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영혼이 잘못 없으랴
- 이시영
독일에서 만난 허수경씨 남편은 뚱보에다가 사람 좋아 보이는 털북숭이 수염을 달고 있었는데 허수경씨 옆에서 마냥 즐거워하는 그에게도 아픈 과거가 있었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노르망디 출신이고 아버지는 베를린 출신인데 말하자면 독일군 병사를 사랑한 죄로 종전 후 그의 어머니는 처녀의 몸으로 주소만 달랑 들고 베를린 애인 집을 찾아갔답니다. 그러나 놀란 것은 그 집의 식구들, 그들도 아들의 행방을 애타게 찾고 있었는데 웬 프랑스 처녀가? 애인도 없는 집에서 눌러산 지 7년. 어느날 아침 현관 밖에 쓰레기를 버리러 나갔다가 거기에 넋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귀환 장정을 보았답니다. 그러니까 그해가 1952년, 소련 전선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그제야 풀려난 것이지요. 그 일년 후에 태어난 그가 모계인 프랑스계 유치원을 다니며 친구들에게 나찌의 자식이라고 손가락질당하며 자란 것은 지금도 지울 수 없는 가장 아픈 기억 중의 하나. 그러나 이제는 그들을 다 용서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는 아르뛰르 랭보를 너무나 좋아하는 반은 프랑스인. 오늘밤에도 그는 흑맥주잔을 높이 들고 먼 동방에서 온 아내의 친구들 앞에서 랭보의 시를 줄줄 외우곤 합니다. "오 계절이여, 오 성(城)이여,/ 어느 영혼이 잘못 없으랴?"
<우리의 죽은 자들을 위해>(창비, 2007) 중에서
댓글 없음: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