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3월 23일 일요일

마가복음 9장 2~9절 “산 위에서 산 아래로”

2025년 3월 21일, 승리교회 금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마가복음 9장 2~9절 “산 위에서 산 아래로”

2 엿새 후에 예수께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시고 따로 높은 산에 올라가셨더니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7 마침 구름이 와서 그들을 덮으며 구름 속에서 소리가 나되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하는지라
8 문득 둘러보니 아무도 보이지 아니하고 오직 예수와 자기들뿐이었더라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어느 날 예수님께서 제자 세 명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오르셨습니다. 바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성경이 그들의 이름을 기록한 방식을 주목해야 합니다. 신약 원문에는 각 제자 이름 앞에 ‘정관사’가 붙어 있습니다. 헬라어 정관사는 영어 정관사 ‘the’와 비슷하게, 각각의 존재를 주목하는 기능을 합니다. 따라서 어색하나마 본문 2절 앞부분을 직역하면 이렇습니다.

육일 후에 예수께서 ‘그를’ ‘베드로를’, 그리고 ‘그를’ ‘야고보를’, 그리고 ‘그를’ ‘요한을’ 따로 데리고 높은 산으로 가셨다.

마가복음이 이렇게 이 세 명의 이름을 한 명, 한 명씩 힘주어 부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요? 그들이 6일 전에 겪었던 사건과 본문 말씀이 매우 긴밀하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라고 물었습니다. 그 질문에 베드로는 ‘주는 그리스도’시라고 자신있게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비로소 당신이 고난을 겪으시고 죽임 당하신 후에 다시 살아나신다는, 복음의 핵심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제자들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동안 헛된 꿈에 가득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셔서 왕좌에 오르시면, 그 곁에서 호의호식하려던 기대가 산산이 무너져 내렸습니다. 특히 베드로가 무척 놀라며 불쾌해 했습니다. 불과 조금 전에 위대한 신앙 고백을 했던 그가 예수님을 붙잡고 흥분하며 따질 정도였습니다.

본문 2절은 예수님께서 바로 ‘그’ 베드로는 물론이고 곁에서 동조한 ‘그’ 야고보와 ‘그’ 요한을 따로 데리고 산에 오르셨다고 기록하였습니다. 이를 통해 6일 전의 그 긴장과 갈등이 여전히 본문 아래에 도도히 흐르고 있음을 밝힙니다. 

이 때, 세 제자가 예수님과 함께 산을 오르는 어색한 모습을 떠올려 보시길 바랍니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음산하게 흔들거립니다. 새들의 울음소리가 귀청을 날카롭게 할퀴고 지나갑니다. 바위들이 기괴한 모습으로 웅크리고 그들을 노려봅니다. 제자들로서는 그 모든 풍경이 마치 자기들을 비웃는 것 같습니다. 

눅눅한 욕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부끄러움, 성급한 행동에 대한 자책, 자신들의 수고를 몰라주는 스승에 대한 원망. 이 모두가 뒤엉킨 채, 그들은 무거운 발걸음을 내디뎠습니다. 낡은 신발이 거친 산길과 맞닿아 일으키는, 섬뜩한 불협화음이 잔인한 적막 속을 비집고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겹게 도착한, 어느 이름 모를 높은 산 위에서 제자들은 예수님의 놀라운 변화를 목격하였습니다. 3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3 그 옷이 광채가 나며 세상에서 빨래하는 자가 그렇게 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희어졌더라

아무리 깨끗이 빨래해도 나올 수 없는 찬란한 빛이 예수님으로부터 뿜어져 나왔습니다. 이 때, “광채”로 옮긴 헬라어 단어는 신약성경에서 유일하게 여기에만 등장합니다. 따라서 그 순간 주님에게 나오는 빛은 흔히 볼 수 있는 이 세상의 광선이 아닙니다. 신약성경의 다른 그 어떤 단어로도 표현할 수 없는 너무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채였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4절 말씀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4 이에 엘리야가 모세와 함께 그들에게 나타나 예수와 더불어 말하거늘

변화된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났습니다. 이 때, 구약의 수많은 위대한 인물 가운데 특별히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이 함께 등장했다는 사실이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왜냐하면 둘 다, 구약에서 진정한 메시아를 드러내는 결정적인 증인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모세와 관련해서 신명기 18장 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5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 가운데 네 형제 중에서 너를 위하여 나(모세)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일으키시리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을지니라

모세는 하나님께서 훗날 자신과 같은 예언자를 이스라엘 가운데 세우실거라고 예고했습니다. 이 말씀대로 하나님께서 수많은 예언자를 백성 가운데로 보내셨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예수님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같은 참된 예언자가 또다시 자신들에게 나타날 것을 갈망했습니다. 그들은 민족의 고난을 힘겹게 헤쳐 가며, 모세가 찾아오길 간절히 기대했습니다. 그가 하나님의 풍성하고 온전한 뜻을 명확하게 드러내 보여줄 것을 마음 깊이 고대했습니다.

엘리야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말라기 4장 5절 읽어 드리겠습니다.

5 보라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기 전에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

하나님께서는 예언자 말라기를 통해, 훗날 당신의 백성에게 “엘리야”를 보내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따라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모세와 마찬가지로, 엘리야 역시 언젠가 그들 곁에 다시 올 것을 기대 했습니다. 엘리야가 메시아의 오심을 바르게 알려줄 거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그런 까닭에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주님 오실 길을 예비한, 세례자 요한을 가리켜서 “엘리야”라고 기록했습니다.

이렇게 “모세와 엘리야”, 이 두 사람은 이스라엘 백성이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리고 기다렸던 예언자입니다. 그들이 언젠가 다시 나타나, 참된 메시아가 누군지 똑똑히 알려 줄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두 사람이 마침내 제자들 앞에, 그것도 이 세상에 다시없을 화려하고 찬란한 빛을 비추시는, 예수님 곁에 분명히 나타났습니다.

이것이 제자들에게 무엇을 의미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왜 당신의 복음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도리어 화를 내고 원망을 쏟아 놓은 어리석은 제자들, 그 베드로와 그 야고보와 그 요한을 데리고 산으로 가셔서 이 놀라운 광경을 보여주셨을까요? 

그들의 의심과 실망에도 불구하고, 예수님 당신께서 온 세상을 구하고 다스리시는 참된 주님이심을 분명히 드러내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은 모세와 엘리야로 대표되는 예언자들의 증언과 일치합니다. 예수님은 이 진리를 제자들이 도저히 부정할 수 없도록 눈부신 영광 가운데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들의 연약한 믿음을 다시 일으켜 세워 경배 받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알아갈 때, 늘 기쁘고 즐거울 수만은 없습니다. 지치고 힘든 순간들을 마주합니다. 복음의 핵심인 십자가는 인간의 그릇된 탐욕과 정면으로 부딪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참을 수 없이 불편하고 당황하게 합니다. 

사실, 고난과 죽음을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거칠게 따져 물었던 베드로의 모습은, 우리 모두의 솔직한 마음을 대신한 행동입니다. 그러므로 바로 “그 제자들”에게 당신의 참되고 찬란한 영광을 비추신 주님을 따라, 우리 역시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산 밑에서는 결코 넓게 멀리, 제대로 볼 수 없습니다. 지금 서 있는 곳의 정확한 위치와 풍경을 온전히 알기 위해서는 더 높은 산 위로 올라가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저마다의 문제를 마냥 끌어안고만 있다면, 결코 해결할 수 없습니다. 혼란 속에 주저 앉아만 있어서는, 절대로 갈등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숨 막히는 삶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아름답게 빛나는 주님의 영광을 잠잠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야구 경기에서 1, 2점차의 긴박한 승부를 매듭짓는 투수를 가리켜 ‘마무리 투수’라고 부릅니다. 우리나라에는 삼성 라이온즈의 오승환 선수를 많은 사람이 역대 최고로 인정합니다. 특히나 저는 전성기 삼성 라이온즈에 의해 번번이 우승이 좌절됐던, 넥센 히어로즈 팬이었기 때문에 쓰린 가슴으로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 오승환 선수가 벌써 10년도 넘는 예전에 했던, 인상적인 인터뷰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이 때 그는 묵직한 돌 직구를 던지며 리그를 압도하는 절정의 기량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러다 시즌 중에 가벼운 부상을 당해 이례적으로 이틀간 쉬었습니다. 그를 대신해 그 해 데뷔한 신인 선수가 등판했습니다. 첫 날은 아쉽게도 승리를 놓쳤지만, 이튿날에는 무사히 세이브에 성공했습니다.

마침 그 신인 선수는 오승환 선수의 룸메이트였습니다. 이미 전설이 된 선배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이렇게 말하며 다독였습니다. “마운드에서 다른 생각을 할 줄 알아야 한다.” 경험이 부족한 어린 투수가 숨막히는 승부처에서 상대편의 노련한 타자를 상대 하는 건 무척 어렵습니다. 대부분은 포수의 글러브만을 보고 공 던지기 바쁩니다.

하지만 오승환 선수는 반대로 가야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인터뷰 기사의 마지막 단락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오승환도 마운드에 오르면 알게 모르게 ‘딴 짓’을 한다. 오승환의 습관은 이따금 먼 곳을 바라보는 것이다. 오승환은 ‘공을 받아들고 한번쯤 경기장 밖을 쳐다보곤 한다. 먼 곳을 바라보면 포수가 가까이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고 했다. 오승환이 ‘최고의 직구’를 던지는 비결 중 하나다.”

기사를 읽으며 야구 외적으로도 참 중요한 교훈을 깨달았습니다. 삶의 치열한 문제와 직면할 때, 오히려 먼 곳을 바라보는 여유가 너무나 중요합니다. 정확히는 하나님의 아름다운 영광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의 숱한 시련을 이겨낼 용기와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바로 이것을 위해 지금 우리는 이 소중한 금요일 밤에 함께 모여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또한 삶의 여러 고단함에도 불구하고, 매 주일을 지켜 예배를 드립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당장 눈앞에 신비로운 일들이 화려하게 펼쳐지지 않습니다. 모세와 엘리야가 예배당에 나타나지도 않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예배는 주님의 위대한 영광으로 나아가는 가장 소중한 은총의 도구입니다. 예배 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주님의 사랑과 뜻을 함께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는 결코 발견할 수 없는, 복음의 생명을 온전히 누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 무엇보다 예배를 소중히 여겨야하는 이유입니다.

또한 순 모임을 비롯한 여러 소그룹을 더욱더 사모하며 모이시길 바랍니다. 각종 양육 훈련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작고 건강한 다양한 모임을 통해 예배하는 가운데, 주님께서 또 다른 빛깔의 풍성한 은혜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마저 어렵다면 매일 단 1분이라도 핸드폰을 잠시 꺼두고, 방이든 차 안이든 조용히 주님의 영광을 묵상하시길 권합니다. 단언하건대, 그러한 산 위의 시간이 여러분의 내면을 참으로 건강하고 풍요롭게 할 줄 믿습니다.


또한 우리가 본문에서 “산 위를 향해야” 한다는 깨우침과 함께, 굳게 명심해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산 위에만” 머물러 있는 걸 원치 않으십니다. 5~6절 함께 읽겠습니다.

5 베드로가 예수께 고하되 랍비여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사오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하사이다 하니 6 이는 그들이 몹시 무서워하므로 그가 무슨 말을 할지 알지 못함이더라

예수님의 찬란한 영광뿐만 아니라 그분 곁에 선 모세와 엘리야를 바라본 베드로는 너무나 놀랐습니다. 감격과 동시에 극심한 공포에 사로잡혔습니다. 그래서 그만 예수님의 마음을 신중하게 헤아리지 못했습니다. 대신에 자신이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른 채 어리석은 욕망을 쉽게 내뱉었습니다. 바로, 영광스런 산 위에 함께 머무르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를 위해 각각 천막을 치고 거기에 계속 살자고 스승에게 건의했습니다. 

그 때, 아버지 하나님께서 구름 가운데 나타나셔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그의 말을 들으라.” 그 순간, 제자들의 눈앞에 펼쳐졌던 신기한 광경이 모두 사라졌습니다. 이어서 주님은 그들이 진정 마음 깊이 담아 두어야 할, 진리를 몸소 행동으로 가르쳐 주셨습니다. 9절 말씀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9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경고하시되 인자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시니

예수님은 더 이상 산 위에 머물지 않으시고 제자들을 데리고 산 아래로 내려오셨습니다. 그러면서 엄중하게 경고하십니다. 당신이 죽음을 이기시고 다시 살아나기 전까지 그들이 그곳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이해되십니까? 한 번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그 때,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보여주신 그 모습 그대로, 영광스럽고 찬란한 빛에 둘러 싸여 산 위만 줄곧 계시다면 어떻게 될까요? 더 이상 가난하고 힘들게 살지 않아도 됩니다. 사람들의 경배만을 받으며, 얼마든지 편하고 여유롭게 살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주님께 아무런 손해가 없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굳이 산 아래로 내려 가셨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답을 얻기 위해 본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사건을 주목해야 합니다. 마가복음 9장 17~18절 말씀, 화면 보시면서 함께 읽겠습니다.

17 무리 중의 하나가 대답하되 선생님 말 못하게 귀신 들린 내 아들을 선생님께 데려왔나이다 18 귀신이 어디서든지 그를 잡으면 거꾸러져 거품을 흘리며 이를 갈며 그리고 파리해지는지라 내가 선생님의 제자들에게 내쫓아 달라 하였으나 그들이 능히 하지 못하더이다

예수님과 제자들은 산 아래에서 한 소년을 만났습니다. 그 아이는 귀신들려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처참한 광경을 외면하지 않으시고 귀신을 내쫓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산 위에서, 산 아래로 내려가신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산 아래로 가야만 사람들의 땀과 눈물로 질퍽거리는 땅을 밟을 수 있습니다. 산 아래로 가야만 약하고 소외된 이들을 껴안을 수 있습니다. 산 아래로 가야만 마침내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관련하여 그림 하나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이 그림은 르네상스 3대 거장 중에서도 가장 탁월한 기량을 인정받는, 라파엘로 산치오의 유작 “그리스도의 변모”(Transfiguration, 1518-20) 입니다. 이 작품은 본문에 묘사된 주님의 찬란한 변화를 웅장한 화법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여기서 눈여겨 볼 점은 그가 단지 예수님의 영광만을 그리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아래쪽 우편을 자세히 보시길 바랍니다. 확대한 그림을 보여 드리겠습니다. 



라파엘로는 변화산 사건의 본질을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산 위에서 보이신 주님의 눈부신 영광과 산 아래, 귀신들린 소년의 고통 사이의 긴장과 조화를 명확하게 이해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두 사건을 함께 한 화폭에 담았습니다. 두 장면이 하나로 합해질 때에만 복음의 양면이 가지는 균형을 비로소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거듭 바라며 당부합니다. 주님의 찬란한 영광을 소망하며 저마다의 영적 산 위에 오르시기 바랍니다. 그 곳에서 하나님을 경험하는 신비를 소중히 여기시길 바랍니다. 바로 거기에 우리의 영혼을 참으로 살리는 생명의 길이 놓여 있습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가 산 위에만 머물러 있는 것을 결코 원하지 않으십니다. 그렇다면 절대로 예수님과 더불어 십자가를 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지으시고 다스리시는, 온 세상 가운데 하나님 나라를 넓힐 수 없습니다.

부디 마음 깊이 새기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예배를 사모하며 교회 안에 모이는 이유는, 더욱 당당히 교회 밖을 향해 흩어지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해야 하는 까닭은, 이웃에게 사랑의 언어를 나누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날마다 성경을 묵상해야 하는 목적은, 그 말씀을 저마다의 삶으로 향기롭게 번역하기 위함입니다. 

숨 가쁘게 흘러온 승부를 매듭지으려 마운드 위에 오른 투수가, 좀 더 좋은 공을 던지기 위해서 때때로 멀리 하늘 위에 눈길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아서는 안 됩니다. 좀 더 먼 곳에 시선을 둔 궁극적인 목적은 또 다시 포수의 글러브를 응시하고, 그 곳을 향해 전력투구 하는 것입니다.

이렇듯 성도는 산에서 내려가기 위해 올라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소중한 진리를 잊어버린 채 산 아래에만 주저 앉아서는 안 됩니다. 혹은 산 위에만 머물러 있지도 말아야 합니다. 그것은 마치 십자가 없는 부활, 혹은 부활 없는 십자가처럼 철저히 뒤틀리고 그을린, 병든 신앙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산 위에서의 예수님과 산 아래에서의 예수님 모두 마음에 품어야 합니다. 복음의 진리를 참으로 깨닫고 전하기 위해 담대히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인생의 모순과 낯선 진리로 말미암아, 당황하고 힘겨워하는 우리를 산 위로 이끄십니다. 바로 거기서 놀랍고도 위대한 영광을 보여주십니다. 따라서 온 우주 가운데 유일한, 주님만의 찬란한 빛이 머무는 예배의 자리를 향해 눈길을 두어야 합니다.

동시에 그 빛을 가슴 깊이 품고 산 아래, 가난하고 연약한 이들을 향해 나아가시길 바랍니다. 그러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주님께서 거룩한 정관사와 함께, 사랑을 담아 부르시고 날마다 이끌어 주실 줄 믿습니다.


기도 
영광의 주 하나님
고단한 삶을 살아가며 때때로 번민과 갈등에 사로잡히곤 합니다. 주님께 실망하며 이루 말할 수 없는 원망이 솟아오르기도 합니다. 이 모든 시련을 이겨내기 위해 예배의 산 위를 오릅니다. 그곳에서 예수님의 고유한 광채를 마주하며 새 힘을 얻게 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산 위에만 머무르고자 하는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우리나라 안팎의 고난 받는 사람들, 살아갈 희망을 잃고 슬픔에 사무쳐 신음조차 제대로 낼 수 없는 이들을 향해, 복음을 들고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을 본받아 그들과 함께 아파하고 눈물 흘리며 주님의 뜻을 넓히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3월 20일 목요일

"하나님의 이름들, 그 맥락과 의미" 2쇄 출간


작년 정산서에서 1쇄 재고가 600권 넘는 걸 확인했다.
빨라도 올해 말은 지나야 다 팔릴 거라 예상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달도 안 돼 1쇄가 모두 나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마침 "단단한 기독교 시리즈"가 개정 중이어서 2쇄는 새로운 표지를 입었다. 저자 소개도 수정했다.

뭉클한 감사를 고백한다.
부디 이 작은 책을 손에 쥔 이들에게 하나님의 이름에 담긴 온기와 생기가 전해지길 축복한다.

알라딘 http://aladin.kr/p/pzvB7
교보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6038199
yes24 https://www.yes24.com/product/goods/143590184




2025년 3월 13일 목요일

히브리서 11장 8~16절 “믿음을 따라 살다가”

2025년 3월 12일, 승리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히브리서 11장 8~16절 “믿음을 따라 살다가”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9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10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12 이러므로 죽은 자와 같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의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이 생육하였느니라
13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14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15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그는 믿음을 따라 멀리 떠나왔습니다. 하지만 아무 것도 이루지 못했습니다. 1889년 10월 2일, 한 호주 청년이 부산항에 내렸습니다. 긴장과 설렘이 섞인 표정 위로 낯선 가을 바람이 스쳐 지나갔습니다. 그의 이름은 죠셉 헨리 데이비스(Joseph Henry Davies)입니다. 데이비스는 어려운 환경을 딛고 젊은 나이에 교육가로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제 가정을 꾸리고 여유를 누리며 살아도 누구도 뭐라고 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오랫동안 가슴 깊이 간직했던 소명을 잊지 않았습니다. 복음 전파의 일꾼으로 자신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에 순종하였습니다. 어느 날 데이비스는 조선 선교의 필요성과 급박성을 호소하는 글을 읽고 결심을 굳혔습니다.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단의 제1호 조선 선교사로 파송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구한말 참으로 척박했던 이 땅에 발걸음을 내딛고 부산을 거쳐 서울에 도착했습니다.

그 후 그는 금세 다른 선교사들과 친해졌습니다. 선교사 공의회의 서기가 될 정도로 실력도 인정받았습니다. 그렇지만 데이비스는 안주하지 않았습니다. 더욱더 험난한 길을 선택했습니다. 이제 서울에는 선교사들이 충분하다고 판단했습니다. 새로운 선교지를 찾기 위해 도보로 기나긴 답사 여행을 떠났습니다. 부산을 목적지로 하고 무작정 길을 나섰습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3주간의 무리한 여정 가운데 몸이 극도로 쇠약해졌습니다. 그 결과 천연두에 감염되었고 폐렴까지 겹쳤습니다. 겨우 부산에 도착하긴 했지만 금세 사경을 헤맸습니다. 결국 다음 날인 1890년 4월 5일, 그가 조선 땅을 밟은 지 육 개월 만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그 때 그의 나이는 불과 서른세 살 이었습니다.

너무나 황망한 죽음입니다. 앞날이 촉망받는 유능한 청년이 과감히 헌신하며 선교지로 향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아 계시다면, 당연히 그에게 커다란 성과를 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희생에 따른 결실을 얻기는커녕, 채 꽃 피우기도 전에 허무한 결과를 맞닥뜨리곤 합니다. 그럴 때마다 힘을 잃고 헤매게 됩니다.

데이비스 선교사만의 경우가 아닙니다. 사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따른 다는 것은 곧 ‘떠남’을 의미합니다.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주님으로 인격적으로 고백한다는 건 죄의 질서와 이별을 뜻합니다. 따뜻한 풍요를 주었던 익숙한 삶의 방식으로부터 멀어지는 결단입니다. 그 과정에서 많은 기회와 소유를 포기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 희생에 대한 보상이 극적으로 주어지지 않습니다. 대부분 정반대입니다. 더 큰 상실을 겪고 방황 하곤 합니다. 후회가 밀려올 때도 많습니다. 떠나온 그곳을 계속 돌아보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심지어는 존재 자체를 의심할 때도 있습니다. 도저히 부정할 수 없는, 신앙 여정의 이면입니다. 


이와 같은 모순을 성경에서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인물이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그 역시 고향을 벗어나 멀리 떠나왔습니다. 하지만 별 이룬 것 없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의아하게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조금만 더 차근히 살펴보면 그가 너무나 스산한 인생을 살아왔음을 알게 됩니다.

아브라함이 75세였을 때 ‘야훼’라는, 너무나 낯선 하나님이 그에게 찾아오셔서 지목하여 부르셨습니다. 그 만남은 지금까지 그가 익히 알아왔던, 모든 신이 거짓이었음을 직감적으로 깨닫게 하였습니다. 그동안 방황하며 오랫동안 갈구했던 참 진리를 마침내 발견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너무나 놀라운 약속을 하셨습니다. 창세기 12장 2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내용은 명확합니다. 바로 큰 민족을 이루어 그의 이름을 널리 떨치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는 지금껏 그저 아들 하나만이라도 낳아서 자기 이름을 이어주길 간절히 바랐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주님은 전혀 다른 높은 차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마치 한 모금의 생수를 구한 사람에게 드넓은 호수를, 한 움큼의 흙을 원한 사람에게 드높은 산을 허락하신 것과 비슷합니다.

그리하여 아브라함은 과감히 믿음의 여정을 떠났습니다. 본문 8절 말씀을 새번역 성경으로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8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고, 장차 자기 몫으로 받을 땅을 향해 나갔습니다. 그런데 그는 어디로 가는지를 알지 못했지만, 떠난 것입니다. 

우리가 두고두고 본받을 만한 너무나 위대한 신앙입니다. 믿음에 관한 성경에서 가장 눈부신 묘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냉정하게 물어야 합니다. 아브라함은 그 믿음의 결과로, 하나님으로부터 약속받은 것을 정말 얻었을까요? 우리에게 익숙한, 수천 년 간의 종교 전통을 잠시 멀리 치워두고 철저히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선뜻 그렇다고 답하기 어렵습니다.

그는 주님의 찬란한 언약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살았습니다. 대신 숱한 시련을 겪었습니다. 권력자들의 기세에 눌려 아내를 누이라고 무려 두 차례나 속이는 굴욕을 겪었습니다. 자식처럼 키운 조카 롯에게 배신당해 많은 재산을 잃었습니다. 타 들어가는 속을 부여잡고 아무리 기다려도 사라의 태는 도무지 열리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나이 백 살에 아들 하나를 힘들게 낳았습니다. 하지만 그 이삭을 불태워 바치라는 잔인한 요구를 하나님께로부터 들었습니다. 물론 우리는 그 사건의 훈훈한 결말을 알고 있습니다. 아들의 목숨을 무사히 건졌습니다. 그럼에도 그날, 그 모리아 산 위에서 아브라함의 영혼이 얼마나 끔찍하게 뒤틀렸을지, 감히 상상조차 하기 힘듭니다.

그렇게 아브라함은 한 생애를 보냈습니다. 기나긴 나그네 길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아내 사라가 먼저 누워 있는 막벨라 굴에서 장례를 치렀습니다. 그 모습을 창세기 25장 9절은 이렇게 쓸쓸하게 묘사합니다. 

9 그의 아들들인 이삭과 이스마엘이 그를 마므레 앞 헷 족속 소할의 아들 에브론의 밭에 있는 막벨라 굴에 장사하였으니 

고요히 잠든 아브라함의 곁을 두 아들, 이삭과 이스마엘이 지켜주었습니다. 물론 장례식에 이 두 사람만 있지는 않았을 겁니다. 후처 그두라를통해 낳은 자녀들과 여러명의 종들도 분명 함께 했을 겁니다. 하지만 그 중에서 아브라함의 이름을 온전히 이을 아들은 이삭 혼자입니다. 게다가 이삭 역시 아버지처럼, 결혼하고 꽤 오랜 뒤에 느지막이 쌍둥이를 낳았습니다. 즉, 아브라함이 생전에 직접 두 눈으로 본 명실상부한 후손은 이삭과 야곱과 에서, 이렇게 겨우 세 명에 지나지 않습니다. 

현대인의 눈에는 평범한 장례식으로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자식의 숫자를 망자의 명예와 동일시했던 옛 사람들에게는 단순히 넘길 장면이 아닙니다. 다른 족장들은 당시 대가족 문화를 따라 적어도 수십 명, 많으면 백 명이 훌쩍 넘는 자손들에 둘러싸여 성대하게 장사를 치렀을 것입니다. 

이와 비교하면 아브라함의 장례 풍경은 지극히 초라합니다. 주님께서 약속하신 하늘의 허다한 별이나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는 너무나 차이가 큽니다. 큰 민족을 이루어 이름을 창대하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언약이, 공허한 허풍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런 까닭에 아브라함 부부가 이 땅에서 걸어왔던 고단한 인생길을 본문 13절 전반부에서 이렇게 정리합니다.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 했(습니다.)”

너무나 아프고 쓰린 문장입니다. 비장하고 서글픈 삶의 질곡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우리가 감히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아브라함을 위대한 믿음의 조상으로 따를 수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요? 본문 13절 전체를 새번역 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3 이 사람들은 모두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그들은 약속하신 것을 받지는 못했지만, 그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반겼으며, 땅에서는 길손과 나그네 신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아브라함의 믿음을 정확히 꿰뚫어 보았습니다. 아브라함은 단지 그 시대 다른 사람들처럼, 많은 아들을 줄줄이 낳아 으스대고 떵떵거리길 바라지 않았습니다. 더 정확히는 언약의 깊이를 헤아렸습니다. 거기에 온 삶을 걸고 진심을 담아 아멘을 외쳤습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고백합니다. 바로 ‘나그네’입니다.

이를 14절은 ‘본향 찾는 자’라고 표현합니다. 아브라함은 자기 삶의 결정적 운명과 진정한 평가가 지금, 이곳에서 끝나지 않음을 굳게 믿었습니다. 당장 나에게 얼마나 많은 돈과 명예가 있는지를 따지고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고된 나그네 생활을 주저 없이 포기 했을 것입니다. 수천 년 전에 이미 고도의 거대한 문명을 이루었던, 고향 땅 우르에 돌아가 다시금 안락한 삶을 누리려 하였을 것 입니다.

대신 아브라함은 하나님께서 설계하시고 세우실 튼튼한 기초를 가진 하늘 고향, 즉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였습니다. 본문 16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아브라함 부부의 시선은 더 먼 곳을 향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입니다. 그들의 하나님이 기꺼이 이루실 언약의 절정입니다. 그 하늘 본향은 공간으로나 시간으로나 저 멀리에 있습니다. 지금 이 곳에서 볼 때는 까마득하고 흐리기만 합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11절 말씀과 같이 하나님의 미쁘심, 즉 신실하심을 고백하였습니다. 비록 남들 보기에는 대단하지 않은 인생길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삶의 순간순간, 그에게 먼저 다가오시는 주님과 동행을 경험하였습니다. 

아브라함이 벧엘에서 처음으로 제단을 쌓고 주님의 이름을 불렀을 때, 조카 롯에게 바보처럼 다 양보하고 황량한 땅에 남겨진 그에게 하나님께서 다가오셨을 때, 어느 한 낮에 세 사람의 모습으로 찾아 오셔서 “내가 하려는 것을 아브라함에게 숨기겠느냐”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리고 무엇보다 갓 태어난 아들 이삭의 신비로운 눈망울과 마주쳤을 때, 아브라함은 자신의 믿음을 시작으로 이루실 하나님의 위대한 구원 역사를 점점 더 깨달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그는 믿음을 따라 살다가 죽었습니다.

비록 사람들 눈에는 그의 죽음이 허망해 보일지 모릅니다. 막벨라 굴 앞에서 거행한 쓸쓸한 장례식 모습이 그런 감정을 더욱 부추깁니다. 어쩌면 그를 두고 주변 사람들이 뒤에서 손가락질하며 비웃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의 믿음은 결코 헛되지 않았습니다. 그 위대한 언약을 완전하게 이루시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아브라함이 어스름하게 보았던 하나님 나라를 또렷하게 선포하셨습니다. 막연하게 경험했던 주님의 다스림을 온전히 이루어가셨습니다. 세상의 질서와 전혀 다른 삶의 방식을 보이셨습니다. 갈릴리 시골길을 따라 몸소 나그네 길을 걸으셨습니다. 그 길 끝에, 마침내 십자가에서 죽임당하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주님으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은 곧, 아브라함의 본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그를 믿음의 조상으로 존경하는 까닭입니다. 동시에 아브라함의 삶을 통해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믿음으로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길 진심으로 소망합니다. 그런데 믿음이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인간의 지극히 자연스러운 의문을 억지로 억누르는 무모한 의지력이 아닙니다. 무작정 내달리는 맹신도 아닙니다. 참된 믿음이란 아브라함처럼 하나님을 신뢰하며, 인생의 그 어떤 모래 바람과 폭풍우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하늘 본향을 향해 내딛는 걸음입니다.

아브라함이 그토록 사모했던,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한 성, 곧 새 예루살렘을 요한계시록은 이렇게 묘사합니다. 계시록 21장 2~4절 제가 봉독해 드리겠습니다.

2 또 내가 보매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이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니 그 준비한 것이 신부가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더라 
3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성도라 할지라도 삶은 녹록치 않습니다. 여전히 질병은 몸과 마음을 괴롭힙니다. 가난은 씻을 수 없는 수치심을 안겨줍니다. 가정 안의 끊임없이 문제가 고통으로 내몹니다. 때로는 그런 자신이 너무나 초라하게 보입니다. 복음이 공허하게 들립니다. 하나님의 언약이 거짓으로 느껴지기도 합니다. 여전히 세상에는 처참한 사망과 애통과 통곡과 아픔이 가득합니다. 그것에 비해 주님은 너무나 무기력한 것만 같습니다.

그렇지만 쉽게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대신,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하늘에 있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해야 합니다. 현실을 도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세만을 바라보라는 뜻도 아닙니다. 다만, 믿음을 따라 이 땅에서 나그네로 살다 죽어간 모든 사람의 눈물을 직접 닦아주시는 하나님, 새예루살렘에서 영원히 함께 하시는 신실하신 주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그러하셨듯이, 우리의 믿음을 결코 헛되이 하지 않으시고 진정한 결실을 이루심을 소망하시길 바랍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소개한 죠셉 헨리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그를 파송한 고국에 큰 충격을 안겨 주었습니다. 데이비스가 숨을 거두고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890년 5월 7일, 호주 빅토리아 장로교 해외선교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작성하였습니다.

“해외선교위원회에서는 우리가 한국에 보낸 첫 번째 선교사인 데이비스 목사의 죽음이라는 큰 손실을 기록할 것을 원한다. 그의 열성적 헌신, 학자로서의 탁월한 재능, 주목할 만한 지속적인 신앙생활, 다른 사람에 대한 강렬한 영향력 등은 새로운 선교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데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우리 주님께서는 스데반이 일찍 부름을 받고 안식과 보상을 받았던 것처럼 데이비스를 분명하게 축복하셨다. 우리는 많은 사람들이 그의 죽음에 감화를 받아 그의 정신을 알리고 그의 열심을 본받아 우리의 옛 형제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영광의 왕관을 받기를 바란다.”

호주 장로교는 이 때부터 본격적으로 조선 선교를 시작하였습니다. 이 땅 곳곳에 교회뿐만 아니라 학교와 병원을 설립하고, 민족의 고난에 함께하며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했습니다.  

따라서 데이비스 선교사의 죽음은 분명 허망해 보이지만 결코 허무하게 끝나지 않았습니다. 도저히 예상할 수 없었던 눈부신 복음의 결실을 거두었습니다. 우리가 그 중 일부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마땅히 주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순종해야 합니다. 나그네로서의 정체성을 명심해야 합니다. 주어진 삶의 현장에 충실하되 눈길은 하늘 본향을 향해야 합니다. 주님의 언약을 깊이 헤아리고 진심으로 신뢰해야 합니다. 

언젠가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이 땅에서 믿음을 따라 살다가 세상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어쩌면 그 모습이 사람들 눈에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처럼 남루하게 보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믿음의 여정을 기쁨으로 묵묵히 이어가시길 바랍니다. 우리를 전혀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기꺼이 언약을 맺으시며, 마침내 새 예루살렘을 완성하실 그 하나님께서 참으로 신실하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아브라함의 믿음을 본받길 소망합니다. 우리 역시 아브라함처럼 본향을 사모하며 인생의 발걸음을 옮기는 나그네임을 고백합니다. 비록 지금 당장 이 세상에서 거두는 약속의 결실은 작고 초라해 보일지 모릅니다. 
하지만 그런 저희를 통해 이루실 주님의 다스림은 지극히 크고 위대하심을 믿습니다. 그 믿음 따라 주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고 부르심에 순종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언약 하신 그대로 새 예루살렘을 완성하시고 저희를 부르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2월 24일 월요일

창세기 50장 15~21절 "선으로 바꾸사"

2025년 2월 24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50장 15~21절 "선으로 바꾸사"

15 요셉의 형제들이 그들의 아버지가 죽었음을 보고 말하되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우리가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지나 아니할까 하고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18 그의 형들이 또 친히 와서 요셉의 앞에 엎드려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19 요셉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하나님을 대신하리이까
20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많은 백성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21 당신들은 두려워하지 마소서 내가 당신들과 당신들의 자녀를 기르리이다 하고 그들을 간곡한 말로 위로하였더라


기도의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성도님들께 차츰 다가오는 봄날과 같은 따뜻한 은혜가 함께 하길 축복합니다.

야곱이 죽었습니다. 총리 부친의 죽음을 추모하는 장엄한 장례로 온 나라가 들썩였습니다. 하지만 유족의 분위기는 무척 서늘합니다. 야곱의 아들들에게 애도는 사치입니다. 슬퍼할 겨를이 없습니다. 아버지를 잃은 상실보다 훨씬 더 큰 공포가 그들을 압도했습니다. 바로 동생 요셉의 복수입니다. 그들은 수십 년 전 자기들이 저지른 행동이 얼마나 추악한 짓인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날 형들은 아버지가 끔찍이 아끼는 동생, 요셉을 죽이려 하였습니다. 그러다 마침 근처를 지나던 미디안 상인에게 노예로 팔아넘겼습니다. 아버지에게는 피 묻은 옷을 들고 가, 그가 짐승에 물려 죽었다고 속였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살인 미수와 청소년 인신매매와 기만죄입니다. 그 결과 아버지와 동생에게 어마어마한 고통을 안겨주었습니다.

그런데 거짓말 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요셉이 이집트 총리가 되어 그들 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시대, 어느 누구도 견줄 수 없는 막강한 권력자로 등장 해 형들에게 자기 정체를 드러냈습니다. 그들은 너무나 큰 충격에 빠져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그 순간 요셉은 이렇게 자신을 소개합니다. “나는 당신들의 아우 요셉이니 당신들이 애굽에 판 자라”(창 45:4). 짧은 문장 안에 그동안 겪었던 험난한 인생사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그런 다음 곧바로 요셉은 형들을 안심시키며 이렇게 말합니다. 창세기 45장 5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5 당신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요셉은 분명히 선언했습니다. 그들을 용서했습니다. 복수심을 접었습니다. 도무지 잊을 수 없는 감격적인 순간입니다. 이 장면이 형들의 기억에 선명히 남았을 겁니다. 그렇지만 인간의 감정과 기대는 쉽게 깨지기 마련입니다. 형들이 보기에 요셉의 호의는 어쩌면 아버지 야곱을 위한 한시적인 배려와 위선일지도 모릅니다. 설령 진심이라 하더라도, 아버지가 안 계신다면 싸늘한 분노로 금세 바뀔 수 있습니다. 

마침내 야곱이 숨을 거두었습니다. 여러 복잡한 생각이 그들 마음을 헤집으며 소용돌이 쳤습니다. 본문 15절 말씀과 같이, 당대 최강 제국의 절대 권력자인 “요셉이 혹시 우리를 미워하여”, “그에게 행한 모든 악을 다” 갚는다면 도무지 감당할 수 없습니다. 결국 그들이 선택할 수 있는 최후의 방법은 요셉을 찾아가 간곡히 비는 겁니다. 16~17절 함께 읽겠습니다.

16 요셉에게 말을 전하여 이르되 당신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명령하여 이르시기를 17 너희는 이같이 요셉에게 이르라 네 형들이 네게 악을 행하였을지라도 이제 바라건대 그들의 허물과 죄를 용서하라 하셨나니 당신 아버지의 하나님의 종들인 우리 죄를 이제 용서하소서 하매 요셉이 그들이 그에게 하는 말을 들을 때에 울었더라

요셉의 화려한 총리 관저 안이 무거운 공기로 가득했습니다. 형들이 요셉 앞에 고개를 숙인 채 바들바들 떨며 야곱의 유언을 언급합니다. 아버지의 권위는 그를 설득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명분입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요셉에게 형들을 용서하라고 말했다고 전합니다. 그러니 제발 지난날 자기들이 행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간청합니다. 그들의 이야기를 사실, 믿기 어렵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할 중요한 말을 직접 하지 않고, 굳이 오랫동안 불신했던 다른 아들들에게 했을 리 없습니다. 

요셉은 결국 참았던 눈물을 터뜨립니다. 울먹이는 목소리로 형들에게 속 마음을 거듭 털어 놓습니다. 20~21절 말씀을 화면 보면서 새한글 성경으로 함께 읽겠습니다.

20 형님들이 뜻하신 것은 저를 두고 나쁜 일을 하는 것이었지만, 하나님이 뜻하신 것은 그것을 좋은 일로 바꾸시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보시다시피 많은 사람의 생명을 보존해 주셨습니다. 21 이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제가 형님들을 계속 잘 모시고 형님들의 어린아이들도 잘 돌보아 드리겠습니다.” 요셉은 형들을 위로하며 형들의 마음에 와닿도록 말했다.

앞서 읽어드린 45장 5절을 반복하는 내용입니다. 그 날, 오랜 세월이 지나 형들을 다시 만나 요셉이 했던 말은 진심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그들을 용서하였습니다. 분노에 사로잡혀 복수의 칼날을 휘두르지 않았습니다. 광기에 휩싸여 원한을 갚으려 않았습니다. 눈부시게 아름답고 성숙한 태도입니다. 너무나 놀랍고 기적적인 장면입니다. 물론 그도 사람인지라 감정의 앙금이 남아 있었을 겁니다. 때때로 바람처럼 화가 마음에 불어왔을 겁니다. 

너무나 당연합니다. 여러분이 요셉이라고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형들에게 사로잡혀 구덩이에 던져졌을 때, 상인들에게 끌려 낯선 땅에 도착했을 때, 보디발 아내의 모함으로 억울하게 옥살이를 할 때, 자기의 꿈 해몽으로 풀려난 왕실 관리가 은혜를 저버리고 방치 했을 때, 그의 마음에 몰아닥쳤을 분노를 떠올려보시길 바랍니다. 한 사람이 도무지 감당하기 벅찬 고통의 절정입니다. 복수하고 싶은 여러 얼굴이 끊임없이 아른거렸을 겁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절망을 겪은 누구나 그렇듯 미움의 최종 목적지는 바로 자기 자신이었을 겁니다. 지난날을 돌이켜 보며 수없이 자책했을 겁니다. 아버지의 편애를 받고 기세등등 해 오만하게 굴었던 어린 시절을 두고 부끄러움에 사무쳤고, 보디발의 집에서 적당히 타협하며 눈치껏 행동하지 못했던 완고함을 후회하며, 파라오의 술을 담당하는 신하에게 단단히 확답을 받지 못한 미련함을 괴로워하며 거듭 곱씹었을 겁니다.

하지만 요셉은 마침내 비극을 딛고 일어났습니다. 지난 날 겪었던 참혹한 폭력을 극복했습니다.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드러내 보였습니다.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하늘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비추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미래로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았기 때문입니다. 바로 거기에서 진정한 회복과 반전의 길이 열립니다.

총리가 되기 전 요셉의 일생은 패배와 좌절로 얼룩져 있었습니다. 철부지로 자란 청년이 미숙한 판단으로 여러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많은 사람에게 순진하게 이용당하며 짓 밟혔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자기 인생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았습니다. 그동안 겪은 고난의 의미를 비로소 이해했습니다. 그것은 모두 필요한 일이었습니다. 주님의 마음으로 지나온 아픔을 새롭게 돌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미래가 인간의 과거를 변화시켰습니다.

요셉의 꿈풀이는 주술이나 점술이 아닙니다. 그는 여러 꿈을 꾸고 해석하며 주님으로부터 다가오는 미래를 느꼈습니다. 그 한 복판에서 하나님의 숨결로 호흡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깨달았습니다. 인간의 그 어떤 악도 하나님께서 선으로 바꾸십니다. 그 어떤 어둠도 하나님은 빛으로 바꾸십니다. 그 어떤 절망도 하나님은 희망으로 바꾸십니다. 이러한 진리가 그로 하여금 혹독한 시련을 견디고 버티고 살아남게 하였습니다. 찬란한 용서와 사랑을 이루게 하였습니다. 형들과 조카들을 끝까지 잘 돌보겠다고 약속하며 위로합니다.

20세기에 여러 처참한 전쟁 범죄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가장 잘 알려진 사건은 이른바 ‘홀로코스트’라고 부르는, 나찌 독일에 의한 유대인 학살입니다. 이러한 역사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는지, 그리고 거대한 폭력 앞에 얼마나 무력한지를 처절히 확인하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러운 궁금증이 생깁니다. 그토록 거대한 비극을 통과한 사람들이 어떻게 아픔을 이겨내었을까요? 그 끔찍한 상처를 딛고 삶을 이어갈 수 있을까요? 영국 최고 랍비를 역임한 조너선 색스라는 학자가 있습니다. 이분은 구약 성경 연구로 세계적으로 권위를 인정 받고 존경을 받는 분입니다. 그는 유대인 대량 학살의 생존자들이 어떻게 삶에 대한 애착을 지킬 수 있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오랜 탐구 끝에 마침내 이유를 깨달았습니다. 조금 길지만 그가 책에 쓴 내용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마침내 나는 깨달았다. 그들 대부분은 과거에 관해 말하지 않았다. 심지어 혼인한 배우자들에게도, 또한 자녀들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인생을 창조했다. 그들은 그곳의 언어와 관습을 새로 배웠다. 직업을 찾았고, 경력을 쌓았다. 혼인해서 아이들을 낳았다. 자기 가족을 잃은 생존자들은 서로에게 확대된 가족이 되었다. 

그들은 앞을 바라보았지, 뒤를 되돌아보지 않았다. 우선 그들은 미래를 건설했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때로 40년이나 50년이 지나고 나서야 자신들의 과거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가족들에게, 그 다음에는 세상에 자신들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우리는 먼저 미래를 건설해야 한다. 그 다음에야 비로소 과거를 슬퍼할 수 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 미래로부터의 부르심으로 들어오신다. 마치 그 분이 시간의 먼 지평선으로부터, 우리로 하여금 여정을 떠나도록, 그리고 우리가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는 방식으로 우리가 그것을 위해 창조된 과업을 실행하도록 우리를 손짓해서 부르시는 것을 듣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것이 바로 소명의 참 뜻이다. 소명은 문자적으로 ‘부르심, 사명이며, 우리를 호출하는 과업이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가 여기에 있기를 원하셨기 때문이며, 우리가 이루어야 할 과업이 있기 때문이다. 그 과업이 무엇인지를 발견하는 일은 쉽지 않으며 흔히 많은 시간이 걸리며 잘못된 출발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들 각자에게는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행하도록 부르시는 무엇인가가 있다. 아직 이루지 못한 그 미래의 시간은 우리로 하여금 완성하기를 기다리고 있다. 

(중략) 먼저 미래를 건설하라. 그 다음에 과거를 슬퍼할 수 있다.”

유대인 인종학살과 같은 참극은 아니더라도, 야곱과 같은 비극은 아니더라도, 땅을 밟고 살아가는 누구나 아픔을 품고 있습니다. 지나온 인생을 돌아보면 후회와 원망으로 가득합니다. 내가 겪은 끔찍한 폭력을 떠올립니다. 동시에 좀 더 강하고 현명하지 못했던 자신을 꾸짖고 미워하기도 합니다. 심지어 실패하고 끝난 삶처럼 느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더욱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그 안에 담긴 놀라운 신비를 발견하시기 바랍니다. 지금 이곳에 나를 세우신 뜻을 살피며 부르심에 응답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 시간 안에서, 주님이 주시는 미래 속에서, 과거의 그 어떤 절망도 결코 영원하지 않습니다. 그 어떤 눈물도 계속 흐르지 않습니다. 그 모두는 아름다운 변화의 재료가 됩니다. 그런 까닭에 사도 바울은 이렇게 외칩니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후 5:17)

그러므로 인생의 거대한 폭풍에 휩쓸릴 때, 도무지 헤어 나올 수 없는 깊고 깊은 아픔 속에 괴로울 때, 지나간 날에 대한 후회로 힘겨울 때, 하나님께서 요셉에게 행하신 놀라운 은혜를 마음에 품으시길 바랍니다. 몸소 사람이 되어 온갖 상처를 입으며 이 땅을 딛고 살아가신 예수님께서 열어 보이실 미래를 기대하며 다시 일어서시길 바랍니다. 

인생은, 세상은, 사람은 우리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생명과 구원과 희망의 역사를 이루어 가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온 생명을 구원하시는 하나님
요셉이 험난한 인생을 거치며 피운 용서의 꽃을 바라봅니다. 그가 고단한 시련을 통과하며 맺은 사랑의 열매를 발견합니다. 
마찬가지로 저희 삶에도 악을 선으로 바꾸시는 주님의 손길을 경험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하나님께서 열어가실 미래로 과거의 아픔을 넘어서며, 하나님께서 부으시는 은혜로 현재의 고난 가운데 주시는 소명을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2월 22일 토요일

이사야 43장 14~21절 “새로운 새로움”

2025년 2월 21일, 승리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이사야 43장 14~21절 “새로운 새로움”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시린 새벽을 깨우고 당신 품으로 나아온 자녀의 발길을 주님께서 기뻐 맞아 주실 줄 믿습니다. 본문 18~19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하나님께서 새 일을 행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일을 기억하지도, 옛날 일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이전 일”과 “옛날 일”에 여러분은 과연 무엇을 대입하시겠습니까? 많은 분이 너무나 비참했던 과거의 장면을 떠올리실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청소년 시절 이 말씀은 언제나 제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습니다. 이 구절을 가사로 한 찬양을 즐겨 불렀습니다. 그 시절, 무척 초라했던 저에게 주님께서 언젠가 행하실 화려한 새 일을 몹시 기대하였습니다.

그런데 혹시 아십니까? 우리는 때때로 거짓에 은혜 받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본래의 의도와 맥락을 무시하고 읽을 때, 성경을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실수를 종종 범하곤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언자가 포로 생활 중인 이스라엘을 향해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고 외친 “이전 일”과 “옛날 일”은 흔히 오해하듯이 어두운 지난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화려한 승리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16~17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이 두 구절이 묘사하는 찬란했던 과거가 무엇인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다름 아닌 출애굽 사건의 절정인, 홍해 바다가 갈라진 이적입니다. 앞에는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최정예부대가 쫓아오는 긴박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바다 가운데에 길을 내셨습니다. 

그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은 살아났고, 파라오의 군대는 홍해에 잠겨 전멸하였습니다. 이 극적인 장면은 ‘구원자’ 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줍니다. 따라서 출애굽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한 동시에 주목해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홍해 위에서 주님께서 구원자이심은 물론이고 ‘창조주’이심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것을 위해 참고해야 할 성경 말씀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1장 1, 2절입니다.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천지창조에 대한 분명한 선언과 더불어 그 창조사건 이전의 상황을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 속의 수면, 즉 물 위에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시는 모습입니다. 이 장면은 구약 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서아시아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결코 단순한 상황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묘사하는 “물”은 동네 개울이나 옹달샘이 아니라 거대한 바다를 가리킵니다. 그 자체로 “절망과 죽음”을 상징합니다. 즉, 땅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더욱 심화시키는 장소가 바로 이 ‘거대한 물’, 곧 바다 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수면 위를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께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말 ‘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이란 의미를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깊고 어두운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쪽에서부터 서서히, 그리고 강렬히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바람의 실체는 곧 성령님입니다. 흑암의 바다가 가진 힘은 성령님이 일으키신 바람으로 말미암아 차츰 균열과 위기에 빠져듭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 2절에서 묘사하는 천지창조 직전의 상황입니다. 

놀랍게도 이 장면은 홍해 바다가 갈라진 이적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에서 힘겹게 포로 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조상으로부터 전해진 천지창조와 출애굽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깨달음에 이르렀을까요? 이 두 사건의 연속성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진정 드러내 보이시려는 깊은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곧 우리를 살리신 분이시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라는 가슴 떨리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님의 ‘창조’와 ‘구원’ 사이의 긴밀하고 역동적인 상관관계입니다. 따라서 본문 15절에서 당신을 가리켜 “창조주”라고 일컬으신 하나님께서, 홍해 사건을 언급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의 창조와 구원이 분명, 한 뿌리로부터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왜 하나님께서는 아프고 우울한 기억이 아닌 감격적인 “출애굽 사건”을 잊으라 하셨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왜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또 다른 희망의 약속인지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주셨던 놀라운 은혜들을 잊으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난 날 홍해 바다 위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곧, 모든 혼돈과 공포를 제압하는 창조와 함께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사람에게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은혜로운 경험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새로움으로 사람들을 향해 달려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와 같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창조적인 상상력의 일부가 소개돼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절 후반 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이러한 표현이 구약성경 특유의 반복, 강조 법으로 20절에 계속하여 등장합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렇게 19절에 이어 20절이 계속 증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바벨론 포로 살이 하던 이스라엘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사막 길에 강물이 흘러넘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강물로 말미암아 포로 귀환 행렬에 참여한 무리가 목마름을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는 사막 생태계를 구성하는 승냥이와 타조 역시도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높인다는 파격적인 묘사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와 같은 예언자의 외침이 이루어 진다면, 그 언젠가 사막의 모든 생명체가 풍요로운 강물로 말미암아 소생과 회복을 경험한다면, 그 광야가 이전과 같겠습니까? 여전히 사람들 눈에 황무지로 보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닙니다. 광야는 더 이상 광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과 전혀 다른, 회복의 땅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새로운 구원은, 단지 그들이 겪는 고통의 일부를 고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상상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늘 행복한 추억들로 가득한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권면합니다. 더 이상 지난날에 얽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더욱이 옛 신앙 경험으로 오늘 우리 가운데 새롭게 이루실, 주님의 구원을 제한하지 말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이집트 탈출과 바벨론 포로 귀환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하는 새로운 희망으로 이끌어 주실 줄 분명히 믿습니다.

저는 대학교 4학년 때, 말 그대로 얼떨결에 과대표를 맡았습니다. 4학년 과대는 졸업 여행과 졸업 앨범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됩니다. 하지만 주변 선후배들의 도움 덕분에 무난히 한 해를 보냈습니다. 저로서는 이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나름의 값진 인생 성취였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 후 한 참 동안 그 성공의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사실입니다. 

대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한동안 저에게 이런 말버릇이 있었습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뜬금없이 불쑥, “사실, 제가 4학년 때 ‘과대’를 했었는데요. ......, 제가 예전에 ‘과대’ 했었을 때......, 제가 ‘과대’ 했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이렇게 알게 모르게 ‘과대’였던 과거를 계속 언급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불필요한 자기 자랑을 비장하게 늘어 놓는다는 것은, 그만큼 내면이 몹시 비루하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과거의 ‘은혜로운 추억들’까지도 과감히 떨쳐버리시길 바랍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그 모든 ‘옛 일’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검은 바다 위를 가르신 주님의 창조가 여전히 살아 숨 쉬어, 모든 삶의 여정을 날마다 새롭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를 더욱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앞에 주님께서 열어 가시는 새로운 길과 강물로 말미암아, 참 생명의 질서가 회복되는 이적을 함께 바라보며 거기에 기꺼이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그러므로 흑암을 뚫고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홍해를 가르고 백성을 이끄신 구원의 주님께 남은 일생을 내어 드려는 우리 모두 되길 바랍니다. 지음 받은 목적대로 온 삶을 통해 진정한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열린 길을 지나 우리에게 새로운 새로움으로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기도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 
주님께서 행하실 새로운 은혜를 기대합니다. 그 소망 가운데 지난날의 아픔뿐만 아니라 영광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하옵소서. 인간의 경험이 하나님의 얼굴 전체를 그려낼 수 없음을 명심하며 주님의 새로운 새로움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새롭게 열어주실 길을 기쁨으로 걸으며, 날마다 찬송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