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6월 20일 화요일

누가복음 11장 1~13절 "이렇게 기도하라"

2017년 6월 11일, 삼위일체주일, 부산진교회 청년설교, 정대진 목사
누가복음 11장 1~13절 "이렇게 기도하라"

1 예수께서 한 곳에서 기도하시고 마치시매 제자 중 하나가 여짜오되 주여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과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 2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는 기도할 때에 이렇게 하라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 3 우리에게 날마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오니 우리 죄도 사하여 주시옵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옵소서 하라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7 그가 안에서 대답하여 이르되 나를 괴롭게 하지 말라 문이 이미 닫혔고 아이들이 나와 함께 침실에 누웠으니 일어나 네게 줄 수가 없노라 하겠느냐 8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9 내가 또 너희에게 이르노니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10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는 찾아낼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는 열릴 것이니라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어느 신학교의 기숙사 새벽 기도 시간에 있었던 일입니다. 새 학년 새 학기가 되자 평소와 다른 분위기가 감돌았습니다. 전에 없던 우렁찬 기도소리가 예배당에 가득히 울려 퍼졌기 때문입니다. 신입생 한 명이 매일 새벽 마다 큰 목소리로 방언기도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결국 참지 못한 누군가가 그를 제지했고 그 일이 한 번 더 반복되자 결국 그 신학생은 새벽에 통성기도를 하는 것을 포기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쉽게 상황에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새벽 기도 때 원하는 대로 부르짖을 수 없자 학교 기도탑을 매일 거르지 않고 올랐습니다. 문제는 차츰 날씨가 더워지고 난 다음의 일이었습니다. 좁고 답답한 기도실 창문을 무심결에 열고 크게 부르짖어 외쳤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 때는 월드컵 열기가 한 창 달아오르던 2002년 이어서 학교 운동장에는 매일 밤마다 축구하는 학생들이 많았습니다. 그 중에서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은 친구들이 그에게 다가와 기도소리가 쩌렁쩌렁하게 다 들리는 탓에 경비 아저씨가 기도탑 아래서 초조하게 서성이는 것을 여러 차례 보았다고 알려 주었습니다. 심지어는 지역 주민들의 격한 민원이 학교로 쏟아져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신입생은 고향 교회를 통해 어릴 때부터 배운 기도 방식이 의도치 않게 여러 사람들에게 심각한 폐를 끼친다는 사실을 깨닫고 심각한 고민과 혼란에 빠졌습니다.

짐작하신대로 제 이야기입니다. 지금 제 모습으로는 도저히 상상이 안 되시겠지만 저도 한 때, 제법 열정적인 신앙을 자랑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요즘도 대학 동기들이 그 시절 이야기를 꺼내면서 저를 놀려대고는 합니다. 하지만 신학을 공부하면 할수록 어릴 때부터 저에게 너무나 당연하게 여겼던 기도에 대한 생각이 크게 잘못 되었다는 것을 분명히 깨달았습니다. 때문에 비록 쉽지 않은 과정을 겪긴 했지만 하나님께서 참으로 원하시는 기도가 무엇인지 좀 더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제게 소중한 깨우침을 안겨 준 말씀이 바로 오늘 함께 읽은 본문입니다. 여기에는 마태복음 6장 9~13절에 기록된 “주기도”와 매우 흡사한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같은 기도문을 마태와 누가가 각자 다르게 기록한 것인지 아니면 예수님께서 다른 날, 다른 상황 속에서 비슷한 기도를 또 다시 가르쳐 주신 것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다만 분명한 점은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기도의 사람”이길 바라시며 꾸준히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사실입니다.


이어서 주님께서는 기도에 대해 보다 알기 쉽게 설명해주시려고 이야기 하나를 들려주셨습니다. 본문 5,6절 말씀 다함께 읽겠습니다. 

5 또 이르시되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꾸어 달라 6 내 벗이 여행중에 내게 왔으나 내가 먹일 것이 없노라 하면

이해를 돕기 위해 해당되는 구절을 새번역성경으로 다시 읽어 드리겠습니다.

“너희 가운데 누구에게 친구가 있다고 하자. 그가 밤중에 그 친구에게 찾아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여보게, 내게 빵 세 개를 꾸어 주게. 내 친구가 여행 중에 내게 왔는데, 그에게 내놓을 것이 없어서 그러네!’”

이 때, 이스라엘 사람들은 중동 유목문화의 영향으로 손님 대접을 아주 중요한 일로 여겼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밤늦게 찾아 왔어도 손님에게 먹을 것을 주지 않는 것은 굉장히 무례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에게는 손님을 대접할 음식이 없었습니다. 때문에 그는 음식이 남아있을 것 같은 다른 친구 집에 서둘러 찾아가 문을 두드리며 먹을 것 좀 달라고 간절히 부탁했습니다. 그렇다면 그 때 집에서 잠을 자고 있던 그 친구가 어떻게 대답할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예상할 수 있는 보통 사람들의 대답을 본인이 먼저 말씀하셨습니다. 해당되는 구절을 이번에도 새번역 성경으로 읽어드리겠습니다.

“나를 괴롭히지 말게. 문은 이미 닫혔고, 아이들과 나는 잠자리에 누웠네. 내가 지금 일어나서, 자네의 청을 들어줄 수 없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대부분 방 한 칸짜리 집에 살고 있었는데 아이들은 문가에 위치한 마루에서 잠을 재웠습니다. 따라서 한 밤중에 문을 열려면 잠든 아이들 사이를 지나가야 했습니다. 게다가 당시 일반적인 집 문은 굉장히 무거운 빗장으로 잠겨있었기 때문에 아이들이 깨기 쉬웠습니다. 그래서 어지간하면 그냥 자는 게 훨씬 편하지 그 모든 것을 무릅쓰고 대문을 여는 일은 무척 귀찮고 짜증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8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비록 벗 됨으로 인하여서는 일어나서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간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요구대로 주리라”

우정 때문이 아니라 그 친구가 너무 귀찮게 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겨우 그 부탁을 들어 주었다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까닭은 무엇일까요? 우리가 그 친구처럼 무작정 계속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뜻일까요? 흔히 이 본문을 두고 “열심히 많이” 기도해야한다는 근거로 삼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도 어린 시절 부흥회 때마다 오늘 본문을 단골 소재로 삼아 죽을 각오로 열심히 기도해야 한다는 설교를 참 많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많은 부담감을 가지며 마냥 크게 오래 기도하는 게 최선이라고 생각하고 그대로 따라 하면서 어리석은 우월감을 느낀 적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해석은 본문의 의도와는 전혀 다릅니다. 오늘 본문 어디에도 예수님께서 그 친구처럼 “귀찮아서 들어주실 때까지”, 혹은 “죽도록”, “열심히” 기도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신 그 어떤 형용사나 부사 없이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라고 단순명료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왜 예수님은 이 이야기를 들려주신 걸까요?


우리는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을 통해 이 비유에 담긴 기도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11~13절 다함께 읽겠습니다. 

11 너희 중에 아버지 된 자로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는데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12 알을 달라 하는데 전갈을 주겠느냐 13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시니라

많은 분들이 공감하듯이 부모님께서는 정말 형편이 어려우시거나 곤란한 경우가 아니라면 자녀들을 위해 뭐든 주고 싶어 하는 존재입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알기 쉽게 예를 들어 설명하였습니다. 만약 아들이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생선대신 뱀을 주는 아버지가 있을까요? 아들이 달걀을 달라고 하는데 그 대신에 전갈을 줄 부모가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아무리 나쁜 사람도 자식에게 만큼은 좋은 것을 주고 싶어 합니다. 그것은 아들, 딸이 늘 착한 일을 해서도 항상 예뻐 보여서도 아닙니다. 그리고 앞서 나온 이야기의 그 친구처럼 단지 매일 같이 귀찮게 졸라서도 아닙니다. “부모니까 자식에게” 그렇게 아낌없이 줄 수 있습니다. 여기에 그 어떤 다른 설명이 불필요 합니다. 자녀가 남달리 훌륭한 행동을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부모님과 자식이라는 그 “관계”가 부모로 하여금 자식에게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되게 합니다.


이제 우리는 한 밤중에 잠든 친구를 귀찮게 깨워 그로부터 떡을 얻은 남자이야기의 진정한 뜻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비유를 통해 이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관계의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 사람들은 아무리 친한 사이라 해도 누구나 들어주기 곤란한 부탁이 있습니다. 그럴 경우 계속 성가시게 요청해야 겨우 마지못해 들어줍니다. 친구라는 관계보다는 그의 간청함으로 말미암은 불편함이 더 앞섰습니다. 따라서 거듭 강조하지만 이러한 모습은 결코 기도의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 오히려 정반대되는 인간의 악한 본성을 드러내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이야기를 통해 하나님께서는 간청함 때문에 마지못해 친구의 요구를 들어주는 그 사람과 절대로 같지 않음을 역설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까닭입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이 땅의 부모와 자녀, 그 이상의 관계입니다.


저는 이른바 장롱면허였습니다. 운전면허증은 있었지만 서울에 살 때는 차를 유지할 여유도 없었고 꼭 필요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오랜 시간 자동차 없이 지냈습니다. 그러다가 인도네시아 사역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와 본격적으로 부목사 사역을 시작하면서 급하게 차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사정을 아시고 장모님께서 본인이 타시던 차를 아무조건 없이 저희 부부에게 선뜻 주셔서 지금까지 감사히 잘 운전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만약 같은 상황에서 제가 교회 권사님 중 한 분께 자동차가 필요하니까 혹시 가능하시면 한 대 좀 달라고 말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저는 굉장히 무례한 행동을 한 사람으로 많은 비난을 받을 겁니다. 그 전에 아무리 가깝게 지냈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이유는 분명합니다. 권사님과 저는 그런 사이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장모님과 저의 관계와 권사님과 저의 관계가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장모님께는 무심결에 바라고 구할 수 있는 것도 권사님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기도에 담긴 은혜와 신비가 바로 이와 비슷합니다. 우리는 너무나 연약한 죄인이지만 감히 하나님께 “기도”합니다. “하늘 아버지와 그의 아들, 딸”이라는 너무도 소중한 관계로 우리가 하나님과 연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열심히 많이 부르짖었기 때문에 누군가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저 너무나 사랑하시는 까닭에, 단지 그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십니다. 사람들은 종종, 마치 거래하듯이 하나님께 기도를 해서 무언가 응답 받는 것에만 관심을 가집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기도를 통해 얻는 그 무언가가 아니라 기도하고 있다는 그 자체, 곧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하늘 아버지”라는 이 위대한 관계의 은혜를 더욱 명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설교를 시작하며 드린 이야기처럼 저는 스무 살에 신학교에 입학하며 그동안 가졌던 기도에 대한 생각이 산산이 조각나는 커다란 혼란에 빠졌습니다. 게다가 당시 학교 기도탑은 외부통제를 하지 않아서 동네 주민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바람에 기도할 공간마저 넉넉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매일 뜨겁게 기도해야 한다는 심한 강박에 사로잡혀 있던 저로서는 무척 답답하고 곤란한 상황이었습니다.

때문에 별수 없이 제가 택한 방법은 무작정 걷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대단한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 아니었습니다. 그저 매일 한 시간이상 기도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막연한 중압감이 제 발걸음을 억지로 이끌었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제 모교는 산책하기에 최적의 자연 환경을 가졌습니다. 그래서 자연스레 입술을 닫고 내면 깊숙이 읊조리며 걷는 기도를 매일 드리게 되었습니다.

다시금 말씀드리지만 이것에 대해 누군가 저에게 가르쳐 준 것도, 제가 열심히 공부한 결과가 아니라 그저 상황이 그렇게 흘렀을 뿐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분명히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시간들을 통해 제게 더욱 넓고 깊은 기도의 세계를 깊은 가운데 알려 주셨습니다. 따라서 기도란 하늘을 향해 힘써 외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이 세상에 온 몸과 마음을 통해 가까이 다가서는 것임을 서서히 깨닫게 되었습니다. 더욱 정확히는, 본문 말씀이 분명히 알려주듯이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는 아버지 하나님께 그저, 가만히 안기는 것이 진정한 기도의 본질임을 마음에 새기게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온 우주를 다스리시는 하나님께서는 당신 스스로를 사람의 모습으로 낮추시고 죽임 당하시며 다시 살아나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그리고 그 사랑으로 우리의 기도 가운데 함께하십니다. 따라서 더 이상 기도에 대해 오해하지 말고 기도에 담긴 하나님 나라의 사랑 앞에 우직이 나아가시기 바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하늘 아버지이신 주님께 진정한 생명과 은혜를 더욱 구하며 참된 기도로 하나 되는 저와 여러분 되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설교 후 기도
아버지 하나님
하나님과 우리가 기도의 끈으로 연결된 사랑의 관계임을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기도를 핑계로 하나님을 마음대로 잡아당기는 것이 아니라 오직 주님의 말씀에 잠잠히 귀 기울이며 그 길을 따르게 해주시옵소서.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봉헌기도 
자녀들의 기도에 귀 기울이시는 하나님
우리의 모든 사정과 아픔을 이미 아시는 은혜에 감사와 찬양을 드리며 한 주간 삶으로 구별한 예물을 드립니다. 기쁨으로 받으시어 소외된 이웃들을 위해 사용하여 주시옵소서.
사랑하는 예담 청년들을 위해 축복하며 기도합니다. 몸과 마음의 건강을 늘 돌보아 주시고 기말고사와 각종 업무 등으로 고단한 하루 가운데 지치지 않는 힘을 주시옵소서. 꿈꾸며 계획하는 모든 일들과 어려운 관계의 문제들 속에서 지혜로운 선택을 하게 하시고 스스로를 더욱 긍정하고 사랑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아멘.


축도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사귐이 

진실한 기도의 삶을 살아가는 예담 청년들과 항상 함께하시길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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