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덕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2019년 1월 9일, 목사 정대진
이사야 43장 14~21절 “새로운 새로움”
14 너희의 구속자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 여호와가 말하노라 너희를 위하여 내가 바벨론에 사람을 보내어 모든 갈대아 사람에게 자기들이 연락하던 배를 타고 도망하여 내려가게 하리라
15 나는 여호와 너희의 거룩한 이요 이스라엘의 창조자요 너희의 왕이니라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
저는 부산에서 태어나긴 했지만 다섯 살 때 이사 간 대전에서 대부분의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그런 까닭에 ‘나중에 대전에서 목회할 생각이 있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는 단 한 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아니요!’라고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대전이라는 도시나 거기에 사는 사람들이 싫어서가 아닙니다. 그곳을 배경으로 보낸 저의 지난날이 결코 돌이켜 보고 싶지 않은 온통 암울한 무채색으로 뒤덮여 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저는 불과 일 년 반 넘게 지낸 이 곳 대구에 훨씬 더 많은 애정과 추억이 생겼습니다. 이곳에서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님들과 함께 보내는 지금이 그 어느 때보다 무척 행복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우리는 얼마 전 새해를 맞아 함께 모여 송구영신예배를 드렸습니다. 해가 새롭게 바뀔 때마다 가져야할 마음 자세를 슬기로운 조상들은 ‘송구영신’(送舊迎新)이라는 사자성어로 정리하였습니다. ‘옛 것을 떠나보내고 새 것을 맞이하는 태도’야말로 1월 1월을 기념하며 새삼 명심해야할 중요한 지혜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떠나보내고 싶고, 떠나보내야 할 과거는 과연 무엇입니까?
아마도 대부분 저와 마찬가지로 힘겹고 슬펐던 기억들일 겁니다. 마치 공포영화 속에 등장하는 집요한 유령처럼 언제나 주위를 배외하는 괴로운 순간들일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저는 청소년 시절부터 20대 초반까지 오늘 본문 18절과 19절을 즐겨 암송하며, 이 구절을 가사로 한 찬양을 자주 부르곤 하였습니다. 두 절 말씀 제가 읽겠습니다.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18절에 기록된,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아야 할 “이전 일”과 “옛날 일”에 과연 무엇을 대입하시겠습니까? 많은 분들이 너무나 비참했던 과거의 장면들을 떠올리실 겁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여서 이 말씀은 언제나 제 가슴을 벅차게 만들었습니다. 그 시절, 초라했던 저에게 주님께서 언젠가 행하실 앞으로의 화려한 새 일이 몹시도 기대 되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혹시 아십니까? 우리는 때때로 거짓에 은혜 받는다는 사실 말입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을 본래의 의도와 맥락을 무시하고 읽을 때, 성경을 자신의 소원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이용하는 실수를 종종 범하곤 합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에서 예언자가 포로생활 중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고 외친 “이전 일”과 “옛날 일”은 흔히 오해하듯이 어두운 지난날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화려한 승리의 역사를 가리킵니다.
18절 바로 앞에 있는 16~17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6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다 가운데에 길을, 큰 물 가운데에 지름길을 내고 17 병거와 말과 군대의 용사를 이끌어 내어 그들이 일시에 엎드러져 일어나지 못하고 소멸하기를 꺼져가는 등불 같게 하였느니라
이 두 구절이 묘사하는 찬란했던 과거가 무엇인지 혹시 아시겠습니까? 다름 아닌 출애굽 사건의 절정인 홍해바다가 갈라진 이적입니다. 앞에는 바닷물이 가로막고 있고 뒤에는 이집트의 최정예부대가 쫓아오는 긴박한 상황이 펼쳐졌습니다. 그 때, 바다 가운데 길을 내신 하나님의 일방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이스라엘 백성은 살아났지만 파라오의 군대는 전멸하였습니다. 이 극적인 장면은 ‘구원자’ 이신 하나님의 모습을 가장 역동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출애굽은 이스라엘 신앙 공동체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구약 성경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입니다.
또한 동시에, 이러한 홍해 바다위에서 주님께서 구원자이심은 물론이고 ‘창조주’이심이 분명히 드러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이것을 위해 반드시 참고해야할 성경 말씀이 바로 우리가 잘 아는 창세기 1장 1, 2절입니다. 제가 읽어드리겠습니다.
1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2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이 말씀은 하나님께서 행하신 천지창조에 대한 분명한 선언과 더불어 그 창조사건 이전의 상황을 함축적이고 상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혼돈’으로 가득한 세상 속의 수면, 즉 물 위에 하나님의 영이 움직이셨다는 사실입니다. 이 모습은 구약성경의 배경이 되는 고대 서아시아의 세계관을 염두에 두고 볼 때 결코 단순한 상황이 아닙니다.
창세기 1장에서 묘사되는 “물”은 동네 개울이나 옹달샘 정도가 아니라 거대한 바다를 가리킵니다. 그 자체로 “절망과 죽음”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즉, 땅의 혼돈과 공허와 흑암을 더욱 심화시키는 장소가 바로 이 ‘거대한 물’, 곧 바다 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 수면 위를 ‘하나님의 영’, 즉 성령님께서 움직이고 계십니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우리말 ‘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루아흐>는 ‘바람’이란 의미를 함께 가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상상해보시길 바랍니다. 깊고 어두운 바다가 드넓게 펼쳐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한 쪽에서부터 서서히, 그리고 강렬히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합니다. 그 바람의 실체는 곧 성령님이시며 흑암의 바다가 가진 힘은 그로 말미암아 차츰 균열과 위기에 빠져듭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기 1장 2절에서 묘사하는 천지창조 직전의 상황입니다.
놀랍게도 이 장면은 홍해바다가 갈라진 이적과 매우 흡사합니다. 그렇다면 바벨론에서 힘겹게 포로 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조상들로부터 전해진 천지창조와 출애굽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어떤 깨달음에 이르렀을까요? 이 두 사건의 연속성을 통해 주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을 향해 진정 드러내 보이시려는 깊은 뜻은 과연 무엇일까요?
그것은 바로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는 곧 우리를 살리신 분이시고, 또한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으신 분이시다.’는 가슴 떨리는 신앙 고백입니다. 주님의 ‘창조’와 ‘구원’ 사이의 긴밀하고 역동적인 상관관계입니다. 따라서 본문 15절에서 스스로를 가리켜 “창조주”라고 일컬으신 하나님께서 홍해에서의 구원사건을 언급하신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주님의 창조와 구원이 분명, 한 뿌리로부터 이어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올바로 이해할 때 비로소, 왜 하나님께서는 아프고 우울한 기억이 아닌 감격적인 “출애굽 사건”을 잊으라 하셨는지, 그리고 그 말씀이 왜 절망의 선언이 아니라 또 다른 희망의 약속인지를 온전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18~19절 말씀 다함께 다시 한 번 읽겠습니다.
18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19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 이제 나타낼 것이라 너희가 그것을 알지 못하겠느냐 반드시 내가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리니
앞서 자세히 살펴본 바와 같이 18절에서 말씀하시는 “이전 일과 옛날 일”은 어두운 과거가 아닙니다. ‘출애굽’이라는 이스라엘 최고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구체적으로 이르는 말입니다. 또한 그것은 지금 민족적 고난을 겪고 있는 그들로서는 다시금 하루 속히 일어나길 무엇보다 간절히 소망하는, 따라서 결코 잊고 싶지 않은 황홀한 신앙 경험입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냉정하게도 그 모든 일들을 더 이상 기억하지도 생각하지도 말라고 이르십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말씀은 이제부터는 출애굽과 정반대되는 절망과 고통의 선언일까요?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과거에 주셨던 놀라운 은혜들을 잊으라고 말씀하신 까닭은 그것들을 넘어서는 전적으로 새로운 구원을 약속하시기 위함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지난 날 홍해 바다 위에서 보여주신 것처럼 우리의 창조주이시며 구원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행하시는 구원은 곧, 모든 혼돈과 공포를 제압하는 창조와 함께합니다. 그렇기에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사람들에게 익숙해질 수 없습니다. 과거에 있었던 은혜로운 경험과 일치하지 않습니다. 완전한 새로움으로 사람들을 향해 달려옵니다.
오늘 본문에는 이와 같은 주님의 능력에 대한 창조적인 상상력의 일부가 소개돼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19절 후반 부에 기록된 바와 같이 “광야에 길을 사막에 강을” 내시는 하나님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구약성경 특유의 반복, 강조 법으로 20절에 계속하여 등장합니다. 제가 읽겠습니다.
20 장차 들짐승 곧 승냥이와 타조도 나를 존경할 것은 내가 광야에 물을, 사막에 강들을 내어 내 백성, 내가 택한 자에게 마시게 할 것임이라
이렇게 19절에 이어 20절이 계속 증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바벨론 포로 살이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향 예루살렘으로 돌아오는 사막 길에 강물이 흘러넘치게 하겠다는 말씀입니다. 그러한 강물들로 말미암아 포로 귀환 행렬에 참여한 무리들이 목마름을 해결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예언자는 사막 생태계를 구성하는 승냥이와 타조 역시도 그 장면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높인다는 파격적인 묘사도 하였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문득 떠오르는 단편 소설이 있습니다. 바로 프랑스 작가 장 지오노가 1953년에 발표한 “나무를 심은 사람”입니다. 참고로 이 작품은 같은 제목의 애니메이션도 무척 유명합니다. 유튜브를 통해 쉽게 찾아 볼 수 있습니다. 미처 못 보신 분들에게 강력히 추천 드립니다.
이 소설은 물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황량한 산자락을 지나던 한 사람이 그 곳에서 묵묵히 나무를 심는 양치기 노인을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그 때 그 노인은 이미 3년간 무려 10만 그루의 도토리나무를 심었습니다. 하지만 뜨거운 태양과 바람으로 그 자취는 전혀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런 그의 수고는 어쩌면 너무나 어리석고 미련해 보였습니다.
그 후 한 참 시간이 지나 여행자가 다시 그 산을 찾아갔을 때 놀라운 관경을 목격하였습니다. 묵묵히 생명의 씨앗을 심은 손길이 마침내 결실을 맺어 오랫동안 메말랐던 그 땅이 아름답고 울창한 숲을 이루었습니다. 바로 그곳에서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아픔을 잊고 즐겁게 어울리며 휴식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비록 소설 속 상황이지만 그 꽃과 나무 사이를 뛰노는 아이들에게 그 곳이 불과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온통 모레바람 뿐인 황무지였다는 사실을 알려준다면 쉽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지리적 위치는 그대로이지만 죽음의 사막에서 생명의 숲으로, 그 땅의 환경과 성격이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본문 19, 20절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언자의 외침대로 그 언젠가 사막의 모든 생명들이 풍요로운 강물로 말미암아 소생과 회복을 경험한다면 그 광야가 이전과 같겠습니까? 여전히 사람들 눈에 황무지로 보이겠습니까?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 때부터 사막은 더 이상 사막이 아닙니다. 광야는 더 이상 광야로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이전과 전혀 다른 회복의 땅으로 완전히 변화되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들에게 행하시는 새로운 구원은, 단지 그들이 겪는 고통의 일부를 고치는 정도가 아닙니다. 사람들의 경험과 상상력을 완전히 초월하는 전적으로 새로운 창조입니다.
사랑하는 삼덕교회 성도 여러분, 지난날을 돌이켜 볼 때 늘 행복한 추억들로 가득한 사람들은 아무도 없습니다. 반대로 항상 고통스러운 기억들만 가진 사람들 역시 존재하지 않습니다. 무릇, 스스로를 포장하지 않고 꾸준히 객관화한 사람이라면 누구든 자신의 옛 기억들 안에 밝음과 어둠이 어지럽게 뒤섞여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여러분에게 오늘 말씀에 의지하여 권면합니다. 더 이상 지난날들에 얽매이지 마시길 바랍니다. 더욱이 옛 신앙 경험들로 오늘 우리 가운데 새롭게 이루실 주님의 구원을 제한하지 말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불가능해 보였던 이집트에서의 탈출과 바벨론 포로생활의 해방을 이루어 주셨습니다. 마찬가지로 그 주님께서 오늘 우리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하는 새로운 희망으로 이끌어 주실 줄 분명히 믿습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가지고 계신 과거의 ‘은혜로운 추억들’까지도 과감히 떨쳐버리시길 바랍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구원은 결코 그 모든 ‘옛 일’들에 얽매이지 않습니다. 도리어 검은 바다 위를 가르신 주님의 창조가 여전히 살아 숨 쉬어, 모든 삶의 여정을 날마다 새롭게 이루어 가십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구원과 창조를 더욱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우리 앞에 주님께서 열어 가시는 새로운 길과 강물로 말미암아 참 생명의 질서가 회복되는 이적을 함께 바라보며 거기에 기꺼이 참여하시길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오늘 본문 말씀을 읽으며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새로운 은혜를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 오셨지만 안타깝게도 당시 이스라엘은 포로시절 예언자들을 통해 전해졌던 주님의 뜻을 올바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새로운 출애굽만을 바랐을 뿐입니다. 물론 그들의 기대 자체가 틀린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복음은 분명 출애굽과 연결돼 있습니다.
문제는 로마의 압제에 시달리던 이스라엘이 지난날 홍해에서 조상들을 건지신 하나님의 참된 뜻이 아닌 기적의 화려함에만 눈길을 빼앗겼다는 사실입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자신들의 달력에 따라 대략 9월 중에 나팔절을 가리키는 <로쉬 하샤나>를 한 해의 시작으로 지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전통은 나팔을 불며 참회의 시간을 갖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그들은 새해를 맞이하며 무엇을 가장 기대했겠습니까? 출애굽한 백성들을 나팔 소리와 함께 진두지휘했던 모세의 화려한 승리가 재현되는 것입니다.
즉,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새로운 출애굽을 소망하지 않았습니다. 단지 새로운 영웅, 새로운 성공, 새로운 기적을 원했을 뿐입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조상들이 맞서 싸운 이집트 그리고 지금 그들이 저항하는 로마와 그리 다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들은 힘과 폭력으로 통치하는 제국을 무너뜨리고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는 당신의 나라를 세우시려는 하나님의 뜻과 완전히 멀어지고 말았습니다.
반면, 그들 눈에 비친 예수님은 저주받은 패배자에 불과했습니다. 주님께서 빈들에서 외친 말씀은 그저 허무맹랑한 헛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낡은 신앙 관습에는 목숨을 걸었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을 대적하고 결국 죽음으로 몰아넣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이 원하는 방식의 새로움, 욕망에 부합한 새로움만을 갈구했을 뿐, 정작 하나님의 새로움을 맞아들일 지혜와 용기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도무지 익숙해 질 수 없는 그 낯설고 불쾌한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새로운 새로움이 마침내 온 세상을 구하였습니다.
지난 2018년은 저에게 가장 행복한 한 해였습니다. 우선, 사랑하는 아들이 건강하게 태어나 자라주었습니다. 또한 우리 삼덕교회 귀한 성도님들의 소중한 사랑 덕분에 무척 감사한 순간들을 보내며 자존감을 건강하게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자리를 통해 다시 한 번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그 다음으로 소중했던 시절은 제가 대학교 4학년이었던 2009년이었습니다. 그 때, 저는 고 학번이었지만 얼떨결에 덜컥 ‘신학과 4학년 과대표’를 맡게 되었습니다. 4학년 과대는 다른 학년과 달리 졸업 여행과 졸업 앨범이라는 막중한 책임을 떠안게 됩니다. 그래서 많이 부담되고 힘들기도 했지만 그 대신 기본만 해도 금방 칭찬을 듣는 자리였습니다.
따라서 결코 제가 잘 해서가 아니라 주변 선후배들의 도움 덕분에 무난히 한 해를 보냈습니다. 그것은 그 이전까지 경험해 보지 못했던 나름의 값진 성취였습니다. 문제는 제가 그 후 한 참 동안 그 성공의 추억에서 헤어나지 못했다는 사살입니다.
4학년을 마치고 신대원에 진학한 후에도 한동안 저에게 이런 말버릇이 생겼습니다. 누군가와 대화하다가 뜬금없이 불쑥, “사실, 제가 4학년 때 ‘과대’를 했었는데요......, 제가 예전에 ‘과대’ 했었을 때......, 제가 ‘과대’ 했었던 경험을 떠올려 보면......” 이렇게 알게 모르게 ‘과대’였던 과거를 계속 언급하는 저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저는 지금도 그 때 모습을 떠올리면 너무나 창피하고 부끄럽기 이를 데 없습니다. 불필요한 자기자랑을 습관적으로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그 내면이 심각하게 병들었다는 증거입니다.
여전히 저에게 대전에서 보낸 지난 어린 시절은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괴로운 시간들입니다. 그 아픈 기억들을 떨쳐 보내기 위해 저는 지금도 부단히 애쓰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또한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을 통해 분명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창조주 하나님께서 구원하시는 손길을 제한하고 교만에 빠지게 한다면, 한 없이 행복했던 추억들 역시도 떠나보내야 합니다. 그제야 비로소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며, 그런 나를 사랑하시는 주님의 새로운 희망과 생명을 온전히 맞아들일 수 있는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흑암을 뚫고 우주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 홍해를 가르고 백성을 이끄신 구원의 주님께 남은 일생을 기꺼이 내어 드려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 열린 길을 지나 우리에게 새로운 새로움으로 찾아오셨기 때문입니다.
기도
창조와 구원의 하나님.
새해를 맞아 주님께서 행하실 새로운 은혜를 기대합니다. 그 소망 가운데 지난날의 아픔뿐만 아니라 영광으로부터도 자유롭게 하옵소서. 인간의 경험이 하나님의 얼굴 전체를 그려낼 수 없음을 명심하며 주님의 새로운 새로움을 바라보길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앞에 열어주실 새 길을 걸으며 날마다 찬송하며 나아가게 하여 주시옵소서.
십자가의 새로움으로 온 세상을 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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