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9일 목요일

이사야 61장 1-3절 "그가 오신 이유"

대림절 첫 번째 주일, 2016년 11월 27일, 부산진교회 청년예배, 정대진 목사
이사야 61장 1-3절 "그가 오신 이유"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소설가 김영하씨가 2003년에 발표해서 큰 호평을 받은 작품 “검은 꽃”은 구한말 멕시코로 이주하여 험난한 삶을 살아갔던 우리 조상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이 소설에는 여러 흥미로운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 중에 본래 가톨릭 신부였으나 주교의 명령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분을 감춘 채 바오로 신부가 아닌 박서방으로 불리며 살아가는 박광수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위도”라는 섬에서 뱃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대부분의 섬이 그러하듯이 그의 고향역시도 굿판이 성행했던 곳인 데다 어린 시절 무당집에서 자란 경험으로 무속신앙에 매우 친숙한 사람이었습니다. 반면 그 시대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그러했듯이 기독교신앙은 너무도 낯설었습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가톨릭 신부가 되고 또 먼 이국에서 여러 군상의 인물들과 부대끼면서 새삼 기독교의 신비와 모순을 곱씹게 됩니다. 소설의 일부를 읽어드리겠습니다.

“바오로 신부는 인간을 대신하여 죽었다는 사람을 잘 알고 있었다. 그 사람 덕에 목숨을 건졌고 그 사람을 위하여 말레이시아의 페낭까지 다녀왔다. 그 사람처럼 되겠노라며 바닥에 엎드려 서품을 받았다. 처음 첩첩산중의 숯골에서 그 사내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는 너무도 기이한 그 종교의 탄생설화에 단박에 매료되었다. 

그것은 정녕 이상한 이야기였다. 신이 인간의 몸으로 태어났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것은 그의 고향 위도에서 너무도 자연스런 일이었다. 그곳에선 일 년에도 수십 번씩 신이 인간의 몸을 빌려 현현하였다.

그런데 그 신이 인간의 몸을 떠나지 않고 아예 평생을 살아버린다는 이야기는 처음이었다. (중략) 어쩌면 이야기에 가득한 그 모순들에 그는 매혹되었는지도 모른다. 신이며 인간이고 전능하면서 무능하며 끔찍하면서 신비로웠다.”

무속적 세계관에 익숙한 박광수에게 이른바 ‘접신 현상’은 그다지 놀랄게 없는 일이었습니다. 온갖 신들이 사람에게 덧 씌워져 각종 신기한 모습을 보이는 일들은 어릴 때부터 충분히 듣고 봐온 얘기입니다. 하지만 신이 단지 사람의 몸을 빌려 잠시 머물다 떠나지 않고 철저하게 사람으로 태어나 사람으로서 살아갔다는 기독교의 복음은 그의 세계관에 강력한 충격을 일으켰습니다.

물론, 이것은 소설가의 상상력입니다. 그러나 소설 속 박광수 바오로 신부가 기독교를 접하며 느낀 경외감은 단순히 허구가 아니라 그 시절 대다수 우리네 신앙의 조상들이 가졌을 충격과 감동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성탄절을 준비하는 대림절을 맞이한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진정한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아가시려 사람으로 태어나셨다는 복음은 우리가 거듭 돌이켜봐도 지나침이 없는 기독교 신앙의 위대한 본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서 더 나아가 한 가지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대체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해 사람으로 오셔서 왜 사람으로 살아가셨을까요? 과연 그 이유와 목적이 무엇일까요? 이 질문에 대한 많은 답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겁니다. 더욱이 어렸을 때부터 오랜 시간 교회에 출석하신 교우들은 친숙한 교리적, 신앙 용어들로 답하실 분들이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그 모든 답들은 충분히 타당하고 존중받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때로 우리 안에 예수님에 대한 너무나 많은 답들이 떠오를 때 성경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진 예수님 자신의 답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누가복음 4장 14-21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누가복음 저자에 따르면 예수님께서는 사탄의 시험을 말씀으로 이기신 후에 본격적으로 공생애를 시작하시며 고향 갈릴리지방 나사렛마을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안식일에 회당으로 가셔서 예언자 이사야의 글이 적힌 두루마리를 펼쳐 말씀을 찾아 읽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가 함께 읽은 본문에 포함되는 이사야 61장 1-2절 말씀입니다.

이 말씀이 증언하는 바는 분명합니다. 바로 ‘기름부음 받은 이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한다.’는 내용입니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이사야서의 구절을 읽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책을 맡은 자에게 주시고 안식일을 지켜 회당에 모인 이들에게 분명한 음성으로 다음과 같이 선포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즉, 이사야 61장 1-2절의 메시아 예언이 바로 당신으로 인해 이루어졌음을 공개적으로 선언하셨습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시고, 살아가신 본질적인 이유가 바로 본문 말씀에 기록되어 있다고 생각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기름부음 받은 자”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단어가 바로 “메시아”이고 예수님께서 바로 온 이스라엘이 그토록 고대하던 진정한 메시아이신 까닭입니다. 그렇다면 참으로 기름부음 받은 자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구체적인 목적과 이유가 무엇인지, 본문 말씀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먼저, 1절 말씀 다함께 읽으시겠습니다.
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1절 말씀에는 기름부음 받은 자, 곧 메시아가 나아가야할 사람들의 목록을 소개 하고 있습니다. 바로 ‘가난한 자’, ‘마음 상한 자’, ‘포로된 자’, ‘갇힌 자’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읽으신 누가복음 4장 18절의 목록과는 다소 차이가 있습니다. 하지만 본질에서는 일치합니다. 두 본문 모두 그 첫 번째 대상이 “가난한 자”이고 그 뒤에 언급되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의 구체적인 양상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즉, 메시아가 보냄 받은 가난한 자는 ‘마음 상한 자’, ‘포로된 자’ 그리고 ‘갇힌 자’와 별개의 사람들이 아니라 이들을 포함하는 상위 개념입니다. 좀 거칠게 정리하자면 예수님께서는 기름 받은 자로서 가난한 자들을 위해 이 땅에 오셨다고 감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너무도 간단히 “영적으로” 해석하고는 합니다. 메시아께서 “영적으로 가난한 자”, “영적으로 마음 상한 자” “영적으로 포로된 자”, “영적으로 갇힌 자”를 위해 오셔서 “영적인 문제”를 해결하셨다고 이해합니다. 물론 그러한 해석도 분명 어느 정도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메시아의 오신 목적을, 그 분의 삶과 복음을 단지 ‘영적’으로만 국한한다면, 그것은 마치 예수님께서는 참 사람이 아니라 사람인 척만 했다고 생각하는 고대 교회의 이단의 주장과 다를 바 없습니다.

우리는 총체적인 의미의 "가난"의 고통을 짊어진 이들을 찾아오신 주님의 모습을 반드시 명심해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전해진 하나님 나라의 복음과 구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차별 없이 전해집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눈길과 손길은 가난한 이들에게 더 먼저 보다 크고 넓게 향하고 있음을 늘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 이유는 너무나 간단합니다. 가난한 이들은 그들의 결핍으로 말미암아 사람다운 삶을 박탈당해 오직 하나님 외에는 아무런 도움이 없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누가복음 6장 20절에 예수님께서는 ‘너희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복음서 전반에 걸쳐 가난한 자들과 함께 하시며 불의한 부자들을 꾸짖는 예수님의 모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본문 말씀이 1차적으로 향하는, 바벨론의 이스라엘 포로들과 같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오신 메시아의 모습을 늘 마음 깊이 담아야 합니다. 물론 이것은 예수님을 믿으면 가난에서 벗어나 부자가 된다는 맹목적 기복신앙이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무조건 편드는 것도 아니고 사람들을 경제적 계급으로 구분하고 나누어 갈등을 부추기는 것은 더더욱 아닙니다. 다만, 사람인척 하지 않으시고 진정한 사람으로 살아가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가장 중요한 목적은 사람됨을 파괴하고 짓밟은 모든 가난의 문제를 몸소 껴안기 위함임을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이것을 유념할 때 우리는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다 총체적으로 그리고 공감각적으로 깨닫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지 우리가 죽어서 천당하게 하시려 기름부음 받지 않으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그저 내면의 평정심을 잘 유지하고 상처를 극복하게 하려고 보냄 받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들이 결벽적인 도덕성과 막연한 이상에 도취되도록 아들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사람답게 살지 못하게 하는 모든 근본적인 폭력과 억압으로부터 참으로 자유롭게 하시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기름부음 받으시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찾아 오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의 학력과 직업과 성별과 출신지역등의 이유로 차별당할 때 예수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여러 모양의 부당한 폭력들로 인해 아파할 때 예수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우리가 여러 결핍들로 인간다운 삶을 박탈당하며 고통 속에 빠질 때 예수님을 기억하시길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온갖 유형의 가난들로 말미암아 절망에 허덕이는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며 기름부음 받은 손으로 끌어안아주시고 함께 싸워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메시아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구체적인 실천 계획을 2절을 통해 밝히 보이셨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2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가난한 당신의 백성들을 향해 파송된 메시아가 행하시는 결론적인 사역은 바로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보복의 날”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누가복음 4장 19절에서는 “보복의 날”을 제외하고 “은혜의 해”만을 인용하여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은혜의 해”는 과연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이것은 흔히 오해하듯이 막연히 ‘은혜로운 해’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복잡한 설명이 필요하지만 간단히 결론내자면 이것은 레위기 25장에 기록된 “희년”을 뜻합니다. 

특별히 1절에 묘사되는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는 메시아의 사역과 연관해서 볼 때 더욱 분명합니다. 그것이 희년에 이루어지는 중요한 사건들과 일치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토록 중요한 희년이 무엇인지 혹시 알고 계십니까? 들어본 적은 있으십니까? 저 개인적으로 무척 안타깝게 생각하는 일은 한국 교회 내에 “희년”이 너무나 쉽게 무시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희년의 상실’은 조금 과장하자면 곧바로 복음의 왜곡으로 이어지기 마련입니다. 따라서 희년에 대해 결코 가볍게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희년은 “토지는 하나님의 것이다”는 지극히 당연한 진리에 근거합니다. 생존권의 기초인 땅이 하나님의 것이기에 결코 사람들이 무한정 보유하려는 탐욕의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사회의 많은 부동산 재벌들이 그러하듯이 가능한 끝없이 많은 땅과 건물을 움켜쥐는 것은 단기간에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입니다. 그러한 이유로 고대로부터 땅에 대한 부자들의 집착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문제는 그러면 그럴수록 땅 없는 절대다수의 가난한 이들의 고통은 대를 이어 계속 된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히브리 신앙공동체에게 당신의 이름을 걸고 엄중히 희년제도의 시행을 명한 것은 바로 그러한 폭압적인 약육강식의 질서를 멈추게 하고 모두가 더불어 함께 살기를 바라는 사랑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는 사람들이 한데 어울려 살면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토지매매 자체는 충분히 용인 하셨습니다. 그러나 일곱 번째 안식년인 49년마다 혹은 그 다음해인 50년 되는 해마다 온 이스라엘에 나팔 소리를 크게 울리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희년, 곧 “은혜의 해”에 토지 소유를 가나안에서 지파별로 처음 분배받은 원점으로 돌리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동안 아무리 많은 땅을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조상들로부터 원래 물려받은 땅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본래 주인들에게 돌려주게 하셨습니다. 또한 본문 1절과 같이, 다른 사람 밑에서 종살이 하는 사람들도 놓아 줄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미 많은 부를 소유한 사람들이 필요이상 과도한 돈과 불로소득을 갖는 것을 막으셨을 뿐만 아니라 사회의 가장 밑바닥에서 고통당하는 이들이 최소한의 생존권을 쥐고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얻게 하셨습니다.

그 뿐만 아닙니다. 누군가 부득이한 사정으로 땅을 판 사람이 있다면 아직 희년이 되지 않았더라도 가까운 친척이 의무적으로 그 땅을 대신 사줄 책임이 있습니다. 그런 친척을 가리켜 우리말 성경은 ‘기업 무를 자’라고 번역하였습니다. 그리고이것은 히브리어 원어상 ‘구속’ (redeem)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구약성경의 메시아를 통한 ‘구속 신앙’의 원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룻기에 등장하는 ‘기업 무를 자’로서의 보아스의 활약은 바로 이러한 희년제도에 근거합니다.

그러므로 희년 제도는 결코 구약성경의 주변부에 위치하지 않습니다. “나는 주 너희의 하나님이다.”라는 주님의 엄중한 자기 선언을 통해 레위기 율법의 중심부에서 구약을 넘어 기독교 신앙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기름부음 받은 자는 가장 낮고 고통 받는 이들의 삶 한복판에서 ‘은혜의 해’인 희년은 선포합니다.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서 이 말씀을 읽으시고 당신을 통해 이루어지셨음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동시에 메시아는 가난한 자들을 짓밟은 불의하고 탐욕스런 이들을 엄중히 심판하여 정의와 공평을 확립하는 “보복의 날”을 선포합니다. 그리하여 ‘모든 슬픈 자’를 막연한 관념이 아닌 손과 발을 통해, 참으로 위로 하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이 희년을 이루기 위해 오셨다고 공개적으로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이어서 주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구체적인 내용을 3절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다함께 읽겠습니다.

3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기쁨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통해 주시는 모든 가난하고 슬퍼하는 이들에게 주는 위로의 핵심은 곧, ‘전복과 반전’, ‘뒤엎음과 뒤집음’ 입니다. 그들은 본래 히브리 애도문화의 전통대로 재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나 기름부음 받은 자는 그 재를 꽃 왕관으로 바꾸셨습니다. 그리고 슬픔을 기쁨의 기름으로 근심을 찬송의 옷으로, 본래의 성격에서 정반대로 바꾸시어 그들의 존재 방식에 본질적인 전환을 안겨주십니다. 또한 여기서 멈추지 않고 그 가난하고 슬퍼하는 이들이 주님의 영광을 드러낼 “의의 나무”가 될 것을 약속해 주십니다.

이것이 바로 다시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며 우리가 진정 고대할 축복의 약속입니다.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과 정의와 평화는 단지 우리 삶의 일부를 고치는 정도로 그치지 않습니다. 우리 삶의 가장 비참한 영역이, 너무나 초라하고 남루한 모습들이, 제일 연약하고 가난한 존재가 전혀 다른 질적인 변화를 겪는 것을 의미합니다. C.S. 루이스가 그의 대표작 “순전한 기독교”에서 사용한 표현을 빌리자면 '말에게 더 높이 뛰는 법을 가르치는 대신, 말을 아예 날개 달린 동물로 변신시키는 일'과 같습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목숨을 건 위험 가운데 뱃 속에 품고 우리에게 “마리아의 노래”로 알려진 다음과 같은 위대한 신앙고백을 남겼습니다. 누가복음 1장 46-55절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 드리겠습니다.

"내 영혼이 주님을 찬양하며 내 마음이 내 구주 하나님을 좋아함은, 그가 이 여종의 비천함을 보살펴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세대가 나를 행복하다 할 것입니다. 힘센 분이 나에게 큰 일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의 이름은 거룩하고, 그의 자비하심은, 그를 두려워하는 사람들에게 대대로 있을 것입니다.

그는 그 팔로 권능을 행하시고 마음이 교만한 사람들을 흩으셨으니, 제왕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사람을 높이셨습니다. 주린 사람들을 좋은 것으로 배부르게 하시고, 부한 사람들을 빈손으로 떠나보내셨습니다. 그는 자비를 기억하셔서, 자기의 종 이스라엘을 도우셨습니다. 우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그 자비는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영원토록 있을 것입니다." (눅 1:46-55, 새번역 성경)

오늘 본문에 담긴 메시아 예언과 매우 흡사한 전복과 반전의 복음이 담긴 마리아의 고백은 결코 그녀의 허무한 소원으로 그치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로 실현되었습니다. 십자가 위의 주님을 덮친 죽음의 그림자가 짙으면 짙을수록 빈 무덤의 빛과 영광이 찬란하듯이 가난한 이들의 눈물이 굵게 흘러내리면 내릴수록, 절망과 실패의 무게가 더하면 더할수록 그 모두를 위해 달려오시며 품으시는 하나님의 생명이 더없이 풍성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전적으로 신뢰하시길 바랍니다. 기름부음 받으신 참 메시아로 이미 오셨고 다시 오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몸소 이 땅 위에서 앞서 걸으신 길은 화려하고 드넓은 대로가 아니라 당신의 자녀들이 흘린 눈물과 피와 땀으로 얼룩진 좁은 길인 까닭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 놀랍고 기쁜 소식을 늘 감격으로 받아들이시길 바랍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문 속에서 그저 각자를 향한 위로와 축복만을 받아들이는 것에만 그친다면 그것은 올바른 하나님의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그 이면에 우리를 향한 부르심과 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 된 우리 모두를 또 다른 ‘메시아’로 세우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위해 성경에 기록된 ‘메시아’라는 인물은 예수님께만 해당되는 배타적인 용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유념하셔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등장하는 기름부음 받은 자 역시 예수님에 대한 직접적인 묘사가 아닙니다.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께서 당신의 뜻한 바를 위해 기름 부으신 모두가 메시아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예수님께서 하늘로 오르신 후 임하신 주 여호와의 영, 곧 성령님의 다스림을 인정하는 모든 이들이 메시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본문에 나타난, 가난함과 슬픔 속으로 찾아오신 메시아의 모습 그대로 우리역시 우리 곁의 가난하고 슬퍼하는 이웃들을 향해 발걸음을 돌려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서 “성령 충만”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은사 중심’의 전통적인 성령충만은 분명히 그 나름의 충분한 장점에도 불구하고 여러 문제점들이 있습니다. 그 중 가장 치명적인 약점은 바로 “자기만족적”이라는 점입니다. 마치 무속신앙의 접신현상처럼 성령충만을 다른 사람들 눈에 확연히 드러나는 외형적인 신비로만 오해하곤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본문을 통해 분명히 깨달을 수 있는 것은 주님의 영이 가득히 임하시는, 성령 충만의 본질은 “참 사람됨”이라는 점입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사람답게 하지 못하게 하는 모든 어둠과 절망에 맞서며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이 필요한 이들을 향해 또 다른 메시아로서 주저 없이 다가갈 때, 비로소 온전한 성령충만을 누린다는 복음의 진리를 반드시 명심하시길 바랍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기름부음 받으신 주님께서 우리 가운데 사람으로 오셨습니다. 오셔서 우리의 모든 가난과 슬픔에 함께 하시며 희년과 심판을 선포하시어 정의로운 위로를 이루어 가십니다. 그리고 뒤엎음과 반전의 은혜를 통하여 우리의 가장 비참함을 의로움으로 바꾸어 주십니다.

지금 우리는 성탄절을 앞두고 4주간동안 보내는 대림절을 보내고 있습니다. 진정한 메시아이신 예수님께서 다시 오십니다. 이천년 전 이미 오신 주님을 묵상하며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기다림의 의미를 곱씹으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주님과 더불어 참된 성령 충만 가운데 우리 곁의 가난한 이들의 슬픔을 위로하는 여정에 함께하여 다시 오실 예수님의 길을 준비하는 우리 모두가 되길 온 마음 다해 축복합니다.


설교 후 기도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시어 사람으로 살아가신 하나님
저마다의 마음을 뒤 흔드는 가난과 슬픔 한 복판에서 주님을 기다립니다. 우리를 향해 달려오시는 주님을 바라봅니다. 주님께서 선포하시는 희년과 정의로운 심판을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를 전적으로 새롭게 하시어 의의 나무로 사용하시는 은혜를 간절히 구합니다.
그리하여 사람을 수단과 도구로 이용하는 욕망의 질서를 물리치고, 사람을 사람답게 하는 참된 성령 충만을 누리며 호흡하는 우리 모두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공적 생애를 시작하시며 희년의 성취를 선언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우리에게 이미 오셨고 또 다시 오실 하나님
우리의 사람됨을 은혜 가운데 회복시키심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쁘게 받으시어 오늘날 이 땅에 희년을 이루는 일에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쌀쌀해진 날씨 가운데 몸과 마음의 건강 지켜주시고 삶을 지긋이 돌아볼 여유와 안식 주시옵소서. 기말고사를 앞둔 청년들에게 지혜와 집중력을 주시고 연말 업무로 분주한 직장인들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보냄의 말씀
목사: 사랑하는 여러분, 평안히 돌아가십시오. 복음의 말씀을 들었으니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림으로 희년을 이루며 살아가십시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모든 사람됨을 건강하게 회복시켜 주십니다.

예담: 아멘! 주님께서 이 땅에 사람으로 오신 이유에 대해 무지했던 어리석음을 뉘우칩니다. 이 땅 가운데 생명과 평화의 하나님 나라를 이루어가며 살아가겠습니다. 성령님! 오셔서 우리마음 가장 깊은 곳에 기름 부어 주시옵소서. 아멘.


축도 
주님께서는 여러분에게 복을 주시고, 여러분을 지켜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비춰 주시고,
여러분을 은혜롭게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얼굴을 여러분을 향해 드시어, 
여러분에게 평화 주십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은혜의 해를 선포하고 이루어 나가는 또 다른 메시아로 살아가길 다짐하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댓글 2개:

  1. 깊이 묵상한 본문과 설교였습니다. 감사합니다.
    하나님의 자녀답게 기름부음 받은 자 답게 모든 슬픈자들을 위로할 수 있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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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미흡한 설교를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연말연시 은혜 가득하시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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