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12월 12일 금요일

창세기 13장 “눈을 들어 둘러보아라”

2025년 12월 13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3장 “눈을 들어 둘러보아라” 찬송가 545, 542장

풍요는 갈등의 씨앗입니다. 인류 역사이래 곳곳에서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진리입니다. 성경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2절 말씀에 따르면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의 종들과 조카 롯의 종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졌습니다. 아브람은 아버지를 잃은 조카 롯을 아들처럼 키우고 돌보았습니다. 그가 성인이 되자 재산도 독립시켰습니다. 하지만 점점 불어난 가축들로 말미암아 함께 목축지를 공유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아브람이 결단을 내렸습니다. 롯에게 선택권을 주었습니다. 그가 살고 싶은 땅에 살게 하였습니다. 아브람의 매우 성숙한 인격을 확인할 수 있는 장면입니다. 그는 삼촌으로서 지닌 지위, 그동안 조카에게 아낌없이 베푼 재물에 대한 권리를 요구하며 롯을 윽박지르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평화를 선택했습니다. 평화를 위해 직접 희생했습니다. 체면과 자존심을 내려놓고 롯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하였습니다. 이때 롯이 어떻게 행동했을까요? 10절 함께 읽겠습니다.

10 이에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롯은 형식적인 사양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욕망이 강렬하게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물론 롯도 죄송하고 민망했을 겁니다. 자기를 거둬주고 지금까지 보살펴주신 인자한 삼촌에 대한 애틋하고 고마운 마음도 컸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포기하기에는 소알 땅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그의 영혼에 다가왔습니다. 여호와의 동산처럼 그리고 이집트처럼, 온 땅에 물이 넉넉한 그곳에서 농사도 목축도 모두 풍성한 결실을 안겨 줄 것만 같았습니다. 

동시에 성경은 묘한 암시를 남깁니다. 소알은 ‘소돔과 고모라’와 같은 평지 성읍입니다. 머지않아 일어날 동일한 심판의 장소입니다. 롯이 보기에 화려하고 찬란했던 그들의 풍요는 결국 죄악으로 이어져 준엄한 징계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즉, 좋은게 좋은게 아닙니다. 우리는 여기서 인간이 선망하며 우러러보는 시선이 얼마나 유한하고 어리석은 지를 깨닫습니다. 

또한 우리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바보같이 져주고 양보한 아브라함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해야 합니다. 14~15절 함께 읽겠습니다. 

14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15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눈을 들어 사방을 둘러보아라.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 당장 눈 앞에 보이는 현실에 연연하지 말라는 의미입니다. 지금 아브람이 서 있는 곳은 약삭빠른 롯이 외면한 땅입니다. 부족함이 많은 곳입니다. 또한 바보같이 조카에게 이득을 빼앗긴, 뒤늦은 후회와 쓰라린 배신감이 흐르는 공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그곳에서 시선을 돌려 온 사방을 바라보라고 말씀하십니다. 보이는 모든 땅을 아브람과 그의 자손에게 영원히 주겠다고 약속하십니다.

롯의 어리석은 판단과 전혀 다른 차원의 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것을 쟁취하고자 애씁니다. 어떻게든 속이고 빼앗고 이기려 듭니다. 그러한 경쟁과 대결에서 패했을 때 좌절에 빠지며 분노에 사로잡히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전혀 다른 삶의 길을 알려주십니다. 주님의 마음을 품고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고 기꺼이 져주는 사람에게 주시는 놀라운 은혜를 선포하십니다.

그 절정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인의 모습으로 비참하게 나무에 달려 숨을 거두셨습니다. 하지만 그 모든 죽음은 헛되지 않고 모든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통로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혼돈스런 삶에서 눈을 들어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떻게든 이기고 쟁취하고자 몸부림치는 대신 져주고 양보해야 합니다. 남 위에 올라 군림하고 힘을 휘두르는 대신 낮아지고 섬겨야 합니다. 그런 우리의 모든 헌신을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시어 온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일꾼으로 사용하실 줄 믿습니다.


기도
놀랍고 풍성한 사랑의 주 하나님
금세 심판받을 소알 땅의 화려함에 눈이 멀어, 어리석고 무례하게 행동한 롯의 모습에서 저희의 연약함과 유한함을 발견합니다. 또한 순진무구하게 손해를 택한 아브라함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습니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눈을 들어 주위를 둘러보는 믿음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주님께서 원하시는 일들에 동참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도 새로운 하루를 선물로 주신 은혜를 높여 찬양합니다.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십자가의 복음으로 다가가 기쁨으로 섬기고 나누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11일 목요일

창세기 12장 “부르심과 순종의 이면”

2025년 12월 12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2장 “부르심과 순종의 이면” 

새로운 시작이 열립니다. 창세기는 물론이고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단락에 들어섰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으로 완성될 구원 이야기의 본격적인 시작을 알리는 인물이 등장합니다. 바로 아브람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에게 떠나라고 말씀하시며 그 결과 얻을 복도 함께 약속 하십니다. 1~3절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3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아브람이 떠나야 할 곳은 그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입니다. 사실 이 셋 모두 같은 공간과 공동체를 반복해서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그는 지금껏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나라도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강력한 응집력을 자랑하는 집성촌들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그런 씨족 사회가 주는 든든한 기반을 등진다는 것은 굉장히 무모한 모함입니다. 

하물며 수천년 전 아브람 시대에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이 지닌 의미는 실로 막강합니다. 삶의 견고한 울타리이자 버팀목입니다. 게다가 고고학 발굴 결과 아브람이 살았던 ‘우르’는 당대 최고의 문명을 자랑하는 곳입니다. 버려두고 떠나기에는 너무나 화려하고 찬란한 공간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에게 풍성한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아브람은 ‘복’ 그 자체가 됩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복을 전하고 나누는 중심에 섭니다. 하나님께서 온 우주를 지으시며 선언하신 복이 다시금 그를 통해 세상에 퍼져나가게 됩니다. 너무나 눈부시고 찬란한 축복입니다. 아브람은 그 말씀 그대로 ‘믿음의 조상’으로 수많은 이들의 존경을 받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시선은 여기서 더 나아가야 합니다. ‘시작 이전의 시작’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창세기 11장 27절 이후 내용은 아브람이 부름 받기 전 상황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30절과 32절 제가 읽어 드리겠습니다.

30 사래는 임신하지 못하므로 자식이 없었더라

아브람 부부는 난임의 고통을 시달렸습니다. 이로 인한 갈등이 아브람 이야기 전반에 흐릅니다. 오늘날에도 난임은 너무나 무거운 아픔을 안겨줍니다. 고대인들에게는 한 층 더 엄중한 의미가 있습니다. 바로 ‘신으로부터 저주’입니다. 옛 사람들은 자녀가 없는 사람을 두고, 후손을 남길 가치가 없는 너무나 비참한 존재로 여겼습니다.

바로 아브람을 덮친 고난입니다. 조심스런 추측이지만, 아브람이 기존의 사회질서와 종교와 가치관을 과감히 던지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를 수 있었던 이유가 아마도 여기에 있을 것입니다. 즉, 철저히 무너지고 좌절했기에 세속의 흐름 그리고 인간의 탐욕과 전혀 다른 주님의 뜻을 기꺼이 따르는 모험을 감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여러분, 인생의 커다란 상실과 절망과 마주할 때. 심지어 하나님으로부터 버림받은 것 같은 깊고 깊은 암흑에 빠질 때. 더욱더 소망을 품으시길 바랍니다. 그 모든 시련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부르심에 잠잠히 귀 기울이게 하는 은혜의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도 주님의 뜻을 따라 담대한 믿음의 여정을 이어가며 복의 근원으로 살아가는 모두가 되시길 축원합니다.


기도
신실하신 주 하나님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견고한 삶의 터전을 과감히 떠나 여정을 내디딘 아브람의 믿음을 말씀 가운데 발견합니다. 그를 복의 근원으로 세우신 주님의 눈부신 언약을 확인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르심과 순종의 이면에 아브람 마음 깊은 곳에 얼룩진 쓰라린 흉터를 발견합니다. 
십자가의 어둠이 깊을수록 부활의 영광이 찬란하듯, 저희 삶에 찾아온 절망이 하나님의 희망으로 이어지는 은혜의 도구임을 고백합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담대히 믿음으로 걸어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오늘 하루 저희가 만나는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선하심을 전하고 나누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10일 수요일

창세기 11장 “내려오사 흩으시다”

2025년 12월 11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11장 “내려오사 흩으시다”

우리 삶의 언어를 다채롭고 풍성하게 펼쳐가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오늘 하루도 충만하길 축복합니다.

홍수 이후 새로운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다시금 사람들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하지만 여전히 연약하고 완악한 인간들은 또 다시 죄를 지었습니다. 급기야 악한 계획을 꾸미고 실행합니다. 바로 ‘바벨탑’입니다. 시날 평지에 모여 하늘에 닿는 높은 탑을 쌓아 올리려 하였습니다. 그런 하나님의 반응을 5절이 묘사합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5 여호와께서 사람들이 건설하는 그 성읍과 탑을 보려고 내려오셨더라

창세기 저자의 재치와 유머가 드러나는, 역설적인 장면입니다. 사람들 딴에는 하늘에 닿는 것과 같은 굉장히 높은 탑을 쌓았습니다. 땅에서 보기에는 너무나 웅장하고 거대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시선에는 정반대입니다. 굳이 내려와야 보일 정도로 극히 미미하고 작기만 합니다. 

우리는 이러한 장면에서 인간의 한계를 여실히 깨닫습니다. 인간이 제아무리 그럴듯하고 화려하게 쌓아올린 그 무엇도 하나님 보시기에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따라서 높은 학벌과 많은 재산과 찬란한 명예를 내세우고 자랑하며 각자의 바벨탑을 쌓으면 쌓을수록 허무하고 공허하게 됩니다.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외형적인 규모와 그럴듯한 성과를 자랑하는 곳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어떤 저명 인사가 있고, 어떤 힘을 가졌는지를 과시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종교 형식의 또 다른 바벨론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하나님께서 행하실 일들을 기대하며 겸손히 주님의 뜻을 따라야 합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헛된 계획을 무너뜨리셨습니다. 6~8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6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 후로는 그 하고자 하는 일을 막을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하게 하여 그들이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으므로 그들이 그 도시를 건설하기를 그쳤더라

하나님께서 진단하시는, 바벨탑 건설의 원인은 ‘언어가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단 하나의 언어, 욕망의 언어가 그들을 지배했습니다.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차단 되었습니다. 권력자들의 추악한 야망이 백성들을 사로잡았습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그들의 언어를 다르게 하셨습니다. 결국 바벨탑을 쌓아 올리는 계획은 좌절되어 그들은 흩어졌습니다.

이를 통해 우리는 건강한 공동체의 성격을 확인합니다. 다양한 언어가 살아 숨쉬는 곳이어야 합니다. 사도행전에 기록된, 성령 강림의 역사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날 마가의 다락방에서 성령님이 임하자 사람들은 각각 다른 언어로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다양한 생각과 가치관과 문화가 공존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도님들의 가정이, 우리 정배교회가, 그리고 대한민국이 그렇게 건강한 공동체 되길 축복합니다. 힘 있는 한두 사람이 탐욕과 권위의식에 눈이 멀어 내뱉는 빈곤한 단어가 아니라, 성령님의 임재로 말미암은 다채로운 빛깔의 언어로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바벨의 길이 아닌 하나님 나라의 길을 걷는 우리 모두가 되길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기도
만유의 주 하나님
하나님이 내려다 보시기에는 지극히 미미하나, 자기들 눈에는 거창한 탑을 쌓아올린 사람들의 모습에서 저희의 어리석은 죄악을 발견합니다. 헛되고 헛된 욕망의 성과를 자랑하기 보다는 잠잠히 주님의 마음을 헤아리며 십자가의 길을 따르는 저희가 되길 소망합니다.
저희 가정과 정배교회가 대한민국 가운데, 성령님께서 이끄시는 다채롭고 아름다운 언어로 가득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한두 사람의 오만과 독선이 아닌, 힘없고 소외된 이들을 비롯한 모든 이들의 소망이 자유롭게 오가는 건강한 공동체를 이루고 전하는 저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9일 화요일

창세기 9장 “덮어주는 사랑”

2025년 12월 10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9장 “덮어주는 사랑”

우리의 모든 허물을 덮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오늘 하루도 풍성히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철저히 망가진 한 사람을 발견합니다. 바로 노아입니다. 그는 지금 술에 취해 널브러져 있습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로 칭찬받던 모습과 너무나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노아가 왜 이렇게 무너졌을까요? 그런 그를 과연 어떻게 바라 보아야 할까요?

지금까지 읽은 창세기 이야기 맥락에서 현재, 노아의 상황을 헤아려 보시길 바랍니다. 한마디로 그는 재난의 한복판을 지나온 사람입니다. 사십일 동안 홍수가 내렸습니다. 땅의 모든 생물이 물에 잠겼습니다. 노아와 그의 가족들, 그리고 방주에 태운 동물들만 살아남았습니다. 

노아의 오랜 친구들, 친척들, 친밀하게 지냈던 마을 이웃들이 모두 숨을 거두었습니다. 퍼부어대는 빗소리 사이로 날카로운 비명이 방주를 뚫고 들려옵니다. 며칠 동안 이어지는 잔인한 절규 속에 노아는 몸서리치며 귀를 막았을지 모릅니다. 그리고 이보다 더 끔찍한 침묵이 이어집니다.

그렇게 노아는 살아남았습니다. 가족의 목숨은 무사히 건졌습니다. 하지만 거대한 비극을 경험한 사람의 삶은 그전과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잊으려 해도 그 때 그 참담한 순간이 불연 듯 떠오릅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보고 맛있는 것을 먹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손주들의 귀여운 재롱이 주는 행복도 그 때 뿐입니다. 망가지는 게 당연합니다. 어떻게 제정신일 수 있었겠습니까? 

결국 그는 포도주에 취하고 말았습니다. 알콜 때문인지, 마음 속에 지워지지 않은 상처 때문인지, 정체를 알기 힘든 열기에 옷도 하나 둘 벗었습니다. 벌거벗은 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술 주정을 하는 노인. 누가 봐도 볼썽 사납습니다. 그가 설령 과거에 놀라운 일을 이룬 의인이라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순간, 추한 술주정뱅이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성경은 그런 노아를 대하는, 명백히 대조적인 두 가지 태도를 보여줍니다. 술 취한 노아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둘째 아들 함입니다. 22절을 보면 함은 장막에서 아버지의 하체를 보았습니다. 우리가 가진 성경은 점잖게 완곡해서 번역했습니다. 하지만 ‘하체’에 해당하는 원문은 나체를 가리킵니다. 노아의 적나라한 상태를 보여줍니다. 그는 위신과 체면을 옷과 함께 모두 던져버리고 말았습니다.

함은 그런 아버지를 보았습니다. 곧바로 장막에서 나와 형과 동생에게 달려갑니다. 그의 표정에는 이미 비웃음을 가득합니다. 벌써 입가가 씰룩거리고 있습니다. 형제들에게 도착하자마자 노아의 추태를 폭로합니다. 지금 아버지가 얼마나 우스꽝스러운 모습인지를 희희덕거리며 떠들어댑니다. 그 말을 듣던 첫째 셈과 막내 야벳의 표정은 금세 굳어졌습니다. 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아버지의 장막을 향해 달려, 그와 전혀 다르게 처신합니다. 2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23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함과 달리 셈과 야벳은 가장 먼저 옷을 챙겼습니다. 수치스러운 아버지의 상태를 덮어줄 도구입니다. 그 옷을 어깨에 걸치고 뒷걸음쳐 들어갔습니다. 노아는 이미 술에 취해 인사불성입니다. 그럼에도 두 아들은 아버지의 부끄러움을 보지 않고 덮었습니다. 이 사실을 23절 후반부에서 강조합니다.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라고 굳이 다시 언급합니다. 

셈과 야벳이 함의 경박한 행동과 얼마나 달랐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술에서 깨어난 노아는 이 모든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 결과 함은 아버지의 저주를 받았습니다. 반면 셈과 야벳은 축복을 받습니다. 명확히 다른 태도에 따른 확연히 다른 결과입니다. 사실, 논란의 여지가 있습니다. 한순간의 실수에 대한 처벌치고는 너무나 가혹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간단히 판단할 문제가 아닙니다. 본문은 재난으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은 사람을 대하는 인류의 두 가지 태도를 고발합니다. 시련을 겪고 연약한 처지에 놓인 사람을 돌봐주는 것은 상식입니다. 너무나 명징한 양심의 방향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다릅니다. 세상사는 늘 상식과 양심대로 흘러가지 않습니다. 정반대의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아무런 죄 없이 끔찍한 폭력을 겪었음에도 공감을 받지 못할 때가 합니다. 심지어 억울한 모함을 겪기도 합니다. 더 나아가 잔인한 조롱과 혐오와 공격의 대상이 될 때도 있습니다. 역사 이래로 이념을 초월해 끝없이 반복해온 비극입니다. 그 가장 먼 과거에, 노아가 초라한 모습으로 쓰러져 있었고 그런 그를 함은 비웃었습니다.

반면에 그런 노아와 같은 사람들을 품어준, 셈 그리고 야벳과 같은 이들이 있습니다. 함부로 상처를 헤집지 않습니다. 무리하게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습니다. 경우 없이 차가운 도덕을 들이밀며 완벽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저 노아가 겪어온 고통 어린 순간들을 말없이 보듬어 줍니다. 수치를 덮어줍니다. 굴욕을 씻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통해 셈과 야벳을 축복하셨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그 두 사람을 본받을 것을 요구하십니다. 함의 어리석음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십니다. 이것을 위해 명심해야 합니다. 늘 셈과 야벳처럼 행동하거나, 항상 함처럼 처신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연약한 죄인인 우리는 모두 양 쪽을 수없이 오갑니다.

그러므로 잠잠히 자기를 돌아봐야 합니다. 내가 과연 다른 사람의 비극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그를 소중히 여기고 있는 지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그가 겪어왔던 절망적인 홍수를 들여다 봐야 합니다. 급기야 그렇게 망가질 수 밖에 없었던 내면 깊은 아픔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함께 아파하고 허물을 덮어줄 때 비로소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온전히 이 시대의 노아에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러하셨습니다. 우리의 모든 죄를 용서하고 품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숨을 거두시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러한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본받아 오늘 하루도 다른 이들의 허물을 덮어 주는 저와 여러분 되길 축원합니다.


기도
위대한 용서와 속죄의 주 하나님.
깊은 상심과 좌절로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 노아를 향한 아들들의 전혀 다른 반응을 말씀을 통해 확인하였습니다. 아버지의 허물을 조롱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는 함에게서 저희 연약함을 발견합니다. 뒷걸음쳐 아버지에게 다가가 몸을 덮어주는 셈과 야벳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놀라운 사랑을 확인합니다. 
저희 역시 예수님을 본받아 이웃의 연약함을 용서하고 덮어주는 성숙한 인격과 신앙을 갖추게 하여 주시옵소서. 때때로 삶에 지쳐 무너진 저희의 전 존재를 품어 안으시는 하나님의 넓고 크신 사랑을 의지하며 살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2025년 12월 8일 월요일

창세기 8장 “기억과 예배”

2025년 12월 9일, 정배교회 새벽기도회 설교, 목사 정대진
창세기 8장 “기억과 예배”

우리를 항상 기억하시고 품으시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이 성도님들과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온 땅을 덮는 홍수가 그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피조물에게 행하시는 매우 중요한 동사를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바로 ‘기억’입니다. 1절 제가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1 하나님이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 하나님이 바람을 땅 위에 불게 하시매 물이 줄어들었고

하나님은 온 땅에 가득한 물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셨습니다. 바람이 불어와 물을 마르게 하셨습니다. 얼핏 당연해 보입니다. 하지만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닙니다. 만약 하나님이 그저 분노하고 심판만 하는 존재라면 죄를 지은 사람들을 물로 쓸어버린 것으로 충분히 만족할 겁니다. 그렇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알려주는 주님의 성품은 그렇지 않으십니다. 방주 안에서 무려 1년을 보낸 당신의 의인 노아와 그 가족들, 그리고 함께 있는 동물들을 기억하셨습니다.

우리말 번역은 한글 어순을 살려서 ‘기억하사’가 1절 중간에 나옵니다. 그러나 구약 원문을 그렇지 않습니다. 1절 초반부를 직역하면 ‘그리고 기억하다.’입니다. 바로 앞절인 7장 24절은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라고 기록합니다. 그러니까 온 땅에 물이 넘치자 마자 주님은 곧바로 먼저 기억하셨습니다. 방주에 태운 피조물들을 즉시 기억하셨습니다.

이것은 노아 홍수의 목적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하나님은 중요한 관심사를 보여줍니다. 심판이 아니라 구원입니다. 분노가 아니라 사랑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인 요한복음 3장 16절을 잘 아실겁니다. 그런데 그 못지 않게 다음절인 17절을 주목해야 합니다.

17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분명 세상을 심판하시지만 심판 그 자체에 목적이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심판은 구원을 향해 나아가는 통로에 지나지 않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구원과 사랑입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은 당신이 이루시는 구원에 참여한 노아와 그의 가족들을 기억하셨습니다. 

방주 안에서 기약 없이 물 위에 떠도는 막막한 심정을 헤아리셨습니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두려움과 불안에 시달리는 그들의 처지를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 정하신 때에 마침내 땅이 드러났습니다. 노아의 가족들이 드디어 방주 밖으로 나왔습니다. 이 때 노아가 행한 일을 주목해야 합니다. 20절 함께 읽겠습니다.

20 노아가 여호와께 제단을 쌓고 모든 정결한 짐승과 모든 정결한 새 중에서 제물을 취하여 번제로 제단에 드렸더니

노아가 방주에서 나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사, 즉 예배입니다. 하나님의 기억 안에 들어온 사람들, 하나님의 헤아림을 받은 사람들이 해야 할 마땅한 반응입니다. 동시에 또 다른 기억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억하신 사람들은 그렇게 자신이 받은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한 행동이 바로 예배입니다. 따라서 예배는 곧 기억의 순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가족들과 같습니다. 인생 여정이 어디로 흘러갈지 모릅니다. 때때로 노아가 맡았던 습한 바다 내음과 노아가 들었던 동물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불안과 공포에 시달릴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부디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기억합니다. 우리의 모든 처지와 형편을 헤아리시고 마침내 방주를 멈추고 나오게 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각자를 향한 주님의 사랑을 마음 깊이 품고 곱씹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렇게 교회에 모여 기도하며 하루를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동시에 주일 예배를 더욱 소중히 드리고, 또한 일상 가운데 예배의 삶을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기도
크고 넓으신 사랑의 주 하나님
방주 안에서 1년간 정처 없이 떠돈 노아의 고난과 어려움을 기억하신 주님. 마찬가지로 저희 삶의 여러 아픔과 고난 또한 주님께서 함께 하시며 간절히 구하는 기도에 귀 기울이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어보이실 구원을 기대하며 날마다 믿음으로 누리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감사함으로 기억하는 주일 예배와 일상의 예배가 아름다운 조화를 이루게 하여 주시옵소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