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3월 22일, 부산진교회 수요기도회 설교, 정대진 목사
사무엘상 16장 6~13절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8 이새가 아비나답을 불러 사무엘 앞을 지나가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 9 이새가 삼마로 지나게 하매 사무엘이 이르되 이도 여호와께서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니라 10 이새가 그의 아들 일곱을 다 사무엘 앞으로 지나가게 하나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들을 택하지 아니하셨느니라 하고 11 또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네 아들들이 다 여기 있느냐 이새가 이르되 아직 막내가 남았는데 그는 양을 지키나이다 사무엘이 이새에게 이르되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라 그가 여기 오기까지는 우리가 식사 자리에 앉지 아니하겠노라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몇 달 전에 서울로 가는 기차 안에서 아이패드로 영화 한 편을 보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잘 아는 프랑스 소설가 생텍쥐페리가 지은 “어린 왕자”를 원작으로 한 애니메이션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서 새삼 소설 “어린 왕자”가 얼마나 위대한 작품인지를 실감하며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이 소설에 담긴 재치 있으면서도 탁월한 문장들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에 한 장면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아주 좋아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도 묻지 않는다.
“그 애의 목소리는 어떠니?”
“무슨 놀이를 좋아하지?”
“그 애도 나비를 수집하니?”
어른들은 절대로 이렇게 묻는 법이 없다.
“그 애는 몇 살이냐?”
“형제는 몇 명이니?”
“몸무게가 얼마냐?”
“그 애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버니?”
어른들은 기껏 이런 식의 질문을 할 뿐이다. 모두가 숫자에 관한 것들뿐이다. 어른들은 그래야만 그 친구 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것으로는 친구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도 말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 제라늄 꽃이 핀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살고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 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다.
“10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그제야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알 수 있다는 듯이, “그렇다면 굉장히 훌륭한 집이겠는걸.” 하고 감탄한다.
아마 여러분 상당수는 이 장면을 읽으시며 씁쓸한 미소를 지으셨을 겁니다. 우리 역시도 여기에 묘사된 “어른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누군가의 깊은 내면을 바라보기 보다는 당장 계량화 할 수 있는 여러 사회적인 조건들을 먼저 따져 묻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만약 잘 수긍이 되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이 처음 알게 된 사람의 무엇을 궁금해 하는 지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내색하느냐 안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그가 어떤 대학교를 졸업했고, 어느 동네에 살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얼마나 연봉을 받고 또,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알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무척 친한 고향 교회 동생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조차 잘 모르는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고백하기를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학교 얘기를 하기가 참 난감했다고 했습니다. 대학 이름을 꺼내는 순간 상대편이 무의식중에 무시하는 눈길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공을 얘기할 때면 그 표정이 항상 정반대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동생은 의대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전공 혹은 직업을 언급하기 전에 출신 대학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얘기를 저에게 종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런 어리석은 무례함을 반복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스스로의 한계와 연약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면의 깊은 약점을 감추고자 몇 줌 안 되는 사회적 조건을 과도하게 내세우거나 타인의 사소함 결함을 지나치게 지적하는 것이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어두운 본성입니다. 더욱 정확히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도록 영적인 시력을 어둡게 만듭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을 깨우쳐줍니다. 먼저 유념해야할 점은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사무엘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 안에 여러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사무엘은 단연 예수님과 가장 흡사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의 사역 자체가 구약에서 유일할 만큼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제사장이면서 예언자였고 동시에 사사였습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제도권 안에서 질서 정연하게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면서 규정과 틀에서 벗어나 맡은 바 말씀을 자유롭게 선포하는 예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인 사사였습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사무엘의 삼중직”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사역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런 까닭에 사무엘을 향해 아낌없는 존경심을 드러내는 장면이 성경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그러한 사무엘의 치명적인 실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빗겨간 얘기이지만 바로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다윗 왕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성경을 기록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물들의 잘못을 여과 없이 그 안에 포함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성경은 결코 특정인물과 집단을 위해서 기록된 책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전하기 위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무엘은 지금 매우 엄중하고 긴박한 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으로서 자신이 직접 기름 부어 세운 사울이 처음의 순수함과 겸손을 잃어버리고 권력에 취하여 폭군으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무척 노여워하시며 당신의 마음에 합한 또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 명령에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런 그의 행보를 백성들은 주목하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떠난 사울 왕조의 운명이 그 끝을 다했음을 그들은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어쨌건 현재 살아있는 권력은 아직 사울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사무엘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의 격노를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사무엘상 16장 4절을 보면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사무엘의 출현을 반가워하지 않고 도리어 두려워하였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반역죄의 공범으로 몰려 마을 전체가 초토화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공포는 사무엘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은 이미 제정신을 잃어서 주님의 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도 잃은 채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무엘상 22장에 따르면 훗날 사울은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제사장 85명을 살해하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사무엘 역시 사울의 주체할 수 없는 폭력성을 분명 잘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왕에게 기름 부으러 가는 발걸음이 무척 떨리고 긴장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분명 자신의 지성과 영성을 최대로 발휘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때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할 경우 그 거센 여파를 본인이 가장 먼저 맞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에 도착하여 초조하게 그의 아들들을 마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그의 판단은 삐걱대었습니다.
본문 6, 7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우리는 먼저 사무엘이 이새의 장남인 엘리압을 보았을 때, 그가 속으로 생각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그를 두고 단지 칭찬하거나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단번에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어지는 7절에는 그런 사무엘의 판단 근거가 나옵니다. 바로 “그의 용모와 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사무엘의 생각이 그리 무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훤칠한 외모가 고대 왕으로서 매우 중요한 신체 요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처럼 통신과 전투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옛날 전쟁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을 이끄는 왕이 병사들의 눈에 잘 띄는 것은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높은 키와 위엄 있는 외모는 당시 임금으로서 가장 필수적인 덕목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상 9장 2절에 보면 사울 역시 백성들보다 신장이 어깨 위만큼 이나 컸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이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무엘 역시 그러한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주저 없이 동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의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며 당신의 깊은 뜻을 전해주셨습니다. 7절 후반부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유한하고 어리석은 “외모”에 지나지 않는 사실을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전혀 다른 눈길이 머무는 곳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바로 사람의 중심입니다. 곧,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을 하나님께서는 올곧게 보고 계신다고 사무엘에게 단호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듯이 이새의 장자 엘리압은 물론이고 아비나답과 삼마를 비롯한 다른 아들 모두를 사무엘이 직접 거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으로 보내어 그들의 아들 중 한 명에게 기름 부으라고 하셨고 그들이 자기 눈에도 적격으로 보였는데 정작 아무도 왕으로 세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새에게 모든 아들이 다 모인 게 맞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새는 민망해 하며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실은 막내가 있는데 지금 양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민족 전체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지도자인 사무엘이 집에 방문했습니다. 이 때, 부모라면 자신의 자녀들을 한 명이라도 예외 없이 그 앞에 데려다 인사시켜 눈에 들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막내 다윗은 그 자리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부모로부터 받아야할 지극히 마땅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은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진 않지만 그가 아마도 원치 않게 태어난 사생아일 수 있다는 짐작을 충분히 가능하게 합니다. 이어지는 다윗의 외모 묘사가 형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도 이를 더욱 뒷받침 해 줍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다윗은 나이와 키는 물론이고 가정여건과 생활방식 등 사람들 눈에 보이는 모든 조건들이 왕으로서는 매우 부족한, 결격사유로 가득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12, 13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사무엘 앞에 이새의 다른 아들들이 지나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그들을 택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 앞에 서자 주님께서는 “이가 그니!”라고 단순명료하게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기름 부으시는 이유에 대해 여러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윗의 순수한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가 그의 모든 단점을 덮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진실이, 눈에 보이는 다른 모든 현실을 이겨 냈습니다. 그 내면의 신비가 외면의 한계를 월등히 극복하며 그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신실한 일꾼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을 통해 참된 위로와 부르심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모두 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그럴듯한 학벌과 외모를 가졌다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은 때때로 주변의 무시와 멸시에 시달리곤 합니다. 때문에 스스로조차 자기 자신을 하찮게 바라볼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으로 여러분을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절대로 헛되고 헛된 세속의 조건으로 여러분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저마다의 존재 자체를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각자가 지닌 고유한 빛깔의 아름다움을 생명의 빛으로 비춰주시고 위로하시며 일으켜 주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늘 마음 깊이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하나님의 전혀 다른 눈길을 통해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시길 소망 합니다. 우리는 결코 보이는 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현재 살아가는 처지를 두고 함부로 비웃거나 조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전혀 다른 죄악의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할 때 더욱 분명해 집니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추악한 사형틀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혐오와 저주의 상징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그것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밝히 보여주는 영광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전하는 우리는 마땅히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눈길을 가질 수 있도록 늘 스스로를 부단히 살펴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기차 안에서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를 보다가 순간 가슴 뭉클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원작 소설 중 일부를 그대로 옮긴 것인데, 익히 잘 알고 있는 소박한 진리였지만 그것이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으로 재현되었을 때 새삼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준비한 영상 다함께 보시겠습니다.
방금 본 장면에 해당되는 소설의 일부를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비밀을 말해줄게. 별건 아니지만 말이야. 무언가를 볼 때는 마음으로만 봐야 제대로 볼 수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이렇듯 ‘마음으로만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우리는 마음으로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자주 시선을 뺏기곤 합니다. 이는 누구도 예외 없는, 심지어 위대한 지도자인 사무엘 역시 범했던 실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한계를 정직히 인정하며 항상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자신과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구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중심을 항한 주님의 시선과 오롯이 눈길을 맞추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드넓게 펼쳐가는 모두가 되기를 마음 다해 소망합니다.
그래서 집으로 돌아와 이 소설에 담긴 재치 있으면서도 탁월한 문장들을 다시 찾아보았습니다. 그 중에 한 장면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어른들은 숫자를 아주 좋아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진짜 중요한 것은 하나도 묻지 않는다.
“그 애의 목소리는 어떠니?”
“무슨 놀이를 좋아하지?”
“그 애도 나비를 수집하니?”
어른들은 절대로 이렇게 묻는 법이 없다.
“그 애는 몇 살이냐?”
“형제는 몇 명이니?”
“몸무게가 얼마냐?”
“그 애 아버지는 돈을 얼마나 버니?”
어른들은 기껏 이런 식의 질문을 할 뿐이다. 모두가 숫자에 관한 것들뿐이다. 어른들은 그래야만 그 친구 에 대해 잘 아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 것으로는 친구의 진짜 모습에 대해서 아무것도 알 수 없는데도 말이다.
만약 어른들에게, “창가에 제라늄 꽃이 핀 화분이 놓여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가 살고 있는, 장밋빛 벽돌로 지은 예쁜 집을 보았어요.”라고 말하면 어른들 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몰라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어른들에게는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편이 낫다.
“100만 프랑짜리 집을 보았어요.”
그제야 어른들은 그 집이 어떤 집인지 알 수 있다는 듯이, “그렇다면 굉장히 훌륭한 집이겠는걸.” 하고 감탄한다.
아마 여러분 상당수는 이 장면을 읽으시며 씁쓸한 미소를 지으셨을 겁니다. 우리 역시도 여기에 묘사된 “어른들”과 별반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어떤 누군가의 깊은 내면을 바라보기 보다는 당장 계량화 할 수 있는 여러 사회적인 조건들을 먼저 따져 묻는 경우가 참 많이 있습니다. 만약 잘 수긍이 되지 않으신다면 여러분이 처음 알게 된 사람의 무엇을 궁금해 하는 지를 생각해 보시면 됩니다. 내색하느냐 안하느냐의 차이만 있을 뿐 대부분 그가 어떤 대학교를 졸업했고, 어느 동네에 살며 어떤 직업을 가지고 얼마나 연봉을 받고 또, 어떤 차를 타고 다니는지 알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저와 무척 친한 고향 교회 동생이 있습니다. 그는 많은 사람들이 있는지 조차 잘 모르는 대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래서 자기 스스로 고백하기를 처음 보는 사람들과 학교 얘기를 하기가 참 난감했다고 했습니다. 대학 이름을 꺼내는 순간 상대편이 무의식중에 무시하는 눈길을 보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전공을 얘기할 때면 그 표정이 항상 정반대로 바뀌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동생은 의대생이었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흘러 지금은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전공 혹은 직업을 언급하기 전에 출신 대학의 이름을 말할 때마다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는 얘기를 저에게 종종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이런 어리석은 무례함을 반복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스스로의 한계와 연약함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내면의 깊은 약점을 감추고자 몇 줌 안 되는 사회적 조건을 과도하게 내세우거나 타인의 사소함 결함을 지나치게 지적하는 것이 저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의 어두운 본성입니다. 더욱 정확히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성은 자신과 다른 사람들을 온전히 바라보지 못하도록 영적인 시력을 어둡게 만듭니다.
오늘 함께 읽은 말씀은 이와 관련하여 우리에게 매우 의미심장한 교훈을 깨우쳐줍니다. 먼저 유념해야할 점은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사무엘이라는 사실입니다. 구약 성경 안에 여러 위대한 신앙의 선배들이 나오지만 그 중에서도 사무엘은 단연 예수님과 가장 흡사한 인물 중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사무엘의 사역 자체가 구약에서 유일할 만큼 독특하기 때문입니다.
사무엘은 제사장이면서 예언자였고 동시에 사사였습니다. 바꿔 말씀드리면 제도권 안에서 질서 정연하게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이면서 규정과 틀에서 벗어나 맡은 바 말씀을 자유롭게 선포하는 예언자였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정치지도자인 사사였습니다. 이것을 조금 어려운 말로 “사무엘의 삼중직”이라고 하는데, 예수님의 사역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그런 까닭에 사무엘을 향해 아낌없는 존경심을 드러내는 장면이 성경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 말씀은 그러한 사무엘의 치명적인 실수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금 빗겨간 얘기이지만 바로 여기에 성경의 위대함이 있습니다.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물론이고 다윗 왕을 포함하여 예수님의 제자들까지, 성경을 기록하는데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주요 인물들의 잘못을 여과 없이 그 안에 포함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통해 성경은 결코 특정인물과 집단을 위해서 기록된 책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만을 전하기 위한 주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깨닫게 됩니다.
다시 본문으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사무엘은 지금 매우 엄중하고 긴박한 순간을 맞이하였습니다. 이스라엘 최초의 왕으로서 자신이 직접 기름 부어 세운 사울이 처음의 순수함과 겸손을 잃어버리고 권력에 취하여 폭군으로 돌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무척 노여워하시며 당신의 마음에 합한 또 다른 사람을 왕으로 세우겠다고 그에게 말씀하셨고 그 명령에 따라 베들레헴에 도착하였습니다.
이런 그의 행보를 백성들은 주목하였습니다. 이미 하나님께서 떠난 사울 왕조의 운명이 그 끝을 다했음을 그들은 직감했습니다. 하지만 어쨌건 현재 살아있는 권력은 아직 사울이었습니다. 따라서 지금 사무엘에게 주어진 임무는 그의 격노를 일으키는 일이었습니다. 때문에 본문 바로 앞에 있는 사무엘상 16장 4절을 보면 베들레헴의 장로들은 사무엘의 출현을 반가워하지 않고 도리어 두려워하였습니다. 자칫 잘못했다가는 반역죄의 공범으로 몰려 마을 전체가 초토화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이러한 공포는 사무엘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사울은 이미 제정신을 잃어서 주님의 종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와 존중도 잃은 채 광기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실제로 사무엘상 22장에 따르면 훗날 사울은 다윗을 도왔다는 이유로 제사장 85명을 살해하는 끔찍한 짓을 저지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 그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사무엘 역시 사울의 주체할 수 없는 폭력성을 분명 잘 알고 있었기에 새로운 왕에게 기름 부으러 가는 발걸음이 무척 떨리고 긴장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그는 분명 자신의 지성과 영성을 최대로 발휘하였음이 분명합니다. 이 때 만약 조금이라도 실수할 경우 그 거센 여파를 본인이 가장 먼저 맞아야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서 알려 주신대로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에 도착하여 초조하게 그의 아들들을 마주하였습니다. 하지만 시작부터 그의 판단은 삐걱대었습니다.
본문 6, 7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6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 7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우리는 먼저 사무엘이 이새의 장남인 엘리압을 보았을 때, 그가 속으로 생각한 것을 주목해야 합니다. 사무엘은 그를 두고 단지 칭찬하거나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단번에 그가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라고 확신하였습니다. 이어지는 7절에는 그런 사무엘의 판단 근거가 나옵니다. 바로 “그의 용모와 키”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런 사무엘의 생각이 그리 무리는 아닙니다. 왜냐하면 그처럼 훤칠한 외모가 고대 왕으로서 매우 중요한 신체 요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처럼 통신과 전투기술이 발달되지 않았던 옛날 전쟁을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전쟁을 이끄는 왕이 병사들의 눈에 잘 띄는 것은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런 까닭에 높은 키와 위엄 있는 외모는 당시 임금으로서 가장 필수적인 덕목이었습니다. 따라서 사무엘상 9장 2절에 보면 사울 역시 백성들보다 신장이 어깨 위만큼 이나 컸다는 것을 긍정적으로 묘사하였습니다. 이것이 그 시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상식이었습니다.
중요한 점은 사무엘 역시 그러한 다른 사람들의 시각에 주저 없이 동의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그의 어리석음을 날카롭게 지적하시며 당신의 깊은 뜻을 전해주셨습니다. 7절 후반부 제가 다시 읽겠습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하시더라
하나님께서는 사람들과 같은 눈으로 우리를 보지 않으십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국 유한하고 어리석은 “외모”에 지나지 않는 사실을 정확히 지적하셨습니다. 그리고 당신의 전혀 다른 눈길이 머무는 곳을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바로 사람의 중심입니다. 곧,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그의 가장 깊은 내면을 하나님께서는 올곧게 보고 계신다고 사무엘에게 단호히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를 입증하듯이 이새의 장자 엘리압은 물론이고 아비나답과 삼마를 비롯한 다른 아들 모두를 사무엘이 직접 거절하게 하였습니다. 그러자 사무엘은 의아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분명히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집으로 보내어 그들의 아들 중 한 명에게 기름 부으라고 하셨고 그들이 자기 눈에도 적격으로 보였는데 정작 아무도 왕으로 세우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새에게 모든 아들이 다 모인 게 맞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이새는 민망해 하며 한 가지 사실을 고백하였습니다. 실은 막내가 있는데 지금 양을 지키고 있다는 말이었습니다. 이것은 굉장히 충격적인 이야기입니다. 민족 전체의 존경을 받는 위대한 지도자인 사무엘이 집에 방문했습니다. 이 때, 부모라면 자신의 자녀들을 한 명이라도 예외 없이 그 앞에 데려다 인사시켜 눈에 들게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당연한 태도입니다.
그러나 막내 다윗은 그 자리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이것은 그가 부모로부터 받아야할 지극히 마땅한 사랑과 돌봄을 받지 못했음을 뜻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장면은 성경에 분명히 언급되진 않지만 그가 아마도 원치 않게 태어난 사생아일 수 있다는 짐작을 충분히 가능하게 합니다. 이어지는 다윗의 외모 묘사가 형들과 전혀 다르다는 점도 이를 더욱 뒷받침 해 줍니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다윗은 나이와 키는 물론이고 가정여건과 생활방식 등 사람들 눈에 보이는 모든 조건들이 왕으로서는 매우 부족한, 결격사유로 가득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눈에는 전혀 다르게 보였습니다. 12, 13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12 이에 사람을 보내어 그를 데려오매 그의 빛이 붉고 눈이 빼어나고 얼굴이 아름답더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 하시는지라 13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사무엘 앞에 이새의 다른 아들들이 지나갔을 때 하나님은 그에게 그들을 택하지 않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다윗이 그 앞에 서자 주님께서는 “이가 그니!”라고 단순명료하게 선언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 기름 부으시는 이유에 대해 여러 자세한 설명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다만 분명한 것은 다윗의 순수한 믿음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사실입니다. 그 하나가 그의 모든 단점을 덮었습니다. 그 보이지 않는 진실이, 눈에 보이는 다른 모든 현실을 이겨 냈습니다. 그 내면의 신비가 외면의 한계를 월등히 극복하며 그를 하나님 나라를 위한 신실한 일꾼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러한 본문 말씀을 통해 참된 위로와 부르심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은 모두 외적인 결함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 아무리 그럴듯한 학벌과 외모를 가졌다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래서 모든 이들은 때때로 주변의 무시와 멸시에 시달리곤 합니다. 때문에 스스로조차 자기 자신을 하찮게 바라볼 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결코 잊지 마시길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사람들의 왜곡된 시선으로 여러분을 보지 않으시고 그 중심을 보십니다. 절대로 헛되고 헛된 세속의 조건으로 여러분을 함부로 평가하지 않으시고 내면 깊숙이 자리 잡은 저마다의 존재 자체를 주목하십니다. 그리고 각자가 지닌 고유한 빛깔의 아름다움을 생명의 빛으로 비춰주시고 위로하시며 일으켜 주십니다. 이 놀라운 은혜를 늘 마음 깊이 간직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러한 하나님의 전혀 다른 눈길을 통해 이웃과 세상을 바라보시길 소망 합니다. 우리는 결코 보이는 대로 보아서는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현재 살아가는 처지를 두고 함부로 비웃거나 조롱해서는 안 됩니다. 그것은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전혀 다른 죄악의 시선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묵상할 때 더욱 분명해 집니다.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습니다. 십자가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너무나 추악한 사형틀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혐오와 저주의 상징이 하나님의 손에 들려졌을 때 그것은 온 세상을 구원하시는 주님의 은혜를 밝히 보여주는 영광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 십자가의 복음을 믿고 전하는 우리는 마땅히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사랑의 눈길을 가질 수 있도록 늘 스스로를 부단히 살펴야 합니다.
앞서 말씀 드렸듯이 기차 안에서 애니메이션 “어린 왕자”를 보다가 순간 가슴 뭉클한 장면이 있었습니다. 원작 소설 중 일부를 그대로 옮긴 것인데, 익히 잘 알고 있는 소박한 진리였지만 그것이 아름다운 화면과 음악으로 재현되었을 때 새삼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을 느꼈습니다. 준비한 영상 다함께 보시겠습니다.
방금 본 장면에 해당되는 소설의 일부를 다시 읽어드리겠습니다.
“내 비밀을 말해줄게. 별건 아니지만 말이야. 무언가를 볼 때는 마음으로만 봐야 제대로 볼 수 있어.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는 보이지 않거든”
이렇듯 ‘마음으로만 봐야 제대로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정말로 중요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은 성경의 진리와 일치합니다. 하지만 연약한 우리는 마음으로 보지 않고, 눈에 보이는 중요하지 않는 것들에 자주 시선을 뺏기곤 합니다. 이는 누구도 예외 없는, 심지어 위대한 지도자인 사무엘 역시 범했던 실수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한계를 정직히 인정하며 항상 마음의 눈으로 볼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 자신과 세상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고 정말로 중요한 것들을 구하며 살아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다른 무엇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 우리 모두가 되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우리 중심을 항한 주님의 시선과 오롯이 눈길을 맞추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드넓게 펼쳐가는 모두가 되기를 마음 다해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겉으로 보이는 것들에 쉽게 마음을 뺏기며 이웃은 물론이고 스스로를 무시할 때가 참 많이 있었습니다. 그런 연약함과 어리석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마음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거룩한 사순절을 보내며 십자가의 외면과 내면이 안겨주는 신비와 은혜를 더욱 밝히 깨달아 알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청년부)
사랑의 하나님
이 세상과 전혀 다른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시선의 폭력에 시달리는 연약한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길 간절히 구합니다.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합니다. 힘겨운 일상 속에 누덕누덕 해진 내면을 위로해 주시고 몸과 마음에 건강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가정 안의 여러 갈등을 슬기롭게 헤쳐 가며 평화를 이루어 나가게 하여 주시길 구합니다. 이제 곧 기말고사를 맞이하는 청년들과 고단한 직장 생활로 힘겨워 하는 청년들에게는 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청년부)
사랑의 하나님
이 세상과 전혀 다른 눈길로 우리를 바라보신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시선의 폭력에 시달리는 연약한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길 간절히 구합니다.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합니다. 힘겨운 일상 속에 누덕누덕 해진 내면을 위로해 주시고 몸과 마음에 건강을 허락해 주시옵소서. 가정 안의 여러 갈등을 슬기롭게 헤쳐 가며 평화를 이루어 나가게 하여 주시길 구합니다. 이제 곧 기말고사를 맞이하는 청년들과 고단한 직장 생활로 힘겨워 하는 청년들에게는 지혜를 부어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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