수 있었을까요? 과연 무엇이 그녀를 일어나게 하고 돌아오게 했을까요? 바로 주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보시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돌보다”로 옮긴 히브리어는 <파카드>입니다. 구약에서 300번 넘게 등장하기 때문에 사실 의미를 정확하게 파악하는게 쉽지 않습니다. 그중에서 절반이 상급자가 하급자를 향한 적극적인 행동을 묘사합니다. 그런 까닭에 일반적으로 “세심하게 돌보다” 혹은 “주목하다”라는 의미로 이해합니다. 

그런데 그중에서도 하나님이 주어인 경우 인간을 “방문하다”라는 뜻으로 가장 많이 쓰입니다. 즉, 백성의 치열한 삶 한 복판으로 주님이 찾아오신 행동을 가리킵니다. 주님의 생생한 임재를 생생하게 표현합니다. 하나님을 만나 현재 삶을 새롭게 이해하고 놀라운 변화를 경험하는 은혜를 드러내 보여줍니다. 주님께서 한 때 기근으로 황폐했던 땅에 오셔서, 자기 백성을 먹이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나오미에게 들려온 소식입니다. 절망에 빠진 그녀를 일으키고 돌이킨 복음입니다. 여기서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나오미는 자기가 여전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소중하게 품고 있습니다. 비록 남편과 두 아들을 잃은 처량한 과부신세가 되었고, 고향을 떠나 낯선 땅에서 오랜 세월을 나그네로 지냈지만 그럼에도 자신이 하나님이 돌보시고 먹이시는 백성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인 우리 삶 깊숙이 찾아오시어 돌보시고 먹이신다는 복음을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때로 우리에게도 폭풍같은 시련이 찾아옵니다. 숱한 좌절과 실패로 마음이 무너지고는 합니다. 억울한 비난과 오해로 지쳐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싶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럴수록 생명의 말씀을 붙잡고 다시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이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선포하신 하나님 나라를 품어야 합니다. 불안과 욕망에서 돌이켜 하나님의 은혜와 평화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그런 우리 모두를 하나님께서 품어 안으시고 새로운 희망의 길을 열어주실 줄 믿습니다. 그 길을 오늘도 기쁨으로 걸어가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자녀를 사랑으로 돌보시고 먹이시는 하나님.
때때로 휘몰아치는 폭풍같은 시련들을 만납니다. 상처입은 몸과 마음으로 지쳐 쓰러지곤 합니다. 그런 저희를 일으키고 돌이키도록 말씀을 들려주시고 복음을 붙잡게 하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자녀들을 찾아오시고 새 길을 열어보이신 주님의 사랑을 마음에 품게 하여 주시옵소서. 진리로 자신을 살피며 고난 받은 이웃을 따뜻하고 보듬고 돌보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생명의 떡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